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아가야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81
알리키 브란덴베르크 글, 그림 | 김명숙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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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42



아이와 함께 자라는 어버이

― 안녕, 아가야

 알리키 브란덴베르크 글·그림

 김명숙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1998.2.20.



  아이를 재울 적에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아무 말 없이 가슴을 토닥이기도 합니다. 바깥마실을 하며 아이를 재워야 할 적에는 살포시 무릎에 누이거나 가슴으로 안거나 등에 업습니다. 두 아이를 한꺼번에 재워야 하면 두 아이한테 어깨를 한쪽씩 내주기도 하고, 한손에 한 아이씩 안기도 합니다.


  아이와 나란히 누워서 노래를 부르면 언제나 가장 보드라우면서 따사로운 목소리로 바뀝니다. 아이한테 들려주는 노래는 늘 나한테 돌아오는 노래가 되고, 따사로우면서 보드라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아이들 마음뿐 아니라 내 마음을 촉촉히 적십니다.


  왼손은 작은아이한테 뻗고, 오른손은 큰아이한테 뻗습니다. 두 손으로 두 아이를 토닥입니다. 늦게까지 잠을 안 자려던 작은아이는 토닥토닥 부드럽게 다독이는 손길을 받으면서 이내 고요합니다. 새근새근 가늘게 숨소리를 내면서 꿈나라로 갑니다. 동생 못지않게 더 잠을 미루려던 큰아이도 살그마니 숨소리를 고르면서 꿈나라로 갑니다. 두 아이한테 한 손씩 내밀어 토닥이다 보면, 내 손에서는 어느새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옵니다. 아이를 모두 재우고 나서 두 손을 내 가슴에 대 보고, 내 뺨에 대 보며, 내 머리에 대 봅니다. 즐거우면서 상냥한 기운이 흐릅니다.



.. 우리는 네가 태어나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  (4쪽)




  어느 어버이라도 이녁 아이를 잘 재웁니다. 다만, 아직 서툴거나 어설플 수 있습니다. 아이도 모두 알아요. 아직 서툴거나 어설픈 어버이를 잘 압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때때로 빽빽거리면서 울곤 해요. 좀 제대로 하라는 뜻일 테고, 좀 제대로 알아들으라는 뜻일 텐데, 서툴거나 어설픈 어버이는 이녁 삶도 서툴거나 어설픕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아이하고 사랑을 오순도순 나눌 줄 알 만큼 거듭나는 어버이는 스스로 하는 일을 늘 씩씩하고 힘차게 즐깁니다. 아이를 돌보는 살림이 서툴거나 어설프다면, 집안에서뿐 아니라 집밖에서도 서툴거나 어슬프기 마련입니다.


  아이가 찾아오는 일은 둘도 없는 사랑입니다. 아이한테 물려줄 사랑뿐 아니라, 내가 나를 아끼는 사랑입니다. 어버이가 이녁 마음밭에 스스로 사랑씨앗을 심을 때라야 비로소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줍니다. 아이를 쏙 낳은 뒤에 끝나는 삶이 아니라, 이제 막 태어난 아이와 앞으로 걸어갈 기나긴 나날이 고스란히 사랑입니다.


  아이는 어버이가 스스로 어느 대목에서 서툴거나 어설펐는지 찬찬히 알려줍니다. 어버이는 허둥지둥 땀을 빼다가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 열 해 스무 해 흐르면서 차근차근 배우거나 깨닫습니다. 삶을 배우고 사랑을 깨닫습니다.




.. 따뜻하기만을 바라겠지 ..  (11쪽)



  알리키 브란덴베르크 님이 빚은 그림책 《안녕, 아가야》(시공주니어,1998)를 읽습니다. 우리 집에 곧 찾아올 셋째를 그리면서 그림책을 읽습니다. 일곱 살 첫째 아이는 혼자 씩씩하게 그림책을 읽습니다. 참말 첫째 아이는 이제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그림책 읽어 달라 말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읽습니다. 둘째 아이는 누나가 읽는 소리를 옆에서 듣습니다.


