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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들기 어떻게 시작할까 - 1인 출판사 5년 동안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알게 된 것들 스토리닷 글쓰기 공작소 시리즈 3
이정하 지음 / 스토리닷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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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푸른책

- 푸른 나날·꿈·사랑을 고스란히 책으로



《책만들기 어떻게 시작할까》

 이정하

 슬리퍼 사진

 스토리닷

 2020.1.23.



  담을 마주하는 이웃집으로 우리 집 나무가 곧잘 가지를 뻗습니다. 나무야 해바라기를 하면서 하늘로 뻗으니 담벼락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웃집에서는 나뭇가지가 뻗으면 싫어하기에 나무줄기에 손을 대고서 속삭입니다. “얘야, 네가 잘 자라니 반갑고 고마워. 그런데 이웃집으로 넘어가면 이웃집에서 싫어하네. 우리 집에서는 마음껏 자라면 되니까, 담 너머로 가지는 말아 주렴. 담을 넘어간 가지는 톱으로 자를게.”


  무화과나무 가지를 치고서 며칠 뒤에는 뽕나무 가지를 칩니다. 뽕나무 가지에는 싹이 텄습니다. 뽕싹을 가만히 보니 꽃하고 잎이 나란히 돋아요. 뽕꽃은 풀빛으로 조그마니 내밀고는 조금씩 굵습니다. 조금씩 굵는 동안에도 풀빛이요, 어느 만큼 굵으면 이제부터 바알갛게 거듭나고, 어느덧 까맣게 익습니다.



나는 출판을 취미로 하려고 시작한 게 아니었다. 나는 엄마이자,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딸인 이 복잡한 역할 중에서도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낳고도 계속 손에서 일을 놓고 싶지 않았다. (229쪽)



  여린 뽕싹을 보다가 하나 톡 훑어서 손바닥에 얹습니다. 이토록 보드랍고 작은 싹이 아름드리로 자라는 나무가 되네 하고 새삼스레 생각하고는 입에 넣습니다. 뽕싹에서는 오디 냄새가 납니다. 아무렴, 오디라는 열매도 뽕꽃도 뽕잎도 모두 하나인걸요. 잘린 뽕나무 가지에서 나오는 하얀물도 오디 내음이 돌아요. 가지를 토막으로 내어 잘 말린 뒤에 달이면, 이 뽕물에서도 오디 내음이 퍼지겠지요.


  아이들하고 뽕싹을 누리면서 올여름 오디잼을 두근두근 기다립니다. 올여름에도 오디를 잔뜩 줍거나 훑어서 오디잼을 실컷 누리자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월을 마무르면서 오월을 바라보다가 생각합니다. 오늘 이처럼 누린 하루는 어버이인 제 몸이며 마음에 스미고, 아이들 몸이며 마음으로 번지겠지요.



우리 출판사 첫 책 《카메라 들고 느릿느릿》이란 책이 있는데, 정말 느릿느릿 팔린다. 그러니 책 제목을 지을 때 이 또한 꼭 기억할 일이다. 부정적인 단어나 부정적인 이미지는 금물이다. (188쪽)



  2020년은 삼월에도 사월에도 학교를 열지 않습니다. 오월에는 열까요? 학교를 열지 않도록 온누리에 돌림앓이가 뻗는데, 돌림앓이가 뻗는 사이에 하늘길도 바닷길도 멈추고, 하늘도 바다도 조용하니 하늘빛이며 바다빛은 더없이 상큼한 파랑이 됩니다. 이러면서 기름값이 뚝 떨어져요.


  매캐했던 하늘이란 지나치도록 하늘하고 바다를 더럽힌 빛깔이었겠지요. 새파란 하늘이며 바다란 우리 삶을 싱그러우면서 튼튼하게 보듬는 사랑어린 빛깔일 테지요. 모든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퍽 오래 집에 머무는 이러한 삶을 저마다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바라볼까요? 이동안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하루하루를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여미어 보려나요?


  혼자서 책을 엮고 짓고 내놓고 알리고 파는 작은 출판사 책지기님이 빚은 《책만들기 어떻게 시작할까》(이정하, 스토리닷, 2020)를 읽었습니다. 요즈막에 이 책이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이른바 집콕을 하는 어린이·푸름이하고 어버이가 이 책을, ‘손수 책을 엮어서 펴내어 알리고 파는 길’을 다룬 이런 책을 읽으면 꽤 뜻있고 재미있겠구나 싶습니다. 신문이며 방송에 가득한 이야기는 이제 그만 들여다보면서, 오늘날 같은 돌림앓이 이야기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달라진 삶을 글로 써 보고, 이렇게 스스로 쓴 글을 스스로 엮어서, 마침내 스스로 책 하나로 꾸려 보면 좋겠다고 봅니다.



내가 만들 책은 이력서에 한 줄 더 넣기 위해서 만드는 첵이 아니다. 어렸을 적 출판사를 해보고 싶었던 로망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요즘처럼 차고 넘치는 정보 속에서 단 한 권의 책으로 묶여서 나올 이유, 그 앞에 당당할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 (90쪽)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어버이랑 함께 책을 짓는다면 바로 ‘온누리에 딱 하나 있는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남이 살아낸 이야기가 아닌, 우리 스스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삶터를 우리 눈으로 바라본 이야기를 갈무리하고, 앞으로 이 삶터를 어떻게 일구면 아름답고 즐거울까 하는 꿈을 우리 손으로 옮기는 책이 태어날 만합니다.


  3월 1일부터 5월 1일까지 날마다 이야기를 써 보았다면, 또는 아직 써 보지 않았다면, 여기에 올해가 저무는 12월 31일까지 이야기를 꾸준히 써 본다면, 또는 한 해치로는 아쉽구나 싶으면 두 해나 세 해치를 잇달아 꾸준히 써 본다면, 우리는 저마다 글쓴님이 되고 지음님이 됩니다. 이 이야기꾸러미를 손수 엮어서 책으로 선보인다면, 우리는 저마다 ‘1인 출판’을 하는 셈이기도 합니다.



