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꾸리는 마음 (도서관일기 2012.11.21.)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사람들은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간다고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으며 ‘스스로 삶을 북돋울’ 뜻으로 ‘도서관에 간다’고 할 수 있을까.


  줄거리를 훑는대서 책읽기가 될 수 없다. 줄거리를 훑을 적에는 ‘줄거리 훑기’이다. 독후감을 쓰려고 책을 살핀다면 ‘독후감 쓰기’일 뿐 책읽기라 할 수 없다. 널리 이름나거나 알려진 책을 들춘다 할 적에도 ‘이름난 책 들추기’일 뿐 책읽기라는 이름은 붙일 수 없다. 신문을 읽을 때에 모두 신문읽기가 되지 않는다. 신문에 어떤 이야기가 실리는가를 ‘읽고’서, 신문에 어떤 이야기가 왜 실리는가를 다시 ‘읽고’서,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을 새삼스레 ‘읽고’서, 내 삶을 가만히 돌아보며 하루를 되새길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신문읽기라 할 수 있다.


  영화읽기나 노래읽기나 문화읽기나 교육읽기나 정치읽기나 사랑읽기 모두 이와 매한가지이다. 겉을 훑는대서 읽기는 아니다. 겉을 훑으면 겉훑기일 뿐이다. 줄거리를 살피면 그저 줄거리를 살핀다 할 뿐이다. 읽기란 ‘살기(삶)’로 이어진다. 꽃을 읽으며 꽃마음을 가만히 되새기며 내 마음을 돌아본다. 하늘을 읽으며 하늘흐름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내 넋을 되새긴다. 아이들 마음을 읽으며 어버이로서 내 마음을 함께 읽는다. 책을 읽는다 할 적에는, 이 책 하나를 쓴 사람이 어떤 삶을 일구면서 어떤 넋을 돌보아 어떤 꿈을 펼치려 했는가를 내 사랑을 쏟아 읽는다고 해야 알맞다.


  제주에서 책손 한 분 찾아온다. 햇살이 가장 밝고 따스한 낮에 큰아이하고 나란히 도서관마실을 한다. 우리 마을 끝자락에 있는 돌기둥 하나를 구경한 다음 우체국에 들러서 도서관으로 간다. 마을 끝자락 돌기둥은 육백 해쯤 되었는지 천 해쯤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돌기둥을 누가 왜 세웠는지도 모른다. 곰곰이 헤아려 본다. 돌기둥을 세운 사람들 마음을 헤아려 본다. 어디에서 이 돌을 들고 와서 깎아 세웠을까. 이 돌기둥은 얼마나 긴 나날을 비바람과 눈바람 맞으며 이 자리를 지켰을까. 어쩌다 논 한복판이라 할 데에 이 돌기둥이 섰을까. 돌기둥은 논이 없던 때부터 돌기둥으로 있다가, 사람들이 이 언저리에서도 흙을 일구어 논을 만들었을까.


  큰아이는 도서관에 오면 책을 보기도 한다. 동생이랑 둘이 오면 뛰노느라 바쁘고, 어른들이랑 함께 오면 개구지게 뛰놀기도 하지만, 제 눈높이에 맞는 그림책을 집어서 조용히 읽곤 한다.


  고흥 시골마을에 연 도서관에 정작 고흥사람은 아직 거의 안 찾아들지만, 먼 곳에서 사는 분들이 고운 책손이 되어 찾아온다. 먼 곳에서 찾아온 분들은 느긋하게 책을 읽고 살피며 느낄 줄 안다. 그러니까 먼걸음을 하겠지. ‘가까운걸음’이라서 다들 바쁘거나 설렁눈길이지는 않지만, 외려 가까운 자리 사람들은 ‘언제라도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제라도 안 오기’ 일쑤이다. 먼 데서 사는 사람들은 마음 즐겁게 품으며 기쁜 마실을 하며 기쁘게 책을 만지고 쓰다듬을 줄 안다.


