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가출했다 힘찬문고 41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한기상 옮김, 최정인 그림 / 우리교육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푸른책과 함께 살기 118



어버이는 고스란히 물려준다

― 언니가 가출했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글

 최정인 그림

 한기상 옮김

 우리교육 펴냄, 2007.1.19.



  어버이는 아이한테 고스란히 물려줍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즐거움도 물려주며, 아픔도 물려줍니다. 사랑도 물려주며, 슬픔도 물려줍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무엇을 물려주고 싶을까요?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무엇을 물려받고 싶을까요?


  주먹질이나 손찌검을 아이한테 물려주고 싶은 어버이는 얼마나 될까요? 주먹질이나 손찌검을 어버이한테서 물려받고 싶은 아이는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입시지옥을 물려주고 싶은 어버이는 얼마나 되나요? 입시지옥을 물려받고 싶은 아이는 얼마나 되나요? 한편, 아파트를 물려주고 싶은 어버이는 얼마나 있지요? 아파트를 물려받고 싶은 아이는 얼마나 있지요?



.. 엄마는 몸을 돌려 언니에게 물었다. “그분들 지금은 조화 장미꽃 안 가지고 있니?” “관심 있으면 가서 직접 보시지 그래요!” … 언니는 죽은 모르모트를 안고 침대로 갔다. 그러고는 침대보 위에 눕혀 놓았다. 엄마는 책상 위에 서 있는 타트야나를 안아서 책상 의자에 앉히고는 피가 나는 손가락을 호호 불면서 중얼거렸다 … 저녁에 쿠르트 아저씨가 우리 방으로 왔다. 아저씨는 언니에게 모르모트를 새로 살 거냐고 물었다. “당신 아이들한테나 사 주시지요.” 언니는 아저씨에게 쏘아붙였다 ..  (9∼10, 21∼23, 24쪽)



  어릴 적부터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돈이 무척 많은 동무는 없었으나, 돈이 꽤 많은 동무는 있었습니다. 돈이 꽤 많은 동무는 그 아이가 바라는 장난감을 거의 다 장만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를 바라보면서 생각했어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도 저 아이네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돈이 많기를 바라나?


  아니더군요.


  우리 어머니도 밥을 잘 하시지만, 동무네 어머니 가운데 밥을 놀랍도록 잘 하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먹을 수 없는 밥이나 반찬을 차려서 주시는 동무네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 동무네 집에서 밥을 한 그릇 함께 먹으면서 생각했어요. 우리 어머니도 이런 밥과 반찬을 해 주기를 바라나? 우리 집에서 이런 것을 먹기를 바라나?


  아니더군요.


  내가 열네 살인가 열다섯 살에 우리 아버지가 처음으로 자가용을 장만합니다. 값이 비싸니 꽤 오랫동안 다달이 갚도록 하면서 장만합니다. 아버지는 네 식구를 태우고 두 시간 동안 마실을 다니기도 합니다. 동네에 자가용 있는 집이 얼마 없던 때인데, 아버지는 무척 자랑스레 여깁니다. 이때 나는 우리 집에 자가용이 있어 좋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더군요.



.. 언니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엄마가 모욕을 주듯 비웃으며 말했다. “먼저 우리 가족에 대한 약속과 의무부터 지켜 보지그래.” “도대체 내가 지켜야 할 의무가 뭔데요? 그리고 엄마가 말하는 가족이라는 건 누구를 얘기하는 거죠?” … 관리인 할머니는 타트야나의 머리 너머로 나를 째려보았다. 마치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꼴 보기 싫은 사람이라도 되는 듯 쏘아보았다 … 할머니는 우물쭈물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쨌든 누가 거짓말한다는 걸 알아차리려면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해. 그리고 잘 돌봐 줘야만 하지.” ..  (39, 67, 81쪽)



  나는 우리 어버이한테서 돈이나 맛난 밥이나 자가용을 물려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한테 돈이나 맛난 밥이나 자가용을 물려주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어버이한테서 오직 하나, 사랑을 물려받기를 바랐습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한테도 오직 하나, 사랑을 물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과 함께 꿈을 물려받고 싶으며, 꿈을 물려주고 싶어요. 사랑과 꿈과 함께 이야기를 물려받고 싶으며, 이야기를 물려주고 싶어요. 사랑과 꿈과 이야기와 함께 숲집을 물려받고 싶으며, 숲집을 물려주고 싶어요.


  땅이나 집이 아닌 ‘숲집’입니다. 숲으로 이루어진 숲입니다. 숲을 이룬 집입니다. 넓거나 비싼 땅이나 집이 아닌, 숲으로 둘러싸인 집입니다. 언제나 아름답게 우거진 푸른 숲과 집입니다.



