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식민지 도서관 (양장) - 아시아에서의 일본 근대 도서관사
加藤一夫 외 지음, 최석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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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재는 왜 이리 따분해야 하나?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6] 가토 카즈오+카와타 이코이+토조 후미노리,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



 엊저녁 고된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동인천 가는 빠른전철을 코앞에서 놓친 다음 한참을 기다리고 섰습니다. 십 몇 분이 지나 빠른전철이 다시 들어옵니다. 굳이 앉아서 갈 생각은 없었지만, 맨 앞줄에 섰으니 ‘오늘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겠군’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철문이 열릴 무렵 갑자기 옆에서 웬 아주머니 한 분이 새치기를 하며 밀고 들어오더니 잽싸게 자리 하나 차지하고 앉습니다. 그런데 비스듬하게 앉습니다. ‘이 아줌마 뭐하는 짓이래?’ 조금 뒤 손짓으로 누군가를 부릅니다. 함께 타는 동무 아주머니인데 옆자리를 당신이 맡아 차지하려고 이처럼 비스듬히 앉아서 다른 사람이 못 앉도록 한 셈이었습니다.

 두 아주머니는 새치기를 했기에 자리에 앉습니다. 제대로 줄을 섰다면 서야 할 분들입니다. 나란히 앉은 두 아주머니는 저를 잠깐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리면서 “호호호!” 하고 웃습니다. 미안해 하거나 부끄러워 하는 빛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참 대단하신 분들이네. 아주머니들 나이를 보건대 틀림없이 아이 한둘쯤은 있음직한데 아이들 앞에서도 이렇게 살아가시나?’

 하루 지나고, 오늘 아침에 인천에서 서울로 길을 나설 때에도 어제와 같은 꼴을 겪습니다. ‘얼마나 다리가 아프고 졸립고 힘드시면 이렇게 새치기로 하루하루를 보내실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다른 이한테 자리를 내어주고 싶지 않아 하는 이 가녀린 마음을, 이웃이고 무어고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 가벼운 마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알쏭달쏭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책을 펼쳐 읽습니다. 아주머니이든 아저씨이든 아가씨이든 젊은 사내이든 꼬맹이이든 할매이든 할배이든, 날마다 숱하게 겪는 새치기를 하는 이 사람들이 어찌하여 이렇게 바보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새치기를 않고 얌전한 사람도 많으나,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착하고 얌전한 마음이 자꾸자꾸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마음은 곧고 바른 쪽으로 가 있어도, 고달프고 지친 몸은 마음과 다르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본서는 일본의 점령 지역에서 일본인의 손으로 설치한 도서관의 발자취를 추적한 것이다. 왜 식민지에 도서관을 설치하였는가? 그 이유는 시대에 따라 강조하는 측면이 조금씩 달라지지만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식민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그 지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과학 기술 등의 정보 자료를 수집하여 정부나 군대가 이용할 수 있도록 조직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식민지의 일본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거류 일본인을 대상으로 학교교육을 보완하거나 식민정책을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다. 셋째, 침략한 나라의 민중을 일본인화하는 정책, 소위 황민화정책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 전쟁의 발단과 원인이라는 것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청일전쟁과 10년 후의 노일전쟁도 무엇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는지 현재의 일본인은 잊은 지 오래다. 동시에 명치정부에 의한 조선 침략의 목적을 위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일과 노일이라는 이름이 그 본성을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  (14, 184∼185쪽)


 지옥철을 타고다닌 지 열 몇 해째가 되는 오늘날까지 돌아본다면, 한손에 책을 쥐고 전철을 기다리던 사람들 가운데 새치기를 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 해서 더 착하거나 훨씬 얌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덜 바빠맞거나 덜 촐랑댄다고 느낍니다. 발을 밟고도 미안하다 말이 없는, 밀치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앞사람 등판이나 머리에 손전화나 신문을 턱 걸치고 게임을 즐기거나 주식시세표를 읽는, 땅위에 있는 전철역에서 버젓이 담배를 태우는 숱한 사람들 가운데 책을 손에 쥐어 보는 사람은 아직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 전철길에서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부터 새벽과 밤으로 고단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 찾아가기 힘든 판인데, 여느 날은커녕 토요일과 일요일에라도 도서관 마실을 갈 겨를이 있을까 하고. 아니,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고단함 가득 쌓인 몸을 이끌고 도서관으로 찾아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책’으로 이루어진 바다에 풍덩 빠지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고. 더욱이, 담배 한 개비와 바깥밥 한 그릇과 술 한 잔과 노래 한 가락과 차 한 잔으로 고단함을 달래거나 잊어야지, 책을 읽으며 마음밥을 채우며 좀더 넉넉하고 너그럽고 따사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마음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고.


.. 조선에서의 도서관정책은 식민정책이지만 도서관은 설치하지 않으며 기존 도서관은 폐쇄한다는 것에 오랫동안 중점을 두고 있었다 … 그렇다면 왜 일본은 조선에 도서관을 설립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운 것일까? 도서관을 세우는 대신 무엇을 한 것일까? … 합병 직후(1910년) 초대 조선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에 의해 ‘애국장서회진’이라는 분서가 단행되었다. 그 수는 수십만 책이라고도 전해지며, 헌병과 경찰이 조선인학교, 서점, 개인주택을 습격하여 압수하여 소각한 것이다. 내용이 민족적이라는 이유로 처분되었으며, 주로 역사서, 고전, 위인전, 지리서, 초ㆍ중등학교 교과서가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근대적 인쇄에 의한 대량 출판이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그 후 조선의 문화 발전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 러시아의 남하를 억제하면서 만주를 취하려는 일본으로서는 동쪽으로부터의 침략 루트인 조선반도는 단순한 발판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조선에 대해서는 토지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일본의 일부로 삼아버리는 ‘황민화’라는 식민정책을 세우게 되었다. 언어를 위시하여 일상 생활양식과 관습, 종교, 역사관, 기타 일본과 상이한 모든 것이 말살 대상이 되어 일본풍으로 바꾸도록 강제되었다. 언론 출판 활동과 도서관 활동도 철저하게 탄압되었다 … (세월이 흘러 1921년이 되어)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도서관이 없음으로 인하여 우민화정책마저도 지장을 초래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설립하여 체면을 세우기로 작정하였다 ..  (181, 38, 188, 201쪽)


 초등학교 아이들부터 느긋하게 책을 읽기 어려운 우리 나라입니다. 이 나라 초등학생은 그냥 초등학생이 아닌 줄을 누구나 알고 있겠지요. 중고등학교를 다니면 책하고는 아예 담을 쌓아야 하는 우리 나라입니다. 중고등학교를 거친 분이라든지,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닌다든지 한다면,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테지요. 그런데, 대학생이 된다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회로 나온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습니다. 나라밖으로 공부를 하러 간다고 책을 더 잘 찾아서 읽는 우리들이 아닙니다. 돈 많이 버는 회사원이 된다고 책을 찾아서 읽는 우리들이 아닙니다.

 너무도 마땅한 소리인지 모르지만, 연속극이나 영화에 나오는 아리땁고 멋진 짝짝꿍들이 책방에서 말없이 마음밥을 냠냠짭짭하면서 사랑을 키우거나 북돋우는 모습을 보기란 더없이 힘듭니다. 연속극이나 영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삶부터 그렇습니다. 책방마실을 할 겨를이 없고, 둘레에서 “야, 우리 책방마실 좀 다녀오자!” 하고 손목을 잡아당기는 사람이 없어요. “야, 우리 ○○도서관에서 만나자. 일이 있어 늦으면 책을 보면서 기다리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야, 우리 ○○헌책방에서 만나자. 술 한잔 하기 앞서 서로한테 책 하나씩 사 주기로 하자.” 하는 사람이 있을는지요. “야, 오늘 아무개 생일인제 책방에 가서 좋은 책 몇 권 사 주자.” 하는 사람이 남아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스스로 일본사람을 깎아내리며 일컫던 ‘경제동물’이라는 말마디를 우리한테 붙여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돈벌레’라고 이름을 살짝 고쳐서. ‘돈만 아는 바보’라고 살을 붙여서. ‘돈 없이는 살지 못하는 멍텅구리’라고 낱낱이 밝혀서.


