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노래. 중2병


2019.7.15. 누가 ‘중2병’이란 말을 지으니 ‘중2병’이 생겨난다. 처음부터 ‘중2병’이 있을 턱이 없다. 중1이건 중2나 중3이건 아픈 아이는 아프기 마련이고, 안 아픈 아이는 안 아프기 마련이다. 초등학생부터 아프기도 하고, 고등학생까지 내처 아플 수 있다. 그리고 중2여도 고2여도 아플 일이 없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중2병’일까? 첫째, 남들이 이런 이름을 붙이면서 푸름이를 재고 따지고 등돌리는 흐름이니, 이 흐름을 고스란히 따르면서 생긴다. 둘째, 한집을 이룬 사람들끼리도 서로 하루를 그리거나 나누거나 이야기하지 않고 손전화를 오래오래 들여다보면서 따로따로 노니, 한창 철이 들며 꽃으로 피어날 아이들이 그만 축 처지거나 시든다. 활짝 피어나거나 깨어날 무렵인 열다섯이란 꽃나이가 ‘꽃나이’ 아닌 ‘병’으로 뒤바뀌는 셈이다. 2020년을 앞둔 2019년 올해를 비롯해 요즈막에는 ‘중2병’이란 엉터리 말을 내뱉거나 퍼뜨리면서 푸름이를 수렁으로 내모는 물결이지만, 내가 열다섯이란 나이를 살던 1989년에는 ‘고2병’이란 말이 나돌았다. 그런데 더 앞서 1980년대 첫머리라든지 1970년대를 떠올리면, 더 거슬러서 1950년대나 1900년대나 1800년대를 헤아리면, 그때에는 ‘열다섯 = 꽃나이’라 일컬었다. 우리는 이제껏 기나긴 나날을 ‘열다섯 꽃나이’란 이름으로 살며 푸르게 철드는 아름다운 살림을 지었으나, 현대물질문명사회에다가 제도권의무교육이 뿌리를 뻗으면서 그만 ‘꽃나이’ 아닌 ‘중2병’이란 엉터리 이름을 우리 스스로 퍼뜨리면서 아이들을 괴롭히고, 어른도 스스로 괴롭다. 이제, 엉터리 이름은 땅에 묻고 푸르게 철드는 이름인 ‘꽃나이’를 되찾아야지 싶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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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다


2002.4.26. “네? 저기, 뭐라고요? 한 달이 아닌 하루에 읽은 책이 서른 권이라고요?” “저기요, 하우에 고작 서른 권밖애 못 읽었다는 게 제 모습이고, 제가 아는 어느 이웃님은 하루에 쉰 권을 읽어요. 아, 아, 죄송해요. 보통은 한 달에 열 권 정도 읽으면 많이 읽는다고들 말하지요. 그런데, 피디님은 모르시겠지만, 책방계에는 바깥에 말을 안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책을 사랑으로 읽는 사람은 ‘시간’이나 ‘권수’로 읽지 않아요. 그래서 하루에 쉰 권뿐 아니라 백 권도 가뿐히 읽어요.” “네? 백 권이라고요?” “앗! 죄송합니다. 모르는 분들한테 함부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피디님이 모르셔서 그렇지요, 책을 사랑으로 읽는 사람한테는 하루에 쉰 권이나 백 권 읽는 숫자가 대수롭지 않고 힘들지도 않아요. 하루에 새로 태어나는 책이 몇 권인데요! 하루에 백 권을 읽는다고 해도, 하루에 이 지구라는 별에서 새로 태어나는 책을 다 읽을 수 없다고요!” “네? 아니, 뭐라고, 아니, 하루에 전 세계에서 태어나는 책이 뭐라고요?” “아무리 책을 사랑하는 사람도 이 지구에서 날마다 태어나는 모든 새로운 책을 다 읽지 못해요. 그래서 하루에 서른 권이나 쉰 권을 읽어도 다들 똑같이 말해요. ‘아아, 내가 오늘 읽은 책보다, 오늘 못 읽은 책이 더 많네!’” “…….” “후후. 피디님, 그렇습니다. 저희는요, 하루에 서른 권씩 읽으며 살아도요, 저희가 날마다 놓치는 책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요. 이 대목을 생각해 주셔요. 저희는 하루에 서른 권씩, 한 해로 치면 만 권을 가볍게 읽는다고 여기실는지 모르지만, 저희 생각으로는요, 저희는 ‘날마다 놓치는 책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책을 참 모르네’ 하고 생각하고, 우리끼리 얘기해요. 한 해에 책을 1만 권을 읽어낸다고 해서 많이 읽는 셈이 아닙니다. 이 대목을 부디 알아주셔요. 저희는 ‘모르는 책’이 대단히 많아서 ‘이 모르는 책을 알아가면서 삶을 배우려’고 즐겁게 새로운 책을 찾아서 읽습니다. ㅅㄴㄹ 