.. 나는 언니한테 여기에 남아 있어 달라고 말하려 했다. 안 그러면 난 완전히 혼자가 되니까 … “누나네 할머니 좋아? 누나네 할머니도 우리한테 할머니가 될 수 있어? 누나네 할머니도 할아버지 있어? 그 할아버지도 좋아?” 올리버가 물었다. 난 재채기를 했다. 그리고 계속 재채기를 하면서 몇 번이나 “그래, 그래.” 하고 대답했다 ..  (49, 153쪽)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님이 쓴 《언니가 가출했다》(우리교육,2007)를 읽습니다. 이녁은 이 작품을 1974년에 처음 선보였다고 합니다. 한국으로 치면 마흔 해를 묵은 작품인데, 유럽에서도 마흔에 앞서까지 ‘가정폭력’과 ‘가정불화’가 대단했구나 싶습니다. 아마 오늘날에도 이러한 아픔과 슬픔은 모두 안 가셨지 싶습니다. 아이를 때리거나 다그치는 어버이가 많고, 아이를 괴롭히거나 윽박지르는 어버이가 많습니다. 게다가 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학교에서도 어른들은 아이를 다그치거나 윽박지르기 일쑤입니다. 요즈은 한국 사회에서는 학교에서 아이를 때리는 일은 거의 수그러들었다 할 만하지만, 아이를 때리지 않아도 입시지옥이 있어요. 시험지옥이 있습니다. 여기에, 학원이 지옥처럼 도사립니다. 아이들은 마음 놓고 놀지 못하고, 아이들은 동무와 사이좋게 지내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열대여섯 살쯤 된다면 ‘집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드디어 몸으로 옮길 만합니다. 그러면, 열대여섯 살짜리 아이는 집을 나가서 어디로 갈 만할까요? 우리 사회는 ‘집을 나간 아이’를 받아들일 만큼 너그럽거나 넉넉하거나 포근할까요? 현대 도시문명 사회는 모든 사람을 옥죄거나 윽박지르기에, 여느 집 어버이조차 아이를 윽박지르거나 때리지 않을까요?


  아이를 때리는 어버이도 마음에 생채기가 있습니다. 어버이부터 스스로 생채기를 다스리지 못했으니 아이를 낳아도 사랑으로 보살피지 못합니다. 어버이부터 삶을 새롭게 찾아야 합니다. 즐거운 삶이 되어야 하고, 아름다운 삶이 되어야 합니다. 즐겁지도 못하고 아름답지도 못한 하루라면, 이러한 굴레에 갇힌 어버이가 아이를 사랑하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우뚝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자리를 찾거나 셋집을 찾으면서 집을 나가는 삶이 아닌, 스스로 꿈을 세워서 가꿀 수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야기책 《언니가 가출했다》에서 ‘언니’는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데, ‘언니’가 집으로 돌아온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언니네 어머니도, 언니네 새아버지도, 언니네 새할머니도 모두 예전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이제 언니에 이어 동생도 머잖아 집을 나가겠지요. 머잖아 집을 나간 뒤 두 번 다시 그 집에 돌아가지 않겠지요. 사랑이 없는 집에서 뛰쳐나가겠지요.


  그런데, 사랑이 없는 집에서 뛰쳐나온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어른이 된 ‘사랑 없이 자란 아이’가 아이를 낳을 적에는 어떤 삶이 흐를까요. 예전과 똑같은 가정폭력과 가정불화일까요, 아니면 이 아이들은 슬기롭게 거듭나서 아름다운 사랑으로 보금자리를 가꿀까요? 이야기책 《언니가 가출했다》에서는 이 대목을 못 건드립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책에서는 이 대목을 못 살폈다거나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거나 이 대목까지 마음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4347.10.1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문학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재 유교수의 생활 34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394



삶을 배우는 길

― 천재 유교수의 생활 34

 야마시타 카즈미 글·그림

 학산문화사 펴냄, 2013.11.25.



  밥을 차릴 수 있는 사람은 무척 즐겁습니다. 밥 한 그릇을 베풀 수 있으니까요. 배고픈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서 함께 먹고, 배고픈 이웃이 있으면 밥 한 그릇 덜어서 함께 나눕니다. 가만히 앉아서 밥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매우 즐겁습니다. 살붙이나 이웃이 지은 사랑을 고맙게 받을 수 있어 즐겁습니다. 내 살붙이나 이웃은 사랑을 베풀 사람이 있어 즐겁고, 나는 내 살붙이나 이웃한테서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즐겁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쌀을 씻어 불립니다. 아이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놀고, 도란도란 오순도순 온갖 놀이를 아침부터 누리고 싶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노는 아이들은 곧 배가 고플 테며, 아이들이 배고프다는 소리가 나올 즈음 천천히 밥을 지으면, 아이들은 밥 익는 냄새를 맡고는 더 신나게 놉니다.


  밥은 입으로 먹어도 배가 부르지만, 밥내음을 코로 맡아도 즐겁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밥을 씹어서 먹는 한편, 코와 살갗으로 밥기운을 맞아들이면서 새롭게 기운을 내는구나 싶어요. 그러니, 햇볕을 쬐면서 뿌듯하고 즐겁습니다. 바람을 마시면서 개운하며 기쁩니다.