.. 북해도는 아이누의 자유로운 대지였지만 이 선주민족을 어떻게 ‘일본인’화할 것인지가 과제였다. 이를 위하여 근대교육이 중요시되었고 사회교육 기관으로서의 도서관을 그 속에 놓았다. 아이누 사람들은 정책난민 상태에 놓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소수민족으로서의 생활환경과 문화가 해체되었다 … 철저한 동화정책으로 아이누 사회는 해체된다. 근대 북해도는 그 위에서 출발한 것이다 … (대만에서는) 선주민족의 반란을 억제하고 인심을 모아 일반 대중을 사회 교화의 대상으로 하기 위한 사회교육 행정이 이때(1919년)부터 강화되게 되었다 ..  (63, 88쪽)


 대학교재로 쓰는구나 싶은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391쪽짜리 책이요 책값은 3만 원입니다. 카도 카즈오, 카와타 이코이, 토조 후미노리라고 하는 일본사람 셋이 함께 쓴 책입니다. 책이름에서도 알 수 있지만, 우리 나라는 일본한테 식민지로 눌려살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겪어야 한 생채기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93쪽을 보면, 1928년에 일본 내무국장이 “도서관을 통하여 내지의 문화를 주입시킴과 동시에 국어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실립니다. 196쪽을 보면, 일본 문부성이 “(1) 고등교육은 정신적 욕구, 특히 자유에 대한 희구를 높이기 때문에 조선인에게 좀더 높은 교육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형편을 나쁘게 하는 일이다. (2) 조선인을 일본인보다 열등하다고 보고 싶다. (3) 조선인의 교육을 위해서 비용을 들일 필요는 없다. (4) 조선인이 최하층 일본인의 역할을 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내놓았다는 대목이 보입니다.

 아무래도 문헌정보학(지식정보학)을 배우는 대학생들이 교재로 이 책을 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옮긴이 최석두 교수는 일본사람 이름을 ‘암창구시’나 ‘대구보리통’이니 ‘목호효윤’이니 ‘이등박문’이니 ‘구미방무’라고 적습니다. ‘문무대보’니 ‘전중불이마’니 ‘문부이사관’이니 하고 적으며 옆에 묶음표를 치고 한자 이름을 밝혀 놓는데, 2000년대 한국땅 지식사회에서 일본사람 이름을 이렇게 읽어도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학과도 아닌 문헌정보학과에서 이렇게 사람이름을 가리켜도 되는지 궁금하고, 이런 번역투와 엮음새는 이 나라 대학생한테 어떤 지식을 나누어 줄는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이라고 하는 책은 “아시아에서의 일본 근대 도서관사”라고 밝혀 놓았으나, ‘근대 도서관’이 어떤 몫을 맡았고 어떻게 꾸려졌으며 어떤 책을 갖추어 어떤 일에 이바지했는가 하는 이야기는 한 줄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첫머리에 “왜 식민지에 도서관을 설치하였는가?” 하고 스스로 물으며, “침략한 나라의 민중을 일본인화하는 정책, 소위 황민화정책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하고 밝히는데, 이 말마디를 넘어서는 생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학문하는 대학생하고 대학교수한테는 어떠할는지 모르겠지만, 정작 도서관을 꾸리는 사람한테든지 식민지 역사를 파헤치거나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한테든지 도서관 발자취를 좇고픈 사람한테든지 책을 좋아하는 사람한테든지, 이 책이 어느 만큼 보탬이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교재는 이렇게 따분하게 엮어도 되는 책인지 모르겠고, 이렇게 써낸 일본사람 책을 우리가 굳이 옮겨내야 했을까 하는 궁금함을 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일제강점기 한국 도서관 발자취”를 그러모은 자료가 거의 없지 않느냐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며, ‘그렇구나. 이만한 책조차 우리한테 없구나.’ 하며 고개를 떨굽니다. (4342.10.6.불.ㅎㄲㅅㄱ)


┌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한울 펴냄,2009)
├ 가토 카즈오+카와타 이코이+토조 후미노리 씀 / 최석두 옮김
└ 책값 : 3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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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조용히! - 풋내기 사서의 좌충우돌 도서관 일기
스콧 더글러스 지음, 박수연 옮김 / 부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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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풋, 도서관 사서가 땡땡이치며 글을 썼구나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 스콧 더글러스, 《쉿, 조용히!》



 오늘은 여느 때보다 조금 일찍, 십 분 남짓 앞당겨 집에서 길을 나섭니다. 일곱 시 십 분이 될 무렵 가방을 메고 나오는데, 아까부터 깨어 있던 아기가 아빠한테 와서 안깁니다. 어쩌는 수 없이 아기를 안고 엉덩이를 토닥이다가는 옆지기한테 넘겨주려고 하는데, 아기가 엄마 얼굴을 안 보고 홱 고개를 돌립니다. 아빠한테서 떨어지기 싫다는 뜻입니다. 아침에 아기가 자고 있을 때 길을 나서야 하는데, 그만 깨고 말아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조금 더 어르며 안고 있다가 살그머니 엄마한테 넘겨줍니다. 아직 졸음기가 있으나 뚱한 얼굴입니다. 아까 깨어났을 때에는 씻는방에서 빨래를 몇 점 했는데, 아기는 빨래하는 아빠 옆에 바싹 붙어 쭈그려앉은 채 말끄러미 비빔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더니 빨래를 헹구려고 작은 대야에 담은 물에 제 조그마한 손을 담그더니 얼굴에 묻힙니다. 제 손으로 낯을 씻겠다는 소리입니다.

 “헤!” 하면서 입을 벌리고 혀를 살짝 내미는 모양이 재미있습니다. 아빠가 헹굼질을 끝낼 때까지 아기는 옆에서 낯을 씻는 시늉입니다. 아직 낯씻기를 제대로 하지 못할밖에 없으니, 아빠가 큰손으로 목덜미와 겨드랑이까지 씻겨 줍니다. 아기는 얌전하게 가만히 있습니다. 이렇게 아빠가 씻겨 주던 하루하루를 아기는 오래도록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손길이 무엇이었다고 떠올릴 수 있을까요.

 엄마 품에 안겨 손을 흔드는 아기를 따라, 차츰 멀어지는 아빠도 왼손을 머리 위로 길게 뻗친 채 골목이 끝나는 데에까지 흔듭니다. 골목 안쪽으로 아빠가 사라진 다음에도 아기는 손을 흔들고 있었을까요. 다시 칭얼거렸을까요. 그러다가 엄마젖을 물고 밀린 잠을 마저 자려고 할까요.

 걸음을 재촉하며 걷다가 아침햇살을 받고 있는 분꽃과 나팔꽃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진 두 장 찍어 놓습니다. 아침 또는 새벽에 나팔꽃을 사진으로 담을 때면 언제나 ‘모닝글로리’라는 문구회사가 떠오릅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1988년)이었을 때부터 이 회사 공책을 썼는데, 이때에는 영어를 처음 배우던 때라 ‘모닝글로리’가 ‘나팔꽃’을 가리키는 줄을 교과서에 나와 있지 않아도 배우면서 재미있어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토박이말로 이름을 붙인 ‘바른손’팬시 이름도 참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아직 철이 덜 들던 때라 ‘바른손’ 다음에 ‘팬시’라고 붙인 대목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으며, ‘모닝글로리’라는 곳이 왜 ‘나팔꽃’이라는 좋은 이름을 안 쓰려 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 열 해쯤 지나 국제통화기금 일이 터질 무렵 ‘모닝글로리’는 회사이름이 영어로 되어 있어 나라안 회사가 아닌 나라밖 회사인 줄 사람들이 잘못 알고 몹시 힘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회사가 이름을 토박이말로 바꾸려나? 다른 회사는 하나같이 영어로 이름을 바꾸지만, 이 회사는 토박이말로 이름을 바꾸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나?’ 하고 꿈을 꾸었는데, 모닝글로니는 그예 모닝글로리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영어로 지은 회사이름을 모조리 잊어버렸습니다.

 이른아침부터 학교 가는 발걸음이 바쁜 아이들을 돌아봅니다. 동인천역에 들어서니, 지하상가 철거에 반대하는 분들이 쳐 놓은 천막이 보입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장사한 분들이 한뎃잠을 자며 버티고 있으나, 시에서는 딱히 어떤 대책이나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습니다. 동인천역 건물에 깃들던 다른 가게는 모두 나간 지 오래이고, 동인천역 건물 바깥은 ‘공사중’을 알리는 커다란 그물을 몇 해 동안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표를 끊고 타는곳에 들어섭니다. 여느 날보다 십 분 남짓 일찍 집에서 나오니 전철을 탈 때에 앉을 자리가 납니다. 제가 타는 전철역은 인천 맨끝이라 그럴 테지만, 맨끝 역이라 해도 7시 32분 차를 타면 자리를 얻기 아주 힘듭니다. ‘앞으로는 오늘보다 5분 더 일찍 나와 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처럼 느긋하게 앉아서 책을 읽겠구나 생각했으나, 제 옆에 앉는 양복쟁이 남자 어른은 팔짱을 낀 채 자려고 해 제 옆구리를 찌르고 아주머니 또한 팔짱을 끼고 몸을 부풀리며 앉느라 오늘도 여러모로 고달픈 출근길이 됩니다. 어느 누가 전철길에 고달프지 않으랴만, 스스로 고달프다고 느낄 때에는 다른 이도 고달플 터이니 다리 벌리기나 팔짱 끼며 ‘내 자리 더 넓히기’는 안 해 주면 좋으련만.
 





