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 빨래와 책읽기


 나흘 앞서부터 오른어깨가 전기라도 먹은듯 결리더니, 그제부터는 오른손목까지 결립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결릴까 궁금하지만, 지난날 자전거 타고 한창 다닐 때 뺑소니 차에 치여 오른어깨며 오른손목이며 오른팔꿈치며 망가지다시피 다친 적이 있어서, 이렇게 때 되면 아프게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리하여, 날마다 수북히 쌓이는 아기 천기저귀 빨래를 하느라 애를 먹습니다. 옆지기가 아이를 낳은 지 일흔 날쯤 되는 만큼 몸은 어느덧 나아져서 혼자서 하루치 기저귀 빨래를 해내기도 하지만, 아무리 하루치 기저귀 빨래를 혼자서 해낸다고 하여도 옹글게 나아진 몸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루 힘을 빼면 이튿날은 곁에서 보기에 안쓰럽도록 몸이 축났구나 하는 느낌이 들고, 아기를 어르고 달랠 때에도 고단해 보입니다. 멍해지지요. 서로서로 힘들고 지치는데, 큰식구가 아닌 작은식구로 아이를 돌보자니 힘들고 지칠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집식구는 큰식구가 아닌 작은식구들뿐입니다. 작은식구가 되어 아이를 낳으니, 집식구 가운데 하나는 바깥에 돈 벌러 나가야 하고, 한 사람이 남아서 오로지 혼자 애를 보아야 하는데, 지치디지쳐서 어디 시설에라도 맡기고 싶어지고, 돈을 주고라도 사람을 써서 돌보게 하고 싶겠구나 싶습니다. 아이 키우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기 어려운 작은식구가 아니랴 싶습니다.




 나흘 앞서는 어깨 결림을 느끼면서 왼손 빨래로 조금 하다가 거의 오른손 빨래로 했는데, 오른손목이 결리는 그제부터는 거의 왼손 빨래를 하다가 살짝 오른손 빨래를 합니다. 처음 왼손 빨래를 해 본 때는, 신문배달을 하다가 오른손가락이 다쳐서인데, 99년이었던가, 신문배달을 마치고 지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뒤에서 자전거를 들이받은 뺑소니 사고로 오른손목이 맛이 갔습니다. 그때는 죽지 않고 오른손목만 망가져서 한숨을 돌렸다고 할 텐데, 이제 와서 그때 그 아픔을 떠올려보았자 다친 오른손목이 나아질 일이란 없고, 다만, 그때 그렇게 다치면서 한 달 남짓 오른손 빨래를 할 수 없었습니다. 밥숟가락 들기도 어려웠는걸요. 그래, 처음 오른손가락이 다칠 때 조금씩 왼손 수저질을 익히고 왼글씨 쓰기를 해 보다가 그때 한 달 남짓 끙끙대며 왼손 빨래를 하고 왼손 젓가락질을 부지런히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른손목이 많이 나아진 뒤로는 오른손으로만 하는 일을 크게 줄이고, 왼손으로 일손을 나누었어요. 셈틀을 쓸 때 다람쥐를 왼쪽에 놓고 씁니다. 오른쪽에 몰려 있는 숫자 글쇠를 안 쓰고 자판 위쪽에 한 줄로 있는 숫자 글쇠를 씁니다. 이 모두 오른손 짐을 덜고 왼오른손이 고르게 쓰이도록 하는 일입니다.

 엊저녁 열 시쯤 잠이 들었습니다. 세 식구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힘들기도 했고, 옆지기가 많이 멍하다고 해서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저도 일감이 잔뜩 밀려 있고 빨래감도 우리를 기다리지만 다 미루고 잠들었습니다. 그렇게 일찍 자니 아기도 잘 자 주어 고맙기도 했지만, 저는 새벽 한 시부터 잠에서 깨었습니다. 새벽에 깨어 아기 기저귀를 갈고 나서 ‘오늘은 이제부터 일어나서 일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가, ‘아니야, 그래도 한 시간은 더 자야지’ 하고 도로 누워서 두 시에 다시 깼다가 네 시에 벌떡 일어납니다.