- ‘나는 지금, 무척 동요하고 있다. 중증이 아니라는 설명을 그토록 듣고 왔는데도, 나는 어쩌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게 아닐까? 내 연구에 언젠가 끝이 온다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게 아닐까?’ (13쪽)

- ‘그렇다. 수많은 인생계획을 생각했지만, 우선순위는 뻔하지 않은가. 처음에 떠올린 것은 아내의 얼굴이 아니었나. 오늘 이날도 마치 그날처럼.ㅣ 나는 앞으로도 변함없는 하루하루를 살 것이다.’ (25쪽)



  아직 내 몸에 힘이 크게 솟지 않으면 힘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너덧 살 아이가 제 신을 스스로 복복 비벼서 빨기란 수월하지 않습니다. 대여섯 살 아이가 제 옷가지를 스스로 복복 비벼서 빨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무렵에는 어른이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합니다.


  아이들이 차츰차츰 자라면서 몸과 손에 힘이 붙으면, 이제 스스로 신을 빨고 옷가지를 복복 비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이를 닦고, 스스로 손발을 씻습니다. 스스로 걸레를 빨아서, 스스로 방바닥을 훔칩니다.


  어른이 스스로 즐겁게 방바닥을 훔치면, 아이들은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이러다가 어느 날 스스로 걸레를 빨아 보고, 물을 짜 보며, ‘아이인 탓에 물을 덜 짠 물걸레’로 방바닥을 물바다로 만듭니다.


  내 어릴 적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내가 방바닥이나 마룻바닥을 물바다로 만들었을 적에, 어머니는 “이리 줘 봐.” 하면서 걸레를 비틀어 물을 죽죽 짰습니다. 물기를 쪽쪽 빼낸 걸레를 건네셨어요. ‘아하 그렇구나’ 하면서 다음에는 물기를 짜려고 악착같이 용을 씁니다. 어려서 물기짜기가 도무지 안 되겠다 싶으면, 젖은걸레로 한 차례 닦은 뒤 마른걸레로 다시 닦습니다.





- ‘그도 나쁜 뜻은 없었을 테고, 그의 개성으로서 존중할 필요는 있지만, 경영자로서는 다소 문제가 있다. 그는, 실패할 만했기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나는 쿠루스 군의 실패를, 음미하고 있나?’ (52쪽)

- “아무리 우여도 아빠는 몰라. 그러니까 언니야가 엄마 해 주께. 아빤 공부할 땐 아무 쓰모가 없쪄. 엄마가 그랬거든? 아빤 언제나 ‘공부’란 놀이만 하고, 힘들고 지저분한 건 다아 내 차지라고. 다아 나한테만 떠맡겨서 힘드여 주께쩌.” (71∼72쪽)



  나는 즐겁게 걷습니다. 먼 길이건 안 먼 길이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냥 걷습니다. 두 시간이나 서너 시간이 걸리는 길도 그냥 걷습니다. 그냥 걸어 봅니다. 한참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좀 멀다 싶은 길을 걸으려 했네 하고 생각합니다. 어디 마땅한 곳을 찾아 앉습니다. 다리를 쉬면서 바람을 마십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동네를 살핍니다. 다리를 툭툭 두들긴 뒤 일어나 다시 걷습니다. 걷고 걸으며 또 걸어서 드디어 내가 가려는 곳에 닿습니다.


  여덟 살 적 일을 떠올립니다. 나는 여덟 살 적부터 그예 씩씩하게 걸었습니다. 혼자 학교까지 걸었습니다. 학교에서 다시 집까지 걸었습니다. 이무렵, 나와 함께 그 길을 걸어서 다닌 동무는 없습니다. 모두 버스를 타고 그만 한 길을 다녔어요. 중학교 적에도 고등학교 적에도 똑같습니다. 삼십 분이나 한 시간 즈음 걸어서 학교를 다닌 동무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함께 길을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거나 하늘바라기를 할 만한 동무는 좀처럼 못 만납니다.


  걸음동무는 사귀지 못했지만, 혼자 오랫동안 길을 걸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오직 내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오로지 내 생각에 젖어듭니다. 이제껏 내가 걸은 길을 헤아리고, 앞으로 내가 걸을 길을 돌아봅니다. 어제까지 내가 걸은 길을 되짚고, 오늘부터 내가 걸을 길을 톺아봅니다.





- “이츠코는 어떻게 이런 걸 잘하게 됐지?” “아빤 좀 가만 있어요.” “미안하다. 계속하거라.” (79쪽)

- ‘나는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무것도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늘 눈여겨보던 이츠코는, 내가 모르는 사이 놀랄 만큼 자라 있었다. 이 순간의 감동을 기록하고 싶다. 가족의 기록을 남기고 싶다.’ (82∼83쪽)

- “당신 그럼, 밤엔 이츠코한테만 맡겼다고요?” “응?” “그런 갓난쟁이를? 애가 밤새 콜콜 잠만 자는 줄 알아요? 난쟁이 요정이 밤마다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타 줬을 리도 없는데, 밤엔 애를 대체 어떻게 한 거야!” (88쪽)



  야마시타 카즈미 님이 빚은 만화책 《천재 유교수의 생활》(학산문화사,2013) 서른넷째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유택 교수는 언제나 삶을 배웁니다. 언제나 삶을 찬찬히 지켜보면서 생각을 기울이고, 생각을 기울인 끝에 스스로 즐겁게 배웁니다.