  첫째 아이가 어릴 적을 돌아봅니다. 첫째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느라 그야말로 진땀을 빼던 일이 아련합니다. 첫째 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진땀을 빼던 지난날을 알까요. 떠올릴까요. 알거나 떠올리지는 못해도 온몸에 그득그득 아로새겼겠지요. 즐거움을 새기고 사랑을 심었겠지요.




.. 태어났을 때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들에 말이야 ..  (22쪽)



  아기가 어버이한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따뜻함, 그러니까, 사랑입니다. 어버이가 아기한테 나누어 주고 싶은 것은 오로지 하나, 따스함, 다시 말하자면, 사랑입니다.


  아이한테 어떤 밥을 먹일 때에 서로 즐거울까요? 아이와 어떤 놀이를 누릴 때에 함께 즐거울까요?


  아이가 자라고, 어른이 자랍니다. 어른이 자라며, 아이가 자랍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늘 새롭게 배웁니다. 어른들도 아이와 나란히 날마다 늘 새롭게 배웁니다. 새롭게 배우기에 어린이요, 어른입니다. 새롭게 자라기에 어른이며, 어린이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배울 때에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아직 서툴거나 어설프다면 아직 덜 배웠거나 아직 제대로 못 배웠다는 뜻입니다.


  다 같이 마음을 열어요. 우리 모두 마음을 활짝 열고 배워요. 아이를 배우고 사람을 배우면서 삶과 사랑을 배워요. 함께 어깨동무를 하면서 자라요. 4347.10.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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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카메라 - 카메라 우체부 김정화의 해피 프로젝트, 2014년 대한출판문화협회 올해의 청소년 도서
김정화 지음 / 샨티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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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94



사진기 아닌 마음이 여행한다

― 여행하는 카메라

 김정화 글

 샨티 펴냄, 2014.9.25.



  사진기가 세 나라를 돕니다. 김정화 님은 디지털사진기를 여러 대 마련해서 맨 먼저 베트남에 찾아갑니다. 베트남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사진기를 건네어 스스로 제 삶을 사진으로 담도록 이끌고는, 이 사진기를 가지고 미얀마(또는 버마)로 넘어갑니다. 미얀마에서 비슷한 또래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사진기를 건네어 그 나라에서 그곳 아이들이 마주하는 이웃과 삶을 사진으로 담도록 이끕니다. 이런 뒤, 몽골로 넘어가서 몽골에서 살아가는 어린이와 푸름이가 누리는 삶과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도록 이끕니다.


  세 나라를 돈 사진기에 깃든 이야기가 흐르는 《여행하는 카메라》(샨티,2014)를 읽습니다. 김정화 님은 ‘사진기 여행’을 하면서 겪은 일과 느낀 생각을 차근차근 적습니다. “카메라를 손에 쥐자 베트남 아이들이 제일 먼저, 제일 많이 찍은 사진은 다양한 각도의 ‘자아도취적’ 셀카였다(23쪽).” 하고 이야기하는데, 아이들은 ‘내 모습’이 여러모로 궁금했구나 싶습니다. 또는, ‘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서 보여주고 싶은가 봅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제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만으로도 이야기를 건넵니다. 이런 각도에서 찍고 저런 각도에서 찍든 그렇지요. 나라와 겨레마다 생김새가 다른 사람입니다. 생김새뿐 아니라 옷차림이 다릅니다. 옷차림뿐 아니라 머리카락 모양이 다릅니다. 이런 사진이 ‘자아도취적’ 사진이든 아니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웃나라 동무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보다 ‘내 모습’이라는 뜻이로구나 싶어요.


  왜 그렇잖습니까. 편지로 사귀는 벗은 으레 ‘네 사진을 보내 주렴’ 하고 바랍니다. 얼굴 사진조차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모습으로 찍은 사진을 바랍니다. 같은 사람 사진이지만 새롭게 찍어서 보내면 새삼스레 반갑습니다. 베트남 아이들이 ‘내 모습’을 수없이 찍었다면, 참으로 아이다운 마음이지 싶어요.


