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책이네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어디에서나 가르치고 배웁니다. 아이한테는 졸업장을 주는 큰 건물만 학교일 수 없습니다. 집도 마을도 배우는 터전입니다. 어른도 졸업장을 주는 그 큰 건물만 학교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집뿐 아니라 마을이 오롯이 배우는 자리라고 느끼면서 보아야지 싶습니다. 모든 곳은 학교요, 배움터요, 삶자리이며, 사랑이 흐르는 숲이라고 느낍니다. 종이꾸러미도 책일 테지만, 아이 눈빛하고 어버이 눈망울도 책입니다. 인문책도 책일 테지만, 만화책하고 그림책하고 사진책도 책일 뿐 아니라, 말 한 마디하고 노래 한 자락도 책입니다. 모두가 배움터이듯, 모두가 책입니다. 모두가 배움터이듯, 모두가 사랑이요 꿈이면서 빛이자 고요입니다. 몸을 잊은 채 고이 내려놓아야 깊이 잠들면서 새롭게 기운을 얻습니다. 우리 머리에 그동안 담은 지식을 잊은 채 모조리 내려놓아야 깊이 읽으면서 새롭게 이야기를 얻습니다. 밤꿈이나 낮꿈을 꾸듯이 책을 곁에 두어 읽습니다. 종이에 깃든 살림을 읽고, 손끝에 묻은 삶을 읽습니다. 숲에 흐르는 바람을 읽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바람을 읽습니다. 그리고 써요. 맑은 하루가 되어 달라는 마음을 하늘에 씁니다. 비 한 줄기 뿌리면 좋겠다는 마음을 하늘에 씁니다. 별잔치를 이루면 좋겠다는 마음을 하늘에 쓰고, 구름꽃처럼 들꽃이 눈부시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이 땅에 씁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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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너머



  우리가 읽는 책은 여럿입니다. 종이꾸러미인 종이책이 있고, 바람이라고 하는 책, 숲이라고 하는 책, 바다라고 하는 책, 풀이나 나무라고 하는 책, 풀벌레나 벌나비라고 하는 책, 흙이나 돌이라고 하는 책, 냇물이나 샘물이라고 하는 책, 살림이라고 하는 책, 사랑이라고 하는 책, 마음이라고 하는 책, 사람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흔히들 종이책을 얼마나 읽느냐를 놓고서 책읽기를 가르지만, 이제는 종이책분 아니라 삶책이나 사람책이나 사랑책이나 숲책이나 바람책이나 별책이나 풀책을 놓고도 이야기를 할 때이지 싶습니다. 삶을 짓는 슬기로운 사랑은 종이책에만 담지 않습니다. 즐겁게 어우러지는 놀이판에도, 상냥하게 주고받는 말에도, 눈빛으로 맑게 흐르는 마음에도 온갖 책이 싱그러이 있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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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집마실을 하는 즐거움



  누리책집에서 또각또각 글판을 두들기지 않고, 두 다리로 책집마실을 하는 즐거움이란 무엇일까요? 누리책집에서 책을 산 분은 아마 다들 알 테지만, 누리책집에서 책을 고르고 살펴서 값을 치르기까지도 품이나 겨를을 꽤 들여야 합니다. 딸깍딸깍 조금 한대서 쉬 끝나지 않습니다. 몸을 움직여 책집까지 스스로 다녀오는 일보다 품이 적게 든다고만 할 수 없어요. 그런데 누리책집에서 새책은 그때그때 새로 올라온다지만, 그동안 태어난 오랜 숱한 책은 다 올라오지 않거나 못합니다. 우리가 다리품을 팔면서 마을책집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헌책집을 다니지 않는다면, 온누리에 가득한 어마어마한 책을 두루 만나지 못합니다. 아주 조금만, 아름다운 책을 늘 마주하더라도 아주 살짝 맛볼 뿐입니다. 다리품을 팔면서 마을책집으로 마실을 다니면, 첫째, 우리 마음눈을 넓힐 수 있습니다. 둘째, 도시에 있는 숲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리책집으로도 마음눈을 넓힐 책을 손에 넣겠지요. 그러나 자동차 소리가 뚝 끊긴 채 고요한 숲바람이 일렁이는 숨결은 누리지 못해요. 조그마하든 널따랗든, 마을책집은 ‘책이 되어 준 나무가 자라던 숲’을 누리는 쉼터이자 놀이터이자 만남터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을 적에는, 줄거리(지식)만 받아먹지 않습니다. 줄거리를 이루기까지 어떤 숲이 어떤 사랑으로 살았는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요. 살아숨쉬는 이야기가 깃든, 숲에서 자란 나무가 흙에 뿌리를 내리며 바람을 마시고 햇볕을 사랑한 노래가 깃든 종이에 얹은 삶을 누려 봐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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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으로 읽다