  다만, 유택 교수는 혼자 생각해서 혼자 배울 뿐, 좀처럼 이 슬기와 즐거움을 둘레에 나누어 주지 못해요.


  이러던 어느 날, 유택 교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줄 깨닫습니다. 그러나, ‘죽음 뒤 인생설계’는 생각하면서도 정작 ‘유택 교수 곁에 있는 사람과 나눌 이야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고 갈고닦아서 ‘옳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이 기쁨을 이야기꽃으로 펼치지 못해요.





- “내가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새로 사귀는 친구들 중에는, 손 한 번 잡을 일 없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구나.” (122쪽)

- “너는 참 이유도 많구나. 벚꽃을 보면, 나는 네 어머니가 생각난다. 오오, 벚꽃처럼 덧없고 아름다운 나의 추억이여. 오오, 신이여!” (168쪽)

- “유택이는 감정이 없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아요. 나는 저 아이가 웃는 얼굴을 자주 보거든요.” “그런가? 그렇다면 좋겠지만.” (185쪽)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 나오는 유택 교수네 아버지는 이 대목을 날카롭게 짚습니다. ‘내 아들’이면서도 이런 모습이 참으로 못마땅하다고 말하지요. 그리고, 아들인 유택 교수는 이런 아버지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참말 그렇지요. 유택 교수는 아직 배울 것이 많습니다. 배울 것이 많다는 얘기는 모르는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유택 교수는 새롭게 배울 생각을 하면서 참말 스스로 새롭게 배우는데, 새롭게 배우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이웃하고 나누는 일에서는 퍽 어리숙합니다. 어릴 적 유택 교수네 어머니가 어린 유택한테 들려주던 이야기도 ‘유택 교수가 손녀를 본 나이’가 되어서야 어렴풋하게 헤아릴 뿐입니다.



- ‘어머니와 벚꽃을 보던 시절, 앞으로 몇 번이나 이렇게 벚꽃을 볼 수 있을지는 생각한 적도 없었다. 봄이 매년 오는 것이 당연하던 그 시절, 벚꽃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 (187쪽)



  예순 줄 나이를 한참 넘겨서야 벚꽃을 벚꽃 그대로 바라본 유택 교수입니다. 유택 교수는 아기 기저귀를 갈 줄조차 몰랐습니다. 유택 교수는 밥짓기도 못하고, 집살림은 영 할 줄 모릅니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으니까요.


  다시 말하자면, 유택 교수는 스스로 쳐다보고 생각한 것만 스스로 깨닫습니다. 스스로 쳐다보지 않은 것은 아예 유택 교수 마음에 없고, 마음에 없는 것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떻게 되든 아랑곳하지 않아요.


  앞으로 유택 교수는 이녁 삶에서 무엇을 더 바라보고 새롭게 배우면 즐거울까요? 집 바깥에서 다른 삶을 바라보고 배워야 할까요? 아니면, 유택 교수 스스로 ‘맨 먼저 떠올리는 곁님 얼굴’처럼, 곁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는가 하는 대목을 서로 조곤조곤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내 마음에서 바라볼 것’을 바라보면서 배울까요?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배웁니다. 우리는 늘 배웁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배웁니다. 마음을 열면 다 보이고, 마음을 열 때에 다 깨닫습니다. 4347.10.1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맛의 거리 문학동네 동시집 3
곽해룡 지음, 이량덕 그림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사랑하는 시 37



꿈과 사랑이 흐르는 삶

― 맛의 거리

 곽해룡 글

 이량덕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08.11.24.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이 돈을 잘 벌어서 돈을 잘 쓰는 어른이 되기보다는, 삶을 즐겁게 가꾸면서 사랑을 기쁘게 나눌 숨결로 자랄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가슴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어 사랑이라는 열매를 가꾸고, 다시 사랑이라는 씨앗을 거두어 새롭게 심을 줄 알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 아이들이 / 바닷물을 끌어당긴다 ..  (밀물)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됩니다. 어른은 모두 아기로 태어나 아이로 자랐습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는 동안 삶을 익히고 삶을 가꾸며 삶을 사랑합니다. 어른은 모두 아기로 태어나 사랑을 받았고 꿈을 키웠으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 시골 할머니 집에서 / 받아 온 꽃씨 / 우리 집 담장 밑에서 / 나팔꽃으로 피었습니다 ..  (나팔꽃)



  씨앗이 뿌리를 내립니다. 씨앗에서 줄기가 오릅니다. 처음 오르는 줄기는 아주 가냘픕니다. 아기가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도 끊어질 만합니다. 나무씨이든 풀씨이든 첫 줄기는 아주 가녀립니다.


