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생 때도 안 보던 마이클 잭슨

 


  국민학생을 지나고 중·고등학생을 지날 무렵 나는 마이클 잭슨 노래를 듣지 않았고, 마이클 잭슨 노래영상 또한 보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무렵에 아바 노래조차 듣지 않았고, 스콜피온즈라든지 퀸이라든지 숱한 외국 노래꾼들 노래는 하나도 듣지 않았다. 등을 질 생각까지는 아니었으나, 한국말로 된 노래 아니라면 딱히 내 마음으로 스며들지 못한다고 느꼈다. 다섯 학기 다니고 그만둔 대학교에서도 외국말로 된 노래는 하나도 안 들었다.


  그러던 지난달, 전북 남원에 꼭 하나 남았으나 이제 문방구로 바뀌고 만 오래된 헌책방 책시렁 한켠에서 1980년대에 한국말로 나온 마이클 잭슨 책(평전) 하나를 보았다. 마이클 잭슨 님이 고작 스물 갓 넘었을 적에 나온 평전이니, 너무 빨리 나온 책일 수 있지만, 오늘에 와서 돌아보니, 그무렵에 나온 마이클 잭슨 평전은 알맞춤하게 나왔구나 싶다.


  참 새삼스럽구나 하고 느끼며 들추다가, 유투브라고 하는 데에서 찾아보면 예전 모습과 예전 노래 찾아 들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마이클 잭슨 지난날 노래를 하나하나 찾아서 듣고 영상을 본다. 갓 무대에 나올 적 모습부터 한창 사랑받을 때, 그리고 나이 서른 끝무렵이 되고 마흔을 넘으며 쉰 가까운 나이에 했던 공연 모습을 본다. 스물을 조금 넘길 무렵 춤사위와 마흔 훌쩍 넘긴 뒤 춤사위는 퍽 다르다. 어쩔 수 없는 대목이 있으리라. 스물 갓 넘길 적에는 몸이 대단히 가벼우면서 잽쌌다면, 쉰 가까운 나이에는 퍽 무디면서 무겁다. 춤사위는 거의 비슷하고 어떤 틀이 있다. 지난날에는 아예 안 봤으니 몰랐을 테지만, 이제 와서 마이클 잭슨 님 춤사위를 들여다보니, 이녁은 탭댄스라고 해야 할까, 발놀림이 몹시 재며 가볍고 싱그럽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나오는 아이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좋아하는 길을 걸어가면서 살았다고 느낀다.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즐거웠을까. 그런데 왜 삶을 등져야 했을까. 얼굴은 뽀얗게 고칠 수 있어도 몸은 한창 때 몸으로 고칠 수 없기에? 몸이 한창 때와 같지 않다면, 스스로 좋아하며 즐기는 노래와 춤을 새롭게 꽃피우면 될 텐데.


  〈heal the world〉라는 노래와 〈black or white〉라는 노래를 여러 차례 다시 들으며 또 생각한다. 지구별 사람들이 스스로 지구별을 따사롭게 돌볼 때에 아름답듯, 마이클 잭슨 님도 이녁 마음밭을 찬찬히 따사롭게 돌보면서 새로운 노래와 춤을 누리고 나눌 때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을 텐데. 마이클 잭슨 님이 예순을 살고 일흔을 살며 여든을 살았으면, 얼마나 어여쁘며 밝고 맑은 노랫가락 우리한테 들려줄 수 있었을까. 4346.4.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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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4-07 16:53   좋아요 0 | URL
저는 마이클 잭슨,하면 'BEN'이 생각나요. 그 영화에서 마이클 잭슨이 14살에 부른 이 BEN의 노래가 아주 오래전에 좋았어요.
<빌리 엘리어트>도 너무 좋아 여러번 보았고, DVD로 선물을 한 기억이 납니다. ^^

숲노래 2013-04-07 17:2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벤 노래 좋아해요.
알라딘서재에는 노래를 붙이지 못하지만,
제 네이버블로그에 벤 노래도 600원 주고 사서 걸쳤답니다 ^^

<빌리 엘리어트>는 아이들과 함께 열 차례 넘게 아마
스무 차례나 서른 차례 즈음 본 듯하네요 @.@

아이들하고 끝없이 되풀이해서 볼 수 있는 영화가
참 좋고 즐거워요.
 

