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이렇게



이틀을 바깥에서 묵고 사흘 동안 바깥일을 하고서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시외버스에서 무릎셈틀을 켜서 쓴 글을 누리집에 올리고서 쉴까 했지만 손목이며 팔뚝에 힘이 없어 차마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손목이랑 팔뚝으로 개수대에 가득한 설거지는 했고 부엌을 비로 찬찬히 쓸었다. 글을 쓰는 몸하고 부엌일을 하는 몸은 다르네. 자리에 눕기 앞서 며칠 사이에 하고 겪고 느끼고 배우고 받아들인 이야기를 곁님한테 짤막히 들려주려 했는데, 그만 네 시간이나 부엌에 나란히 앉았네. 고단해 쓰러지려고 하는 몸이랑, 이야기꽃을 펴는 몸도 다르네. 어쩜 이렇게 다를까. 같은 몸이면서 다른 몸이다. 다른 몸이면서 같은 몸이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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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음



내가 글을 쓰는 마음은 딱 하나이다. ‘참마음’. 한자말로 옮기면 ‘진심’. 이밖에 달리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참마음이 아닌 채 어떻게 글을 쓸까? 참마음이 아닌 채 어떻게 밥을 짓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낳으며, 어떻게 하루를 누릴까? 참마음이 아닌 채 어떻게 동무나 이웃을 사귀고, 참마음이 아닌 채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이제껏 모든 자리에서 참마음일 뿐이었고, 오늘도 모레도 늘 참마음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감출 수도 숨길 수도 없다. 내 낯빛에 참마음이 그대로 묻어나고, 내 몸짓에 참마음이 고스란히 흐른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 속삭인다. 사랑해.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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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 울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따로 글쓰기 강의를 다니지는 않는다. 누가 우리 책숲집으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할 적에, 또 다른 여러 일로 다른 고장에 강의를 갈 적에, 이웃님이 여쭈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최종규 씨는 어떻게 그 많은 책을 다 읽고 날마다 그 많은 글을 다 쓰나요?” 하고 으레 물으면 다음처럼 대꾸를 한다. 


“저는 저 스스로 사랑하고 싶어서 삶을 배우는 길에 문득 책이 얼마나 깊고 푸른 숲이면서 바람을 고이 품는가 하고 스스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때가 열여섯 살인가 열일곱 살이에요. 그때 그 눈물이 샘솟는 기쁨을 날마다 맛보고 싶어서 날마다 참으로 숱한 책을 읽고, 그렇게 읽은 책 못지않은 부피로 글을 쏟아냅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껏 똑같은 글을 쓴 적이 없어요. 늘 새롭다 싶은 이야기하고 줄거리로 글을 써요. 저 스스로 돌아보지요. 어떻게 나는 이틀이나 사흘 만에 책 하나 부피가 될 만한 글을 스물 몇 해째 날마다 쓸 수 있는가 하고요. 

저 스스로 마음에 물어보면 언제나 한 가지 대꾸가 흘러나와요. ‘너 있잖아, 네가 쓴 글을 네가 읽고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니? 너 말이야, 네가 쓴 글을 너 스스로 읽으면서 깔깔깔 까르르 하하하 호호호 웃을 수 있니?’ 

이웃님한테 글쓰기 이야기로 말씀을 여쭌다면 오직 이 하나예요. 이웃님 스스로 쓴 글을 이웃님이 스스로 읽으면서 눈물이 눈가에서 마구 샘솟아 볼을 타고 흐르다가 턱끝으로 방울이 져 톡 떨어져 발치를 적시는가요? 

우리가 쓴 글을 우리 스스로 읽으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글이 아니라면 글을 쓸 일이 없다고 여겨요. 우리가 쓴 글을 남들이 아닌 바로 우리 스스로 읽으며 웃음을 피울 수 있는 글이 아니라면 구태여 글을 쓸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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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보고 읽을 뿐



아이들한테도 말하고 어른들한테도 말한다. 우리는 서로 마음으로 볼 뿐, 마음 아닌 몸으로는 볼 수 없고 볼 까닭이 없고 볼 일조차 없으며 볼 뜻마저 있을 수 없다고. 글 한 줄을 읽을 적에 눈에 보이는 글씨를 읽는가, 아니면 연필이나 볼펜이나 붓으로 썼는가를 읽는가, 아니면 글쓴이가 이제껏 걸어온 삶으로 지은 살림이 묻어나는 사랑이 흐르는 숨결을 읽는가? 무엇을 읽는가? 책을 손에 쥐어 읽을 적에 책쏜이 이름값을 읽는가, 아니면 책을 펴낸 곳이 얼마나 알려진 곳이라 하는 이름값을 읽는가, 아니면 글쓴이나 펴낸곳 이름값이 아닌 책에 서린 이야기가 얼마나 참답거나 참한 기쁨이 녹아드는 꽃송이인가를 읽는가? 모든 자리 모든 때에 그저 마음으로 보고 읽을 뿐이다. 글을 읽으면서 마음을, 글쓴이 마음을 못 읽는다면 글을 안 읽거나 책을 못 읽은 셈이라고 여긴다. 사람을 만나면서 마음을, 내가 마주한 그이 마음을 못 읽는다면 우리는 사람을 안 사귀거나 못 만난 셈이라고 느낀다. 눈을 가만히 감고서 오롯이 마음으로 마주하며 바라보고 품에 안으려 할 적에 비로소 ‘읽기’이고 ‘쓰기’가 된다고, 나는 이제까지 살며 온몸이랑 온마음으로 느껴서 배웠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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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네가 엉뚱해도



묻는 네가 슬기롭기에 너한테 대꾸하는 말이 슬기로울까? 나한테 띄운 네 글이 엉터리이기에 나도 너한테 엉터리인 글을 마주 띄워야 할까? 묻는 네가 사랑스럽기에 너한테 대꾸하는 말이 고스란히 사랑스러울까? 나한테 퍼붓는 네 글이 얄궂기에 나도 너한테 얄궂다 싶은 글을 마구 들이밀어도 즐거울까? 생각한다. 다시 생각하고 자꾸 생각한다. 누가 참 엉뚱하거나 엉망이로구나 싶은, 바보스럽거나 어처구니없거나 부질없구나 싶은 이야기를 물어도 대수로울 일이란 없다. 어떤 물음을 받아들이건 나 스스로 어떠한 길을 꿈으로 지으면서 나아가려 하는가, 이 하나만 헤아리면서 맞글을 적거나 맞말을 들려주면 될 뿐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돌보면서 스스로 곱게 빛나는 기쁨을 누리려고 글을 쓰거나 말을 하거나 살림을 짓거나 곁님을 바라보거나 아이들을 가슴으로 품는다. 누구한테 잘보이거나 밉보일 까닭이 없을 뿐더러, 서로 엉뚱하거나 엉성할 일도 없다. 가장 수수하면서 가장 티없이 웃는 낯으로 글 한 줄을 적고 말 한 마디를 풀어놓아 바람결에 띄우면 넉넉하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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