  가녀린 줄기에서 가녀린 잎이 돋습니다. 이 첫 잎을 ‘싹’이라고 합니다. 새싹이 돋은 씨앗은 햇볕과 빗물과 바람을 먹으면서 흙 품에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이윽고 줄기가 단단하게 굵고 잎은 넓어집니다. 줄기와 잎과 뿌리가 알맞게 자라면서 어느 만큼 따사로운 기운을 머금을 무렵 가만히 꽃송이를 터뜨립니다. 꽃송이는 벌과 나비와 개미를 부릅니다. 게다가 사람까지 부르지요. 벌과 나비와 개미는 먹이를 찾아 꽃송이한테 다가갑니다. 사람은 아름다운 숨결을 받고 싶어서 꽃송이한테 다가섭니다.



.. 사람들이 모를 심듯 / 새들은 나무를 심는다 ..  (똥 누러 가는 새)



  아름다운 꽃송이는 여러 날 바람에 한들거리면서 즐겁게 한삶을 누리다가 사르르 집니다. 꽃송이가 지면서 씨방이 굵습니다. 씨방은 차츰 여물고, 어느새 새로운 목숨을 안은 씨앗이 태어납니다.


  씨앗이 씨앗을 낳습니다. 씨앗은 씨앗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을 베푸는 씨앗은 새로운 사랑을 베풀 씨앗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씨앗은 앞으로 새롭게 사랑을 노래할 씨앗으로 숨결을 잇습니다.


  꽃이 진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은 살짝 서운하지만, 씨앗이 맺은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부풉니다. 그래, 올해가 지나고 새로운 해가 찾아오면 다시 꽃잔치를 누릴 수 있어. 이 씨앗을 보면서 다시금 기운을 차려야지.



.. 꽃길 걷다 보면 / 나도 모르게 / 찐―짠 찐짠 찐짠 / 노래가 나온다 ..  (꽃길)



  곽해룡 님이 빚은 동시를 그러모은 《맛의 거리》(문학동네,2008)를 읽습니다. 아이한테 들려주려고 쓴 동시가 이 작은 책에 깃듭니다. 곽해룡 님이 어린 날부터 어른이 된 오늘까지 스스로 사랑하며 살던 이야기가 작은 동시에 조촐히 깃듭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란 사랑입니다. 꿈이란 무엇일까요. 꿈이란 꿈입니다. 사랑은 돈이 아닙니다. 꿈은 대학교가 아닙니다. 사랑은 아파트가 아닙니다. 꿈은 서울살이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어른들은 꿈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물려받아야 합니다. 어른들은 꿈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 “학교 다녀왔습니다!” / “그래.” / 연속극에 붙들린 엄마 / 방에서 나와 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  (엄마를 구하다)



  동시집 《맛의 거리》는 애틋하면서 살갑습니다. 다만, 조금 더 헤아려서 ‘사랑과 꿈을 노래하는 숨결’이 될 수 있으면 한결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놓은 사회 얼거리를 보여주는 동시도 나쁘지 않고, 어른들이 만든 슬픈 울타리를 건드리는 동시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동시로는 노래를 부르기 어려워요.


  아이들이 부르고 어른들도 함께 즐길 노래는 우리가 다 함께 나아갈 사랑과 꿈이 어우러진 이야기여야지 싶습니다. 이를테면 〈엄마를 구하다〉 같은 작품은 재미있고 어떤 상징을 보여준다고 할 만하지만, 이 동시를 노래로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살며시 나무라는 재미난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끝이에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내 동생〉 같은 작품도 아름답다 할 만하지만, 여기에서 끝이에요. 더 뻗지 못해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지을 꿈과 사랑이 흐르지 못합니다.



.. 어제는 벽에 / 달을 그려 / 엄마한테 혼나고 // 오늘은 풍선을 그려 / 혼나고 / 울다 잠든 / 내 동생 ..  (내 동생)



  함께 지을 사랑을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씨앗을 심는 삶을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누릴 꿈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씨앗이 꽃이 되고 다시 씨앗이 되는 이야기를 어깨동무하면서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을 짓듯이 동시를 짓기를 바랍니다. 재미난 몇 가지 이야기를 조각조각 맞추기보다, 꿈꾸는 삶과 사랑하는 삶을 따사롭게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7.10.1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어린이문학 비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낮은 풍경 - 이희재의 스케치여행
이희재 지음 / 애니북스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398



따스한 사람들이 어깨동무

― 낮은 풍경, 이희재의 스케치여행

 이희재 그림·글

 애니북스 펴냄, 2013.7.26.



  우리가 사는 이곳에는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 ‘낮은 삶’이나 ‘높은 삶’도 따로 없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하는 사람은 높지 않습니다. 의사나 판사 같은 일을 한대서 높지 않습니다. 대학교 졸업장으로 사람이 높아지지 않으며, 외국에서 배웠거나 대학원을 마치기에 사람이 높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거머쥔대서 높지 않으며, 어버이가 부자라서 높지 않습니다. 땅을 많이 거느리는 사람이 높지 않고, 이름을 드날리는 사람이 높지 않습니다.


