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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87 이야기동무, 어깨동무



  이야기를 나눌 동무가 있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야기를 나눌 동무하고 생각을 도란도란 주고받습니다. 나는 스스로 깊고 넓게 생각을 키워서 너한테 들려주고, 너는 너대로 스스로 넓고 깊게 생각을 가꾸어서 나한테 들려줍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을 살찌우니 서로 아름답게 새로운 꽃으로 피어납니다. 새봄과 같은 꽃내음을 나누는 봄동무예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동무는 이내 어깨동무를 합니다. 생각을 주고받는 사이에 마음을 열고, 마음을 열어서 북돋우는 사이에 사랑이 자라요. 어깨동무를 하는 두 사람은 서로 아름다운 숨결로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어깨동무는 곧 놀이동무로 거듭납니다. 함께 놀면서 깔깔 웃습니다. 놀다가 어느새 노래를 불러요. 기쁘게 노니까 기쁜 노래가 저절로 샘솟습니다.


  바야흐로 노래동무로 자랍니다. 노래동무는 놀이동무로서 어깨동무를 합니다. 노래동무는 노래와 놀이를 함께 누리면서 기쁘게 웃으니 웃음동무이기도 합니다. 왁자지껄 이야기꽃을 피우는 두 사람은 이야기동무이기도 해요. 더없이 사랑스럽습니다. ‘살을 섞는 몸짓’이 아니라 ‘마음을 곱게 아끼는 숨결’로 사랑동무가 됩니다. 동무는 끝없이 새로운 동무가 됩니다. 참말 ‘새동무’입니다.


  새동무는 새롭게 웃음과 놀이를 짓습니다. 새롭게 웃음과 놀이를 지으면서 삶을 배웁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삶동무로 나아갑니다. 씩씩하게 한길을 걷는 길동무입니다. 이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배움동무입니다. 함께 배우고 가르칩니다. 서로 배우고 나눕니다. 밥 한 술을 나누고, 옷 한 벌을 나눕니다. 나눔동무이자 밥동무입니다. 살림을 함께 지으면서 가꾸기에 살림동무이기도 합니다.


  두 동무는 씩씩하게 일합니다. 어느새 어른으로 자랐어요. 어릴 적에는 놀이동무였고 배움동무였는데, 어른이 되면서 일동무가 되고 꿈동무가 됩니다. 이제는 서로서로 이루고픈 꿈이 있어요. 서로서로 도와서 저마다 이녁 꿈으로 가는 길에 씩씩한 길잡이 구실을 합니다.


  꿈을 슬기롭게 이루려고 힘쓰는 두 사람은 생각동무입니다. 꿈을 이루기까지 어떤 일을 하면서 삶을 가꾸어야 하는가를 놓고 슬기롭게 생각하니까 생각동무입니다. 생각동무는 생각을 말로도 나누고 마음으로도 나누어요. 그래서 말동무이면서 마음동무요 슬기동무입니다.


  어느덧 두 동무는 저마다 짝꿍을 만나 새롭게 보금자리를 가꿉니다. 저마다 제 집을 가꾸면서 집동무가 되고, 마을동무로 나아갑니다. 차츰 나이를 먹고, 천천히 철이 들며, 시나브로 생각과 마음과 사랑을 깊이 헤아릴 줄 아는 넋으로 튼튼하게 섭니다. 기나긴 나날에 걸쳐서 동무로 지낸 두 사람은 넋동무입니다. 숨동무이자 바람동무입니다. 이제는 너이니 나이니 하는 금이 없습니다. 너와 나는 한넋입니다. 한동무입니다. 두 동무는 저마다 낳은 아이들이 씩씩하게 자라요. 아이들한테 아름다운 씨앗을 물려주었습니다. 씨동무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은 한결 깊고, 철이 자라면서 꿈은 더욱 밝으며, 언제나 씩씩하면서 슬기는 아름답습니다. 빛동무이자 꽃동무로서 둘은, ‘너나들이’가 됩니다. 짙푸른 숲을 가꾸어 아이들한테 물려주기에 숲동무이기도 하고, 바다처럼 너른 가슴으로 살아가니 바다동무이기도 하며, 지구별에서 함께 숨을 쉬고 바람을 타는 동무라서 흙동무이자 별동무이기도 해요.


