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책읽기

 


  서른 몇 해 앞서부터 수선화라는 꽃이 남모르게 마음으로 들어왔다. 몇 살 적에 수선화를 처음 보았을까. 국민학교 다니며 교사 책상에 놓인 수선화를 본 일이 있는데, 더 어릴 적에도 보았을는지 모른다. 푸른 꽃대에서 조그맣게 꽃망울이 맺히는가 싶더니 어느새 꽃잎을 펴고는 풀줄기와 다르게 샛노랗게 빛나는 잎사귀가 무척 남다르구나 하고 느꼈다. 아니, 수선화라는 꽃을 보고 나서 꽃이란 이렇게 어여쁘게 벌어지는 빛이로구나 하고 깨달았다.


  작은 꽃대에서 커다란 꽃이 피어난다. 눈부신 꽃잎에서 맑은 내음이 흐른다. 열매를 사람이 먹지 않고 꽃송이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배가 부르고 마음이 넉넉하다.


  수선화를 처음 깨달은 날부터 ‘꽃집’이 따로 있는 까닭을 알았다. 수선화를 처음 마음으로 담은 때부터 ‘꽃다발’을 선물하거나, 집안에 ‘꽃그릇’을 두는 까닭을 알아차렸다.


  우리 집 마당에 수선화를 옮겨 심으려고 여러 차례 해 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서재도서관 한쪽에 수선화가 자라네. 비료도 뭣도 아무것도 안 주는 자리에 수선화가 저 스스로 씩씩하게 피고 지네. 그래, 우리 서재도서관은 1997년까지 초등학교였지. 초등학교 문간에 심은 수선화였을 텐데, 학교가 문을 닫고 열 몇 해가 지났어도 수선화는 저 스스로 씩씩하게 피고 지는구나. 저 스스로 맑은 꽃내음을 풍기면서 이곳을 밝히는구나. 예전에 수선화가 이곳에 알뿌리 하나만 있지 않았겠지. 곳곳에 있었겠지. 아직 다른 곳에서는 수선화를 못 보았다. 어쩌면 다른 수선화는 모두 죽고 이 아이만 살아남았을 수 있다. 수선화 둘레를 얼기설기 휘감은 등나무 덩굴줄기를 치운다. 등나무야, 이곳에서 수선화가 곱게 살아가도록 이쪽으로는 뿌리도 줄기도 뻗지 말자. 4347.3.2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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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틔우는 꽃빛과 꽃내음

 


  꽃빛이 가장 고울 때는 언제인가? 아침일까, 낮일까, 저녁일까. 우리 시골집에서는 날마다 하루 내내 꽃구경을 할 수 있으니, 아침과 낮과 저녁에 따라 꽃구경을 하기로 한다. 밤에도 뒤꼍 매화나무 곁에 서기로 한다. 새벽에도 만난다. 하루 내내 매화꽃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가장 고울 때는 따로 없다. 내가 매화나무 앞에 서서 매화꽃을 그윽하게 바라보면, 이렇게 바라볼 적마다 꽃빛이 곱다.


  꽃망울이 터질랑 말랑 할 적에도 곱다. 꽃망울이 처음 터질 적에도 곱다. 꽃망울이 흐드러지는 잔치날이 되어도 곱다. 꽃잎이 지면서 하나둘 시들 적에도 곱다. 꽃이 모두 지고 천천히 열매가 익으면서 푸른 잎사귀 돋을 적에도 곱다. 언제나 곱다. 언제나 고운 빛이 흐르니, 꽃을 바라보고 잎을 바라보며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고운 꽃내음을 먹는다. 4347.3.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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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풀꽃이 즐겁다

 


  통영을 걷는다. 처음 찾아간 통영에서 헌책방을 찾다가 골목과 동산을 걷는다. 통영에 마지막까지 있던 헌책방은 조용히 사라진 듯하다. 헌책방이 있었으리라 보는 곳은 무언가 확 바뀌었다. 찻길이 넓고 아파트가 높다. 틀림없이 이 언저리일 텐데 하고 한참 뒤돌아보지만 몇 해 앞서 문을 닫고 말았네 싶은 헌책방은 내 눈앞에 없다.


  통영에도 이마트가 있다. 통영시는 작지 않다. 그렇지만, 책이 흐르는 물길 가운데 하나가 사라졌다. 통영에 헌책방이 없으면, 통영에서 책은 어디로 가야 할까. 도서관에서 버리고, 이삿짐 사이에 섞여 나오는 책은 어디로 가야 할까.