  사람을 높이로 따지는 사람치고 바보스럽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을 높이뿐 아니라 크기나 부피 따위로 재는 사람치고 어리석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 7월 5일, 낮부터 비가 내리더니 저녁 집회시간이 다가오자 비가 멎었다. 날씨 따라 어둡던 마음도 개운해졌다. 많은 시민이 다시 모였다. 촛불은 밤을 밝혔고 물결처럼 거리로 휘돌며 빗나간 권력에 맞대응했다 ..  (촛불)



  그런데,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은 한 가지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녁한테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대목을 살필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사랑스러운가 아닌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으로 삶을 가꾸는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높거나 낮다고 가를 수 없으나, 따스한가 차가운가를 놓고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돈이나 이름값 따위로 가를 수 없지만, 사랑스러운가 안 사랑스러운가를 살피며 나눌 수 있어요.


  그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뜨거운 피가 흐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랑 없는 사람은 없기에 누구나 사랑입니다. 그저 아직 사랑에 눈을 뜨지 못했을 뿐입니다. 사랑이 없이 차갑구나 싶은 사람이라면, ‘아직 사랑에 눈뜨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을 밟거나 부수려는 사람이라면,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 어떤 대상이고 처음 붓을 들면 낯설다. 사물에 익숙해지는 데는 대상이 도구와 교감하고 몸에 들어앉을 수 있는 시간의 뜸을 들여야 한다. 집과 집은 다닥다닥 옆구리를 맞대고 있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리어카 하나 비켜설 수 없는 조밀한 곳, 집마다 삶의 내력과 세월에 배어 있을 것이다 ..  (중계동 산동네 백사마을을 가다)



  만화를 그리는 이희재 님이 《낮은 풍경, 이희재의 스케치여행》(애니북스,2013)이라는 작품을 선보입니다. 우리가 마주할 풍경 가운데 ‘낮은 풍경’이나 ‘높은 풍경’이란 따로 없으나, 이희재 님은 스스로 ‘낮은 풍경’을 찾아서 그림에 이야기를 담습니다.


  낮은 곳은 어디일까요?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가 낮은 곳일까요? 도시에 있는 달동네가 낮은 곳일까요? 한국 정부에서 버린 윤이상 같은 사람이 낮은 곳에 있었을까요? 미얀마라는 나라가 낮은 곳에 있을까요?


  이희재 님은 굳이 “낮은 풍경”이라고 책이름을 붙입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 정부와 사회와 경제와 문화와 예술이 ‘어떤 사람과 마을’을 낮게 깎아내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희재 님 스스로 ‘낮은 사람’이 되어 ‘낮은 이웃’을 만나려고 ‘낮은 나들이’를 즐깁니다.





.. 통영의 영산 미륵산 꼭대기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둥둥 떠 있는 섬들은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윤이상의 눈에 밟히던 고양이다. 윤이상은 이곳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랐음에도 끝내 조국은 문을 닫아버렸다 ..  (윤이상을 찾아서)



  따스한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합니다. 따스하지 않은 사람은 어깨동무를 하지 않습니다. 따스한 사람들이 서로 아끼면서 어깨동무를 합니다. 따스하지 않은 사람들은 혼자 잘났기에 굳이 어깨동무를 할 까닭을 못 느낍니다. 따스한 사람들이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어깨동무를 해요. 따스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랑을 모르니 어깨동무라는 낱말조차 모르리라 느낍니다.


  만화를 그리는 이희재 님이 바라보면서 그림으로 담은 ‘낮은 풍경’이란, 바로 따스한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이지 싶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낮은 풍경’이란, 바로 따스한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돌보는 모습이지 싶어요.





.. 나는 둑길에 앉아 점심을 먹는 것도 잊고 장터의 흥정에 홀려 사람들을 그렸다 ..  (황금의 땅 부처의 나라 미얀마)



  낮은 곳에는 입시지옥에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주식투자가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스포츠나 연예인이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법원도 국회의사당도 청와대도 대학교도 없습니다. 아니, 이런 것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밭이 있고 마을이 있으며 골목이나 고샅이 있습니다. 낮은 곳에는 나무와 풀과 꽃이 함께 자랍니다. 낮은 곳에서는 풀벌레와 개구리와 멧새가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낮은 곳이란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보금자리입니다.


  더 들여다본다면, 낮은 곳에는 돈도 이름도 힘도 없습니다. 낮은 곳에서는 돈도 이름도 힘도 쓸 일이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책도 문화도 예술도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작가도 예술가도 공무원도 교사도 없습니다.


