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괭이밥풀꽃입니다. 11월 8일에 활짝 피어난 시골꽃이에요. 도시에도 이 꽃은 많이 피지요.)

 

..

 

 꽃을 읽다

 


  골목마실을 할 적에 참 많은 분들이 골목꽃을 알아보지 못한다. 제법 커다란 꽃그릇에서 빨갛고 노랗고 파란 꽃송이가 피어올라도, 꽃그릇 하나 놓인 골목집은 커다란 골목 가운데 아주 작은 점이고, 골목동네는 커다란 도시에서 아주 작은 섬과 같아서일까.


  골목마실을 하면서 골목 틈바구니에서 예쁘게 피어나는 골목꽃을 생각없이 발로 밟는 분이 제법 많다. 어른 손바닥만큼 꽃송이가 올라와야 알아볼까. 어른 손톱만큼 되는 노란 민들레조차 알아보지 않고 밟는 분이 참으로 많다. 아이 새끼손톱보다 작은 괭이밥풀꽃이라든지 봄까지꽃이라든지 별꽃은 거의 아무렇지 않게 밟고 만다.


  시골을 찾아온 도시내기라고 다르지 않다. 가끔 논둑이나 숲길을 함께 거닐며 바라보면, 도시 분들은 으레 유채꽃이든 갓꽃이든, 또 엉겅퀴꽃이든 자운영꽃이든, 또 들꽃이든 풀꽃이든 마음쓰지 못한다. 부추꽃을 본 도시내기는 얼마나 될까. 감자꽃이나 진달래꽃은 알아볼 테지만, 장미꽃과 동백꽃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보면서 예쁘게 들여다보는 도시내기가 너무 적다. 그러니까, 도시에서는 장미잔치를 할 테지만 동백잔치를 하지 못한다. 벚꽃잔치를 하지만 매화꽃잔치라든지 살구꽃잔치나 복숭아꽃잔치 이야기는 듣지 못한다.


  작은 들꽃 하나 들여다보지 못하고, 작은 들꽃에 서린 이야기를 읽지 못한다면, 이 땅 이 나라 이 마을에 있는 ‘이름 안 알려진 작고 여린’ 사람들 목소리와 이야기 또한 못 듣거나 못 읽는 셈이라고 느낀다. ‘이름난’ 몇몇 사람들 ‘이름난’ 몇몇 책은 읽을는지 모르나, 아름다운 삶과 어여쁜 사랑과 아리따운 꿈이 깃든 ‘작은 풀꽃과 풀꽃 같은 사람’, 또 ‘작은 들꽃과 들꽃 같은 사람’ 목소리와 책은 얼마나 가까이하려나.


  그런데, 풀꽃은 도시내기가 저를 알아보지 못한대서 서운해 하거나 슬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풀꽃은 너르며 조용한 시골이 좋아 풀꽃끼리 옹기종이 어깨동무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니까. 들꽃은 도시내기가 저를 알아채지 못한대서 안타까와 하거나 밉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들꽃은 따사롭고 넉넉한 시골이 기뻐 들꽃끼리 알콩달콩 얼크러지면서 재미나게 살아가니까.


  작은 사람들은 작은 사람들끼리 작은 보금자리를 이루어 재미나게 살아간다. 여린 사람들은 여린 사람들끼리 사랑 어린 마을을 일구며 즐겁게 살아간다. 작은 보금자리에는 신문이 없다. 사랑 어린 마을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신문을 안 읽고 신문기자도 없으나, 집집마다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훤히 안다. 텔레비전을 안 보고 방송기자라든지 지식인이라든지 학자라든지 교수라든지 작가라든지 아무도 없으나, 네 철 날씨를 알고 아이들 보살피는 따순 손길을 고이 물려줄 줄 안다. (4345.11.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쌍용’ 이야기를 쓰면 진보인가?

 


  ㅈㅈㄷ신문도 ‘쌍용’ 이야기를 노동자 눈높이에서 쓸 수 있다. 그러면 ㅈㅈㄷ신문 기자는 진보인가? ㅇㅁㅂ 대통령은 ㅈㅈㄷ신문에서도 까거나 헐뜯거나 나무랄 수 있다. 그러면 ㅈㅈㄷ신문 기자는 진보인가? ㅇㅁㅂ 대통령을 손가락질한대서 진보가 될 수 없다. 옛 독재자를 꾸짖는대서 진보가 될 수 없다. ‘쌍용’ 이야기를 글로 쓴 사람은, “쌍용 이야기를 글로 썼을” 뿐이다. ㅇㅁㅂ 대통령을 손가락질한 사람은, “ㅇㅁㅂ 대통령을 손가락질했을” 뿐이다. 옛 독재자를 꾸짖은 사람은, “옛 독재자를 꾸짖었을” 뿐이다.