  그러니까, 사진을 찍을 때에는 사진을 생각하면 됩니다. 김정화 님은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이냐 하는 질문에는 정답이라는 게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찍는 사람의 느낌이 전달되는 사진, 이야기가 상상되는 그런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한다(34쪽).” 하고 말하는데, 베트남 아이들이 ‘내 모습’을 잔뜩 찍었어도, 이러한 사진에는 이러한 사진대로 이야기가 깃들기에, 이러한 사진을 받는 이웃 미얀마(또는 버마) 아이들은 이웃나라 동무들 살림살이와 하루를 읽을 수 있습니다.


  《여행하는 카메라》에 나오는 아이들 사진은 “자세히 보니 아이들이 직접 찍은 사진들에서는 피사체의 표정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웠다(40쪽).”고 합니다. 아무렴, 그렇겠지요. 아이들은 어디에서 누구를 사진으로 찍었을까요? 아이들은 늘 함께 지내는 한집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고, 이웃집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가까이하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더없이 자연스럽고 사랑스레 찍을밖에 없습니다.


  제아무리 빼어난 사진가들이 베트남이나 미얀마(또는 버마)나 몽골로 찾아가서 다큐사진을 찍더라도 아이들 사진처럼 찍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빼어난 사진가는 ‘이웃이나 동무나 한집 사람’을 찍는 사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내 집 사람들이나 내 이웃이나 동무를 사진으로 찍는다면 아주 자연스러우면서 사랑스럽겠지요. 누구나 스스로 가장 가깝고 살가운 이웃을 사진으로 찍으면 아주 훌륭하도록 아름답기 마련입니다.


  사진찍기는 ‘마음찍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음올 찍는 일이 사진찍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진찍기는 ‘이야기찍기’요 ‘노래찍기’가 되기도 할 테지요. 내가 이웃과 함께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찍고, 내가 오늘 하루 새롭게 부르는 노래를 찍습니다.


  김정화 님은 세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지만, 아직 세 나라 삶을 읽지 못합니다. “미얀마 사람들에게 나눔은 일상이었다. 그래서 카메라도 나눠 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그런 말을 하니 혼란이 왔던 것이다(68쪽).”와 같은 일을 겪습니다. 그러나, 세 나라 삶을 아직 덜 읽었기에 잘못은 아닙니다. 아직 덜 읽었으니 세 나라 아이들은 저희 삶을 찬찬히 알려주거나 보여줍니다. 세 나라 삶을 읽는 몫은 오로지 김정화 님한테 있습니다. 미리 헤아리든, 그 나라에 가서 찬찬히 오래 머물면서 온몸으로 받아들이든, 스스로 익히고 살필 노릇입니다.


  세 나라 삶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껴안는다면 한결 깊고 넓게 바라봅니다. 한국에서도 그래요. 밀양 송전탑 사람들을 이웃으로 마주하면서 밀양에서 석 달을 살거나 세 해를 살아 보셔요. 사흘만 머물거나 세 시간만 지내다가 떠나 보셔요. 석 달과 세 해와 사흘과 세 시간은 사뭇 다르겠지요. 얼마나 머물면서 함께 하거나 지켜보느냐에 따라 내가 보고 느끼면서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만큼 내가 찍을 수 있는 사진이 달라질 테고, 그만큼 내가 읽어서 깨달을 이야기가 달라질 테지요.


