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코파이 자전거 동시야 놀자 1
신현림 지음, 홍성지 그림 / 비룡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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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36



개구쟁이가 쓴 동시

― 초코파이 자전거

 신현림 글

 홍성지 그림

 비룡소 펴냄, 2007.2.23.



  우리 집 작은아이는 개구쟁이에 장난꾸러기입니다. 어떤 놀이를 하든 개구쟁이 짓을 보여주고, 언제 어디에서나 장난꾸러기다운 웃음과 모습입니다. 너는 어디에서 왔는고 하면서 돌아보면, 누구이긴 누구인가 하면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왔지요. 아이를 낳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어릴 적에 개구쟁이로 놀면서 장난꾸러기다운 온갖 놀이를 즐겼겠지요.


  문득 생각합니다. 내가 어릴 적에 개구쟁이 짓을 한참 할 적에, 우리 어버이와 형과 동무와 이웃은 어떻게 맞아들였을까 하고. 그저 예쁘거나 귀엽게 맞아들였을까요, 아니면 고단하거나 괴롭게 맞아들였을까요. 제발 그만 해 주기를 바랐을까요, 아이 때에는 누구나 그러려니 하고 여겼을까요.



.. 초코파이 자전거를 탔더니 / 바람이 야금야금 / 다람쥐가 살금살금 / 까치가 조금조금 / 고양이가 슬금슬금 먹어서 ..  (초코파이 자전거)



  신현림 님이 이녁 딸아이한테 들려주려고 쓴 동시를 담은 《초코파이 자전거》(비룡소,2007)를 읽습니다. 신현림 님은 틀림없이 이녁 딸아이한테 들려주는 선물과 같이 동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신현림 님 스스로 삶을 즐기려고 이 동시를 썼어요.


  아마 이녁 어릴 적을 숱하게 떠올리면서 한 줄 두 줄 적었겠지요. 이녁 어릴 적에 어떻게 놀면서 하루를 꿈꾸었는지 되새기는 즐거움이 한 줄 두 줄 녹아들었겠지요.


  노래는 언제나 삶으로 드러납니다. 삶은 언제나 노래로 피어납니다. 노래는 언제나 삶에서 자랍니다. 삶은 언제나 노래가 있어 넉넉합니다.



.. 봄바람에 / 내 머리카락 살랑살랑 / 엄마 치마 하늘하늘 // 봄바람에 / 벚꽃잎 화르르르 // 어느새 / 봄이 활짝 피었네 ..  (봄바람)



  작은아이한테 큰소리를 치고 나면 늘 머리가 아픕니다. 작은아이한테 친 큰소리를 바로 내가 나한테 친 큰소리와 같다고 느낍니다. 꾸짖거나 나무라려는 뜻에서 큰소리를 친들 작은아이가 들을 턱이 없습니다. 오직 내 마음이 더 아프고 힘들 뿐입니다. 그러니까, 작은아이를 곁에 앉히거나 세우거나 품에 안고서 사근사근 말하면, 부드럽고 따스한 목소리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들려주면, 작은아이는 응응 하면서 아버지 말마디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작은아이한테 들려주는 보드랍고 따스한 노래는 바로 내가 나한테 들려주는 보드랍고 따스한 노래입니다. 게다가, 작은아이가 여느 날 귀여겨들은 보드랍고 따스한 노래는 이 아이 가슴에 고이 깃들어, 어느 날 새롭게 깨어납니다. 아이는 어버이가 즐겁게 들려준 노래를 참말 잘 아로새깁니다. 이 노래를 언제 어디에서나 맑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불러 줍니다.



.. 주물럭주물럭 / 조물락조물락 // 내 양말 내 팬티야 / 조잘조잘 / 그만 떠들어라 // 잘 마를 때까지 / 포옥 자고 일어나라 // 푸욱 자고 일어나 / 어서 하늘 끝까지 펄럭여 봐 ..  (빨래)



  개구쟁이 아줌마가 개구쟁이 아이한테 동시를 써서 들려줍니다. 종이에는 글로 쓰지만, 입으로는 노래를 부릅니다. 장난꾸러기 아줌마가 장난꾸러기 아이한테 동시를 써서 읊습니다. 종이에는 글로 쓰고 나서, 입으로는 노래를 조잘조잘 읊습니다.


  개구쟁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개구쟁이를 낳습니다. 장난꾸러기는 무럭무럭 커서 장난꾸러기를 낳습니다.


  개구쟁이는 어릴 적에 거침없이 뛰놀았습니다. 어른이 된 개구쟁이는 이녁 아이가 개구쟁이로 태어난 모습을 보면서 몹시 기쁩니다. 이제 어른과 아이가 함께 개구쟁이가 되어 뛰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난꾸러기는 어려서부터 스스럼없이 뒹굴며 놀았어요. 어른이 된 장난꾸러기는 이녁 아이가 장난꾸러기로 태어난 모습을 보면서 아주 반깁니다. 이제 어른과 아이가 나란히 장난꾸러기가 되어 온누리에서 갖가지 장난질로 웃음꽃과 노래잔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커다란 배추 / 기다란 무 / 굵다란 양파를 / 썩뚝썩뚝 썰어서 담근 김치 // 둥근 항아리에 / 새콤달콤 익어 가는 나박김치 ..  (나박김치)



  아이들은 스스로 들은 대로 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본 대로 움직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맞이한 대로 반깁니다. 사랑을 넉넉히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사랑을 나누는 기쁨을 압니다. 사랑을 따스히 누리며 자란 아이들은 이웃과 동무 모두 사랑을 그리고 껴안을 적에 즐거운 줄 환하게 압니다.


