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꽃 책읽기

 


  맨 먼저 피는 꽃은 없습니다. 꽃은 서로 다투지 않아요. 풀포기는 같은 자리에 뿌리를 내려 서로 엉키기도 합니다. 뿌리가 서로 엉키며 어느 한쪽이 더 기운을 내어 다른 뿌리를 말려죽일 수 있을 테지만, 밭에서 김을 매고 보면, 온갖 풀이 뿌리가 하나로 엉킨 채 씩씩하게 자라곤 합니다. 조금 일찍 피었다가 지는 꽃이 있고, 나란히 피며 나란히 지는 꽃이 있어요. 때에 맞추어 피는 꽃이지, 맨 첫째로 피거나 둘째로 피거나 하면서 다툴 일이 없습니다. 서로서로 알맞게 피고, 서로서로 즐겁게 씨앗을 맺어, 서로서로 흙숨 나누어 맡습니다.


  풀이 서로 다투거나 겨루기를 한다면, 아마 스스로 씨가 마르겠지요. 한 가지 풀만 자라는 땅은 기름지지 못하거든요. 여러 풀이 자라면서 여러 기운이 스미는 땅이 될 때에 기름지거든요.


  냉이꽃 조그맣고 하얀 꽃송이 벌어집니다. 겨울비 지나고 들판 촉촉하고 보드랍게 녹은 이듬날, 논둑과 들판마다 조그마한 들꽃이 잔치를 벌입니다. 아직 흐드러진 잔치는 아니요, 천천히 노래하는 잔치입니다. 머잖아 하얗게 파랗게 노랗게 발갛게 잔치마당 이루어지겠지요.


  아이들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거닐다 냉이꽃 몇 송이 바라봅니다.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는 군내버스 타고 이웃마을 지날 적에도 ‘저기 냉이꽃 피었네’ 하고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 4346.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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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바다

 


  하루 내내 비가 내린 겨울이 지나간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지치지 않고 비가 오시는 겨울이 흐른다. 깊은 밤이 되어 비는 멎는다. 비가 멎은 들판을 바라보며 작은아이를 품에 안고 밤마실을 나온다. 겨울비 드리운 밤들판을 바라보렴. 저기 저 까만 하늘도 보렴. 비가 그치고 나니 하늘이 한결 맑게 보이지? 구름이 물결치는 밤바다 같은 밤하늘 사이사이 반짝반짝 빛나는 어마어마한 별을 함께 보자. 저 별이 무리를 지은 듯하다고 느껴 옛사람은 미리내라는 이름을 붙였어. 미리내는 어떤 냇물일까. 지구를 둘러싼 뭇별이 이루는 환한 냇물일까. 보아도 보아도 눈을 터 주는 별빛은 별꽃일까. 피어도 피어도 지지 않는 별꽃은 별꿈일까. 꾸어도 꾸어도 그치지 않는 별꿈은 별사랑일까. 저 먼 별은 지구한테 어떤 사랑을 나누어 주고 싶을까. 우리는 서로한테 어떤 사랑을 속삭이면서 지구별을 보살필 수 있을까.


  구름바다가 흐르며 날이 갠다. 구름바다가 지나가며 밤하늘이 훤하다. 구름바다가 우리한테 노래를 들려주면서 새근새근 잠들 때가 다가온다. 4346.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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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나무

 


  도시를 짓고자, 사람들은 숲을 민다. 도시를 지으며, 사람들은 나무 한 그루 없이 메마른 곳에서 머리가 빙글빙글 돌기에, 아직 도시로 짓지 않은 시골을 찾아가서 나무를 파낸다. 그러고는 도시에 새로 나무를 박는다.


  도시에서는 나무를 심지 않고, 나무씨앗을 뿌리지 않으며, 나무가 씨앗을 떨굴 적에 씨앗이 깃들어 자랄 빈 흙땅이 없다. 도시는 ‘나무박기’를 한다. 시골에서 예쁘게 자라던 나무를 함부로 파내어 찻길 가장자리에 아무렇게나 줄줄이 나무박기를 한다. 뿌리뽑힌 채 고향을 잃어야 하는 나무들은 도시 한복판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먹으며 시름시름 앓는다. 해마다 공무원들은 나뭇가지를 뭉텅뭉텅 자른다. 핑계를 대기론, 전봇대 전깃줄 건드린다며 나뭇가지를 베지만, 나무는 전깃줄을 안 건드린다. 괜히 사람들 스스로 나무를 괴롭히려고 할 뿐이다.


