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배움빛

숲집놀이터 254. 묻는 말



작은아이가 마당에서 딱정벌레를 찾아낸다. 틀림없이 갓 깨어난 아이로구나. 시골에서 태어나 골짝물 흐르는 소리에 포근히 잠들던 작은아이는 숱한 풀벌레에 딱정벌레에 잎벌레를 늘 가까이하던 아기로 살다가 어린이로 피어났다. “근데, 아버지, 얘 이름이 뭐예요?” 몇 해 앞서 이 딱정벌레 이름을 이웃님한테 여쭈어 알아냈는데 어느새 잊었다. 여름이 가까우면 밤마다 붕붕 힘차게 날며 모기그물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히다가 바깥마루에 톡톡톡 떨어져서 구르던 반짝반짝 노란빛 아이. 네 이름이 뭐였더라. 갓 깨어났을까. 낮이라 힘들까.  토실한 딱정벌레를 모시잎에 앉혀서 가만히 바라본다. 딱정벌레랑 나는 눈이 마주친다. “넌 어떤 기쁜 꿈으로 이곳에 태어나서 우리 곁에 왔니?” 하고 묻는다. 마음으로 묻는다. 입으로 소리를 내지 않는다. 눈빛으로 물으며 눈빛으로 듣는다. ‘너 참 눈빛이 밝구나. 후박나무 곁에 놓을 테니 이제부터 신나게 놀렴.’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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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길 2021.4.21.

살림꽃 4 걸레



손이며 몸을 닦는 천으로 쓰다가 낡으면 걸레로 삼는다. 바닥을 훔치고 먼지를 닦는 걸레로 삼다가 구멍이 숭숭 뚫리고 낡으면 자전거에 기름을 발라서 닦거나 마당 언저리를 치울 적에 쓴다. 마당 언저리를 치울 적에 쓰다가 매우 너덜거리면 끈으로 삼아서 알맞춤한 곳을 살펴서 묶어 준다. 어느 곳을 동여매거나 해가림을 하는 몫으로 삼노라면 어느새 흙으로 돌아갈 때를 맞이한다. 곁에서 살뜰히 다루는 살림살이라면 아무 천이나 값싸게 들이지 않는다. 늘 손으로 만지는 살림이니 제값을 치러서 제대로 쓴다. 밥그릇뿐 아니라 빗자루에 걸레를 아이들도 쥔다. 수세미랑 빨래가루나 설거지비누를 아이들도 만진다. 아무것이나 써도 될까? 우리 집에서는 몸이나 손을 닦는 천이건 버선(양말)이건 이불이건 처음 장만한 뒤에는 하루나 이틀쯤 볕에 말린다. 먼저 볕바라기에 바람바라기를 시키고서 물에 담그고 빨래를 한벌 하지. 이다음에 볕바람을 듬뿍 먹이고서야 몸에 댄다. 한두 해 입을 옷이 아닌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입다가 걸레로 삼고, 걸레를 지나 끈으로 삼기도 하는 살림이라면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살펴서 쓸 노릇일까? 아이들은 아직 걸레를 빨아서 물을 알맞게 짜지는 못하지만, 마루를 닦는 걸레질놀이는 신난다. 놀면서 배운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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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2021.4.20.