  언제나 노래를 들으며 자란 아이는 언제나 노래를 부르겠지요. 잘 부르거나 못 부르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즐겁게 부르면 됩니다. 언제나 그림을 그리며 자란 아이는 언제나 그림을 그려요. 잘 그리거나 못 그리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즐겁게 그리면 됩니다.



.. 쓱쓱쓱 빗자루로 쓸고 / 싹싹싹 걸레로 닦고 / 쓱쓱싹싹 청소를 했네 // 어느새 방 안은 / 환한 보름달 ..  (청소)



  아이들은 시험을 받아야 하지 않아요. 어른들도 시험을 받아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시험성적으로 줄을 서야 하지 않아요. 어른들도 시험성적이나 은행계좌나 이런저런 실적 따위로 줄을 서야 하지 않아요.


  아이도 어른도 즐겁게 놀아야 합니다. 아이도 어른도 기쁘게 일해야 합니다. 아이도 어른도 땅을 밟고 하늘을 마셔야 합니다. 아이도 어른도 풀과 꽃과 나무를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이도 어른도 싱그러운 물을 마시고, 맛난 밥을 먹어야 합니다.


  아이가 살기 좋은 나라는 어른도 살기 좋아요. 아이가 사랑스레 살아갈 나라라면 어른도 사랑스레 살아갈 나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른들은 살기 좋은 나라에서 살려는 마음을 좀처럼 안 품습니다. 오늘날 어른들은 사랑스러운 나라하고는 자꾸 동떨어지려고 합니다.


  생각해 봐요. 전쟁무기가 있으면 뭘 하겠어요? 전쟁을 하겠지요.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있으면 뭘 하겠어요?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없는 사람을 따돌리거나 푸대접을 하겠지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어른인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아이들한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하겠습니까. 전쟁무기를 물려주겠습니까, 사랑을 물려주겠습니까. 아름다운 나라를 가꾸겠습니까, 차별과 신분이 가득한 제도권 사회에서 종살이를 하겠습니까.



.. 노란 보리 출렁출렁 / 까만 밤바람 훌렁훌렁 / 답답한 가슴 후련후련 / 노란 달 보러 간다 ..  (노란 달 보러 간다)



  개구쟁이가 쓴 동시를 곰곰이 읽습니다. 개구쟁이는 개구진 짓을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착하고 참다우면서 곱습니다.


  장난꾸러기가 쓴 동시를 찬찬히 읽습니다. 장난꾸러기는 늘 장난을 치지만, 마음은 늘 사랑스럽고 밝으면서 따스합니다.



.. 엄마 냄새 솔솔 나게 / 문 열고 일하세요 // 엄마 냄새 기분 좋아 / 실실 웃음이 나요 // 엄마! / 엄마 냄새에 취해 / 슬슬 잠이 쏟아져요 ..  (엄마 냄새)



  동시 한 줄을 쓰고자 꿈을 꿀 수 있기를 빕니다. 동시 한 줄을 낳을 때까지 사랑을 속삭일 수 있기를 빕니다. 머리로 쓰는 동시가 아니라, 오늘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쓰는 동시가 태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문학으로 짓는 동시가 아니라, 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따사로운 숨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동시가 무럭무럭 자랄 수 있기를 빕니다.


  동시집 《초코파이 자전거》는 꿈을 꾸는 동시가 모인 책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랑을 속삭이려는 넋으로 태어난 동시가 이 책에 모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문학이나 어린이문학이 아닌, 즐거운 시요 노래이자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덮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냄새를 풍기면서 어떤 손길로 다가서는 어버이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여미고 이마를 살살 어루만집니다. 4347.10.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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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회사 쉬겠습니다 2
후지무라 마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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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88



오늘 내 마음은

― 오늘은 회사 쉬겠습니다 2

 후지무라 마리 글·그림

 송수영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3.7.15.



  후지무라 마리 님 만화책 《오늘은 회사 쉬겠습니다》(대원씨아이,2013) 둘째 권을 읽습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두 주인공은 서른세 살과 스물한 살입니다. 가시내는 서른세 살이고, 사내는 스물한 살입니다. 둘 사이에 피어나는 사랑을 아기자기한 이야기로 그리는 만화책입니다. 열두 살이 벌어진 두 사람 사이인 만큼, 만화책에서는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데, 이 만화책을 읽는 내 나이가 마흔 살이고 보니, 열두 살 벌어진 나이는 그닥 대수롭지 않습니다. 살짝 시큰둥합니다. 아마 쉰 살이나 예순 살 나이에 바라보아도 나이는 아무것이 아니라고 느낄 수 있겠지요. 왜냐하면, 한 살 두 살 살고 보면, 열두 살이건 스물네 살이건 대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나이를 놓고 사귀지 않아요. 우리는 오직 마음으로 만나면서 어깨동무를 하거나 사랑을 속삭입니다.



