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책 382] 나무 눈물



  시달리는 나무가 맺는 열매

  시달리는 풀이 피운 꽃

  시달리는 아이가 치는 시험



  비닐집에서 나무를 키워 열매를 맺는 곳이 차츰 늘어납니다. 바람을 쐬지 못하고 햇빛을 보지 못하며 눈비를 맞지 못하는 나무가 차츰 늘어납니다. 비닐집에서 석유난로 불기운을 쬐면서 수돗물을 마시는 나무는 늘 가지치기를 겪습니다. 비닐집 키를 넘으면 안 되니까요. 오늘날 우리 곁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떤 삶을 누리는가요? 아이들은 바람이나 해나 눈비를 만날 수 있는 삶일는지요, 시험공부 하나에만 얽매여 대학바라기로 시달리며 눈물을 지어야 하는 삶일는지요, 아니면 눈물조차 잊고 말아야 하는 삶일는지요. 2017.5.20.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삶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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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말) 곁님·10살 아이·7살 아이하고 함께 살림을 짓고 시골에서 살며 한국말사전을 새로 쓰는 일을 하는 사내(아저씨)입니다. 시골 폐교를 빌려서 도서관학교로 가꾸면서, 우리 집 두 아이는 제도권학교 아닌 ‘우리 집 학교’에서 즐겁게 가르치고 함께 배웁니다. 어버이로서 두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면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하며 스스로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살림입니다. 밥·옷·집을 손수 지으며 누리고 나누자는 마음으로 밑바닥부터 하나하나 익히려는 사랑을 길어올리려 합니다. 이러한 뜻으로 ‘아이키우기(육아)·살림(평등)·사랑(평화)’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으로 사는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여성혐오’도 ‘여성혐오를 혐오’하는 길도 아닌, 새로운 사람길을 밝혀 보고 싶어요.


우리는 ‘아이 성 새로 짓기’를 합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5] ‘어버이 성 안 쓰기’를 하는 마음


  어릴 적에 동무들은 흔히 저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야,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니? 넌 참 다르다, 달라!” 

  요즈막에 이웃들은 으레 저한테 이렇게 얘기합니다.

  “최종규 씨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해요? 참 다르네요.” 

  어릴 적에 동무들한테는 이렇게 대꾸했어요.

  “거참, 너는 왜 안 다르니? 너하고 다른 동무는 안 다르니? 너하고 나는 안 다르니? 우리는 모두 달라. 다 다르니까 다를 뿐이야. 여기에 너하고 똑같은 사람이 어디 있니? 너도 참 달라.” 

 요즈막에 이웃들한테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에요. 우리는 서로 다르지 않으면 살 수 없어요. 숨조차 쉴 수 없어요. 풀밭에 자라는 풀도 다 같은 풀이 아니라 다 다른 풀이에요. 얼핏 보기에 비슷해 보이지만, 풀밭에 납작 엎드려서 바라보면 다 다르게 생겼고 크기도 달라요. 모든 사람은 다 다르기 때문에 다 다르게 아름다워요.”

  저는 어릴 적에 저한테 붙은 성인 ‘최’를 좋아했습니다. 이러면서도 왜 저한테는 ‘차’라는 성이 안 붙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제 성인 ‘최’는 우리 아버지 성입니다. 저한테 안 붙은 ‘차’는 우리 어머니 성입니다.

  어릴 적에도 어딘가 아리송했어요. 아니 왜 ‘아버지 성’만 써야 하나 싶더군요. 나는 ‘최’도 ‘차’도 함께 쓰고 싶었습니다. 이때가 1980년대 첫무렵입니다.

  1980년대 첫무렵에 ‘어버이 성’을 함께 쓰자고 생각한 분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때 저는 어린이였으니 둘레에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틀림없이 있으리라 믿었어요. 다만 동무들한테 이런 말을 하면 하나같이 벙뜬 얼굴로 “야, 그게 말이 되니? 어떻게 두 가지 성을 다 써?” 하고 대꾸하더군요.

  어릴 적에 처음에는 아버지 성도 어머니 성도 함께 쓰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던 어느 날 한 가지를 깨달아요. 우리 어머니 성은 ‘우리 어머니를 낳은 아버지한테서 받은 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낳은 아버지’하고 성이 달라요.

  이 대목을 깨달으면서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아아, 이건 뭐야? 그러면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는? 또 자꾸자꾸 거슬러 올라가는 숱한 어머니들은? 할머니들은?