  김정화 님이 엮은 책은 《여행하는 카메라》입니다. 사진기 하나를 여러 나라로 실어 나르면서 여러 나라 아이들이 새롭게 만나도록 다리를 놓는 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을 곰곰이 읽어 보면, 여러 나라 삶과 사람과 이야기를 아직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이웃을 새롭게 읽거나 제대로 마주하는 ‘이웃 만남’이 되리라 느낍니다. 이를테면 “믿기지가 않아서 정말 몽골 아이들은 네 나이에 빨래도 직접 하느냐고 물었더니 함에르덴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도리어 의아해 한다(128쪽).” 하고 읊는 대목이 있는데, 오늘날 몽골 아이들이나 베트남 아이들뿐 아니라, 얼마 앞서까지 한국 아이들도 열 살 언저리에 집일을 나누어 맡았습니다. 열 살 어린이도 풀을 뜯어서 소를 먹였고, 열 살 어린이도 빨래와 걸레질을 할 줄 알았습니다. 일본에서도 《오싱》이라는 작품이 아니어도 고작 일곱 살 어린이가 밥짓기를 할 줄 알았으며, 집일을 꽤 맡았으며, 동생도 돌보았습니다.


  열 살 어린이는 학교에 가서 학교 공부만 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왜 학교 공부만 해야 하겠습니까. 아이들은 삶을 누려야 합니다. 학교에서 배울 것은 배우되, 집과 마을에서는 집살림과 마을살림을 함께 해야지요. 이것이 삶이니까요.


  김정화 님은 ‘여행하는 카메라’라는 일을 꾀하면서 《여행하는 카메라》라는 책도 내놓습니다만, 처음 품은 뜻은 “2차 때에 내가 하려는 사적인 실험 중의 하나가 사진 치료이다. 이런 질문들은 투사적 사진 치료의 기법이다(236쪽).” 하고 밝힙니다. 무엇을 치료하려고 ‘사진 치료’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사진으로도 얼마든지 마음을 달래거나 다독일 수 있습니다. 그림으로도 글로도 말로도 노래로도 춤으로도 밥 한 그릇으로도 우리는 언제나 마음을 달래거나 다독일 수 있어요.


  ‘투사적 사진 치료’처럼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그저 사진기 하나로 ‘사진놀이’를 할 뿐입니다. 애써 ‘치료’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놀고 스스로 일하면서 삶을 가꿉니다. 삶을 가꾸면 ‘치료’는 저절로 어느새 이룹니다. 따로 ‘치료’를 생각할 일이란 없다고 느껴요. 그저 ‘놀이’로 누리고, ‘삶’으로 맞이하면 됩니다.


  베트남과 미얀마(또는 버마)와 몽골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김정화’라고 하는 사람을 이웃이나 동무로 여겨서 받아들입니다. ‘김정화’라고 하는 사람이 저희를 돕는다든지 무엇인가 선물로 주려고 찾아오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홀가분하게 놀러오기를 바랍니다. 그저 이웃과 동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과 동무가 되자면, 돈이나 이름이나 힘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나 자동차가 있어야 이웃이나 동무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어 사귀면 이웃이나 동무가 됩니다.


  아이들은 사진놀이를 만나면서 재미있게 놀고, 재미있게 놀면서 천천히 삶을 새롭게 눈뜹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사진놀이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소꿉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웃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행하는 사진기’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여행하는 고무줄’이 되어도 됩니다. 나라마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모양새가 살짝 다르지만 꽤 비슷합니다. 한국에서 날아온 고무줄을 베트남 아이들이 놀고, 미얀마(또는 버마) 아이들이 놀다가, 몽골 아이들이 놀 수 있게 이어도 재미있습니다. 여러 나라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나서 느낀 이야기를 글로 쓰도록 이끌 수 있어요.


  ‘여행하는 고무줄’나 ‘여행하는 소꿉’을 꾀한다면, 굳이 사람이 징검돌이 되어 나르지 않아도 됩니다. 편지봉투에 고무줄이나 소꿉을 넣어서 보내도 돼요. 돌고 돌고 또 돌면서 함께 나누는 삶을 생각하고, 지구별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사랑을 돌아봅니다.


