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일기 86] 보고 그린다

― 내가 바라보는 꿈을 담는다



  바다 옆에서 살면 늘 바다를 보면서 바닷바람을 마시고 바닷내음을 맡습니다. 바다가 보여주는 빛깔을 늘 바라보면서 바다와 얽힌 이야기를 마음에 담습니다. 멧골에 깃들어 살면 늘 멧골을 보면서 멧바람을 마시고 멧내음을 맡습니다. 멧골이 보여주는 빛깔을 늘 바라보면서 멧골과 얽힌 이야기를 마음에 담습니다.


  내가 사는 곳에 내가 바라보는 숨결이 있습니다. 내가 보금자리를 마련한 곳에 내가 맞이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내 삶터에서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더 나은 것이나 덜떨어지는 것이 있는 삶터는 없습니다. 언제나 나 스스로 바란 대로 있는 삶터입니다. 내 보금자리가 아파트이든 시골집이든 그대로 받아들여서 누릴 때에 내 넋이 싱그럽습니다. 어느 곳에서 살든 마음이 홀가분하면서 즐거울 때에 내 하루가 홀가분하면서 즐겁습니다. 아파트에 있으면서도 하느님 마음이 될 수 있고, 시골집에 있으면서도 꽁꽁 묶이거나 갇힌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그림을 그립니다. 우리가 늘 마주하거나 바라보는 모습을 그립니다. 이 그림은 그예 그림입니다. 곱거나 예쁜 그림이 아니라, 그저 그림입니다. 사는 모습을 그리고, 생각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꿈꾸는 모습을 그리고, 사랑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래서 그림에는 온갖 모습을 담을 수 있습니다. 바로 내 눈앞에 있는 모습을 그리고, 앞으로 누리려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릴 적에는 먼저 숨을 차분히 고릅니다. 잘 그리려는 생각이나 다르게 그리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내 숨결을 담아서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 하나만 합니다. 이런 손재주나 저런 기법이나 그런 이론을 써서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내 손길이 닿는 대로 그리되, 내 손길은 내 마음으로 움직입니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는지 모르겠다면, 아이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셔요. 나는 아이가 그릴 그림을 말하고, 아이는 내가 그릴 그림을 말하면 됩니다. 서로 어느 그림을 그려 보자고 이야기해 주면 됩니다.


  내가 마음속에 그리는 그림대로 내 삶이 흐릅니다. 내가 마음속에 담으려는 그림대로 내 하루가 찾아옵니다. 그러니, 내 생각은 늘 내 꿈이어야 합니다. 이루려는 꿈을 늘 생각하고, 이루려는 꿈으로 가는 길을 언제나 가꾸어야 합니다. 걱정이나 근심이 아닌 맑은 생각과 밝은 마음이 되어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림을 즐겁게 그리는 사람입니다. 4348.2.1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고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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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원



  나흘에 걸친 바깥마실을 마치고 고흥으로 돌아오면서, 읍내 가게에 들러 몇 가지 먹을거리를 장만할 때이다. 이제 셈을 치르고 나오려는데 여덟 살 큰아이가 아버지를 부른다. “아버지, 나 껌.” “응?” “나 풍선껌 할래.” “껌 하지 말자.” 이 말에 큰아이는 아주 시무룩한 낯빛이 된다. 셈을 치르고 나오는데 아주 찜찜하다. 문득 큰아이 세뱃돈이 떠오른다. 설은 아직 멀었으나, 설에는 일산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갈 수 없기에 미리 절을 하고 받은 돈이 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자, 벼리야 네 세뱃돈 줄 테니까 껌 사.” “응!” “동생 몫으로 따로 한 통 더 사.” “응! 알았어!” 큰아이는 종이돈을 들고 후다닥 달린다. 풍선껌 두 통을 골라서 셈대에 줄을 서서 기다린다. 풍선껌 한 통 값은 400원. 두 통은 800원. 큰아이는 풍선껌 두 통을 손에 쥐고 활짝 웃음꽃을 핀다. 너는 껌이 아니라 풍선을 빚고 싶었지, 아버지가 깜짝 잊었다. 4348.2.11.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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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눈’을 떠서 ‘머리를 오롯이 쓰’면



  뇌를 100퍼센트 쓰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맞는 말이라고 느껴요. 여느 때에 아무것도 안 하다가 갑자기 뇌를 100퍼센트 쓰면 이녁은 곧바로 숨을 거둔다고 합니다. 몸이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맞는 말이라고 느껴요. 그러면, 누가 뇌를 100퍼센트 쓸 수 있을까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생각을 늘 마음에 심어서 새로운 길을 짓는 사람이라면 뇌를 100퍼센트 쓸 만하리라 느낍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몸에서 스스로 막아서 뇌가 ‘더 많이 열리지 못하도’록 하리라 느껴요. 왜냐하면, 몸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기운을 마음이 시키려 한다면, 몸은 그만 터질 테니까요.


