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노래꽃, 시를 씁니다 ― 45. 비



  밤에 드러누워서 맞이한 꿈이 아니라, 고흥에서 순천을 거쳐 수원으로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살짝 눈을 감아 보는데, 갑자기 머리로 온갖 그림이 떠올랐어요. 지난날 제가 ‘종’으로서 어느 공주님 눈썹을 그려 주는 일을 하는 그림, 고기잡이가 되어 바다에서 그물로 고기를 낚아 맨손으로 척척 손질해서 날로 먹는 그림, 아주 능구렁이 훔침질을 하는 거짓말쟁이로 살다가 붙들려 오른팔이 뎅겅 잘렸는데 이렇게 오른팔이 잘리고 왼팔마저 뎅겅 잘려도 훔침질을 더 신나게 하면서 노닥거리는 그림, 이밖에 그동안 살아온 갖가지 옛모습이 새록새록 나타납니다. 아주 짧은 동안 눈을 감았다가 떴어요. 때로 치면 10초나 5초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짧은 동안 눈을 감고서 본 제 옛삶을 말로 옮기자니 몇 시간으로도 모자랄 뿐 아니라, 몇 날로도 모자라겠더군요. 아주 긴 나날을 한때에 불쑥 보았거든요. 이러고 하루가 지난 오늘, 서울 광화문 앞길을 걷다가 갑자기 자리에 앉고프다는 생각이 들어 두리번두리번하는데 국립극장이 보여 안으로 성큼 들어서서 이곳 지킴이한테 “살짝 앉았다 가도 될까요?” 하고 여쭈었고, 이동안 노래꽃 한 자락이 술술 흘러나왔습니다. 이 노래꽃 ‘비’는 제가 예전 어느 때에 빗방울로 살면서 스스로 겪은 이야기라고 해요. 오롯이 나였으나 이제는 오롯이 사람이라는 옷을 입은 내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어떻게 맞이하면 좋은가 하는 이야기를, 바로 ‘나였으나 내가 아닌 내’가 ‘나이면서 내가 아닌 나’한테 들려준 이야기를 옮깁니다. ㅅㄴㄹ 




아직 궁금하지 않아서

조용히 나무 품에

잎사귀 품에 꽃송이 품에


문득 이 바깥이 궁금해

햇볕을 타고

아지랑이 되어 나오더니

바람 타고 하늘로 올라


나처럼 궁금쟁이인 동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어

참 많구나

우리는 궁금덩이 구름 되네


이윽고 뭉실뭉실 춤추다가

저마다 수수께끼 풀려고

여기로 저기로 새롭게

날아가며 마실하는 빗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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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시를 씁니다 ― 44. 이슬



  알지 못하니까 알지 못할 테고, 알 테니까 압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이 말 그대로인 줄 느끼기는 해도 ‘이렇게 느낀 내 마음대로 알아도 되나?’ 하고 망설였어요. 어릴 적부터 둘레 어른이나 또래는 하나같이 ‘네가 느낀 대로 받아들이면 안 돼!’라든지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친 것이 아니면 다 틀려!’ 같은 말을 했을 뿐 아니라, 좀 배웠다는 이들은 ‘교과서는 거짓말투성이야, 이 책을 봐, 이 책에 내온 줄거리가 맞아!’ 같은 말을 보탰어요. 그러나 저는 학교뿐 아니라 이름값 있다는 분들이 쓴 책조차 교과서처럼 거짓말투성이, 아니 ‘그들한테는 참으로 보일는지 모르나, 나로서는 하나도 안 맞다고 느끼는 이야기’로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릴 적부터 맨눈으로 바람결을 볼 수 있었고, 맨귀로 풀이나 이슬이나 빗물이 들려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적은 교과서도 인문책도, 게다가 종교책조차 못 만났습니다. 이러다가 드문드문 멋진 길잡이를 만났지요. 저는 바람결을 맨눈으로 보지만, 어느 길잡이는 제가 미처 못 본 ‘물결’을 맨눈으로 보시고, ‘물고기가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결’도 마음이나 살갗으로 느끼셨어요. 이때에 온몸이 찌릿찌릿하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내 눈은 미치지 않았구나’ 하고 깨달았고, ‘나는 내 눈을 사랑할 노릇이로구나’ 하고 여기기로 했어요. 저는 이슬방울 겉모습을 노래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분은 그런 겉모습을 노래하겠지요. 저는 이슬하고 나눈 말, 이슬이 들려준 노래를 노래하려 합니다. ㅅㄴㄹ