좀 자세히 설명하자면, 책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첫 번째, 나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 대해 물어보고 답을 얻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87쪽)



  하루를 쓰는 일기란 오직 우리 한 사람 삶이자 이야기입니다. 오직 한 사람 삶이자 이야기는 그저 어느 고장 어느 마을 어느 집에서 겪거나 바라본 이야기일 텐데, 작은 발자취가 되지요. 굵직한 물결은 아니더라도 자그맣게 퍼지는 물결이 됩니다. 이름나거나 힘있거나 돈있어야만 글을 쓰거나 책을 내지 않아요. 오늘 하루를 스스로 즐겁거나 씩씩하거나 알차게 보내었다면, 또는 오늘 하루를 웃음이나 눈물로 보내었다면, 또는 오늘 하루를 홀가분하거나 아프게 보내었다면, 또는 오늘 하루를 꿈꾸거나 꿈없이 쳇바퀴질로 보내었다면, 이런 다 다른 한 사람 삶이 책 하나로 다 다르게 태어날 만합니다.


  열 가지 스무 가지 일을 혼자서 다 해내야 하는 1인 출판일 텐데, 서둘러서 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마감을 세우되 마감에 얽매일 까닭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 오천만 사람이 살아간다면, 오천만 눈길로 오천만 가지 다 다른 꿈하고 사랑으로 오늘날 돌림앓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가꿀 앞날을 그리는 책을 써 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책을 스스로 펴내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해요.



책 사기를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하지만 다 읽지 않는 남편과 어느 날 저녁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결론은 책이란 그 사람 삶이라는 것이었다. (68쪽)


1인 출판사와 같은 작은 출판사라 해서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대형 출판사와 비교해서 자본력과 조직력에서 밀리지만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끌고 가는 힘은 1인 출판사가 훨씬 더 낫다고 본다. (33쪽)



  푸른 나날·꿈·사랑을 고스란히 책으로 여미면서 푸른 나날이 그야말로 짙푸르도록 가꿀 수 있습니다. 푸르지 못하고 시든 나날이어도, 또 아픈 꿈이어도, 또 서러운 사랑이어도, 이 시든 빛이며 아픈 꿈이며 서러운 사랑도 차곡차곡 여미어 멍울을 스스로 달래어 천천히 일어서거나 기지개를 켜는 밑거름으로 삼을 만합니다.


  아름다운 하루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아름답게 책으로 태어납니다. 슬프거나 아픈 하루는 슬프거나 아픈 이야기가 되어 새삼스레 아름다이 책으로 태어납니다. 아름다워도 아름다운 책이고, 아프거나 슬퍼도 아름다운 책입니다.



판매를 떠나서 작가의 태도를 보는 것도 중요해요. 그만큼 한 권의 책을 내다 보면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치다 보니 그 작가와 일을 하는데 몸과 마음이 황량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 그 작가 원고를 보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270쪽)



  작은 출판사를 꾸리는 글쓴님은 《책만들기 어떻게 시작할까》에 앞서 두 가지 책을 선보였습니다. 하나는 《글쓰기 어떻게 시작할까》이고, 둘은 《책쓰기 어떻게 시작할까》입니다. 2016년에, 2018년에, 2020년에, 천천걸음으로 한 자락씩 책으로 여미었습니다. 출판사 대표이자, 곁님이자, 아이 어머니이자, 아줌마이자, 무엇보다 스스로 하루를 이야기로 갈무리하는 글님으로서 세 가지 책을 차근차근 쓰고 엮고 짓고 펴낸 셈입니다.


  요즈음은 굳이 책이 아니어도 볼거리나 할거리가 많습니다. 그런데 굳이 책을, 더구나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맡아서 하는 책을, 더군다나 요즈음 돌림앓이를 둘러싸고서 달라진 우리 삶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를 담는 책을, 저마다 하나씩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요, 종이란 바로 숲에서 온 나무로구나 하는 숨결을 느껴 보자는 뜻입니다. 그냥 사서 쓰는 종이가 아닌, 여태까지 이 별을 푸르게 어루만진 숲에서 자란 나무가 종이라는 몸으로 달라져서 우리 곁에 있는 줄 느껴 보자는 뜻이에요.


  바로 오늘부터 앞길을 푸르게 바라보자는 뜻입니다. 여태까지 살아온 대로 살아도 좋을는지, 앞으로는 모든 살림을 갈아엎듯 처음부터 새로 생각해서 짓는 길로 가야 좋을는지, 돌림앓이하고 보금자리하고 숲하고 사람을 사랑어린 슬기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글로 여미어 보자고 여쭙고 싶습니다. 같이 책을 지어 봐요. 아름다운 꿈을 그리면서.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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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곤소곤 1 - silent voice
후지타니 요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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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푸른책/숲노래만화책

바람이 외치는 소리를



《소곤소곤 1》

 후지타니 요코

 장혜영 옮김

 대원씨아이

 2016.8.15.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곳에서 흐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곳에서는 이 소리를 듣고, 저곳에서는 저 소리를 듣습니다. 곳곳은 다 다른 소리인 터라, 그저 다를 뿐, 낫거나 떨어지는 소리란 없습니다. 바다를 품는 마을에서 나고 자란다면 바닷소리를 품겠지요. 숲을 안는 마을에서 나고 자란다면 숲소리를 안겠지요. 아파트가 빼곡한 곳에서 나고 자란다면 아파트 소리를 품어요. 자동차가 끝없이 달리는 데에서 나고 자란다면 자동차가 울리는 소리를 품고요.



“동물이나 물건의 목소리가 들리지? 그럼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일단 그걸 마지막으로 본 게 어디인지 기억해?” “어, 그게, 어제 아침에 가방 안에 넣었어.” “그럼 가방한테 물어봐.” (36∼37쪽)



  요즈음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가 매우 적습니다. 놀러갈 적을 빼고는 시골을 마주할 일이 없을 뿐더러, 시골에 동무나 이웃이 있는 어린이도 없다시피 합니다. 시골 아이도 적지만 ‘시골동무를 둔 어린이’도 없다시피 한 셈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면서 들이며 숲이며 바다이며 냇물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으레 새소리를 흉내내었습니다. 숲짐승이나 집짐승이 내는 울음소리도 잘 따라할 뿐 아니라, 어떤 마음을 드러내는가를 환히 읽었어요. 바닷마을 아이는 바다에서 헤엄치는 바다벗이 어떤 마음인가도 또렷이 읽었지요.


