[시로 읽는 책 381] 잃은 꿈



  바람을 느끼니 바람을 보고

  바람을 안 느끼니 바람을 못 보고

  잃었다고 느끼니 참말 잃고



  꿈을 이룰 적에는 늘 꿈을 생각하며 마음에 담았기 때문이라고 느껴요. 꿈을 못 이룰 적에는 꿈을 늘 생각하지 않거나 마음에 안 담았기 때문이라고 느껴요. 바람을 늘 생각하면서 느끼려 하기에 바람을 보면서 알아요. 바람을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느끼려 하지 않으니 바람을 못 보면서 몰라요. 잃는 까닭이나 읽는 까닭은 늘 하나이지 싶어요. 우리가 쓰는 마음에 따라서 달라져요. 2017.5.8.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넋/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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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는 뜻) 곁님·10살 아이·7살 아이하고 함께 살림을 짓고 시골에서 살며 한국말사전을 새로 쓰는 일을 하는 사내(아저씨)입니다. 시골 폐교를 빌려서 도서관학교로 가꾸면서, 우리 집 두 아이는 제도권학교 아닌 ‘우리 집 학교’에서 즐겁게 가르치고 함께 배웁니다. 어버이로서 두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면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하며 스스로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살림입니다. 밥·옷·집을 손수 지으며 누리고 나누자는 마음으로 밑바닥부터 하나하나 익히려는 사랑을 길어올리려 합니다. 이러한 뜻으로 ‘아이키우기(육아)·살림(평등)·사랑(평화)’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으로 사는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여성혐오’도 ‘여성혐오를 혐오’하는 길도 아닌, 새로운 사람길을 밝혀 보고 싶어요 ...


+ + +


라면조차 못 끓이던 아버지
[남자도 여자도 아닌 3] 반토막 사내 아닌 오롯한 사람 되기


  어릴 적에는 마을 아주머니가 저한테 “쟤는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하고 들려주는 말이 ‘폭력’이 되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아주머니가 사내 아이한테 들려주던 이런 말은 ‘사내는 집일이나 살림을 몰라도 되고, 안 배워도 된다’로 읽혀 버릴 수 있어요. 거꾸로 ‘가시내는 마땅히 집일이나 살림을 알아야 하고, 꼭 배워야 한다’로 읽힐 수 있습니다. 사내는 집에서만 머물러도 집일을 안 해도 된다거나, 가시내는 집 바깥에서 일을 많이 해도 집일까지 도맡아야 한다는 뜻이 될 수 있어요.

  가부장 권력은 아저씨(사내)가 윽박지르는 몸짓이나 목소리로만 퍼지지 않아요. 아주머니(가시내) 스스로 뿌리깊이 받아들이면서 물려주는 셈이 되기도 해요. 아저씨는 스스로 생각을 열어서 스스로 집일을 살펴서 함께 할 줄 알아야 하고, 아주머니는 스스로 기운을 내어 사내가 집일을 함께 하도록 이끌 수 있어야지 싶어요.

  어린 날을 더듬어 보면, 어머니는 하루 내내 집에서 수많은 집일을 도맡고 집살림을 꾸리셨어요. 어머니는 한 해 내내 집을 비울 수 없었고, 집을 비울 틈이 없었다고 할 만해요. 밥이며 빨래이며 청소이며, 꽃그릇을 건사하고 곁일을 하고 두 아이 숙제를 보아주고, 새벽부터 밤까지 쉴 겨를이 없습니다. 이동안 아버지는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는 일을 합니다.

  아주 드물게 어머니가 한동안 집을 비워야 하는 일이 있곤 합니다. 아침 일찍 나가셔서 밤 늦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일이 생깁니다. 아마 어머니네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일이 생겨서 서둘러 다녀와야 하는 일이었겠지요. 어떤 일 때문에 바삐 다녀오셔야 했는지는 얘기를 들려주지 않으셔서 모릅니다만, 어느 일요일이었어요. 이날은 아버지가 두 아이 끼니를 챙겨 주어야 했어요.