  2008년에 우리 집 첫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이러한 생각이 머리에서 어지럽게 춤추었습니다. 그리고 이 어지러운 생각을 곁님이 아주 손쉽게, 참으로 슬기롭게,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하게, 여기에 매우 곱게 실마리를 풀어 주었어요. 2008년에 태어날 우리 첫 아이를 맞이하기 앞서 곁님하고 이런 얘기가 오갔어요.

  “여보, 우리 아이한테는 성을 새로 지어 주면 어때요?” “응? 성을 새로 지어 주자고? 안 돼. 법으로는 그렇게 안 되어.” “법으로 안 된다고요? 무슨 법이 그래? 성 하나를 새로 지어서 쓸 수 없다고? 한국에서 사람들이 성을 쓴 역사가 얼마나 된다고 성을 새로 못 지어?”

  곁님이 마지막으로 물은 말에는 저로서는 차마 대꾸할 수 없었습니다. 이 대목을 이제껏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제 머리는 ‘현행 법 틀’만 헤아렸을 뿐, ‘현행 법이 슬기롭지 못한 틀’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악법도 법이다’라는 생각에 멈춘 제 모습이었어요.

  곁님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새로운 생각을 들려줍니다.

  “그럼 이렇게 하기로 해요. 아이들 성을 새로 짓기는 하되, 법(주민등록)으로 등록할 때에는 그 법대로 하기로. 다만 우리 집에서는 법으로 등록한 성을 안 쓰고 우리가 지은 성을 쓰기로 해요.”

  저는 이 말을 듣고 곁님을 꼬옥 안았습니다. 법이 어떠하든 우리는 ‘법이 없이 즐거우며 아름답고 사랑스레 사는 길을 걸으면 되는 살림’이라는 대목을 깨달았어요. 아이 성은 주민등록에서는 ‘아버지 성’으로 올리되(곁님은 굳이 ‘어머니 성’으로 하지는 말자고 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언제나 ‘우리 두 사람, 곧 아이 어버이인 우리가 지은 새로운 성’을 쓰기로 합니다.

 사름벼리
 산들보라

  2008년에 이어 2011년에 둘째 아이가 찾아옵니다. 둘째 아이한테는 둘째 아이한테 알맞을 새로운 성하고 이름을 생각하여 사랑으로 지어 줍니다. 둘째 아이도 첫째 아이하고 똑같아요. 법으로는 ‘아버지 성’을 올립니다만, 집에서는 언제나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사랑으로 지어 준 성’만 쓰지요.

 사름(성) + 벼리(이름)
 산들(성) + 보라(이름)

  저희는 ‘어버이 성 안 쓰기(부모 성 안 쓰기)’를 합니다. 아이들한테는 아이들한테 걸맞을 새로운 성하고 이름을 하나하나 지어서 주기로 합니다. 저희는 아이들한테 ‘가부장 흐름에 따라 이어주거나 이어받는 성’이 아니라 ‘아이들이 앞으로 스스로 새롭게 가꾸며 펼칠 꿈이 스며드는 성’을 주기로 합니다.

  다시금 따져 본다면, 저희가 하는 일은 ‘아이 성 새로 쓰기’입니다 ‘아이 성 새로 짓기’이기도 해요.

  아이들이 나중에 스무 살이 되면, 아이들 나름대로 어버이가 지어 준 성이나 이름이 아닌, 저희 깜냥껏 새로운 성이나 이름을 슬기롭게 지어서 쓸 수 있어요. 아이들은 ‘최 사름벼리’나 ‘전 산들보라’처럼 이름을 쓸 수도 있겠지요. 아이들 마음이니까요.

  아이들한테 어버이로서 이름을 지어서 물려준다고 할 적에는 ‘지나온 길(옛 역사)’을 이어받기를 바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새로운 길(아이 스스로 지을 역사)’를 스스로 찾아서 스스로 펼치고 스스로 이루기를 바라는 뜻입니다.

  평등하게 아버지 어머니 성을 ‘함께 쓰기’를 하는 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여기에서 하나를 더 생각해 본다면, ‘어버이 성 함께 쓰기’는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새로운 짝꿍을 만날 적에 몹시 골치가 아플 만합니다. 아이들 성은 하루하루 자꾸자꾸 길어지면서 어지러워질 테니까요. 아버지나 어머니 가운데 어느 쪽 성을 앞에 쓰느냐를 놓고도 골치가 아플 테고요.