  이른바 ‘프레임 선점 논쟁’이라든지 ‘진보 논쟁’이란 모두 덧없다. 진보란 ‘목소리 내기’가 아니요, ‘네 편 내 편 금긋기’가 아니다. 스스로 삶을 아름답고 사랑스레 북돋우면서 올바르고 슬기롭게 가다듬는 모습이 곧 ‘진보’이다. 진보는 목소리가 아닌 삶이다. 보수 또한 목소리가 아닌 삶이다. 사람은 누구나 제 목숨을 튼튼히 건사하면서 날마다 새롭게 나아가려고 한다. 한 사람 몸은 보수와 진보가 얼크러지면서 씩씩하거나 튼튼할 수 있다. 한 사람 마음은 진보와 보수가 어우러지면서 예쁘거나 아름다울 수 있다.


  북녘땅에서 굶주리다가 남녘땅으로 어렵사리 건너온 사람을 돕는 사람은 진보인가 보수인가?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오직 ‘사람’일 뿐이다. 누군가 동냥그릇을 들고 우리 집에 동냥을 한다 할 적에, 이이한테 “여보게, 당신 진보요? 보수요?” 하고 물을 까닭이 없다. 동냥하는 이가 굶지 않도록 밥술 나누어 주면 된다.


  꽃은 꽃일 뿐, 진보 꽃도 보수 꽃도 없다. 꽃 이야기를 쓰면 되지, 진보 눈길로 바라보거나 보수 눈썰미로 들여다볼 까닭이 없다. 삶을 쓸 수 있을 때에 삶쓰기가 되면서 삶을 빛낸다. 삶을 쓰지 못할 적에는 겉치레나 껍데기로 진보인 척할는지 모르나, 껍데기 진보나 겉치레 진보는 머잖아 시들시들 사라지고 만다.


  ‘쌍용’ 이야기를 다룬 책은 진보 목소리인가? ‘삼성 반도체’ 이야기를 다룬 책은 진보 목소리인가? 진보도 보수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쌍용’ 이야기를 다룬 책 가운데 하나요, ‘삼성 반도체’ 이야기를 적바림한 책 가운데 하나이다. 제대로 쓴 책은 제대로 쓴 책이고, 겉만 훑는 책은 겉만 훑는 책이다. ‘줄거리(소재)’가 노동자 이야기라서 더 아름다울 까닭이 없다. 줄거리만 가난하거나 여린 이 삶을 다룬대서 더 읽혀야 하지는 않다. (4345.1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을들 유채꽃 책읽기

 


  가을들 사이를 아이와 함께 지나가다가 노란 꽃송이를 본다. 유채꽃일까 갓꽃일까. 잎사귀를 보면 푸르다가도 살짝 까맣게 올라오려는 모습인데, 갓잎은 훨씬 넓게 까만 빛이 올라오니까 갓잎은 아닐 듯한데, 그러면 유채일까 궁금하다. 또는 유채를 닮은 다른 풀은 아닐까 알쏭달쏭하다. 논둑에 다른 풀은 거의 나지 않았고, 다들 추위에 하나둘 스러지는데, 오직 이 녀석만 푸른잎을 달고 꽃송이까지 노랗게 피운다. 며칠 따스한 바람이 불었기 때문일까. 가을에도 퍽 따스한 남녘 날씨 때문일까.


  생각해 보면, 네 이름이 유채꽃이든 갓꽃이든 다른 풀꽃이든 그리 대수롭지 않다. 나는 네 잎을 뜯어서 맛나게 먹으면 즐겁다. 네 노란 꽃송이를 가을날 반가이 맞이하며 예쁘게 들여다보면 즐겁다. 봄에 만날 꽃을 가을에 먼저 만나니, 이러한 삶은 이러한 삶대로 즐겁다.


  아이하고 한참 노란 꽃을 구경하다가 곰곰이 돌이켜본다. 마을마다 가을걷이를 마친 다음에는 ‘경관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빈논에 유채씨를 잔뜩 뿌리곤 한다. 유채는 씩씩하게 꽃을 피우고 씨앗을 퍼뜨린다. 이 씨앗이 바람 따라 곳곳에 흩날리면서 논둑에도 뿌리를 내려 이 가을에 새삼스레 피어날 만하리라 느낀다.


  봄볕을 받아도 푸르며 노랗게 빛나고, 가을볕을 받아도 푸르며 노랗게 빛나는구나. 봄에도 가을에도 따순 사랑과 같이 햇살이 드리우니 언제나 즐거울 테지. 내 마음속 빛줄기는 이 가을에 어떠한 무늬와 모습으로 따사로운 꿈길이 될 수 있을까. (4345.1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꽃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혁명, 아인슈타인

 


  무기를 손에 쥐면 누구나 전쟁일 뿐입니다. 무기를 손에 쥐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기를 쥐는 사람은 누구나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을 벌여 평화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전쟁을 해야’ 합니다.


  호미를 손에 쥐면 누구나 흙일입니다. 호미를 쥐어 전쟁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호미를 쥐면 밭으로 가서 흙을 만집니다. 흙을 만지며 먹을거리를 얻습니다. 흙을 만져 먹을거리를 얻는 이는 식구들 몫만 거두지 않습니다. 이웃하고 넉넉히 나눌 만큼 거둡니다. 서로 배부를 수 있고, 서로 배부르고 보면 다투거나 싸우거나 겨루거나 따지거나 괴롭히거나 등돌리거나 할 까닭도 일도 구실도 없습니다.