  골목길을 걷는다. 시내에서 벗어나 자동차 소리에 귀가 아프지 않은 골목길을 걷는다. 큰길에서 몇 미터 안쪽으로 깃들 뿐인데, 자동차 소리가 그치면서 새소리가 들린다. 아, 통영 골목동네에도 새가 있구나. 바닷가에는 갈매기가 날고, 골목동네에는 직박구리와 딱새와 박새와 때까치가 있구나. 통영 골목동네에는 사월에 제비가 찾아오겠지? 통영 골목동네에서는 제비 노랫소리도 누릴 수 있겠지?


  조용한 골목동네를 걷다가 풀꽃을 만난다. 동백꽃 붉은 큰 나무 둘레에 앙증맞도록 조그맣고 귀여운 풀꽃이 방긋방긋 고개를 내밀며 바람에 흔들린다. 골목 한켠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코를 대고 봄풀내음과 봄꽃빛을 맡는다. 너희는 이곳에서 예쁜 골목사람 고운 손길을 받으면서 살겠지?


  통영에 있던 헌책방 〈개미서점〉을 만나지 못해 서운한 마음이 작은 풀꽃을 보면서 풀린다. 작은 헌책방은 역사책에 이름 넉 자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작은 풀꽃은 작은 골목동네를 이렇게 밝히는구나. 너희 푸른 숨결이 통영을 살린다. 4347.3.2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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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받침꽃과 등잔풀(등대풀) 푸른 빛

 


  새봄에 돋는 풀꽃은 으레 하얗거나 발그스름하거나 파르스름하거나 노르스름하다. 그런데, 이런 알록달록 봄꽃잔치 사이에서 푸르스름한 빛으로 피어나는 꽃이 있다. ‘불받침꽃’이요 ‘등잔풀꽃’이다. 일본 풀이름으로는 ‘등대풀’이다.


  아이들과 함께 발포 바닷가에 찾아가서 바닷바람을 쐬며 쉬는데, 발밑에 알록달록 앙증맞게 올라온 너를 보고는 사뭇 반갑다. 네 곁에 함께 피어나는 봄까지꽃을 보면서 더욱 반갑다. 봄까지꽃은 꽃송이가 갓난쟁이 손톱보다 훨씬 작은데, 불받침꽃 너도 그리 크지는 않구나. 아마 네가 꽃인 줄 알아보는 사람도 드물지 않을까. 너를 꽃으로 여기며 예뻐 할 사람도 아주 없지 않을까.


  나는 너한테 새롭게 이름을 붙여 주고 싶다. 푸르스름한 잎사귀가 벌어져 받침을 이루고, 푸른 받침 사이에 아주 조그맣게 맺는 풀빛 꽃송이를 떠올리면서, 너는 푸른 불꽃을 받치는 꽃이라고, ‘불받침꽃’이라고 이름을 붙여 본다. 봄을 밝히는 푸른 불꽃이 되자. 봄을 환하게 노래하는 푸른 불씨가 되자. 4347.3.1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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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아 반갑구나

 


  우리 집 마당 한쪽에 제비꽃이 피었다. 제비꽃송이를 바라보니, 꽃봉오리 터진 지 여러 날 되었구나 싶은데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마당 한쪽에 있는 쑥밭 귀퉁이에 아주 조그맣게 피었기에 늦게 알아보았구나 싶다. 서서 바라보면 자그마한 제비꽃이 있는지 없는지 못 알아채곤 한다. 쪼그리고 앉아 풀을 뜯으면 비로소 ‘어라, 여기에 제비꽃이 있네?’ 하면서 느낀다.


  봄꽃은 제비꽃마냥 조그맣다. 그나마 제비꽃은 다른 봄꽃과 견주어 크다고 할 만하다. 봄볕 한 조각을 먹으면서 자라는 제비꽃이고, 봄햇살 한 줄기를 마시면서 크는 제비꽃이다. 땅바닥에 얌전히 붙어 조용조용 피어나고는, 어느새 조용조용 지면서 씨앗을 톡톡 터뜨린다.


  제비꽃씨는 개미도 먹는다. 제비꽃씨는 작은 벌레들이 반가이 누린다. 개미와 작은 벌레가 먹지 않고 남은 씨앗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 조그맣게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새로운 제비꽃으로 피어난다. 올봄에도 우리 집에 찾아온 제비꽃아, 반갑구나. 4347.3.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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