- ‘방 곳곳에 귀여운 소품이 여기저기. 하긴 얼마 전까지 여친이 있었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이런 걸 신경 쓰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고.’ (15쪽)

- ‘예전 여친 같은 걸 신경 쓰면 어쩌자는 거야. 타노쿠라는 나랑은 달라. 그 애는 평범하게 연애를 하며 살아온 사람이라고.’ (17쪽)




  생각해 보셔요. 한 살이 벌어지면 어떠한가요. 두 살은 어떠한가요. 세 살은? 네 살은? 다섯 살은? 한 살씩 찬찬히 더해요. 이렇게 더하고 보면 한 살이 벌어질 때하고 열두 살이 벌어질 때에는 똑같습니다. 스물네 살뿐 아니라 서른여섯 살이 벌어지더라도 똑같아요. 나이는 그저 숫자입니다. 숫자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될 수 있으려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가 되자면 사랑이 피어야 합니다.


  나이는 서로 같지만, 서로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가 있습니다. 마음이 안 맞기 때문입니다. 나이는 나보다 훨씬 위이지만, 이녁한테서 아무것도 못 배울 때가 있습니다. 나이만 위일 뿐 마음이나 생각이 너무 얕거나 좁기 때문입니다. 나이는 나보다 한참 아래이지만, 이녁한테서 크게 배우면서 즐거울 때가 있습니다. 나이만 아래일 뿐 마음이나 생각이 아주 깊거나 넓기 때문입니다.



- “엊그제 일로 아직도 화났어요?” ‘아직도? 아직도라니. 난 네가 그날로 예전 여친 물건 다 정리하고 바로 연락 주지 않을까 해서 어제 온종일 기다렸다고.’ (26쪽)

- ‘타노쿠라마저도 한 순간 잊고 있었어. 이렇게 쉽게 잊혀지다니. 타노쿠라도 이럴 때가 있을까. 그런 건 좀 쓸쓸할 거 같아. 타노쿠라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43쪽)




  만화책 《오늘은 회사 쉬겠습니다》 둘째 권을 읽다가 문득 하나 더 생각합니다. 언제나 집일을 도맡는 내 하루인데, ‘오늘은 밥을 쉬겠습니다’라든지 ‘오늘은 육아를 쉬겠습니다’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일곱 살 네 살 어린 아이들더러, ‘얘들아, 오늘은 아버지가 힘드니, 오늘 우리 모두 밥은 굶자’ 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이런 말은 못 하겠지요. 다만, ‘얘들아, 오늘은 아버지가 힘드니, 바깥에서 밥을 사다가 먹자’ 하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회사는 쉴 수 있습니다. 집일이나 아이키우기는 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도 쉴 수 없습니다. 쉬어 가는 사랑이란 없어요. 언제나 흐르는 사랑이고, 한결같이 따스한 사랑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어깨동무하는 믿음직한 이웃하고도 이와 같아요. 언제나 흐르는 믿음이요, 한결같이 즐거운 만남입니다.



- ‘어느새 내 생활이 180도 달라졌다. 질투하고 상처 받고 상처 주고, 이런 식으로 누군가와 온힘을 다해 마주한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또 쓸쓸하다고 느낀 적도 없었어.’ (51∼52쪽)

- ‘연애라는 건 참 힘들지만, 그래도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마음이 부드러워지는구나.’ (53쪽)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햇살을 맞이합니다. 아침햇살을 바라보면 온몸에 따순 기운이 감돕니다. 사랑스러운 사람과 함께 누리는 하루는 언제나 아침햇살과 같습니다. 믿음직한 사람과 함께 가꾸는 삶은 늘 따순 기운을 북돋웁니다.


  이녁이 나이가 많아서 나한테 넉넉한 언덕이 되지 않습니다. 이녁이 나이가 어려서 나한테 든든한 언덕이 못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 언제나 넉넉합니다. 마음이 좁은 사람이 언제나 좁습니다. 마음이 따스한 사람이 늘 따스하게 웃고 노래합니다. 마음이 차가운 사람이 늘 웃지 못하고 늘 노래하지 못합니다.



- ‘오랜만에 만났더니 눈이 부셔서, 부끄러워서 눈을 못 마주치겠어.’ (61쪽)

- “미안해요. 저 양반이 괜히 이상한 소리만 해서. 하나에가 남자를 집에 데려온 게 오늘이 처음이라, 애 아빠가 좀 흥분한 거 같아요.” (113쪽)



  만화책 《오늘은 회사 쉬겠습니다》 둘째 권 끝자락에 ‘지금 이 순간을 머릿속에 다 새겨두고 싶다(160쪽).’와 같은 속엣말이 흐릅니다. 그렇습니다. 즐거운 오늘 이 하루를 머릿속에 다 새기면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애써 이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즐거운 기운은 뼛속까지 깊이 스며듭니다. 이 즐거운 기운은 언제까지나 나한테 따사로운 숨결로 피어나서 흐릅니다.