(숲노래 책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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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노래] 물 1994-2019


1994.6.20. 조교로 일하는 선배가 오늘 목돈을 벌었다면서 저녁에 술자리를 열 테니 같이 가자고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지겹다. 그런 날이 아니어도 그냥 날마다 늘 술자리를 펴잖은가? 속으로 한숨을 쉬다가 생각한다. 옳거니, 어쩌면 오늘이 좋은 ‘날’일는지 모른다.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한다. 아주 벼르기로 한다. 활짝 웃으면서 술집으로 앞장서서 걸어가는 선배한테 묻는다. “선배님!” “응? 왜?” “오늘 참말로 마음껏 술을 마셔도 됩니까?” “그래! 아까 말했잖아? 오늘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마셔! 하하하!” 선배한테서 다짐을 들었으니 되었다. 1학년 새내기인 우리들은 선배를 가운데에 앉히고 빙 둘러싼다. 500들이 맥줏잔을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놓는다. 맥줏잔을 다 놓고 돌아가려는 술집 일꾼을 부른다. “저기요, 기다려 주셔요.” 내 몫으로 500들이 맥줏잔을 받기 무섭게 한칼에 비우고 돌려준다. “다시 채워 주셔요.” 선배는 이 모습을 보더니 “이야, 술 잘 먹네! 좋아! 그렇게 마셔야지.” 그런데 500들이 맥줏잔 한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술집 일꾼이 내 잔을 새로 채워서 가지고 오면 “저기요, 기다려 주셔요.” 하고는 꼭 44벌을 되풀이했다. 500들이 맥줏잔을 한칼로 비울 적마다 손가락을 꼽으면서 셌다. 넋을 잃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셌다. 너덧 벌쯤은 선배가 웃으면서 보다가, 열 벌을 넘고 스무 벌을 넘자 선배 낯빛이 싹 바뀌었다. 그렇지만 나는 44벌까지 달렸다. 이동안 뒷간을 아예 가지 않았고, 그냥 앉은자리에서 500들이 44잔을 한칼에 비웠다. 술자리를 마칠 즈음에야 비로소 뒷간에 갔는데, 얼추 10분 넘게 오줌만 누었다. 어쩌면 20분 넘게 오줌만 누었을는지 모르겠다. 다들 내가 뒷간에 가서 쓰러진 줄 알았단다. 그러나 나는 뒷간에서 10분인지 20분인지 30분인지도 모르도록 오줌만 누었는걸.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버티고 서서 선배한테 말했다. “선배, 앞으로 후배한테 술 좀 사 주지 마세요. 후배한테 뭘 사 주고 싶으시면 그 돈으로 책을 사 주셔요. 저는 책 살 돈이 모자라서 사고 싶은 책을 다 못 사는데, 술값 말고 책값으로 해 주셔요.” 선배는 이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미안하다. 앞으로 술 마시자고 안 할게. 내가 아주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뭐 그렇지만 책을 사 주겠다는 말은 안 하더라.