  해처럼 포근한 가슴인 두 사람은 해동무입니다. 달처럼 까만 밤에도 환하기에 달동무입니다. 무지개처럼 눈부신 빛살이니 무지개동무입니다. 온삶을 함께 걸어왔으니 온동무입니다. 너나들이는 너와 나라는 울타리나 금이 없기에 ‘우리’라는 말 한 마디로 빙그레 웃어요. ‘우리동무’이고 ‘우리님’입니다. 그리고, 고요히 숨을 거두면서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릅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하늘동무가 되면서 ‘님동무’인 ‘하느님’으로 삶을 끝맺습니다. 4348.4.14.불.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숲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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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86 내 뜻대로 해



  어떤 일이든 ‘내 뜻’대로 해야 합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언제나 ‘내 뜻’대로 해야 합니다. 남이 하는 말을 옮겨서, 마치 ‘다른 사람 말’을 ‘내 말’이라도 되는 양 하지 말 노릇입니다. 다른 사람 말은 다른 사람이 하도록 두고, 나는 내 말을 해서 내 뜻을 펴야 합니다.


  네가 내 밥을 먹어 주고 나서 내 똥을 누어 주지 않는 줄 안다면, 내가 할 말은 언제나 ‘내 뜻을 담은 내 말’입니다. 그리고, 이 얼거리를 슬기롭게 알아챈다면, 네가 나한테 사랑을 주어야 사랑이 되지 않는 줄 제대로 압니다. 네가 주어야 사랑이 되지 않아요. 내가 스스로 길어올려야 사랑이 됩니다. 남이 나한테 주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나한테 주는 사랑입니다. 내가 손수 길어올려서 내가 스스로 나한테 주는 사랑입니다.


  내 뜻대로 하지 않으니 사랑을 남이 나한테 주는 줄 잘못 압니다. 내 뜻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이 나한테 사랑을 주지 않는다고 떠들거나 악을 쓰거나 떼를 부릅니다. 내 사랑은 언제나 나한테 있는데, 내가 내 사랑을 안 보고 안 찾으며 안 누린다면, 어떻게 내가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요?


  술을 마시고 싶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술을 마시면 됩니다. 담배를 태우고 싶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담배를 태우면 됩니다. 살을 섞고 싶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살을 섞으면 됩니다. 놀거나 자고 싶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놀거나 자면 됩니다. ‘내 뜻’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보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니까, 덩달아 나도 할 까닭이 없습니다. 다른 데서 보았더니 ‘좋아 보여’서 나까지 휩쓸려서 해야 할 까닭조차 없습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한다면 바로 ‘내 뜻’이 있을 때입니다.


  술 한 가지를 든다면, 술을 왜 마셔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버릇이 되어서 마시나요? 일이 힘들다고 여겨 마시나요? 슬프거나 기쁘다고 여겨 마시나요? 힘들면 힘듦을 풀 노릇이고, 슬프면 슬픔을 달랠 노릇이며, 기쁘면 기쁨을 나눌 노릇입니다. 이러한 일과 술은 하나도 안 이어집니다. 힘드니까 술을 마신다는 말은 늘 핑계입니다. 슬픔이나 기쁨 때문에 술을 찾는 몸짓도 늘 핑계예요. 그냥 술을 마시고 싶으니까 술을 마시면 됩니다. 다른 까닭을 붙일 일이 없어요.


  다른 핑계를 이모저모 붙이기 때문에, ‘내 뜻’이 아닙니다. 내 뜻을 제대로 읽어서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내 뜻’이 아닌 술은 ‘퍼넣기’로 치닫습니다. 내 뜻대로 술을 마시면 한 잔을 홀짝이든 열 병을 마시든 내 몸은 멀쩡합니다. 이런 몸으로는 무슨 일이든 즐겁고 슬기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이 아니라, 힘들다는 핑계나 기쁨·슬픔이라는 핑계를 든다면, 또 회사에서 회식을 한다는 핑계를 댄다면, 내 몸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저 휩쓸리는 물결이 되기에, 그만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 몸이 됩니다.


  눈앞에 잔치밥이 가득 있어서 이것저것 마구 먹는 사람은 배앓이를 합니다. ‘내 뜻’이 아닌 채 ‘퍼넣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내 뜻’이 많이 먹고 싶다고 하면, 많이 먹으면 되고, 이러할 때에는 배앓이를 안 합니다. 스스로 내 뜻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움직인다면, 우리는 늘 ‘참다운 홀가분함’이 아닌 ‘껍데기 자유’를 외치는 몸짓이 됩니다. 참답게 홀가분하지 않은 몸과 마음일 때에는,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할 뿐입니다. 입으로 아무리 ‘자유’를 외친다고 해서 자유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내 뜻’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고 슬기롭게 읽어서 사랑스레 삶으로 녹일 때에 비로소 홀가분하게 섭니다.


