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유채꽃 노랗게

 


  겨울에는 무슨 풀을 먹을까 하고 살짝 걱정했으나, 걱정할 일이란 없었다. 겨울에는 이렇게 유채가 노랗게 꽃을 피우니까.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다가올 무렵부터 스멀스멀 싹을 틔우는 유채는 겨우내 우리를 먹여 살리는 아름다운 풀빛이 된다. 그런데, 유채는 언제부터 이 땅에 들어왔을까. 배추는 고려 적부터 책에 적혔다 하고, 유채는 1643년에 《산림경제》라는 책에 적혔다 하는데, 책에 적히기 앞서부터 이 땅에 있었겠지.


  처음 이 땅에서 배추를 보고 유채를 본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배추꽃을 보고 유채꽃을 본 사람들은 어떤 눈빛이었을까. 배추잎을 뜯고 유채잎을 뜯은 사람들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책에 적힌 발자취로 헤아리면 갓은 배추와 유채보다 훨씬 오래되었단다. 이 땅에 살던 옛사람은 갓잎과 배추잎과 유채잎으로 겨울을 났으리라. 갓꽃과 배추꽃과 유채꽃을 보며 이 겨울이 저물고 새봄이 찾아오는 줄 생각했으리라. 꽁꽁 얼어붙는 찬바람이 불어도 푸른 잎사귀를 내밀고 노란 꽃송이 터뜨리는 갓꽃과 배추꽃과 유채꽃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따사로운 불빛을 품었으리라. 4346.12.2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꽃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 눈에는 겨울에 겨울풀빛

 


  지난 12월 18일에 고흥 녹동고등학교로 강의를 하루 다녀올 적에, 학교 어귀에 있는 우람한 나무에 흠뻑 사로잡혔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 둘레로 넓게 흙밭을 이루고, 가랑잎으로 온통 뒤덮인 흙밭에 겨울풀 예쁘게 돋은 모습이 무척 어여쁘다고 느꼈다. 강의를 하러 학교 건물로 들어가야 하는데, 한동안 나무 둘레를 서성이면서 줄기를 쓰다듬고 여린 겨울풀을 어루만지면서 놀았다. 사진도 몇 장 신나게 찍으면서.


  겨울에 돋은 이 예쁜 풀을 살짝 뜯어서 먹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여름이나 봄이라면 서슴지 않고 뜯어서 먹었을 텐데, 겨울에 돋은 이 고운 풀빛이 오래오래 환하게 빛나면서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즐겁게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오밀조밀 피어나는 작은 풀꽃이 예쁘장하고, 가랑잎을 이불 삼아 하나둘 새로 돋는 어린 싹들은 더없이 귀엽다. 이 겨울빛을, 한겨울에도 푸릇푸릇한 이 풀빛을, 따스한 남녘땅 고흥 풀내음을, 고흥 이웃들이 마음속에 넉넉히 품는다면 참 아름답겠지.


  풀아, 풀아, 겨울에도 씩씩하게 돋는 풀아, 찬바람 즐겁게 맞아들이면서 새봄을 함께 기다리자. 4346.12.2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꽃과 책읽기)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착한시경 2013-12-28 09:27   좋아요 0 | URL
너무 신기해요,,, 앙증맞지만 씩씩해 보이는 풀들이~ 올 겨울 유난히 심란했는데,,, 저 풀들을 보며 용기내야겠어요~^^

숲노래 2013-12-28 09:31   좋아요 0 | URL
이 추위에도 겨울풀은 살금살금 고개를 내밀면서 방긋방긋 웃음인사를 보내 줍니다~~ ^^

oren 2013-12-28 16:46   좋아요 0 | URL
성탄절날 날씨가 잠깐 풀려서 호수공원엘 다녀왔는데, 사람이 다니는 산책로조차 겨우 반쪽만 눈을 치워 놓아서 사람들이 서로 지나다니기 불편할 정도로 눈이 많이 쌓여 있더라구요. 그런데 앙상하게 옷을 벗은 나무들 아래로 푸릇푸릇한 풀들이 정말 거짓말처럼 저렇게 얼굴을 내놓고 있어서 저도 깜짝 놀랐었답니다. 아무리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이라고 해도 푸른 풀빛들은 마냥 씩씩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니 조금만 추워도 몸을 움츠리고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 바쁜 우리 인간들이야말로 너무 연약한 존재가 아닌가 싶기도 하더군요.