  도서관 꾸리는 내 마음을 읽는다. 나는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책을 읽어야 아름답게 거듭난다고 느끼지 않는다. 다문 한 사람이 다문 한 권을 손에 들어 만지작거린다 하더라도, 스스로 슬기롭게 살아가고픈 꿈을 사랑스레 품을 때에 비로소 아름답게 거듭난다고 느낀다. 도서관이란 백만 천만 억만 사람 누구한테나 열린 곳이기는 하지만, 도서관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은, 스스로 가슴속 깊이 꿈을 사랑스레 품는 사람뿐이라고 느낀다. (ㅎㄲㅅㄱ)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1.341.7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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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워서 책읽기

 


  고단한 날에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잠자리에 드러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으면 책 하나 펼쳐 누워서 읽는다. 누워서 책을 읽다가 마당으로 나와 별바라기를 해 본다. 밤바람을 살짝 쐰다. 고즈넉한 마을을 둘러본다. 어둠이 내려앉아 조용하니 예쁜 시골이다.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불을 끈다. 아이들은 새근새근 잘 자거나, 때때로 잠투정을 한다. 쉬가 마렵다며 깨어나 아버지를 부른다. 기저귀에 쉬를 누고는 끙끙거린다. 하루는 길면서 짧다. 하루는 사뿐사뿐 찾아와 나긋나긋 저문다. 칭얼거리는 작은아이를 무릎에 누여서 다독다독 하다가는, 이제 깊이 잠들었다 싶으면 나도 다시 잠자리에 누워 작은아이를 배에 올려놓고, 배에 올린 뒤 아주 깊이 곯아떨어졌다 싶으면 옆으로 눕힌다. 하루를 되새기면, 누워서 하는 일도 퍽 많다. (4345.11.2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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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 책읽기

 


  하느님은 예배당에 없다. 예배당에는 예배당만 있을 뿐이다. 숲에는 숲이 있지, 숲 말고 다른 것이 없다. 다만, 요즈음 숲에는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있다. 자가용 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자가용 창문을 열고 휙휙 쓰레기를 던지기 일쑤라, 시골 들판을 걷거나 자전거로 지나가다 보면 곳곳에서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 버렸구나’ 싶은 쓰레기를 본다.


  하느님은 성경책에 없다. 성경책에는 성경책만 있을 뿐이다. 아이들을 바라보면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들을 느끼고 싶으면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살며시 껴안으면 된다. 어린이 마음을 다루는 책이라든지, 어린이 몸짓을 살피는 방송이라든지, 어린이한테 무엇무엇 가르친다는 교재를 들여다본대서 아이들을 느낄 수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 다른 어떤 지식이나 정보로 다룰 수 없다.


  하느님은 십자가에 없다. 십자가에는 십자가만 있을 뿐이다. 정치권력자는 전쟁영웅한테 훈장을 주고, 무슨무슨 훌륭한 일을 했다는 사람한테 훈장을 준다. 그러면 전쟁영웅이란 무엇인가. 이 나라에서는 전쟁영웅인 그이가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될까. 베트남전쟁 영웅은 어떤 사람일까. 한국전쟁 영웅은 어떤 사람일까. 베트남사람은 한국사람 총에 맞아 죽어도 될 만한가. 괴뢰군이나 인민군이란 없다. 국군도 없고 미군도 없다. 모두 ‘여느 사람’이요 ‘여느 아버지’요 ‘여느 어버이’일 뿐이다. 군인옷을 입었고 멀찍이 떨어졌기에 못 알아챌 뿐, 전쟁영웅이 죽인 적군이란 바로 내 이웃집 아저씨이거나 내 오래된 동무이곤 하다. 문화영웅이나 교육영웅이나 스포츠영웅이란 무엇일까. 십자가에는 십자가만 있듯, 훈장에는 훈장만 있다. 사람을 옭아매는 굴레만 있다.


  하느님은 하늘에 없다. 하느님은 바다에도 땅에도 어디에도 없다. 하느님이 있는 곳은 오직 내 마음속이다. 못 믿겠으면 내 마음을 읽으면 된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 노예교육에다가, 이에 앞서 유치원이니 어린이집이니 유아원이니 보육원이니 하는 여덟 해 바보교육에다가, 나중에는 대학교이니 대학원이니 유학이니 하는 쳇바퀴교육에 허덕이면서, 갓난쟁이일 적부터 서른이 넘을 무렵까지 ‘내 마음속 스스로 들여다보기’를 할 겨를이 없다. 그나마 틈틈이 혼자 여행이라도 다니면 조금이나마 ‘내 마음속 조용히 돌아보기’를 할 텐데, 여행길에 나서면서 느긋하거나 너그러운 마음이 되는 사람은 뜻밖에 퍽 드물다.