 네 시 반쯤, 옆지기도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더 자도 될 텐데, 일찍 잔 까닭에 일찍 일어나서 말똥말똥해지는구나 싶습니다. 아기를 키우는 집에서는 온 식구가 일찍 자고 아빠 엄마가 새벽녘에 일어나 밀린 일손을 조용히 하면 훨씬 수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기가 깨어 같이 놀아 달라는 낮에는 집안일이고 뭐고 붙잡기 어렵거든요. 차라리 온 식구가 일찍 자자고 하면 아기도 잡니다. 그러나 일이 많아서 늦어진다고 늦게까지 안 자면 아기도 안 자요. 그런데 용하게도 아기는 새벽에는 안 일어나 줍니다. 아침까지 내처 잡니다. 이리 고마울 데가 없는데, 어쩌면, 아기가 우리 두 사람을 헤아려 주는지 모릅니다.

 밀린 일을 어느 만큼 마무리하고 나서, 씻는방으로 가서 빨래를 합니다. 기저귀 일곱 장과 배냇저고리 한 장과 수건 한 장. 아기 똥오줌이 묻은 옆지기 옷과 속싸개가 있는데, 남은 빨래는 아침에 해 뜨면 하려고 남겨 둡니다. 오늘은 모든 빨래를 왼손 빨래로만 합니다. 햇수를 따지면 벌써 열 해가 되는 왼손 빨래인데, 아직 오른손 빨래만큼 비빔질이 잘되지는 않습니다. 오른손이 다치거나 아플 때마다 하기는 했던 왼손 빨래고, 오른손 빨래를 하는 틈틈이 왼손 빨래를 하기는 했지만, 제가 오른손잡이라 잘 안 되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아픈 오른팔을 더 쓰기 어려우니 왼손으로만 북북 빠는데, 조금씩 비빔질 힘이 잘 들어간다는 느낌입니다. 문득, 지난달께 우리 도서관에 취재를 왔던 어느 촬영기사가 묻던 말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이렇게 빨래를 잘하세요?”

 혼자서 살림 다하고 살면 저절로 하게 되는 빨래인데. 세탁기를 비롯한 기계문명을 아예 안 쓰거나 되도록 덜 쓰려고 하면 마땅히 하게 되는 손빨래인데. 내가 남자라 그렇지, 내가 여자였다면 그렇게 물어 보지 않았을 텐데. 여자가 아닌 남자라 해도 집살림을 알뜰살뜰 할 수 있도록 매무새를 가다듬을 수 있어야 할 텐데.

 비빔질을 하면서 문득, 세상사람이 ‘한 사람 삶’을 바라보는 눈이 너무 외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또다른 생각이 이어집니다. 고등학교 때인데, 반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동무들한테 묻던 말. “야, 넌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하냐?” 전교에서 1등을 홀로 차지하는 동무녀석은 이 물음을 꽤 자주 들었는데, 그 아이 지능지수는 저보다 한참 낮았고 반에서 그럭저럭 공부하는 동무들하고 엇비슷했지만, 시험성적은 꼭 높았습니다. 동무녀석은 늘 수줍게 웃으면서, “야, 내가 머리 안 좋은 건 너희들도 알잖아. 그냥 부지런히 하면 돼.” 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 동무녀석을 가만히 보면, 참 부지런히 공부에 파고들었고, 한번 파고들면 옆에서 떠들어도 떠드는 소리를 못 듣고 교과서나 참고서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타고나기를 마음모으기 잘하는 매무새였는지 모르나, 그런 타고남이 어느 만큼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보다는 그 동무녀석 스스로 자기한테 무엇이 모자라는 줄 또렷이 깨달으면서 자기가 바라는 길로 나아가고자 날마다 무던히 힘쓴 보람이 그런 시험성적으로 빛을 보지 않았으랴 싶어요.





