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껍질 눈송이 책읽기

 


  고흥 시골집에 처음 들어올 적, 이웃집 할머니들이 우리 집 텃밭에서 자라는 키 작은 나무를 가리켜 모두들 ‘산초나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산초나무인가 보다 여겼다. 우리 집 자그마한 나무는 까만 열매 아닌 불그죽죽한 껍데기를 빻아서 쓴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분은 이 나무를 보고는 산초 아닌 ‘제피’라거나 ‘초피’라고 말씀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산초는 아닌 듯하고 초피나무하고 잎사귀 모양이 꼭 닮았다. 한 해 동안 산초라고 알았으나, 아무래도 초피가 맞으리라 느낀다. 헷갈려 하는 사람이 많다 하고, 잘못 아는 사람이 많다 한다. 고을마다 가리키는 이름이 다르다고도 한다.


  맨 처음 누가 이 나무한테 이름 몇 글자 붙여 주었을까 헤아려 본다. 어슷비슷하게 생긴 여러 나무를 바라보며 저마다 다른 이름을 붙여 주었을는지, 처음에는 한 가지 이름으로 뭉뚱그려 가리켰을는지 곱씹어 본다. 같은 쑥이든 민들레이든 진달래이든 냉이이든 명아주이든, 다 똑같이 생기지는 않는다. 토끼풀이건 괭이밥풀이건 똑같이 돋는 잎사귀란 없다. 그래서 이런 풀 저런 풀 갈래갈래 꼼꼼하게 새 이름을 붙여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 풀 저 풀 다 다르게 돋았을까. 맨 처음에도 다 다른 풀이 한꺼번에 돋았을까. 차츰차츰 다 다른 풀로 갈라졌을까. 곳과 철과 때에 맞추어 다 다른 풀이 저마다 돋았을까. 처음에는 다 같은 풀이 돋다가 시나브로 모습과 무늬와 냄새와 맛이 하나하나 달라졌을까.


  산초 아닌 초피로구나 싶은 나무에 맺힌 불그죽죽한 열매껍질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젖는다. 사람들은 먼먼 옛날 ‘맨 처음 사람’이 어떠했는가 하고 뼈다귀라든지 무언가에 기대어 뿌리를 캐거나 밝힌다고들 하는데,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가 언제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갈라졌는가를 밝힐 수 있거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있을까. 생각해 보는 사람은 있을까. 알아보거나 돌아보면서,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풀과 나무 한살이와 죽살이를 톺아보는 사람은 있는가. 4345.1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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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잔치 꽃다발 책읽기

 


  혼인잔치 꽃다발을 부케(bouquet)라고들 하는데, 이 낱말이 프랑스말인 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프랑스말이라 나온다. 시집을 가고 장가를 드는 사람들은 이 낱말뜻을 헤아려 보곤 할까. 국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신부가 손에 드는 작은 꽃다발”을 일컫는단다. 그러면, 한국말로는 ‘신부 꽃다발’쯤 될까. 이러한 모습 그대로 ‘신부 꽃다발’이라 할 만하고, ‘사랑꽃다발’이라든지 ‘예쁜꽃다발’이라든지 ‘꿈꽃다발’처럼 새 이름을 애틋하게 붙일 수 있으리라.


  신부가 되는 사람이 꽃다발을 던진다. 곧 신부가 되겠다는 사람이 꽃다발을 받는다. 꽃다발은 꽃내음 물씬 풍기며 하늘을 난다. 신부가 된 사람도, 곧 신부가 될 사람도 모두 꽃답다. 굳이 꽃을 들지 않아도 되지만, 꽃은 어디에나 있기에 어디를 가든 저마다 꽃내음을 담뿍 느낄 테지. 조그마한 꽃송이도 함박만 한 꽃송이도 모두 어여쁜 꽃이다. 노란 꽃도, 붉은 꽃도, 파란 꽃도, 모두 아리따운 꽃이다.


  아이들은 풀숲에 가면 으레 꽃송이를 하나둘 따서 조그마한 손에 조그마한 꽃송이를 다발처럼 잔뜩 쥐면서 논다. 가시내도 사내도 꽃밭에서 꽃이 되어 뛰논다. 아이들은 꽃을 따지 않아도 꽃다운 빛과 무늬가 맑고, 저마다 손과 손에 꽃송이묶음을 들지 않아도 꽃내음 물씬 풍긴다.


  꽃다발을 받지 않아도 내 손에는 꽃물이 든다. 꽃다발을 건네지 않아도 내 가슴에는 꽃사랑이 흐른다. 4345.12.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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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을 먹는 책읽기

 


  나는 풀만 먹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풀맛을 즐겁게 누리고픈 사람입니다. 사회에서는 채식이나 육식이니 잡식이니 하고 금을 그으려 하지만, 고기를 많이 먹는다는 사람치고, 밥을 아예 안 먹는 사람은 없어요. 밥이란 쌀이요 쌀이란 벼며 벼란 곡식인데, 곡식이란 풀입니다. 곧, 푸성귀를 많이 먹든 고기를 많이 먹든, 누구나 풀을 먹어요. 풀 한 포기는 목숨 이을 밥바탕이 됩니다.


  나는 밥이 되는 벼풀 말고 다른 풀을 즐겁게 누리고 싶습니다. 무도 좋고 배추도 좋습니다. 감자도 좋고 쑥도 좋습니다. 고구마도 좋고 마늘도 좋습니다. 들판에서 스스로 자라는 온갖 풀 모두 좋습니다. 괭이밥풀도 망초풀도 좋습니다. 주홍서나물풀도 좋고 유채풀도 좋습니다. 내 몸으로 깃들며 고운 목숨이 될 모든 풀이 반갑습니다.


