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나 비룡소 창작그림책 59
정진호 / 비룡소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788


밤에 별빛 누리며 자전거 달리기
― 별과 나
 정진호
 비룡소, 2017.8.30.


빛이 없어야 비로소 보이는 빛이 있다. 주변이 조용할 때 비로소 들리는 풀벌레 소리처럼. (책날개 소개글)


  서울에서 밤에 등불 없이 자전거를 달린다면 매우 아찔합니다. 오가는 자동차가 아주 많을 뿐 아니라, 길바닥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터라 자칫 크게 다치거나 목숨까지 잃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시골은? 시골이라 해서 아무 데에서나 등불 없이 자전거를 달리면 여러모로 아슬아슬합니다. 옛날하고 다르게 오늘날 시골은 빈 농약병이나 술병이 논둑길에 구르기도 하고, 경운기가 지나가며 남긴 흙발자국이 제법 두툼하게 곳곳에 있기 일쑤라, 자칫 논바닥이나 도랑에 처박힐 수 있어요.

  시골에서 살며 곧잘 밤자전거를 달립니다. 두 아이를 샛자전거하고 수레에 태워서 슬슬 밤마실을 해 보는데, 일부러 등불을 안 켜고 천천히 달립니다. 늘 오가는 길이더라도 싸목싸목 달립니다. 자동차가 안 지나가는 조용한 시골길이어도 굳이 빨리 달릴 일은 없습니다. 밤에 자전거를 달릴 적에는 아이들한테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말해요. 아버지는 자전거를 달리느라 하늘을 볼 수 없지만, 너희는 우리 시골마을에서 얼마나 별이 쏟아지는가를 밤바람을 가르면서 누려 보라고 이릅니다.


  그림책 《별과 나》(비룡소, 2017)를 읽습니다. 글 없이 그림만 새까맣게 흐르는 그림책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밤에 자전거를 달리는데 등불이 망가졌는지 안 켜진다고 합니다. 이때에 이분은 등불 없이 달리기로 합니다. 따지고 보면 밤에 자전거가 등불 없이 달리면 안 됩니다. 이웃나라에서는 자전거에 등불을 안 켜고 밤에 달리면 ‘자전거 등록 취소’입니다. 자전거도 걷는 사람도 달리는 사람도 모두 아슬아슬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등불 없이 자전거를 달려 볼 수 있다면, 밤에 전깃불빛 아닌 별빛이나 달빛에 기대어 자전거를 달려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새삼스러운 밤빛을 누려요. ‘등불이 없어도 길을 보네?’ 하고 느껴요.

  자전거 아닌 두 다리로 걸을 적에도 이와 같아요. 아이들하고 밤에 틈틈이 뒤꼍이나 마을을 슬슬 거닐어 보곤 해요. 아이들은 처음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말하지만, 어느새 “다 보여!” 하고 말하지요. 밤눈을 트고 나면 하늘을 채운 쏟아지는 별빛이 더욱 환하면서 곱습니다.

  밤눈을 트기에 별잔치를 누릴 수 있다고 할까요. 밤눈을 뜨기에 새로운 밤빛을 맞이할 수 있는 셈일 테고요.


  낮에 낮눈을 뜨면서 마주하는 낮빛이란 무지개빛입니다. 밤에 밤눈을 뜨면서 맞이하는 밤빛이란 별빛입니다. 무지개빛은 우리를 둘러싼 겉빛일 수 있고, 별빛은 우리 마음 깊은 자리에 서린 속빛일 수 있어요. 무지개빛이 있어 별빛이 한결 밝으면서 곱고, 별빛이 있으니 무지개빛이 더욱 환하면서 아름답지 싶습니다.

  그림책 《별과 나》는 한밤에 등불 없이 자전거를 달리면서 마주하는 온갖 빛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떤 빛에 둘러싸여서 살아가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만합니다. 자전거나 걷는 사람을 헤아리지 않는 기차나 자동차 등불빛 때문에 눈이 따갑습니다. 따가운 빛이 지나가고 나면 밤하늘은 더욱 까마면서 별빛으로 환합니다.

  그나저나 이 그림책에는 자전거를 달리는 사람이 나오는데, 꼭 빈틈없이 자전거를 잘 그려야 하지 않습니다만, 조금 더 자전거스럽게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람을 그릴 적에 팔다리나 머리나 눈코입을 아무 데나 붙이지 않듯이, 자전거를 그릴 적에 바퀴나 손잡이나 깔개나 발판이나 뼈대를 아무 데나 붙이면 …… 좀 거석합니다. 2018.1.27.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그림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미들의 소풍 내 친구는 그림책
후루야 카즈호 그림, 기시다 에리코 글, 고광미 옮김 / 한림출판사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새롭게 놀고픈 아이가 있고 아이를 따사로이 지켜보는 동무하고 어른이 있다. 아이는 늘 넘어지고 부딪히면서도 새로운 놀이를 찾아나서고, 동무하고 어른은 상냥하게 바라보면서 기다릴 뿐 아니라 살뜰히 보듬어 주기도 한다. 이런 너그러움하고 넉넉함은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마을을 즐거이 짓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읽기 2018.1.25.


《퀘스천》 14호(2018년 1·2월)

편집부, 인터뷰코리아, 2018.1.10.