.. 지난달 우리는 폐관을 위한 행사를 기획했다. 지역사회 주민들이 거의 오십 년 동안 배우고, 읽고, 사랑하게 된 이 작은 건물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픈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기회였다. 나이든 이용자들은 이 도서관 이름이 된 초대 사서를 개인적으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이야기했고, 십대들은 자신들이 첫 걸음마를 겨우 뗄 무렵 동화 낭독을 들으러 왔던 기억을 공유했다. 누구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이야기를 하나쯤 품고 있었다. 그 한 달 내내 모든 기억들이 모였다. 누구도 도서관이 문을 닫게 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들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모두가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더 나아지기 위한 폐관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건물은 그들만의 도서관이었다. 와서 배우고 성장한 그들만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이 지금 없어지려고 하는 것이다 ..  (198쪽)


 신길역에서 갈아타고 서대문역에서 내립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사람들이 붐빕니다. 그리고, 이렇게 붐비는 사람 가운데 자동계단 아닌 돌계단을 타고 오르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한 사람쯤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는데, 서대문역쯤 되는 깊이라면 모두들 ‘걷지 않으려’고 합니다.

 서대문역이나 이대역이나 신금호역 같은 곳은 계단이 깊기도 깊다 하지만, 장애인이 아닌 사람이라면 이만한 계단은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걸을 만합니다. 그리고, 이만큼은 걸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숱한 회사원과 학생들이 ‘하루 동안 걸을 일’이 참 드물거든요. 밥을 먹어 몸에 기운을 얻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이라지만, 정작 몸을 움직이며 살아 있음을 느끼고 서로 어울리는 일이란 퍽 드물거든요. 운동이 모자라 헬스클럽을 다닌다든지 주말에 어디를 다닌다든지 하는 일도 나쁘지 않으나, 여느 때에 두 다리로 걷고 계단도 성큼성큼 디딜 수 있으면 그리 걱정되지 않습니다. 집에서 세탁기를 돌려도 그릇되지는 않으나, 웬만한 빨래는 손으로 빨고 걸레도 손으로 빨아서 무릎 꿇고 방다닥을 슥슥 문질러 훔치면 운동이 모자랄 일이 없습니다. 아이를 키우면 아이하고 신나게 놀고, 아이가 많이 자라 어린이나 젊은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함께 어울리는 자리를 꾸준히 마련하면서 어깨동무하면서 나들이를 다니고 한다면, 이 또한 운동이 모자랄 까닭이 없습니다.


.. 도서관을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다. 이용자들이 도서관을 도서관답게 만든다. 그들이 없으면 신성함도 사라진다. 그저 책이 있는 건물에 불과하다 … 이삿짐 센터 사람들은 짐을 함부로 다뤘다. 도서관 안에는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막노동꾼들 같았다. 그들은 책을 다룰 줄 몰랐다. 그들은 책을 상자에 넣기 위해서 함부로 던지고 책에 낙서를 했다 … 그동안 본 적도 없는 백인들이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와서 관심 있는 척하고 있었다. 나는 시장을 바라봤다. 그의 입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정치 선전에 불과했다. 그는 한 번도 도서관에 온 적이 없었다. 물론 이 남자를 위해 도서관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는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다른 도시에서 사다가 읽을 것이다. 그는 이 도서관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이 도시의 부촌에 있는 대저택에 살고 있다 ..  (210, 214쪽)


 오늘 아침은 여느 날보다 조금 일찍 길을 나섰지만, 새벽 여섯 시 사십 분에 깨어나는 바람에 밥을 못했습니다. 전철역 앞에서 김밥 파는 아주머니한테서 김밥 석 줄을 삽니다. 3900원입니다. 김밥을 가방에 넣습니다. 일하러 나온 길에 읽은 책도 가방에 넣습니다. 그제와 어제와 오늘 아침까지 해서 즐겁게 읽은 책은 이제 마감합니다.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며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를 꾸밈없이 적어내려간 《쉿, 조용히!》라는 책인데, “도서관 사서가 들려주는 도서관 이야기”라기보다는, “도서관에서 일한 수수한 한 사람이 내 삶과 이웃 삶을 돌아본 발자취”라는 느낌이 짙습니다. 도서관 공무원으로 있으며 ‘용케 땡땡이 잘 치며 글도 재미나게 썼네?’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렇게 ‘도서관에서 일할 때에 일 안 하고 도서관 이야기를 글로 쓴’ 모습이 밉지 않습니다. 도서관에 책손이 뜸하며 조용할 때에는 도서관 사서라 하더라도 책에 앉은 먼지를 털거나 책만 읽기보다는, 이러한 짬에 스스로 내 삶 이야기를 적바림한다면 더없이 즐겁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할 수 있으니까요.

 생각을 열려고 하면 눈길이 열리고, 마음을 열려고 하면 따순 손길을 두루 뻗칠 수 있겠지요. 눈길을 열면서 우리 둘레 삶터를 한결 넉넉하게 바라보면서 글 한 줄로 담아낼 수 있고, 따순 손길을 두루 뻗치면서 좀더 사랑스러운 말 한 마디를 나눌 수 있겠지요. 우리 나라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공무원이 이야기책을 하나 쓴다면 어떤 모양새가 될까 궁금합니다. 아니, 우리 나라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공무원들은 땡땡이를 칠 때에 무엇을 할는지 궁금합니다. (4342.9.17.나무.ㅎㄲㅅㄱ)


 ┌ 《쉿, 조용히!》(스콧 더글러스 씀,박수연 옮김/부키,2009)
 └ 책값 :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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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점의 문화사
이중연 지음 / 혜안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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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안법 없애면 책이 책다울 수 있을까
 [잠깐 읽기 48] 이중연, 《고서점의 문화사》


- 책이름 : 고서점의 문화사
- 글 : 이중연
- 펴낸곳 : 혜안 (2007.3.15.)
- 책값 : 14000원


 (1) 우리 나라에서 ‘책’과 ‘헌책방’이란?


 출판사 ㅌ 일꾼 두 분하고 헌책방 마실을 합니다. ㅌ이라고 하는 출판사에서 책을 하나 내기로 하고 용산 어느 밥집에서 만난 다음 이야기를 조금 하고 나서 헌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오늘날 서울 용산은 아이파크몰이니 무어니 하면서 아주 복닥복닥 시끄럽습니다. 제가 모르던 지난날에 용산 앞터에 커다란 저잣거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무렵에는 용산에도 헌책방이 많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곳 용산에서 1975년부터 터를 내린 헌책방 〈뿌리서점〉 아저씨 말씀을 들으면, 원효로 쪽에 헌책방이 제법 있었다고 합니다. 당신도 원효로에서 한 해쯤 있다가 지금 자리 둘레로 왔고, 그곳에서 스무 해 남짓 책방살림을 꾸렸으나, 건물임자가 더 높은 임대삯을 받으려고 내쫓는 바람에 지금 자리로 옮겼습니다.


.. 지하철공사가 진행되자 동대문 고서점들은 문을 닫거나 활동무대를 옮겼다. 40∼50곳에 이르던 책방은 1974년에 불과 세 곳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 지하철이 개통되자 모두 없어졌다. 보문사ㆍ교문사ㆍ희문사ㆍ경안서점 등은 청계천으로 옮겼다. 1970년대에 그렇게 고서점의 동대문 시대는 저물어 갔다 … 《샛강》의 설명은 자세하다. 시장에 건물이 새로 세워지자 연고권을 가지고 다시 샀지만 빚이 불어난다. 그런데 앞뒤의 가게가 모두 책과는 거리가 먼 가게들이었다. 당연히 책방은 장사가 안 된다. 결국 시내로 들어갔지만 6개월도 안 돼 주인의 횡포로 쫓겨나고 급기야 어느 집 처마 밑에 차양을 달고 책방을 꾸민다. 하지만 근처에 빌딩이 들어서면서 책방이 도로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3대 헌책방의 전주에서의 마지막 모습이다 ..  (246, 324쪽)


 헌책방에 함께 찾아온 두 분은 바쁜 틈을 쪼개어 책 구경을 즐깁니다. 다시 일터로 돌아가셔야 하기 때문에 살짝 맛보기만 합니다. 저와 옆지기는 번갈아 아기를 안고 어르고 재우면서 책을 살핍니다. 아기도 힘들고 옆지기도 힘들어 하기에 책 구경은 얼마 못합니다. 살짝 책 구경을 하는 동안 우리 두 사람은 열 권 남짓 골랐습니다.