  작은 씨앗 같은 사랑이 내 몸에 깃들어 천천히 자랍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씨앗이었을 사랑은 차츰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립니다.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요. 이윽고 열매를 맺고 새로운 씨앗을 맺는 사랑입니다.


  자라고 자라는 사랑입니다. 크고 또 크는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이어지는 두 사람은 언제나 기쁘게 웃겠지요. 4347.10.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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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프고 싶어!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27
프란츠 브란덴베르크 지음, 알리키 브란덴베르크 그림, 이수연 옮김 / 시공주니어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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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38



다 함께 바라볼 곳

― 나도 아프고 싶어!

 알리키 브란덴베르크 그림

 프란츠 브란덴베르크 글

 이수연 옮김

 시공사 펴냄, 1995.3.12.



  아이들과 지내는 어버이는 아픈 날이 있으면 여러모로 고단합니다. 어버이 몸이 아프면 아이한테 밥을 차려서 주기에도 힘들고, 아주 조그마한 일 하나조차 몹시 벅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이가 아닌 어른이 아프면 한결 낫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아픈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훨씬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파서 끙끙거리는 아이를 바라보고 이마를 쓸어넘기다가 문득 눈물을 글썽입니다. 어버이가 아파야지 왜 너희들이 아프니, 하고 생각합니다.


  며칠 아프던 아이들은 곧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납니다. 가을 한복판에 마을 빨래터에서 개구지게 물놀이를 하다가 춥다고 벌벌 떠는 아이들은 잠자리까지 춥다는 말을 입에 달더니, 이튿날 아침이 되니 언제 춥다고 말했느냐는듯이 멀쩡하게 얇은 옷을 입고 훨훨 날면서 땀을 옴팡 쏟습니다.


  아이들과 지내며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아이들이 언제 튼튼하고 언제 아픈가 하고 가만히 헤아립니다. 아이들은 아플 일이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아플 일이 있다면, 자동차를 너무 오래 탔다든지, 시골집을 떠나 도시에서 오래 지냈다든지, 집밥이 아닌 바깥밥을 여러 끼니 먹였다든지, 시끄럽거나 복닥거리는 데에서 너무 오래 데리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어디를 가든 두리번두리번 살핍니다. 이것을 보고 저것을 봅니다. 아이들은 여느 때에 스스로 보고픈 것만 보면서 마음껏 뛰노는데, 도시처럼 복닥거리는 데에 가면 그만 넋을 잃고 이것저것 홀려서 바라보느라 바빠요. 이때에 아이들은 기운을 잃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걷고 달리고 뒹굴고 기고 놀기를 바랍니다. 자가용을 태워 준대서 아이들한테 반갑지 않습니다. 살짝 자동차를 얻어타고 조금 달리면 괜찮지만, 몇 분만 지나도 아이들은 좀이 쑤십니다. 아이들은 아무리 멀다 싶은 길이어도 스스로 걷고 싶습니다. 아이 스스로 다리가 아파서 지칠 때까지 걷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온몸을 움직이면서 놀고 싶거든요.





.. 엘리자베스는 투덜거렸습니다. “이건 불공평해! 엄마가 오빠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시는 동안, 난 일어나서 옷을 입어야 하잖아.” ..  (10쪽)



  놀지 못하는 아이들이 아픕니다. 햇볕을 먹지 못한 아이들이 아픕니다. 싱그러이 흐르는 바람을 마시지 못한 아이들이 아픕니다. 맑게 흐르는 물을 마시지 못한 아이들이 아픕니다. 과자를 많이 먹어서 아플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뛰놀지 못한 터전이 아이한테 가장 나쁩니다. 햇볕을 쬐지 못하고, 바람을 쐬지 못하며, 냇물과 빗물을 누리지 못할 때에 아이한테 참으로 나빠요.


  그러니까, 우리 어른들은 아이한테 무엇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살면서 자랄 때에 튼튼한가를 제대로 바라보고 느껴서 깨달아야 합니다.


  예방주사는 몸이 잘못되지 않도록 지켜 주지 않습니다. 몸이 잘못되지 않으려면, 아이들은 온몸을 마음껏 움직이면서 날마다 땀을 몇 바가지씩 쏟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옷을 여러 벌 갈아입을 만큼 뛰놀아야 합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기에 아이들이 아파요. 싱그러이 흐르는 바람이 없으니 아이들이 아파요. 시멘트 교실에 아이들을 가두고는 형광등 불을 훤한 낮에도 켜니까 아이들이 아파요.


  책으로 지식을 배워야 할 아이들이 아니라, 온몸 구석구석 튼튼하게 자라면서 새로운 삶을 누려야 할 아이들입니다. 학교를 다니며 교과서 지식으로 시험공부를 잘 해야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동무와 사이좋게 어울리면서 어디이든 거리끼지 않고 뛰놀 수 있어야 하는 아이들입니다.