1994.7.14. 선배가 한 달쯤 앞서 있던 일을 까맣게 잊었나 보다. 또 “맘대로 마셔” 술자리를 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선배는 뭔가 징하게 겪어야 하는구나? 오늘도 지난달처럼 500들이 맥줏잔 한칼질을 한다. 오늘은 지난달처럼 44벌까지 달리지 못하고 40벌에서 멈추었다. 아, 40잔은 집어넣었는데 41잔째에서 더는 안 들어가네. 선배가 지난달 일을 떠올린다. “아, 지난달에 똑같은 일이 있었지!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선배, 이 짓을 두 판째 겪었으니, 이제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맙시다.”


2010.2.28. 잠결에 물이 녹는 소리를 들었다 싶어 퍼뜩 깨어난다. 그러나 꿈이었다. 한숨을 쉬고 입맛을 다신다. 곁님도 잠결에 물이 녹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곁님 또한 꿈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며 또 기다린다. 늘 기다리고 언제나 기다리며 자꾸 기다린다.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내 하루하루 삶을 글로 적바림하고 사진으로 남긴다. 따순 봄을 기다리면서 내 글과 사진에 조금 더 따순 기운이 스밀 수 있기를 바란다. 잠든 아이 이마를 쓸어넘긴다. 깊은 밤에 아이가 쉬 마렵다며 깨어나기에 기저귀를 푸니 벌써 오줌으로 젖었다. 오줌을 참다 못해 조금 지리고 일어났을까. 아이는 제 오줌그릇에 앉는다. 푸직푸직 소리가 난다. 아하, 요 나흘 동안 물똥을 싸더니 아직 속이 안 좋아서 이렇게 또 자다가도 물똥을 싸는구나. 아이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는다. 한참 똥을 누는 아이를 기다린다. 다 눈 아이를 안아서 밑을 씻는다. 바지를 다시 입힌다. 이제 속이 개운한지 깊은 밤인데 조잘조잘 떠들며 노래까지 부른다. 아이로서는 깊은 밤이건 한낮이건 아침이건 새벽이건 똑같을까. 놀고 싶을 때에 놀고, 잠보다 밥보다 놀이가 더 좋을까. 아침이 되어 비가 멎는다. 어제는 하루 내내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며 도랑 얼음과 계단논 얼음도 꽤 녹았다. 그러나 다 녹지는 않았다. 아직 비가 찬비인 듯하다. 찬비를 지나 따순비가 되어야, 그러니까 그냥 봄비라 할 비가 아니라 참말로 따뜻한 봄비가 되어 온 들판과 멧자락 얼음과 눈을 스르르 녹일 수 있을 때에 우리 집 겨우내 얼어붙은 물도 녹을 테지. 똑같은 비라 할지라도 찬비는 얼음을 녹이지 못한다. 똑같은 비인데 따순비는 얼음을 녹인다. 똑같은 가슴이더라도 찬가슴은 사람들 마음을 녹일 수 없겠지. 똑같은 글이더라도 따순글이 될 때에 다른 사람들보다 내 가슴부터 사르르 녹일 수 있겠지. 이 비가 지나고 비를 몰고 온 매지구름이 물러나면 바야흐로 따스하면서 살랑바람이 부는 파란 봄하늘이 찾아올까 궁금하다. 기다리고 기다리며 거듭 기다린다. 이제 집에서 빨래하고 설거지하며 걸레 빨아 집안 구석구석을 닦고 싶다.