  배움길(공부)도 익힘길(훈련)도 모두 ‘내 뜻’에 따라서 합니다. 억지스레 하는 배움길과 익힘길은 모두 곤두박질칩니다. 억지이기에 몸이나 마음 모두 따라가지 못해요. 억지로 버티지 말고, 내 뜻을 생각하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끝까지 버틴다고 하면 그저 ‘버티기’가 될 뿐, ‘배움’이나 ‘익힘’이 안 됩니다. 배우려는 뜻이기에 배우고, 익히려는 뜻이라서 익힙니다. ‘내 뜻’을 아는 사람은 언제나 알맞게 움직이면서 살뜰히 살림을 짓습니다. 4348.3.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숲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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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85 내가 짓는 삶이다



  사회의식에서는 ‘네가 한 일은 네가 책임을 지라’라든지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처럼 말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맞구나 싶은데, 그렇다고 옳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럽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뿌린 대로 거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리사랑 치사랑’이라든지 ‘낳은 사랑 기른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내가 한 일이니 내가 맡아서 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한 일은 내가 스스로 끌어들인 삶이요 일(경험)입니다. 내가 짊어질 굴레는 아닙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서로 도와요. 두레도 하고 품앗이도 합니다. 요샛말로는 ‘이웃돕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 하면, 함께 짓는 삶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짓고 너는 너대로 네 삶을 짓습니다. 우리는 모두 따로따로 살아요. 한집에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따로따로 밥을 먹습니다. 내가 밥을 먹을 적에 네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네가 숨을 쉴 적에 나는 숨을 안 쉬어도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맞는 짝꿍이라 하더라도, 밥을 따로 먹고 똥을 따로 눕니다. 잠도 따로 자야 하고, 몸도 따로 씻어야 합니다. 참말 그래요. 내가 밥을 먹었으니 내가 똥을 누지, 네가 내 똥을 누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힘들어서 내가 쉬지, 네가 내 몫을 쉬어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다 다른 삶을 짓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은 삶’은 ‘우리가 함께 누리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내가 지은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내 이웃이 바라보면서 기쁨을 느낍니다. 내가 지은 어설픈 보금자리를 내 이웃이 바라보면서 혀를 끌끌 찹니다. 내 이웃이 기쁨을 느끼면 내 이웃은 새로운 기운을 얻고, 내 이웃이 혀를 끌끌 차면 이녁은 내 보금자리에 일손을 거들러 옵니다.


  그런데, ‘내가 지은 삶’이 있어야, 내 이웃이 나를 바라보면서 기쁨을 느끼든 도와주러 오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은 삶’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도 안 나타납니다.


  좋거나 싫거나 나쁘다고 따지는 삶이 아닙니다. 그저 삶입니다. 내가 너보다 기운이 조금 세니까 내가 너보다 일을 많이 합니다. 어른이 아이보다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세니까 어른이 일을 도맡아서 하고, 아이는 신나게 뛰놀도록 합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내가 너보다 돈이 조금 넉넉하니까 내 돈을 너한테 줍니다. 네가 나보다 돈이 훨씬 넉넉하니까 네가 나한테 꽤 많은 돈을 나누어 줍니다.


  고요히 흐릅니다. 물은 언제나 고요히 흐릅니다. 가파른 자리라면 거칠게 흐르면서 우렁찬 소리를 내는데, 아무리 가파르더라도 물이 다 쏟아지고 나면 비알은 사라집니다. 물은 다시 반반하게 멈추면서 고요하게 있지요.


  삶이 흐릅니다. 삶은 언제나 고요히 흐릅니다. 오르락내리락 고빗사위도 있어 보이는 삶이지만, 가만히 보면 어떤 고빗사위가 물결을 치더라도 우리 삶은 늘 차분하면서 고요한 자리로 갑니다.


  내가 짓는 삶은 거룩한 일(업적)을 쌓아올리려는 몸짓이 아닙니다. 내가 짓는 삶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즐겁게 웃고 기쁘게 노래하려는 몸짓입니다. 내가 짓는 삶에서 돈을 벌 수도 있고 이름을 얻을 수도 있으며 힘(권력)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름·힘을 거머쥐려고 오늘 이곳에서 살지 않습니다. 나는 늘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이 되어서 씨앗을 바람에 날리려는 뜻으로 오늘 이곳에서 삶을 짓습니다.


  내가 지은 씨앗을 내가 뿌립니다. 내가 심은 씨앗으로 내가 꽃이 되어 새롭게 태어납니다. 내가 지은 삶을 내가 노래합니다. 내가 이루는 꿈을 내 온 사랑을 기울여 아낌없이 노래합니다.