숲노래 2013-12-28 18:24   좋아요 0 | URL
oren 님도 겨울풀을 보셨군요.
일산은 고흥과 대면
겨울에는 10~15도쯤 벌어지더라구요.
우리 장모님 장인어른 계신 집은
요즈음 -15도 안팎이에요.

추운 날씨에도 추위를 즐겁게 맞이하면서
이 추위에도 씩씩하게 돋아
우리한테 푸른 바람과 내음 나누어 주는 풀을
사랑스레 아껴 주셔요~
 

멀구슬나무 책읽기

 


  고흥 읍내 봉황다리 곁에는 우람한 멀구슬나무 몇 그루 있었다. 고흥 읍내로 마실을 올 적마다 멀구슬나무를 보는 즐거움이 사뭇 컸다. 그런데 이 나무이름을 아는 사람이 둘레에 없어서 지난 몇 해 동안 ‘겨울에 동글동글 노란 열매 줄줄이 달려 마치 노란 등불 켠 듯 환한 나무’라고만 여겼다.


  올 2013년 봄, 고흥 읍내 멀구슬나무가 갑자기 사라졌다. 고흥군청에서 공용주차장을 넓힌다면서, 우람한 멀구슬나무를 모조리 베었다. 그러고는 시멘트로 냇가를 퍼붓고 다져서 여러 달만에 주차장을 지었다. 주차장으로 바뀐 그곳이 멀구슬나무가 우람하게 자라서 여름에는 그늘을 드리우고 겨울에는 노란 열매빛으로 눈을 즐겁게 하던 자리인 줄 아는 고흥사람은 얼마나 될까.


  고흥군은 2013년 봄에 고흥 읍내에 있는 구백 살 가까운 느티나무를 함부로 가지치기를 했다. 가지가 빽빽하고 잎사귀도 빼곡하던 구백 살 가까운 느티나무가 하루아침에 민둥민둥 이 빠진 나무가 되어 버렸다. 나무를 제대로 건사하거나 돌볼 줄 모르는 공무원 행정인 터라, 퍽 오래 뿌리내려 우람하게 자란 멀구슬나무를 아무렇지 베어 없애고 주차장으로 바꾸었겠지.


  다시 만나지 못하는 멀구슬나무를 놓고 아쉽게 여겼는데, 녹동고등학교 건물 뒤쪽에 멀구슬나무 몇 그루 있다. 한겨울인데 아직 노랗게 여물지 않고 푸른 빛깔 뽐내는 열매가 달린 멀구슬나무란.


  녹동고등학교 아이들은 저희 학교에 이 예쁜 나무가 씩씩하게 자라는 줄 얼마나 느낄까. 녹동고등학교 어른들은 이녁 학교에 이 멋진 나무가 튼튼하게 뿌리내리는 줄 얼마나 헤아릴까. 멀구슬나무 열매를 몇 얻어 우리 동백마을에도 살며시 심고 싶다. 우리 집 뒤꼍에서도 멀구슬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있으면 좋겠다. 4346.12.2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꽃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코딱지나물꽃 책읽기

 


  겨울바람 아직 수그러들지 않은 이월로 접어든 때부터 밭둑과 들판에 울긋불긋 피어나는 꽃이 있다. 이 꽃을 두고 우리 식물학자는 ‘광대나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직 ‘학명’이 없던 때, 일본 식물학자가 이름을 먼저 붙이기 앞서 한국 식물학자가 ‘광대 옷차림이 울긋불긋’하다고 떠올리면서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학자가 식물학에 따라 풀이름을 붙이기 앞서, 먼먼 옛날부터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풀을 먹던 사람들은 풀마다 이름을 다 붙여 놓았다. 식물학자는 시골사람이 붙인 풀이름을 학명, 이른바 학술이름으로는 안 쓰기 일쑤인데, 시골사람은 식물학자가 붙인 이름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한의사가 어려운 한문으로 이름을 붙이거나 말거나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풀은 풀이지 ‘草’도 ‘野草’도 ‘雜草’도 아니며, ‘植物’ 또한 아니다. 풀이 맺은 꽃은 풀꽃일 뿐 ‘野生花’일 수 없다.


  코딱지나물은 코딱지나물이다. 코딱지나물이 맺는 꽃은 코딱지나물꽃이다. 시골마을에 깃들어 시골사람들 시골말을 듣기 앞서까지, 나도 ‘광대나물’이라는 이름만 듣고 알았지만, 시골사람들 누구나 코딱지나물이라고 말하는데, 나도 시골에서 시골사람으로 살면서 광대나물이라는 학술이름을 쓸 까닭이 없다고 느낀다.