  열세 평짜리 작은 집이건만 아버지는 부엌이 낯섭니다. 이 조그마한 집에서조차 아버지는 부엌으로는 거의 걸음하지 않았어요. 칼이 어디에 있는지 도마는 어디에 있는지, 밥솥은 어디에 있고 쌀은 어디에 있는지 하나도 모르십니다. 수저가 어디에 있는지마저 모르십니다. 저하고 형은 으레 어머니를 곁에서 도왔으니 이것저것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이것은 여기에 있고 저것은 저기에 있다고 알려 드립니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는 쌀이며 밥솥이며 조리이며 다 찾았어도 어떻게 밥을 지어야 하는가를 모릅니다. 아버지는 끝내 ‘밥하기는 두 손 들어’요. 밥은 아무래도 못 하겠다고 여긴 아버지는 라면을 끓이기로 합니다. 그러나 라면이 또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지요. 형하고 제가 라면이 어디 선반에 있다고 알려줍니다. 냄비는 어디에서 꺼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아버지는 라면 봉지 뒤쪽에 적힌 ‘라면 끓이는 법’을 한참 읽습니다. 그러나 한참 읽으시다가 ‘라면 끓익기도 두 손 들어’요.

 “얘들아, 우리 중국집에 시켜서 먹자.”

  아버지가 밥도 라면도 아닌 중국집에 짜장면을 시켜서 먹자고 들려준 말씀은 썩 반갑지 않았습니다. 쌀도 있고 라면도 있는데, 딱히 시켜서 먹어야 할 일이 없는데 굳이 시켜서 먹어야 하니 내키지 않습니다.

  이날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설마 오늘 하루 내내 시켜서 먹어야 하나?’

  아버지는 형이나 저한테 ‘라면을 어떻게 끓이니?’ 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형하고 저는 라면을 퍽 잘 끓였어요. 어머니가 집에 안 계셔도 형이나 저는 스스로 라면을 끓여서 먹어요. 더구나 형도 저도 압력밥솥으로 밥을 할 줄 알아요. 이무렵 형은 국민학교 6학년이었고, 저는 국민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1984년에 국민학교 6학년이나 3학년이라는 나이는 ‘압력밥솥으로 밥하기’를 실과 수업에서도 배우지만, 집에서도 늘 어머니 곁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물을 맞추고 불을 살피며 줄여서 끈 뒤에 뜸을 들이고 나서 김을 빼어 뚜껑을 여는 일까지 하나하나 할 줄 알기 마련입니다. 압력밥솥을 설거지를 할 적에는 꽤 힘들었지만 어떻게 부시고 어떻게 말려야 하는가도 알았어요.

  1984년에 마흔 언저리였던 우리 아버지는 밥도 라면도 할 줄 몰랐습니다. 부엌 살림이 어떻게 있는지 모르시니 설거지도 할 줄 몰랐습니다. 그 뒤 서른 몇 해가 지난 오늘날 우리 아버지는 라면은 끓일 줄 아시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몇 해 앞서 슬쩍 여쭌 적이 있는데, “라면은 끓일 줄 알지.” 하고 말씀하셨으나 왠지 미덥지 않았어요. 어쩌면 이제는 끓일 줄 아실 수 있을 테고, 아직 라면을 못 끓이실는지 모릅니다.

  라면도 못 끓이느냐고 따질 수 있지만, 어쩌면 라면 끓이기란 ‘쉬운 듯하면서 안 쉬울’ 수 있어요. 해 보지 않는다면, 라면 봉지 뒤쪽에 적힌 ‘끓이는 법’대로 따라하기가 너무 어려울 뿐 아니라,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못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집 바깥자리에서 큰 이름을 드날린다고 하더라도 집 안자리에서 살림을 거느리지 못할 적에는 반토막이 된다고 느끼며 자랐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밥하기도 배우시고 김치 담그기도 배우시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으나, 그보다 저 스스로 이런 안살림을 차근차근 잘 익혀서 해 보고 나서 말씀을 여쭙자는 마음입니다. 우리 아버지도 언젠가 온몸으로 ‘이제라도 배우자’고 생각하시겠지요. 저는 오늘 우리 아이들한테 먼저 밥살림을 즐겁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함께 짓고 함께 먹으려고요. 함께 살피고 함께 가꾸려고요. 2017.5.6.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살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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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380] 하늘사람



