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빛 책읽기

 


  아직 세 식구였을 적 제주섬을 한 차례 찾아간 뒤 좀처럼 제주마실을 못 한다. 네 식구 되면 제주마실 하기 벅차리라 여겨 세 식구일 적 마실을 하기는 했지만, 참말 네 식구 되니, 아이들 할머니 할아버지 뵈러 가는 마실이 아니고서는 다 함께 움직이기는 만만하지 않구나 싶다.


  셋이 제주마실을 하던 그러께였을 텐데, 제주섬 어디를 보아도 억새가 참으로 많았다. 참말 사람들이 제주로 억새 구경하러 올 만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우리 식구 살아가는 시골마을에도 억새가 퍽 많다. 곳곳이 억새밭이다. 빈논에도 억새밭이 이루어지고, 빽빽이 이어진 논과 논 사이에도 틈틈이 억새밭이 이루어진다. 바다를 메운 언저리라든지 마을을 못으로 바꾼 둘레에는 무척 넓게 억새밭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갈대밭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이웃 시골을 곧잘 찾아다니며 새삼스럽게 느끼곤 하는데, 이 나라 어디를 가도 억새밭이 매우 많다. 그러니까, 제주섬에만 억새가 많이 자라지 않는다. 어느 시골에나 억새가 많이 자란다. 어느 시골에서도 억새 구경을 할 만할 뿐 아니라, 관광객으로 우글거리는 제주섬에서 벗어나 한갓진 여느 시골을 군내버스 타고 달리다가 알맞춤한 곳에 내려 천천히 거닐어 보면, 조용하고 산뜻하며 시원하고 푸른 들과 파란 하늘을 누리면서 억새밭을 즐길 수 있다.


  두 다리로 걷다가, 자전거로 달리다가, 군내버스로 지나가다가, 문득문득 생각한다. 억새밭 예쁘다 여기는 누군가 있어, 이 나라 시골마을 두루 돌며 다 다른 시골자락 다 다른 억새밭 어여쁜 빛과 그림을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로 엮어 선보일 수 있으면 참 멋지겠지. 이른바 ‘대한민국 억새마실’이랄까. (4345.10.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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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책들을 (도서관일기 2012.10.13.)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이 나라에는 도서관이라 할 곳이 몇 군데 없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도서관은 대여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도서관이지, 대여점 구실을 하는 데가 아니다.


  베스트셀러나 소설 몇 가지를 빌려주고 돌려받는 데라면 대여점일 뿐이다. 도서관이란 백 해나 이백 해나 오백 해가 흘러도 알뜰히 건사할 책을 갖추면서 사람들이 ‘책으로 삶을 읽고 살피도록 길동무 구실을 하는 데’라고 느낀다. 곧, 이런 구실을 하는 데가 거의 안 보이기에, 이 나라에는 도서관이라 할 곳이 몇 군데 없구나 싶다.


  베스트셀러나 소설 몇 가지를 쉽게 빌리고 돌려줄 만한 곳도 있어야겠지. 그런데 이 몫은 참말 대여점한테 맡기기를 바란다. 도서관에서는 베스트셀러나 소설 몇 가지도 알뜰살뜰 갖추어 자료로 삼도록 할 수 있으면서, 삶을 밝히고 사랑을 빛내는 온갖 책을 꾸준히 두루 갖추도록 힘써야 한다고 느낀다. 이를테면, 아기를 평화롭게 집에서 낳고 싶은 이들이 도움을 받을 만한 책과 자료를 도서관에서 갖출 수 있어야 하리라 본다. 대학교 아닌 길을 찾고 싶은 푸름이한테 도움이 될 만한 책과 자료를 도서관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하리라 본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삶짓기를 도와줄 길잡이책을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하리라 본다.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사람다움을 건사하도록 이끄는 빛줄기를 보듬는 책과 자료를 도서관에서 살필 수 있어야 하리라 본다.


  사진을 배우려는 이들이 도서관에서 나라 안팎 훌륭한 사진책을 만날 수 있어야겠지. 그림을 배우려는 이들이 도서관에서 나라 안팎 훌륭한 그림책(화집)을 만날 수 있어야겠지. 문학과 문화가 빛날 도서관이어야 한다. 방문객 숫자가 많은 도서관이 아니라, 책손다운 책손이 먼길을 기꺼이 찾아올 만한 도서관이어야 한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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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숨결을 깨우는 소리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36] 오진태, 《바닷소리》(세명출판사,1981)

 


  바닷가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늘 바닷소리를 듣습니다. 들판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들소리를 듣습니다. 멧골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은 노상 멧소리를 듣습니다.