 책값을 셈하고 나오려는데, 〈뿌리서점〉 오랜 단골 아저씨가 들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단골 아저씨는 이곳 〈뿌리서점〉을 서른 해 가까이 다니신 분입니다. 모르지만 서른 해가 넘었을는지 모릅니다. 열일곱 해 앞서 제가 이 헌책방에 처음 찾아왔을 때에도 아저씨는 열 몇 해째 이곳을 드나들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세 해 뒤면 헌책방 〈뿌리서점〉 스무 해째가 되어, 드디어 이 헌책방에서 “저도 이곳 단골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되는데, 단골 아저씨는 몇 해 뒤에 ‘마흔 해 단골’이 될는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이곳 〈뿌리서점〉에 처음 드나들 무렵에 열 몇 해째 드나들던 할아버지가 꽤 있었는데 요즈음은 거의 만나뵙지 못합니다. 제가 스물을 갓 넘기던 때에 나이 일흔이나 여든쯤 되면서 당신이 제 나이였을 때부터 책방을 드나들었다고 하셨는데, 살아 계시다면 아흔이나 백일 테고,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그 긴 세월을 걸쳐 읽고 갈무리한 책을 집안에 고스란히 남기고 흙으로 돌아가셨겠지요.


.. (1700년대 조선) 정부가 처벌한 대상은 세 갈래였다. 첫째 책을 소지한 사람, 둘째 책을 전파한 책쾌, 셋째 중국에서 책을 들여온 역관. 이들 가운데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측은 책쾌였다. 책을 보거나 지녔던 모든 사람과 역관 일반이 처벌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책쾌는 모두 체포되어 벌을 받도록 조처되었다 … 책쾌에 대한 조처는 극단적이었다. 곧 도성 안에 책쾌가 보이지 않도록 지시하고, 만일 책을 가지고 왕래하는 자가 있으면 포도청에서 수사하도록 명했다. 책쾌는 범죄집단처럼 다루어졌다 … 책쾌 9명이 모두 문제서적을 거래하지는 않았는데, 앞서 보았듯이 모두 효시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책 소지자보다 유통인을 더 문제 삼은 것이다 … 박인환의 선택은 서점의 활로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본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사상의 정치적 대립이 출판ㆍ문화계에도 영향을 주면서 금서조처, 압수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 1947년 말에 서울에서 대대적인 금서 압수 수색이 진행되었다. 종로에 있던 갑문당 서점에서는 75종이 압수되었다 ..  (60∼64, 196∼197쪽)


 헌책방을 처음 알아차리며 다니던 고등학생 때에는 돈이 넉넉하지 않았으나 아예 없지 않았습니다. 제 둘레에 돈을 펑펑 쓰던 동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으레 돈이 얼마 없기 마련’이라고 느꼈으며, 책은 한 권이나 두 권씩 사서 읽으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오히려 저는 고등학생 때에도 신문배달이나 과외 같은 알바를 학교 몰래 조금씩 하며 푼푼이 돈을 모으곤 했기 때문에, 책을 여러 권씩 사읽는 주머니는 그리 빠듯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등학생이던 1990년대에 제가 즐겨 사읽던 책은 ‘헌책방에서 500원 하던 손바닥책’입니다. 때때로 700원짜리 시모음을 사서 읽고, 더러더러 1500원이나 2000원짜리 인문책과 소설책을 장만했습니다.

 2009년에 접어든 오늘에는 손바닥책 한 권 값을 1500원쯤 칩니다. 푼수로 치면 세 곱일는지 모르나, 부피로 치면 거의 안 오른 셈입니다. 더구나 우리 세상은 온통 ‘더 값싼 물건을 더 많이 사서 쓰기’에 물들어 있는 만큼, 새책이라 할지라도 인터넷책방에서는 40퍼센트까지 깎아서 팔기도 하고, 마일리지까지 치면 60%나 깎아서 파는 책이 있기도 합니다. 하기는, 텔레비전 홈쇼핑에서는 60∼70% 깎아팔기가 으레 이루어지고 있으니 할 말은 없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한국땅에서 책은 책이라는 구실을 잃어버리고 소비재가 되었다고 할까요. 더 값싸게 많이 장만해서 책꽂이 그득그득 꽂아 놓은 다음 곶감 빼어먹듯 읽는 지식덩어리가 되었다고 할까요.

 새책이란, 겉에 찍힌 책값에 따라 사고팔려야 올바를 텐데, 1만 원이 찍힌 책을 1만 원을 온돈으로 치르고 사면 “난 꼭 바보가 된 듯한 느낌이야!” 하고 말하는 판입니다. 이런 가운데 헌책방 헌책 또한 제자리를 찾기 어렵습니다. 뭐가 새책이고 뭐가 헌책인지 가누기 어렵습니다.

 깊이 파고들면, 아무리 새책이라 할지라도 ‘지난날 쓴 글이 오늘날 새 종이에 새 잉크로 찍혀 나왔을’ 뿐이긴 합니다만, 이리하여 새로 나오는 책에 담기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때로는 100 해 앞선 때 이야기이거나 500 해 앞선 때 이야기이기도 해요.


.. 일제강점은 위생담론과 함께 조선의 상점 모습을 해체시키는 형태로 다가왔고, 고서점의 서적유통 모습도 일본인에 의해 부정적으로 그려지게 된다. 쿠랑도 서울ㆍ시골의 골목길이 좁고 지저분하다거나 장터가 먼지투성이라고 했지만, 적어도 책 유통과 관련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특히 고서점의 경우 가게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면서도 불결하다거나 하는 따위의 위생담론을 펼치지 않았다 … 일반적 상점 이야기지만, 고서점의 경우에도 일본인의 위생담론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를테면 노점 헌책방과 잡화점식 고서점을 주로 다녔던 어떤 일본인은 사본ㆍ활자본이 가끔 나오는 한 가게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곧, 주인이 “여름 더울 때에는 파리가 입에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낮잠”을 잔다거나 주인 옆의 ‘변기항아리’를 열면 ‘이상한 훈풍’이 와서 도망을 가야 한다는 따위다. 그는 이 가게를 ‘조선답다’고 했고 ‘사랑할 만한 가게’라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싸게 사기 때문이지, 조선답다는 수식은 비상시와 떨어진 가게를 남겨둘 필요가 없다는 말에 의해 무색해진다 … 쿠랑은 그 모습보다 가게에서 다루는 책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일제가 청결ㆍ불결, 입구의 높낮이, 하수덮개 따위를 잣대로 삼을 때, 다루는 책의 질과 관계없이 작은 초가집의 고서점은 점차 자본과 개발에 밀려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  (106∼108쪽)


 저 스스로 《모든 책은 헌책이다》라는 이름으로 책 하나를 쓰기도 했지만, 모든 책은 틀림없이 헌책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책은 새책입니다. 그저 모든 책은 책일 뿐입니다.

 한 사람을 놓고 헌 사람과 새 사람으로 가를 수 없고, 할매 할배라고 헌 사람이 아닌 만큼, 책은 그저 책일 뿐입니다. 겉보기로 늙어서 늙은이일 뿐이요, 겉보기로 낡아서 헌책일 뿐입니다. 한자말로 ‘고서’라 적는 ‘옛책’도 매한가지입니다.

 우리한테는 얼마나 읽을 값이 있느냐를 살펴서 ‘나한테 좋은 책’인가 아닌가를 느끼면 됩니다. 우리한테는 얼마나 갈무리해 놓을 뜻이 있느냐를 헤아려서 ‘나한테 알맞는 책’인가 아닌가를 돌아보면 넉넉합니다.

 대통령이든 청소부이든 똑같은 사람이고, 경찰이든 시위대이든 똑같은 사람입니다. 교사이든 학생이든 똑같은 사람이며, 부자이든 가난뱅이든 똑같은 사람입니다. 높은 사람이 없고 낮은 사람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이 없고 못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빚어내어 즐기거나 나누는 책도 매한가지라, 나한테 걸맞는 책이냐 아니냐가 갈릴 뿐입니다.

 다만, 돈을 밝히는 사람이 있듯이 돈을 밝히는 책이 있습니다. 이름값 높이려는 사람이 있든 이름값 앞세우는 책이 있습니다.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듯이 권력을 움켜쥐려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옳게 살아가려 한다면 옳은 목소리 담은 책에 눈길이 갑니다. 우리 스스로 착하게 살아가려 한다면 착한 삶 담은 책에 손길이 갑니다. 우리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려 한다면 아름다운 꿈 깃든 책에 마음길이 갑니다.

 요즈음 잘 팔리는 책을 돌아본다면, 우리들은 아무래도 돈을 밝히고 이름값을 높이고 싶으며 권력을 얻어서 내 밥그릇을 꾹꾹 눌러 채우면 될 뿐이라고 여기지 않느냐 싶습니다.