  우산을 펴도 비는 내려

  비를 느끼고

  비내음 섞인 바람을 마셔



  모든 사람은 아기로 태어나서 자랍니다. 모든 아기는 나이를 먹으면서 늙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기로 태어나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새로 배웁니다. 모든 아기는 처음부터 새롭게 배우기에 어른이 됩니다. 모든 사람은 아기로 태어나면서 두 손을 펴고, 모든 사람은 늙어서 죽으며 두 손을 폅니다. 무엇을 쥐려고 하든 스스로 짓는 삶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스스로 짓고, 미움도 시샘도 스스로 짓습니다. 노래도 춤도 스스로 짓고, 이야기도 생각도 스스로 지어요. 천사나 악마로 따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닙니다. 모두 똑같이 하늘사람으로 태어납니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길은 저마다 스스로 하늘사람인 줄 깨닫는 하루이지 싶어요. 2017.5.4.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삶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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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노래 삶노래 . 마을님



누나 따라 나무 오르다가

토끼풀꽃 가락지 엮다가

샘터 물이끼를 수세미로 벗기다가

빨래터에 뛰어들어 놀다가


잠자리를 손끝에 앉히며

간지럼을 타며 웃다가

마당에 드러누워

흰구름 흘러가는 몸짓 보다가


스르르 눈을 감고는

어느새

꿈나라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키도 몸도 손도

다 작은 우리 어린이는

씩씩하매 해사한

마을님



2017.4.30.해.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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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는 여자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남자도 여자도 아닌 2] 왜 ‘여자만’ 집일을 배울까?


  만화책 《달려라 하니》가 있습니다. 1985년에 나온 만화이고, 1988년에 만화영화로도 나왔어요. 만화책은 이제 찾아보기 매우 어렵지만, 만화영화는 텔레비전에서 곧잘 다시 나오기도 해서, 이 만화가 처음 나오던 1980년대 어린이뿐 아니라 1990년대나 2000년대 어린이도 ‘하니’ 이야기를 알 수 있습니다.

  뜬금없는 하니 이야기를 꺼낸다고 여기실 수 있을 텐데, 우리 집 아이들은 2010년대를 살아가지만 이 하니를 압니다. 저한테는 《달려라 하니》 만화책이 있어요. 꽤 오래된 만화영화이지만, 동영상을 장만할 수 있기도 해요. 아이들하고 만화책을 돌려서 보거나 만화영화를 함께 보곤 합니다. 아이들은 하니 만화에서 이래저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찾아내는데, 며칠 앞서 ‘홍두깨 선생님이 옥탑에 있는 하니네 자취방에 찾아가서 김치를 담그는 모습’을 아주 재미있다면서 자꾸 말해요. 홍두깨 선생님이 손이 안 보일 만큼 빠르게 무를 써니까 무가 숭숭숭 썰리면서 하늘을 날아 커다란 통에 담긴다고 말이지요.

  부엌에서 무를 썰며 아이들한테 이야기합니다. “자, 보렴, 무를 아주 빨리 썰어도 만화영화처럼 하늘을 날지는 않아. 만화영화는 사람들이 더 재미나고 또렷하게 잘 느껴 보라면서 그렇게 보여준단다. 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야말로 손이 안 보이도록 무를 썰면 무가 숭숭숭 하늘을 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아이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썰린 무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가만히 생각하다가 문득 한 가지를 알아챕니다. 1980년대 첫무렵에 나온 만화책 《달려라 하니》에 나오는 홍두깨 선생님은 ‘사내’이지만 김치를 담글 줄 알 뿐 아니라, 밥이나 국을 매우 잘 합니다. 다른 ‘하니’ 이야기에 나오는 ‘만화가 홍두깨 아저씨’도 밥솜씨가 얼마나 훌륭한지 몰라요.

