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니?



어떤 이는 내 겉모습이나 옷차림을 보고 암말을 안 한다. 어떤 이는 뭔가 잔뜩 말하고 싶으나 참는다. 어떤 이는 대뜸 이 말부터 한다. 어떤 이는 아무렇지 않다고 여겨 서로 나누고 싶은 말을 한다. 어떤 이는 겉모습하고 옷차림을 스스로 즐겁게 누리는 삶이 얼마나 신난가 하는 이야기부터 풀면서 그동안 서로 나누고 싶은 말을 꽃피워서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살림길을 주고받는다. 한 사람은 가만히 있다. 이 한 사람을 보는 눈이 그저 다 다르다. 나는 이 다른 여러 눈길 가운데 어느 눈길이 가장 좋거나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사람이 다 다르니 다 다르게 보는구나 하고 느낀다. 이러면서 시나브로 생각하는데, 함께 이야기판을 벌일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가릴 수 있다. 똑같은 옷인데, 누구는 치마라 하고, 누구는 반바지라 하고, 누구는 치마바지라 한다. 그리고 누구는 그저 옷이라 하고, 누구는 우리 몸뚱이야말로 넋이 뒤집어쓴 옷이라고 한다.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보고 싶은가? 무엇을 보는가에 따라서 우리 손에서 피어나는 글이 다 다르게 흐른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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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힘을 다해



온힘을 다해 아침저녁을 차린다. 설렁설렁 차리면 밥상맡에 앉은 사람이 바로 눈치를 챈다. 온힘을 다해 차리는 밥은 수저를 드는 사람이 굳이 눈치를 채지 않아도 한결 느긋하면서 넉넉하게 누린다. 온힘을 다해 아침저녁을 차린 다음에는, 다시 온힘을 다해 부엌을 치운다. 이러고 나면 어느새 기운이 쪽 빠지고 머리가 어질어질. 먹을 때보다 차리고 치울 적에 기운이 더 쓰이지 싶다. 이리하여 요새 늘 생각해 본다. 앞으로 아이들이 손수 밥을 지어서 먹고 치울 줄 안다면, 그때에는 밥은 되도록 안 먹거나 적게 먹으면서 살아야겠다고. 2018년을 돌아보면 보름쯤 밥 없이 지낸 적이 있고, 뒤이어 열흘 즈음, 또 이레 즈음, 닷새 즈음, 서너 날, 하루나 이틀 즈음, 이렇게 밥을 몸에 안 넣은 적이 있다. 밥끊기라기보다 몸에서 바라지 않는다고 여겨 물조차 안 마시며 지내기도 했다. 보름쯤 밥 없이 지낼 적에는 몸이 대단히 가벼웠고, 밥이란 데에 마음도 품도 겨를도 안 들이니 머리가 어찌나 맑고 시원하게 돌아가는지, 아주 재미있었다. 우리는 먹기 때문에 기운이 난다기보다, 먹기 때문에 한결 굼뜨거나 퍼지거나 지치지 싶다. 우리는 먹기 때문에 온힘을 ‘밥하고 치우는 데’에 너무 써 버리지 싶다. 먹지 않아도 즐거운 살림이라거나 적게 먹어도 넉넉한 살림이라 한다면 우리 하루가 얼마나 길고 알찰는지 가만히 그려 본다. 온힘을 다해 밥을 짓는 나날도 나쁘지 않다. 온힘을 다하는 걸음걸이를 잇다 보면, 앞으로 온힘을 다해 꿈을 짓고 사랑을 펴며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나날을 맞이하겠지.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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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서 못 쓰는 글



모르니 쓸 수 없다. 모르는 채 쓰면 어찌 될까? 거짓글이 되겠지. 생각해 보라. 모르면서 밥을 어찌 짓나? 모르는 채 국을 어떻게 끓이나?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쓴 글이 뜻밖에 잘 될 수 있겠지만, 이런 글은 오래가지 못한다. 밥이든 글이든 제대로 익히고 나서야 해야 제대로 빛이 난다. 모를 적에는 배운다. 밥짓기도 배우고 글짓기도 배운다. 모르니까 배워서 익힌다. 밥짓기도 배워서 익히고, 글짓기도 배워서 익힌다. 밥을 지어서 나누는 살림을 찬찬히 배워서 삶으로 익힌다. 글을 지어서 나누는 기쁨을 차근차근 배워서 사랑으로 익힌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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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본 글