  몸이 ‘나는 터지고 말 테야’ 하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다스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몸은 ‘마음이 시키는 일’을 모두 다 할 만하리라 느낍니다. 몸은 두려움을 느끼는데, 마음만 혼자 ‘끝없는 끝’이나 ‘가없는 점’으로 간다면, 몸은 어떻게 될까요. 죽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느낍니다. 마음만 혼자 살 수 없고, 몸만 따로 살 수 없습니다. 마음과 몸이 함께 살 때에, 제대로 기운이 샘솟아서 제대로 삶을 짓는다고 느낍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수퍼맨’이나 ‘영웅’을 안 믿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짠 하고 나타나서 우리 지구별을 깨끗하게 씻어 줄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어요. 수퍼맨이나 영웅은 아무리 보아도 바보스럽기만 하고, 무언가 제대로 모르는 사람 같다고 느꼈어요. 생각하면 할수록 그렇지요. 어떤 수퍼맨 하나가 모든 나쁜 것을 다 씻으면 삶이 재미있을까요?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아주 잘못 생각하는 대목이 있는데, 우두머리(지도자) 한두 사람이 짠 하고 나타나야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민주‘주의’가 아닌 ‘민주’를 이루자면, ‘내가 나를 다스려서 내가 내 삶을 스스로 짓는 길’로 가야 합니다. 한자말 ‘민주’를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임자’가 되는 길이 ‘민주’예요. “백성(서민·시민)이 주인 되기”가 ‘민주’가 아니에요. “사람이 스스로 사람이 되어, 내 삶을 바로 내 손으로 짓는 삶”이 ‘민주’입니다. 이기주의나 개인주의가 아니라, 내 삶을 내가 손수 지어서, 밥과 옷과 집을 언제나 스스로 지어서 얻고 누릴 수 있을 때에, ‘홀로서기’요 ‘삶’이며 ‘민주’입니다. 대통령이 아무리 뛰어나거나 훌륭하더라도, 사람들이 스스로 제 삶을 손수 짓지 않는다면, 이런 나라에는 끔찍함만 도사릴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수퍼맨’이나 ‘수퍼우먼’이나 ‘여왕’이나 ‘영웅’이 되어 지구별을 살릴 수 없어요. 어떤 사람도 이런 길을 안 바라요. 사람들 스스로 제 길을 찾고 살피고 알고 깨달아서 슬기롭게 삶을 지어야 합니다.


  수퍼맨이나 수퍼우먼이 나타나서 ‘나쁜 것’을 싹 쓸어서 없앤 뒤에 어떻게 되는가요? 사람들은 평화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싸움’을 자꾸 일으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나쁜 짓’이나 ‘새로운 바보짓’을 자꾸 일삼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찾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니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나쁜 짓이나 바보스러운 짓’을 일삼아서, 이를 스스로 바로잡거나 다스리거나 불태울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만화책 《드래곤 볼》이라든지 만화영화 《천년여왕》을 보아도, 이런 대목이 아주 잘 나와요. 사람들은 ‘평화’와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그저 쳇바퀴질을 합니다. 어떤 대단한 사람이 나타나서 모든 것을 다스리면, 언제나 그때일 뿐, 모두 제자리(바보스러운 엉터리)로 돌아갑니다.


  나는 남을 도울 수 없습니다. 남도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서로 어깨동무를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서로 이웃과 동무가 될 수 있어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도울 뿐입니. 우리는 이웃이 되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만하고, 우리는 동무가 되어 돈을 보태어 준다든지 일손을 함께 맞잡는다든지 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길’을 엮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잘 알아야 할 대목은, 내가 스스로 우뚝 서야, 서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내가 폭삭 주저앉으면 아무도 나하고 어깨동무를 못 합니다. 나부터 우뚝 서야, 내 이웃과 동무랑 어깨동무를 합니다.


  ‘새로운 눈을 떠서 머리를 오롯이 쓰면(제3의 눈을 떠서 뇌를 100퍼센트 쓰면)’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라고 느껴요. 내 삶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내 삶을 제대로 지으면 됩니다. 새로운 눈을 뜬 뒤 다른 사람을 도울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내가 내 삶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제대로 지으면, 내 동무와 이웃은 나를 바라보면서 ‘아하, 그렇구나. 나도 눈을 새롭게 뜨면서 즐겁게 살아야겠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요. 누군가를 도우려 한다면 ‘이렇게 해야 돕는 일’이 됩니다. 내가 스스로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레 살면, 내 이웃과 동무도 이녁 스스로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레 살아요.


  가만히 보니, 내가 ‘새로운 눈’을 뜰 때마다 하는 일은 수수합니다. 이를테면, 밥을 새롭게 짓습니다. 또는 아이들과 함께 읽을 ‘짧은 노래(시)’를 기쁘게 짓습니다. 나무를 심습니다. 우리 집 뒤꼍이나 마당에서 풀을 뜯어서 나물밥을 차립니다. 아이들을 태운 자전거를 몰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과 마당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새로운 눈’을 안 뜰 적에는 나도 모르게 꽥 소리를 지르거나 골을 부리거나 바보스러운 짓을 해요.