  사진기 아닌 마음이 여행을 합니다. 사진기를 빌어 마음을 한결 넓게 열 수 있기도 하지만, 사진기 아닌 나무젓가락으로도, 고무줄로도, 돌멩이 하나로도, 소꿉으로도, 나무조각으로도, 그림 한 점이나 연필 한 자루로도 마음을 여는 나들이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행하는 사진기’에 한결같이 따순 사랑이 감돌기를 바랍니다. 4347.10.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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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 11
강경옥 글.그림 / 팝툰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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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393



삶과 죽음 사이

― 설희 11

 강경옥 글

 팝툰 펴냄, 2014.9.29.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죽지 않았으니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죽습니다. 살지 않으니 죽습니다. 그런데, 산 목숨으로 오늘을 맞이하지만, 산 목숨답게 하루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제 막 숨을 거두었으나 모든 것을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즐겁게 새로운 곳으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산 목숨일 때에 얼마나 즐거운 산 목숨일까 궁금합니다. 휘둘릴 것도 붙잡을 것도 없이 홀가분하게 새로운 곳으로 넋이 날아갈 수 있다면, 이때에는 어떤 이야기가 될는지 궁금합니다.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팝툰,2014) 열첫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어느 연속극과 벌여야 한 실랑이 탓인지 모르나, 만화책 《설희》를 이루는 뼈대는 일찌감치 드러나야 했습니다. 이제 만화책 《설희》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은 ‘설희가 어떤 삶’인지 거의 알아챕니다. 오백 살 가까이 죽지 않고 살아온 나날을 어렴풋하게 읽습니다.





- ‘말이 힘을 가진다는 느낌. 정말로 죽을 수 있다는 순간 내가 정말 죽고 싶은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지.’ (10쪽)

- “너에겐 과거만 중요한 거 같아. 마치 과거만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처럼. 그래서 그 과거가 다 밝혀지고 해결되면?” (18쪽)



  스스로 오백 살 즈음 살지 않고서야 오백 해 동안 살아온 사람이 어떤 마음일는지 알기는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스스로 쉰 해나 백 해쯤 살다가 죽지 않고서야 쉰 해나 백 해 만에 숨을 거두어 사라지는 사람이 어떤 마음일는지 알기 어렵겠지요.


  오백 살을 살아온 사람은 쉰 해를 살다 죽을 사람이 어떤 마음일는지 읽기 어렵습니다. 쉰 해를 살다 죽을 사람은 오백 살을 살았을 뿐 아니라, 앞으로 오백 살을 더 살 만한 사람이 어떤 마음일는지 읽기 어렵습니다.


  둘은 어떻게 만날까요. 둘은 서로 어떻게 사랑을 속삭일 수 있을까요. 둘은 어떻게 동무나 이웃이 될까요. 둘은 서로 어떻게 꿈을 키울 수 있을까요.





- “어쩌면 너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기억하려고는 하고 있어?” (35쪽)

- “세계까지 전쟁으로 들어갔어. 세상은 언제나 변해. 이 전쟁이 끝나도 또 언젠가 전쟁이 나겠지.” (109쪽)

- ‘작은 농담과 일상의 대화. 눈발이 날리는 강원도에서 난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161쪽)



  삶과 죽음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면, 나 스스로 삶과 죽음 사이에 가야지 싶습니다. 꽃내음을 알려면 나 스스로 꽃내음을 맡아야 하고, 시냇물이 얼마나 싱그럽고 맛난지 알려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을 찾아서 두 손으로 떠서 마셔야 합니다.


  아이와 누리는 삶을 알려면 아이를 낳거나 아이를 가까이 두고 돌봐야 합니다. 어느 책을 알거나 말하려면 어느 책을 읽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 까닭을 알자면 어떤 사람이 어제와 오늘 어떻게 살았는가를 찬찬히 헤아려야 합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한대서 알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면 겉모습은 훑겠으나 속내는 살피지 못해요. 살아야 압니다. 삶도 살아야 알고, 죽음도 살아야 알아요. 그러니까, 만화책 《설희》에 나오는 설희와 다른 아이들은 서로서로 눈앞에 마주하면서도 아주 딴 곳에서 동떨어진 채 사는 듯한 느낌이 될밖에 없습니다. 서로서로 손을 뻗어 살갗을 쓰다듬거나 입을 맞출 수도 있지만, 마음과 넋은 아주 다른 곳에 따로 있습니다.