  찬바람 씽씽 부는 섣달 한복판에도 씩씩하게 잎사귀 내놓고 줄기 올리며 꽃을 피우는 이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들꽃은, 시골내음 그득한 이름으로 부르며 톡 따서 입에 넣어 야금야금 씹으면 봄내음 물씬 퍼진다.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생각을 기울인다. 다른 고장 다른 고을에서는 어떤 이름을 쓸까. 내가 이 풀과 풀꽃을 바라보며 새롭게 이름을 붙인다면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매서운 바람과 따순 볕 사이에서 흐드러지는 이 상냥한 들풀과 들꽃한테는 어떤 이름이 가장 곱게 어울릴까. 4346.12.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꽃과 책읽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appletreeje 2013-12-22 18:07   좋아요 0 | URL
정말 씩씩하고 예쁜 '코딱지나물꽃'이네요~
그런데 꽃송이가 푸른 이파리들(?) 속에서 되게 신기하게
피어 나는군요~

숲노래 2013-12-22 19:45   좋아요 0 | URL
네, 그런 모습이 꼭 코딱지 같다고 할까요 ^^;;;
저렇게 불쑥 튀어나와서 추욱 처지는 듯한 모습이니까요~
 

 

미나리꽝에 소리쟁이와 별꽃과

 


  꽃은 어디에서 피는가. 꽃은 꽃그릇에서 피는가. 꽃은 어디에서 볼 수 있는가. 꽃은 꽃집에서 볼 수 있는가.


  꽃은 흙이 있는 땅에서 핀다. 꽃은 들과 숲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꽃이 자랄 수 있는 흙땅에 사람들이 시멘트를 들이부어 집을 짓는다. 도시를 세운다. 아스팔트를 더 얹어 찻길을 닦고, 찻길 위로 높다란 구름다리와 구름찻길을 드리운다. 도시에서는 흙땅이 따로 없기에 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흙밭을 돈을 들여 새삼스레 만든다. 그런데, 도시 공원은 엄청난 돈을 들여서 만든 데인 만큼 모든 풀과 꽃과 나무가 틀에 맞추어야 한다. 한 치도 벗어나서는 안 되고 조금도 어긋나서는 안 된다. 계획표에 적은 대로 나무를 심고, 행정예산에 맞추어 꽃씨를 사다가 뿌린다. 들꽃 씨앗이 바람에 날려 공원에서 자라는 일을 공원 지킴이가 그대로 두지 않는다. 들새가 나무열매를 따먹고 공원에 똥을 누어 ‘공원으로서는 뚱딴지 같은 나무’가 자라도록 그대로 두지 않는다. 공원에 느티나무를 심었다 하더라도, 느티나무가 맺은 느티꽃에서 느티열매 맺어 느티씨 떨어지더라도, 어느 느티나무가 큰 느티나무 둘레에서 곱게 자라도록 지켜보지 않는다. 모조리 베고 몽땅 농약을 쳐서 죽인다.


  꽃은 어디에서 피어야 하는가.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데에서 피어야 한다. 꽃은 어디에서 보아야 하는가. 자동차도 버스도 경운기도 콤바인도 찾아가지 않는 곳에서 보아야 한다.


  미나리꽝에 겨울에 새로 돋은 미나리가 찬바람 맞고 벌벌 떨면서 붉게 물든다. 곁에는 소리쟁이가 커다란 잎사귀 내밀고, 어느새 별꽃나물이 줄기를 그득 덮더니, 앙증맞은 하얀 꽃망울 활짝 편다.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기 앞서까지 이 미나리꽝 둘레는 아이들로 부산했으리라. 나물 뜯는 마을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 나물 저 나물 바지런히 뜯었으리라. 이제 이 미나리꽝은 새마을운동 뒤로 엄청나게 뿌려대는 농약 때문에 아무도 미나리를 뜯으러 오지 않고, 소리쟁이도 별꽃나물도 안 뜯는다. 봄이 되어 깨어나는 풀벌레만 미나리랑 소리쟁이랑 별꽃을 조금씩 갉아먹을 뿐이다. 겨울 찬바람 휭휭 불지만, 별꽃 잎사귀는 가지런하다. 4346.12.2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꽃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