  쉽게 말하자면,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하느님인 줄 아무도 모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이녁 마음읽기를 못 한다.


  가만히 마음을 다스리며 생각을 기울여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웃으면 내 아이가 웃고, 내 옆지기가 웃으며, 내 이웃이 웃는다. 익살꾼이 웃겨야 웃지 않는다. 가벼운 내 웃음 한 자락이 훨훨 퍼진다. 내가 찡그리면 내 아이도 내 옆지기도 내 이웃도 몽땅 찡그린다. 내가 사랑스레 활짝 웃으면, 내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웃음꽃이 피어나며 둘레 사람들 마음이 따뜻해진다. 왜 그럴까? 왜 그런지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 몹시 사랑스러운 웃음을 흘리거나 나누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 곁에서는 마치 ‘빛이 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들 하는데, 참말 빛이 나니까 빛이 난다고 느낀다. 왜 그럴까? 왜 환한 사랑 꽃피우는 사람한테서는 빛이 날까?


  생각해야 한다. 느껴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하느님이라서, 저마다 다른 하느님이 저마다 어떤 마음이 되고 어떤 생각이 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이 지구별이 달라진다. 하느님은 예배당에도 성경책에도 십자가에도 없다. 하느님은 바로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기에, 모든 사람이 스스로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려 하느냐에 따라 지구별 목숨이 달라진다. 아주 작은 한 사람이 스스로 삶을 바꾸어 도시를 떠나면 도시도 살고 시골도 산다. ‘도시에 한 사람 자리가 비어’서 도시가 살지 않는다. 도시는 이대로는 몽땅 무너지고 둘레 시골마저 망가뜨린다. 그래서 이런 슬픈 굴레를 깨닫고 도시를 떠나 시골살이를 하겠다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이 한 사람 기운이 도시를 따스히 보듬고 시골 또한 살가이 쓰다듬기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살아날 수 있고, 지구별이 숨쉴 수 있다.


  이 나라 한국이 안 무너지고 버티는 까닭은 삼성이나 에스케이나 무슨무슨 재벌이 수출을 많이 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나라 한국이 안 무너지고 버티는 까닭은 ‘어린이와 젊은이 모두 떠난 시골’에 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씩씩하게 남아서 식량자급율 20%를 지켜 주기 때문이다. 비록 오늘날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농약 많이 쓰고, 풀 한 포기 그대로 건사하지 않지만, 시골에서 숲을 사랑하고 곡식을 거두는 따순 손길이 있기에, 이 손길 힘을 받아 한국이라는 나라 하나 버틸 수 있다.


  잘 생각해야 한다. 이제 시골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시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야 한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도시사람은 ‘쌀조차 다른 나라에서 사다 먹어’야 한다. 아직은 그나마 ‘농약 가득 서린 쌀’이라 하더라도, 이 나라 쌀을 먹지만, 앞으로는 이 나라 값싼 쌀조차 못 먹고, 다른 나라에서 비싸게 사다 먹어야 한다. 곡물재벌이나 씨앗재벌 금고를 두둑히 채우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이 나라 사람들 모든 삶이 얽매이면서 흔들리고 만다.


  사람이 살자면, 시골에서 살아야 마땅하지만, 도시에서 살더라도 사람다움을 건사하고 싶다면, 하느님이 어디에 있는지 깨우쳐야 한다. 스스로 깨우치도록 마음을 닦고 다스리며 아껴야 한다. 시골사람은 누구나, 그러니까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누구나 당신 스스로 하느님인 줄 안다. 당신 스스로 ‘하느님이 내려준 선물 같은 손과 발’로 흙을 만지는 줄 안다.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 되어 흙을 만지고 풀을 만지면서 목숨을 일구는 줄 안다. 도시사람은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직 씩씩하게 살아서 흙을 만지는 동안 하루 빨리 ‘내 마음을 읽어 하느님 찾는’ 일을 해야 한다. 예배당 아닌, 성경책 아닌, 십자가 아닌, 바로 내 마음속에 깃든 하느님을 찾아, 저마다 하루를 어떻게 빚고 하루를 어떻게 누리며 하루를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아름다운가를 깨달아야 한다.