  우리는 ‘책임을 질 만한 일을 스스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기쁘게 웃고 노래할 사랑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짓는 삶은, 내가 짓는 사랑이요 꿈이요 웃음이요 노래요 글이요 춤이요 이야기입니다. 4348.3.24.불.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숲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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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84 보고, 하면, 돼



  “해 보면 돼.”라는 말은 아이나 어른이나 두루 씁니다. 그런데, 이 말을 쓰는 사람 스스로 이 말에 어떠한 힘이 깃들었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 쓰지요. 다만, 이 말을 그냥 쓰더라도 이 말에는 어마어마한 힘이 깃들었기 때문에 이 말대로 됩니다. “해, 보면, 됩니다.” 그리고, 이 말처럼 어마어마한 힘이 깃든 다른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해 봤자.”입니다. 흔히 “해 봤자 안 돼.”나 “해도 안 돼.”나 “해 보니 안 되던걸.”이나 “해도 해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해?”처럼 말합니다.


  자,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해 보면 돼(해 봐 돼).” 하고 노래하면서 스스로 제 마음에 말씨(말로 된 생각씨앗)를 심는 사람과, “해 봤자(해도 해도 안 돼).” 하고 울면서 스스로 제 마음에 말씨(이때에도 말로 된 생각씨앗)를 심는 사람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둘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까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꾸 ‘안 되는 길’만 생각해서 끝끝내 도무지 안 되고야 마는 자리에서 삶을 마치고 죽음으로 갑니다.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꾸준하게 ‘되는 길’을 생각해서 언제나 새롭게 되고 다시 되면서 스스로 거듭나는 자리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고요한 누리로 갑니다.


  아이들이 놀면서 서로 얘기합니다. “난 잘 안 돼.” “아니야, 자 봐 봐. 잘 보라구. 잘 보니?” “응.” “그래, 잘 보면, 너도 할 수 있어.” “나도 할 수 있을까?” “그럼, 나도 하는걸. 자, 다시 해 봐. 너도 돼.”


  하려면 보아야 하고, 보았으면 해야 합니다. 어느 쪽이 먼저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기’와 ‘보기’는 늘 같이 움직입니다. 그리고, ‘하기’와 ‘보기’가 같이 움직이듯이 ‘되기’도 같이 움직입니다. 하면서 보고, 보면서 바로 됩니다. 보면서 하고, 하면서 곧장 됩니다.


  오늘날 사회 얼거리를 보면, 학교에서 아이들을 늘 다그치면서 시험공부를 시킵니다. 시험공부를 시키는 어른(교사와 어버이)은 아이들을 둘로 가릅니다. 한 갈래는 ‘시키면 잘 하는 아이’이고, 다른 한 갈래는 ‘시켜도 못 하는 아이’입니다. 대학입시를 바라보는 제도권학교에서는 으레 ‘우열반’을 가릅니다. 우열반을 갈라서 한쪽은 ‘해 보면 되’도록 이끌고, 다른 한쪽은 ‘해도 해도 안 되’도록 이끕니다. 이러한 제도권학교를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사람들은 길듭니다. 내가 나한테 말을 거는 길을 잊거나 잃습니다.


  정부에서는 왜 모든 아이를 학교에 집어넣는 의무교육을 시키려고 할까요? 아이들이 저마다 스스로 ‘나는 보겠어. 나는 보았으니 하겠어. 나는 했으니 되겠어.’와 같은 생각을 못 하게끔 막으려고 의무교육을 억지로 시킵니다. 아예 법으로 못박아서 모든 아이가 반드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도록 내몰 뿐 아니라, 한번 학교에 발을 들여놓으면 대학교까지 꼭 다녀야 하는듯이 몰아세웁니다. 대학교를 다니면 이제는 ‘도시에서 회사원이 되어, 웃사람이 시키는 일만 죽어라 하다가, 정년퇴직을 하고, 정년퇴직 뒤에는 연금을 받으면서, 정부가 마련한 놀이시설과 휴양시설에서 관광이나 하다가 죽는 길’로 가도록 집어넣어요.


  보험을 드는 사람은 보험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보험을 바라보고 지었으며, 보험에 맞추어 제 삶이 흐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안 아프면서 제 삶을 짓는 사람은 몸이 안 아프면서 제 삶을 지을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눈부시게 튼튼한 몸을 늘 생각하면서 노래하고 웃거든요.


