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전화를 흘린 하루



  아침 일찍 길을 나서다가 시골버스에서 손전화를 흘렸습니다. 흘린 손전화를 되찾지 못했습니다. 자리에 흘렸구나 하고 깨닫고는 버스로 돌아가서 둘러보았지만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잃어버린 손전화를 새로 장만해야 하니 일이 갑자기 생기고 돈도 나갈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오늘 하루는 아주 길었습니다. 잃은 손전화를 찾으려고 뛰어다니느라 길었다기보다, 손전화 없이 시골길을 걷고, 집일을 조금 건사하다가 등허리를 펴려 눕고, 저녁일을 보고, 작은아이하고 누워서 말을 섞고, 이모저모 하는데 며칠이나 몇 해쯤 흐른 듯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손전화를 손에 쥐면서 매우 먼 곳에 있는 벗이나 이웃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너무 많은 말에 치이느라 하루를 잃을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놓아 온나라를 하루 만에도 오간다지만, 막상 그리 빨리 오가면서 하루가 더 길어졌을까요? 오히려 하루가 더 짧고 바쁜 삶은 아닐는지요? 우리가 책을 읽을 수 있다면 하루가 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책을 못 읽는다면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tsf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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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책집, 한칸책터



  책집은 만 평이나 십만 평이어야 하지 않습니다. 책터는 백 평이나 천 평쯤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책집이든 책터이든 만 권이나 십만 권이나 백만 권쯤 갖추어야 하지 않습니다. 한 뼘만큼 작은 책꽂이를 둔 책집이어도 좋습니다. 한 칸짜리 책시렁을 놓은 책터여도 아름답습니다. ‘한뼘책집’하고 ‘한칸책터’를 곳곳에서 누구나 느긋하게 누릴 수 있으면 사랑스럽습니다. 으리으리한 집을 짓는 도서관이 없어도 됩니다. 마을 한켠에, 골목 어귀에 책꽂이 하나 두고서 ‘한칸도서관’을 꾸며도 되어요. 전시관이나 공연장이나 약국이나 빵집 한켠에 ‘한켠책집’을 꾸며 놓고서 어슬렁어슬렁 다니다가 책 하나 장만해서 가슴에 품을 수 있는 길도 아름답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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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더라도



  책을 읽더라도 이웃님 삶을 제가 고스란히 따라가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웃님 삶을 지켜보면서 배울 뿐입니다. 제가 책을 읽을 적에는 저 스스로 앞으로 새로 지을 살림을 얼마나 슬기롭고 고우면서 착하게 거듭나는 길을 걸을 적에 즐거울까 하고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종이라는 책도 읽고, 바람이라는 책도 읽으며, 풀잎이라는 책도 읽습니다. 아이 눈망울이라는 책, 곁님 손길이라는 책, 비님 따스함이라는 책을 비롯하여 온누리 모든 책을 두루 읽고, 스스로 걸어가는 하루라는 책을 새삼스레 씁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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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책 새론책



  묵은똥을 누어야 새론밥을 먹습니다. 묵은똥을 내보내지 않으면 속이 더부룩한 나머지 무엇을 먹더라도 아무 맛을 못 느낄 뿐 아니라, 먹는 기쁨도 못 누립니다. 묵은앎을 씻어야 새론앎을 받아들입니다. 묵은앎이 가득한 채로 산다면 아무리 새로운 삶과 살림을 바탕으로 빚은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곁에 흐르더라도 어느 하나 못 받아들이는 고리타분한 몸짓이 됩니다. 묵은책을 책시렁에서 치워야 새론책을 맞아들입니다. 책시렁에 묵은책이 가득해서 짓누른다면 어마어마한 깊이와 너비를 드러내어 우리 삶과 살림에 새로 사랑을 북돋우는 책을 만났더라도 선뜻 맞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묵은똥이나 묵은앎이나 묵은책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묵은똥이 돌아갈 흙을 찾아서 묵은똥이 흙에 깃들어 새흙이 되도록 하면 되어요. 묵은앎은 글로 적어 놓고서 우리가 지나온 발자국을 되새기는 배움길로 삼으면 되어요. 묵은책은 우리 책숲집을 마련해서 고이 모셔 놓고서 이 묵은책을 되읽고 싶을 적에 얼마든지 되읽으면 될 뿐 아니라, 우리 뒷사람이 이 묵은책으로 새길을 찾거나 배우고 싶을 적에 물려주거나 헌책집에 내놓으면 됩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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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랑 많이랑

  이웃님한테 들려줄 수 있는 책읽기라면 ‘즐겁게 읽기’입니다. 즐겁게 읽을 적에는 적게 읽어도 넉넉합니다. 아니, 즐겁게 읽을 적에는 스스로 몸이며 마음에 알맞게 건사할 수 있고, 나중에는 종이책이 없어도 바람책이나 풀책이나 하늘책이나 물책이나 풀벌레책이나 살림책이나 사랑책처럼 우리 곁에서 마주하는 모든 삶이랑 자리에서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새로읽기’를 누립니다. 이와 달리 즐겁게 읽기보다는 ‘좋은 책을 더 많이’ 읽을 적에는 날마다 참으로 많이 읽고 거듭거듭 읽어도 모자라요. 틀림없이 푸짐하게 읽었지만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에 책을 자꾸자꾸 읽느라 다른 일이나 놀이나 살림을 할 틈이 사라집니다. 책으로만 온삶이 흐르고 말아요. 이때에는 많이 있어도 많은 줄 못 느끼는, 많이 읽되 외려 너무 적다고 느끼고 마는 길이 되어요. 읽은 부피나 숫자가 대수롭지 않듯, 알려진 책이냐 많이 팔린 책이냐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마음에 씨앗을 한 톨 심어서 우리 몸에 새롭게 깨어나도록 북돋운 책 하나인지 아닌지를 헤아릴 수 있기를 빕니다. 굳이 ‘즐겁게 많이’ 읽으려 하지 마셔요. ‘많이’를 덜고 ‘즐겁게’ 읽으면 좋겠어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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