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20 자고 일어나기



  어린이일 적에는 하루를 06시에 열었고, 푸름이일 적에는 하루를 04시에 열었으며,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로 일하던 무렵부터 하루를 02시에 엽니다. 큰고장에 살던 예전도 시골에 사는 오늘도 하루를 여는 때는 매한가지입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고도 하겠으나 둘레가 고요할 적에 일어나서 일하고, 둘레서 왁자지껄할 적에는 눈귀입을 닫고서 가만히 꿈나라로 갑니다. 스무 살에 제금(분가)을 나면서 새뜸나름이하고 몇 가지 곁일로 스스로 먹고살며 하루를 열던 02시란 더없이 고요하면서 모든 바람이 가장 차분하고 별빛이 깨어나는 즈음입니다. 02시에 잠들면 별빛을 모릅니다. 02시에 일어나야 별빛을 압니다. 별빛을 읽어야 새벽이슬을 읽고, 새벽이슬을 읽어야 풀꽃나무를 읽으며, 풀꽃나무를 읽어야 풀벌레·숲집승을 읽고, 이윽고 바람·하늘·해·비·흙을 읽어요. 이다음으로는 아이 눈빛을 읽고, 어버이 눈망울을 다스리고, 살림꽃을 가누는 숨결을 추스릅니다. 02시에 일어나면 서울도 숲으로 바뀝니다. 보금자리를 숲집으로 가꾸면, 여느 자리에서 쓰는 모든 말이 살림말이 되고, 이 살림말을 아이한테 물려주니 사랑말이 되며, 다같이 하루를 노래하면서 저마다 다르고 아름다우며 즐겁게 숲말을 펴기 마련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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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21 접종 배지



  서른 언저리까지 온갖 보람(배지)을 옷·등짐·자전거에 잔뜩 붙이거나 주렁주렁 달았습니다. 서른 즈음부터 이 모든 보람을 떼었습니다. 마음을 기울이는 ‘보람’이기도 하겠으나, 이보다는 마음을 빼앗기는 ‘보람’이 되고, 서로 금을 긋거나 남 앞에서 우쭐대는 ‘자랑’마저 되더군요. 지난 어느 날 이웃님이 저한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전을 쓰는 양반이 어느 쪽에 기울어지면 안 될 텐데요? 좋은 뜻인 줄은 알지만, 그 길만 좋은 뜻일까요? 어느 길에도 안 서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착한 사람이 있을 텐데요?” 하고 얘기하더군요. 국립국어원 낱말책은 “배지(badge) : 신분 따위를 나타내거나 어떠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옷이나 모자 따위에 붙이는 물건”으로 풀이해요. 북녘에서는 ‘김일성 배지’를 옷깃에 달도록 시켰어요. 남녘에서는 ‘일하는 곳·이바지(기부)한 곳·미는(지지하는) 곳·배움터(학교)’ 무늬를 새겨서 나붙입니다. 나쁜 뜻으로 보람(보이도록 하는 것)을 달지는 않는다고 느끼지만, ‘너랑 나랑 가르는 금’이 되곤 합니다. 요즈막 이 나라는 ‘접종 배지’를 달게 하려 한다지요. 마침종이(졸업장)로 사람을 가르는 굴레, ‘대학 이름 적힌 살림’하고 똑같습니다. 바늘(주사)은 조용히 놓고 쉴 노릇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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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19 짜장국수