  모든 말은 씨앗입니다. 그래서 ‘말씨’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사회에서 한국말 ‘말씨’는 거의 죽은 말이 됩니다. ‘글씨’는 글로 심는 씨앗입니다. 글 매무새가 글씨가 아니라, 글로 심는 씨앗이 글씨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컴퓨터와 온갖 기계로 글을 쓰도록 사회의식이 우리를 내모니 ‘손으로 짓는 글씨’를 거의 모든 사람이 잃거나 잊습니다. ‘내 그림(카드)’과 ‘내 글(말)’과 ‘내 삶(길)’은 늘 손수 지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삶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를 슬기롭게 바라보아야 하고, ‘말씨’랑 ‘글씨’라는 낱말을 사랑스레 되찾으면서, ‘내 말을 내가 스스로 내 마음에 심는 아름다운 하루’를 열 수 있어야 합니다. 복지정책과 보험제도에 내 몸을 길들이거나 맞추지 말고, 내 삶은 내 넋으로 즐겁게 지어서 기쁘게 누려야 합니다. 4348.4.10.쇠.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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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83 스스로 그리는 그림



  우리는 스스로 그림을 그립니다. 누가 시켜서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면 ‘우리 마음’이 이끄는 대로 스스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학교 정규 교육과정에 맞추어 ‘남이 시키는 말’에 억지로 휘둘리는 그림을 어쩔 수 없이 그려야 합니다. 학교에서 시키는 그림은 점수로 매깁니다. 학교에서 그리라고 시키는 그림은 점수에 따라 등급을 매깁니다. 이리하여,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만 다니면 ‘그림그리기’에서 아주 멀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늘 그림을 그립니다. 무슨 그림을 그리느냐 하면, ‘내 그림’을 그립니다. 내 그림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내 삶’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서 내 그림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낮을 보내면서 내 그림대로 삶을 짓습니다. 우리는 밤에 잠이 들면서 새롭게 내 그림을 그립니다. 이리하여, 내 삶은 ‘아침 낮 밤’으로 흐르는데, 아침에는 그림을 새로 들여다보고, 낮에는 그림대로 살며, 밤에는 새롭게 그림을 그립니다. 종이에 얹는 그림은 무엇인가 하면, 밤에 새롭게 빚는 그림이거나, 아침에 새롭게 바라보는 그림이거나, 낮에 새롭게 짓는 그림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대로 이룹니다. 우리가 그린 그림을 우리가 스스로 이룹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림을 그린 대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새로운 삶을 짓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왜 아무것도 이루지 않을까요? 스스로 ‘아무것도 안 그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그린 삶’을 이룹니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명상’을 이룹니다. 명상이란 무엇일까요? “마음 비우기”라고들 말합니다. “마음 비우기”란 무엇일까요? 마음에 아무런 그림을 안 그리는 모습입니다. 이리하여, 명상을 하는 사람은 ‘마음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대로 나아가는 삶을 이룹니다. 명상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텅 비어’서 ‘가볍다 싶은 몸’이 될는지 모르나, 그 어느 것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마음과 몸이 되고 말아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요? ‘내 그림’을 손수 그려야 합니다. 남이 시키는 그림이 아니라, 스스로 이루려 하는 삶을 그림으로 그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늘 새롭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그림을 내가 새롭게 바라보면서 내 삶을 늘 새롭게 지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내 삶은 제자리를 찾으면서 제대로 빛나고, 제대로 흘러서, 제대로 아름다운 사랑으로 됩니다. 거듭 말하자면, ‘하고 + 보며 + 되다’입니다. 생각을 해서 그림으로 짓고, 그림으로 지은 것을 보며, 그림으로 지은 것이 그대로 되다, 와 같은 얼거리입니다.


  스스로 그리는 그림은 모두 이루어집니다. 이를테면, 내가 전쟁무기를 그림으로 그리면 전쟁무기가 어디에선가 태어납니다. 내가 싸움박질을 그림으로 그리면 내가 싸우든 다른 사람이 싸우든 합니다. 내가 ‘사랑 어린 푸른 숲’을 그림으로 그리면, 나는 사랑 어린 푸른 숲을 누리는데, 내가 아니더라도 내 이웃이 이 사랑 어린 푸른 숲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예술이나 미술이나 문화가 되는 그림이 아닌, 내 삶을 짓도록 스스로 북돋우는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림 솜씨를 자랑하려는 그림이 아니라, 사랑을 담아서 꿈으로 나아가는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려고 미술학원에 다닐 까닭이 없습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내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아야 하고, 내 삶이 언제 어느 곳에 어떻게 있는가를 제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때에 나는 홀가분하게 ‘내 그림’을 그리고, ‘좋고 나쁨이 없’는 사랑으로 그림을 그려서, 이 그림이 그대로 아름다운 삶으로 태어납니다. 4348.3.10.불.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말넋/숲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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