  나는 내 ‘새로운 눈’을 뜨면서 스스로 웃습니다. 나는 일어서면서 웃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새로운 눈을 뜨기에 일어설 수 있고, 일어서기에 웃습니다. 일어서기에 웃으면서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눈(제3의 눈)’을 뜨고서 우주혁명이나 지구혁명을 일으키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내 길을 가면 됩니다. 4348.2.10.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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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아이 오줌방울



  기침이 멎지 않고 몸이 아픈 작은아이가 저녁을 거르고 내처 잔다. 퍽 오랫동안 잠자리에만 누웠구나 싶어서, 밤 열한 시에 일으켜서 쉬를 누인다. 쉬를 누이기 앞서 “쉬 할래?” 하는 말을 여러 차례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는 눈치는 없으나, 쉬가 마려워서 몸을 자꾸 비튼다고 느낀다. 살며서 안아서 마루로 나와서 쉬를 누이려는데, 작은아이 고추가 뭉쳤다가 풀리면서 내 뺨에 오줌방울이 튄다. 아, 오랜만이로구나. 네 오줌을 얼굴에 맞는 일 말이야. 작은아이는 오줌그릇이 가득 차도록 쉬를 눈다. 무척 오래 참았구나. 국물과 물을 몇 모금 마신 작은아이는 다시 잠자리에 눕고, 몇 번 기침을 하다가 조용히 곯아떨어진다. 밤새 잘 자렴. 아침에는 말끔한 몸으로 일어나렴. 4348.2.10.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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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2-11 05:19   좋아요 0 | URL
한솔이는 어제 병원에서 독감검사하고 독감판정되어 일주일간 학교 가지말고 있으라는 진단서를 주더라구요.
큰병원인데 독감환자로 병실이 모자라서 입원도 안되고요.
일단 집에 데려왔는데 집에서 봐줄 사람이 없어 데리고 출근해야하네요. ㅠㅠ

숲노래 2015-02-11 05:54   좋아요 1 | URL
아이가 병원에 안 가고 어머니하고 함께 다녀야 하는 한 주라면,
어쩌면 아이한테는 무척 뜻깊은 한 주가 될 수 있으리라 느껴요.
아이는 스스로 튼튼하니, 독감이라 하더라도
씩씩하게 지내면서 말끔히 털리라 생각해요.
콜록거리는 사람만 가득한 병실보다는
어머니 곁이 한결 포근하면서 좋은 쉼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즐겁게 오늘 하루 열어 보셔요.
아이도 하양물감 님도 믿습니다.

우리 집 작은아이도 오늘은 기침을 털고 씩씩하게 놀리라 믿어요 ^^
 

다르면서 새로운 두 아이



  두 아이는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르면서 서로 새롭다. 두 아이가 ‘그저 다르다’고만 느낀다면, 두 아이를 마주하는 기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리라 본다. 두 아이는 ‘두 아이대로 새로운 숨결’인 줄 느끼면, 두 아이를 새롭게 바라보면서 내 삶을 기쁘게 마주할 만하리라 생각한다.


  인천과 일산에서 모두 나흘을 머물면서 바깥마실을 한 뒤 고흥으로 돌아오는 아침에, 큰아이는 ‘이제 어머니한테 가자’ 하고 말하니 졸린 눈을 비비면서 바로 일어나고, 작은아이는 이 말을 듣고도 ‘보라 더 잘래’ 하고 말하면서 안 일어나려 한다. 달래고 타이르고 얼러도 작은아이는 ‘보라 더 잘래’가 앞선다. 한참 만에야 겨우 일어나서 잠옷을 갈아입고 쉬를 누는 작은아이는 택시를 타러 갈 때까지 ‘걷기 힘드니 안아’ 달라고 한다. 큰아이도 졸음이 가득한 몸이지만 동생이 아버지한테 안기니 안아 달라는 말을 안 한다.


  작은아이는 일산에서 순천으로 가는 시외버스에서 한참 곯아떨어진다. 큰아이도 이 버스에서 함께 곯아떨어졌는데, 버스 난방이 제법 달아올라서 큰아이 겉옷 한 벌 벗기려는데 지퍼가 도무지 안 풀리고 천에 집혀서 애먹는 사이 그만 잠이 깬다. 작은아이는 겉옷 한 벌을 벗겨도 그저 잔다. 잠을 덜 잔 큰아이는 순천에서 고흥으로 들어가는 시외버스를 탈 적에 길게 뻗듯이 곯아떨어진다. 곯아떨어진 큰아이를 안고 버스에서 내린 일이 요 몇 해 사이에 드물었지만, 어제 아주 오랜만에 ‘잠든 큰아이’를 안고 ‘말짱한 작은아이’는 혼자 걸어서 버스에서 내린다.


  날마다 새로운 일을 겪으면서 두 아이가 자란다. 어버이인 나도 아이들과 함께 무럭무럭 큰다. 4348.2.10.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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