.. 한글책을 다루는 고서점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때문에 일경의 주목을 더 받게 되었다. 금서목록을 고서점에 통보하는 이면에서 일제는 고서 거래가격까지 정해 유통을 통제하려 했다 … 일제는 고서점에서 불온서적이 거래되는 것을 통제했지만, 고서점은 그에 상관없이 그들 책을 매매했다. 단지 수요를 따르려는 뜻 말고도 고서점 주인이 한 권의 책에 담긴 저항의 전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전시파쇼체제 하의 조선에서 판금서적은 급증했지만 고서점은 금서의 유통경로로 자리를 잡았다. 구하기 힘든 금서는 고서점에서 찾는 게 독서인의 상식이었다 … 한글책만 다루는 서점에 대한 일경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일본책을 다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노선변경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한글책을 계속 유통시키기 위함이었다 … 역사책을 읽으며 민족의식을 고양해쓴데, 그 구입 경로는 고서점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역사라는 표현을 볼 때 그 책은 금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읽기는, 일제에 대한 독서의 저항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  (84, 87, 89, 90, 98쪽)


 더위를 식히려고 부채질을 하며 물 한 모금 마시고 책을 읽다가 덮습니다. 이야기책 《고서점의 문화사》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경찰이 벌인 ‘불온도서 빼앗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일 ‘불온도서 빼앗기’는 해방 뒤에도 있었고, 이승만 때와 박정희 때와 전두환 때와 노태우 때와 김영삼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김대중과 노무현 때에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이명박 때에도 되풀이됩니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아는 사람은 압니다. 우리 나라에 ‘국가보안법’이 일본제국주의자 총칼로 들어선 다음부터 어느 한 해이고 보안경찰들이 ‘헌책방마실을 하며 불온도서 찾기’를 안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판이 끊어져 버린 책이라 할지라도 이삿짐에서든 도서관에서 내다버린 책에서든 ‘혁명과 민주와 평화와 통일을 좀더 거세게 외치는 줄거리’ 담긴 책은 헌책방에 흘러들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이든 독재정권 때이든, 인문사회과학책방 일꾼뿐 아니라 헌책방 일꾼들은 이러한 책들한테 ‘제 임자 찾아 주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헌책방 일꾼들은 이런 책에 어떤 줄거리가 담겼는지 모른다 할지라도, ‘책을 불사르’거나 ‘책을 찢어버리’는 끔찍한 우격다짐만큼 잘못된 생각과 몸짓은 없다고 느낍니다. 왼쪽이라고 더 낫지 않으나 오른쪽이라고 덜 낫지 않으며, 왼쪽이라고 나쁜놈이 아닌 가운데 오른쪽이라고 좋은놈이 아닙니다. 사람은 모두 같은 사람이고, 책은 모두 같은 책입니다.

 언제나 ‘책을 받아먹는 사람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고자 한다면, 아무리 엇나가는 줄거리 담긴 책을 읽더라도 바르게 꾸리는 삶을 놓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뚤어지게 살고자 한다면, 아무리 올바른 줄거리 담긴 책을 읽더라도 비뚤어지고야 맙니다. 우리 나라에서 책이 책답게 뿌리내리며 이어오기 힘들고 헌책방이 헌책방답게 자리잡으며 대물림하기 힘든 탓은, 아무래도 우리 스스로 옳은 삶을 붙잡거나 즐거운 삶을 함께 나누려 하는 뜻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2) 몹시 아쉬운 책 《고서점의 문화사》


 2007년에 이중연 님이 펴낸 《고서점의 문화사》는 책이름 그대로 ‘고서점’이라는 곳이 한국땅에서 어떤 문화 노릇을 하면서 어떠한 발자취를 남겼는가를 톺아보려고 하는 책입니다. 이중연 님은 《책, 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2005)라든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2001) 같은 책을 꾸준히 펴내면서, 우리네 ‘책 문화 역사’를 밝히고자 하는 분입니다. 이참에 낸, 아니 이태 앞서 낸 《고서점의 문화사》는 우리 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책방’ 발자취를 다룬 책입니다. 더욱이, 책방 가운데에서도 여느 새책방이 아닌 ‘헌책방’을 다룬 책입니다.

 이 책이 처음 나올 무렵, 온갖 매체에서 이 책을 여러모로 칭찬하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저 또한 책이 갓 나왔을 때에 장만해 놓았습니다. 다만,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지루하다고 느껴 덮어 놓기 일쑤였고, 덮어 놓았다가도 ‘고서점’을 다루는 책이라서 섣불리 집어치우거나 책꽂이에 쑤셔박지 못한 채 이태를 보냈습니다.


.. 신간 서적이 많이 간행되지 않았던 해방 직후에는 헌책방에 조선에 대한 문화 수요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경로가 되었다 ..  (290쪽)


 인천에서 개인 도서관을 열어 놓고 이럭저럭 자리를 잡는 가운데 우리네 도서관 문화와 흐름을 함께 돌아보는 동안, 이 책 《고서점의 문화사》도 새롭게 생각해 보려고, 지루함을 무릅쓰고 새삼스레 집어들어 끝까지 읽어 봅니다. 제가 개인 도서관을 연 2007년부터 ‘도서관진흥법’이 바뀌어, 저처럼 책만 많고 돈이 없는 사람은 ‘개인도서관을 열지 못하도록’ 바뀐 한편, ‘도서관’이라는 이름조차 못 쓰도록 되었습니다. 또한, 대학교에서 도서관학과를 나와 사서자격증을 손수 따거나 사서자격증이 있는 사람을 직원으로 쓰지 않으면 도서관을 열 수 없다는 조항까지 생겼습니다. 도서관위원회라든지 무슨무슨 시설과 설비라든지 하는 숱한 조항을 들여다보면, 개인힘으로 도서관을 열자면 수억을 들여 새 건물을 짓지 않고서는 꿈조차 꿀 수 없는데, 이 나라에 ‘돈과 책을 함께 넉넉히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푸념을 좀 늘어놓았습니다만, 이런 푸념을 늘어놓을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에는 그만큼 책 문화가 없고, 책을 보는 문화가 없으며, 책을 생각하는 문화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헌책방과 인문학책방과 만화책방을 즐겨찾는데, 우리 나라는 도시이든 시골이든 동네에서 가깝게 찾아가서 즐길 만한 ‘새책방’이 몇 군데 안 남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서관은 더욱 꿈도 못 꿉니다. 기적의 도서관이니 무엇이니 하면서 큰돈 들여 전국 몇 군데에 새로 지어 주기는 하는데, 우리한테 ‘건물이 없’어 도서관을 못 갖추겠습니까. 전국 곳곳에 빈 건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시에는 번듯번듯한 새 건물도 많으며, 시골에는 문닫은 학교도 많습니다. 고갱이는 무엇인가 하면, ‘널린 건물을 가득 채울 만한 책이 모자라다’입니다. ‘널린 건물에 한 번쯤 책을 채운다’ 할지라도 새롭게 나오는 책들을 꾸준하게 장만해서 갖출 ‘책 사들이는 돈이 모자라다’입니다. 그리고, 새책이라 하여도 쉽게 판이 끊어지기 때문에 헌책방에서 판 끊어진 책을 찾아야 할 텐데, 도서관 사서 가운데 헌책방마실을 힘껏 하면서 ‘사람들한테 빛과 소금과 웃음과 눈물이 될 책’을 찾아 주려고 팔벗고 나설 분이 드물다는 아쉬움입니다.


.. 그(민병산)는 마음 놓고 책을 살 정도로 돈이 있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만일 주머니가 무거웠다면 동대문에서 헌책을 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전기 수집에 나서게 되었다. 희귀한 고서, 국학 관련서는 보고도 못 본 척할 수밖에 없고, 한 권 값이면 다섯 권 여섯 권을 구할 수 있는 싼 전기 책을 수집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  (230쪽)


 이와 같은 세상 흐름을 돌아볼 때, 우리한테는 “고서점 문화사”뿐 아니라 “새책방 문화사”와 “동네책방 문화사”가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책이 갈래마다 하나씩 있으면서, 우리네 ‘문화관광위 소속 국회의원’ 나으리께서 읽어 주셔야 할 터이며, 전국 공무원과 교사들이 이러한 책을 읽으며, 마을과 학교마다 ‘작은 도서관과 책방’ 마련하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애쓰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헌책방 문화사”를 하나 다룰 수 있으면 얼마나 반가우랴 싶습니다. 가난한 책벌레한테든, 이냥저냥 싼 잡지 찾는 뜨내기한테든, 그저 책을 좋아하는 사람한테든, 세월과 세계를 넘나드는 온갖 책을 골고루 갖추면서 우리 앞에 펼쳐지는 헌책방이라는 문화쉼터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줄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쁘랴 생각합니다.


.. 조선학 연구ㆍ확산은 고서의 발견ㆍ수집ㆍ확산과 함께했다. 한 권 책의 보존ㆍ발전에서 조선학이 전망되었다 … 최남선, 양주동, 방종현, 이희승, 이병기, 조윤제, 김태준, 이병도, 황의돈, 이인영, 김양선 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 국문학자ㆍ국어학자ㆍ국사학자ㆍ기독교사가를 아우른 공동 기반은 고서 수집이다 … 경성제대에서 가장 먼저 조선어문학을 전공했고 조선어문학회의 좌장이라 할 조윤제는 언론에 〈고서왕래〉를 연재할 정도로 전문적인 고서 수집가였다 ..  (204, 207, 216쪽)


 인문학 연구책인 《고서점의 문화사》는 ‘읽는 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느낍니다. 우리네 ‘옛책(고서) 다루는 가게’ 가운데 몇 군데를 살포시 짚어 보는 가운데, 소설책 한 권에 나타나는 ‘3대 헌책방 발자취’를 아주 살짝 ‘독후감 쓰듯’ 짚으면서 끝맺습니다. 처음부터 “헌책방 문화사”까지 아닌 “고서점 문화사”로만 못을 박은 탓인지 모르나, 우리 둘레에는 짧으면 서너 해, 길면 예순 해 가까이 헌책방 살림을 꾸린 분들이 아직 많이 살아 있고, 현장에서 땀흘리고 있습니다.

