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제비꽃

 


  제비꽃이 필 무렵 들판이 알록달록하다. 조그마한 제비꽃 봉오리는 사람들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 성큼성큼 걸어가면 제비꽃이 곁에 피었어도 보지 못하고, 자칫 제비꽃이 뻗은 줄 모르며 밟기까지 한다. 봄에도 가을에도 제비꽃이 핀 풀숲이나 들판을 천천히 거닐다가 발걸음을 멈추면 자그마하면서 앙증맞은 꽃잎을 마주할 수 있다. 조용히 피어 조용히 꽃을 피우고는 조용히 씨를 맺어 조용히 씨를 떨구는 제비꽃이다. 기쁘게 찾아온 봄을 노래하다가, 고즈넉하게 저무는 가을을 속삭이는 제비꽃이다. 4346.10.2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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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초피나무 풀빛

 


  어린나무는 어리다. 어린나무는 쑥쑥 자라지 않는다. 여러 해에 걸쳐 아주 천천히 자란다. 이동안 어린나무를 둘러싼 숱한 풀은 높이높이 자란다. 다른 풀은 봄부터 가을까지 어린나무 위를 몽땅 덮을 만큼 높다라니 자라기 일쑤이다. 그렇지만, 다른 풀은 가을이 되어 시들고는 모두 말라죽는데, 어린나무는 가을이 되건 겨울을 맞이하건 시들지 않고 죽지 않는다.


  어른 아닌 어린이 손가락 마디보다도 작기 일쑤인 어린나무를 바라본다. 줄기도 작고 잎사귀도 작다. 어른인 내 눈길 아닌 아이들 눈길로 바라보아도 어린나무는 참 작다. 그러나 이 작은 어린나무에는 어른나무와 똑같은 기운이 서린다. 어른나무와 똑같은 숨결이 흐르고 어른나무와 나란히 하늘바라기를 하면서 하늘숨을 쉰다.

 

  어린나무 곁에는 으레 어른나무가 있다. 어른나무가 벼락을 맞거나 사람들이 베거나 했다면, 어린나무는 한결 씩씩하고 야무지게 자라서 스무 해 마흔 해 지나면 새 어른나무 되어 숲을 밝히고 마을을 빛낸다. 그리고, 어른나무 된 이 작은 어린나무는 지난날 저 스스로 겪으며 살아냈듯이 조그마한 씨앗 흙땅에 떨구어 새 어린나무 자라도록 아름드리 그늘과 품을 베푼다. 4346.10.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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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민들레 잎사귀

 


  봄 아닌 가을에 새로 돋은 민들레를 만난다. 잎사귀 널찍하게 퍼뜨린 짙푸른 모습을 바라본다. 가을민들레 만나면서 ‘얼마나 맛날까?’ 하고 생각하며 군침을 흘린다. 며칠 더 지켜보고 나서 즐겁게 톡톡 뜯는다. 가을민들레도 새 잎사귀를 더 낼 수 있을까. 우리 집 대문 앞에도, 마을 고샅에도 가을민들레 잎사귀를 내민다. 가을날 싱그러운 들풀 먹기가 쉽지 않은데, 아주 고맙게 민들레가 선물을 베풀어 준다. 풀밭이나 고샅을 찬찬히 살피면, 민들레뿐 아니라 씀바귀도 새삼스레 잎사귀 내놓으면서 짙푸른 내음을 퍼뜨린다.


  그런데, 마을 고샅길 가을민들레는 꽃대를 미처 올리지 못하고서 시멘트를 뒤집어쓴다. 깊은 두멧시골에까지 주암댐 수돗물 마시게 해 준다는 ‘문화복지 정책’에 따라 커다란 물관 파묻는 공사를 벌인다. 가을민들레도, 가을민들레 곁 가을유채도 가을씀바귀도 가을미나리도 모조리 시멘트를 뒤집어쓴다.


  앞으로 자동차 드나들기 한결 나아지겠지. 그리고, 자동차 드나들기 나아지는 만큼 들민들레도 들유채도 들씀바귀도 들미나리(돌미나리)도 모두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 테지. 4346.10.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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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을 먹는 책읽기

 


  몸이랑 마음이 아픈 옆지기를 만났기에 풀물을 함께 먹는다. 몸이랑 마음이 아픈 옆지기하고 낳은 아이를 돌보면서 풀물을 함께 마신다. 처음에는 도시에서 유기농 푸성귀를 사다가 풀물을 내어 먹고, 이제는 시골에서 시골풀 뜯어서 풀물을 마시기도 했고, 날풀을 먹기도 한다.


  풀을 먹으며 생각한다. 풀을 뜯어서 밥상을 차리면, 배터지게 먹는 일이 없다. 가끔 고기를 사다가 먹는다든지, 또 누가 고기를 사다 준대서 함께 먹는 자리에서는, 배가 불러도 더 수저질을 한다. 나도 다른 사람도, 고기 놓인 밥상에서는 배가 불러도 수저질을 쉬 멈추지 못한다.


  고기를 먹을 적에는 으레 몸이 늘어진다. 몸이 늘어지면서 마음 또한 늘어진다. 풀을 먹을 적에는 몸이 늘어지지 않는다. 풀을 먹는 삶에서는 몸이 가볍다. 몸이 가벼우니 마음 또한 가볍다.