  옆지기 동생이 시집잔치를 하기에 전남 고흥에서 경기 일산까지 먼길을 달려옵니다. 시집잔치를 며칠 앞두고, 옆지기 동생이 새로 마련한 작은 집으로 찾아가서 튀김닭을 함께 뜯으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옆지기 동생네 단골집이라 하는 데에서 시킨 튀김닭인데, 밥상에 튀김닭을 펼칠 적에 깍뚝무와 튀김닭이 놓일 뿐, 흔하디흔한 양배추버무림조차 없습니다. 고기랑 무조각만 있을 뿐, 달리 아무런 풀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흥을 벗어나 순천 기차역에서 도시락을 사다 먹을 적에도 ‘도시락 반찬’은 온통 고기 반찬이었지, 싱싱한 풀 한 줌 없어요. 따로 고기집에 들러 세겹살을 구워 먹을 때가 아니라면 싱싱한 풀을 반찬으로 내주는 밥집이 없어요. 어느 밥집에서건 김치를 빼면 ‘풀 반찬’은 구경할 수 없습니다.


  문득 깨닫습니다. 도시에는 풀이 홀가분하게 자랄 터가 없습니다. 도시사람은 풀이 길가나 아파트 잔디밭에서 ‘함부로’ 자랄라치면 약을 치거나 북북 뜯거나 뽑습니다. 가게 많고 자동차 많으며 밥집 많은 도시이지만, 막상 나무가 없고 풀이 없으며 꽃이 없는 도시예요. 예쁘장한 꽃을 다발로 사고파는 꽃가게는 있습니다만, 풀이 씨앗을 틔워 자라난 다음 새 씨앗을 맺으려고 피우는 소담스러운 꽃은 없는 도시예요. 길가에 나무를 심기는 하되, 사람들이 오붓하게 나무열매 즐길 수 없는 도시예요.


  도시로 마실을 왔다면 풀 먹을 생각은 할 수 없겠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도시로 나들이를 왔으면 도시 흐름에 발맞추어 고기만 먹을 노릇이구나 하고 다시금 느낍니다. 시골로 돌아가 흐뭇하게 풀 먹을 나날을 그립니다. 시골집에서 호젓하게 풀 먹으며 풀방귀 뀔 나날을 헤아립니다. 4345.11.3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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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잎 책읽기

 


  그러께에 단풍잎을 처음으로 먹어 보았다. 사람이 먹을 수 없는 풀이나 잎은 없다고 생각하며 지내다가 문득 ‘갓 돋은 단풍잎’은 어떤 맛일는지 몹시 궁금했다. 한창 자라며 싱그러이 빛나는 푸른 단풍잎이라든지, 빨갛게 빛나는 단풍잎은 먹기 쉽지 않으리라 느끼지만, 갓 돋은 단풍잎은 수많은 들풀처럼 맨들맨들 말랑말랑 맛나 보였다. 나뭇가지에 새로 돋은 잎을 톡 하고 따서 살그마니 입에 넣어 살살 씹으면, 단풍나무 단풍잎다운 단풍내음이 솔솔 퍼지면서 단풍맛은 이러하구나 하고 느낄 수 있다. 단풍잎이 내 몸이 되고, 내 몸은 단풍잎한테 스며든다. 내 삶은 단풍잎 조그마한 잎사귀 하나로 거듭나고, 내 숨결은 단풍잎 작디작은 잎사귀 하나와 함께 빛난다. 풀을 먹는 일이란 목숨을 먹는 일이다. 풀을 먹으며 목숨이 살아난다. 풀은 햇살을 머금으며 싱그러이 빛나고, 내 몸은 햇볕을 쬐며 흙빛이 된다. 따순 날씨에 단풍나무도 가을날 새잎을 틔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4345.11.2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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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초꽃 책읽기

 


  꽃마다 피고 지는 철이 있단다. 참 맞다. 꽃마다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처음 피는’ 철이 있다. 그런데 거의 모든 풀은 철에 따라 피거나 지지 않는다. 거의 모든 풀은 한 해에 여러 차례 피고 진다.


  쑥풀을 봄에만 뜯어서 먹지 않는다. 여름에도 뜯어서 먹고, 가을에도 뜯어서 먹는다. 미나리도 유채도 질경이도 이와 같다. 왜냐하면, 김을 맨다면서 이들 풀을 뽑아서 버리면, 머잖아 이들 풀은 새롭게 돋는다. 사람들이 다시 김을 맨다면서 이들 풀을 또 뽑아서 버리면, 이윽고 이들 풀은 새삼스레 돋는다.


  논둑이든 밭둑이든 망초라 일컫는 풀은 참 자주 쉽게 뽑힌다. 가을날 가을걷이를 마치고 나면 비로소 망초나 숱한 풀은 한숨을 돌리며 씩씩하게 돋는데, 이때에는 꽃이 피고 씨를 맺어 훨훨 저희 숨결을 퍼뜨릴 때까지 안 뽑히곤 한다. 왜냐하면, 곧 겨울이 다가와 이들 풀은 겨울 추위에 몽땅 얼어죽는다고 여기니까.


  겨울 앞둔 늦가을 들판에서 망초꽃을 본다. 너희 참 씩씩하게 잘 컸구나. 대견하네. 어여쁘네. 너희를 들여다보며 곱다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너희는 너희 숨결대로 이 땅에 힘차게 태어나 아름다이 삶을 누리는구나. 4345.11.2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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