 대구에는 1951년부터 헌책방을 꾸린 할아버지가 오늘도 부지런히 땀을 흘리고 있고, 인천에도 1951∼52년에 ‘길바닥 헌책방’부터 해서 이제는 번듯한 가게를 꾸린 할아버지가 여러 분 살아 있으면서 현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부산 보수동 1세대로서 오래도록 그 골목을 지켜 오던 할아버지 한 분은 지난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 《고서점의 문화사》는 얼마든지 이러저러한 분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더 살피고 더 헤아렸다면, 테두리를 ‘고서점’으로만 맞추어 놓았다고 해도, 딱딱한 논문을 넘어설 책으로 꽃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딱딱한 논문이라 할지라도 줄거리가 한결 넉넉한 열매를 맺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또한 듭니다. 그리고, ‘책 수집가 이야기’에서도 몇몇 이름난 분들에서 머물기보다, 또 일제강점기 무렵 지식인한테만 머물기보다, 우리 둘레 가까운 곳을 좀더 차근차근 바라보거나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이 책 《고서점의 문화사》는 한결 넉넉하고 아름다울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고서점’이든 ‘헌책방’이든 ‘사라진 옛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서점이 되든 헌책방이 되든 오늘날에도 어엿하게 있는 곳이며, 어제도 오늘도 앞날도 바삐 땀흘려 일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날에도 뻘뻘 땀을 흘리며 애쓰는 사람들 발자취와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는 역사라 한다면, 이 무더운 여름날까지 기나긴 세월을 땀흘려 온 사람들 숨결과 손길을 담아낼 수 없는 문화라 한다면, 우리는 책을 왜 읽고 쓰고 나누어야 할까요. (4342.7.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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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혁명
존 맨 지음, 남경태 옮김 / 예지(Wisdom)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책표지는 엉뚱한 녀석이 뜨네? -_-;;;;;) 

 



 직지심경을 ‘혁명’으로 삼지 않았으니 대한뉴스 따위가
 [잠깐 읽기 42] 존 맨, 《구텐베르크 혁명》



- 책이름 : 구텐베르크 혁명
- 글 : 존 맨
- 옮긴이 : 남경태
- 펴낸곳 : 예지 (2003.2.5.)
- 책값 : 14500원


 (1) 우리한테는 어떤 책이 있는가


 헌책방을 다니면서 놀랄 때가 더러 있습니다. 1970∼80년대에 나온 책인데, 그때 그 책에 붙은 값이 그때 여느 노동자 여러 달 일삯이 될 만큼 비싼 녀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툼한 사전이라면 그럴 수 있다지만, 그리 두툼하지 않으며 사전 아닌 학술책임에도 대단히 높은 값을 붙인 책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책은 요즈음에도 있습니다. 그만큼 값어치가 있고 뜻이 있다 하여 5만 원이니 7만 원이니 10만 원이니 15만 원이니 37만 원이니 하고 책값이 붙는데, 스무 해쯤 앞서인가 어느 분은 150만 원짜리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헌책방을 다니면서 새롭게 놀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손바닥책을 보면서 놀라는데, 자그마치 1000쪽이 넘는 손바닥책을 펴내는데, 무게도 가볍고 펼쳐 읽기에도 좋으며, 알맹이도 야무졌습니다. 글씨는 작지만 읽으면서 눈이 아프지 않았고, 게다가 이 1000쪽이 넘는 손바닥책은 ‘사진 문고’였습니다.


.. 그 전까지 성서는 수도사들이 양피지에 필사하고 온갖 화려한 장식을 붙여 만드는 상당한 고급품이었다. 게다가 양피지의 재료값과 보통 한 달 이상이 걸리는 제작 공정을 감안하면 양피지본 성서는 일반인들이 구입하기 어려운 사치재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아무리 위클리프와 후스가 “성서로 돌아가자”고 외친들 제대로 먹혀들기 어려웠다. 최소한 서민들의 가정마다 성서가 비치되어 있어야 성서로 돌아가든 말든 할 게 아닌가? 따라서 민중은 여전히 교회가 해석하는(또는 곡해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쇄술로 인해 성서가 대량으로, 값싸게 출판된 것은 종교개혁의 필수적인 배경이었던 것이다 ..  (8쪽/옮긴이 말)


 범우사에서 ‘범우문고’를 1000원이나 2000원에 판 때는 그리 오래된 옛날이 아닙니다. 내로라하는 지식인마다 ‘삼중당문고’를 보며 자랐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삼중당문고가 아니었어도 뜻깊고 알차며 값싸고 야물딱진 손바닥책은 참으로 많았습니다.

 얼마 앞서 빈센트 반 고흐 편지를 추려모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아트박스,2009)가 새롭게 나왔는데, 800쪽짜리 26000원인 이 책을 보면서 지난날 정음사에서 ‘정음문고’로 낸 작고 가벼운 손바닥책이 떠올랐습니다. 비록 1970년대 정음문고에는 반 고흐 편지가 더 많이 실리지 않았습니다만, 1970년대 사람들은 이 작고 야무진 책을 단돈 몇 백 원으로 장만할 수 있었고, 나라안 헌책방에서도 2000년이 될 무렵까지 500원이나 1000원이면 ‘반 고흐를 만나고 새길 수 있었’습니다.

 《창가의 토토》 같은 책은 요즈음 새책 한 권 값이 8800원이니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처음 펴낸 일본에서는 겉을 딱딱하고 두꺼운 판으로 댄 양장본도 있으나 훨씬 작고 조촐한 판으로 된 값싼 손바닥책을 함께 펴냈습니다. 일본에서는 웬만한 책들은 ‘작고 조촐하고 알차고 값싼’ 판으로 엮어내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아이들 그림책은 으레 두꺼운 판을 대어 ‘접히거나 구겨지거나 찢어지지 않게끔’ 해 주고 있는데, 일본이나 서양에서는 꼭 ‘두꺼운 판 대기’만을 하지 않습니다. ‘두꺼운 판이 아닌 여느 두꺼운 종이(여느 도화지보다 조금 두꺼운)를 쓴’ 가볍고 값싼 책도 곧잘 펴냅니다. 《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라는 그림책은 처음에 이렇게 ‘두꺼운 종이 하나로만 살짝 댄 판’으로 나왔다고 떠오릅니다.


.. 1400년경에는 현대적 개념의 과학적, 역사적 진리란 존재할 수 없었다. 문헌의 양이 사막의 꽃처럼 드물었을 뿐더러 설사 있다 해도 평생 동안 찾아다녀야 겨우 하나 건질까 말까 한 정도였기 대문이다. 유일하게 참된 진리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뿐이었다. 교회는 마치 빅 브러더처럼 (문헌을 다루는) 필경사와 (구술을 다루는) 사제, 그리고 둘 다에 관련된 예술가를 이용하여 매체를 통제했다. 교회는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부유해졌으나, 부와 특권에 부수되게 마련인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  (61쪽)


 ‘공정여행 가이드북’이라는 작은이름이 붙은 《희망을 여행하라》(소나무,2009)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456쪽에 이르는 무지개빛 사진 가득 담긴 이 책은 16000원이 붙습니다. ‘안데스 음악을 찾아서’라는 작은이름이 붙은 《영혼을 빗질하는 소리》(천권의책,2009)도 읽고 있습니다. 339쪽에 이르고 판은 조금 작고 글도 얼마 안 실려 있으나 책값은 15000원이 붙습니다.

 책값이 싸다고 착하거나 좋은 책이 아닙니다. 책값이 비싸다고 나쁜 책이거나 못된 책이 아닙니다. 다만, 책 하나 만들면서 어떤 종이를 어떻게 쓰고, 글은 빈자리를 얼마나 두면서 엮어내어 보여주려 하느냐를 헤아릴 노릇입니다. 종이 무게에 따라 종이값이 달라지고, 종이값이 달라지면 으레 책값이 달라집니다. 빛깔있는 사진을 넣으면 인쇄값이 높아집니다만, 부수를 적게 하면 인쇄단가가 높은 셈이라 책값을 낮게 매기기 어렵습니다. 1000권을 찍을 때하고 1만 권을 찍을 때하고 인쇄단가가 사뭇 다르기에, 책 하나에 붙는 값도 벌어집니다.