이슬


해가 기울면 어느새

바람 한 줄기가 죽

돌고 감돌고 맴돌며

이슬을 뿌려


해가 뜰 즈음

풀밭이며 숲은 온통

새벽이슬로 반짝이는

그림판이 돼


풀도 꽃도 나무도

개미도 사마귀도 벌도

아침이슬 마시면서

새기운 내네


맨발로 풀이슬 느끼며

우리 밭에 선다

맨손으로 꽃이슬 맡으며

오늘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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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43. 치마



  아침에 길을 나서며 여느 날처럼 치마바지를 두릅니다. 겉으로는 치마요 속으로는 바지라 ‘두른다’는 말은 알맞지 않습니다만, 그냥 두른다고 말해요. 막상 이 치마바지를 입으려면 두 발을 꿰어야 하거든요. 저는 치마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데,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은 으레 ‘치마를 입었네?’ 하고 여깁니다. 속에 바지가 깃든 줄 헤아리지 않습니다. 속에 바지가 있다고 알려주어도 겉보기로 치마이니 그냥 치마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겉보기로 그러려니 여기는 분들 눈길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분들 겉보기일 뿐, 속내를 밝히거나 가르쳐 주어도 못 받아들인다면, 이런 눈길이 얼마나 어울리거나 옳거나 즐겁거나 아름다울까요? 사내처럼(?) 생긴 가시내가 있고, 가시내처럼(?) 생긴 사내가 있다고 해요. 겉모습이나 겉보기로는 무엇을 알 만할까요? 목소리가 거친 가시내가 있고, 목소리가 나긋한 사내가 있어요. 겉듣기로는 무엇을 읽을 만할까요? 허울이 좋은 이름으로 거짓장사를 하는 이가 있고, 껍데기만 그럴싸한 글을 써서 돈장사를 하는 이가 있어요. 우리는 이 겉치레를 알아차리기도 하지만 속기도 하고, 속은 줄 알아도 못 벗어나기까지 합니다. 무엇이 겉이고 속일까요? 무엇이 참이고 거짓일까요? 치마나 바지라는 옷을 두른 몸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 몸이 감싼 넋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몸에 깃든 넋은커녕, 몸이 두른 옷부터 눈에 들보를 쓴 채 참모습하고는 동떨어진 곳에서 헤매는 오늘은 아닐까요? ㅅㄴㄹ 



치마


튀어서 묻거나 얼룩 안 지게

앞치마를 두르고서

그림을 그리거나 놀거나

밥을 짓거나 일하거나


햇볕 바람 세기에

해가리기 바람가림으로

머리에 쓱 둘러

사뿐가뿐 다니지


쉬를 못 가리는 아이는

웃옷 한 벌 씌우고

샅이 시원하도록

가볍게 뛰어놀아


꿰는 아랫옷인 바지

두르는 쓰임새인 치마

발에는 버선

머리에는 따로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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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42. 고래



