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숲노래 책마실


여름꽃 (2021.7.17.)

― 제주 〈몽캐는 책고팡〉



  제주섬 곽지 바닷가에서 아침을 맞습니다. 어제 이야기꽃은 즐거이 마쳤습니다. 제주바다를 보러 제주에 오지 않았습니다. 제주책집을 찾아가려고 제주에 왔습니다. 부릉부릉 쇳덩이가 아닌 두 다리로 이 책집하고 저 책집 사이를 잇는 길을 달리면서 이 고장이 어떤 숨결로 흘러가는가를 느끼고자 합니다.


  오늘 달릴 길을 어림하자니 일찌감치 나서야 합니다. 등짐 책무게를 얼마 줄이지 못 했으니 쉬엄쉬엄 달리며 등판하고 다리를 쉬자고 생각합니다. 사락사락 발판을 굴러 느슨히 나아갑니다. 바닷가하고 등지면서 한라산을 바라보는 길을 달립니다. 나즈막한 바닷길은 수월할 테지만, 바닷길은 부릉이도 사람도 많기에, 부릉이도 사람도 적을 길을 살펴서 달립니다.


  구경터가 아닌 마을 고샅으로 들어서니 한갓집니다. 골목집을 지나고, 우람하게 선 마을나무 곁을 스치고, 땀비를 길바닥에 쏟으면서 스륵스륵 나무숲 사이 조용한 길에 섭니다. 제대로 길을 짚으면서 가는지 엉뚱하게 헤매며 서귀포 쪽으로 빠지는지, 제자리에서 맴돌듯 헤매는지 알 턱이 없습니다. 오가는 부릉이가 드문 길을 나무로 둘러싼 데에 문득 서면서 해바라기를 합니다.


  어디인지 종잡을 수 없더라도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갈 곳을 잃고 거꾸로 달렸으면, 오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면 됩니다. 오르막에 또 오르막이 나와 “으째 책집이 아닌 한라산으로 가는가베.” 싶으면 그만 오르다가 등짐을 내려놓고 고무신을 벗고 발바닥을 쉽니다. 풀밭에 앉아 글종이를 꺼내어 노래꽃(동시)을 씁니다.


  아마 과오름을 지난 듯싶고, 고내봉을 에도는 듯싶습니다. 이러다가 농협하고 더럭어린배움터를 봅니다. 옳거니, 아주 어긋나게 헤매거나 돌지는 않았군요. 어린배움터 옆길을 무시무시하게 달리는 커다란 짐차를 다 보내고서 다시 자전거를 달립니다. 드디어 〈몽캐는 책고팡〉에 이릅니다. 그러나 마침 오늘은 책집을 안 여는 날인 듯싶습니다. 자전거는 돌담에 기대어 놓고서 돌담꽃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닫힌 책집 둘레를 서성이면서 무릎이랑 허벅지랑 허리를 토닥입니다. 어디 우체국이 있어 책짐을 덜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돌담을 낀 고샅에 나무가 크고, 바람은 나뭇잎을 후루루루 흔들며 싸락싸락 물결소리 같은 노래를 들려줍니다. 땀이 다 식습니다. 물 한 모금으로 입을 헹굽니다. 이다음 제주마실을 하는 길에 들를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자전거를 달립니다. 책집이 깃든 마을을 천천히 한 바퀴를 돕니다. 이렇게 이룬 마을에 이렇게 책집이 깃드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손을 흔듭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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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살림 (2021.7.14.)

― 제주 〈책밭서점〉



  나를 기다리는 책은 언제나 나한테 찾아옵니다. 내가 기다리는 책은 마침내 내 품에 안깁니다. 새로 태어나는 책은 아침을 밝히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예전에 깨어난 책은 밤을 밝히는 별빛으로 다가옵니다.


  온누리에 괴롭힘질·들볶음·때리기·태움 따위로 가리킬 일을 모두 녹여내어 푸르게 어깨동무할 수 있는 길을 헤아려 봅니다. 누가 나를 괴롭히거나 들볶거나 때리거나 태우려 했어도, 빙그레 웃으면서 이 모든 멍울짓을 그들한테 되돌려주기보다는 사르르 녹인 따뜻한 빗물이나 이슬이나 눈물로 이 땅에 내려놓으려는 길을 생각합니다. 아이가 넘어질 적에 돌부리나 땅바닥을 탓할 까닭이 없습니다. 넘어진 아이를 빙그레 바라보면서 “자, 일어나서 먼지를 털고 또 달리자!” 하고 속삭이면 아이는 아프거나 다치는 일이 없이 활짝 웃으면서 스스로 빛납니다.


