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자라는 어린나무

 


  아마 아무도 모르게 싹이 트고 잎을 내면서 천천히 오르리라. 학교 어른 가운데 누군가 알아챘다면 큰나무 곁에서 잡풀이 돋았다면서 신발로 문지르거나 낫으로 베거나 손으로 뽑았으리라. 아이들이 알아챘다면? 아이들 가운데 땅바닥에 고개를 대고 가만히 바라보면서 상냥하게 쓰다듬어 줄까?


  큰나무 곁에서는 어린나무가 자라기 마련이다. 모든 어린나무는 맨 처음에는 큰나무 곁에서 자란다. 큰나무 한 그루가 어머니와 같이 따사롭고 너른 품으로 어린나무를 돌본다. 숲이란 나무가 우거진 곳이요, 나무 한 그루는 혼자만 자라고 싶지 않다. 둘레에 동무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기다린다. 나무 한 그루가 두 그루 열 그루 백 그루 만 그루 되도록 씨앗을 퍼뜨린다. 자꾸자꾸 새 어린나무가 자라도록 한다.


  풀 먹는 짐승이 어린나무 잎사귀를 훑는다. 큰나무가 벼락을 맞고 쓰러지기도 한다. 사람이 큰나무를 베어 집을 짓거나 불을 피우기도 한다. 그런데, 숲이 아닌 도시에서는, 시골이라 하더라도 조그마한 학교 가장자리 조그마한 풀밭에서는, 큰나무 곁에 어린나무 씩씩하게 올라오더라도 미처 자랄 틈이 없다. 누군가 이 자그마한 나무를 아끼지 않으면, 잘 파서 다른 곳에 옮겨심지 않으면, 새봄에 틀림없이 모가지가 꺾이거나 뿌리가 뽑힐 테지. 기운을 내렴. 4347.1.2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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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가시나무에도 겨울눈

 


  면소재지 초등학교 놀이터로 간다. 아이들이 하도 가고 싶다 말하니 마지못해서 간다. 놀이터는 좋지만, 학교는 달갑지 않아 딱히 가고 싶지 않다. 시골에 있는 학교조차 나무를 아무렇게나 베거나 비틀거나 괴롭히기 때문이다. 우리 보금자리 있는 시골하고 가까운 초등학교에서도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자르고 나뭇잎을 아무렇게나 자른다. 이른바 ‘조경’과 ‘정원’과 ‘원예’라는 이름을 들이밀면서.


  고맙게도 아이들은 학교나무를 쳐다보지 않는다. 어쩌면 흘깃흘깃 보았을 수 있겠지.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다닐 적에 옆에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지나갈 적마다 배기가스 냄새가 아주 고약하다고 느끼니까, 나무가 아파하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지 않으리라 본다.


  모양을 낸다면서 나무를 함부로 베고 자르고 다듬었다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다가, 가시나무 잘린 가지 한쪽에 돋은 겨울눈을 본다. 너는 용케 남았구나. 아니, 잘린 가지 끝에서도 너는 씩씩하게 겨울눈 내밀었구나. 이 겨울눈에서 곱게 새빛 베풀 테지. 아름답게 피어나는 봄을 부르겠지. 이 시골학교 어른들조차 너희들 고운 새빛을 깨닫지 못하는 나머지 새봄에 또 너희들을 마구 가지치기 할 텐데, 이곳 어른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이곳 아이들이 부디 제대로 깨달아 나무가 아프게 하는 일이 사라질 수 있기를 빈다. 4347.1.2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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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열매 책읽기

 


  고흥에 깃든 뒤 치자꽃을 처음 보았다. 아니, 다른 데에서도 치자꽃을 보았을 수 있으나, 다른 데에서는 치자꽃인지 아닌지 모르며 살았다. 마을에서 치자꽃밭 돌보는 할배가 한 분 있고, 면소재지 언저리에 치자나무 돌보는 할배가 한 분 있다. 이 옆을 지날 적마다 치자나무를 들여다보고 치자잎과 치자꽃을 늘 마주한다.


  그동안 치자열매는 제대로 눈여겨보지 못했다. 고흥살이 여러 해만에 드디어 치자열매를 제대로 바라본다. 치자열매가 이런 빛이었네. 치자열매를 만지니 이런 느낌이었네. 치자열매한테서 이런 냄새가 흐르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코로 맡는다. 살갗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찬찬히 헤아린다. 이 시골에서 오래도록 살아오며 치자를 곁에 둔 할매와 할배는 그동안 어떤 빛과 냄새와 무늬와 맛을 맞이했을까. 치자열매를 만진 손에는 어떤 빛과 냄새와 무늬가 스몄을까.