  오늘날 큰고장 어린이는 어떤 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숨결을 읽을까요? 손쉽게 닿는 자리에 넘치는 기계가 퍼뜨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기계이니까 딱히 마음은 없다’고, ‘기계한테서 무슨 숨결이 있겠느냐’고 여기면서 자라지는 않을까요?



‘어릴 적에는 많은 것들의 목소리에 둘러싸여 살았다. 어떤 목소리였는지 지금은 생각도 안 나지만.’ (47쪽)


‘이것이 이 집의 일상?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부모? 말도 안 돼.’ (57쪽)



  몸에 달린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듯, 몸에 달린 귀로만 듣지 않습니다. 마음눈이 있듯 마음귀가 있어요. 만화책 《소곤소곤 1》(후지타니 요코/장혜영 옮김, 대원씨아이, 2016)는 바로 마음귀 이야기를 다룹니다. 여섯걸음에 걸쳐 조금씩 이야기를 펴는 이 만화책에는 어릴 적에 마음귀로 마음말을 스스럼없이 펴다가 둘레에서는 아무도 마음귀가 없어 마음말을 듣지 못하는 줄 깨닫고는 마음을 닫은 채 고등학생이 된 푸름이가 나옵니다. 이 푸름이 둘레에 ‘마음귀로 마음말을 스스럼없이 듣는 어린이’가 나타나고요.


  열 살쯤 터울이 진 푸름이하고 어린이가 동무로 사귀면서 저마다 어떻게 마음을 밝히면서 스스로 거듭나고 둘레에 새롭게 마음꽃을 피울 수 있는가를 다룹니다. 입으로 터뜨려야 알아듣는 마음이 있다면, 입으로 터뜨리지 않고도 낯빛으로 알아듣는 마음이 있어요. 낯빛에 드러나지 않아도 온몸으로 풍기는 마음이 있고요.



‘다이치만큼 물건과 대화할 수 있었다면, 엄마가 치구사 아줌마만큼 거짓말이 능숙했다면, 난 뭔가 달라졌을까.’ (64쪽)



  지난 몇 해 동안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2019년까지 바람은 우리한테 ‘왜 이렇게 나를 꺼리거나 싫어하니? 나를 꺼리거나 싫어한다면 찾아가고 싶지 않아.’ 하고 속삭이더군요. 돌개바람이 몇 해 동안 얼씬을 않았어요. 여름은 바람 없이 후끈후끈했습니다. 겨울은 바람 없이 포근했어요.


  2020년으로 접어들어 바람은 새삼스레 ‘이제 숨통을 좀 트겠어. 그동안 하늘에 걸거치는 것이 잔뜩 있더니 이제는 걸거치는 것이 잔뜩 사라졌더라. 마음껏 춤추면서 여태 하늘에 쌓인 먼지를 좀 쓸어내야겠어.’ 하고 외칩니다.


  바람이 쓸고 간 자리는 그지없이 깔끔합니다. 어느 누구도 바람처럼 하늘을 맑게 쓸지 않아요. 아니, 오늘날 어느 누구도 바람처럼 하늘을 환하게 쓸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비행기를 타고, 그냥 자가용을 몰고, 그냥 기름을 태우고, 그냥그냥 이것저것 쓰고 버리는 살림을 잇습니다.



“그럼 형도 내 기분은 몰라?” “알 때도 있어.” ‘만져서 확인하지 않아도 기뻐 보이는 얼굴,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 드러나니까. 왜 지금 쓸쓸하면서도 기뻐 보이는지.’ (90∼91쪽)


‘이렇게 다 내보여도 되는 건가? 다이치는 내 목소리가 안 들린다고 했는데. 나만? 내가 들려주지 않으려고 닫고 있는 건가? 다이치의 세계는 이토록 거짓이 없는데, 나만 자신을 지키느라 필사적으로…….’ (134쪽)



  바람은 수다쟁이입니다. 바람이 부는 날 눈을 감고서 바람수다에 귀를 기울여 봐요. 이 지구라는 별을 샅샅이 훑으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잔뜩 들려주거든요. 우리가 마음귀를 열고서 바람수다를 들을 줄 안다면, 굳이 비행기를 타고 이 나라 저 나라로 찾아가지 않더라도 이웃나라 살림살이를 귀여겨들을 만합니다. 우리가 마음눈을 뜨고서 ‘바람이 보여주는 여러 나라 모습’을 들여다볼 줄 안다면, 따로 책이나 누리그물이 없더라도 온누리 이웃사람을 만나거나 사귈 만합니다.



“나무나 땅은 굉장히 조용해. 그러고 보니까 물이랑 공기도. 아주 큰 덩어리, 에너지에는 감정 같은 게 없는 걸까.” (127쪽)



  모든 새는 바람을 타고 납니다. 바람을 거스른다면 어느 새도 날아오르지 못합니다. 모든 새는 바람이 들려주는 수다에 귀를 기울입니다. 바람수다를 듣지 않는 새는 그만 목숨을 잃거나 길을 헤매기 쉬워요.


  예부터 사람들은 스스로 바람을 읽었어요. 바람결을 읽고, 바람빛을 읽지요. 때로는 ‘바람을 읽는 새’를 지켜보면서 ‘바람을 읽는 새’를 거쳐서 바람을 새롭게 읽었어요. 또는 ‘바람을 읽는 벌나비랑 딱정벌레’를 읽었고, ‘바람을 읽는 풀꽃나무’를 읽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어느새 바람을 안 읽고, 바람을 안 들으며, 바람을 안 보는 서울사람이 되어 가는데요, 바람을 안 읽으면서 무엇을 읽나요? 바람을 안 보면서 무엇을 보나요? 바람을 안 듣고서 무엇을 듣나요? 바람을 사귀지 않고서 무엇을 사귀나요?



‘작은 목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들려온다. 잠에서 깨어난 귀를 길들이는 것처럼. 옛날의 난 그대로 있어도 괜찮았던 걸지도 몰라.’ (150∼151쪽)



  바람은 우리한테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예술이나 종교나 과학을 할 까닭이 없다고, 그런 허울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속삭입니다. 바람은 우리한테 졸업장이나 자격증에 매이지 말라고 외칩니다. 바람은 우리더러 사랑으로 살림을 지으라고 속삭입니다. 바람은 우리더러 즐겁게 일하고 신나게 놀며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는 슬기로운 삶을 가꾸라고 외칩니다.


