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나비 애벌레



  해마다 우리 집에서 깨어나는 범나비가 있다. 그러니, 해마다 우리 집에 알을 낳는 범나비가 있고, 우리 집에서 자라는 애벌레가 있다. 어느 해에는 이 아이들을 만나기도 하고, 어느 해에는 미처 못 보기도 한다. 우리가 보거나 말거나 범나비 애벌레는 씩씩하게 초피잎을 갉아먹으면서 자란다. 무럭무럭 크고, 그야말로 통통한 몸을 꼬물거리면서 잎을 천천히 갉는다.


  한참 동안 애벌레를 지켜본다. 아이하고 함께 지켜본다. ‘거짓눈’도 보고, 다리가 얼마나 짧은지도 보며, 입이 얼마나 작은지도 본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도 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모습을 본다.


  많이 먹으렴. 너희가 잎을 갉아도 우리 집 초피나무는 아직 잎을 많이 매달지. 너희가 배불리 먹고도 넉넉히 남는단다. 초피나무에서 태어난 애벌레를 바라보는 동안 어느새 내 몸에는 초피잎 알싸한 냄새가 짙게 밴다. 4348.7.14.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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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나물 냄새 큼큼 (어성초)



  유월이면 마당 한쪽에서 멸나물꽃이 하얗게 핀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유월에 멸나물꽃을 본다.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되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데, 봄이 되어 천천히 싹이 트고 여름이 되어 곱다시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면 새삼스레 놀란다. 철 따라 흐르는 삶을 꽃하고 함께 지내면서 새로 바라본다.


  멸나물 냄새는 예나 이제나 비릿하다. 비릿한 멸나물 냄새를 맡으면서, 아아 재미있네 하고 다시금 생각한다. 꽃내음하고 풀내음만으로도 마음이 즐겁다. 꽃빛하고 풀빛을 마주하면서 두 눈에 새 힘이 솟는다. 4348.7.10.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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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쟁이 씨앗



  우리 집에 온갖 풀이 다 나지만 소리쟁이만큼은 아직 안 난다. 그래서 소리쟁이 씨앗을 볼 적마다 훑어서 마당이나 뒤꼍에 뿌리는데, 지난 네 해 동안 소리쟁이가 돋지 않는다. 얘야, 예쁜 풀 소리쟁이야, 너희 씨앗을 훑어서 또 뿌리고 거듭 뿌릴 테니까, 우리 집에서도 신나게 돋아 주렴. 너희 잎사귀를 즐겁게 먹고 싶어. 보드르르한 씨앗을 손바닥에 얹고 가만히 느껴 본다. 이 씨앗이 아름다운 풀로 태어날 모습을 마음으로 그린다. 4348.7.8.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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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만난 찔레꽃



  찔레꽃을 바닷가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찔레꽃은 숲이나 들에서 으레 보았고, 우리 집 뒤꼍에서 늘 본다. 그런데, 바닷바람이 드세게 부는 바닷가에도 찔레넝쿨이 뻗으면서 하얗게 꽃을 피우네. 찔레야, 너한테는 ‘바다찔레’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겠네. 바닷바람이 짜면서 고되지는 않으니? 너희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어떤 꿈을 키우니? 바람이 드센 바닷가에서는 누가 너희한테 찾아와서 꽃가루받이를 해 주니? 개미가 있을까? 벌이나 나비가 이 둘레로 날아올까? 아니면 자그마한 새가 너희를 찾을까? 땅바닥을 기면서 돌둑을 타는 바다찔레꽃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쓰다듬는다. 4348.7.4.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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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석딸기인걸



  들이나 숲에서 돋는 딸기 가운데 알이 퍽 굵은 녀석이 있다. 조물조물한 알이 모인 들딸기 말고, 굵직굵직한 알이 모인 녀석은 멍석딸기이다. 잎이나 꽃도 여느 들딸기하고 다르다. 찬찬히 살피면 잎이랑 줄기랑 알을 보면서 멍석딸기인 줄 알아챌 수 있지만, 그냥 빨간 빛깔로만 보면 들딸기나 산딸기인 줄 알기 일쑤이다.


  여덟 살 시골순이더러 “얘는 멍석딸기로구나.” 하고 말하는데 ‘멍석’이라는 말을 못 알아듣는지,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름을 머리에 안 새기더니, 멍석딸기를 훑고 나서 보름 남짓 지난 어느 날, 들꽃 사진책을 보다가 “아버지, 여기 봐, 우리가 저번에 바다에서 본 딸기는 멍석딸기래!” 하고 외친다.


  아이야, 책에 나오는 모든 이름은 먼저 사람들이 삶에서 빚은 말이란다. 사람들이 삶에서 빚은 말이 없으면 책을 쓸 수 없어. 책에 나왔으니 알아보는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삶에서 언제나 누리기에 이름이 있고, 이러한 이름을 차곡차곡 모아서 책을 엮는단다. 아무튼, 멍석딸기는 멍석을 깔듯이 옆으로 줄줄이 퍼진다. 4348.7.3.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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