- ‘누군가를 계속 미워하기에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걸. 이건 그저 되새김일 뿐.’ (187쪽)

- ‘내가 처음 죽었던 것은 언제였지?’ (194쪽)



  만화책 《설희》는 앞으로 열둘째 권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열둘째 권에 이르면 ‘앳된 스물 언저리 젊은이’가 삶과 죽음을 깊이 헤아리거나 돌아볼 수 있을까요?


  별에서 온 어떤 숨결이 설희라는 아이한테 ‘죽지 않는 삶’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다른 별 숨결’한테 무엇을 줄 만할까요. 우리 지구별에서는 공해와 매연과 전쟁과 폭력과 입시지옥 따위를 다른 별에 퍼뜨릴 만할까요. 이 지구별에서 우리들은 서로 어떻게 어우러지면서 살아갈는지요. 앞으로 얼마나 더 살고, 앞으로 어떤 일을 얼마나 더 겪어야, 우리는 슬기롭거나 사랑스러운 넋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는지요. 4347.10.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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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3. 훈민정음과 한글과 한국말

― ‘쉬운 말’과 ‘어려운 말’



  ‘밥값’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 낱말은 세 가지 뜻으로 씁니다. 첫째는 “밥을 먹는 데 드는 값”입니다. 둘째는 “끼니가 될 밥을 먹으며 치르는 값”입니다. 셋째는 “밥을 먹은 만큼 하는 일”입니다. 시를 쓰는 정호승 님은 《밥값》이라는 이름을 붙인 시집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공기관이든 여느 회사이든 학교이든 ‘밥값’이라는 낱말은 거의 안 씁니다. 으레 ‘식대(食代)’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밥을 밖에서 사다 먹자고 할 적에도 한자말을 빌어 ‘식당(食堂)’이라는 낱말을 써요. 한국말로 ‘밥집’을 쓰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맛집’이라는 낱말이 꽤 퍼졌습니다. 맛있게 하는 밥집을 가리키는 ‘맛집’일 텐데, 이러한 낱말을 쓰는 흐름을 잘 살핀다면, ‘밥집’이라는 낱말도 앞으로 넉넉히 쓸 만하리라 봅니다. 구내식당이나 학생식당 같은 곳이라면 ‘밥터’라는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어요. 책을 사고파는 곳을 가리켜 ‘책방’이라고도 하지만 ‘책집’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책이 있는 곳, 이를테면 도서관이나 서재라 한다면 ‘책터’라는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습니다.


  돈을 내고 빨래를 맡기는 곳은 ‘빨래방’입니다. 이와 달리, 예부터 마을에서 빨래를 하려고 모이는 곳은 ‘빨래터’예요. ‘터’라는 낱말은 ‘집’이나 ‘방’과 다른 자리에서 써요. 그래서, 돈을 내고 노래를 부르는 작은 방이라면 ‘노래방’이라 할 테지만, 노래를 즐겁게 듣거나 누리는 곳, 이를테면 ‘음악회관’이나 ‘콘서트장’이나 ‘음악감상실’ 같은 곳은 ‘노래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입시교육으로 찌든 ‘학교’가 아닌 참답게 삶을 배우는 곳을 가리켜 ‘배움터’라는 이름을 새롭게 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글날을 맞이하면 이곳저곳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글은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는 글이요, 지구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손꼽는 글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틀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한글을 높이 사기만 할 뿐, 정작 한글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는 한국말은 어떠한가를 살피지 않기 일쑤입니다.