  바람을 읽는다면 아이 눈빛을 읽습니다. 바람을 듣는다면 아이 목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을 바라본다면 아이 참모습을 바라봅니다.


  우리한테 수다를 떨고서 찾아오는 바람입니다. 우리한테 자꾸자꾸 물어보려고 몰아치는 바람입니다. 이제 그만 책상맡에서 일어나 바람수다를 들을 수 있나요? 이제 그만 자가용에서 내린 뒤 바람얘기를 들을 수 있나요? 이제 그만 근심걱정 신문·방송은 내려놓고서 오롯이 바람노래를 들을 수 있나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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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의 딸 올가 3
야마모토 룬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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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푸른책/숲노래만화책

- 사랑이 넘치는 빛이기에 사람

#山本ルンルン #LunLunYamamoto #サ-カスの娘オルガ


《서커스의 딸 올가 3》

 야마모토 룬룬

 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0.4.30.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크게 벌어지는 봄가을이면, 비가 제법 오고 난 저녁나절에 안개가 짙게 드리웁니다. 안개가 잔뜩 퍼진 날 걸어다니면 재미있어요. 달음박질을 해도 신나지요. 요새는 안갯길을 함부로 달리다가는 자동차하고 박을는지 모르지만, 지난날에는 모든 어린이가 이 안갯길에서 숨바꼭질이며 술래잡기를 하느라 바빴으리라 생각해요.



“이건, 그의 새로운 경지라고. 사랑으로 넘치는, 가득 찬 빛이, 내 마음을 흔드네.” (222쪽)


“전쟁은 계속되고, 매일 날은 춥고 굶주리는데, 새로운 일이 일어날 거란 예감으로 이렇게 설레다니 말이야!” (147쪽)



  사월이 무르익으니 드디어 감잎이 돋고, 뽕잎이 납니다. 갓 돋은 감잎이나 뽕잎을 들여다보면 옅노랗습니다. 며칠쯤 옅노란 빛으로 올라오는 새잎이 차츰 옅푸르게 바뀌어요.


  무화과잎을 보아도, 느티나무를 보아도, 참으로 숱한 나무가 새잎을 옅노랗게 내밀어요. 다만, 석류나무는 바알간 새잎을 내밀더군요.


  나무마다 새로 내놓는 여리고 노오란 잎을 따먹으면서, 들마다 새로 돋는 숱한 나물을 훑으면서, 향긋하게 피어나는 봄꽃을 톡톡 뜯으면서, 하루도 심심할 일이 없이 새마음 새꿈 새눈빛으로 자라나는 온누리 어린이라고 느낍니다.



“오늘은 왜 좋은 냄새가 안 나?” “응? 아아, 저 과자 공장 말이니?” “응, 평소엔 저기서 달콤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데.” “아아, 파업 중이거든.” “파업?” “그래. 공장의 높으신 분이 저기서 일하는 사람들한테 제대로 된 월급을 안 줘서, 다들 화가 나서 일하길 그만뒀던다.” (18쪽)



  많이 먹는다고 배부르지 않습니다. 적게 먹거나 안 먹는다고 배고프지 않습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모여서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배부르거나 배고프기 마련이에요. 《서커스의 딸 올가 3》(야마모토 룬룬/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0)은 ‘어린이 올가’가 ‘어른 올가’로 자라난 길을 다룹니다. 앞선 첫걸음하고 두걸음에서는 ‘어린이 올가’가 스스로 살아남으려고 온힘을 다해서 애쓰는 땀방울을 다루었다면, 석걸음부터는 숱한 땀방울에 사랑이라고 하는 웃음방울을 달아서 피어나려고 하는 길을 다룹니다.



“난 누구의 것도 되지 않아.” (11쪽)


“주제도 모르고 우쭐대다니. 유리,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냐.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아니야.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내 영혼은요? 전 이제 세계를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92∼93쪽)



  힘이나 돈이나 이름을 거머쥔 이들은 스스로 잘났다고 여기기도 하고, 스스로 우쭐거리기도 하며, 마치 하늘을 찌르고 솟구칠 줄 아는 듯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언가 거머쥔 이는 하늘을 못 날아요. 날개를 단 비행기에 몸을 실을는지는 몰라도 스스로 날지 못합니다.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까닭을 헤아려야 해요. 새는 힘이나 돈이나 이름을 거머쥐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그저 팔을 뻗고 몸을 바람에 맡깁니다. 새라 하더라도 날갯짓만으로는 못 날아요. 날갯짓만 하려면 버둥대다가 기운이 빠져서 고꾸라집니다.


  우리는 눈으로 바람을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마음으로 바람을 읽을 수 있을까요? 바람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바람을 알 길이 없으니 날지 못합니다. 바람을 온몸으로 감싸듯 품지 않는다면 바람하고 하나될 길이 없으니, 이때에도 못 날아요.



“난 전위니 예술이니 하는 어려운 건 모르겠는걸.” “어려운 거 안 한다니까.” “전위예술가의 집단같이 콧대 높은 녀석은 딱 질색이야!” (135쪽)


‘춥다. 언제부터 이렇게, 아니, 내가 알지 못했을 뿐인가. 하, 세상물정 모르는 녀석.’ (170쪽)



  권력자는 힘, 부자는 돈, 예술가는 이름, 저마다 뭔가 거머쥐려 합니다. 그래요, 손아귀에 쥐고 싶으니 쥘 만할 텐데, 신나게 쥐었으면 기쁘게 흩뿌리면 좋겠어요. 신나게 힘을 쥐었으니 아름답게 이 힘을 펴면 좋겠습니다. 신명나게 돈을 쥐었으니 사랑스레 이 돈을 나누면 좋겠어요. 땀흘려 이름을 쥐었으니 홀가분하게 이 이름을 돌려주면 좋겠어요.