  의젓하며 듬직한 이웃님 한 분이 강릉에 삽니다. 저는 강릉이란 이름을 들으면 그 고장에 사는 의젓하며 듬직한 그 이웃님을 떠올립니다. 이 이웃님을 마지막으로 만난 지 거의 열 해쯤 되었지 싶은데 아직 얼굴도 다시 못 봅니다. 강릉하고 고흥은 참 안 가깝거든요. 올해 2019년에는 강릉마실을 꼭 해보자고 다짐하면서 강릉을 헤아리다가, 지난 2018년 12월에 문을 연 마을책집 한 곳이 눈에 뜨입니다. 아, 강릉에 문을 연 책집이란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불쑥 한 가지를 생각했어요. 바로 이 마음 ‘얼마나 사랑스러울까’를 고스란히 노래꽃에 실어서 그 마을책집에 살그마니 띄우면 즐겁겠구나 싶더군요. 마을 앞에서 시골버스를 타고 읍내로 가는 길에 열여섯 줄을 슥슥 씁니다. 수첩에 먼저 적은 열여섯 줄을 정갈한 종이에 천천히 옮깁니다. 다 옮기고는 눈을 감고 숨을 고릅니다. 강릉이라는 고장에서 고래처럼 숨을 쉬고 이웃을 마주하면서 마을책집을 가꾸는 분들 두 손에 즐거운 이야기가 기쁘게 샘솟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한테 열여섯 줄을 새로 적어 띄우는 제 두 손에도 언제나 즐거운 꿈이 기쁘게 자라면 더없이 좋겠다고도 생각합니다. 노래를 지어서 부르는 마음이라면, 다같이 즐겁고 싶은 꿈을 씨앗으로 심고 싶어서이겠거니 하고 느낍니다. ㅅㄴㄹ



고래


나긋나긋 속삭여 봐

차분히 눈을 감고서

마음으로 부르자

고래고래 소리지르지는 말고


느긋느긋 다가서 봐

천천히 팔을 들고서

구름처럼 춤추며 가자

나부대며 어지럼 피우지 말고


우리를 지켜보는

저 깊은 바다에서 노니는

포근한 눈빛이면서

어진 고래는


파란하늘 품은 물결을 타고

언제든지 우리 얘기를 듣지

푸른숲 품은 휘파람을 띄워

언제라도 고래 만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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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41. 또



  누구를 만나면서 즐거운가 하고 떠올리면 어느새 노래가 흐릅니다. 이 노래는 즐겁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합니다. 이 노래는 신나기도 하지만 아프기도 해요. 그러니까, 누구를 만난다고 할 적에는, 튼튼하고 씩씩한 사람도 만나지만, 괴롭거나 힘든 사람도 만나요. 이러다 보니, 튼튼하고 씩씩한 이웃님하고는 싱그럽게 춤추는 노래를 이야기하고, 괴롭거나 힘든 이웃님하고는 오늘을 다시 보고 새로 가꾸는 길을 찾아나서려는 노래를 이야기합니다. 우리 몸이란 마음이 걸친 옷이기에, 우리 몸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싶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즐거운 넋이라면, 몸은 덩달아 즐거워요. 기쁜 마음으로 기쁜 얼이라면, 몸은 언제나 나란히 기뻐요. 이리하여 ‘또’라는 낱말을 혀에 얹습니다. 또 또 하고 싶어서, 또다시 누리고 싶어서, 또 만나고 또 사귀며 또 따스히 안고 싶어서. 찬찬히 스며나오듯 피어나는 노래입니다. 또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덤으로도 쓰고, 덤터기로도 써요. 덤이라서 좋고 덤터기라서 나쁘지 않아요. 기꺼이 누릴 뿐입니다. 손을 내밀어 봐요. 이렇게 내민 손에 드리우는 햇볕을 받아들여 봐요. 손을 쥐어 봐요. 이렇게 쥔 손에 살짝 내려앉는 바람줄기를 느껴 봐요. 햇볕이 어떤 말을 속살이나요? 바람은 어떤 귀띔을 하나요? 파리도 모기도 우리하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찾아와요. 지렁이도 달팽이도 우리 눈길을 받고 싶어서 빼꼼 고개를 내밀어요. 비도 눈도 언제나 상냥한 이웃이에요. ㅅㄴㄹ




하나 있으니 좋더라

그래 또 하나

다시 하나

덤으로 하나


해보니 재미있어

그래서 또 하고

거듭 하고는

자꾸자꾸 하지


만나서 얼마나 반갑던지

이래서 또 보고

또또 보고는

날마다 보는 사이


나무 한 그루 좋아

나무타기 재미있어

나무에 앉은 새 반가워

또다시 하루가 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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