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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풀 책읽기

 


  빈 논에 풀이 가득하다. 빈 논이라 말하지만, 정작 빈 논은 아니다. 논에 볍씨를 심어 벼를 거두기에 벼가 자라지 않을 때에는 빈 논이라 말하는데, 벼를 베고 나서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이한 논에는 숱한 들풀이 자라고 들꽃이 핀다.


  아직 괭이질이나 가래질을 받지 않은 논을 바라본다. 논자락 가득 메운 들풀을 바라보고 들꽃을 바라본다. 이렇게 수많은 들풀과 들꽃이 피어난 다음 논을 갈아엎으면 이 풀기운이 흙으로 스며들어 거름이 될까.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한다기에 논풀을 몽땅 뒤엎어 벼 한 가지를 심어 기르는데, 풀은 이 논에 얼마나 뿌리를 내리고 싶었을까. 문득, 참말 ‘빈 논’이라 하는 ‘묵은 논’을 떠올린다. 시골에 깃들던 사람이 숨을 다해 흙으로 돌아가고 나면 더는 손길을 타지 않아 묵는 논이 곳곳에 생기는데, 묵은 논은 한 해만 지나도 온통 풀밭으로 바뀐다. 묵은 논은 세 해쯤 지나면 제법 큰 나무가 자란다. 묵은 논은 열 해쯤 지나면 자그마한 숲이 된다.


  정원사나 조경사가 일구지 않아도 묵은 논은 다시 ‘자연’이 되어 천천히 숲을 이룬다. 사람이 따로 씨앗을 심거나 뿌리지 않아도 묵은 논은 싱그러운 풀과 꽃과 나무가 깃들며 새와 짐승이 보금자리를 틀 ‘자연’이요 ‘숲’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람은 무슨 책을 읽는가. 사람은 어떤 삶을 꾸리는가. 사람은 어디에서 사랑을 속삭이는가. 논자락 풀들 앙증맞게 바람에 살랑이며 짙은 내음과 숱한 이야기를 흩뿌린다. (4345.4.1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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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4-17 13:44   좋아요 0 | URL
정원사나 조경사가 필요하지 않은, 자연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숲노래 2012-04-17 21:20   좋아요 0 | URL
도시 공원도
자연 그대로 잘 살아가도록
예쁘게 보살피고 사랑한다면
참 좋으리라 생각해요
 


 자운영 책읽기

 


  너른 들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시골집을 누릴 수 있기를 꿈꾼 적 있는가 곰곰이 돌아본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지.’ 하는 꿈은 틀림없이 꾸었다. 다만 ‘이렇게 살아가면 좋겠지만 집은 어떻게 얻나?’ 하는 마음이 으레 뒤잇곤 했다. 걱정하는 꿈이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데, 왜 걱정을 뒤잇는 꿈을 꾸었을까. 꿈을 생각하는 삶을 스스로 찾지 않았기 때문일까. 제도권 학교를 탓하거나 누군가를 탓하면서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 아닌가.


  자운영 꽃잎을 바라본다. 봄 들판에 봄빛을 알리던 들꽃을 헤아리니, 맨 처음은 옅은파랑이었고(봄까지꽃), 뒤이어 하양이었으며(별꽃), 다음으로 옅은빨강(광대나물)이었다. 이윽고 보라였고(제비꽃), 노랑이었으며(유채꽃·갓꽃), 옅은하양이나 하양이 갈마들었다(매화꽃). 자운영꽃은 이 가운데 보라빛 제비꽃과 함께 찾아왔다.


  어느 꽃이든 꽃잎이 참 작다. 어느 들꽃이든 키가 작달막하다. 유채꽃은 좀 멀대 같다 할 만하지만, 그리 큰 키라 하기 어렵다. 흔히 유채꽃 흐드러진 들판을 헤아리지만, 사람들이 따로 씨앗을 잔뜩 뿌려 유채밭이 되지, 유채 스스로 처음부터 떼로 몰려 피어나지는 않았다. 아니, 유채도 먼먼 옛날에는 스스로 곳곳에 무리지은 보금자리를 마련했겠지.


  들꽃이 피어나는 자리는 다 다르지만, 차례차례 피어나는 꽃이 좁다란 흙뙈기에 나란히 어깨동무하곤 한다. 흙 한 줌은 수많은 들꽃한테 보금자리가 된다. 서로 즐거이 꽃잎을 벌린다. 언뜻 보자면 서로 제 씨앗을 더 많이 더 널리 퍼뜨리려고 애쓰는 듯 여길는지 모르나, 서로 알맞게 제 씨앗을 남길 뿐, 누가 더 넓게 이 땅을 차지하려 든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이 꽃이 피고 나면 저 꽃이 피고, 저 꽃이 피고 나면 그 꽃이 핀다. 숱한 들꽃이 찬찬히 피고 지면서 들판을 알록달록 어여삐 일군다.


