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30 바꾸지 말고 해보기



  얼핏 본다면 제가 하는 일은 “바깥말을 우리말로 바꾸기”로 여길 만합니다. 곰곰이 본다면 제가 하는 길은 “무엇이든 우리말로 그리기”입니다. 저는 “어떤 바깥말도 우리말로 바꾸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삶·살림이든 우리말로 나타내거나 그려 보려고 합”니다. “우리말‘로만’ 바꾸려는 일”이 아니라 “우리말‘로도’ 나타내거나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길을 찾아나섭니다. 한자도 영어도 없던 지난날을 헤아리면서 낱말을 엮습니다. 집밥옷이란 살림살이를 누구나 손수 지으면서 사랑을 나누던 지난날 어떻게 생각을 짓고 말을 지으며 하루를 지었을까 하고 그리면서 낱말을 지어요. 제 다짐말은 “바꾸지 말고 해보기”예요. “저 사람이 잘못 쓰는 말을 바꾸기”를 아예 안 합니다. “저 사람은 저때에 저런 말을 쓰는구나. 그러면 나는 저때에 이렇게 써 봐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쓰는 말은 저 사람이 스스로 생각해야 저 사람이 바꿉니다. 저는 제가 쓰는 말을 여러모로 생각해서 하나씩 짓고, 이렇게 말짓기라는 길을 아이들한테 들려줍니다. “자, 네 생각은 이렇게 나타낼 수 있어” 하고, “보렴, 네 마음은 이처럼 그려낼 만해” 하고 속삭여요. 어른들 틀이 아닌 아이들 길을 열도록 틈을 마련한달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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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29 가리지 않는다



  제가 가리는 책은 딱히 없습니다. 재미없거나 따분하다 싶은 책조차 읽습니다. 안 좋아하거나 안 즐기는 책이란 없습니다. 이 버릇은 푸름이(청소년)로 살던 열일곱 살부터 들였어요. 제가 안 좋아해도 배움수렁(입시지옥)에서는 외워야 하거든요. 푸른배움터를 마치고 말옮김이(통역사) 길을 배우던 열아홉 살에도 모든 책이며 글을 읽어야 했어요. 바깥말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라면, 모든 삶·살림·사람을 알거나 헤아려야 하거든요. 저한테 믿음(종교)이 없어도 믿음책(경전)을 읽어서 믿음이(종교인) 생각을 알아야 합니다. 말옮김이를 배우다 그만두고서 말꽃짓기(사전집필)로 접어든 때가 스무 살인데, 낱말책을 엮으려고 할 적에도 “우리가 쓰는 말은 모든 곳에 걸쳐 다 다른 삶·살림·사람을 나타내는 터”라 어느 책이건 안 가리고 읽을 노릇입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글님이 없이 다 읽지요. 모든 갈래를 아울러야 하고, 그 갈래에서 일하는 사람 못지않게, 때로는 더 깊이 파면서 속내나 뒷모습까지 읽어야 비로소 낱말풀이를 하고 보기글을 붙일 수 있어요. 이런 버릇으로 살며 아이를 낳아 돌보자니 홀가분하더군요. 아이는 모든 놀이를 바라고, 모든 사랑을 바라보거든요. 다 만지고 듣고 하고 누리고 싶은 아이는 길잡이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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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28 흰밥 누런밥



  우리 삶을 책으로 갈무리해서 나누기에 책을 펴면 우리가 미처 겪거나 보거나 알지 못했던 일을 마주하면서 배웁니다. 그러나 책에 적힌 삶은 한 줌조차 안 됩니다. 살아낸 이야기를 책으로 풀어내는 분이 꽤 늘었으나 모든 삶이 종이책으로 태어나지 않고, 삶을 책으로 풀어내어도 온자취를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다른 책(자료)을 바탕으로 자취(역사)를 살피기 일쑤인데, “글로 안 적힌 자취”가 허벌납니다. 거의 모두라 할 삶은 글(책·자료)로 안 남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남을까요? 바로 몸뚱이에, 마음에, 생각에, 말에 남지요. 다른 글(자료·기록)을 바탕으로 새글(새책)을 쓴대서 나쁘지 않습니다만, 다른 글을 넘어 이웃 살림·삶·자취·눈물웃음·노래·일놀이에다가 숲을 두루 헤아릴 노릇입니다. 이렇게 헤아리지 못하기에 ‘흰밥·누런밥’ 같은 말을 모르지요. ‘백미·현미’라 해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싸움판(군대)에서는 순이(여성)만 노리개로 삼지 않습니다. 돈이 있으면 순이를 노리개로 사지만, 돈이 없으면 돌이(남성)를 노리개로 삼아요. 그나마 “순이 노리개(이성 성폭력)”는 조금 불거집니다만 “돌이 노리개(동성 성폭력)”는 거의 못 불거져요. 글보다 삶을 읽고 밝혀야 삶을 슬기로우며 사랑스레 추스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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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꾼, 아니 어떤 "지식 권력자"가