  어린이 올가는 어떻게 줄타기를 누구보다 아름답게 하는 길을 알았을까요? 힘이나 돈이나 이름을 얻고 싶어서일까요? 아닙니다. 반가운 동무랑 줄을 같이 타면서 바람에 몸을 맡기는 즐거운 하루가 얼마나 눈부신가 하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자랑하려는 솜씨가 아닙니다. 우쭐대며 으뜸이 되려는 재주가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햇볕을 먹고 바람을 마시면 되어요. 풀꽃을 아끼고 나무를 어루만지면 됩니다.



“연기가 그게 뭐냐. 순 거짓말이잖아. 그런 춤으론, 내 마음은 움직일 수 없어.” (185쪽)


“하지만 이제야 됐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평범한 유리가. 그러니까 난 그릴 거야. 그러기 위해서 살아 돌아왔으니까.” “응, 지금까지 기다렸어. 네가 찾을 수 있도록, 줄 위에서 춤을 추면서.” (193쪽)



  만화책 《서커스의 딸 올가》를 보면 올가 둘레로 이모저모 노리는 사람이 자꾸 달라붙습니다. 올가는 저한테 달라붙는 사람을 가볍게 떼어냅니다. 싫다고 억지로 밀어내지는 않아요. 올가한테 달라붙어 뭐 하나라도 얻어내거나 거머쥐고 싶은 이들은 ‘스스로 눈부신 올가’한테 달라붙으려 하다가도 어느새 녹아버리면서 사라질 뿐입니다.


  누가 올가 곁에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되면 올가 곁에서 녹아버리지 않을 만할까요? 바로 ‘스스로 눈부신 나’가 된다면 누구라도 올가 곁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웃고 이야기하는 하루를 맞이할 만합니다. ‘남이 치켜세우는 허울’이 아닌, ‘스스로 하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되어요. ‘남이 붙여 주는 이름값’이 아닌 ‘스스로 환하게 웃음지으면서 살림짓는 사랑’으로 피어나면 됩니다.



“올가. 넌 위를 목표로 삼아야 해.” “위? 원하는 건, 이미 전부 여기에 있는걸.” (215쪽)


“관객에는 이류도 삼류도 없어.” (218쪽)



  어른 올가는 ‘위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밑바닥을 내려다보’지도 않아요. 어른으로 자라난 올가는 ‘이류도 삼류도 없는 관객’을 그저 바라보듯, 오롯이 마음자리에 흐르는 숨결을 바라보고 싶을 뿐입니다.


  저이가 권력자라 해서 굽신거리지도 않지만, 저이가 권력자이기에 손가락질하지 않습니다. 저이가 콧대높은 예술가라 해서 알랑거리지도 않지만, 저이가 콧대높은 예술가이기에 비웃지 않습니다. 저이가 부자라 해서 고개숙이지도 않지만, 저이가 부자이기에 깔보지 않습니다.


  바쁜 일을 해야 하더라도 그 바쁜 일을 멈추고서 하늘을 봐요. 하늘은 누구한테나 파랗게 빛나는 바람을 베풉니다. 해님을 비롯한 뭇별은 누구한테나 초롱초롱 맑은 빛줄기를 건넵니다. 풀꽃나무는 누구한테나 싱그럽게 푸른 기운을 퍼뜨립니다. 벌나비는 누구한테나 멋스러운 춤사위를 보여줍니다. 풀벌레하고 개구리는 누구한테나 그윽하며 힘찬 노래를 불러 줍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어떤 모습일 적에 스스로 사랑이 되어 아름다울까요? 우리가 글을 쓴다면 어떤 글빛이 되면 아름다울까요? 우리가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른다면, 우리가 벼슬아치 자리에 서서 행정을 맡는다면, 우리가 교사 자리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우리가 어버이 자리에 서서 아이들을 돌본다면, 우리가 가게지기가 되어 손님을 맞이한다면, 우리가 자동차 손잡이를 잡고서 부릉부릉 길을 달린다면, 우리는 스스로 어떤 몸짓이며 눈빛일 적에 하루를 아름답게 지을까요?



“우리는 강해. 이런 시대에도 사람들은 서커스를 찾아. 예술을, 오락을 찾아. 즐거움을 찾으려고 한다고. 먹을 것도 궁핍한데 말이야!” “아, 세르기에. 위험해.” “벨라. 우린 지금 멋진 시대에 있어.”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아주 멋지다니까. 보라고. 삶의 기쁨을 알고 있잖아.” (224∼225쪽)



  우리가 사람이라면, 저마다 사랑이 넘치는 빛이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한테서 아직 빛이 흘러넘치지 않는다면, 아직 사람이 덜 되거나 안 되었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예부터 왜 ‘어린이 마음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하는가를 돌아볼 노릇이에요. 나이가 적건 많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힘이 세건 여리건 대단하지 않습니다. 돈이 있건 없건, 이름이 높건 낮건, 얼굴이나 몸매가 이러하건 저러하건, 머리가 똑똑하거나 안 똑똑하건, 그야말로 덧없는 겉차림이에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마음결이란, 스스로 흘러넘치는 사랑스러운 빛인 숨결입니다. 줄타기를 아름답게 하는 아가씨란, 그림을 아름답게 그리는 젊은이란, 말 한 마디마다 구슬이 구르듯 아름다운 어린이란, 모두 옹글게 사랑이라는 길로 흘러넘치는 빛이 된다는 뜻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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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초밥왕 2 - 3 - World Stage
다이스케 테라사와 글.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숲노래 푸른책/숲노래 만화책

트집하고 텃집 사이에 한 가지



《미스터 초밥왕 world stage 3》

 테라사와 다이스케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15.4.25.



  적잖은 사람이 한국을 떠납니다. 한국에서는 더 깊거나 넓게 배울 길이 없다고 여겨 이웃나라로 갑니다. 이웃나라에서 넓거나 깊게 배운 다음에 이 나라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그냥 그곳에 머물면서 조용히 살아가곤 합니다.


  이웃나라로 배움마실을 다녀올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나라에서 이웃나라로 배움마실을 보낼 적에는 ‘슬기롭게 배워서 사랑스레 뜻을 펼칠 만한 보금자리’를 건사할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이 나라가 돌아올 만한 나라여야겠지요. 이 나라에서 새롭게 뜻을 펼치면서 날개를 펼 만한 터전이어야겠지요.



