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빛나는 책시렁

 


  나뭇잎이나 나뭇줄기는 쓰다듬거나 비빈다고 닳지 않는다. 살아서 바람을 마시는 목숨은 닳지 않는다. 사람도 쓰다듬거나 어루만진다고 해서 닳지 않는다. 산 목숨은 닳지 않고 단단해진다. 산 숨결은 닳는 일 없이 한결 곱게 빛난다. 고운 손길 뻗어 쓰다듬을 적에 사랑이 스민다. 맑은 눈빛 드리워 어루만질 때에 이야기가 샘솟는다.


  나무에서 태어난 책은 사람들이 만지고 만질 때마다 조금씩 닳는다. 나이를 먹는 책은 천천히 낡는다. 백 사람도 만 사람도 손으로 만져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천 해 지나고 이천 해 흐르는 사이 종이가 바스라지고 책등이 조금씩 터진다.


  그런데, 낡거나 닳는 책은 껍데기가 낡거나 닳더라도 빛을 잃지 않는다. 왜냐하면, 책은 껍데기나 종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종이에 얹은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읽는 책이지, 종이를 읽거나 껍데기를 읽는 책이 아니다. 사람들은 책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은 이야기를 살피고 헤아리며 즐길 뿐, 껍데기에 붙인 이것저것을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즐기지 않는다. 겉장은 단단한 종이로 새로 붙여도 된다. 속종이는 아예 새로운 종이에 다시 박아서 묶을 수 있다. 그런데, 겉장을 새로 붙이든 속종이를 새로 찍어서 묶든, 속에 얹는 글(이야기)은 한결같다.


  가지 하나 부러지더라도 나무는 나무이다. 잎사귀 모두 떨구어도 나무는 나무이다. 꽃이 새로 필 적에도 나무는 나무이다. 벼락을 맞아 부러지거나, 나무꾼이 도끼로 베어 그루터기만 남아도 나무는 나무이다.


  아이들이 과자 먹던 손가락으로 책에 기름을 묻히더라도 책은 책이다. 빗물이 떨어져 책종이가 일어나도 책은 책이다. 끈으로 질끈 묶인 채 몇 해 동안 책손 손길을 타지 못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더라도 책은 책이다. 많이 팔리는 책도 책이고, 책손 한 사람이 알뜰히 사랑해도 책이다.


  나무가 빛나는 책시렁을 바라본다. 나무에서 태어난 책은 나무를 잘라 마련한 책시렁에 놓이면서 빛난다. 어쩌면, 사람들 숨결도 늘 나무가 아닐까. 나무가 있어 집을 짓고, 불을 피우며, 연장을 마련한다. 나무가 있어 그늘이 있고 푸른 바람이 불며 둘레에 온갖 풀이 자란다. 나무가 있어 새들이 깃들어 노래한다. 나무가 있기에 숲이 우거지면서 냇물이 흐른다. 나무가 있어 구름이 피어나고 무지개가 뜨며 별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4346.7.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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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불빛

 


  어둠이 드리운 골목에 불빛이 밝다. 시골마을에 켜는 등불에는 하루살이와 밤벌레가 찾아든다. 어둠이 드리운 골목에 밝게 켠 책방 불빛은 마음밥 먹고 싶은 사람들을 부른다. 마음밥을 먹으면서 마음밭에 씨앗 한 톨 뿌리는 사람들은 마음나무를 키워서 마음꽃을 피우고 마음빛을 밝힐 수 있을까.


  나무는 열 살쯤 자라면 작은 멧새 내려앉을 만한 가지를 키울 수 있을까. 나무는 열다섯 살쯤 자라면 작은 멧새한테 고운 열매 나누어 줄 수 있을까. 나무는 스무 살쯤 자라면 아이들한테 조그맣게 그늘 내어줄 만할까. 나무는 서른 살쯤 자라면 어른들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잔치 나누는 너른 그늘 마련해 주려나.