 오늘 새벽, 왼손 빨래를 하면서 동무녀석을 떠올리고, 또 사람들이 저한테 뻔질나게 물어 보는, “어떻게 헌책방에서 그런 드문 책을 잘 찾아내셔요?” 하는 말, “어떻게 좋은 책을 찾아내어 읽어요?” 하는 말을 곱씹습니다. 옛적 동무녀석이 다른 동무들한테 하던 말처럼, “부지런히 헌책방을 다니면 책이 저절로 보여요.”, “좋다 나쁘다 가리지 말고 이 책 저 책 골고루 부지런히 오래오래 읽다 보면 저절로 느껴요.” 하는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익숙한 왼손 빨래가 아니라, 한 해 두 해 한다고 잘할 수 있는 왼손 빨래가 아니라, 다섯 해 열 해 스무 해씩 해야 비로소 익숙해지는 왼손 빨래이며(왼손잡이한테는 오론손 빨래), 막다른 골목까지 밀리고 또 밀리면서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면서 치러내어 몸에 배도록 하는 왼손 빨래입니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스승들한테 배우기도 하지만, 있는 돈 없는 돈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모두 바치고 바쳐 열 해고 스무 해고 들이면서 스스로 눈을 뜨게 되는 책읽기입니다. 가난뱅이라서 못 찍는 사진이 아니라, 가난뱅이임에도 죽어라 알바 뛰고 뭐 뛰고 해서 필름값 벌고 사진기값 모아 애써 한 장 두 장 찍는 가운데 몸뚱이로 배우는 사진찍기입니다.

 추천도서목록에 적힌 책을 줄줄줄 찾아서 읽는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훌륭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멋진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좋다는 책 몇 권 읽었다 하여도 괜찮은 사람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름난 사람이 알려주는 책이라든지, 훌륭한 분이 건네주는 책이라든지, 아름다운 이가 선물해 주는 책 몇 가지를 읽는다고 하여 우리 삶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면서 우리 넋과 얼이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피를 흘리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피를 바치고 살을 들여야 합니다. 내 팔을 잘라서 바치듯, 내 다리를 베어서 드리듯, 온몸과 온마음을 쏟지 않고서야 ‘책 읽는 매무새’를, ‘책 알아내는 눈길’을, ‘책 보듬는 마음결’을, ‘책 꿰뚫는 가슴’을, ‘책 쥐어드는 손길’을, ‘책 짊어지는 등판’을 갈고닦을 수 없습니다. (4341.10.2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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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지기 식구들이 살고 있는 일산으로 가고자, 동인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갑니다. 용산역에 내려서 뒷간에 한 번 들릅니다. 종로3가역에 내려서 뒷간 다시 한 번 들릅니다. 용산역에서 내려 ‘표 끊고 나가야 하는 바깥’이 아닌, 안쪽에 하나 있는 뒷간으로 가자면, 인천에서 서울 가는 쪽으로 나 있는 계단 두 곳 가운데 뒤쪽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종로3가역에서 뒷간을 찾아가자면 1호선 타는곳 맨끝으로 가거나 5호선 타는곳 맨끝으로 가야 합니다. 사이에는 뒷간이 없기에, 길을 잘못 들면 한참 걸어가야 합니다. 낮이라서 전철은 뜸하게 옵니다. 뜸하게 오는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내내 서 있습니다. 어느 전철역이든 앉을 자리는 거의 없습니다.

 서울역부터는 땅밑으로 달립니다. 땅밑 전철, 지하철입니다. 땅위에서 달릴 때에는 철길 긁는 소리가 그리 크게 안 들렸으나, 땅밑으로 들어오면 대단히 크게 들립니다. 안내방송 소리도 크게 들립니다. 이에 따라 지하철을 타고 오가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목소리는 한결 높아집니다. 손전화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목소리를 높입니다. 형광등은 파르르 떨리기도 하여 책을 읽던 눈이 아파서 한동안 책을 덮고 눈을 감습니다.