2014.6.9. 오늘 바다로 마실을 가면서 책을 두 자락 챙길까 하다가 한 자락만 챙긴다. 동시책을 한 자락 챙기면서 틀림없이 너끈히 다 읽으리라 여겼으나, 동시책을 다 읽고 나서 더 읽을 책까지 챙기지는 않는다. 아이들과 바다로 마실을 갈 적에 책을 넉넉히 챙기면 나로서는 책을 느긋하게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바다로 가면서 책을 챙기면 책을 바라보느라 바다를 덜 바라본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저희끼리 놀아야 할 때가 있다. 이동안 나는 혼자 조용히 동시책을 읽는다. 동시책을 반쯤 읽고 나서 아이들한테 간다. 아이들은 모래밭에서 모래를 뒤엎느라 바쁘다. 나는 아이들을 살며시 바라보다가 바닷물 찰랑이는 데로 걸어간다. 맨발로 바닷물을 첨벙첨벙 밟는다. 아, 바닷물은 이 느낌이어서 좋지 즐겁지 싱그럽지 하고 생각한다. 혼자서 바닷물을 밟고 누비면서 재미있다. 조금 뒤 아이들이 다가온다. 바닷물을 밟으면서 노는 아버지를 알아챈다. 이제 아이들은 모래놀이보다 바닷물놀이가 훨씬 재미있다. 한여름에도 차가운 바닷물에 온몸을 담그면서 아이들은 바닷물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속으로 생각한다. 너희들 참말 물을 좋아하네. 너희들 참으로 바다가 반갑구나. 아이들은 왜 이렇게 물을 좋아하면서 즐길까 궁금하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적부터 물을 늘 마주하기 때문일까. 우리 몸은 거의 모두 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우리가 먹는 밥이 거의 모두 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바닷물에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모래밭으로 나오자고 하면서 동시책을 마저 읽는다. 아이들은 모래밭에서 살짝 있다가 다시 바닷물에 들어간다. 얼른 동시책을 덮는다. 나도 바닷물로 들어가서 아이들과 섞인다. 세 시간 가까이 바닷물을 누비면서 논다. 바다에 있는 동안 바다만 바라보고 바다만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숲에 가면 숲만 누리고 숲만 생각한다. 집에서는? 집만 바라보고 집만 생각하겠지. 마당에서 제비집을 볼 적에도, 제비집만 바라보면서 제비집만 생각한다. 바다에서 동시책을 읽으면서 바닷물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아마, 동시책보다 바닷물 소리 때문에 책을 더 살뜰히 읽었으리라 느낀다. 동시책이 아무리 아름다웠다 하더라도 바닷물 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덮었으리라 느낀다.


2015.8.6. 골짜기에 깃들어 책을 읽으면 대단히 재미있다. 깊고 깨끗한 골짜기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만 해도 아주 우렁차고, 이 우렁찬 물살 소리를 가로지르는 멧새 노랫소리에다가, 바람이 나뭇잎하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어우러진다. ‘데시벨’로 치면 아주 높은 소리가 퍼지는 골짜기인데, 이런 데에서 책을 손에 쥐면 아뭇소리가 안 들린다. 아주 고요하고 차분하게 책에 사로잡힌다. 골짜기에 깃들어 책을 읽더라도 눈길을 다른 데에 두면 괴롭다. 이를테면 여름날 휴가철을 맞이해서 시골로 놀러오는 사람들이 골짜기에 함부로 버린 온갖 쓰레기가 눈에 뜨이면 ‘책’이 아니라 ‘쓰레기’에 자꾸 눈길하고 마음이 가고 만다. 골짜기에는 ‘쓰레기를 보러’ 오지 않는데, 휴가철 언저리에는 그만 ‘쓰레기에 눈길이 가’니, 이를 어쩌나? 한 마디로 말해서 마음을 제대로 모으지 못하는 셈이다. 도시에는 자동차가 아주 많다. 여느 때에 ‘자동차 노래’를 부르는 작은아이는 장난감 아닌 실물 자동차가 쏟아질듯이 넘치기에 눈을 뗄 줄 모른다. 도시에서는 작은아이 손을 붙잡고 걷지 않으면 자동차에 휩쓸리겠다고 느낀다. 그런데 도시에서 사는 사람은 자동차를 안 쳐다본다. 너무 많으니 안 쳐다볼 수 있을 테고, 자동차를 쳐다보면 ‘내 할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지 못하니, 쳐다보아야 할 까닭도 없다. 골짜기에서 책을 읽는다고 할 적에, 골짝물하고 골짝바람하고 골짝나무하고 골짝이웃이 모두 내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도록 돕는다. 그러고 보면, 배우려는 사람들이 깊은 숲이나 절집으로 깃들려고 하는 까닭을 알 만하다. 숲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곳인가? 사람들이 고요하면서 차분한 마음이 되도록 이끄는 데가 바로 숲이다. 도시라는 곳에도 찻길하고 건물만 있지 않고 너른 숲이 함께 어우러진다면, 도시에서 일하거나 사는 사람 누구나 고요하면서 차분한 마음이 되어 사랑과 평화를 꿈꾸는 삶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도시라는 터를 지으며 숲을 밀어내고 아파트를 잔뜩 세우는 까닭이라면, 사람들이 못 깨어나도록 할 셈이지는 않을까? 도시에 일자리를 잔뜩 마련해 놓고, 지하상가를 끝없이 뚫으며, 갖가지 문화시설이나 체육행사를 꾀하는 까닭도, 사람들이 숲이라고 하는 살림터랑 배움터를 까맣게 잊고는 쳇바퀴질을 하도록 내몰려는 속셈이 아닐까? 도시에 겨우 마련한 손바닥만 한 공원마다 그렇게 농약을 뿌려대어 잔디밭이건 나무밑이건 앉기 어렵도록 하는 까닭도, 사람들이 풀잎이나 나무한테서 바로 기운을 받아 참다이 깨어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아 종살이에 길들도록 하려는 꿍꿍이가 아닐까?