김혜수, 김미화

 


  나는 김혜수 님이 대학교를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모른다. 아니, 대학교를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생각해 본 적 없다.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김혜수 님한테 대학교 졸업장이 무슨 뜻이나 보람이 있겠는가. 즐겁게 연기하고 아름답게 연기하면 넉넉할 뿐이다.


  연기를 하다가 시사방송을 이끄는 김미화 님이 대학교를 다녔는지 안 다녔는지 나로서는 모른다. 아니, 김미화 님이 대학교를 다녔든 안 다녔든 아랑곳할 까닭이 없다. 웃음보따리는 대학교를 다녀야 열지 않는다. 사회와 삶과 지구별 읽는 눈썰미는 대학교를 다녀야 키우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고 내 몸을 스스로 아낄 줄 안다면, 사회와 삶과 지구별을 깊고 넓게 읽거나 헤아릴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김혜수 님과 김미화 님이 ‘논문 표절 말밥’에 오른다. 참 뜻밖이로구나 싶으면서, 뭣 하러 두 사람한테 이런 트집을 잡으려 할까 궁금하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영화를 찍든 연속극을 찍든, 또 코미디를 찍건 시사방송을 찍건, 그이 마음그릇과 생각밭이 어떠한가를 살필 노릇이다. 그이 졸업장을 뒤적이거나 논문을 훑을 까닭이 없다. 시인 한 사람이 시를 쓸 때에는 시를 읽을 노릇이다. 시인이 어느 대학교 무슨 학과를 나오거나 어떤 사람한테서 시를 배웠다든지 어느 문학잡지에 시를 실었는가 따위를 알아야 할 까닭이 없다. 소설가 한 사람이 소설을 쓸 때에는 소설을 읽을 노릇이다. 소설가가 무슨 밥을 먹고 어떤 옷을 입으며 자가용을 모는지 마는지 따위를 살필 까닭이 없다.


  쌀밥 먹는 사람들이 ‘나락 키운 흙일꾼’이 할매인지 할배인지 따지지 않는다. ‘나락 키운 흙일꾼’이 젊은내기이건 늙은이이건 가릴 까닭이 없다. 아이들이 낫질을 해서 나락베기를 거들었거나 안 거들었거나 굳이 살펴야 하지 않는다. 살피거나 따져야 한다면, 농약이나 비료를 쳤느냐 안 쳤느냐 쳤다면 얼마나 쳤느냐를 따져야겠지. 곧, 연기하는 사람한테는 연기를 따질 노릇이다. 글을 쓰는 사람한테는 글그릇을 살필 노릇이다.


  봄햇살 묻어나는 바람이 분다. 봄꽃내음 물씬 밴 바람이 분다. 꽃가루 날리는구나 하고 느낀다. 어떤 풀과 나무가 이렇게 어여쁜 꽃가루 날리며 봄기운 듬뿍 나누려 할까. 매화나무 곁 십 미터 거리에 서도 매화꽃내음 가득하다. 모과나무는 이제 새잎 트려 하는데에도 모과나무 곁에 서면 모과내음 솔솔 난다. 좋은 봄날, 사람들 가슴속에 좋은 이야기 깃들면서 좋은 생각 피어날 수 있기를 빈다. 4346.3.2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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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사람들

 


  나를 취재하고 싶다는 전화를 가끔 받는다. 충청북도 멧골에서 살 적에도 “취재하시는 일은 좋은데, 여기까지 오셔야 하는데요.” 하고 말하면 으레 전화를 뚝 끊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더라. 전라남도 시골에서 사는 요즈음도 “취재하시려는 뜻은 고마운데, 예까지 오셔야 해요.” 하고 말하면 슬그머니 전화를 뚝 끊고는 입을 스윽 씻네.