  요즈음 어린이는 ‘존중’이라는 어려운 말을 쓰더군요. 어린배움터(초등학교)부터 길잡이(교사)란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말이로구나 싶습니다. 아이들이 ‘존중’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려나 아리송합니다. 우리말로 쉽게 ‘높이다’나 ‘섬기다’를 쓸 적에 뜻이 제대로 드러날 텐데요.


  그러나 굳이 높이거나 섬겨야 하지 않습니다. “서로 높여 주고 돌봐주는” 길이 안 나쁩니다만, “스스로 사랑하며 서로 사랑하는” 길로 거듭나기에 아름다워요. 사랑이 아닌 몸짓은 사랑이 아니기에 아무리 ‘좋은 뜻으로 존중하려’ 하더라도 으레 어긋난다고 느낍니다. 어려운 말로는 뜻이 제대로 안 드러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몸으로도 펴지 못 하게 마련입니다.


  자전거를 배에 실어 제주로 건너왔습니다. 뙤약볕이 한창인 여름날 자전거를 달리며 제주책집을 천천히 돌아다니려고 합니다. 〈책밭서점〉에 닿아 여러 이야기를 담은 여러 책을 쓰다듬습니다. 거뜬히 짊어져야지요. 책밭에서 길어올리는 이야기밭을 가다듬어 새롭게 글밭을 일구면, 어느새 마음밭이 푸지게 빛나면서 노래밭으로 이어갑니다.


  한 해에 하루이틀을 만나더라도, 이 하루이틀 만남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요. 뱃삯·책값·잠삯을 주섬주섬 모아 책마실길에 섭니다. 책짐을 질끈 메고 달리는 자전거는 길바닥에 땀비를 떨굽니다. 톡톡 내리는 땀비를 따라 오늘자취가 새삼스럽고, 여름빛을 받아들이는 하루가 싱그럽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건널목에서 길가에 자전거를 세워 숨을 고르며 생각합니다. 빗물은 하늘에 낀 먼지를 씻고, 땀은 몸에 붙은 티끌을 씻고, 책은 마음에 남은 응어리를 씻어 줍니다.


ㅅㄴㄹ


《물질과 생명》(앨런 와츠/김형찬 옮김, 고려원미디어, 1991.7.20.)

《인생유전, 쟝 루이 바로의 일생》(쟝 루이 바로/윤동진 옮김, 홍성사, 1983.4.10.)

《東京商銀20年史》(年史編纂委員會, 東京商銀信用組合, 1974.3.21.)

《문화 차이와 인간관계》(에드워드 스튜어트/김성경 옮김, 보성사, 1989.10.20.)

《영어와 더불어 2 학창시절》(조성식, 신아사, 1992.10.31.)

《아름다운 매듭》(권도룡 엮음, 주부생활사, 1979.5.1.)

- 《엘레강스》 79.6.별책부록

《청년마당 32호》(김성수 엮음, 대한YMCA연맹, 1991.9.1.)

《수수께끼 시》(박시향, 주변인의길, 1992.9.10.)

《진눈깨비》(고정국, 서울, 1990.4.25.)

《한라산의 겨울》(김경훈, 삶이보이는창, 2003.3.27.)

《마라도 등대》(문태길, 자유지성사, 1993.3.5.)

《咸錫憲全集 17 民族統一의 길》(함석헌, 한길사, 1984.8.26.)

《トルスト-イ傳 第一卷》(ビリュ-コフ/原久一郞 옮김, 中央公論社, 1941.3.5.)

《養蠶敎科書》(裁桑及飼育の部 엮음, 朝鮮總督府, 1914. 3.15.)

《農業經濟及法規敎科書》(朝鮮總督府 엮음, 朝鮮總督府, 1915. 4.15.)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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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꾸덕살 (2022.9.27.)