  논둑과 도랑 둘레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자운영 꽃잎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너 자운영을 바라보며 무슨 빛깔이라 이름을 붙여야 하겠니. 어떤 빛이름이 너한테 어울리겠니. 별꽃이 흰빛이라 하더라도 아무래도 ‘별꽃빛’ 아니고는 도무지 나타낼 수 없듯, 자운영꽃 또한 그 어떤 빛이름보다 ‘자운영빛’ 아니고는 참말 나타낼 수 없겠지. (4345.4.1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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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아이 책읽기

 


  둘째 아이가 한손에 볼펜을 쥐고 다른 한손에 빈책을 쥐며 논다. 마치 제 누나가 둘째 아이 무렵일 때에 놀던 모습하고 같다. 아이들은 어버이 모습을 늘 곁에서 지켜보며 하나하나 배운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간다면 어린이집 어른들이나 동무들을 바라보면서 또 무언가를 배울 테지. 아이들하고 나란히 들판에 들놀이나 들마실을 간다면 아이들은 들을 바라보고 느끼며 배우리라. 아이들이랑 뒤꼍 밭뙈기 흙을 갈거나 씨앗 한 알 심는다면 아이들은 흙삶을 바라보고 느끼며 배우리라. 아이들을 수레에 태우고 자전거를 몰면 아이들은 자전거 타는 삶을 바라보고 느끼며 배우겠지.


  내 모든 좋은 모습을 아이들이 바라보고 느끼며 배운다. 내 모든 궂은 모습 또한 아이들이 바라보고 느끼며 배운다. 곧, 나 스스로 오늘 하루를 어느 만큼 아끼고 사랑하느냐에 따라, 아이들 또한 스스로 아끼고 사랑할 하루가 달라진다. 나 스스로 내 꿈을 즐겁게 빚는다면 아이들 또한 저희 꿈을 즐겁게 빚는다. 나부터 예쁜 넋이요 고운 말이라면 아이들은 시나브로 예쁜 넋이랑 고운 말로 저희 마음을 빛내리라.


  둘째 아이도 첫째 아이도 새삼스럽게 새로 배우고픈 이야기가 많다. 두 아이와 살아가는 옆지기와 나 또한 새삼스럽게 새로 배울 이야기가 많다. 아름다운 삶을 새로 일구면서 배우고, 좋은 사랑을 새로 지으면서 배운다. 따스한 봄날이 하루하루 이어진다. (4345.4.1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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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과 새꽃 책읽기

 


  모과꽃을 며칠 뒤부터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집 뒤꼍 모과나무는 키가 작습니다. 처음부터 작은 키는 아니었고, 지난해 새로 보금자리를 틀며 우리 집 뒤꼍에 있던 모과나무 한 그루 가지치기를 하며 키가 줄었습니다. 모과나무 한 그루는 이내 키가 자라겠지요. 가지치기를 했어도 가지마다 새눈이 틉니다. 겨우내 새눈이 아주 작게 맺힌 모습을 보았습니다. 겨울이 끝나고 봄부터 새눈이 터도 좋으련만, 모과나무는 춥디추운 겨울부터 새눈이 작게 고개를 내밀며 옹크렸고, 새봄을 맞이해 하루하루 따스해지자 새눈이 조금씩 부풀면서 이내 한 잎 두 잎 환하게 터집니다.


  아직은 우리 아이들 손톱보다도 작은 여리며 보드라운 잎사귀입니다. 머잖아 새꽃이 송이송이 어여쁘게 터질 무렵에는 나뭇잎 또한 천천히 자라며 한결 굵고 큼지막하게 자랄 테지요.


  모과는 열매가 참 커다란데 꽃잎이 참 작습니다. 꽃잎이 작은 모과나무이기 때문인지 앙 다물며 곧 터질 듯 말 듯하는 봉우리는 더욱 작습니다. 호박은 꽃도 크고 열매도 큰데, 아니 호박꽃 크기를 헤아리면 호박열매가 그만 한 크기가 되겠구나 싶고, 모과꽃 크기를 살피면 모과열매가 그만 한 크기가 될 수 있겠구나 싶고. 그런데, 매화꽃은 그만 한 크기에 고만고만한 열매인데, 벚꽃은 그만 한 크기에 자그마한 열매인데.