 전철칸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물결은 늘 있습니다. 그렇게 움직인들 얼마나 더 빨리 갈 수 있으랴 싶지만, 이렇게 요리조리 움직이는 분들은 다문 몇 초라고 아끼고 싶으실 테지요. 이리하여 사람으로 꽉 차 빈틈이 없어도 밀치고 쑤시며 지나가려고 할 테지요. 으레 밀치고 쑤시고 지나다녀야 했기에, 널널할 때에도 애꿎은 사람을 밟거나 치거나 밀어도 미안하다는 느낌 한 번 없을 뿐더러, 미안하다는 말 한 번 없을 테지요.

 간첩을 신고하고 반체제를 꾀하는 사람을 신고하라는 안내방송은 2008년 여름을 접어들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요즈음에도 간첩이라는 사람이 있으려나. 얼마 앞서 시청 앞에서 ‘대북침투공작원 집회’가 있었는데, 그 간첩이라고 하는 사람은 북녘에서 남녘으로 내려보내기도 했지만, 남녘에서도 북녘으로 올려보냈는데, 남이고 북이고 왜 이리 뒤에서 꿍꿍이셈만 헤아렸을까. 왜 서로서로 평화와 자유와 민주와 평등으로 감싸면서 돌보려는 마음을 키우지 못했을까. 반체제라 한다면, 그제(6월 16일) 나온 여론조사에서 12% 지지율까지 떨어진 대통령 이씨를 꾸짖거나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반체제가 되려나. 촛불모임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반체제이려나. 아니면, 대통령 이씨를 꾸짖지 않는 사람들이 반체제가 되려나. 촛불모임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반체제가 되려나.

 3호선 구파발역을 지날 무렵부터 보이는 바깥세상. 지하철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바깥세상은 온통 아파트 새로 짓는 공사터 세상. 북한산을 휘감아 주는 아파트 세상. 모두들 아파트가 좋다고 하니 아파트만 이렇게 지어댈 터이지. 모두들 자가용을 좋아하니, 아무리 기름값이 치솟아도 자가용 씀씀이는 줄어들지 않을 터이지. 모두들 ‘사랑’보다는 ‘돈’을 더 좋아하니까, ‘믿음’보다는 ‘대학교 학벌’을 더 좋아하니까, ‘나눔’보다는 ‘개인 명예와 권위’를 더 좋아하니까, 우리 세상은 이렇게 저렇게 흘러갈 터이지.

 다문 몇 초라도 아껴서 더 빨리 어딘가로 가려고 하는 우리 나라이니까, 더 많은 돈을 남(내 이웃)보다 더 많이 벌어서 어깨를 우쭐거리고 싶어하는 우리 나라이니까, 책 한 권 느긋하게 읽을 마음을 일구기는 어려울 수 있구나. 책 한 권을 손에 들어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휴머니스트,2008)나 《항일유적답사기》(눈빛,2006) 같은 책은 고르기 어려울 수 있구나. 《두 친구 이야기》(양철북,2005)나 《눈물나무》(양철북,2008) 같은 책은 ‘아이들이나 읽는 책’으로만 여기고 말겠구나.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아름다운사람들,2004)이나 《나의 수채화 인생》(미다스북스,2005) 같은 책을 손에 들고 눈물을 똑 똑 똑 똑 …… 흘릴 일은 없겠구나. 《슬픈 미나마타》(달팽이,2007)라든지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삼인,2006) 같은 책을 가슴에 안고 우리가 여태껏 찬찬히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 틀거리를 가슴시리게 붙잡을 수는 없겠구나. 그렇지만, 조그마한 꿈 하나를 품어 보아야지. 가녀린 꿈 하나를 살며시 손바닥에 올려놓아야지. (4341.6.1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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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해 동안 사랑받을 만한 책을 엮겠다고 생각하는 책마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천 해 동안 사랑받을 만한 책을 묶겠다고 생각하는 책마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니 천 해나 백 해는 꿈꾸지 말고, 쉰 해쯤이라도, 아니 서른 해쯤이라도, 아니 스무 해, 아니 열 해쯤이라도 사랑받을 만한 책을 펴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어쩌면 한 해가 채 지나지도 않았으나 고침판을 내야 할 만큼 책을 엮지는 않는지. 어쩌면 새로 펴낸 그때에만 반짝 팔아치운 뒤 또다른 책을 새로 펴내며 그때그때 반짝반짝 팔아치울 마음은 아닐는지. 출판사 도서목록에는 수많은 책이 얼굴을 내밀고 있지만, 이리하여 출판사 햇수가 길어지면서 도서목록은 두꺼워지고, 알음알이하는 작가가 늘어나지만, 자기 출판사 일꾼조차도 자기 출판사에서 낸 책을 찬찬히 읽고 아끼면서 둘레사람한테 두루 소개하고 나누는 일은 못하고 있지 않을는지. (4341.6.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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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 얼마가 흘렀든지 다시 돌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기에 헌책방 헌책입니다. 겉이 낡고 더러워졌어도, 판권에 적힌 책값보다 훨씬 많은 돈을 치러야 해도 살 만한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헌책방 헌책입니다. 때때로 500원이나 1000원밖에 안 하는 헐값에 살 수도 있는 책이 뜻하지 않게 놀라움과 반가움을 선사하기도 하는 헌책방 헌책입니다. 사람은 늘 새로 나고 죽지만, 책에 담긴 이야기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유행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로 유행이 되는 밑거름을 건네주는 헌책방 헌책이라고도 하겠네요.