.. 엘리자베스도 아팠습니다. 엄마는 엘리자베스에게 음식을 먹여 주셨습니다. 아빠는 열이 내리라고 차가운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 주셨습니다 ..  (16∼17쪽)





  알리키 브란덴베르크 님이 그림을 그리고, 프란츠 브란덴베르크 님이 글을 쓴 《나도 아프고 싶어!》(시공사,1995)를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오빠가 먼저 몸이 아파 눕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오빠한테 달라붙어 보살피고 도와줍니다. 동생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시샘을 합니다. 오빠가 몸져누운 동안 온갖 집일과 심부름을 도맡아야 합니다. 이러던 어느 날 동생이 앓아눕습니다. 오빠는 스스럼없이 집일과 심부름을 도맡을 뿐 아니라, 동생이 심심해 하지 않도록 놀아 줍니다.



.. 엘리자베스는 투덜거렸습니다. “이건 불공평해.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어서 오빠는 정말 좋겠다.”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를 위로했습니다. “네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 ..  (22쪽)



  오빠는 오직 한 가지를 바랍니다. 동생이 아프지 않고 튼튼하게 놀고 어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생도 마음속으로 오직 한 가지만 바랐지 싶어요. 오빠하고도 어머니와 아버지하고도, 이모와 고모하고도, 할머니와 할아버지하고도, 모두 모여 즐겁게 웃고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랐지 싶어요.


  아프면 어떻게 될까요? 아프면 아픕니다. 아프면 아플 뿐입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픈 사람을 보살핍니다. 아픈 사람은 가만히 누워서 몸을 다스립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이것저것 맡아서 즐겁게 살림을 가꿉니다. 아픈 사람이 이윽고 훌훌 털고 일어나면 빙그레 웃으면서 맞이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동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새 마음과 새 몸이 됩니다. 아프고 나서야 깨달았다고 할 수 있지만, 오빠 마음이 되고, 어머니와 아버지 마음이 된 뒤, 비로소 한 가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즐거움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사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삶을 바라보고, 웃음과 노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4347.10.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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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수의 정원 1
사노 미오코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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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87



마음을 지키는 이웃

― 귀수의 정원 1

 사노 미오코 글·그림

 정효진 옮김

 서울문화사 펴냄, 2011.9.30.



  귀를 기울여요. 이웃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요. 이웃은 옆집에 사는 사람일 수 있고, 풀밭에서 노래하는 벌레일 수 있습니다. 이웃은 옆마을에서 흙을 일구는 할매일 수 있고, 밀양과 청도에서 송전탑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할배일 수 있으며, 하늘을 흐르는 구름일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은 누구일까요? 내 이웃은 무엇을 할까요? 내 이웃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까요? 내 이웃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꿈을 꾸며, 어떤 사랑을 가꾸고 싶을까요?



- ‘이 세상은 의외로 재미있구나.’ (4쪽)

- “ 생사의 문턱은 몇 번이나 넘나들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해서, 이 세상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그리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그런 마음을 가져서 이 저택에 간단히 들어온 게야.” (17쪽)




  사노 미오코 님이 그린 만화책 《귀수의 정원》(서울문화사,2011) 첫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에는 ‘귀수’가 나오고 ‘정원’이 나옵니다. 사람이 아닌 넋이 나오고 온갖 풀과 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뜰이 나옵니다.


  귀수는 귀수끼리 이웃이면서 벗님입니다. 사람은 사람끼리 이웃이면서 벗님입니다. 그런데, 귀수 가운데에는 풀과 나무를 이웃과 벗님으로 삼는 넋이 있습니다. 사람 가운데에도 풀과 나무를 이웃과 벗님으로 삼는 숨결이 있습니다. 여기에, 귀수 가운데 사람을 이웃과 벗님으로 여기는 넋이 있고, 사람 가운데 귀수를 따사로운 이웃과 벗님으로 생각하는 숨결이 있습니다.



- “나는 백화초목을 보살피는 능력밖에 없는 운무의 정령. 능력이라곤 이 아담한 정원을 윤택하게 만드는 게 고작. 허나, 수고를 아끼워 않고 자비를 베풀면 반드시 윤택하게 자라나지. 천계도, 인간계도 마찬가지야. 하늘의 마음은 작은 것 안에서 더더욱 잘 나타나는 법이다.” (27쪽)

- “어떤 모습이건 나는 유일하다. 이 세상이 이루어진 이후로 쭉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28쪽)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지만,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짓을 누구보다 잘 알아채기도 합니다. 사람인 탓에 사람을 가엾게 여기거나 사랑하기도 하지만, 사람인 탓에 사람이 싫거나 미울 수 있어요.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전쟁무기를 만드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군인이 되어 이웃을 죽이거나 해코지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들도 우리 이웃이 될까요.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든지 전쟁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도 우리한테 이웃이나 벗님이 될 만할까요.


  어떤 아이도 전쟁을 생각하며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도 전쟁무기를 손에 쥐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지구별에 자꾸 전쟁을 터뜨립니다. 어른들은 지구별에 자꾸 전쟁무기를 늘립니다. 아이들한테 무엇을 물려주려는 생각일까요?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려는 생각일까요?