  내 웃음 하나가 퍼져 온누리를 밝힌다. 내 비아냥이나 짜증이 퍼져 온누리를 어둡게 한다. 내 사랑으로 온누리를 따스히 돌본다. 내 거친 말과 막된 몸짓으로 온누리를 뒤흔든다. (4345.1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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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마와 책읽기

 


  아이 어머니는 여러 날 바깥마실을 나갔다. ‘람타’ 공부를 하려고 바깥마실을 나선 지 나흘 밤이 지났다. 닷새째 되는 오늘 두 아이와 복닥거리는 하루를 돌아보면, 아이들과 지내는 나날이란 밥하고 빨래하며 씻기고 쓸고닦는 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새삼스레 느낀다. 내가 먼저 어버이인 나 스스로를 사랑할 노릇이요, 어버이인 나 스스로를 나부터 사랑할 적에 아이들은 스스로를 믿고 즐겁게 뛰놀 수 있다.


  밥만 차려 줄 수는 없기에 고구마를 잔뜩 삶아 준다. 고구마를 먹으면 밥을 안 먹지만, 고구마를 배불리 먹으면 끼니를 넉넉히 잇는 셈이라 생각해 본다. 작은아이는 껍질을 아버지가 먹고 알맹이만 작게 잘라서 하나씩 입에 넣어 준다. 큰아이는 앞뒤 꽁댕이만 잘라서 건네면 껍질째 맛나게 먹는다. 그런데, 큰아이는 그림책을 무릎에 올려놓고 고구마를 먹는다. 책도 읽고 고구마도 먹고, 그렇구나, 재미나게 읽고 놀며 하루를 지내자. (4345.11.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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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빛, 책은 밝은 데에서 읽자

 


  내 눈은 나쁘지 않았다.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 내 눈은 1.5였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고부터 학교에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시키는데다가 운동장에서 뛰놀 겨를이 몽땅 사라지고 보니, 차츰 내 눈이 나빠진다. 빽빽한 감옥과 같은 교실에서 형광등 불빛만 받으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시달리기를 여섯 해 하면서 내 눈은 아주 나빠진다.


  어떤 아이는 이런 곳에서 지내더라도 안경을 안 쓰고 눈알이 똘망똘망 살아남기도 한다. 용한 노릇일까. 집에서나마 눈을 쉬었기 때문에 더 나빠지지는 않았을까.


  곰곰이 돌아보면, 나는 새벽버스나 밤버스를 타고 학교와 집을 오가는 길에도 책을 읽었다. 교과서 아닌 책을 읽으려고 바둥거리며 살았다. 어두운 새벽녘 버스 등불이나 길가에 켜진 등불에 기대어 책을 읽었기에 눈이 나빠졌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눈뿐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 차가운 시멘트교실에서 지나치게 짓눌렸기에 몸뚱이와 마음 모두 깊이 아프면서 고달팠구나 싶다.

  사내라면 모두 끌려가는 군대에서는 강원도 양구 비무장지대에 있었으니 눈길이 확 트이는 멋스러운 터전이라서 눈이 맑아진다고 여길 만한데, 군대 내무반은 학교 교실이나 감옥이랑 똑같다. 어느 모로 보면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 더 어둡고 더 무서우며 더 끔찍하달 만하다. 늘 죽음이 감도는 군대에서 나 스스로 삶을 얼마나 생각했을까. 아니, 모든 것이 온통 죽음인 곳에서 ‘그래,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고 생각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다섯 살 큰아이가 그림책을 펼칠 때면 으레 가만히 바라본다. 넌지시 한 마디 한다. “벼리야, 책을 보려면 밝은 데에서 보자. 몸을 밝은 곳으로 돌려서 책을 보자. 엎드려서 읽어도 좋고 누워서 읽어도 좋아. 다만 밝은 데에서 보면 돼.”


  밝은 빛은 밝은 빛이다. 밝은 빛에 수많은 이야기가 감돌며 찾아든다. 가을날 밝은 빛살을 느낀다. 새롭게 열린 아침에 환하게 흐드러지는 빛줄기를 느낀다. 햇빛은 내 가슴속 빛을 깨운다. 햇빛은 아이들 가슴속 빛을 함께 깨운다. 햇빛은 종이책에 서린 나무 기운을 살그마니 건드리면서 책빛으로 다시 태어난다. (4345.11.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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