― 인천 〈아벨서점〉



  어머니 손은 언제나 누러면서 딱딱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조차 쉬는 날이 없이 일하셨거든요. 어머니는 이따금 심부름을 맡기지만 따로 집안일을 거들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혼자 짊어지려 하면서 “넌 공부나 해.” 하고 핀잔했습니다. 짝꿍이 쉬잖고 일할 적에 다른 짝은 무엇을 할 적에 서로 아름다우면서 즐거워서 사랑일까요? 집안일도 집밖일도 가를 수 없습니다. 모든 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면, 일나눔(가사분담)이 아닌 두레랑 품앗이여야 알맞지 싶어요.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로 일하면서 손가락에 굳은살이 착착 박였습니다. 새벽부터 일하고, 살림을 건사하고, 자전거를 달려 책집마실을 다녀오고, 잠자리에 들기 앞서까지 책을 읽고 종이에 글을 쓰노라면 손가락도 손바닥도 쉴 겨를이 없다시피 합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배움길을 온 언니가 어느 날 “‘굳은살’? 그게 뭐야? 아, 이건 ‘꾸덕살’이라고 하지. ‘굳은살’이란 말이 어딨냐?” 하고 나무랍니다. “꾸덕살이라고요? 그런 말이 있어요?” “허허, 넌 우리말을 배운다면서 우리말도 모르니?” 다시 꾸지람을 듣습니다.


  가만 보면 ‘꾸덕살’이라고도 하지만 ‘옹이’라고도 합니다. ‘옹이’는 나뭇가지 한켠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마치 나무처럼 단단하게 잡힌 살점을 빗대기도 하고, 마음에 멍울처럼 잡힌 아픈 데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저는 1992년부터 제대로 책숲마실을 다녔다고 생각합니다. 이때부터 서른 해 남짓 온나라 책집을 돌면서 바라보노라면, 헌책집지기는 모두 손마디에 옹이나 꾸덕살이 잡혔습니다. 요 몇 해 사이에 새롭게 태어난 마을책집지기 가운데 손마디에 옹이나 꾸덕살이 잡힌 분은 드뭅니다. “책을 만졌다”고 하려면 “흙을 만졌다”고 할 여름지기처럼 손마디도 손발바닥도 나무처럼 옹이가 잡힐 테지요. 〈아벨서점〉 책지기 손마디를 새삼스레 바라봅니다. “아벨지기님 이 손이 책을 만지고 살린 숨결입니다.” 하는 말이 불쑥 튀어나옵니다.


  늙음은 죽음길이되, 철듦은 살림길입니다. 나이만 먹으면 늙은몸이요, 철이 들면 어른빛입니다. 끝이란 꽃이니, 몸을 내려놓고서 삶을 쉬는 길은 꽃으로 피어나 씨앗을 남기는 사랑이에요. 그저 ‘늙음’만이라면 틀림없이 끝입니다. 겉보기로 허름하기에 ‘끝으로 가는 책’이지 않아요. 모든 헌책은 옹이가 맺힌 손마디로 쓰다듬는 숨결을 받고서 새롭게 읽히는 꽃씨로 거듭납니다. 반들반들한 새책을 안 싫어합니다. 다만 꾸덕살로 쓰고 엮어 꾸덕살로 읽는 책을 조금 더 즐길 뿐입니다.


ㅅㄴㄹ


《베스트문고 129 비밀일기》(S.타운젠드/안종설 옮김, 삼중당, 1987.9.20.첫/1990.4.10.중판)

《舊約聖經에서 본 障碍者》(나이또 토시히로/박천만·김경란 옮김, 한국장애자 전도협회, 1989.11.30.)

《방언 연구》(안토니 훼케마/정정숙 옮김, 신망애출판사, 1972.6.1.첫/1991.6.15.중판)

《의산문답》(홍대용/이숙경·김영호 옮김, 꿈이있는세상, 2006.4.15.첫/2006.11.1.2벌)

《잘해 주지 마! 1》(마츠야마 하나코/김재인 옮김, 애니북스, 2012.8.16.)

《잘해 주지 마! 2》(마츠야마 하나코/김재인 옮김, 애니북스, 2012.8.16.)

《정음문고 68 사랑의 交響樂》(G.펠레그리니/이성삼 옮김, 정음사, 1974.5.20.첫/1982.11.30.중판)

《꼴찌 강아지》(프랭크 에시/김서정 옮김, 마루벌, 2008.1.26.)

《광대열전》(김명곤, 예문, 1988.12.31.)

《꿈의 작업》(스트레폰 카플란 윌리암스/노혜숙·오명선 옮김, 청하, 1988.7.20.)

《花壇づくり》(脇坂誠, 保育社, 1969.3.1.)

《드래곤볼 22》(토리야마 아키라/아이큐점프 편집부, 서울문화사, 1993.9.25.2벌)

《드래곤볼 29》(토리야마 아키라/아이큐점프 편집부, 서울문화사, 1993.10.1.3벌)

《엘살바도로 맹그로브 숲의 아이들》(조은숙, 명문미디어 아트팩, 2018.10.1.)