  호박은 호박대로 꽃이 예쁘고 열매가 소담스럽습니다. 모과는 모과대로 꽃이 예쁘장하고 열매가 소담소담합니다. 눈부신 열매 맺는 꽃송이들 푸른 들판에 차근차근 고운 무늬를 입힙니다. (4345.4.14.흙.ㅎㄲㅅㄱ)

 

..

 

모과꽃 어떻게 맺는지 궁금하신 분은 이곳으로~

http://blog.aladin.co.kr/hbooks/4784763

 

지난봄,

충청북도 음성에서 맞이한 모과꽃 이야기가 있어요.

지난해에는 모과꽃 이야기를 5월 13일에 썼네요 @.@

 

아아, 전라남도 고흥 봄이란 참 빠르고

참 따뜻하군요.

모과꽃 이야기가

자그마치 한 달이나 빠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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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억이라 하는 돈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 도서관일기 2012.4.12.

 


  국회의원 선거는 끝나고, 붙은 사람과 떨어진 사람이 갈린다. 다른 곳은 어떠한지 나로서는 모르고,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남 고흥을 돌이키면, 이 작은 시골마을에 국회의원 되겠다고 나선 후보자는 자그마치 여섯이다. 게다가 예비후보자로 나와 애쓰던 이들이 꽤 많았다. 국회의원 후보자로 나오더라도 십 억이니 이십 억이니를 가볍게 써야 한다는데, 예비후보자로 나오더라도 몇 억쯤 되는 돈을 가벼이 쓸밖에 없으리라. 모두 해서 열 사람쯤 친다면, 이들이 선거철에 쓴 돈이란 수십 억, 또는 백 억까지 될 수 있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 아닌 전남 고흥이라는 자그마한 시골에서.


  이들은 왜 국회의원이 되려고 할까. 국회의원이 되어야만 나라를 아름답게 바꾸거나 고칠 수 있을까. 국회의원이 되지 않고서는 나라를 아름답게 바꾸거나 고칠 수 없을까. 금배지를 안 달고 시골마을 흙일꾼으로 살아가며 이 나라를 아름답게 바꾸거나 고칠 길을 보여주거나 함께할 수 없을까.


  몇 억이라 하는 돈이라면 시골 논밭을 꽤 넓게 장만할 수 있다. 얕은 멧자락 하나쯤 장만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이 논밭이나 멧자락을 아주 예쁘게 돌보면 된다. 풀약이나 비료를 먹이지 않고 아주 깨끗하게 땀방울만 쏟고 똥오줌 거름을 내면서 흙을 살찌우고 멧자락을 보듬으면 된다. 시골 흙일꾼은 법을 만들지 못하지만, 법이 없어도 즐겁고 착하게 살아간다. 시골 흙일꾼은 신문이나 방송에 날 일이 없다지만, 도시나 시골 어디에서나 좋은 숨결 마시고 좋은 밥 먹을 수 있도록 사랑을 나누어 준다. 시골 흙일꾼은 역사책에 이름이 안 남을 테지만, 지구별 뭇사람한테 예쁜 사랑씨앗을 남길 수 있다.


  선거철마다 지역구에서 예닐곱 사람쯤 몇 억을 들여 논밭이랑 멧자락을 장만해 예쁘게 일구는 삶을 헤아린다면, 전국을 통틀어 천 사람은 넘을 테고, 열 해쯤 지나면 만 사람이 넘을 테며, 백 해쯤 지나면 백만 사람이 훌쩍 넘겠지. 이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정치판 아닌 흙땅 품에 안기며 좋은 사랑을 일굴 수 있겠지.

 

 ..


  우리 식구한테 몇 억이라 하는 돈이 들어오기를 꿈꾼다. 내가 쓴 책이 여러모로 잘 읽히며 글삯을 벌 수 있기를 꿈꾼다. 시골마을 우리 도서관 터를 기쁘게 장만해서 이곳 운동장은 숲으로 돌보고, 낡은 건물은 손질해서 책터로 살찌우며, 텅 빈 관사는 살림집으로 북돋우면 오래오래 이 시골마을 예쁜 사랑 감도는 보금자리로 일굴 만하리라 생각한다.


  나는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려는 사람들한테도 바란다. 부디 국회의원 같은 자리를 꾀하지 말고, 그 돈과 품과 넋으로 이 좋은 시골마을에서 스스로 좋은 흙일꾼 삶을 일구어 이녁 아이들한테 좋은 흙일꾼 사랑을 물려줄 수 있기를 바란다. 기름지게 일군 논밭을 아이들한테 물려준다면, 이보다 더 멋진 선물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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