“가장 무서운 것은, 불만이 있어도 표현하지 않는 손님이야. 점원의 태도나 맛에 불만이 있어도, 일절 입밖에 내지 않고 묵묵히 가게를 나가서, 우리에게 변명이나 개선의 기회를 주지 않고 두 번 다시 이 가게를 찾지 않는 거지.” (12∼13쪽)



  이웃나라에서 배운 다음에 그곳에 머무는 모습이란, 시골을 떠나 서울에서 배운 다음에 다시 시골로 가지 않고서 서울에 머무는 모습하고 닮습니다. 서울사람 가운데 아스라히 옛날부터 서울에 뿌리를 박은 이는 얼마나 될까요? 거의 모두 다른 고장에서 나고 자라서 서울로 배움마실을 왔다가 눌러앉지 않았을까요? 일자리를 찾아 서울에 깃든 다음에 어느새 뿌리를 내려서 구태여 시골집으로 안 돌아가는 셈 아닐까요?


  보금자리가 없다면 보금나라가 아닙니다. 보금마을도 안 되겠지요. 보금나라가 아니라면 애써 익히거나 갈고닦은 솜씨나 뜻을 펼 만하지 않을 테고, 이 나라에서 무엇이 어수룩하거나 모자라거나 덜떨어졌는가를 찬찬히 짚거나 따지거나 고치거나 바꿀 길이 없어 보인다는 소리라고 느낍니다. 시골을 떠나 서울로 간 다음에 시골로 돌아오지 않는 어린이·푸름이·젊은이도 매한가지라고 느껴요. 제 텃마을에서는 새로운 생각이나 목소리나 뜻을 받아들이거나 귀여겨듣는 일이 없으니 구태여 힘들게 텃마을로 안 돌아가겠지요.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생명의 초밥’으로 아버지는 멋지게 우승하게 됐죠. 마음은 반드시 전해진댔어요. 사장님의 초밥을 주고 싶은 사람은 누군가요?” (21쪽)



  어린이 쇼타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이란 손길로 초밥 한 줌을 쥐는 이야기를 다룬 제법 긴 만화가 있습니다. 한국에는 《미스터 초밥왕》이란 이름으로 나왔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수수하게 “쇼타네 초밥”으로 나온 만화입니다.


  수수한 책이름을 혀에 얹으면서 생각했어요. 일본에서는 왜 이처럼 수수하게 이름을 붙였을까요? 말 그대로 ‘수수한 사람’이 수수한 꿈으로 수수한 손길을 펴는데, 이 수수한 손에서 더없이 따사롭고 아름다운 사랑이 깨어나니까 수수하게 책이름을 붙였겠지요.


  어린이 쇼타는 시나브로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쇼타는 아이를 낳아 돌봅니다. 《미스터 초밥왕 world stage 3》(테라사와 다이스케/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15)은 어른 쇼타가 낳은 아이가 나옵니다. 쇼타하고 맞붙은 젊은이도 제법 늙수그레한 나이가 되고, 이분이 낳은 아이는 쇼타하고 또래가 되어 만난다고 해요. 이 두 사람이 일본이란 판은 너무 ‘좁고 갑갑하고 막히고 낡’아서 싹 갈아치우려는 꿈을 키우는 줄거리를 다룹니다.



“온갖 기법을 구사하고 재료에 소스나 향을 더해 입체적으로 맛을 내는 거야. 그래서 재료를 가리지 않고 전 세계 어디에나 퍼질 수 있었지.” (102쪽)


“좋은 재료가 있어야만 비로소 맛을 내는 요리라면, 세계에 널리 퍼지기 어렵지 않을까?” (103쪽)



  일본이란 나라에서만 산다면 일본이란 나라는 알더라도 이웃나라는 모를 테지요. 일본 훗카이도에서만 산다면 일본 훗카이도는 알더라도 오사카나 교토나 류우큐우나 도쿄는 도무지 모를 테고요. 일본 도쿄에서만 살아도 일본 여러 고장을 모를 만합니다.


  한국에서는 어떠한가 돌아봅니다. 한국 서울에서 나고 자라고 배운다면 한국이란 터전을 얼마나 넓거나 깊게 알까요? 경북 영양이라는 눈으로만 한국을 본다면? 전남 고흥이라는 눈으로만 한국을 바라본다면? 대구나 광주나 인천이나 부산이나 대전이라는 눈으로만 한국을 쳐다본다면?



“프랑스에도 이렇게 단순한 요리가 있구나.” “그야 당연하지. 일본도 집집마다 가이세키 요리(연회용 코스요리)를 먹지는 않잖아?” (131쪽)



  자꾸 트집을 잡는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굳이 토를 붙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트집이나 저런 토는 ‘더 헤아리면 한결 거듭나면서 가없이 눈부시도록 피어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트집을 잡아 보고 싶습니다. 투표권을 숱하게 쓰면서 지켜보자니, 선거알림글로 집에 날아온 종이를 펼치면 모든 이들이 더 목돈을 들이는 더 커다란 삽질을 하겠다는 다짐이 줄줄이 흐르더군요. 마을을 더 조그맣고 조용하게 돌보면서 숲이 되도록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아직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녹색당조차도 ‘풀빛’이 첫째 다짐이 되지 않습니다. 뭘 없애거나 막겠다는 다짐은 있되, 없애거나 막은 자리에 무엇을 어떻게 가꾸거나 지으면서 아름드리숲으로 나아가겠노라 하는 빛을 밝히지 못하더군요.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든, 어느 마을이 마음에 들어와서 찾아와 뿌리를 내리려는 사람이든, 이 마을에서 조촐하게 살림을 짓고 꿈을 그리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길을 북돋우거나 바라지하겠다는 다짐을 밝힌 이도 아직 찾아보지 못합니다. 어느 정당이나 후보자나 매한가지입니다. 다들 ‘서울로 보내기’에 얽매인달까요.


  삽질을 더 크게 벌이겠다는 다짐이 아주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만,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군수이든 도지사이든 시장이든 구청장이든, 하나같이 ‘삽질 다짐’은 있되 ‘숲 다짐’이나 ‘마을살이 다짐’이나 ‘이야기꽃 다짐’이 없다면, 돈을 들이지 않고도 아름답게 펼 만한 행정이며 문화이며 교육이라는 눈길이 없다면, 이들 정당이나 후보자는 이 나라에서 어떤 앞길을 보는 셈일까요. 왜 하나같이 목돈을 들이는 삽질에만 얽매일까요? 삽질을 하면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지니까?



