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쑥 내음 책읽기

 


  태풍이 지나가고 난 눈부신 파란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빨래를 넌다. 마당 귀퉁이에 빨래를 널다가, 가을을 맞이해 새로 돋는 ‘마당 쑥’ 내음을 맡는다. 아침에 풀물을 짤 때에 쑥을 한 주먹 뜯어서 함께 넣는데, 뜯으면서도 쑥내음이 나고, 뜯고 나서도 쑥내음이 감돈다. 봄에 돋는 봄쑥에는 봄내음이 묻어나고, 가을에 돋는 가을쑥에는 가을내음이 묻어난다. 봄에도 가을에도, 또 여름에도 마당 한켠에서 스스로 자라나는 쑥을 뜯어서 날로도 먹고 풀물을 짜서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즐거운가. 게다가 햇볕에 잘 마르는 빨래마다 가을쑥 내음이 배어들 테지. 마당에서 맨발로 노는 아이들 몸과 마음에도 가을쑥 내음이 찬찬히 스며들 테지. 나한테도 옆지기한테도 좋은 내음이 가만히 찾아들며, 언제나 좋은 넋으로 좋은 꿈을 꾸도록 도와주는구나 싶다. (4345.9.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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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놀이터 (도서관일기 2012.9.11.)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도서관이란 책을 갖추는 곳이다. 도서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어느 사람은 가벼운 읽을거리를 바라고, 어느 사람은 마음을 다스리는 읽을거리를 바란다. 어느 사람은 돈벌이에 도움이 될 무언가를 바라고, 어느 사람은 지식이나 정보를 쌓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생각하는 삶에 따라 책을 마주한다. 스스로 생각한 대로 살아가기에, 스스로 살아가는 결에 맞추어 책을 손에 쥔다. 스스로 생각하는 삶결이 오직 돈벌이라면, 굳이 책이 찾아들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는 삶자리가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면, 애써 책이 스며들지 않는다.


  흔히들 사람 있고 아이들 있는 데에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내가 느끼기로는 무엇보다 숲이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숲이 없으면서 도서관만 있다면, 이러한 곳은 책읽기를 못하고 삶읽기도 못하는 데라고 느낀다.


  도서관을 세우려 한다면, 책을 갖출 건물만 지어서는 안 된다. 책을 둔 건물을 둘러싸고 조그맣게라도 숲을 마련해서, 사람들이 책을 숲 한복판에 앉아서 읽도록 이끌어야지 싶다. 사람들한테 가장 모자란 한 가지라면, 도시나 시골이나 바로 숲이라고 느낀다. 숲다운 숲이 있어야 한다. 나무가 자라고 풀이 돋으며 짐승과 벌레가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숲이 있어야 한다. 도토리가 뿌리를 내리고 풀씨가 흩날리는 숲이 있어야 한다.


  숲은 사람들 삶터를 살찌운다. 숲은 아이와 어른 모두한테 놀이터가 된다. 숲에서 살고 숲에서 놀며 숲에서 일하는 사이, 시나브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적에, 비로소 사람들은 스스로 글을 쓰고 책을 빚을 수 있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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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젓가락소나무 책읽기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사람들이 나무젓가락처럼 박아 놓은 소나무를 본다. 숲에도 기차역에도 도시 한켠에도, 소나무를 갖다 심는 사람들은 ‘나무심기’ 아닌 ‘나무젓가락 박기’를 한다. 소나무 아래쪽 가지를 모조리 잘라 없앤 다음 맨 위에만 조금 남긴 나무젓가락이 되게 한다.


  소나무는 이렇게 나뭇가지 몽땅 잘리고 솔잎 몇 남지 않아도 살 수 있을까. 아니, 이렇게 나뭇가지와 솔잎을 몽땅 잘라 없애야 소나무는 이리 비틀고 저리 뒤틀며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용을 쓸까. 사람들이 소나무한테 하는 짓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스스로 깨닫거나 느낄까. 돈과 겉멋에 휘둘리는 사람들이 소나무한테 이런 몹쓸 짓을 한다고만 느끼지 않는다. 여느 사람들조차 이런 소나무가 멋스럽거나 ‘비싸다’고 생각하니, 이런 짓이 끊이지 않는다. 더구나, 나무는 언제나 스스로 씨앗을 맺어 스스로 새끼나무를 퍼뜨리는데, 사람들이 애써 억지로 심어서 기르고 돌봐야(관리) 한다고 잘못 생각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엉터리라서 엉터리짓을 할밖에 없을까.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슬기로운 길하고 동떨어지기에 슬기롭게 살아가며 사랑하는 꿈은 헤아리지 않을까. 도시를 만들며 숲을 밀어 없애는 도시사람 마음이기에, 이 마음에 따라 나무를 나무로 여기지 않고 나무젓가락으로 삼는 노릇일까. (4345.9.1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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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를 물려타는 책읽기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가꾸지 않으며 살아가기에 ‘새로운 한국말’이 예쁘면서 슬기롭게 태어나지 못하곤 한다. 새로운 문화나 예술이 흐드러지게 꽃피운다면, 이러한 문화와 예술에 걸맞게 ‘새로운 한국말’이 흐드러지게 꽃피울 만큼 새로 태어나야 알맞다. 그렇지만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예쁘거나 슬기롭게 안 하느라, 언제나 서양말이나 일본말이나 중국말로 ‘새로운 문화나 예술’뿐 아니라 ‘새로운 문명이나 기계’에다가 ‘새로운 학문과 넋과 이야기’를 나타내려고만 한다.