  기름밥 먹는 일꾼 손에서는 기름내음이 난다. 치자꽃 만지는 일꾼 손에서는 치자내음이 나겠지. 흙일꾼 몸에서는 흙내가 감돌 테고, 물일꾼, 그러니까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 몸에서는 물내음이나 바다내음이나 소금내음이 감도리라 느낀다. 먹는 밥이 삶이 되고 몸이 된다. 맞이하는 바람이 숨결이 되고 넋이 된다. 4347.1.1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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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01-14 09:32   좋아요 0 | URL
치자꽃! 향기가 무척 좋은 하얀색의 꽃이지요~?^^
치자열매가 저렇게 생겼군요~
치자로 물도 들인다는데, 저 열매로 들이는거죠?
언젠가 부활달걀을 노랗게 물들일 때, 치자염료를 썼던 것 같아요~*^^*

숲노래 2014-01-14 09:47   좋아요 0 | URL
아마 이 열매로 물을 들이지 싶어요.
저도 거기까지는 모르지만,
머잖아 하나하나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하얀 꽃에 붉은 열매가
참 남달라요.
치자나무도 겨우내 잎을 그대로 다는 나무인 듯해요.
 

찔레 열매 책읽기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으면 씨앗을 떨군다. 씨앗을 떨구면 새롭게 자라날 어린나무를 보듬는다. 돌고 돌면서 푸른 숨결이 자란다. 흐르고 흐르면서 붉은 빛이 짙다. 작고 하얀 찔레꽃이 남기는 찔레 열매는 붉다. 가을날 숲과 들에 붉은 빛깔 남기는 찔레 열매는 작은 새들을 부른다. 큰 새는 가시 비죽비죽 돋은 찔레나무 덤불로 깃들지 못한다. 가볍게 나뭇가지에 앉아 콕콕 부리질 할 수 있는 작은 새들이 찔레 열매를 차지한다.


  붉은 열매 한 톨 톡 딴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본다. 아이한테 내밀어 맛을 보라 한다. 어떤 가을빛이 이 열매에 스몄을까. 어떤 가을빛이 이 열매에 깃들었을까. 새들은 이 열매를 먹으면서 무엇을 생각할까. 작은 열매를 먹는 작은 새는 배고픔을 달래면서 어떤 기운을 차릴까. 숲은 언제나 모든 목숨을 살뜰히 아낀다. 4347.1.1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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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물결 책읽기

 


  억새가 물결친다. 억새물결이 한들거린다. 억새가 춤추는 옆으로 논배미가 펼쳐진다. 이 논임자는 이 억새를 왜 그대로 둘까. 오늘날 같은 시골에서는 억새를 베어 지붕을 삼거나 바구니를 짤 일도 없는데. 성가시니까 그대로 둘까. 가을걷이 마친 뒤에는 굳이 건드릴 까닭 없으니 내버려 둘까. 오며 가며 마음을 포근하게 건드리면서 살랑이니 사랑스럽다 여겨 곱게 돌볼까.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가올 무렵, 온 시골마을에 농약내음이 번진다. 기계를 들고 풀 목아지를 치는 분들도 있으나, 으레 논둑과 밭둑에 농약을 죽죽 뿌린다. 논일과 밭일을 앞두고 바야흐로 시골은 농약물결이다. 옛날 같으면 논둑과 밭둑에서 풀을 뜯느라 부산했을 테고, 논둑과 밭둑에서 자라는 억새를 낫으로 잘라 정갈하게 건사하려고 애썼으리라.


  도시에 있는 공장에서 플라스틱 그릇과 바구니를 쏟아낸다. 도시에 있는 공장에서 화학섬유 옷을 뽑아낸다. 시골사람은 이제 시골에서 억새를 벨 일도, 모시를 벨 일도 없다. 억새도 모시도 그저 잡스러운 풀 가운데 하나로 여길 뿐이다. 요즈음 삼베옷은 몹시 비싼 값에 사고팔리지만, 삼씨를 심어 삼풀을 거두는 일손이 없을 뿐더러, 물레도 베틀도 없다. 박하풀이 어느 시골 어느 밭둑에서 자랄까. 질경이가 어느 시골 어느 밭둑에서 고이 살아남을까.


  억새물결을 바라본다. 억새춤을 맞이한다. 억새는 물결치듯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른다. 사그락사그락 사락사락 싸싸 쏴라락쏴라락 온갖 소리를 들려주고 갖은 노래를 베푼다. 억새밭 곁을 지나면서 억새내음을 맡는다. 억새가 흩뿌리는 숨결을 받아먹는다. 4347.1.1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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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01-11 12:14   좋아요 0 | URL
와우~굉장하네요! 억새물결 한들거림이!!^^
처음 봤을 때는, 파도가 치는 것도 같았고 눈들이 춤을 추는 것 같이도 보였어요~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억새들의 춤물결이네요~ㅎㅎㅎ

억새를 베지 않고 놔 두신 논임자님께도, 이렇게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 주신
함께살기님께도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참 좋은 주말입니다~*^^*

숲노래 2014-01-11 12:38   좋아요 0 | URL
이웃마을에서 꼭 저곳만 저렇게 수수하고 조촐하게
억새밭 이루어져 억새물결이 일렁여요.
가을이면 언제나 부러 저 앞길로 돌아서 다니곤 하는데
틀림없이 일부러 이렇게 두는구나 하고 느껴요.

아름다움이란 늘 우리 곁에 있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