“아들을 억지로 어부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웃기고 있네. 로봇도 아니고, 그럼 아들의 마음은 뭐가 되는데? 댁의 아들은 스스로 어부가 되기로 결정한 거야! 그걸 자기 탓이네 뭐네 하는 건 아들을 오히려 모욕하는 거라는 생각 안 들어요?” (171쪽)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 world stage》는 ‘world stage’라는 꼬리말처럼, 일본을 떠나거나 벗어나는 이야기가 바탕입니다. 일본사람 스스로 일본이란 나라는 더없이 막혔다고, 갑갑하다고, 꼴통이라고, 얼간이라고, 머저리라고, 수렁에서 헤어나올 줄 모른다고, 낡아빠진 틀을 ‘전통·문화’란 이름으로 부여잡고서 썩어문드러진다고, 매우 날선 호통을 늘어놓습니다.


  이 만화에 흐르는 곳을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돌려놓고서 생각할 만하다고 봅니다. 한국은 얼마나 안 막힌 곳일까요? 이 나라는 얼마나 안 갑갑하거나 안 꼴통일까요? 이 나라는 안 얼간이나 안 머저리인가요?


  벼슬아치나 나라지기는 곧 죽어도 대학입시를 없애지 못할 듯합니다. 시골이며 큰고장이며 젊은이는 차춤 줄어들고, 시골은 더더군다나 사람이 크게 줄어드는데, 거꾸로 공무원은 자꾸 늘어납니다. 이 거꾸로질은 어떻게 바로세워야 좋을까요. 공무원 일삯은 자꾸자꾸 오르고 나라빚은 자꾸자꾸 늘어납니다. 맑게 흐르는 바람이 피어나는 숲은 줄어들고, 논밭도 줄어드는데, 이 자리에는 찻길에 공장에 발전소에 공항에 관광단지에 골프장에 호텔에 쇼핑센터에 …… 그저 삽질판입니다. 이 거꾸로질을 돌려세우거나 살림길로 바꾸어 내려는 일꾼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자기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건 자기밖에 없어! 삶이 자기 거라면 죽음 역시 자기 거라고! 영감님이 책임을 느끼는 건 자유지만, 아들이 과연 기뻐할까? 불쌍한 인생이라고 멋대로 동정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을까?” (177쪽)



  트집하고 텃집 사이에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슬기로운 초밥지기는 ‘투덜거리는 손님한테서 배운다’고 말합니다. 투덜거릴 적에는 투덜거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으니, 이 투덜질을 더 파고들어서 스스로 손맛을 더욱 알차게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말합니다.


  틈새를 찾아내어 보듬기에 삶터가 됩니다. 그저 트이기만 한 곳은 바람이 그치지 않습니다. 트인 곳에 알맞게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얹고 지붕을 얹으며 칸을 놓습니다. 트이기만 한 곳이 아닌, 살아갈 틈이 사랑스러운 터전으로 바꾸어 내는 손길입니다.


  텃집은 보금자리입니다. 텃집을 박차고 나와서 온누리를 두루 다닐 만합니다. 두루 보고 난 다음에는 즐겁게 텃집으로 돌아갈 만합니다. 우리 어버이가 사랑으로 가꾼 보금자리에 새롭게 손길을 보태거나 덧대어, 때로는 아예 새집을 지어서, 한결 푸르면서 파랗게 빛나는 살림길을 여밀 만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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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마리코 9
오자와 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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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푸른책/숲노래 만화책

- 여든살림 지나 온살림



《80세 마리코 9》

 오자와 유키

 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19.11.30.



  나라가 차츰 늙어 간다고 합니다. 어려운 말로는 ‘고령화 사회’일 텐데, 쉽게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하는 말씨로는 ‘늙는 마을’입니다.


  늙는 마을이란 나쁠까요. 또는 좋을까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을까요.


  마을이 늙는다면, 늙은 사람만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나라가 늙는다면, 참말로 나라에 늙은 사람이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어린이하고 푸름이에다가 젊은이가 꿈날개를 펴면서 날아오를 만한 터전이 아니라는 얘기이지요.



“나나미도 가엾네. 우리 딸아이가 생각난다.” “네?” “마음씨 고운 아이란다. 내가 잘 키웠지. 나나미도 아빠 엄마한테 사랑 듬뿍 받으면서 커서, 남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착한 아이야.” (23쪽)



  마을이며 나라가 너무 어리기만 해도, 너무 젊기만 해도 치우칩니다. 너무 늙기만 해도 치우치는 판입니다. 아기, 어린이, 푸름이, 젊은이, 늙은이, 이렇게 고루 있으면서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는 터전이 아름다우면서 살기에도 좋겠지요. 어린이한테서 새롭게 피어나는 꿈을 바라보고, 젊은이한테서 꿈을 지피는 땀방울을 바라보며, 늙은이한테서 꿈을 가꾸며 얻은 슬기를 바라봅니다. 푸름이는 이들 사이에서 스스로 새롭게 나아가고픈 꿈을 익히는 눈빛을 바라보겠지요.



‘사랑은 당연히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몇 년을 수십 년을 거듭 쌓아왔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거야.’ (29∼30쪽)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는 큰고장에 어린이랑 푸름이랑 젊은이가 지나치게 쏠렸습니다. 이 나라 큰고장에는 숲도 바다도 들도 없는데 어린이·푸름이·젊은이가 지나치게 많아요. 이 나라 시골이며 숲이며 바다이며 들에는 너무 늙은이투성이입니다.


  이 골을 슬기롭게 풀 길은 틀림없이 있어요. 일자리나 배움터를 시골로 옮겨야 하지 않아요. 살아가는 마음이며 생각을 확 엎어야지요.


