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꾼 ‘싸이’ 독서량 0

 


  노래하는 사람 ‘싸이’는 “독서량 0”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 가운데 “독서량 0”인 사람이 노래꾼 싸이뿐일까 궁금하다. 참 많은 사람들이 “독서량 0”이라고 느낀다. 대통령 뽑는 날이 다가온다 하는데,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들은 책을 얼마나 읽을까. 아니, 책을 읽을 틈을 내기는 할까.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이름과 얼굴을 알리는 데에 바쁜 나머지, 스스로 삶과 넋과 꿈을 북돋우는 책을 어느 만큼 읽을는지 알쏭달쏭하다.


  그런데, “독서량 0”이 아닌 “독서량 1”이면 어떠할까. “독서량 2”나 “독서량 3”은 어떠한가. 0과 1는 얼마나 다르고, 1와 2은 얼마나 다른가. 차근차근 이어 5과 6은, 9과 10은 얼마나 다를까. 더 이어 생각한다. 열한 권 읽는 사람과 열두 권 읽는 사람은 어떻게 다르려나. 열두 권과 열세 권, 열세 권과 열네 권, …… 아흔아홉 권과 백 권, …… 구백아흔아홉 권과 천 권, 이렇게 저렇게 읽는 책 숫자는 서로 얼마나 다르다 할까.


  다른 금이 있을까. 다르다 할 대목이 있을까.


  “읽은 책 없음”과 “읽은 책 한 권”이 그리 다르지 않다면, “읽은 책 없음”과 “읽은 책 만 권” 또한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곧, 책은 ‘숫자’로 읽지 않는다. 책은 책으로 읽는다.


  사람은 사람으로 읽는다. 사귀거나 만나거나 아는 사람 ‘숫자’가 많대서 동무가 많거나 이웃이 많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귀거나 만나거나 아는 사람이 서로서로 얼마나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운가를 살펴야 비로소 ‘사람읽기’가 어떠한가를 헤아릴 수 있다.


  어떤 책을 한 권 읽거나 백 권 읽는가를 돌아보아야지 싶다. 저마다 읽은 책을 어떻게 곰삭혔는가를 살펴야지 싶다. 책 한 권 읽은 뒤로 삶과 넋과 꿈이 어떻게 거듭나거나 새롭게 꽃피었는가를 톺아보아야지 싶다. 종이로 된 책을 안 읽었거나 적게 읽었대서 대수롭지 않다. 종이로 된 책을 많이 읽었거나 꾸준히 읽는대서 대단하지 않다.


  삶을 생각할 노릇이라면, 달삯을 얼마 버는가 하는 숫자나 종이책 몇 권 읽었나 하는 숫자에서 홀가분해져야지 싶다.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대학교 졸업장으로 ‘어느 한 사람 삶이나 넋이나 꿈’을 읽을 수 있거나 살필 수 있거나 가를 수 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대학교 졸업장은 그예 졸업장일 뿐, 이 졸업장이 한 사람을 보여주지 못한다. ‘한 사람이 읽은 책’ 또한 그저 읽은 책일 뿐, 이렁저렁 읽은 책이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을 밝히지 못한다.


  겉으로 내세우는 이름은 모두 덧없다. 여러 가지 좋다거나 훌륭하다거나 멋지다거나 하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좋아지거나 훌륭해지거나 멋져지지 않는다. 스스로 좋게 살아갈 때에 좋을 뿐이요, 스스로 훌륭하게 생각하며 살아갈 때에 훌륭하고, 스스로 멋지게 생각하고 꿈꾸며 삶을 일굴 때에 멋지다.


  나는 노래꾼 싸이 님이 어떤 삶길을 걸었는지 모르고, 둘레에 어떤 이웃이나 동무를 사귀는지 모른다. 무엇을 얼마나 배웠고, 이녁 동생이나 아이한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지 또한 모른다. 그러나, 누가 누구한테 지식이나 정보를 가르치는 일도 부질없다. 게다가, 지식이나 정보를 가르친대서 삶을 배우지 못한다. 오직 온몸으로 삶을 보여주면서 느끼도록 할 뿐이다.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아이를 낳아 돌보지 않는다. ‘읽은 책 권수와 가짓수’가 많아야 아이들을 슬기롭게 가르치거나 이끌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에 아이들한테 사랑을 보여주며 가르치고 물려준다. 꿈이 있을 때에 아이들한테 꿈을 보여주며 가르치고 물려준다. 이렇게 살아가면 넉넉하지 않을까? ‘종이책 독서량 0’이 무슨 대수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메마른 사람들이 딱하지, ‘종이책 읽은 권수가 없’는 사람이 딱하지 않다. (4345.10.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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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토리 줍는 책읽기

 


  9월 2일에 음성 할아버지 생일에 맞추어 나들이를 했고, 9월 28일에 한가위를 앞두고 다시 나들이를 한다. 9월 2일 멧자락을 살피니 도토리가 한창 여물려고 하지만, 푸른 빛이 감돌아 덜 익었다. 한가위 즈음 찾아오면 다 익겠거니 여겼는데, 한가위 즈음 도토리는 거의 모두 떨어졌다. 잘 익었을 뿐 아니라 거의 남김없이 바닥에 떨어져서 흙이랑 하나가 되었다.