- “잡초가 이런 데까지 나다니. 뽑아 버리자.” “잠깐, 무라이. 그대로 둬. 그건 잡초가 아니라 이삭여뀌라는 풀꽃이야.” (45쪽)

- “나는 인간을 좋아한다, 카후.” “이, 인간 말씀이신가요?” “그래, 인간이다. 숭배받는 걸 당연타 여기는 천계의 신들보다 말이다.” (67쪽)

- “꽃이야 매년 피는 것! 꺾어도 무에 하나 아까울 것 없는 목숨이다, 꽃도 사람도!” “올해의 꽃과 내년의 꽃은 달라. 인간도, 아무리 환생을 반복하는 중생이라 해도 그 생은 단 한 번뿐, 꺾어도 아깝지 않은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소.” (80쪽)




  만화책 《귀수의 정원》을 차근차근 되읽습니다. 사람이라는 껍데기를 썼어도 사람답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귀수라는 옷을 입었어도 사람다운 이들이 있습니다. 풀과 나무라는 껍데기를 썼지만 사람다운 숨결이 가득하기도 하고, 사람이라는 옷을 뒤집어쓰기만 할 뿐, 아무것도 안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겉도 속도 사람이면서 아름다운 사랑으로 넋을 가꾸려는 이들이 있어요.


  우리가 나아갈 길은 어디일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꿀 삶은 어떠할 때에 아름다울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나눌 사랑은 어떻게 보듬으면서 어깨동무할 적에 서로 기쁘게 웃을 만할까 생각합니다.


  참말 생각할 노릇입니다. 내 아이를 돌보면서 아이한테 일삯을 달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내 아이한테 밥 한 그릇 차려 주면서 밥값을 내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웃이나 동무한테 밥 한 그릇 차려 준 뒤에 밥값 내놓으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한테서 밥값을 받을까요? 우리는 누구한테서 ‘돌봄 일삯’을 받을까요?



- “그 소나무는 그리지 마! 카후! 마을사람들 모두 ‘객사 소나무’라고 부른다고. 얼마 전에도 노인이 죽었대. 불길한 소나무야.” “그런 말은 소나무에게 실례잖아.” (117∼118쪽)

- “질투도 소중한 마음의 일부. 연모하는 마음 뒤에서 숨죽인 채 살아가는 벌레인 게지요.” (168쪽)




  한국 사회에서는 흔히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요. 참으로 그렇지요. 그러면,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인데, 우리는 서로서로 어떤 말을 주고받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어떻게 돌보거나 아끼는지 궁금합니다.


  꼭 돈이 있어야 할까요? 누구도 누구한테도 돈을 주거나 받지 않으면서 삶을 가꿀 수 있는 노릇이 아닌가 궁금합니다. 돈이란 없이 오직 사랑으로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면서 삶을 북돋울 수 있는 노릇이 아닌가 궁금합니다.


  내 아이한테 밥값이나 일삯을 받지 않듯이, 내 이웃과 동무한테 밥값이나 일삯을 바라지 않듯이, 우리가 서로한테 돈을 바라지 않으면서 사랑스레 살아간다면, 이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길을 열 수 있으리라 느껴요. 평등도 민주도 평화도 통일도 자유도 바로 서로를 사랑하는 자리에서 태어나리라 느껴요.



- “아무려면 어떤가.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하고 있는데.” (178쪽)

- “그 소나무를 그리자. 그 가지 하나하나, 솔잎 한 가닥 한 가닥까지. 이 그림을 완성할 즈음, 형형색색의 봄이 찾아오리라.” (181∼182쪽)



  그림을 그립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그림쟁이는 이녁대로 용을 그립니다. 나는 나대로 내 마음을 지키는 살가운 이웃을 그립니다. 내가 내 이웃을 사랑스레 아끼고 보살필 수 있는 길을 천천히 그립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나를 아끼고 돌보면서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길을 가만히 그립니다. 4347.10.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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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초 편지 - 출간10주년 개정판 야생초 편지 1
황대권 글.그림 / 도솔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6



풀 한 포기와 나누는 사랑

― 야생초 편지

 황대권 글

 도솔 펴냄, 2002.10.1.



  어제 낮에 집부터 면소재지까지 걸어갑니다. 2킬로미터 길이니 가깝습니다. 잰걸음이라면 삼십 분이면 갈 만합니다. 그러나 굳이 서두르지 않습니다. 천천히 걷습니다. 가을내음을 맡습니다. 아무도 들에 없기도 하지만, 들길을 걸어가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에 맞춰 살랑살랑 춤을 춥니다.


  깊은 가을로 접어들기에 살그마니 꽃을 피우는 환삼덩굴을 봅니다. 환삼덩굴꽃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새삼스레 들여다봅니다. 이제껏 나물로 신나게 뜯어먹기만 했을 뿐, 정작 환삼덩굴꽃은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쑥꽃을 본 지 몇 해 안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우리 보금자리 한켠에 쑥대를 그대로 두었기에 비로소 쑥꽃을 볼 수 있었어요.