2016.7.20. 아이들한테 가만히 속삭인다. 얘들아, 오늘은 어떤 날씨가 될까? 너희는 오늘 어떤 날씨이기를 바라니? 아이들이 잘 모르겠다고 하면 다시 속삭인다. 자, 우리 하늘을 볼까? 자, 우리 바람맛을 느껴 볼까? 아침 낮 저녁으로 바람맛을 보고 햇볕맛을 보면, 날씨가 어떻게 흐르는가를 몸으로 깨달을 수 있다. 어렵지 않다. 그저 몸으로 누구나 알아차릴 만하다. 이러한 날씨는 마당에 설 때뿐 아니라, 마루나 부엌이나 어디에서라도 느낀다. 모든 바람은 온누리를 골골샅샅 흐르기에, 우리 마을이랑 집을 둘러싼 날씨는 내가 늘 마시는 바람결로 헤아릴 수 있다. 시골집에서 살며 마시는 물은 냇물이거나 골짝물이다. 뒷숲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나 숲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땅밑으로 흐르는 물이니 땅밑물이기도 하겠지. 여름에도 겨울에도 늘 흐르는 이 물을 마시면서 새삼스레 아이들한테 묻는다. 우리 어여쁜 아이들아, 이 냇물맛은 어떠하니? 시원하니? 맑니? 다니? 차갑니? 상큼하니? 우리 집 아이들이 삶을 읽고 살림을 읽으며 사랑을 읽는 따사롭고 너그러운 숨결로 자라기를 비는 마음이다. 이러면서 나도 삶이랑 살림이랑 사랑을 읽는 슬기로운 어른으로 아이들 곁에서 무럭무럭 크자고 꿈꾼다. 밥맛뿐 아니라 풀맛이랑 흙맛을 읽고, 바람맛이랑 비맛을 읽을 수 있는 어른으로 살자고 생각한다.