  시골서 살아가는 하루는 조용하니 좋다. 서울서 충청북도조차 멀다고 여기는 서울사람들이, 서울서 전라남도까지 오겠나. 충청북도나 전라남도 아닌 부산이나 광주라면, 또는 대전이나 마산이라면, 또는 안동이나 구례쯤만 되어도 좀 달랐으리라 싶은데, 어찌 되든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하다.


  서울사람들은 숲이 얼마나 좋은가를 모른다. 숲에서 안 태어나고 숲에서 안 자랐으며 숲에서 일 안 하기에 숲이 얼마나 좋은가를 모를까. 아마 그러하리라. 언제나 아파트 둘레에서 살고, 언제나 자동차한테 둘러싸여서 살며, 언제나 숱한 신문과 방송과 잡지와 책과 영화와 언론과 연예인과 스포츠와 주식과 뭣뭣에 휩쓸린 채 살아가는 서울사람으로서는, 숲을 숲 그대로 느끼기란 아주 어려우리라 본다.


  나를 취재하고 싶다는 분한테 늘 똑같이 말한다. “휴가라고 생각하며 놀러오셔요. 여러 날 출장 간다고 생각하며 나들이하셔요. 시골집은 작지만 방 하나 비니 여러 날 묵으셔도 돼요. 밥은 제가 차리니 밥값도 안 들어요. 숲이 예쁘고 들이 아름다우며 바다가 멋져요. 밤에는 미리내를 보고, 낮에는 나뭇잎 살랑이는 파랗고 맑은 바람 쐬며 냇물을 마셔요.” 그런데 아직 이런 말에 마음이 이끌리는 서울사람, 그러니까 서울에서 일하는 글쟁이(기자·작가·편집자)는 없는 듯하다. 하기는, 시골사람 스스로 시골을 떠나 서울로 가겠다는 마당인데, 서울사람이 제발로 시골로 찾아오기란 몹시 힘들 만하리라. (4345.1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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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팬클럽·공지영 팬카페

 


  누군가를 마음 깊이 섬기거나 모시는 일은 훌륭하리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마음 깊이 섬기면서 스스로를 올바로 가다듬을 수 있고, 누군가를 마음 넓게 모시면서 스스로를 어여삐 다스릴 수 있어요. 그런데, 팬클럽이나 팬카페처럼 받아들이면 그만 스스로 수렁에 빠집니다.


  팬클럽을 이루거나 팬카페를 여는 일이 잘못일 수 없습니다. 다만, 팬클럽이나 팬카페가 되면서 스스로 잘잘못을 바라보지 못하고 말아요. 제 눈에 들보라는 말처럼, 눈꺼풀이 쓰이고 말아요.


  2012년 대통령 뽑는 자리에 나온 박근혜 님을 깊이 섬기면서, 박근혜 씨가 하는 일이나 읊는 말이라면 모두 받들거나 몽땅 우러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의자놀이》라는 책을 내놓고 ‘진보 의제’까지 건드리면서 더 널리 이름값 높이는 공지영 씨가 쓰는 글이나 내놓는 책이라면 모두 읽거나 몽땅 외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른바 ‘박근혜 팬클럽’과 ‘공지영 팬카페’입니다.


  누군가 박근혜 씨를 좋아하거나 섬기는 일이 잘못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면 좋아할 뿐입니다. 누군가 공지영 씨를 아끼거나 즐겨읽는 일이 허물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즐기면 즐길 뿐입니다.


  박근혜 씨를 일부러 깎아내릴 까닭이 없고, 공지영 씨를 애써 나무랄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 그대로 바라보면서 숨결 그대로 맞아들이면 됩니다. 말과 넋과 삶이 어떠한가를 가만히 헤아리면서 내 삶을 옳고 바르며 즐겁고 아름다이 추스를 수 있으면 됩니다.


  박근혜 씨는 ‘독재자 딸’이 아니라 박근혜 한 사람입니다. 공지영 씨는 ‘유명 작가’가 아니라 작가 한 사람 공지영입니다. 정치밭에서 정치를 하겠다는 박근혜 씨라면, 정치밭에서 하는 일과 읊는 말을 살피면서 이이 매무새를 가늠할 노릇입니다. 글밭에서 글을 쓰겠다는 공지영 씨라면, 글밭에서 하는 일과 읊는 말을 살피면서 이이 몸가짐을 헤아릴 노릇입니다.