  이를테면, ‘물려주다’에서 테두리를 넓혀 ‘물려읽기’라든지 ‘물려쓰다’라든지 ‘물려타기’라든지 ‘물려하다’ 같은 낱말을 새로 지을 줄 모른다.


  나는 자전거를 ‘물려탄다’고 생각한다. 내 어버이가 즐겁게 타면서 고이 건사하는 자전거를 내가 물려타고, 내가 물려타면서 즐기고 돌본 자전거를 내 아이가 물려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 자전거나 물려줄 수 없다. 뼈대가 튼튼한 자전거일 때에 물려줄 수 있다. 부품은 열 해 스무 해 지나고 보면 닳거나 바스라져서 갈아야 하곤 한다. 그렇지만 뼈대는 서른 해 쉰 해를 흘러도 그대로 이어간다. 자전거를 손질한다 할 때에는 뼈대를 뺀 부품을 갈거나 손질하지, 뼈대를 손질하는 법이 없다. 튼튼하고 훌륭한 뼈대 하나만 있으면 자전거는 언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어느 삶에서라도 같은 흐름이 된다고 느낀다. 내가 두 아이를 태우는 자전거수레는 뼈대가 아주 튼튼한 자전거이다. 이 자전거는 그야말로 뼈대만 빼고 모든 부품을 다 갈았다. 다만, 아직 ‘바퀴’는 그대로라 할 텐데, 바퀴살이 부러져서 바퀴살을 갈아 넣은 적이 있다. 바퀴도 퍽 튼튼하기에, 뼈대와 바퀴 두 가지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어가리라 보는데, 바퀴도 어느 때에는 새로 갈아야 할는지 모르는데, 뼈대만큼은 훨씬 오래 건사할 수 있다.


  밑앎과 밑삶이 튼튼하며 훌륭한 줄거리일 때에 책이 되리라 느낀다. 밑앎과 밑삶이 허전하거나 얕을 때에는 ‘가벼운 읽을거리’는 될는지 모르나, 두고두고 건사할 만한 책은 못 된다고 느낀다.


  나는 날이 갈수록 신문을 안 좋아한다. 신문이란 그야말로 ‘읽을거리 없는 종이뭉치’라고 느낀다. 날마다 뚝딱뚝딱 뒤집는 정치 이야기가 너무 많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도 부질없는 주식시세표나 방송편성표를 왜 실어야 할까. 누리신문(인터넷신문)이라고 다르지 않다. 누리신문에 실리는 이야기는 하루도 아닌 한나절도 아닌 반나절도 아닌 한 시간조차 값을 하는지 안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고작 하루치 목숨밖에 안 되는 글과 사진과 자료를 실어야 한다면, 신문이 할 몫은 무엇일까. 오려서 두고두고 읽을 만한 글을 얼마나 싣는 신문일까. 곧, 책 가운데에는 예쁘게 보살피는 넋으로 책시렁에 꽂고는, 두고두고 물려읽힐 만한 책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스스로 얼마나 ‘물려읽힐 책’을 장만해서 갖추는가. 나 스스로 열 차례 스무 차례 되읽을 뿐 아니라, 아이들한테 물려읽히고, 이 아이들이 자라서 새 아이를 낳으면, 새 아이한테까지 기쁘게 물려읽힐 책을 장만해서 갖추는가. 그저 바로 오늘 읽어야 한다고 여기는 책을 장만해서 갖추는가. (4345.9.1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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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와 집과 삶과 책과

 


  1000년 살아온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면 1000년이 끄떡없다. 500년 살아온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면 500년이 끄떡없다. 100년 살아온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면 100년이 끄떡없다. 30년 살아온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면 30년이 끄떡없다.


  오늘날 한국에서 집을 짓는 이들은 어떤 나무를 베어서 집을 지을까. 오늘날 한국에는 1000년 살아온 나무를 베어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아니, 한국에는 500년은커녕 100년이나 50년 살아온 나무를 베어 집을 지을 만할까. 아니, 한국에는 앞으로 100년이나 500년이나 1000년 뒤를 살아갈 뒷사람이 집을 짓도록 나무를 예쁘게 건사하는 삶을 누리는가.


  1000년을 생각하며 쓰는 글은 1000년을 읽히는 책이 된다. 100년을 헤아리며 쓰는 글은 100년을 읽히는 책이 된다. 저마다 마음을 기울이는 대로 저마다 다르게 읽히는 책이 된다. (4345.9.1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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