  1980년대에 ‘사내가 부엌칼을 쥐는 일’은 으레 손가락질이나 놀림을 받았습니다. 그런 때였어도 만화에서는 ‘부엌칼을 쥔 사내’를 그렸어요. 이 대목을 좀 곰곰이 생각해 봐야지 싶어요. 홍두깨 선생님이나 홍두깨 만화가는 어머니나 곁님 없이 홀로 살림을 짓습니다. 혼자서 김치도 담가야 할 테고, 밥도 짓고 국도 끓여야 할 테지요. 빨래이며 청소이며 홀로 거뜬히 해내야 할 테고요.

  만화에서 ‘하니’가 가시내 아닌 사내였다면, 하니가 집을 뛰쳐나와 옥탑방에서 혼자 먹고산다고 할 적에 무엇을 했을까요? ‘가시내 아닌, 사내 하니’는 김치를 담그겠다고 생각할까요?

  만화를 보면서 ‘살림’을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혼자 제금을 난다고 할 적에는 밥이며 옷이며 집을 스스로 건사합니다. 가시내이건 사내이건 손수 밥을 지어야 합니다. 김치나 반찬도 손수 마련해야 할 테고요. 빨래나 청소도 손수 해야 할 테고요. 우리는 가시내나 사내를 떠나서 옷이랑 집이랑 밥을 건사하는 살림을 누구나 배울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저는 집안일을 얼추 열 살 무렵부터 거들었다고 떠올라요. 그무렵부터 뭔가 머리가 굵으면서 이런저런 집안일을 거들었구나 싶어요. 그즈음 마을 이웃 아주머니들은 으레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종규 너는 어쩜 그렇게 어머니를 잘 돕니. 야무지지. 너는 여자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그러게 말야, 쟤는 여자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여자로 태어나서 일을 도우면 얼마나 잘 도울까.” “우리 집 딸은 일을 시키면 얼마나 싫어하는지 몰라.” “싫어하기만 하면 좋게. 우리 집 딸은 일도 잘 못해.”

  김장철에는 한 집에서만 김장을 하지 않고 집집마다 온 살림을 너른 마당에 다 내어놓고 함께 합니다. 그야말로 여기도 저기도 온통 김장 담그는 일로 시끌벅적해요.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 일손도 거들고 이웃 아주머니 일손도 거들다가 이런 말을 들으니 아뭇소리도 할 수 없는데다가 얼굴이 벌게집니다. 얼굴이 너무 화끈거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며 어머니를 거들지 못하겠어요. 얼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마음에도 없는 “이제 좀 놀러갈게요” 하는 말을 짧게 내뱉고는 후다닥 달아납니다.

  달음박질을 치며 그 자리를 빠져나옵니다. 그렇다고 동무들이 노는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을을 벗어나서 기찻길로 갑니다. 오래되어 하루에 몇 번 안 지나가는 기찻길이 마을 가까이 있었어요. 그 기찻길을 여러 시간 하염없이 거닐며 ‘애먼 시간을 때웠’습니다. 이동안 생각에 잠겼어요.

  ‘그래, 내가 가시내로 태어났으면 느긋하게 김장을 거들며, 김치를 어떻게 담그는가를 배울 수 있었겠지. 그런데 사내로 태어나도 김장을 거들며 김치를 어떻게 담그는가를 배우면 되지 않아? 왜 가시내만 김장을 거들고 김치 담그기를 배워야 해? 왜 가시내한테만 김장을 가르쳐야 해? 왜 가시내한테만 집일을 시켜야 해? 왜 사내는 놀기만 하고 집일을 안 배워? 이건 뭔가 잘못이 아니야?’

  마을에서나 학교에서나 ‘평등’이라든지 ‘남녀평등(또는 여남평등)·성평등’ 같은 말은 한 마디도 듣지 못하던 어린 날입니다. 1980년대를 이렇게 보냈어요. 평등이라는 말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니 알지도 못했습니다만, 가슴에 어떤 싹 하나가 몽실몽실 태어나려고 했어요. 2017.5.2.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살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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