  낮은 곳에는 오직 사랑이 있고, 오로지 꿈이 크며, 그예 삶이 피어납니다. 낮은 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요 어머니입니다. 낮은 곳에서는 서로서로 아재와 아지매입니다. 낮은 곳에서는 다 같이 언니요 동생입니다. 낮은 곳에서는 모두 동무이면서 이웃입니다. 낮은 곳에서는 저마다 다르면서 몽땅 한동아리가 되는 사람입니다.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습니다.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습니다. 사랑에는 높낮이가 없습니다. 사랑은 너비나 깊이로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따스하거나 포근합니다. 사랑은 늘 즐겁거나 아름답습니다. 4347.10.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친구 비차 사계절 아동문고 18
니콜라이 노소프 지음, 엄순천 옮김 / 사계절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64


 

네가 내 동무 맞니?

― 내 친구 비차

 니콜라이 노소프 글

 엄순천 옮김

 사계절 펴냄, 1993.4.20.



  고흥 시골자락에 조그마한 우리 집을 마련한 지 세 해 만에 뒤꼍 유자나무에서 유자알을 구경합니다. 제법 많이 열렸기에 샛노랗게 익으면 즐겁게 따서 유자차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침저녁으로 한두 차례씩 뒤꼍에 와서 유자나무를 올려다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유자나무 크기로 본다면 지난해와 그러께에도 유자알이 열렸을 텐데 왜 지난 두 해에는 못 보았을까 하고. 설마 지난 두 해에는 우리 집과 맞닿은 다른 이웃이 우리 몰래 유자알을 몽땅 따는 바람에 이 나무에 열매가 안 맺는 줄 여기지 않았을까 하고. 곰곰이 돌아보니, 올봄에 우리 집 뒤꼍 매화나무에 매화알이 아주 많이 맺혀서 이 열매를 노랗게 익은 뒤에 따려고 했는데, 푸르스름한 빛이 빠질 즈음 하루아침에 몽땅 사라진 일이 있었습니다. 터무니없는 일이었어요.


  시골마을에 대문에 자물쇠를 채운다든지, 울타리에 가시넝쿨을 박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 훔쳐 갈 일이 없거니와 훔칠 것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돌울타리는 어른이라면 가볍게 타고 넘을 수 있는 터라, 이웃집에서 ‘푸른 매실’이 아닌 ‘노란 매실’을 얻으려고 그대로 두는 열매를 ‘안 먹으려고 저러는구나’ 하고 함부로 생각하면서 모조리 가져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 내 생각에 아빠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줄 모른다. 엄마도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아빠는 절대로 선생님을 하면 안 된다. 처음 30분은 차근차근 설명하다가도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면 마구 화를 낸다. 그러면 나는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면서 바보 멍텅구리처럼 멍하니 앉아만 있게 된다 … 내가 왜 이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결국 나는 의지력이 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의지력은 있으나 약하다 ..  (43, 87쪽)



  낮에 사광이풀과 환삼덩굴 줄기와 돌콩 줄기를 걷어서 유자나무 둘레에 쌓습니다. 뒤꼍에서 다른 집으로 이어지는 자리도 뻥 뚫렸기에, 이곳에도 풀짚을 쌓고 장미나무 줄기를 몇 끊어서 풀짚에 얹습니다. 이쪽은 길도 샛길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쪽으로는 들어오지 말라는 뜻입니다. 뱀이나 개구리나 풀벌레나 새라면 이런 풀짚 울타리야 아랑곳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이 풀짚 울타리를 옆으로 치우거나 밟아서는 안 됩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예부터 제주섬에서는 나뭇가지를 돌울타리 앞자락에 걸쳐서 걸쇠로 삼았다고 합니다. 걸쇠라기보다 그냥 걸치는 나뭇가지일 뿐인데, 이웃은 이 나뭇가지를 보고는 함부로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요. 나뭇가지 걸친 모습을 보면 ‘집이 빈’ 줄 뻔히 알 수 있겠지요. 집이 빈 줄 뻔히 알면 누구라도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요즈음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집이 빈 줄 뻔히 알기에 함부로 안 들어가나요? 집이 빈 줄 알아차리면 무언가 훔치거나 빼앗으려고 몰래 들어가지 않나요?


  도시를 보면 어느 집이든 문을 꽁꽁 걸어 잠급니다. 문을 꽁꽁 걸어 잠가도 도둑은 용케 자물쇠를 따고 들어갑니다. 다시 말하자면, 도둑은 자물쇠가 있든 없든 훔칩니다. 이웃은 자물쇠가 없든 있든 서로 아끼거나 보살핍니다.


  우리는 서로 어떤 사이일까 궁금합니다. 우리는 서로 어떤 사이로 여길까 궁금합니다.



.. “오빠는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어? 우리 오빠는 나를 귀찮아 하는데.” “있었으면 좋겠어. 동생이 있으면 장난감도 만들어 주고, 귀여운 동물들도 갖다 주고 하면서 무척 귀여워해 줄 텐데.” … 만일 나라면? 내가 지고 친구가 이긴다면 오히려 기뻐할 거다. 하지만 알릭은 정반대였다. 자기가 이기면 너무 좋아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지면 화가 나서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  (57, 95쪽)



  니콜라이 노소프 님이 쓴 《내 친구 비차》(사계절,1993)를 읽습니다. 러시아에서 나온 퍽 오래된 어린이문학입니다. 한국말로 옮긴 지도 제법 되었습니다. 러시아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꾸준히 읽히면서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책이름이 말하듯이 “내 동무”를 이야기합니다. 서로 동무라 한다면 어떻게 아끼고 사랑하면서 지내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동무 사이에 지킬 이야기를 밝히고, 동무 사이에 이룰 수 있는 꿈과 사랑을 알려줍니다.