  두 눈으로 읽는 책이 있고, 마음으로 읽는 책이 있습니다. 두 눈을 뜨기에 보이는 책이 있고, 두 눈을 감으니 보이는 책이 있습니다. 삶으로 쓰거나 지식으로 쓴 책이 있다면, 꿈으로 쓰거나 사랑으로 쓴 책에, 살림으로 쓴 책이나 졸업장으로 쓴 책이 있어요. 이름값이나 손재주로 쓴 책도 있고, 저마다 즐거이 걸어온 길대로 쓴 책이나, 숲을 짓는 마음으로 쓴 책에, 바람 담는 품으로 쓴 책이 있어요. 어떤 책을 두 눈으로 알아보든 두 손에 바람 같은 숲내음이 흐르는 책을 쥘 수 있다면 아름답습니다. 어느 책을 마음으로 읽거나 새기든 온몸으로 숲길을 걸어가는 기쁜 웃음짓으로 새롭게 책을 곁에 둘 수 있으면 사랑스럽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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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걸음 읽기



  둘레에서 저한테 으레 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제발 남보다 한 걸음 앞서 가려 하지 말고, 반 걸음만 앞서 가라”입니다. 이 말이 때로는 옳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제 삶하고는 안 맞습니다. 저는 반만 살다 죽을 수 없고, 제가 할 일을 반만 하고 끝낼 수 없습니다. 둘레에서 저를 잘 모를 뿐인데, 저는 무척 오랫동안, 거의 마흔 해를 ‘반걸음질’로 살았습니다. ‘온걸음질’이 아닌 반걸음질을 말이지요. 반걸음질은 어떤 삶이었을까요? 말 그대로 반토막 삶입니다. 반만 산 셈입니다. 생각해 봐요. 말을 할 적에도 ‘온말’을 할 노릇이지, ‘반말’을 하면 어떤가요? 책을 애써 샀는데 반만 읽어도 좋은가요? 책을 반토막만 살 수 있나요? 책을 샀으면 오롯이 읽을 노릇 아닌가요? 책을 온것으로 살 일이겠지요? 글쓰기에서도 똑같아요. 둘레에서 저러더 “제발 반 걸음만 앞서 가서 글을 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례사 비평을 하란 소리입니다. 좋은 얘기 반만 하고, 궂은 얘기 반은 굳이 하지 말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반토막 글쓰기, 이른바 주례사 비평을 하면 누구한테 뭐가 좋을까요? 글이나 책에 궂은 줄거리가 있도록 쓴 사람한테도, 이웃님(독자)한테도 좋을 일이 하나 없어요. ‘반토막’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그 반토막을 제가 따라주면 다시 반토막을 더 말합니다. 그 반토막을 할 수 있으니 다시 뒤로 더 물러나라 하지요. 이러다 보면 어떻게 되나요? 바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제자리걸음이에요. 반걸음만 앞서 가면서 사람들한테 맞추어야 좋다고 말하는 분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에서 멈추거나 때로는 뒷걸음질까지 된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온걸음’을 떼어야 합니다. 온걸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 노릇입니다. 한 걸음씩 걸어야 비로소 앞이 트입니다. 사람들한테 맞출 노릇이 아니라, 사람들이 바라볼 앞길을, 빛줄기를, 새삶을, 노래를, 사랑을 즐겁게 나아갈 노릇입니다. 하나 더 헤아린다면, 아픈 사람더라 “반만 나으십시오” 하고 말하면 어떨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롯이 나아야지 반만 나을 수 없습니다. 반걸음만 나을 수 없어요. 온걸음으로 다 나아야 합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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