2018.8.5. 참 오래 한 가지 생각을 하면서 물에 몸을 맡겼다. ‘나는 헤엄을 못 쳐’ 같은. 이제 이 생각을 더는 안 한다. 요새는 ‘나는 물하고 사귀면서 놀고 싶어’ 하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물에서 헤엄질을 하지는 않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든, 아니면 숨을 다 내뱉은 빈몸으로든, 물속 깊이 잠기며 놀기를 즐긴다. 헤엄질도 재미있을 텐데, 자맥질도 매우 재미있다. 더구나 제법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서 얌전히 바닥에 앉아 본다든지, 엎드리거나 눕는 자맥질이 매우 재미나네. 자맥질을 할 적마다 조금씩 길게 해 보는데, 내가 물속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지낼 수 있나 놀라곤 한다. 그렇다고 아직 10분이나 20분쯤 물속에 잠기지는 못하는데, 우리 살갗이 뭍에서는 바람에 깃든 숨을 걸러서 마시듯이 물에서는 물에 깃든 숨을 걸러서 마시지 않나 하고 문득 느껴 보았다. 굳이 코나 입으로 숨을 가득 담아서 물속에 잠기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 살갗은 물이 몸속으로 못 들어오게 막는 구실도 하지만, 이러면서 물에 깃든 숨을 알맞게 걸러서 받아들이는 줄 느낀다면, 물속에서 얼마든지 길게 자맥질놀이를 할 만하구나 싶다. 이렇게 자맥질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다 보면, 물고기가 물속에서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함께 느낄 만하네. 뭍에서는 뭍대로 느끼고 보는 눈이요, 물에서는 물대로 느끼고 보는 눈이로구나. 우리가 뭍에서 으레 적외선 테두리로만 바라보는데, 자외선이나 감마선이나 알파선이나 베타선이나 엑스선을 볼 줄 안다면, 이러한 빛줄기를 보는 눈으로 마음을 활짝 열 줄 안다면, 더욱 재미나겠구나 싶다. 뭍하고 물을 거쳐 하늘을 날며 볼 수 있다면, 그때에는 새가 온누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배우겠지? 종이책을 한동안 덮고서 골짝물에 잠기니, 갖가지 새로운 책이 나를 이끌면서 새롭게 가르쳐 준다.


2019.7.12. 아침이면 물을 4리터 남짓 마신다. 그냥 벌컥벌컥 마신다. 물이 몸에 얼마나 잘 들어오는지 모른다. 아침마다 물을 4리터 남짓 마실 적마다 생각한다. 물을 마시면 굳이 다른 밥을 먹어야겠다는 마음이 안 생긴다고. 어쩌면 우리가 물을 안 마시거나 덜 마시니까 자꾸 끼니를 채울 밥을 지어서 몸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여기지는 않을까 하고. 이렇게 물을 신나게 마시다가 어느 날에는 굳이 물을 안 마시곤 한다. 며칠쯤 다른 어떤 밥도 몸에 안 넣고 물조차 안 넣으면서 지내는데 뱃속이나 몸이 매우 가벼우면서 싱그럽다고 느낀다. 이런 때에 새삼스레 생각한다. 물만 마셔도 배가 부르고 몸이 반기기도 하지만, 굳이 입으로 물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짓을 하지 않더라도 살갗으로 ‘바람에 깃든 물’을 늘 받아들이니 물조차 따로 마실 까닭이 없을 수 있겠구나 하고.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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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2일, 순천 동남사에서

사진강의를 합니다.

이 자리에서 펼 이야기 가운데 한 자락을

이렇게 추슬러 놓습니다.

즐겁게 사진을 누리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숲노래 책노래] 사진책


1998.7.14. “어이, 최종규 씨, 사전 쓰는 일 하지?” “네, 그렇지요.” “그러면 이 사진책도 좀 보지 그래?” “네? 사진책이요?” “그래. 말만 나온 책만 보지 말고, 이제는 사진이 나온 책도 좀 봐.” “어, 그런가요?” “잘 봐. ‘아미쉬’라는 이름은 어떻게 풀이할래? 아미쉬 사람들이 입은 옷이나 타고다니는 마차를 보지 않고서는 아미쉬 사람들을 풀이할 수 없잖아? 뭐, 아미쉬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 같이 살아 본다면 사진책을 안 봐도 되겠지만, 모든 나라 모든 곳에 다 찾아가서 두 눈으로 볼 수는 없잖아? 그런 때에 사진책이 무척 좋다고. 이 아미쉬 사진책을 좀 봐. 때로는 사진 하나로 백 마디 말을 담아내는 풀이를 할 수도 있어. 라루스 사전이 그래. 굳이 말로 풀이하지 않고서 그림이나 사진을 넣기도 하거든.” “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여태 사진책을 볼 생각을 안 했는데, 이제부터는 사진책도 찬찬히 봐야겠습니다.”