  어린이문학 《내 친구 비차》에 나오는 아이들은 서로 ‘동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무이면서 동무인 줄 제대로 못 깨닫기도 했기에, 동무가 어려울 적에 제대로 못 돕거나 마음을 못 기울이기도 합니다.



.. 나는 완전히 다른 아이가 돼 있었다. 이렇게 당당한 내 모습에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 언제나 다른 아이들에게 물어 보기만 하던 내가 다른 사람한테 수학 문제를 가르쳐 줄 수 있게 되다니 … 엄마를 위해서 공부하는 건 아니야. 엄마도 늘 그렇게 말씀하셔. 하지만 역시 난 엄마를 위해서도 공부하고 있는 거야. 엄마는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셔. 나는 꼭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될 거야 ..  (139, 288쪽)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물을 노릇입니다. 내가 네 동무 맞니, 하고. 네가 내 동무 맞니, 하고.


  생각하고 생각할 노릇입니다. 동무 사이라면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이웃 사이라면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 헤아릴 노릇입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이웃인가요? 여러 정당은 서로 이웃인가요? 한국사람은 저마다 서로 이웃인가요? 남녘과 북녘은 서로 이웃인가요? 한국과 일본은, 또 한국과 중국은, 또 한국과 미국은, 또 한국과 베트남은 서로 이웃인가요? 지구별에 있는 여러 나라는 서로 이웃인가요?


  사람과 개구리는 이웃인가요? 사람과 나무는 이웃인가요? 사람과 제비는 이웃인가요?


  우리가 서로 이웃이라면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우리가 서로 이웃이 아니라면 어떻게 지내면 될까요? 이웃이 어려울 적에 도와준다면, 이웃이 배고플 적에 밥 한 그릇을 준다면, 우리는 이웃한테 돈을 달라고 바랄 만한지요? 아니면, 이웃이니 즐겁게 도와주었다고 말을 할는지요?



.. “얘들아, 이제 코스차를 어떻게 도와줄 건지 얘기해 보자. 코스차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어. 그래서 결국 학교를 그만둘 생각까지 하게 된 거야. 우리한테도 책임은 있어. 우리는 코스차가 어떻게 공부하는지 눈곱만큼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필요할 때에 도와주지도 않았으니까.” … 코스차는 아이들에게 아주 엄한 도서부원이었다. 누가 더러운 손으로 책을 빌리러 오면 마구 화를 냈다. “부끄럽지도 않아? 손이 왜 그렇게 더럽니?” “으응, 좀 더럽지? 그런데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이라니? 책 빌리러 온 거 아냐?” “맞아.” “그렇게 더러운 손으로 책을 빌려 가려고?” “그러면 안 돼?” “손을 깨끗이 씻고 빌리러 와야지. 그렇게 더러운 손으로 만지면 책이 더러워지잖아!” ..  (231, 277쪽)



  도시사람은 시골사람을 얼마나 이웃이나 동무로 여길까 헤아려 봅니다. 한국전력 공무원과 경찰과 전투경찰은 밀양 할매와 할배를 얼마나 이웃으나 동무로 여길까 생각해 봅니다. 4대강사업을 끝까지 밀어붙은 대통령과 공무원과 개발업자는 이 나라 사람들을 얼마나 이웃이나 동무로 여겼는지 곰곰이 짚어 봅니다. 전쟁무기를 자꾸 만들면서 군대를 크게 거느리는 정치권력자는 북녘을 얼마나 이웃이나 동무로 여길까 따져 봅니다.


  이웃끼리는 전쟁무기를 겨누지 않습니다. 이웃한테는 총이나 칼을 겨누지 않습니다. 이웃끼리는 탱크나 미사일을 겨누지 않습니다. 이웃한테는 핵무기를 겨누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이웃이라면 어깨동무를 하면서 밥을 함께 먹습니다. 우리가 서로 이웃이라면 입시지옥이나 경쟁이나 상업주의 같은 것을 만들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이웃이라면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웁니다. 우리가 서로 이웃이라면 슬기를 밝혀 즐거운 지구별로 가꿉니다. 우리가 서로 이웃이라면 화석연료를 태우는 짓을 멈추고 모든 나라 모든 마을에서 밥·옷·집을 스스로 일구어 쓰레기 없는 맑고 싱그러운 터전을 짓습니다.


  ‘소비자’나 ‘상품 구매자’나 ‘고객’이나 ‘국민’이 아닌 ‘이웃’이라는 이름이 이 나라에 곱게 드리울 수 있기를 빕니다. 4347.10.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