  흙하고 한몸으로 섞인 도토리는 천천히 뿌리를 내리며 어린 참나무로 자랄 테지. 나는 아직 도토리나 잎사귀나 줄기나 나뭇가지를 살피면서, 네가 굴참나무인지 갈참나무인지 졸참나무인지 떡갈나무인지 상수리나무인지 가름하지 못한다. 그저 도토리요 그예 참나무라고만 여긴다. 이름을 옳게 살피지 못한다.


  참 마땅한 노릇이리라. 왜냐하면, 내가 도토리를 갈무리해서 도토리를 빻고, 도토리를 갈아 도토리묵을 쑤지 않으니까. 내가 몸소 도토리묵을 쑤면서 먹을거리를 마련한다면, 도토리마다 다 다른 맛과 내음을 느낄 테지. 도토리마다 다른 맛과 내음, 여기에 빛깔과 무늬와 모양을 느낀다면, 나는 눈을 감고도 참나무 이름을 찬찬히 헤아릴 수 있으리라.


  나무도감이나 열매도감 같은 책을 백 번 천 번 읽거나 외운대서 도토리를 알 수는 없다. 잎 그림을 백 번 천 번 그려도 도토리를 알 수는 없다.


  도토리를 주워서 먹어야 안다. 잎사귀를 어루만지며 그늘을 누리고, 숲에서 나물을 캐야 비로소 안다. 숲사람일 때에 숲을 이루는 나무를 알지, 숲사람이 아니고서 어떻게 도토리를 알거나 참나무를 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직 숲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시골사람 되어 시골자락을 누리면, 나무와 풀과 꽃마다 어떤 이름인가를 알지 못하더라도 가슴을 활짝 열어 온갖 빛깔과 맛과 내음을 듬뿍 받아들일 수 있다. 모두모두 반가우며 푸른 빛깔이요 맛이요 내음이로구나 하고 느끼ㅕ 활짝 웃을 수 있다. (4345.10.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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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 책읽기

 


  새벽 일찍 마을 청소를 한다. 한가위 맞이 큰청소이다. 청소를 마치고 바지런히 짐을 꾸린다. 11시 15분 군내버스를 탄다. 읍내로 나아간다. 읍내에서 순천역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탄다. 순천역에서 기차를 기다린다. 기차에 탄다. 자리 넉 칸을 붙인다. 조치원역까지 기차가 신나게 달리고, 조치원역에서 다시 음성역으로 신나게 달린다. 음성역에서 내린 네 식구는 택시를 잡아타고 음성 읍내에 들렀다가 생극면 도신리로 달린다. 이제, 아이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집에 닿는다.


  아침 11시에 길을 떠나서 저녁 20시 무렵에 닿는다. 전남 고흥을 떠나 충북 음성으로 가는 네 식구는, 버스길과 기차길과 택시길에서 숱한 사람들을 만난다. 무뚝뚝한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아이들 바라보며 싱긋 웃는 사람들을 보며, 기차에 딸린 뒷간에서 담배를 피우며 연기 가득 채워 놓은 누군가를 본다. 고단함에 쩔디쩐 사람들을 보고, 맑게 웃거나 홀가분하게 이야기꽃 피우는 사람들을 본다. 옷차림이 눈부시거나 해사한 사람들이 있다. 옷차림이 우중충하거나 무거운 사람들이 있다. 짐이 많은 사람이 있고, 빈손인 사람이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이는 아주머니가 있고, 혼자 다니는 어린이나 푸름이가 있다.


  우리 곁을 스치는 숱한 사람들을 바라본다. 이 사람들한테 우리 네 식구는 숱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보이겠지. 이 사람들은 우리 네 식구를 비롯해 숱한 사람들을 어떤 이웃이나 동무로 바라볼 수 있을까. 나는 이 숱한 사람들을 어떤 이웃이나 동무로 여기면서 바라볼까.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품에 안는다. 스스로 떠올리는 지난날이든, 스스로 생각하는 오늘날이든, 스스로 꿈꾸는 앞날이든, 사람들 누구나 가슴속에 이야기 한 자락 품는다. 돈을 버느라 바쁘든, 무언가에 쫓기느라 힘겹든, 이것저것 하느라 슬프거나 외롭든, 이렇거나 저렇게 기쁘거나 홀가분하든, 스스로 느끼건 안 느끼건 사람들 누구나 이야기를 빚으면서 살아간다.


  저 사람 저 이야기는 어떤 삶이요 어떤 빛일까. 나와 옆지기와 두 아이는 어떤 삶이면서 어떤 빛인가. 우리들은 어떤 삶으로 어떤 꽃을 피우면서 어떤 빛을 이루려 하는가. 나는 어떤 일을 꾀하고 어떤 생각을 돌보면서 어떤 사랑을 나누려 하는가.