"남성 위안부는 없다" 하고 글을 쓰기에

어쩜 이렇게 삶과 살림과 자취도 모르며

글을 함부로 쓰는가 하고 놀랐다.


그러나 삶과 살림과 자취도 모르기에

글을 함부로 쓰겠지?


그 "지식 권력자"는 우리나라를

"안티조선인 사람"과 "안티조선이 아닌 사람"으로

갈라서 보고

이 틀에 스스로 갇히면서 "지식 권력"을 펴더라.


스스로 "살림꾼"이라면 틀을 가르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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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27 교과서



  저는 ‘교과서’라는 낱말을 안 쓰고 ‘배움책’이라 합니다. 글에는 ‘배움책(교과서)’처럼 쓰지요. 일본사람마냥 굳이 ‘교과서’란 이름을 쓸 까닭이 없어요.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터를 헤아리면서 우리 스스로 즐겁고 아름답게 나눌 말씨를 찾아서 새롭게 짓고 스스럼없이 쓰면 됩니다. 어린배움터에 처음 들어갈 여덟 살 어린이한테 ‘교과서’란 이름은 얼마나 낯설까요? ‘교사·학교·교장’이란 낱말을 얼마나 알아차릴까요? “배우려고 배움터에 들어가서 배움책을 곁에 둔단다.”처럼 수수하고 쉽고 부드러이 들려줄 노릇이지 싶습니다. 제가 여덟 살이던 1982년에 어린배움터에 들어가서 열아홉 살에 푸른배움터를 마치기까지 받은 배움책은 어쩐지 재미없을 뿐 아니라 너무 겉훑기에다가 온통 거짓말투성이였다고 느꼈습니다. 배움책이라면서 배울 만하지 않기에 스스로 배우려고 스스로 ‘배움책 아닌 여느책’을 끝없이 찾아나섰습니다. 아무도 저한테 이렇게 안 시켰어요. 도리어 “그렇게 교과서 아닌 책을 읽으면 시험점수 떨어진다”고 나무라더군요. 저는 ‘높은 줄’에 설 뜻으로 배움책을 펴지 않습니다. 스스로 ‘열린 눈·트인 넋·맑은 길’이 되고 싶어 배움책을 내려놓고, 배움터(제도권학교)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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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26 꾸밈없이



  할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꾸미고 자시고 할 틈이 어디 있나요? ‘꾸밈없이 쓰는 글’이 아닙니다. 꾸밀 일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스스로 살아낸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기에도 온하루를 다 쓸 판이거든요.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며 사랑은 우리 숨결을 글로 여미기만 해도 글빛이 주렁주렁 맺히기 마련입니다. 글쓰기는 집살림을 하는 하루랑 같아요. 밥을 꾸미면서 하지 않아요. 빨래를 꾸미면서 하지 않아요. 비질이나 걸레질이나 설거지를 꾸미면서 하지 않아요. 젖먹이를 돌보며 자장노래를 부르는 자리에서 꾸밀 일이 없어요. 아이 손을 맞잡고 같이 놀 적에 뭘 꾸미나요? 우리 스스로 살아가는 오늘은 ‘꾸밈’이 아닌 ‘살림’입니다. 누구나 다 다르게 ‘살림’으로 보내는 나날입니다. 다만 오늘날 이 터전에서는 억지웃음(감정노동)을 짓는 분이 너무 많다 보니 그만 스스로 마음빛을 잊거나 잃고 말아서, 붓을 손에 쥘 적에 그만 ‘꾸미’더군요. 아프면 앓으면 됩니다. 슬프면 울면 됩니다. 기쁘면 웃으면 됩니다. 즐거우면 노래하면 됩니다. 모두 삶이에요. 눈물도 살림이고, 웃음도 사랑입니다. ‘꾸밈없이 쓰는 글’이 아닌 ‘우리 삶을 스스로 쓰는 글’입니다. ‘꾸밈’이란 낱말을 생각하지 말고 ‘살림사랑’을 생각해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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