 그러나, 책이 가볍고 예쁘장하며 값까지 싸다고 하여도, 속에 담은 알맹이가 여물지 못했으면 눈길이나 손길이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겉꾸밈이 훌륭하다 하여도, 훌륭히 꾸민 겉싸개가 안고 있는 알맹이가 흐물흐물하거나 곪아터져 있다면, ‘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렵습니다. 한낱 ‘종이뭉치’입니다.

 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찍혀 나오더라도 신문 노릇을 하지 않을 때에는 신문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교사라는 이름으로 학생들 앞에 서더라도 교사 노릇을 하지 않을 때에는 교사라 하기 어렵습니다. 책이 책 노릇을 할 때라야 비로소 책 값어치가 있습니다. 책으로서 값어치가 있을 때에는 조금 비싸더라도 즐겁게 장만할 수 있으며, 값어치가 있으면서 눅은 값이라 하면 한결 고맙게 마련할 수 있는 대목이 다릅니다.


.. 아르보가스트 수도원 근처에서 구텐베르크는 무슨 일을 했을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는 돈을 벌고 싶었고, 그것도 많이 벌고 싶었다 … 하지만 이제는 실질적인 최종 생산물, 즉 책이 있어야 한다. 그만한 경비와 노력을 기울이고 채무까지 떠안은 판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 그는 베스트셀러가 필요했고, 그것도 가능한 한 여러 권이 있어야 했다. 아직 성서는 상업적 가능성이 명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교회와 성직자들을 감안하여 성서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다 … 신학자와 성직자들은 교리를 수호하는 역할을 통해 권위와 더불어 막대한 수입도 올렸다. 성서를 널리 보급해야 한다는 생각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같은 소수의 사람들만 품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특히 구텐베르크의 기본 시장이 되어 줄 학생과 교사들-은 성서가 없었으며, 필사본이든 인쇄본이든 성서를 구입할 만한 재정적 여유도 없었다 ..  (90, 194∼195쪽)


 그러면 우리 나라에는 어떤 책이 있을까요. 우리 나라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책마다 어떤 알맹이를 넣어 꾸미고 있을까요. 책을 만들고 팔아 번 돈은 책 만들기에 얼마나 다시 돌아가도록 얼거리를 짜 놓고 있는가요. 흔한 말로, 책 팔아 번 돈으로 땅 사고 빌딩 사고 있지는 않습니까. 책 팔아 거둔 돈으로 음료수 만들고 정수기와 비데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책 팔아 번 돈으로 교재 만들어 더 커다란 돈을 긁어모으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책을 쓰는 사람들 땀방울, 책을 엮는 사람들 품, 책을 사읽는 사람들 주머니와 겨를을 온통 빼앗거나 내동댕이치는 쪽으로 흐르는 오늘날 우리 책문화가 아닌지 궁금합니다.


.. 1450년까지도 면죄부는 교회가 기금을 모집하는 좋은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  (209쪽)


 무엇보다도,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이 ‘교과서 아닌 책’을 들여다볼 틈을 내주지 않는 매무새와 흐름이 걱정스럽습니다.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 어른과 키우는 어른이 당신 아이들한테 스스로 ‘교과서 아닌 책’을 읽도록 책을 베풀거나 말미를 마련해 줄 생각은 아예 없지 않느냐 싶어 근심스럽습니다. 가까스로 입시지옥에서 벗어났어도 ‘책다운 책’을 알아가도록 아이들을 풀어놓지 않고서 ‘새로운 돈벌이 굴레’에 허덕이도록 내몰면서 바보처럼 살도록 밀어내지는 않느냐 싶어 가슴이 저밉니다.


 (2) 직지심경은 ‘혁명’이 못 되었으나 구텐베르크는 ‘혁명’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고 하는 《직지심경(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는 책이 우리 나라에서 1377년에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우리네 옛 역사가 얼마나 거룩하고 대단했는가를 들면서 《직지심경》이며 온갖 ‘옛 활자본’을 이야기하고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서양에서는 《직지심경》을 그리 대단하게 높이거나 받들지 않는 듯 보입니다. 햇수로 치면 《직지심경》이 훨씬 앞서는 금속활자본이라 할 만하지만, ‘맨 처음’이라는 대목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구벤베르크가 했던 성경 찍기는 서양에서 ‘종교개혁’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 뜯어고치기’를 이룬 발판이 되었지만, 우리 나라에서 나온 《직지심경》은 여느 사람들 삶하고는 아주 동떨어진 채 ‘조용히’ 이루어졌거든요.


.. 그런데 왜 동양에서는 그 인쇄술이 꽃을 피우지 못했을까? 왜 동양에서는 인쇄술을 바탕으로 ‘출판사’들이 곳곳에 세워지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민간 부문이 발달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관에서 독점하던 동양 역사의 특유한 성격 때문이다. 지배층의 관점에서, 서적이란 일반 백성이 보는 게 아니었다. 그랬기에 동양에서는 인쇄술이 개발되었어도 ‘장서용’ 역사서나 몇 부 찍어서 서고(사고)에 보관하는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지식은 생산의 측면에 못지않게 보급의 측면이 중요하다.지식의 대중화는 지식의 재생산과 업그레이드를 가능케 할 뿐더러, 지식을 독점하고 대중과의 의사소통을 차단함으로써 권력을 누리는 지식 권력체가 등장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이다 ..  (10쪽/옮긴이 말)


 교과서에 몇 줄로 짤막하게 ‘종교개혁’을 했다는 사람으로 나와 있는 ‘루터’라는 사람은, “교황은 면죄부 판매상들의 탐욕과 부정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성 베드로 대성당이 신도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355쪽)” 같은 말을 책으로 찍어서 사람들한테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루터가 이런 말을 했는지, 또 다른 어떤 말을 했는지 잘 모릅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세계사 교과서로는 이러한 이야기를 알 수 없었습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며 찾아낸 ‘루터 평전’이 두어 가지 있는데, 이런 책을 읽었을 때 비로소 이와 같은 대목을 헤아릴 수 있었으나, 학교 교과서 교육으로는 오직 한 마디 ‘종교개혁’이라는 말마디만 듣고 배웠을 뿐입니다.


.. 인쇄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를 확산시켰다. 예전에는 지배자들이 추종자들에게 말하거나, 법률가들이 법정에서 말하면 그들의 말은 문자 기록으로 남았다. 학자의 저작이나 성현의 가르침과는 달리 민간의 문학 작품이 글로 남게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거기에 단테의 《신곡》,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 피콜로미니의 《두 연인의 이야기》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어디서나 라틴어가 아니라 자국어로 설득력 있게 말할 수만 있다면, 다른 어느 누구-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첵에서가 아니면) 그런 적이 없었다. 이제 새로운 양식이 발명되었다 … 인쇄술이 남긴 중요한 결과들 중 한 가지는 인간의 행위와 지식의 거의 모든 측면을 범주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점이다 ..  (339, 341쪽)


 우리 나라는 인터넷이 집집마다 들어서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셈틀 한 대쯤 없는 집은 없다고 할 만합니다. 텔레비전 안 키우는 집이란 몹시 드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온나라 사람이 낱낱이 꿰고 있지는 않으나, 신문이나 방송에서 날마다 떠도는 소식과 정보로 우리 머리와 눈과 귀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갖 소식과 정보를 듣고 얻을 문은 있되, 우리 스스로 온갖 소식과 정보를 일구어 나눌 자리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며칠 앞서 정부에서는 ‘극장판 대한뉴스’를 되살려 내었습니다. 극장에서 틀어 주는 대한뉴스란 지난날 독재정권이 일삼던 ‘땡전뉴스’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사람들한테 세금을 거두어들여 허튼 짓을 하면서 이 허튼 짓이 허튼 짓이 아닌 듯 보이도록 하려는 몸짓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에 제국주의자들이 천황한테 예의를 지키라 했고, 해방 뒤 독재정권이 나라님 앞에 예의를 지키라 했듯(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 대한뉴스나 땡전뉴스는 이러한 소식과 정보를 내보이면서 ‘이런 이야기도 있으니 한번 들어 보라’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참이니까, 다른 데에 귀기울이지 말고 고스란히 믿고 따르기만 하라’는 억누름입니다.

 국가보안법으로 우리 넋과 얼과 말과 몸짓을 옭죄는 이 나라는, 대한뉴스라고 하는 허수아비 시늉을 선보이면서 우리네 슬프고 안타까운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준다고 할까요. 자유롭고 너른 생각과 뜻을 나누려는 ‘개혁’을 꿈꾸며 책을 찍고 인쇄술을 발돋움시킨 한국이 아니었던 지난날 발자국처럼, 오늘날에 와서도 자유롭고 너른 생각과 뜻을 북돋우고 이끌어 내려고는 꿈꾸지 못하는 어줍잖고 어리숙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할까요.