《옛날에 어떤 생쥐가…》(인도 우화/이미림 옮김, 분도출판사, 1978.첫/1997.7벌)

《별아기》(오스카 와일드 글·파이어나 프렌치 그림/김영무 옮김, 분도출판사, 1983.첫/1995.4벌)

《내꺼야!》(레오 리오니/서명희 옮김, 분도출판사, 1987.첫/1996.6벌)

《잠잠이》(레오 리오니/이영희 옮김, 분도출판사, 1980.첫/1995.6벌)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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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 (2022.8.28.)

― 제주 〈책대로〉



  서귀포시에서 제주시로 건너옵니다. 저녁빛이 돌기 앞서 책집을 들르고서 길손집으로 가려고 합니다. “산들보라 씨, 너희 숲노래 씨는 집을 떠나 밖으로 일하러 나올 적에는 언제나 책집에 다닌단다. 오늘은 이 한 곳만 들르고서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려고 해.” “음, 알겠어요. 그렇게 해요.”


  제주시 골목을 걸어서 〈책대로〉에 닿습니다. 지난해에 찾아간 자리가 아닙니다. 그동안 자리를 옮겼군요. 책집지기님은 〈책대로〉를 2021년 11월부터 새터로 옮겼다고 합니다. 새터는 예전보다 작다고 말씀하시지만, 제가 느끼기로는 작다기보다 알뜰하면서 고즈넉한 골목빛이 흐르는 곳입니다. 예전 자리는 큰길하고 가깝지만 부릉부릉 오가는 쇳덩이가 둘레에 많았다면, 새터는 큰길하고 조금 멀면서 마을 안쪽으로 포근히 안깁니다.


  요 몇 달 동안 한자 ‘민(民)’이란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짚고 돌아보았습니다. 둘레에서는 ‘국민·시민·서민’에 ‘민중·민초·인민’ 같은 한자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지만, 저는 ‘민’이 들어간 모든 낱말이 껄끄럽습니다. 한자 ‘민(民) = 눈먼 사람 = 우두머리·힘꾼한테 눈을 빼앗긴 나머지 장님으로 살아가는 사람 = 위에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니 ‘민 = 종(노예)’인 속내요 밑뜻입니다. ‘국민 = 나라종(국가노예)’이고, ‘시민 = 서울종(도시노예)’이고, ‘인민 = 무리종(집단노예)’입니다. ‘민주·민주주의’는 “종(노예)이 살아가는 틀”을 가리킬 텐데, 우리는 “눈을 힘꾼한테 빼앗긴 채 끌려가는 굴레”가 아닌 “스스로 눈뜨고 살림짓고 사랑하는 새길”로 나아갈 적에 위아래 담벼락을 허물면서 힘·이름·돈을 모두 물리치는 어진 숨빛으로 거듭나겠지요.


  한자말이나 영어가 나쁠 일은 없습니다. 그들(우두머리·힘꾼·글바치)은 무시무시한 굴레를 낱말마다 숨겨서 사람들을 길들이려 할 뿐입니다. 숱한 한자말이며 영어이며 어려운 낱말은 그들이 우리를 가두려는 ‘말굴레(언어지옥)’입니다.


  요즈막에 자꾸 드는 생각 가운데 하나인데, ‘시골아이’뿐 아니라 ‘시골어른’도 ‘사라질 판(멸종위기종)’입니다. ‘착한어른’과 ‘참한어른’도 사라질 판이요, ‘착한아이’와 ‘마음껏 뛰노는 아이’도 사라질 판이라고 느껴요.


  삶을 누리고서 멍울만 키우면 미움이 자랍니다. 삶을 맛보고서 사랑을 키우면 기쁘게 나누는 살림꽃이 핍니다. 티없는(솔직한) 마음이 잘못(죄)이라고 여기기는 어려워요. 티없는(솔직) 마음을 티있는(안 솔직한) 눈으로 바라보기에 잘잘못으로 가르고 말아요. 이제는 누구나 새말을 품고 새빛으로 노래할 때입니다.


ㅅㄴㄹ


《모든 것은 흙속에 있다》(이영문, 양문, 1999.2.28.)

《숨은 질서를 찾아서》(R.파인만/박병철 옮김, 히말라야, 1995.7.12.)

《제주문화자료총서 8 제주여성문화》(문화예술과·제주도지편찬위원회, 제주도, 2001.12.10.)