2001.3.12. “야, 이 사진책 좋기는 한데, 비싸지 않냐?” “네, 값이 좀 세기는 합니다만, 이만 한 사진을 담은 사진책이 드물어요. 이 책값은 이 사진 하나가 다 벌어 줍니다. 이 엄청난 사진 하나 때문에 우리는 엄청난 돈을 줄였다고도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엄청난 사진 하나이니, 우리는 이곳에 갈 찻삯이며 품이며 안 들여도 될 뿐 아니라, 몇 달이나 몇 해라는 나날까지 벌어들인 셈이에요. 그렇게 치면 이 사진책 하나를 우리 사전을 짓는 길에 자료로 삼으려고 사들이는 값은 매우 싸다고 할 수 있어요.”

2003.5.22. “집에 사진책이 꽤 많으시네요? 사진을 전문으로 하세요?” “아닙니다. 저는 사전을 씁니다.” “네? 그런데 웬 사진책이 이렇게 많아요?” “사전을 쓰는 사람이니까 사진을 같이 봐야 해요.” “어, 왜요?” “생각해 보셔요. ‘옷’이라고 해도 오늘 우리가 입는 옷이 있지만, 1950년대에 입는 옷하고 다릅니다. 1850년대에 입는 옷하고도 다를 테며, 1550년이나 550년이나 기원전 옷하고도 다르겠지요. 이 모든 다 다른 옷을 모두 사진으로 담아내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한때 차림새는 사진으로 담겨요. 그 사진을 읽으면서 더 예전에는 어떤 옷을 두르고 살았을까 하고 어림하지요. 옷 하나를 보기로 듭니다만, 낱말 하나도 매한가지예요. 어느 낱말 하나를 제대로 파헤쳐서 알아내고 뜻이나 결을 밝히자면, 그 낱말이 살아온 길을 모두 헤아려야 해요. 그런 길에서 사진책은 대단히 고마운 곁책이 되어 줍니다.“

2007.4.5. 사진이란 삶을 사랑하는 빛. 이 빛살이 넘쳐흘러 가슴이 풍덩 잠기도록 출렁거리는 이야기꾸러미가 사진책.

2010.6.6. 사진책은 ‘사진 작품집’이 아니다. 예술을 하든 작품집을 꾸미든, 이렇게 해서 나오는 사진책도 더러 있다. 그러나 사진책이란, 사진으로 삶을 이야기하면서 노래하는 살림을 갈무리하는 책이다. 사진으로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작품집이란 이름은 붙일 수 있을 터이나 ‘사진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첫 쪽부터 끝 쪽까지 사진을 줄줄이 담아내어야 사진책이 되지 않는다. 사진책이란, 사진만 있는 책이 아니다. 사진책이라면, 삶과 살림과 사람을 사랑이라는 눈으로 슬기롭게 살피면서 새롭게 이야기를 지피는 책이라고 해야 걸맞는다고 느낀다.

2019.7.11. 어느 사진이 깃든 어떤 사진책을 마주하든, 이제껏 보거나 읽은 사진·사진책을 먼저 마음에서 지워 놓고서, 텅텅 비운 마음으로 마주하려고 한다. 내 앞에 있는 사진·사진책은 새로운 빛결을 담은 이야기가 흐르니, 이 이야기를 읽자면 모든 옛생각(선입관·지식)을 잊어야 한다. 옛생각을 티끌만큼이라도 품은 채 새로운 사진·사진책을 마주한다면, 옛생각이라는 틀로 읽고 만다. 새로운 빛결을 해묵은 눈으로 읽는다면 무엇을 느낄까. ‘바지 입은 가시내’는 가시내인가 사내인가? 가시내일 테지. ‘치마 입은 사내’는 사내인가 가시내인가? 사내일 테지. ‘바지 = 사내’이지 않고 ‘치마 = 가시내’이지 않다. ‘짧은머리/박박머리 = 사내’인가? ‘긴머리 = 가시내’인가? 아니다. 사내이든 가시내이든 머리카락을 짧게 치고 싶으면 짧게 칠 뿐, 그대로 두어 길게 나풀거리고 싶으면 이렇게 할 뿐이다. 틀에 박힌 눈을 품은 채 새로운 빛결을 마주하려 하면 아무것도 못 보고 만다. 속살뿐 아니라 겉모습조차 제대로 못 본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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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노래, 모기