  사내도 가시내도 아닌, 사내나 가시내를 넘어선, 오롯이 서는 사랑이라는 사람으로서, 우리 아이들이 즐거운 살림을 물려받기를 바랍니다. 사내랑 가시내라는 성별을 모두 가슴으로 품으며, 우리는 모두 그저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다 같이 홀가분한 숨결로 씩씩하게 서기를 바라요. 2017.5.18.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살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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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노래 삶노래 . 길



아무리 수많은 개미나 풀벌레가

밟고 지나가더라도

그 자리는 그대로예요.


새 열 마리가

가느다란 가지에 앉아도

나무는 말짱해요.


토끼가 너구리가 노루가 지나가도

오솔길조차 안 나지요.


한 사람이 조용히 거닐어도

따로 길이 없어요.



2017.4.10.달.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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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노래 삶노래 . 그림마을



담벼락 따라서

딸기꽃이 피고

찔레꽃이 어우러지다가

호박넝쿨 수세미넝쿨

높다라니 타고 올라요.


지붕에는 박넝쿨이 춤추고

밭 가생이에는

흰민들레 가득하고

봄에 밀보리물결

가을에 나락물결


나무마다 아름드리

그늘 베풀고

겨울바람 가려 주니

그림 같은 마을.



2017.4.30.해.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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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는 뜻) 곁님·10살 아이·7살 아이하고 함께 살림을 짓고 시골에서 살며 한국말사전을 새로 쓰는 일을 하는 사내(아저씨)입니다. 시골 폐교를 빌려서 도서관학교로 가꾸면서, 우리 집 두 아이는 제도권학교 아닌 ‘우리 집 학교’에서 즐겁게 가르치고 함께 배웁니다. 어버이로서 두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면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하며 스스로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살림입니다. 밥·옷·집을 손수 지으며 누리고 나누자는 마음으로 밑바닥부터 하나하나 익히려는 사랑을 길어올리려 합니다. 이러한 뜻으로 ‘아이키우기(육아)·살림(평등)·사랑(평화)’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으로 사는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여성혐오’도 ‘여성혐오를 혐오’하는 길도 아닌, 새로운 사람길을 밝혀 보고 싶어요 ...


아이들한테 살림 가르치는 아버지
[남자도 여자도 아닌 4] 가르치면서 배우는 집안일


  골이 띵해서 자리에 누워 허리를 폅니다. 부산하게 아침을 차려서 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밥상을 치우고, 부엌을 쓸고, 빨래를 해서 널고, 물병을 내놓아 햇볕을 쪼인 뒤에 들여놓고, 이것저것 갈무리를 하고 나서 ‘이제 되었나?’ 싶으면 바야흐로 골이 띵합니다.

  저는 어릴 적에 토요일하고 일요일, 또 방학 때면 어머니가 하루 내내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늘 지켜보았습니다. 어머니는 형하고 저랑 밥상맡에 함께 둘러앉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두 아이 밥상을 차려 준 뒤에 다른 일을 하느라 언제나 바쁩니다. 어머니로서는 이 일이나 저 살림을 마무리짓지 않고서는 도무지 수저를 들 수 없는 마음이었지 싶어요.

  어릴 적 그무렵에서 서른 몇 해가 지난 오늘날 가만히 생각합니다. 어릴 적에는 우리 어머니가 함께 밥상맡에 둘러앉지 못하던 모습이나 몸짓을 헤아릴 길이 없었어요. 함께 밥상맡에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먹고 나서 함께 부엌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면 될 텐데 싶었어요.

  일손이 익숙한 살림지기로서는 남한테 일을 맡기기가 오히려 어렵기도 합니다. 손에 익은 대로 혼자 해치울 적에 한결 빠르다고 느낄 만해요. 이것을 이 아이한테 시키고, 저것을 저 사람한테 맡기자면 오히려 손이 더 간다고 여길 만해요. 때로는 이 일을 저렇게 하느라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고, 저 일을 이렇게 해 놓고 가 버린 탓에 되레 일거리가 늘기도 하지요.

  고단하거나 골이 띵할 적에 일손을 멈추고 생각해 봅니다. 왜 굳이 고단하도록 일을 하거나 골이 띵하도록 일손을 못 놓을까요? 왜 이 집일을 아이들한테 차근차근 재미나게 보여주거나 알려주거나 물려주지 못할까요? ‘빨리 해치우’거나 ‘얼른 끝내야’만 하는 까닭이 있을까요?