  작은아이하고 강추위를 맞서면서 읍내 우체국을 다녀온 이튿날은 집에서 조용히 지낸다. 저녁에는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가 흐르는구나 하고 여기지만, 우리는 텔레비전을 안 두기에 방송이 끝나고 동영상을 사려면 이튿날에 보아야 한다. 한국은 처음이라는 이웃나라 낯선 동무들 몸짓이나 말이 왜 궁금할까? 아무래도 그 나라 사람들 나름대로 살아온 발자취를 고스란히 느끼면서,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스스로 어떻게 어우러질 적에 즐거운가를 읽을 수 있어서 아닐까. 잡지 《퀘스천》 14호를 다 읽었다. 다 읽고 나서 1월호랑 2월호를 묶은 줄 깨닫는다. 다음은 3월호로구나. 이 잡지는 묻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저 묻는다. 물음을 들은 사람은 제 나름대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람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에는 딱히 얽매이는 틀이 없다. 이제껏 깜냥껏 재주껏 마음껏 살아온 대로 한 올 두 올 실타래를 풀어 놓는구나 싶다. 옳거나 바르거나 틀리거나 그른 자리를 따지지 않고서 풀어내는 이야기이기에 더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간다. 가만히 보면 여태 나온 숱한 잡지나 인문책은 ‘묻고 이야기하기’ 같은 흐름이 없이 ‘이것이 옳고 저것이 틀리다’라는 잣대로 갈랐지 싶다. 금긋기를 하면 참말 따분하다. 이야기를 펴야 참으로 재미나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강 신드롬 - 자기계발을 부추기는 세상에서 중심 잡기
칼 세데르스트룀.앙드레 스파이서 지음, 조응주 옮김 / 민들레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 삶읽기 336



잘살기 바람

― 건강 신드롬

 칼 세데르스트룀·앙드레 스파이서/조응주 옮김

 민들레, 2016.8.1.



웰니스는 이제 단지 북미권 일부 대학생들만 추구하기로 다짐하는 목표가 아니다. 오늘날 웰니스는 현대인이 끊임없이 되뇌어야 하는 도덕적 요구가 되었다. (11쪽)


몇십 년 전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라이프 코칭은 이제 꽤 흔한 직업으로 자리잡았다. 전 세계 약 4만5천 명이 라이프 코칭업에 종사하고 있고, 업계 규모는 연간 20억 달러에 이른다. (25쪽)


많은 기업들이 직원 건강에 열을 올리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직원을 건강 프로그램에 참여시켜 인력의 체질 자체를 기업 입맛에 맞게 조정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69쪽)


〈블랙 미러〉 속 사회는 통제사회다. 작은 걸음 하나하나, 사소한 활동 하나하나 다 기록되어 개인점수로 환산된다. (191쪽)



  ‘the wellness syndrome’이라는 책을 한국말로 옮기며 《건강 신드롬》(민들레, 2016)이라 이름을 붙이는데, 그리 와닿지 않습니다. ‘wellness’는 틀림없이 ‘health’나 ‘fitness’하고 다른 영어입니다. 다만 영어사전을 살피니 이 영어나 저 영어나 그저 ‘건강’으로만 풀이하는데, 《건강 신드롬》을 곰곰이 읽으니 ‘웰니스’는 ‘잘살기’를 가리키는구나 싶어요.


  “건강 신드롬”보다는 “잘살기 바람”이라고 할까요. 잘살고 싶다는 바람이 불거나 잘살려고 하는 물결이 인다고도 하겠지요.


  방송이나 사회나 학교에서 사람들더러 ‘잘살자’고 부추긴다고도 할 만합니다. 그런데 방송이나 사회나 학교는 사람마다 다른 모습이나 삶이나 즐거움을 짚으면서 잘살자고 부추기지는 않기 일쑤입니다. 으레 돈에 따라 움직입니다. 돈이 아니고도 잘살 만한 길은 널리 있을 텐데 이 대목은 좀처럼 안 짚어요.


  “잘살기 바람”을 짚는 책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휩쓸리고, 방송이나 사회나 학교가 사람들을 너무 틀에 가두려 한다는 대목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줄거리가 빠졌지 싶어요. 잔뜩 바람을 넣는 얄궂은 사회 얼거리를 낱낱이 짚으려 하기는 하되,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 잘사는 길이란 무엇인가?’라는 대목에서는 깊게 들어가지 않는구나 싶어요.


  얄궂은 사회 흐름을 짚는 이야기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길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알맹이를 쏙 빼놓고 언저리만 툭툭 건드리는 셈이랄까요. 2018.1.26.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읽기 2018.1.24.


《몬순 vol.2》

고형렬·린망·시바타 산키치·꾼니 마스로한띠와 열세 사람 글, 삼인, 2017.12.29.



  한국·일본·중국에서 다섯 사람씩, 인도네시아에서 두 사람, 문학길을 걷는 열일곱 사람 눈길을 그러모은 《몬순 vol.2》이라고 한다. 적어도 네 갈래 문학을 보여준다고 할 테지만, 사람마다 삶길이 다를 테니 모두 열일곱 갈래 문학을 보여준다고 할 테지. 아시아라고 하는 터에서 살아가는 길을 담으려 마음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줄거리로서는 아시아다운 삶을 들려주는구나 싶으면서도, 줄거리를 담은 말을 놓고 보자면 매우 어지럽고 엉성하다. 그러나 이를 글쓴이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 오늘날 지구나 온누리나 한국에서 흐르는 말이란, 삶이란, 살림이란 모두 어지럽고 엉성하니까. 말다운 말이 어디에 있을까. 한국말다운 한국말이란 무엇일까. 껍데기만 한글인지, 알맹이가 한국말인지, 이를 누가 살피거나 짚을 수 있을까. 그러면 문학이란 알맹이나 줄거리만 있으면 되는가. 알맹이하고 줄거리를 어떤 말이나 글로 담아야 문학이 되는가를 글쓴이로서 헤아리지 않아도 될까. 세계나 아시아를 바라보기 앞서, 먼저 이곳을 제대로 바라보아야지 싶다. 모처럼 고흥에서도 얼음이 어는 날씨에 우체국을 다녀오며 시골버스에서 읽다가 조용히 덮는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