  시골사람이라면 시골에서 나서 자랐다는 뜻이니, 시골소리를 듣고 자란 셈입니다. 도시사람이라면 도시에서 나서 자랐다는 뜻이라, 도시소리를 듣고 자란 셈일 테지요.


  바다에는 어떤 소리가 흐를까요. 들판에는 어떤 소리가 감돌까요. 멧골에는 어떤 소리가 떠돌까요. 시골에서는 어떤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나요. 도시에서는 어떤 소리에 휩싸여 살아가나요.


  소리가 한 사람을 키웁니다. 내음이 한 사람을 돌봅니다. 빛깔이 한 사람을 북돋웁니다. 무늬가 한 사람을 살찌웁니다. 보고 듣고 겪고 마시고 느끼고 마주한 모든 것이 한 사람 숨결로 깃듭니다. 좋고 나쁜 것은 없습니다. 그르거나 맞는 것은 없습니다. 차근차근 흐르고 하나하나 흘러 한 사람 넋으로 이루어집니다.


  1936년에 경상남도 충무에서 태어나 부산 동래구 장전2동에서 살아간다고 하던 오진태 님이 1981년에 내놓은 사진책 《바닷소리》(세명출판사)를 읽습니다. 부산 한켠에서 조용히 내놓은 사진책 《바닷소리》는 그야말로 부산 한자락에서 조용히 읽혔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닷소리를 생각하는 사진을 찍고, 바닷소리를 헤아리는 사진을 읽습니다. “갯가에서 나서 갯가에 살고 있읍니다(맺음말).” 하는 말처럼, 갯가에서 나서 자라며 늘 마주하던 삶을 스스럼없이 사진으로 담습니다.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사진으로 담지 않습니다. 더 구지레하거나 낡게 보이도록 사진으로 찍지 않습니다. 늘 보던 대로 사진으로 담습니다. 늘 느끼던 대로 사진으로 찍습니다. 늘 마주하고 바라보며 겪던 대로 사진으로 옮깁니다.

 

 

 


  글을 쓰는 이들이 이녁 어린 날이나 푸른 삶을 꾸밈없이 적바림하듯, 사진쟁이 오진태 님은 이녁 어린 날이나 푸른 삶 바닷가 바닷소리를 꾸밈없이 사진으로 다시 빚습니다.


  1930년대나 1940년대 바닷가 바닷소리를 1960년대나 1970년대에도 사진기 하나 손에 쥐고서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2000년대나 2010년대로 접어든 오늘날 사진책 《바닷소리》는 오래도록 흐르는 바닷내음이나 바닷빛깔을 들려줄 수 있을까요.


  문득 사진책을 덮습니다. 바닷사람이 바닷소리를 사진책으로 내놓는다면, 들사람은 들소리를 사진책으로 내놓을 만하고, 멧사람이 멧소리를 사진책으로 내놓을 만해요. 그러면, 들사람 이야기를 담은 사진책이나 멧사람 삶자락을 실은 사진책은 우리 둘레에 얼마나 있을까요. 수수하거나 투박하면서 즐겁게 누리는 하루를 고이 담는 사진책은 우리 곁에 얼마나 있는가요.


  오늘날 젊은 사진쟁이는 으레 ‘만듦사진(메이킹포토)’으로 흐릅니다. 사진을 만들지 않고서는 ‘사진찍기’를 할 수 없는 듯 여깁니다. 더없이 마땅한 흐름이라 할 텐데, 오늘날 젊은 사진쟁이는 사진길을 걷기 앞서 어린이집·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만들어진 틀’에서 시험공부만 해야 했어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부터 영어를 배우도록 내몰려요. 어른들은 아이들을 ‘만들어진 틀’에 집어넣고는 다섯 살 어린이나 열 살 어린이일 적에도 서울에 있는 이름난 몇몇 대학교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만들어진 틀’ 바깥에서 홀가분하게 뛰놀도록 풀어놓지 않습니다.


  즐겁게 뛰놀지 못한 아이들이 사진기를 손에 쥔다 해서 ‘삶을 사진으로 빚는’ 길을 깨닫지 못해요. 그동안 길들여진 대로 ‘만들어진 틀 틈바구니에서 무언가 다시 만드는 얼거리’를 짤 뿐이에요. 사진을 찍는 삶과 사진을 읽는 삶을 누리지 못해요. 자꾸 새로운 예술을 하거나 놀라운 문화를 해야 하는 듯 생각하고 말아요.