  한겨레는 왜 ‘모든 소리를 담을 만한 글’을 쓸까요? 한국말은 모든 소리를 귀여겨듣고 즐겁게 입으로 들려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글은 왜 뛰어나다고 손꼽을 만한 글일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쉽고 빠르게 익히면 우리가 입으로 나누는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거나 즐거운 이야기를 오래오래 건사하도록 옮겨적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을 쉬운 글로 담아 삶을 쉽게 지으면, 모든 사람이 날마다 아름답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길을 엽니다.


  한글날을 맞이해서 모처럼 한글을 생각한다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한결 깊거나 넓게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글날 하루만 반짝 스치듯이 지나가기보다는 한 해 내내 말과 글이 서로 맺고 얽는 흐름을 톺아볼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는 밥을 먹습니다. 우리는 밥그릇을 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웃하고 도란도란 밥 한 그릇을 나눕니다. 다만, 밥그릇에 담은 밥을 나누지, 밥을 담는 그릇을 나누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한글날을 기린다고 할 적에는 ‘그릇’이 되는 글(한글)이 아니라 ‘알맹이(밥)’가 되는 말(한국말)을 제대로 기리면서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대로 바라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릇을 먹지 않고 밥을 먹어요. 우리는 껍데기를 먹지 않고 알맹이를 먹어요. 우리가 옷을 입는 까닭은 옷을 지키려는 뜻이 아니라, 옷이 감싸는 알맹이인 몸을 지키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은 우리 몸에 깃든 마음을 지킵니다. 우리가 저마다 다른 사람이요 숨결이라고 할 적에는, 몸뚱이만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몸뚱이에 깃든 넋이 저마다 다르면서 애틋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한글날을 기려야 한다면, 그릇인 글 때문이 아니라, 그릇에 담는 말 때문입니다. 지난날 훈민정음을 처음 지었다고 할 적에 중국글과 중국말만 있었다면 훈민정음이 오늘날처럼 빛이 날 까닭이 없었으리라 느낍니다. 게다가 처음 훈민정음이 태어나고 나서 오백 해 가까이 한글이 푸대접을 받은 발자국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훈민정음이 왜 푸대접을 받았을까요? 임금님이 새로운 우리 글자를 짓기는 했으나, 이 새로운 글자를 한겨레 모든 사람이 두루 배워서 쓰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임금님 둘레에 있는 몇몇 지식인과 권력자만 쓰도록 했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거나 바다에서 물을 만지거나 아이를 낳아 돌보는 여느 사람한테 훈민정음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훈민정음은 오직 양반과 사대부와 임금님 둘레 몇몇 사람만 배워서 아주 조금 쓰던 글입니다. 이런 ‘죽은 글’이 오백 해쯤 흐른 개화기 언저리가 되어, 비로소 여느 사람 손으로 넘어와 ‘산 말’로 깨어납니다.


  ‘훈민정음’에서 ‘한글’로 이름을 바꾼 까닭이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처음 이 글을 지은 분 뜻과 같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을 누리려고 썼습니다. ‘한글’이라는 새 이름을 지은 분은 이 글을 몇몇 사람만 홀로 차지해서 쓰는 글이 아니라, 온누리 모든 사람이 즐겁게 배워서 아름답게 쓰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오늘날에도 ‘글 권력(지식·학문·정치)’을 누리는 이들은 한자와 한자말을 즐겨씁니다. 오늘날 새로운 ‘글 권력’을 누리는 이들은 알파벳과 영어를 즐겨씁니다.


  우리는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먹는 사람입니다. 옷을 아끼는 사람이 아닌 몸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몸에 깃든 마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한글은 한글대로 아끼되, 제대로 아끼고 사랑하며 보듬을 것은 ‘말’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이 땅에서 태어나 살던 한겨레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겁게 나누던 ‘말’을 제대로 바라보고 아끼고 사랑하고 보듬을 노릇입니다. 말을 살릴 때에 넋이 살고, 넋이 살 때에 사랑이 살며, 사랑이 살 때에 사람이 삽니다.