  아이들이 하나씩 차근차근 배우면서 살림을 짓는 길을 익히면, 살림지기로서도 한결 수월할 뿐 아니라, 집일은 ‘고단하게 떠맡는 일거리’가 아닌 줄 스스로 새롭게 배울 만하지 않을까요?

  거의 모든 어머니는 집안일을 짐이나 멍에로 떠안습니다. 사회가 이렇게 내몰아요. 그러나 이 집안일을 즐겁게 고이 받아들여서 알차게 일구는 어머니가 많아요. 아무리 사회가 가시내를 고단한 길로 내몰아도 슬기롭고 씩씩하며 사랑스레 집안을 돌보는 분이 많습니다.

  어머니 아닌 아버지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사내들이 ‘사회가 내몰아 모든 집안일을 홀로 떠맡아야 한다’고 할 적에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우리 사내들은 가시내처럼 슬기롭고 씩씩하며 사랑스레 집안을 돌보는 몸짓이 될 수 있을까요? 부드럽고 상냥하며 따스한 손길로 집살림을 건사하는 아름다운 살림지기가 될 수 있는 사내는 얼마나 있을까요?

  마루나 방이나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을 부릅니다.

  “배고프니?” “음, 안 배고픈 듯한데?” “그러면, 밥 차려 놓으면 안 먹을 생각이니?” “음, 먹, 을, 까?”

  어째 배고픈지 안 배고픈지도 모르랴 싶지만, 이때에 우리 아이들이 아닌 ‘제가 어릴 적’에 어떠했는가를 떠올리면 됩니다. 저도 어릴 적에 우리 어머니가 “얘들아, 밥 먹어라.” 하고 부르면 ‘글쎄, 아직 배가 안 고픈 듯한데?’ 하고 생각했어요. 노는 데에 온마음을 쏟으면 놀기에 바쁘기에 배고픈 줄 잊어요.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다면, 이때에는 그림이나 책에 사로잡혀서 배가 고픈 줄 잊지요.

  살림을 맡은 어머니로서는 ‘아이들이 언제 밥을 먹었는가’를 살펴서 ‘배가 고플 때에’ 밥을 지어서 차립니다. 아이들은 이 대목을 거의 못 헤아리기 마련이로구나 싶어요.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집안을 가꾸고 살림을 꾸리며 사랑을 길어올리자는 생각을 하면서 ‘배움’을 되새기려 합니다. 두 아이가 저희 힘이나 몸이나 손길에 걸맞게 차근차근 익힐 수 있는 살림을 보여주면서 가르쳐 보려 합니다. 함께 밥을 짓고, 함께 밥을 먹으며, 함께 밥상을 치우고, 함께 입가심을 하다가, 함께 해바라기를 하면서 쉬고, 다시 함께 기운을 내어 우리 보금자리를 일구는 길을 걸어 보려 합니다.

  “마당에서 솔(부추)을 뽑아 줄래?” “마당에서 파를 끊어 줄래?” “마당에서 돌나물을 함께 훑을까?” “밥에 넣을 모시잎을 따 줄래?” “지짐이로 할 만큼 소쿠리에 쑥을 뜯을 수 있을까?”

  아이들한테 하나하나 맡겨 봅니다.

  “자, 작은 도마를 꺼내고 작은 칼을 꺼내 보세요. 한 사람씩 오이를 썰어 봐요.” “누나가 오이를 썰면 동생은 토마토를 썰어 봐.” “스스로 먹을 만큼 주걱으로 밥을 푸세요.” “어머니 수저를 누가 챙겨 줄까?” “밥상을 펴면 행주로 잘 닦아 주세요.”

  끼니마다 날마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말을 몇 해 동안 날마다 해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끼니마다 으레 한 가지씩 거들면서 시나브로 어른이 되어 가지 싶어요. 우리 어른은 아이들한테 언제나 고운 마음으로 차분히 이야기를 들려주고 일손을 이끌어 심부름을 맡기면서 한결 무르익는 어른으로 우뚝 설 만하지 싶어요. 나이만 어른이 아닌 마음으로 아름다운 어른으로 거듭난다고 할까요. 아이들이 배울 ‘한살림(함께 가는 하나 될 살림)’은 어른들도 함께 배울 ‘사랑살림’이라고 생각합니다. 2017.5.13.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살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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