  도시로 와야 하는 나무들은 밤에 잠들지 못한다. 밤이면 밤마다 찻길을 환하게 비추려고 등불을 켜니까, 나무는 답답해서 잠들지 못한다. 사람들은 나무 옆에 담배를 버리고 쓰레기를 버린다. 가게 일꾼은 나뭇줄기에 못을 박아 걸개천을 걸기도 하고, 운동한다며 이녁 등판을 나뭇줄기에 쿵쿵 때리기도 한다.


  나무는 천 해나 이천 해쯤 살아가는데, 때로는 오천 해나 만 해를 살아가는데, 고향인 시골을 빼앗기며 도시 한복판 아스팔트 찻길 가장자리로 박히며 줄기가 자꾸자꾸 뭉텅뭉텅 잘리는 나무는 서른 해조차 살기 힘들다. 왜냐하면, 도시는 끝없이 재개발을 하기에, 이제 서른 해쯤 산 나무들은 새삼스레 밑둥을 잘리며 죽어야 한다.


  여섯 살 큰아이가 도시나무를 보다가 살살 줄기를 쓰다듬는 모습을 떠올린다. 나 또한 큰아이처럼 도시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살 줄기를 쓰다듬곤 한다. 아프지? 힘들지? 고단하지? 그래도 너는 봄이 되면 이곳에서도 푸른 잎사귀 내놓고, 가을이면 곱게 물든 나뭇잎 흩뿌리는구나. 나무야, 나무야, 사랑도 이야기도 꿈도 모두 곱게 자라는 나무야. 사람들은 언제쯤 도시짓기를 멈추면서 삶짓기를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스스로 삶짓기를 하지 못하는 오늘날, 너는 이 가녀리고 딱한 사람들한테 싱그러운 그늘을 베풀려고, 아픈 몸 달래며 씩씩하게 새 가지를 뻗고 새 잎사귀로 노래를 하니? 4346.1.1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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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바다

 


  벼포기는 무럭무럭 자라 아이들 키보다 웃자랍니다. 옥수수포기도 씩씩하게 자라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 키보다 웃자랍니다. 수수도 해바라기도 모시도 모두 튼튼하게 자라며 높이높이 키를 뻗칩니다.


  여름날 들판에 서면, 이야 풀밭이네 하는 소리 아닌, 이야 풀바다로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자라나는 풀은 어느새 우리 키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풀숲에 깃들며 풀내음 물씬 받아먹습니다. 풀밭에 깃들며 풀소리 담뿍 받아들입니다. 바람이 불어 서걱서걱 노래를 짓습니다. 풀잎이 서로 몸뚱이 비비며 내는 싱그러운 노래를 짓습니다. 푸르게 빛나는 풀잎은 푸르게 속삭이는 노래입니다. 푸르게 싱그러운 풀잎은 푸르게 웃음짓는 노래입니다.


  풀바다에 안겨 춤을 추는 아이는 풀마음을 키웁니다. 풀바다에 뛰어들어 뛰노는 아이는 풀사랑을 보듬습니다. 4346.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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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밍한 풀맛

 


  읍내 가게에서 돗나물 한 꾸러미를 장만한다. 된장에 무쳐서 먹는다. 한겨울에도 읍내 가게에 가면 돗나물 한 꾸러미를 장만해서 푸른 빛 나는 풀을 먹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젓가락 집어서 입에 넣으니, ‘퍼석’ 하는 밍밍한 물맛만 난다. 아, 그래, 그렇지. 한겨울에 읍내 가게에서 사다 먹을 수 있는 푸성귀라면, 비닐집에서 키웠을 테니까. 비닐집에서 물과 비료만 먹고 자랐을 테니까. 햇볕과 흙과 바람과 빗물을 마신 풀이 아닐 테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 집 텃밭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얻는 돗나물은 줄기가 퍽 가늘고 잎사귀도 작다. 가게에서 사다 먹는 돗나물은 줄기도 굵직하고 잎사귀도 큼직하다. 겉보기로는 먹음직스럽지만, 막상 먹고 보면 밍밍한 물맛만 돌 뿐, 풀다운 풀맛이 돌지 않는다. 4346.1.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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