숨은책 520


《베르사이유의 장미 2》

 마리 스테판 드바이트 글

 노희지 옮김

 소년문화사

 1979.12.15,



  ‘만화방’을 처음 찾아간 어린 날 무척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엄청나게 우글우글한데, 만화책 하나를 몇으로 가르고 까만 끈으로 꿰어서 까만 고무줄에 척 얹더군요. 낱책 하나를 그냥 두면 한 아이가 오래 본다면서 부러 너덧으로 쪼개어 30원을 받습니다. 이러면 아이들이 더 많이 보고, 그만큼 돈을 더 번다지요. 서서 읽도록 실꼬리를 달아 줄에 묶고요. 멀쩡한 책을 쪼개는 손짓이 끔찍해서 만화방에는 다시 안 갔습니다. 동무들이 가자고 잡아끌면 “난 싫다. 차라리 돈을 모아 낱책을 사서 읽을래.” 했어요. 동무들은 《수학의 정석》이나 두꺼운 배움책을 으레 갈라서 들고 다니지만, 저는 아무리 두꺼운 배움책도 통째로 건사했습니다. 줄거리를 읽는 책은 종이꾸러미로 그칠 수 없어요. 일본 만화책을 참 많이 몰래 베낀 우리나라인데,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놓고 몰래책이 갖가지로 나왔어요. 어느 몰래책도 ‘이케다 리에코’라는 이름을 안 밝히더군요. ‘글·옮긴이’는 밝혀도 ‘그린이’는 안 밝히는 눈가림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준 셈일까요. 배고프니 훔친다지만, 배고프면 손수 짓거나 손을 벌리는 동냥을 하면 됩니다. 그나저나 안 찢기고 살아남은 1979년치 만화책이 드문드문 있으니 고마울 뿐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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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2021.4.20.

숨은책 521


《샘이깊은물》 94호

 설호정 엮음

 뿌리깊은나무

 1992.8.1.



  2001∼2003년에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으로 일할 적입니다. ‘뿌리깊은나무·샘이깊은물’을 잇던 붓잡이 설호정 님을 만나기 앞서 《샘이깊은물》을 되읽었습니다. 1992년 8월치 〈이 인물의 대답〉을 보면 설호정·김종철 두 분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녹색평론》의 이념을 선생님은 삶에서 어느 정도 실천하세요?” “대부분 못하죠. 그러니까 《녹색평론》은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실천하시는지.” “가급적이면 외식 안 하려고 하고.” “보신주의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보신주의 나쁠 거 없어요. 나한테 좋은 게 지구한테도 좋은 거예요. 또 고기 안 먹고. 제 생활은 간단하게 단순하게 살고. 여행을 잘 안 하고. 거의 안 합니다.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집하고 여기하고 학교하고밖에 왔다갔다 안 하고. 또 식구한테 빨래 자주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빨리 해결해야 되는 과제가 아파트로부터 나와야 하는 일입니다.” “선생님 가족들이 공감하세요?” “내년이면 애들이 다 우리를 벗어납니다. 대학을 가니까.” “서울로 간단 말이죠?” 《녹색평론》 김종철 님은 대구를 안 버리겠다고 했지만, 설호정 님이 따진 말처럼 2009년에 서울로 갔지요. 글은 스스로 하는 삶만 쓸 노릇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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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2021.4.20.

숨은책 519


《풀종다리의 노래》

 손석희 글

 역사비평사

 1993.11.20.



  1993년을 견뎠습니다. 새벽 다섯 시 삼십오 분에 첫 버스로 배움터에 갔고, 밤 열한 시 십오 분 막차를 놓치면 집까지 두 시간 남짓 걸었습니다. 막차를 놓쳤대서 투덜대지 않았어요. 거리불빛에 기대어 책을 읽었어요. 배움책으로 가득한 등짐이지만 여느 책을 늘 대여섯 가지씩 챙겼어요. 어린배움터 길잡이로 일하는 아버지는 집에서 쉴 때면 보임틀(텔레비전)을 매우 크게 틀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난 앞으로 보임틀을 집에 안 두겠어!” 하고 다짐합니다. 열린배움터로 갔으나 스스로 배운다거나 책을 곁에 두는 동무나 윗내기를 못 만납니다. 다들 보임틀에 눈을 박습니다. 동아리 사람들이 크게 튼 보임틀이 못마땅해서 혼자 조용히 헌책집을 떠돕니다. 보임틀에 참목소리는 얼마나 있을까요? 책에는 참목소리가 얼마나 흐를까요? 우리 삶터는 허울을 쓰고 속내를 감춘다고 느꼈습니다. 헌책집에서 만난 책벗이 《풀종다리의 노래》가 좋다고 하기에 들췄으나 시큰둥했어요. 그 뒤 손석희 님이 큰집을 덜컥 장만하든, 중앙일보 종편으로 가든, 박진성 시인한테 안 뉘우치든, 조주빈하고 엮이든 그러려니 싶어요. 풀종다리 노래를 하자면 스스로 들풀이 될 노릇입니다. 두 다리로 골목을 걷고 맨발로 풀밭을 디뎌야겠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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