  연필을 쥐면 누구나 문학이 됩니다. 돈을 쥐면 누구나 재벌이 됩니다. 부엌칼을 쥐면 누구나 살림꾼, 또는 요리사가 됩니다. 아이들 손을 쥐면 누구나 사랑스러운 어버이가 됩니다.


  어느 길을 가려 하나요. 어떤 길을 가려 하나요. 혁명이란 어떤 길이라고 생각하나요. 혁명을 어떻게 이루려 하나요. 사람들이 도시에 우글우글 모인대서 정치혁명도 문화혁명도 경제혁명도 일으키지 못해요.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고 도시를 버리며 도시를 잊어야 비로소 정치혁명도 문화혁명도 경제혁명도 일으킬 수 있어요. 왜냐하면, 혁명이란 ‘깡그리 부수어 없애는’ 일이 아니라 ‘아름답고 새롭게 짓는’ 일이거든요. 혁명이란 ‘너한테서 빼앗아 다 함께 나누는’ 일이 아니라 ‘나 스스로 새롭게 일구어 서로서로 나누는’ 일이거든요.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님도 ‘혁명’이 무엇인지 똑똑히 깨우친 한 사람입니다.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한겨레,1990)라는 책 31쪽을 읽습니다. “이런 악에 대항해서 소수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아는 한 가능한 길은 하나밖에 없다. 혁명적인 방법으로써 복종하지 않고 협력하기를 거부하는 길, 즉 간디가 걸어간 길뿐이다.” (4345.1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보기
― 사라진 사진들

 


  디지털파일로 찍은 사진이 사라집니다. 틀림없이 즐겁게 찍은 사진인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메모리카드가 잘못되었나? 아니면 메모리카드에 담긴 사진을 셈틀로 옮기지 않고 그만 메모리카드 씻기(포맷)를 하는 바람에 봄눈 녹듯 아무런 자취를 안 남기고 사라졌나?


  필름으로 찍은 사진이 사라집니다. 파노라마사진기를 즐거이 장만해서 낑낑거리고 들고 다니며 우리 아이들이며 우리 마을이며 신나게 찍었는데, 아무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 필름을 거꾸로 끼웠나? 빛을 제대로 못 맞추었나? 때로는 현상소에서 깜빡 하고 한 통쯤 잃어버렸나?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언가 찍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이 사진을 찾아보면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불쑥 어느 방(폴더)에서 사진이 ‘나 여기 있네!’ 하고 나타날는지 모릅니다. 현상한 필름이 어느 책더미나 짐 사이에 찡긴 채 몇 해를 묵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 여기 있었는데 몰랐니?’ 하고 고개를 내민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찍든 저렇게 찍든 종이에 앉히지 않으면 내 앞에서 안 보이는 사진일까 하고 헤아려 보곤 합니다. 종이에 앉힌 사진을 벽에 붙이고는 날마다 곰곰이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사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노릇 아닌가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런데, 사진기 단추를 눌러야 사진이 ‘태어난다’고 할까요. 사진기 단추를 누르지 않고도 사진을 ‘빚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맨 먼저 내 눈으로 바라보고, 내 눈을 거쳐 내 마음에 담으며, 내 눈을 거쳐 내 마음에 담은 모습을 내 가슴속 깊은 데에서 샘솟는 사랑으로 살며시 어루만질 때에, 비로소 ‘사진찍기’를 이루지 않나 싶어요. 사랑 어린 마음으로 찬찬히 아로새기는 사진찍기를 하고 나서야, 시나브로 ‘디지털파일이나 필름이라는 이름으로 사진기를 써서’ 어떤 이야기를 꾸릴 수 있지 싶어요.


  마음속에 있으면 언제나 사진이요, 마음속에 없으면 내 눈앞에 ‘종이에 앉힌 어떤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사진이라 할 수 없는 셈 아닐까 싶어요.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에는 제아무리 이름난 아무개가 찍어 길거리에 큼지막하게 내걸었어도 내 눈에는 안 보여요. 그저 스쳐 지나가며 느끼지도 못해요. 마음에 와닿을 때에는 환하게 떠올리고 활짝 웃으며 이야기꽃 피우는 밑바탕이 되어 주는구나 싶어요.


  삶이 있으며 사진이 있고, 스스로 삶을 잃으며 사진을 잃어요. 마음이 있으며 사진이 있고, 스스로 마음을 놓거나 버리면서 사진 또한 놓거나 버리고 말아요. (4345.1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12-11-09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지털 사진의 경우 한 3개쯤 백업을 해놔야 안심이 되는데 요즘은 워낙 사진들 파일이 커서 백업 기기 사는 것도 만만치 않더군요ㅡ.ㅡ

숲노래 2012-11-10 07:42   좋아요 0 | URL
그래도 외장하드가 예전 생각하면 참 싼값인데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