  풀 먹는 시골사람으로 살며 새삼스레 생각한다. 사람 아닌 짐승들은 풀을 먹으며 몸앓이를 하지 않는다. 노루도 토끼도 다람쥐도 딱히 몸이 아플 일이 없다. 사람이 놓은 덫에 발이 걸려 다친다든지, 사람이 뿌린 농약이나 독약을 마시는 바람에 목숨을 잃지 않고서야, 짐승들이 몸이 아플 일이 없다. 숲이나 들에 돌림병이 돈다면, 모두 사람 탓이다. 사람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숲짐승이나 들짐승이 모조리 숨을 거두기도 한다. 사람이 바보스레 밥을 먹지 않고, 사람이 바보스레 숲과 들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사람도 튼튼하고 짐승도 튼튼하다. 사람들 스스로 엉터리로 살면 사람과 짐승 모두 슬픈 굴레에 허덕이고 만다.


  고기를 먹는대서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고기만 먹을 적에는 몸이 아프리라 느낀다. 고기를 지나치게 먹으니 몸이 다치는구나 싶다. 고기를 먹더라도 풀을 함께 먹을 노릇이요, 고기로만 배를 채우지 말고, 풀로 배를 함께 채워야지 싶다. 들에서 나는 풀과 숲에서 자라는 풀을 골고루 누리면서 마음과 몸을 다스리면, 내 보금자리와 마을이 아름답게 살고, 내 보금자리와 마을이 아름답게 살아날 적에, 이 나라도 아름답고 튼튼하게 서리라 느낀다. 4346.10.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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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10-19 11:22   좋아요 0 | URL
제목이 참 좋습니다.*^^*

숲노래 2013-10-20 09:30   좋아요 0 | URL
언제나 좋게 보아 주시니
그 좋은 마음은 늘 아름답게 돌아가리라 생각해요~
 

노랑붓꽃 씨주머니 책읽기

 


  붓꽃이든 창포이든 막상 꽃대가 올라 꽃이 곱게 피어나기 앞서까지, 사람들은 ‘그저 흔한 풀포기’ 가운데 하나로 지나치리라 느낀다. 생각해 보면, 나도 우리 집 노랑붓꽃이 꽃이 피어날 무렵 한참 들여다보지, 풀포기만 풀빛으로 있을 적에는 이 앞에서 오래도록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숨을 늘 쉬면서도 숨쉬기를 느끼지 않듯, 푸르게 빛나는 풀포기가 가득하더라도 부러 더 마음을 기울여 쳐다보지는 않는 셈일까. 우리들이 이 풀포기를 마주하거나 바라보지 않더라도 우리들 누구한테나 푸른 숨결 나누어 주는데, 고마움이란 사랑이란 바로 이처럼 곁에서 늘 푸르게 빛나는 바람과 같을까.


  꽃이 지고 나서는 거의 안 들여다보던 노랑붓꽃이 어느새 씨주머니를 터뜨린다. 꽃이 진 뒤 씨주머니 맺히는 모습까지는 보았는데, 씨주머니가 이렇게 터질 줄 미처 살피지 못했다. 덩굴풀이 덮인 마당 끝자락을 들추니 덩굴잎 사이사이 그동안 터진 노랑붓꽃 씨앗이 그득하다.


  씨앗을 하나하나 줍는다. 시멘트바닥인 마당에서는 이 아이들 뿌리를 내릴 수 없을 테니, 흙이 있는 데에 하나씩 둘씩 뿌린다. 우리 집 대문 앞에도 뿌리고, 마을 고샅과 논둑에도 뿌린다. 자전거를 타고 이웃마을 돌아다니면서 곳곳에 뿌린다. 큰아이는 샛자전거에 앉아 씨뿌리기를 거든다.


  이듬해에 이 씨앗들 뿌리 씩씩하게 내려 야무지게 줄기를 올릴 수 있을까. 마을 어른과 이웃 어른은 이 씨앗이 뿌리내려 새싹이 오를 적에 붓꽃줄기인 줄 알아채실 수 있을까. 웬 풀포기가 이리도 억세게 또 자라느냐며 몽땅 모가지를 치려나.


  올해처럼 다음해에도 우리 집 노랑붓꽃은 씨주머니 흐드러지게 터뜨리리라. 나는 또 아이들과 함께 이 씨앗들 살뜰히 거두어 온 마을에 뿌리고 다녀야지. 나는 “미스 럼피우스” 같은 분은 아니지만, 우리 집과 마을 모두 고운 꽃내음과 맑은 풀내음 가득하기를 빌고 바라며 꿈꾼다. 4346.10.1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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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0-10 17:42   좋아요 0 | URL
미스터 럼피우스~! ㅎㅎㅎ
아~정말 씨주머니 터지는 모습도 신기하고
노랑붓꽃의 씨앗들을 보니, 벌써부터 내년 동백마을에
어여쁜 노랑붓꽃들이 가득 필 생각에 흐믓합니다~~


숲노래 2013-10-10 19:47   좋아요 0 | URL
아직은 몰라요.
여러 해 꾸준히 뿌리고,
가끔 알뿌리도 옮겨심어야지 싶어요~ ^^

아무튼, 동백마을에서 미스 럼피우스 할머니처럼
고운 씨앗 드리우는 사람이 되면
참 아름답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