 

 

 


  오진태 님은 “이제 여기 몇 점 바다 내음의 조각들을 모아 보았읍니다(맺음말).” 하는 말을 붙이며 사진쟁이 말을 마감합니다. 책끝에 실은 오진태 님 모습은 최민식 님이 찍어 주었습니다. 같은 부산에서 서로 사진으로 만나고 사귀었겠구나 싶습니다. 최민식 님은 오진태 님을 반가운 동생으로 여기고, 오진태 님은 최민식 님을 고마운 형으로 여겼을까요. 서로 다른 사진을 찍지만, 서로 같은 사진길을 걸으면서 즐거이 어깨동무를 했을까요. 오진태 님은 1969년에 중앙일보 사진콘테스트 금상을 받고, 1975년에 신동아 초대작품 14점 ‘바다의 삶’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1981년에 《바닷소리》를 내놓은 다음 어떤 사진빛을 이루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바닷사람이 바닷내음 맡으며 바닷소리를 ‘바다삶’으로 들려주는 사진책 《바닷소리》를 읽으며 바다를 그릴 수 있어 즐겁습니다. 바다를 그리면서 내가 살아가는 터전을 그려 봅니다. 바닷내음을 맡으며 내가 살아가는 시골자락 시골내음은 어떤 기운이나 넋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바닷빛깔을 느끼며 우리 집 두 아이가 누리는 시골빛은 어떤 꿈결이 되어 맛난 밥이 될까 하고 가눕니다.


  숨결을 깨우는 소리입니다. 봄에는 제비가 처마 밑으로 찾아와 봄소리를 들려줍니다. 가을에는 처마 밑 둥지를 떠난 제비에 이어 누런 들판을 누비는 뭇새들 노랫소리가 가을소리 되어 찾아듭니다. 시골자락 바람소리에는 별빛이 묻어나고 햇볕이 스밉니다. 시골마을 들소리에는 풀벌레 노랫소리가 천천히 어립니다. 어린 아이들은 마음껏 마당을 뛰놀고, 집안을 뒹굽니다. 까르르 웃고, 넘어져 울고, 밥먹으며 게걸스럽고, 잠들며 색색 고요합니다. (4345.10.14.해.ㅎㄲㅅㄱ)

 


― 바닷소리 (오진태 사진,세명출판사 펴냄,1981.8.23.)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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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꽃 책읽기

 


  아이들 얼굴 크기만 한 꽃을 본다. 요즈막 어느 시골에나 흔하게 피는 코스모스 언저리에 코스모스하고 똑 닮았으나 잎사귀가 무척 큰 옅은분홍빛 꽃을 본다. 먼 데에 있어도 꽃내음이 물씬 풍긴다. 큰꽃이 맑은 내음 풍기는 들판에서 자라는 벼는 이 꽃내음도 담뿍 담으며 무르익겠지. 꽃내음 맡는 아이는 꽃내음도 함께 먹으며 자란다. 꽃잎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꽃바람도 함께 누리며 자란다. 큰아이가 큰꽃 한 송이를 꺾어 논둑길을 달린다. 머리에 핀을 꽂고 핀 사이에 꽃대를 물리며 꽃순이가 된다. (4345.10.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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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질듯 수수알 책읽기

 


  예전 사람들은 수수를 얼마나 심어서 먹었을까. 논자락이나 밭뙈기 끄트머리에 한 줄로 심은 수수가 나락과 함께 알이 터질듯 익는 모습을 보다가 생각해 본다. 다섯 살 큰아이는 수숫대를 바라보며 “옥수수야?” 하고 묻는다. 옥수숫대가 제 키보다 웃자라는 모습을 으레 보았고, 얼핏 본다면 옥수숫대를 닮았다 싶으니까 이렇게 묻는다. 거꾸로, 아이가 어린 나날부터 수숫대를 보고 수수빗자루를 만지며 살았으면 “야, 저기 수수네?” 하고 물었으리라 느낀다.


  수수가 들어간 밥그릇을 받아먹으며 자랐을 뿐, 내가 손으로 수수알을 심은 일은 없다. 수숫대 한들거리는 모습을 시골에서 살아가며 바라보지만, 이 수숫대를 낫으로 베어 수수알을 훑고 수숫대로 빗자루를 엮는 일은 해 보지 않았다.


  시골마을 할머니는 수수빗자루를 엮어 읍내 장마당에 한 자루씩 들고 나와서 팔곤 한다. 흙을 만지는 손으로 수수알을 심고, 수수알 베는 손으로 수수빗자루 엮으며, 수수빗자루 엮는 손으로 가을 열매를 갈무리해서 이듬해 봄에 다시 흙에 한 알 두 알 심는다. (4345.10.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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