  짜장국수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돌이키면 어릴 적에는 짜장국수를 거의 못 먹었습니다. 중국집 짜장국수는 너무 기름져요. 열한두 살 무렵에 처음으로 짜장국수 한 그릇을 비울 수 있었지 싶습니다. 이 짜장국수를 1995년부터 곧잘 먹었어요. 서울 용산에 있는 헌책집 〈뿌리서점〉을 푸른배움터를 다니던 열아홉 살부터 찾아갔는데, 1994년에 열린배움터에 들어갔으나 이듬해부터 그만두자고 생각하며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로 일했어요. 혼자 일해 혼자 먹고살며 밥값을 오롯이 책값으로 돌렸어요. 새책은 엄두를 못 내고 헌책집을 날마다 찾아가는데, 주머니가 가벼우니 으레 예닐곱 시간쯤 구석에 앉아 읽지요. 사고 싶지만 못 사고 눈으로 살펴 머리로 새기고 마음에 담는 나날인데, 이런 책벌레를 고이 여긴 〈뿌리서점〉 지기님은 “오늘도 밥은 안 먹고 책만 보나? 책만 보면 배 안 고픈가? 나도 출출한데 혼자 먹기 그러니, 같이 먹겠나?”라든지 “책은 덜 사더라도 밥을 먹어야 하지 않나? 어떻게 책만 보나?” 하시면서 늘 짜장국수를 사주었습니다. 전철삯조차 버거워 짐자전거로 한두 시간을 달려 헌책집을 다니니 늘 굶으나, 단골인 여러 헌책집지기님이 으레 짜장국수를 사주면서 책벌레를 먹여살렸어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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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하루, 책과 사귀다 18 자꾸자꾸



  이 일을 어느 만큼 했으면 다른 일을 합니다. 다른 일을 제법 했다면 또다른 일을 찾습니다. 또다른 일을 꽤 했으면 슬슬 멈추고 쉽니다. 되도록 맨살이 해바람에 잘 드러나는 차림으로 마당이나 뒤꼍에 맨발로 섭니다. 눈을 가만히 감고서 햇볕에 일렁이는 기운을 먹고 바람에 춤추는 숨결을 먹습니다. 이러고서 다시 집안일을 하고 글일이나 책일을 합니다. 아무리 마감이 바쁘더라도 글을 제법 쓰거나 손질하거나 추슬렀으면 집안일을 합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비질을 합니다. 들풀을 훑고 마당을 살피고 풀꽃나무를 쓰다듬습니다. 책을 좀 읽었으면 자전거를 타고 들길이나 멧길을 가지요. 들길에서 풀꽃을 보고 멧길에서 나무를 만납니다. 한 가지만 오래도록 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만 오래오래 할 수 없습니다. 아기를 돌볼 적을 떠올리자면, 젖을 물리고 물을 몇 모금 먹이고서 등을 토닥입니다. 자장자장 노래도 하고 살몃살몃 춤을 춥니다. 아기를 앞으로 안고서 해바라기를 하고, 아기 얼굴 코앞으로 풀잎을 대고, 아기 손에 나무줄기를 만지도록 합니다. 기저귀를 갈고, 기저귀를 삶고, 삶은 기저귀 물을 짜서 널고, 잘 마른 기저귀를 걷어서 개고, 곁님이 누릴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 늘 새롭게 이모저모 갈마듭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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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하루, 책과 사귀다 17 이반 일리치



  처음 이반 일리치 님을 책으로 만나던 때를 떠올립니다. “왜 이렇게 어렵지?” 싶더군요. 그때에는 잘 몰랐으나, 이반 일리치 님이 쓴 글을 우리말로 옮긴 사람이 하나같이 ‘꾼(전문가)’이더군요. ‘꾼(전문가)’이기에 누구나 알아듣고서 쉽게 배우고 즐거이 따르다가 새롭게 삶을 짓도록 북돋울 만한 우리말로 가다듬지 않았어요. 이분이 쓴 책은 “Disabling Professions”라지요. “망가뜨리는 놈들”이나 “망치는 녀석들”쯤으로 옮기면 뜻·결·실마리가 확 다를 뿐 아니라, ‘꾼(전문가)’이 온누리에서 뭘 하는가를 한결 빠르게 알아채도록 이끌 만하리라 봅니다. ‘꾼이 쓰는 말’을 ‘아이들·시골 할매 눈높이’로 풀어내어 이반 일리치 님을 다시 읽어 보면, 이분은 우리 스스로 저마다 ‘님’이 되어야 한다고 속삭이는구나 싶습니다. ‘꾼이 아닌 님’입니다. 잘난꾼이 아닌 살림님이 될 노릇입니다. 살림을 가꾸는 손으로 하루를 짓고, 살림을 돌보는 눈으로 생각을 일구고, 살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무를 사귈 적에 비로소 온누리에 아름다이 빛이 드리운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여겨요. 책만 곁에 둔대서 배우거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책에 서린 숨결을 들여다보고 아이랑 시골 할매하고 나누려는 자리에 설 노릇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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