  마음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바라며 어두운 골목에 등불을 켠다. 책방 앞에도, 책방 안에도 그리 크지 않은 등불을 켠다. 주유소나 여관이나 술집처럼 번쩍거리는 등불을 켜지 않는 책방이다. 대학입시에 목을 매는 학교들처럼 애먼 아이들 붙들지 않는 책방이다. 책을 읽을 사람은 스스로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책을 아로새길 사람은 스스로 책장을 넘긴다. 책 한 줄에서 삶을 헤아릴 사람은 스스로 꿈을 키운다. 책밥 즐거이 먹은 사람은 스스로 사랑을 길어올려 이웃과 나눈다.


  해 떨어진 저녁, 조용한 골목에 등불 하나 켠 책방이 환하다. 하루일 마친 어른도, 하루놀이 끝내는 아이도, 맑은 이야기밥을 책방마실 하면서 얻는다. 4346.7.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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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12 09:27   좋아요 0 | URL
며칠째 비가 내리고
해 떨어진 저녁, 조용한 골목에 등불 하나 켠 책방에
가고 싶은 아침입니다. 혼자 가도 좋겠지만..고운 벗과 함께 가서
말없음표..속에서도, 등불을 켜듯 그렇게 책들을 고르고 서로에게
마음밥, 마음빛, 마음눈물, 마음길.. 선물하고 싶은 아침입니다..^^

숲노래 2013-07-12 09:41   좋아요 0 | URL
올가을 9월 마지막주에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
마실을 해 보셔요~ ^^

저녁나절 헌책방골목 불빛이
참 그윽하며 예쁘답니다.

appletreeje 2013-07-12 09:49   좋아요 0 | URL
예~꼭 그래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저녁나절 보수동 헌책방골목 가서 책들을
한꾸러미씩 골라 들고..막걸리도 한잔씩 마시고 와야겠습니다. ㅎㅎ
 

빗물과 책

 


  비가 퍼붓는 날이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이건 책방으로 나들이 가는 사람이 있다. 보슬비가 듣는 날이건 구름에 살며시 그늘 드리우는 날이건 책방하고는 등을 지는 사람이 있다. 마음속에 책씨앗 심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날씨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책방 나들이를 한다. 마음밭에 책씨앗이 없는 사람은 늘 다른 자리에서 다른 삶을 일군다.


  비가 오면 헌책방에서는 책을 바깥으로 내놓지 못한다. 비가 오는 날이건 비가 안 오는 날이건 새책방에서는 책을 바깥으로 내놓지 않는다. 새책방에서는 우산비닐을 문간에 두는데, 헌책방에서는 양동이를 하나 놓거나, 아예 양동이조차 없곤 하다. 우산은 문간에 기대어 놓거나 바닥에 눕히는 헌책방이다.


  새책방은 문을 굳게 닫은 채, 바깥이 춥든 덥든 아랑곳하지 않기 마련이다. 헌책방은 으레 문을 연 채, 바깥이 추우면 함께 춥고 바깥이 더우면 함께 덥기 마련이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빗소리와 비내음이 빗물과 함께 헌책방으로 물씬 스며든다.


  비가 쏟아지는 날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 지붕과 길바닥을 때리는 빗소리를 노래처럼 들으면서 책을 즐길 수 있다. 다만, 비오는 날에는 책종이가 살짝 흐늘거린다. 이리하여, 헌책방은 비가 그치면 문을 더 활짝 열어 책시렁마다 스며든 물기가 햇볕에 보송보송 마르도록 한다.


  헌책방에서 책은 바람을 마시면서 자란다. 헌책방에서 책은 사람들이 우산을 쓰듯 비닐을 뒤집어쓴다. 헌책방에서 책은 해바라기를 하고, 한갓지게 드러누워 쉬면서, 반가운 책손 한 사람 기다린다. 고운 빛 우산을 쓰고 헌책방으로 찾아올 한 사람을 기다린다. 4346.7.1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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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책들은

 


  커다랗게 만들어도 책이고, 조그맣게 만들어도 책입니다. 커다랗게 만든대서 이야기가 커지지 않습니다. 조그맣게 만들기에 이야기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어떤 꼴로 만들어도 책에 깃드는 이야기는 한결같습니다.


  책에 때가 타거나 먼지가 앉아도 이야기에는 때가 타지 않고 먼지가 앉지 않습니다. 책이 헐어도 이야기가 헐지 않습니다. 책이 다쳐도 이야기가 다치지 않아요. 아이들은 똑같은 그림책이나 만화책을 천 번 만 번 되읽습니다. 책이 아주 낡고 닳습니다. 그런데, 책이 낡고 닳을수록 이야기가 한결 빛나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책빛이란, 이렇게 손길을 타는 빛이요, 눈길을 받는 빛일는지 몰라요.