  햇볕은 알맞게 따스합니다. 바람은 알맞게 시원합니다. 시골 논둑길이 예전처럼 흙길이라면 훨씬 싱그럽겠지만, 시멘트 논둑길도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시골마을이 예전처럼 농약 없는 들길이라면 한결 아름답겠지만, 비가 한 차례 지나간 들길인 터라 농약내음은 얼마 안 납니다.



.. 오늘 비디오를 보면서 영화로도 사람을 얼마든지 고문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주윤발이나 유덕화, 왕조현 등과 같은 톱스타들이 그토록 저질영화에 무분별하게 출연한다는 사실이다 … 교도소가 왜 이리 삭막해지는지 모르겠어. 풀 한 포기 없이 삭막해야만 잘 돌아간다고 여기는 건가? 심지어 구 척 담장 밑에 한 줄로 쪼로니 피어난 제비꽃마저 깨끗이 뽑아 버리니 말이야 ..  (27, 57쪽)



  환삼덩굴꽃을 한참 바라보는데 풀뱀 한 마리가 옆으로 슬슬 지나갑니다. 풀꽃을 보다가 풀뱀을 봅니다. 풀뱀은 나를 보았을가요. 풀뱀은 내 발자국이나 몸짓을 느꼈을까요.


  뱀은 사람을 무서워 합니다. 뱀은 사람이 무섭습니다. 사람은 옛날부터 뱀을 잡아서 먹었고, 뱀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뱀을 끔찍하게 잡거나 죽입니다. 참말 뱀은 깃들 곳이 없습니다. 논밭에 하도 농약을 쳐대니 개구리나 도룡뇽뿐 아니라 작은 풀짐승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뱀은 먹이가 자꾸 사라져서 괴롭습니다. 뱀은 지구별에서 사라져야 할까요? 뱀이 지구별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논둑길은 조용합니다. 그러나 저 먼 큰길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는 퍽 멀리까지 울립니다. 몇 킬로미터쯤 떨어져야 자동차 소리를 안 들을 만할까 헤아려 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지 돌아봅니다. 자동차 바퀴소리가 우리 삶을 살찌울는지, 풀벌레와 멧새 노랫소리가 우리 삶을 북돋울는지 가만히 생각합니다.


  어떤 소리를 들어야 할까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방송과 인터넷에서 흐르는 대중노래가 우리 마음을 살찌울 만한가요. 사람들은 저마다 이녁 삶에 맞추어 스스로 노래를 지어서 부를 수 없는가요. 먼먼 옛날 누구나 일을 하며 노래를 불렀듯이, 놀이를 하며 노래를 즐겼듯이, 일노래와 놀이노래는 이제 어디로 갔을까요. 삶을 가꾸는 삶노래는 어디에 있을까요.



.. 우리는 이미 박통 시절에 이런 생태적 재앙을 겪었다. 바로 통일벼에 의한 싹쓸이 경작이 그것이지. 이 통일벼 심기는 새마을 운동과 결합되어 생태적 재앙뿐 아니라 우리 농촌에 문화적 재앙까지 몰고 왔다 … 우리 산야에 자라나는 풀꽃들의 이름은 참으로 예쁘고 친근한 것들이 많다. 그 많은 풀들에 일일이 그런 예쁜 이름을 붙여 준 우리 민중들의 슬기에 감사드리고 싶다 ..  (106, 114쪽)



  황대권 님이 교도소에 갇혀서 지내야 하던 때에 쓴 짤막한 글을 모아서 엮은 《야생초 편지》(도솔,2002)를 읽습니다. 2002년에 처음 나온 이 책은 2012년에 새롭게 옷을 입고 다시 나왔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은 책에 붙은 띠종이를 보면, “야생초는 단순한 풀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여는 상징입니다”와 같은 글월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기울입니다. “단순한 풀”은 무엇이고 “새로운 문명을 여는 야생초”는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을 펼칩니다. ‘야생초(野生草)’는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서 자라는 풀”이라 합니다. ‘야초(野草)’는 “들에 저절로 나는 풀”이라 합니다. ‘산초(山草)’는 “산에 나는 풀”이라 합니다. ‘잡초(雜草)’는 “= 잡풀”이라 합니다. 그러면 ‘풀’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은 ‘풀’을 “초본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풀이합니다.


  요즈음 사회에서는 이런저런 한자말을 쓰는데, 이런저런 한자말이 이 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습니다. 1950년대 시골에서 ‘야생초·야초·산초·잡초’ 같은 말을 썼을까요? 1900년대 시골이나 1800년대 시골이나 1500년대 시골이나 1000년대 시골이나 500년대 시골에서 이런 한자말을 썼을까요? 기원전 시골이나 단군 무렵 시골에서 이런 한자말을 썼을까요?


  턱없는 소리입니다. 고작 쉰 해 즈음 앞서만 해도 이런 한자말을 쓸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지난날 시골사람은 누구나 ‘풀·들풀·멧풀·김(지심)’이라는 한국말을 썼어요. 여기에 ‘풀·나물·남새·푸성귀’라는 한국말을 썼습니다.