  몸이 아프면 어마어마한 돈도 부질없습니다. 간당간당한 목숨줄이라면 엄청난 이름값도 덧없습니다. 골골대고 앓다가 곧 죽을 판이라면 무시무시한 주먹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돌림앓이가 판을 치는 2020년 한국은 어떤 살림길을 내다볼까요? 왜 이 나라는 한 해쯤 대학입시를 아예 그만두려는 생각을 못 할까요. 무서워서 엄두를 못 낼까요? 그러나 돌림앓이가 걱정스럽고 무서우며 두렵기에 학교를 한 달 넘게 쉬었지요. 언제 학교를 다시 열는지 모를 노릇이지요. 하늘길도 거의 다 막히거나 막아요. 왜 그런가요? 그 어떤 것보다 우리 몸을 튼튼하게 건사하면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이 첫째이기 때문입니다.


  여든 살 할머니가 ‘누리잡지’ 편집장이 되어 ‘늙어버린 마을’을 뒤집어엎는 생각을 새롭게 지피는 이야기가 흐르는 《80세 마리코 9》(오자와 유키/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19)을 읽으면서 빙그레 웃습니다. 여든 살 할머니는 일할 적에 스스로 몇 살인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저 하고픈 일을 합니다. 더구나 하고픈 일을 할 적에는 ‘여든이란 나이까지 살아오며 지켜보고 겪고 마주하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웃고 울며 노래하고 춤춘 모든 걸음걸이’가 새 앞길에 새 빛줄기가 되는 줄 깨닫습니다.



“고부간이란 참 어려운 거야. 좋아서 맺게 된 관계가 아니니까. 내가 낳았다고 해도 나와 코지는 다른 인간이고, 코지가 선택한 당신은 내가 선택한 인간이 아니야.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더 숨이 막히게 되지.” (50쪽)



  열여섯 살 푸름이한테 ‘어느 대학교에 시험을 치르려 하느냐’만 묻는다면 삶이 메마르지 않을까요? 열여덟 살 푸름이한테 ‘어느 일터에 들어가서 돈을 얼마나 벌려 하느냐’만 묻는다면 삶이 팍팍하지 않을까요? 열두 살 어린이한테 ‘인문교양 학습만화’만 손에 쥐어 준다면 삶이 따분하지 않을까요?


  스물여섯 살 젊은이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활짝 웃을 만할까 하고 생각할 때입니다. 서른여섯을 지나고 마흔여섯을 거치며 쉰여섯을 가로질러 예순여섯을 달리다가 일흔여섯을 뛰어넘고 여든여섯을 노래하는 나이에는 하루를 어떻게 지어서 어떤 기쁨슬픔을 나누면서 환하게 빛나는가를 돌아볼 때라고 여겨요.



“청과점 사장입니다. 40년간 채소를 팔아 왔습니다. 모델은 처음이에요! 잘 부탁 드립니다!” (101쪽)



  청와대를 없애면 좋겠습니다. 구태여 꽉 맏힌 집에 틀어박혀 책상맡에 앉을 까닭이 없어요. 굳이 서울 한켠에 머물지 말고 다달이 나라 곳곳을 돌면서 조그마한 길손집 한켠을 일터로 삼아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경호원이란 사람으로 둘둘 감싼 우두머리가 아닌, 손수 밭을 가꾸고 손수 밥을 짓고 손수 빨래랑 설거지를 하고 아기를 돌보는 어버이다운 마음결로 나라일을 돌보는 이가 나라지기로 서면 좋겠어요.


  어깨띠를 두르고서 목청 높여 ‘나를 찍으시오’ 하고 굽신거리는 이가 아닌, 4월이 눈부신 이맘때 밭자락에서 같이 마늘을 캐고, 숲자락에서 나무를 어루만질 줄 아는 착하고 참한 사람이 벼슬아치 노릇을 하면 좋겠습니다. 바람을 알고 별을 알며 흙을 알고 풀꽃나무를 아는 이가 나라일이며 벼슬을 맡을 적에 이 나라가 아름답게 피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상점가가 계속될지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손님이 와준다’는 게 제일 행복해요.” (127쪽)



  만화책 《80세 마리코》에 나오는 마리코 할머니는 여든을 넘긴 나이입니다. 할머니 곁에는 나이 많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제 한국도 일본도 어디나 늙은 사람이 가득하니까요. 일흔 줄에도 옷집을 꾸리고, 푸성귀집을 이끌며, 찻집을 보듬는 이들은 그동안 무엇을 보고 느끼며 생각했을까요. 오랜 나날 한길을 파면서 마을살림을 지은 이들 마음에는 어떤 새싹이 돋을까요.


  고작 여든밖에 안 된 나이에 ‘스스로 신나서 하는 일’이 없이 골칸에 갇혀서 골골거리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쳐다보아야 하는 어린이나 푸름이라면, 이 어린이나 푸름이한테 앞으로 지피고 싶은 꿈이 자랄 만할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아,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렇게 살려나?’ 하는 생각을 얼결에 품지 않을까요. ‘아, 나도 저 나이에 저렇게 빛나면서 꿈길을 가면 즐겁겠네!’ 하는 마음을 가만히 품도록 우리 삶터를 구석구석 가꿀 노릇이리라 생각해요.



‘내일 일은 모른다. 답이란 없다. 하지만 지금을 바꾼다면 다른 내일이 올지도 모르지.’ (131쪽)



  나이는 몸에 깃든 해입니다. ‘해’는 하늘에서 이 별을 비추는 별이면서, 삼백예순닷새를 아우르는 이름입니다. 여든 ‘해’를 몸에 품는 동안 어떤 ‘해’를 마음에 품은 삶일까요.


  나이를 먹는다는 말이란 ‘해를 먹는다’는 뜻이지 싶습니다. 철마다 다른 숨결을 먹고, 네 철을 꾸러미로 여민 해를 먹으며, 숱한 바람이며 풀꽃나무이며 노래이며 빛이며 사랑을 고스란히 먹기에 ‘해’를 차곡차곡 모두지 싶습니다.


  온살림을 바라보는 마을이 되기를 바랍니다. 혼자 차지하면서 꼭두에 서는 다툼판이 아닌, 고루두루 어우러지는 마을길을 닦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요. 대학입시를 없애기를 바라요. 전쟁무기를 없애기를 바라요. 저마다 다른 살림지기로 살아가면서, 서로서로 곱게 살림빛을 지피기를 바라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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