  손바닥만 한 책들에는 손바닥만 한 이야기가 깃들지 않습니다. 크기는 손바닥만 하지만, 이야기는 너른 바다와 같습니다. 한손으로 쥘 만큼 가볍고 작은 책이지만, 이야기는 깊은 숲과 같아요.


  책을 읽습니다. 커다란 책이나 조그만 책 아닌, 내 마음 북돋우는 아름다운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습니다. 이름있는 책이나 이름없는 책 아닌, 내 사랑 보듬는 어여쁜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습니다. 값있는 책이나 값없는 책 아닌, 내 꿈 밝히는 책을 읽습니다.

  조그마한 씨앗이 우람한 나무로 자랍니다. 아기 손톱보다 훨씬 작은 씨앗 하나가 아주 커다란 나무로 자랍니다. 나무씨는 콩씨보다 작기 일쑤입니다. 나무씨가 아주 조그맣대서 조그마한 나무로 자라지 않아요. 마음속에 고운 빛 품기에 씩씩하게 자랍니다. 가슴속에 맑은 빛 어루만지기에 튼튼하게 자랍니다.


  이야기 한 타래 책밭에서 자랍니다. 이야기 한 꾸러미 책터에서 자랍니다. 이야기 한 가지 책누리에서 자랍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작은 손길 뻗어 손바닥만 한 책들 사이에서 조그마한 이야기씨앗 하나 받아안습니다. 4346.7.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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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놓는 마음

 


  내가 장만해서 읽은 책은 내 마음을 살찌우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즐겁게 일해서 그러모은 돈을 즐겁게 써서 책을 한 권 장만합니다. 기쁜 마음 되어 두근두근 책장을 넘겨요. 새록새록 스며드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고맙게 받아먹습니다. 다 읽은 책을 가슴에 포옥 안으며 한껏 설렙니다. 이 느낌 홀로 누리기보다 여럿이 누리면 더 즐거우리라 생각하면서, 내 마음 살찌운 아름다운 책을 한 꾸러미 되도록 모아서 헌책방으로 가져갑니다. 즐겁게 장만해서 즐겁게 읽은 책이기에 즐겁게 내놓습니다. 누군가 나처럼 이 책들 환하게 맞아들여 반갑게 즐기면서 새롭게 마음밥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즐겁게 읽은 책을 헌책방에 내놓는 마음이란, 기쁘게 북돋운 사랑을 이웃과 나눠 갖고 싶은 빛입니다. 내 마음에 빛 한 줄기 된 책을 내 이웃 마음속으로도 새로운 빛 한 줄기로 스며들기를 바라는 꿈입니다.


  책이 돌고 돕니다. 책이 읽히고 읽힙니다. 돌고 도는 책은 언제까지나 아름답게 빛납니다. 읽히고 읽히는 책은 한결같이 사랑스럽습니다. 4346.7.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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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08 09:53   좋아요 0 | URL
저는 중고등학교때만 해도, 헌책방은 필요 없어진 책을 팔고 또 필요한 책을 더욱 싼 값으로 사오는데로만 알았어요..^^;;; 집근처인 동대문운동장이나 평화시장 길목에 헌책방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함께살기님 덕분에 '헌책방'의 의미있고 아름다운, 삶의 오래된 숲을 깨닫게 되어 참 기쁘고 감사하답니다. ^^
저도 나중에 제가 즐겁게 읽은 예!쁜 책들을 한꾸러미씩 모아 헌책방엘 가야겠어요~.
사진으로 올려주신 헌책방이 참으로 근사하고 좋군요..^^

숲노래 2013-07-08 10:50   좋아요 0 | URL
헌책방에서 '필요한 책'을 사려면, 누군가 그 '필요한 책'을 내놓아 주어야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아직도 이 대목을 잘 모르시더라구요. 그래도, 적잖은 사람들은 이 대목을 잘 알아서, 예나 이제나 아름다운 책을 헌책방에 즐겁게 내놓아 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