 그러나 모든 헌책방 헌책이 볼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책은 버려지지요. 뭐, 백 해나 이백 해가 지나면 모든 헌책은 옛책 구실이나 값어치를 하긴 하지만, 더구나 돈이 많고 헛간도 널찍해서 간수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 조그마한 자리에서 살림을 꾸리는 헌책방으로서는, 책방 임자부터 ‘다시 볼 만한(팔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곤 합니다. 그래, 다시 팔 만한 값어치가 없는 헌책은 거리낌없이 버려요. 버려지지요. 버려야 해요.


 우리 나라 방송풀그림은 어떨까요. 며칠 지난 풀그림은, 한두 달 지난 풀그림은, 한두 해 지난 풀그림은, 대여섯 해 지난 풀그림은, 열 해쯤 지난 풀그림은,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지난 풀그림은, 백 해쯤 지난 풀그림은 어떠하지요? 볼 만할까요? 볼 만한 재미나 보람이 있을까요? 다만, 방송풀그림도 아주 오래되거나 묵었다면, 자료로 값어치 구실을 합니다. 어떤 풀그림도 그렇습니다. 어떤 책이라도 무척 오래되었으면 지난날 자료가 되니까요.


 제가 방송풀그림을 그다지 안 좋아하기도 하지만, 텔레비전을 즐겨보는 분들 가운데 몇 달 지난 ‘재방송’을 재미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몇 해 묵은 ‘재방송’은 더더구나. 열 해쯤 지난 연속극이나 익살이야기는 어떻지요? 1991년 프로야구 어느 경기 하나를 세 시간 동안 앉아서 볼 수 있을까요? 1994년 어느 연속극을 한 시간 동안 앉아서 볼 수 있을까요? 인기를 많이 얻었다는 한국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볼 때면, ‘지금 와서 다시 보니 참 재미없네.’ 하는 느낌이 퍽 짙게 듭니다. 〈친구〉라는 영화를,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다섯 해나 열 해쯤 뒤에도 텔레비전에서 틀어 줄까요? 틀어 줄 때 볼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 우리 나라 방송풀그림 눈높이는 ‘재방송으로 보여줄 값어치나 재미나 보람’이 없는 테두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재방송으로 보여줘도 한 해도 못 넘길 만한’ 테두리에 머물고 있다고 느낍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즐겨 찾아서 보는 책들 가운데에도 ‘한 해 지난 뒤’에도 읽고픈 생각이 안 드는 책이 참 많습니다. 지금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서 아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지만, 그 책들이 얼마나 그 좋은 자리에 버틸 수 있을까요?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책들이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머무를까요? 열 해 앞선 때 베스트셀러를 오늘날 읽을 만할까요? 스무 해 앞선 때 베스트셀러나 서른 해 앞선 때 베스트셀러는 어떻지요? 요즘 베스트셀러를 열 해 뒤에도, 아니 다섯 해 뒤에도 읽을 만하다고 느낄까요? 그래서 신문에서 ‘아무개 책방 이주 베스트셀러 목록’을 붙이는 일은 참 쓸데없는 일인 한편, 폭력이라고 느껴요. 정작 우리한테 쓸모가 있고 재미도 있으며 즐거움과 보람이 있는 책목록은 베스트셀러가 아니니까요.