《개미》(베르나르 베르베르 글·파트리스 세르 그림/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2000.1.10.첫/2007.11.30.고침1벌)

《위대한 탄생 19 벽장 속의 괴물》(머서 메이어/이현주 옮김, 보림, 1989.9.15.첫/1995.3.15.15벌)

《오늘 날씨는 물》(오치 노리코 글·메구 호소키 그림/김소연 옮김, 천개의바람, 2020.1.20.첫/2021.9.1.2벌)

《香港, 路面電車の走る街》(永田幸子 사진·小柳 淳 글, 春陽堂, 2015.6.20.)

《Stormy, Misty's Foal》(Marguerite Henry 글·Wesley Dennis 그림, Scholastic, 1963.)

《하급반 교과서》(김명수, 창작과비평사, 1983.5.25.)

《쿠바혁명사》(레오 휴버만·스위지, 지양사, 1984.9.25.)

《군부독재, 그 붕괴의 드라마》(니코스 풀란차스/강명세 옮김, 사계절, 1987.8.2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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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곳에 (2022.8.29.)

― 제주 〈나이롱책방〉



  작은아이한테 묻습니다. “오늘은 새벽 일찍 움직여 오름 한 곳을 올랐고, 〈책밭서점〉 할아버지를 만났고, 밥도 먹었고, 어떠니? 더 걸을 수 있니?” “아직 걸을 만해요.” “아직 걸을 만하다면 힘들다는 뜻?” “음, 더 걸어 봐요.”


  늦여름해가 지는 제주시 한복판을 걷다가 버스를 탑니다. 안골목으로 깃들어 〈나이롱책방〉 앞에 섭니다. 작은아이가 “아버지, ‘나이롱’이 무슨 뜻이에요?” “나이롱? 음, 여러 가지일 텐데, 숲노래 씨는 ‘나는, 이제부터, 삐삐롱스타킹이다.’ 하고 생각해 볼래.”


  디딤칸을 밟고 천천히 들어섭니다. 한쪽에 우리 짐을 내려놓습니다. 책집을 닫을 때까지 얼마 안 남지만, 이곳에서 저녁나절 책내음을 맡고서 길손집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합니다. 걸상에 앉은 작은아이한테 ‘월리’ 그림책을 건넵니다. 꼬물꼬물 그득한 사람밭 그림 사이에서 ‘월리’를 찾는 그림을 들여다보는 작은아이는 기운을 조금 차립니다. “아버지, 이 책 재미있는데요? 히히.”


  그러나 ‘월리’는 이곳에서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아쉬우나 이다음에 다른 데에서 만날 수 있을 테지요. 한글판 ‘월리’는 다 판이 끊긴 듯하나 영어판으로 장만하자고 생각합니다.


  아이 곁에서 함께 ‘월리’를 들여다보다가, ‘포카혼타스’ 펼침책을 넘기다가, 그림을 잘 그려야 할 까닭이 없고, 일을 잘 해내야 할 까닭이 없듯, 글을 잘 써내야 할 까닭이 없다고 느낍니다. 어버이 노릇을 훌륭히 해내야 하지 않아요. 아이도 어버이도 다리가 아프면 쉬고, 지치면 일찍 자고, 풀밭에 드러누워 구름바라기나 별바라기를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즐겁습니다.


  우리는 “글을 못 써도 된다”도 “글을 잘 써야 한다”도 아닌, “그저 삶을 마음에 담아서 생각이라는 씨앗으로 돌보고서 고스란히 말로 들려주는 모습 그대로 옮기는 글”이라면 넉넉하구나 싶습니다. 언제나 “그냥 쓰면 다 아름다운 글”일 테지요. 아이하고 뭔가 남다르게 하루를 보내려 하기보다, 그저 같이 걷고 놀고 얘기하고 쉬고 잠들면 느긋합니다.


  작은아이가 묻습니다. “우리 잠자는 곳에 버스 타고 가면 얼마나 걸려요?” “음, 30분쯤.” “음, 그러면 우리 택시 타고 가요.” “힘들구나.” “아니, 힘들지는 않은데, 그냥.” “그래, 네가 바라는 대로 할게.”


  낮하늘빛은 파랗고 밤하늘빛은 까맣습니다. 파랑이랑 까망 사이에는 하양 보라 빨강 노랑 풀빛이 있습니다. 온누리 어디서나 무지개를 품을 수 있기를 빕니다.


ㅅㄴㄹ


《POCAHONTAS Pop-up book》(Kathryn Siegler 꾸밈/Vaccaro Associates·Eric Binder 그림/Rodger Smith 여밈, Disney Press, 1995.)

《꽃이 온 마음》(조민경, 커넥티드코리아, 2022.4.15.)

《모나미 153 연대기》(김영글, 돛과닻, 2019.11.14.첫/2020.8.31.2벌)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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