  2012년에 새로운 옷을 입고 나오는 《야생초 편지》라 한다면, “풀 편지”나 “들풀 편지”처럼 제대로 된 이름으로 고쳐서 제대로 내놓을 수 있기를 바랐는데, 글쓴이와 출판사 모두 풀이름 하나 제대로 살피지 못합니다.



.. 이담에 내가 살 집의 마당은 아마도 야생초 전시관이 될 거다. 어디 갔다 올 때마다 하나씩은 파올 테니까. 그러자면 마당을 아주 넓게 잡아야 하겠지, 그렇게 십여 년 가꾸다 보면 아마 자식놈은 꽃만 보고도 책 한 권 분량의 야생초 이름 정도는 줄줄 외워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집안엔 늘 야생초차 향기가 가득할 것이구 … 안동교도소 청소부는 야생초에게뿐만 아니라 내게도 천적과 같은 존재이다. 도대체가 풀이 좀 자라서 뜯어먹을 만하면 어느샌가 와서 엎어 버리니 ..  (155, 166쪽)



  풀이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풀이 없으니 사람이 미칩니다. 풀이 없기에 사람이 싸우거나 다툽니다.


  우리가 먹는 밥이란, 쌀알이고, 쌀알이란, 벼이며, 벼란, 풀이요, 쌀알이란, 풀알, 곧 풀 열매입니다. 풀 열매인 풀알이 없으면 사람은 모두 굶을 뿐 아니라 죽습니다. 밥으로도 풀알을 먹지만, 사람이 먹는 돼지이든 소이든 닭이든 풀을 밥이나 모이로 삼아서 먹고 자라요. 예부터 한겨레가 먹은 고기란, 그냥 살점이나 살덩이가 아니라 ‘풀을 먹고 자란 고기’입니다. 고깃덩이를 먹어도 고기가 아닌 ‘풀로 이룬 살점’을 먹은 셈입니다.


  풀이 있기에 나무가 살 수 있습니다. 나무가 있기에 둘레에서 풀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숲은 풀과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우거진 곳입니다. 풀과 나무가 어우러져 숲이 될 때에, 사람들은 숲에서 나무를 얻어 집을 짓고 장작을 패며 다리를 놓습니다. 풀에서 실을 얻어 옷을 짓습니다. 풀이 없으면 밥도 못 먹지만 옷도 못 입습니다. 풀이 있기에 싱그럽게 바람이 붑니다. 나무뿐 아니라 풀이 지구별 온누리에 싱그러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온누리에 돋는 풀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썼어요. 첫째, 먹는 풀입니다. 둘째, 옷을 짓는 풀입니다. 셋째, 지붕이나 울타리로 삼는 풀입니다. 넷째, 약으로 쓰는 풀입니다. 다섯째, 그대로 지켜보면서 푸른 바람을 얻도록 해 주는 풀입니다.



.. 문명이란 그 풀 냄새를 점차로 지워 없앤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야채가 그것이지. 야생의 풀 냄새를 제거하고 인간의 미각에 맞추어 특정한 맛만을 선택하여 육종, 발전시킨 것이 오늘의 야채이다 … 어제 이감을 오는데 대구 시내에 들어서서 다시 화원읍으로 빠지는 길이 마침 퇴근 시간과 겹쳐서 어찌나 밀리던지. 호송차의 창 틈 사이로 간신히 보는 풍경이었지만, 저 엄청난 차와 매연과 시멘트덩이 속에서 어찌들 살아가고 있는지. 참으로 나로서는 엄두가 나질 않는다. 괴물이 아니고서야 저런 환경 속에서 어찌 사나 싶었다 ..  (176, 194쪽)



  《야생초 편지》라는 책에 나오듯이 “풀내음을 자꾸 지워서 없애는 오늘날 사회요 정치이고 문화이며 교육이자 과학”입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풀을 끔찍하게 미워할 뿐 아니라, 없애느라 바쁩니다. 왜 풀밭에 농약을 칠까요? 곡식이나 남새를 망가뜨리는 풀일까요? 아니에요. 나물을 뜯을 줄 모르고 약풀을 건사할 줄 모르니 함부로 농약을 칩니다. 요즈음 시골에서 모시풀을 함부로 베어 없애거나 태워 없애는 까닭은, 지난날처럼 모시에서 실을 얻어 모시옷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골에 모시풀이 많이 돋는 까닭은 지난날 어느 시골에서나 모시풀에서 실을 얻어 옷을 지었기 때문이에요.


  풀을 모른다면 시골에서 살 수 없습니다. 풀을 아끼지 않는다면 농사를 짓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풀을 알려 하지 않는다면 인문학 지식이 아무리 넘쳐도 바보스러운 삶으로 나아가고 맙니다. 풀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면 채식도 육식도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풀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구별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풀 한 포기에서 평화가 자랍니다. 모든 꽃은 풀줄기에 달립니다. 풀씨에서 풀뿌리가 내리고, 풀씨에서 풀줄기가 오르며, 풀씨에서 풀잎이 돋아야, 비로소 꽃망울이 맺히고 꽃봉오리가 터져서 꽃잎이 벌어집니다. 4347.10.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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