 
 책이든 방송이든 영화든 연극이든 다른 공연이든 문화든 예술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어느 무엇이든, 지금 곧바로뿐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즐길 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밥을 좋아합니다. 밥 한 그릇은 지금 곧바로도 제 배를 넉넉히 채워 주고 기운을 북돋워 줍니다. 새힘을 선사해요. 이 밥은 몇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여태껏 얼마나 많은 밥그릇을 비웠을는지. 몇 만 그릇도 넘겠지요. 앞으로도 10만 그릇, 또는 20만 그릇, 또는 30만 그릇을 비울지 모릅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그릇이요, 지금 이때에도 낮밥이나 저녁밥으로 제게 기쁨을 선사할 밥그릇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도, 영화도, 방송풀그림도, 사진도,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곧바로 즐거울 수 있는 한편, 앞으로도 꾸준히 즐길 수 있는 책을, 영화를, 방송풀그림을, 사진을, 그림을 좋아합니다. 지금 곧바로만 재미있는 책은 싫습니다. 앞으로 좋아질 책도 썩 달갑지 않습니다. 한결같은 책, 꾸준한 방송풀그림, 곧게 이어가는 사진이 좋습니다. (4339.10.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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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들을 읽힐 수 있을까?

이런 책들은... 아직 너무 힘들라나... -_-;;




 중학교 아이들은 읽을 책이 없다


 중학교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은 거의 없습니다. 동화책이나 동시집은 초등학교 아이들이나 보는 책 같아서 가까이하지 않을 테지요. 소설이나 시는 아직 어려울 테니 읽기 힘들고요. 문학이 아닌 책은 중학교 다닐 만한 나이인 아이들 눈높이에 너무 높거나 낮아서 알맞지 않기 일쑤입니다. 예술이나 문화나 사회나 과학이나 종교도 마찬가지예요. 말 그대로 사이에 낀, 가운데에 찡겨 버린 어중간한 나이처럼 되고 마는 아이들, 열넷부터 열여섯입니다.

 생각해 보면, 중학교를 다닌다는 아이들한테는 소년소설도 즐기도록 하고 동시도 즐기도록 해 주어야 알맞습니다. 어린이문학이란 어린이만 즐기는 문학이 아니라 ‘어린이부터 모든 어른이 즐길 수 있는 문학’이건만, 이렇게 생각하거나 느끼는 분이 참 드뭅니다. 어쨌든, 동시도 그저 어린아이들만 읽는 문학이 아니라 낮은학년이 즐기는 동시와 높은학년과 열대여섯 아이들까지 두루 즐길 수 있는 문학이 따로 나뉘어 있어야 합니다. 문화나 예술이나 종교나 과학이나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아이들 책과 마찬가지로 ‘학교로 치면’ 중학교, 나이로 치면 열넷부터 열여섯 사이에 있을 아이들도 문학작품으로 문화와 예술과 종교와 과학과 철학을 맛볼 수 있도록 마음을 쓰고 책을 펴내야 좋습니다. 문학만이 아니라, 어느 만큼 전문성을 담아내는 책도 차근차근 맛볼 수 있도록 해 주면 더욱 좋고요.