2019.5.19. 우리 집 뒤꼍에서 쑥을 뜯는다. 집에서 쑥잎을 덖을 생각이다. 이때에 모기가 곧잘 앵앵하면서 달라붙으려 한다. 유월 내내 뽕나무 곁에서 오디를 훑었다. 오디로 신나게 오디잼을 했다. 이때에도 모기가 흔히 앵앵대면서 달라붙으려 한다. 모기가 붙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다가, 때로는 손가락으로 통 튕겨내다가, 모기가 애타게 빌면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제발 네 피를 빨게 해줘!” “뭐? 내 피를 달라고?” “그래, 네 피를 빨아먹게 해줘! 한 방울이라도 줘!” “내가 내 피를 왜 너한테 줘야 하니?” “우리(모기)는 우리가 무는 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어. 이 모기란 몸을 벗을 수 있어. 나(모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사람을 물려고 해.” “…….” “넌 못 믿겠지만, 우리(모기)들은 소를 물면 소로 다시 태어나고, 개를 물면 개로 다시 태어나. 사람을 물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어서, 목숨을 던져서 사람을 물려고 하지.” “그래? 그런데 내가 너를 찰싹 때려서 죽이면?” “아 …….” “왜?” “…….” “더 할 말 없으면 이제 널 때려잡아도 되지?” “때려잡더라도 피를 좀 주고서 때려잡아.” “응? 왜? 왜 그래야 하는데?” “피를 못 빨고서 죽으면 모기로 다시 태어나.” “그게 뭐?” “우리는 사람한테든 다른 짐승한테든 달라붙어서 피를 빨 때까지는 모기로 다시 태어나거든. 그래서 비록 너희(사람)한테 때려잡히더라도 피를 한 방울 빨고서 너희 피에 담긴 숨결을 받아들이면, 기꺼이 즐겁게 때려잡혀 죽을 수 있어.” “이 말을 들으니 영 너한테 내 피를 더 안 주고 싶은걸?” “제발 …….” 모기가 애타게 비는 말을 끝으로 입김을 후 불어서 모기를 날렸다.


2019.7.4. 올해 5월하고 6월, 두 달 동안 우리 집 모기하고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가 참말 ‘모기 수다’였을까 하고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입으로 주고받은 말이 아닌, 마음으로 확 들어온 모기 목소리였으니, 틀림없이 모기는 애타게 무언가 빌면서 나한테 찾아왔지 싶다. 모기는 참말로 사람피를 빨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 모기 몸에는 모기 씨톨(DNA)만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모기로서는 다른 숨결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기 그대로 다시 태어나기만 하리라 느낀다. 이러다가 다른 목숨한테서 흐르는 다른 숨결이자 씨톨을 ‘피를 빨면’서 받아들이면, 참말로 다른 몸으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몸을 이루는 씨톨은 먼먼 옛날부터 흐르고 흘렀다고 하는 만큼, 고작 피 한 방울이라 하더라도 대수로우리라 느낀다. 그저 한 가닥 머리카락이나 한 방울 피가 아닌, 우리 몸을 이루는 모든 씨틀이 깃든 숨결이요, 이 숨결을 제대로 구석구석 느끼거나 살펴서 하루를 살지 않을 적에는, 이 몸이 낡거나 죽음길로 가겠구나 싶더라.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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