  팬클럽을 만들든 팬카페를 열든 ‘취향’이고 ‘자유’라 할 테지요. 그런데, 팬클럽과 팬카페 목소리에 묻혀 정작 ‘작고 낮은 여러’ 목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팬클럽 목소리와 팬카페 글이 넘치면서 온누리 ‘작고 낮은 여러’ 사람들 얼굴과 몸뚱이가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따지고 보면, ‘리영희 팬클럽’이든 ‘이오덕 팬카페’이든 몹시 부질없습니다. 리영희를 읽는 이라면 리영희 님 넋과 얼을 내 넋과 얼이 거듭나는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뿐입니다. 이오덕을 읽는 이라면 이오덕 님 슬기와 깜냥을 내 슬기와 깜냥이 새로워지는 밑틀로 삼아야 할 뿐이에요.


  밭에서 풀을 뽑을 때에나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숙입니다. 사람이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숙일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를 재우거나 젖물리는 어버이가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굽힙니다. 사람이 사람 앞에서 줄을 세우거나 금을 그을 까닭이 없습니다. 삶을 살피지 못하고 ‘박근혜 팬클럽 줄서기’를 한다든지(또는 ‘공지영 팬카페 금긋기’를 하는 이들은 스스로 이녁 가슴속에 깃든 빛줄기를 짓밟는 꼴입니다. 스스로 서야지, 남을 세울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빛나야지, 남을 빛낼 일이 아닙니다. 즐기지 않고 무리를 만드는 사람은 권력으로 치달아 독재자를 만듭니다. (4345.11.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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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아인슈타인

 


  무기를 손에 쥐면 누구나 전쟁일 뿐입니다. 무기를 손에 쥐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기를 쥐는 사람은 누구나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을 벌여 평화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전쟁을 해야’ 합니다.


  호미를 손에 쥐면 누구나 흙일입니다. 호미를 쥐어 전쟁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호미를 쥐면 밭으로 가서 흙을 만집니다. 흙을 만지며 먹을거리를 얻습니다. 흙을 만져 먹을거리를 얻는 이는 식구들 몫만 거두지 않습니다. 이웃하고 넉넉히 나눌 만큼 거둡니다. 서로 배부를 수 있고, 서로 배부르고 보면 다투거나 싸우거나 겨루거나 따지거나 괴롭히거나 등돌리거나 할 까닭도 일도 구실도 없습니다.


  연필을 쥐면 누구나 문학이 됩니다. 돈을 쥐면 누구나 재벌이 됩니다. 부엌칼을 쥐면 누구나 살림꾼, 또는 요리사가 됩니다. 아이들 손을 쥐면 누구나 사랑스러운 어버이가 됩니다.


  어느 길을 가려 하나요. 어떤 길을 가려 하나요. 혁명이란 어떤 길이라고 생각하나요. 혁명을 어떻게 이루려 하나요. 사람들이 도시에 우글우글 모인대서 정치혁명도 문화혁명도 경제혁명도 일으키지 못해요.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고 도시를 버리며 도시를 잊어야 비로소 정치혁명도 문화혁명도 경제혁명도 일으킬 수 있어요. 왜냐하면, 혁명이란 ‘깡그리 부수어 없애는’ 일이 아니라 ‘아름답고 새롭게 짓는’ 일이거든요. 혁명이란 ‘너한테서 빼앗아 다 함께 나누는’ 일이 아니라 ‘나 스스로 새롭게 일구어 서로서로 나누는’ 일이거든요.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님도 ‘혁명’이 무엇인지 똑똑히 깨우친 한 사람입니다.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한겨레,1990)라는 책 31쪽을 읽습니다. “이런 악에 대항해서 소수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아는 한 가능한 길은 하나밖에 없다. 혁명적인 방법으로써 복종하지 않고 협력하기를 거부하는 길, 즉 간디가 걸어간 길뿐이다.” (4345.1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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