 초등학교 다닐 때 배운 과목을 좀더 어렵게 배우는 단계가 중학교가 아니라면, 고등학교 때 배울 지식을 조금 쉽게 풀어서 배우는 단계가 중학교가 아니라면, 이때 아이들이 즐기고 반가이 맞이할 책을 출판사나 책방이나 도서관이나 학교에서 기꺼이 알뜰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초등학생도 사람이고 중학생도 사람이며 고등학생도 사람입니다. 어린이도서관이 있어야 하는 한편, 청소년도서관이 있어야 하고, 학문을 깊이 파고들 사람이 즐겨찾을 전문도서관이 있어야 하는 가운데, 늘 바쁘고 고된 일에 매여 있는 월급쟁이들이 마음 쉬며 찾아갈 쉼터 같은 도서관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도서관을 마련하자면, 무엇보다도 중학생이 즐길 책, 고등학생이 즐길 책, 여느 월급쟁이가 즐길 책을 차근차근 엮어낼 만한 문화와 터전을 닦아 놓아야 합니다.

 어린이도서관을 찾는 아이들 가운데에는, 제 또래보다 적잖이 앞서가는 책읽기를 하는 아이들, 그래서 열대여섯 살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책을 즐기는 열두어 살짜리 아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 가운데에는, 또래들보다 조금 눈높이가 낮은 열서너 살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책을 즐길 수 있겠지요. 그래, 나이나 학년으로 치면 세 해이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아래로 두 해, 위로 두 해 해서 모두 일곱 해를 아우를 수 있는 눈길과 눈높이를 살피는 책을 도서관에서 갖추어야지 싶어요.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야기야 저뿐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며, 중학교 다니는 딸아들 둔 어버이라면 으레 느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분들도 몸소 느끼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두들 ‘머리’로는 알고 ‘입’으로는 말씀을 하시지만 실천을 못하는구나 싶어요. 몸으로는 못 옮기지 싶어요. 출판사에서 땀흘리고 힘들여서 중학교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책을 펴낸다고 해도, 잘 안 팔릴 뿐더러, 초등학교 높은학년이나 고등학교 1∼2학년 아이들이 눈여겨보아 주지 않으니 버겁다고도 합니다. 더구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모든 ‘교양 책’을 버리고 참고서와 문제집만 달달달 외우도록 끄달리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 대학교 입시가 걸립니다. 중학교뿐 아니라 고등학교 아이들은 입시에 억눌려서 책을 못 읽습니다. 책 읽을 틈이 없습니다. 교과서와 시험에 짓눌려서 마음이 답답하지요. 게다가 머리도 아파요. 아무리 좋은 책을 쥐어 준다 해도 그 책을 읽고 싶을까요? 아니, 읽을 겨를이 있을까요. 읽을 겨를을 내어주는 학교 교사가 있나요? 읽도록 마음써 주는 학부모가 있나요? 더구나 그런 책을 읽는다 해도 시험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학생 스스로 그 책을 아주 좋아해하지 않는다면 한두 권 읽다가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 스스로도 그렇지만, 학생들이 책을 즐길 수 있도록 교사들이 이끌지도 않거나 못하곤 합니다. 교사들로서도 학생들이 시험점수 많이 내는 쪽을 더 좋아하잖아요. 학생들이 자기한테 좋은 책을 스스로 찾아서 읽도록 이끌자면, 교사들은 ‘교과서 진도 넘어가기’는 저리 가라 할 만큼 준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마음이고 품이고 시간이고 돈이고 많이 들여야 합니다. 이런 데에 마음쓴다고 학교에서 돈이 나오지도 않고 사회에서 알아주지도 않겠지요. 더군다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밤 열 시나 열한 시까지 붙들어 매는 ‘거짓 자율학습’을 시켜야 하니, 몸이 지쳐서 제대로 된 배움을 나누는 데까지 마음을 기울이기 어렵구나 싶어요.

 그래서 중학교 아이들이 좋은 책을 가까이하도록 하자면 무엇보다도 입시제도가 사라져야 합니다. 틀에 박힌 교과서 굴레도 가벼워져야 하며, 아이들한테 지나친 공부 짐을 주지 말아야 해요.