꿈에서 또다른 나를 본다. 이른바 평행세계라 하는 나란나라에서 살아가는 내가 이곳에 있는 나한테 말을 건다. “어이. 이봐. 잘 보이지? 네가 이곳에서 본 이야기를 소설로 써 봐.” 나는 대뜸 대꾸한다. 여태 꿈을 구경하다가 내 목소리를 낸다. “뭐? 소설을? 난 소설 싫어하는데.” “싫어하든 말든 써 봐. 재미있어.” “아, 소설도 쓰라고? 난 동화를 쓰고 싶은데.” “동화를 쓰든 말든 써 봐. 네가 이곳에서 본 이야기를 잘 떠올려서 쓰면 돼.” “그런가? 그러면 너희도 설마?” “응. 우리도 이쪽 나라에서 글을 쓸 적에 너희 나라 이야기를 꿈에서 보고서 써.” “그렇구나. 헨델이란 사람이 꿈에서 들은 노래를 이승에서 옮겨서 풀어냈다고 하더니, 노래뿐 아니라 글도 그렇구나.” “그래. 넌 몰랐구나.” 이야기를 마치고 꿈자리에서 일어난다. 꿈인지 꿈이 아닌지 헷갈린다. 다만 한 가지는 또렷하다. 내가 글을 쓸 적에는 이곳에 있다는 생각을 까무룩 잊는다. 오직 글쓰기만 생각하는데, 아니 글을 쓴다는 생각조차 없이, 아무 소리도 느낌도 배고픔도 추위도 더위도 고단함도 졸림도 안 느끼면서 그저 마음에서 흐르는 모든 목소리랑 노래랑 춤을 고스란히 풀어낼 뿐이다. 내가 그동안 쓴 모든 글은, 어쩌면 나 스스로 모르게 저쪽 꿈나라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를 낱낱이 옮겼을는지 모른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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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덧글을 버리는 글쓰기



내가 쓰는 여러 누리집 가운데 한 곳에 ‘쓰레기 덧글’을 남긴 이가 있다. 이이는 ‘쓰레기 덧글’을 남기면서 퉁명스레 한 마디를 내뱉는다. 왜 ‘덧글 창을 공개’하느냐고. 웃기는 소리이다. 나는 ‘들어온(로그인)’ 사람만 덧글을 쓰도록 해 둔다. 아무나 다 덧글을 쓸 수 없다. 더구나 덧글 창을 ‘들어온 사람이 쓰도록 하’든 ‘아무나 쓰도록 하’든, 이 덧글 창에 ‘쓰레기 덧글’을 올리라고 열어 둘 사람이 어디 있는가? 길가나 골목에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 사람이 있고, 때로는 도시에서 짐차에 쓰레기를 몰래 싣고 와서 시골 밭둑이나 골짜기 한켠에 들이붓고 달아나는 사람이 있다. 생각해 보라. 밭둑이나 숲이나 골짜기에 높다랗게 시멘트담이나 쇠가시울타리를 안 쳤으니, 쓰레기를 버려도 된다는 뜻인가? 아니다. 쓰레기를 스스로 건사하지 않거나 아무 데나 버리는 사람이 잘못이다. 온누리 모든 누리집이 매한가지이다. ‘쓰레기 덧글’을 달아도 좋다는 뜻으로 덧글 창을 열어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나는 ‘쓰레기 덧글’, 줄여서 ‘쓰레글’을 쓴 이한테 쓰레글을 돌려주기로 했다. 아이들이 “튕겨!”나 “반사!” 하면서 놀지 않는가? 쓰레글을 쓴 쓰레님(쓰레기 누리님)한테 “튕겨!”를 하면서 한 마디를 보태었다. 너 말야, 그런 쓰레글을 쓰면서 삶이 즐겁니? 그런 쓰레글을 쓰는 동안 웃거나 춤을 추니? 그런 쓰레글을 쓰는 줄 바로 네 마음이 똑똑히 지켜본단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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