  나는 내 모습을 찬찬히 짚으면서 내 몸과 마음을 헤아리고, 내 가슴속에 깃든 이야기가 무엇인지 읽는다. 나는 누구보다 ‘나라고 하는 사람 책’을 읽는다. 내가 나를 읽을 수 있을 때에, 나는 내 옆지기를 읽을 수 있겠지. 내가 나를 읽지 못할 때에, 내 두 아이가 어떤 빛이면서 숨결인가를 읽지 못하겠지.


  나를 사랑하는 내 삶일 때에 나를 둘러싼 이웃과 동무를 따사롭게 바라볼 수 있으리라 느낀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내 삶일 적에 내 둘레에 흐르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못 느끼는 허여멀건 나날이 되리라 느낀다. 사람을 읽기는 아주 쉽다. 내가 나를 읽는 데에서 사람읽기가 열리니까. 사람을 읽기는 아주 즐겁다. 내가 나를 좋아하는 데에서 사람읽기 첫끈을 여니까.


  같은 하늘 아래이지만, 들판과 멧자락과 물과 바람이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르게 삶을 꾸리며 사랑을 일군다. (4345.9.2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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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똥벌레 책읽기

 


  두 아이를 이끌고 저녁마실 나온다. 작은아이는 내 오른손을 잡고, 큰아이는 내 왼손을 잡는다. 마을회관 옆에 서며 달을 올려다본다. 구름이 가득 낀 밤하늘은 달빛을 새롭게 감싼다. 아주 천천히 흐르는 구름은 달빛이 마을마다 예쁘장하게 흩뿌리도록 돕는다. 달을 한참 올려다보고 나서 걷는다. 문득 큰아이가 “저기!” 하고 외친다. 뭐가 있기에 그런가 하고 바라보니 불빛이 조그맣게 반짝인다. 그래, 개똥벌레, 반딧불이로구나. 어쩜, 여기에 개똥벌레가 있구나. 불빛 없는 시골길을 걷는 동안 개똥벌레를 여럿 만난다. 논 옆으로 도랑이 흐르고, 도랑에는 다슬기가 사는가 보다. 개똥벌레한테는 먹이가 있고, 올해부터 마을마다 농약을 아예 안 쓰거나 되도록 적게 쓰기로 한댔으니, 이처럼 저녁에 반짝반짝 빛나는 날갯짓을 볼 수 있구나. 풀벌레 노랫소리 감도는 고즈넉한 마을 곳곳에 개똥벌레가 춤을 춘다. 내 머리 위로, 아이들 머리 위로, 개똥벌레가 부웅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4345.9.2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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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도서관 (도서관일기 2012.8.26.)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시골에 도서관을 여는 일을 헤아려 본다. 시골에는 사람이 적으니까 굳이 도서관을 안 열어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뜻밖에 참 많다. 도서관은 사람들이 자주 찾아가야 하니까 도시에 열어야 하고, 도시에서도 시내 한복판에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 내가 서재도서관으로 꾸리는 ‘사진책 전문’ 도서관 또한,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찾아오기 쉬운 커다란 도시 시내 한복판에 있어야 한다고들 말씀한다.


  도서관이라는 곳을 찬찬히 그려 본다. 사람들이 많이 와서 많이 읽어 주면 책이 반갑게 여기리라 느낀다. 다만, 반갑게 여기는 일이 가장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가장 좋으며 즐거운 일을 해야 한다고 느낀다. 책이란 종이꾸러미로 엮을 때에만 책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 살아가는 몸짓과 말짓과 마음짓 모두 책이라고 느낀다. 곧, 시골에서는 흙을 만지고 햇살을 쬐며 새와 벌레 노랫소리 듣는 일 모두 책읽기가 된다고 느낀다. 가만히 보면, 시골에서는 애써 종이꾸러미 책을 안 읽어도 될 만하다. 그러나, 언제나 삶책과 자연책과 나무책과 풀책을 읽기에, 여기에 다른 한 자리로 종이책을 읽으면서, 마음과 몸을 고르게 살찌울 수 있으리라 느낀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도시에는 ‘종이책 도서관’에 앞서 ‘자연책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도시에는 ‘숲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 도시 아파트나 건물 사이사이 조그맣게라도 숲이 있어야 한다. 자동차가 득시글거리는 찻길 한켠에는 길다랗게 숲길이 이루어져, 이 거님길 걷는 사람들이 나무와 풀을 느끼면서 햇살과 바람을 생각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학교나 공공기관도 자동차 대기 좋은 아스팔트 바닥만 마련하지 말고, 두 다리로 사뿐사뿐 디딜 흙땅과 숲이 얼마쯤 있어야 한다. 방음벽을 세우지 말고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룰 노릇이다. 전철이 지나는 기찻길 옆이든, 고속도로 가로지르는 곁이든, 어디에나 숲이 있고 풀과 나무가 어우러져야지 싶다. 먼저 이렇게 도시가 숲 품에 안기도록 하고 나서야, 종이꾸러미로 된 책을 갖추는 도서관을 마을마다 알맞춤하게 세워야지 싶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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