 아이들이 모두 회사원이 되어야 할까요. 큰회사에 들어가 연봉 1억씩 받는 월급쟁이가 되어야 할까요. 모두 영어를 잘해서 세계시민이 되어야 하는가요. 아이들 앞날은 영업사원뿐인가요. 아이들은 인터넷 다루는 일만 해야 하는지요. 아이들이 할 일은 ‘돈 많이 버는 일’, ‘일등이나 일류가 되는 일’, ‘이름을 날리는 일’, ‘권력을 붙잡는 일’뿐인가요.

 아이들은 아이들입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입니다. 저마다 다른 것을 좋아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해요. 아이들 가운데 연예인이나 가수도 나와야겠지만 농사꾼과 노동자도 나와야 합니다. 아이들 가운데 교사도 나와야겠지만 청소부와 운전기사도 나와야 합니다. 아이들 가운데 공무원도 나와야겠지만 장사꾼이나 광부도 나와야지요. 고기잡이도,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책을 엮어내는 사람도 나와야 해요.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아이도 나와야 합니다. 노래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사람도 나와야 합니다. 같은 노동자 가운데에도 기계를 다루는 노동자, 쇠붙이를 다루는 노동자, 종이를 다루는 노동자, 전기를 다루는 노동자, 용접을 다루는 노동자, 페인트바르기를 다루는 노동자 …… 들도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된 어른이라면, 이렇게 저마다 다른 곳에서 다르게 살아가며 일하고 어울릴 아이들임을 생각해서 아이들마다 ‘자기 됨됨이와 생각과 마음’을 알뜰하고 푸짐하고 너르게 가꾸고 추스르는 일을 학교와 집과 동네에서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좋습니다. 책은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자기 모습과 마음을 가꾸는 길잡이 가운데 하나로 곁에 둘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가운데 하나로 건네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이 나라 중학교 아이들한테는 책도 없지만 삶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도 없고 꿈도 없습니다. 현실도 없고 이야기도 없고 동무도 없습니다. 뭐가 있습니까? 이것저것 많이 있는 것 같지요? 컴퓨터도 있고 손전화도 있고 이것저것 많이 가진 것 같지요? 하지만 아이들이 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껍데기뿐이에요. 껍데기만 뒤집어쓰고 있어요. 바람만 불면 휙 날아가 버리고 마는 껍데기 말입니다.

 아이들한테는 껍데기가 아닌 속살을, 알맹이를, 튼튼한 기둥을 주어야 합니다. 어쩌면, 아이들 스스로 이런 속살과 알맹이와 기둥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이끌고 살뜰하게 살아가도록 삶터만 마련해 주면 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자기 삶을 마음껏 펼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어야 책은 책대로 즐기고 다른 것은 또 다른 것대로 제대로 즐길 수 있는지 모릅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뚫린 것 없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꾸려가기 어려운 세상이고 현실인 이 나라인 터라, 아이들한테 주어진 것은 거의 없고 아이들 스스로 즐길 만한 것도 참으로 드물구나 싶습니다.

 아이들한테 책을 건네주고픈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이런 제 마음은 아이들이 ‘책만 보길’ 바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책도 보고 다른 것도 즐기면서’ 자기 삶을 아이들 마음대로 신나고 즐겁게 찾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부디 아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창 신나게 뛰어놀고 마음도 씩씩하게 가꿀 중학교 아이들, 열대여섯 살 이팔청춘 아이들 얼굴에 그늘지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막 싱그러운 꽃잎이 달릴, 고운 몽우리로 피어날 꽃다운 아이들한테 어른인 우리들이 무엇을 주고 있고 무엇을 숨기거나 없애고 있는지 살피며, 또렷이, 아주 똑똑히, 빈틈없이 샅샅이 살피면서 알아차리고 다독이면 좋겠습니다. (중학교) 아이들한테 책다운 책을 내어주고, 삶다운 삶을 꾸릴 수 있는 틈을 주면서. (4338.11.1.불./2007.9.26.물.고쳐씀.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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