  지난 오백 해 남짓 훈민정음을 쓴 분들은 무엇보다 ‘한국 지식인이 한자 소리를 하나로 모두어서 쓰도록 틀을 세우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내 삶을 스스로 가꾸면서 아름답게 새로 지어 날마다 즐겁게 사랑을 나누자는 뜻’으로 한글에 한국말을 담아서 쓸 수 있기를 빕니다. ‘쉬운 말’을 ‘쉬운 글’에 담을 때에 삶이 사랑스레 열립니다. ‘어려운 말’을 ‘어려운 글’에 담을 적에 삶이 차갑고 무섭게 닫히거나 갇힙니다. 4347.10.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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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공장 2
야마사키 주조 지음, 히로카네 겐시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392



볼 마음이 사라진 만화책

― 꿈의 공장 2

 히로카네 켄시 그림

 야마사키 주조 글

 오경화 옮김

 서울문화사 펴냄, 2004.7.25.



  ‘시마’ 사원과 계장과 부장과 이사와 사장, 이런저런 만화를 꾸준히 그리는 분이 그림을 맡은 《꿈의 공장》 첫째 권을 읽으면서 영화와 방송이 이렇게 허술하거나 허접한가 하고 생각했다. 그저 머리에 아무 생각이 없이 찍는가 하고 생각했다. 만화책 《꿈의 공장》 둘째 권을 읽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다가, 첫째 권만으로 섣불리 말할 수 없으리라 여겨, 둘째 권도 읽기로 한다. 그러나, 둘째 권을 읽다가 아무런 재미를 못 느낀다. 나로서는 재미도 못 느끼고 그예 헛웃음만 나왔다.



- “뭐야? 그 옷차림은.” “왜?” “별 상관은 없는데 네가 어딜 봐서 중1이냐? 요즘 꼬맹이들은 너무 도발적이라니까.” “흥분돼?” (35∼36쪽)

- “좋아. 그만 가 봐! 자넨 이 작품이 끝나는 대로 〈여탐정 마리〉에서 잘릴 줄 알아!” “그래요? 꼭 그렇게 해 주십시오.” “빌어먹을. 세컨드 조감독 주제에.” (59쪽)






  만화책 《꿈의 공장》 둘째 권에서는, 주인공 ‘히타케’가 첫째 권에서는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루는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히타케는 무엇을 못 이루었는가? 바로 ‘아주 어린 여자’와 살을 섞는 일이다. 삯을 얻은 집에서 열네 살 가시내를 덮치려는 꿈을 꾸더니, 끝내 어느 시골에서 촬영을 마친 뒤 그곳 고등학생과 살을 섞는 이야기가 나온다. 《꿈의 공장》 첫째 권을 보면 술에 절어 넋이 나간 몸으로 ‘함께 일하는 여자 동료’를 덮치려고 하다가 헛물을 켜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참으로 그악스럽다.


  글을 쓴 이와 그림을 그린 이는 ‘영화’와 ‘방송’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모두 일곱째 권까지 있는 《꿈의 공장》이니 막판 뒤집기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막판 뒤집기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면 구지레하게 엮는 이 만화는 그야말로 볼 값어치조차 없으리라 느낀다.


  돈에 종이 되고, 이름값에 종이 되며, 여자 몸을 장삿속으로 훑다가 덮쳐서 정자를 뱉어내려고 하는 얼거리로 엮는 만화로 어떻게 ‘영화’를 “꿈의 공장”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여줄 만한지 도무지 모르겠다. 우리 사회가 이런 모습이라고 보여주는 만화일 수도 있겠지. 도시에서 사람들이 이룬 문명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밝히는 만화일 수도 있겠지. 대학교도 마치고 지식 좀 있다는 이들이 보여주는 방송밭 뒷모습이란 바로 이러하다고 까뒤집는 만화일 수도 있겠지. 사람들이 아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더럽고 어처구니없는 모습으로 얼룩진 영화판과 방송밭을 샅샅이 드러내려는 만화일 수도 있겠지. 4347.10.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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