.. 틴들의 《신약성서》는 최대한 가격을 낮게 책정했기 때문에 높은 수익을 노리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필사본 성서의 가격이 30파운드 이상이었을 때-당시 노동자의 연가 수입은 겨우 2파운드였다-, 틴들의 《신약성서》는 소매 가격이 4실링(20펜스)이었고, 때로는 더 낮았다 … 당시 가톨릭에서 신교로 향하는 고통스럽고 피비린내나는 이행을 겪고 있었던 잉글랜드에서 틴들은 결과적으로 큰 기여를 한 셈이었다. 그가 영어의 봇물을 터뜨린 덕분에 수십 년 뒤에는 셰익스피어와 흠정영역성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틴들은 일상어를 사용해서 성서를 번역했다는 점에서 잉글랜드의 루터였다. 그는 “소박한 모국어로 된 성서를 눈앞에 놓아 주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회의하는 어느 성직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래 전에, 나는 쟁기를 가는 소년을 가르쳐, 당신보다 성서에 관해 더 많이 알도록 만든 적도 있었소!” ..  (376, 378쪽)


 대한뉴스 이야기를 한 마디 보태 본다면, ㅈ일보 어느 기자는 “아직도 우리는 대한뉴스를 보면서 웃어줄 여유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혹시 대한뉴스가 자신의 사상을 지배하게 될까봐 그래서 두려운 것은 아닐까? 그렇게도 자신의 사상에 대해서 자신이 없는건가?” 하고 묻습니다.

 이렇게 묻는 일은 잘못이 아닙니다. 대한뉴스를 옳게 여기고 기쁘게 받아들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뉴스란, ‘극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즐겁게 볼 권리를 빼앗’습니다. 더구나,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느니 마느니에 앞서 우리들한테 ‘보여주어도 되느냐?’ 하고 묻지 않았으며, 보여준다고 할 때에도 어떤 이야기를 누가 엮고 짜서 보여주려고 하는가를 묻지 않았고, 열린 자리에서 옳고 그름을 똑똑히 듣거나 살피지 않았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버젓이 이루어지는 ‘허울좋은’ 자율학습과 보충수업하고 매한가지인 대한뉴스이고 국가보안법입니다. 자율로 이루어지지 않는 자율학습처럼, 대한민국 이야기라 할 수 없는 대한뉴스입니다. 보충을 하려고 하는 보충수업이 아니듯, 국가를 보안한다는 뜻이 아닌 국가보안법입니다. 예나 이제나 수없이 많은 일들이 ‘나라사랑(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여집니다. 날마다 숱한 일들이 ‘공익’이라는 이름을 걸고 펼쳐집니다.

 《구텐베르크 혁명》을 쓴 존 맨 님은 책을 마무리할 즈음, “금지된다는 것은 일종의 추천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흠을 잡기는 쉽다. 검열관은 원래 세계 어디서나 욕설과 조롱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다(38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나라 정부나 군대에서 아직까지 ‘불온도서-금지도서 목록’을 만들어 내놓는 일과 마찬가지로, 1400년대까지 서양 교회에서는 ‘불온하니 금지할 책이 이렇게 있다’고 알리곤 했고, 그 뒤로도 끝없이 알리고 있습니다.


.. 군주와 의회는 더 이상 글을 아는 사람에게 자신들의 통치 행위를 숨길 수 없었고, 자신들이나 후손들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  (344쪽)


 굳이 ㅈ일보 기자 말이 아니더라도 ‘대한뉴스를 수없이 틀어대어도 정부가 잘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잘하는 줄 깨닫고, 잘못하고 있으면 잘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웃으면서 너그럽게 보아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ㅈㅈㄷ이라고 하는 신문들을 얼마든지 ‘웃으면서 너그러이 펼쳐들’ 수 있고, 경품권을 기쁘게 받아들면서 집에서 신문 한 부 받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합니다. 이런 일은 ‘옳은’ 일인가요? 이런 일은 ‘바른’ 삶인가요? 대한뉴스를 보면서 웃어 주자고 하는 ㅈ일보 기자님은 ‘ㅈㅈㄷ이라는 신문을 꾸짖고 나무라는 사람들 목소리’를 고개를 끄덕이면서 받아들이거나 하하 웃으면서 보아넘기고 있으신지요?

 ㅈㅈㄷ이든 다른 신문이든, 또 인터넷이든 방송이든, 옳은 일은 옳게 해야 하고, 옳지 못한 일은 옳지 못한 일이었음을 느끼도록 꾸짖음을 듣고는 차근차근 고쳐 나가야 합니다. 《구텐베르크 혁명》이라는 책에도 이야기가 나오지만, “글을 아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통치 행위를 숨길 수 없”으니까요. 나라에서는 사람들을 더 바보로 가는 길로 내몰고, 너른 터를 빼앗으며, 비정규직으로 몰아세우지만, 이렇게 내몰리고 빼앗기고 몰아세워진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바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박물관 유적이 되어 유리진열대 안에 놓이거나, 역사책에 적혀 시험문제 풀이로 외워야 하는 ‘직지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삶을 옳고 바른 쪽으로 고쳐 나가도록 돕는 ‘책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고 사랑을 쏟고 싶고 믿음을 함께하고 싶어할 테니까요. (4342.6.2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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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 - 책 읽고, 놀고, 대학도 가고, 일석삼조 독서토론기
조원진.김양우 지음 / 삼인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책읽고 대학 갔다가, 책만 들고 대학 관두고
 [잠깐 읽기 37] 조원진+김양우,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



- 책이름 :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
- 글 : 조원진, 김양우
- 펴낸곳 : 삼인 (2009.4.20.)
- 책값 : 11000원


 (1) 책읽기와 대학교 가기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는 고등학생이던 때, 학교나 학원 동무인 여러 아이들이 ‘책을 읽고 느낌을 이야기로 나누자’는 데에 뜻을 맞추면서 열다섯 차례에 걸쳐 ‘독서토론’을 해 온 발자국을 담아낸 책입니다.

 따로 학교에서 교사가 이끌지 않은 ‘책읽기모임’이었고, 학교에서 학생들이 꾸역꾸역 몰려든 동아리가 아닌 ‘책읽고 나누는 모임’이었습니다. 다만, 아이들은 열다섯 차례뿐 아니라 서른 차례이든 쉰 차례이든 얼마든지 ‘책읽고 나누고 함께하는 모임’으로 꾸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또는 마땅하게도 ‘책읽기모임’은 ‘논술모임’으로 바뀌었고, 아이들 스스로도 이렇게 가야 한다고 그럭저럭 느끼거나 받아들였습니다. 열다섯 차례에 걸쳐 스스로 모임을 꾸려 나가던 어느 날, 아이들한테 가뭄에 단비처럼 모임을 도와준 ‘어른’이 나타났거든요.


.. 사실 《제3의 물결》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우리 모임이 수준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이 책으로 토론을 하면서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 어려운 책만이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 항상 내 관점만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독서토론을 하면서는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친구들과 서로 다른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법도 배웠다 ..  (32, 56쪽)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도움이 어른’은 아이들한테 더없이 좋은 길동무였을는지, 그지없이 반가운 이슬떨이였을는지.

 언제나 받아들이기 나름이므로, 아이들 스스로 기쁘게 받아들이고 즐거이 함께하려 했다면 도움이 어른은 좋은 사람이고 고마운 길잡이입니다. 더구나, 아이들은 ‘책읽기모임’을, 티없는 마음으로 책을 사랑하는 줄기를 내 삶을 사랑하는 줄기로 잇자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책읽기모임’을 하면서 ‘다가오는 대학입시에서 논술시험 대비도 잘할 수 있어 괜찮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스스로 도움이 어른을 바랄밖에 없었고, 스스로 얼마든지 ‘책읽기모임’을 꾸려 나갈 수 있었고, 또 열다섯 차례 꾸려 나가기까지 했지만, 스스로 이루어 온 열매와 보람에 어떤 뜻과 값이 담겨 있는가를 더 깊이 곰삭이고 깨닫고 되뇌기보다는, 가볍게 ‘대학교 잘 붙기’ 쪽으로 갑작스레 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 토론이 진행될수록 저마다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게 됐다는 거다. 처음 멋모르고 독서토론을 시작할 때는 무서울 게 없었다. 어떤 개념을 모른다든지 지식이 부족하다는 데 부끄러움이 전혀 없었고, 엉터리 같은 말이라고 거침없이 내뱉었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무지하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토론도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보다는 주제에 대한 발표 위주로 진행되었다 ..  (106쪽)


 딱하다면 딱한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를 쓰고 함께한 아이들만 딱한 노릇이 아닙니다. 그나마 이렇게 ‘책읽기모임’이라도 해 보겠다면서 ‘입시에 옴쭉달싹 못하도록 매인 껍질’을 벗어던지려고 하는 몸부림조차 안 하는 아이들이 거의 모두이니까요.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고, 그예 억누르는 틀에 맞춰 지내면서, 몰래몰래 ‘어른들 하는 짓’을 따라 담배도 태우고 술도 마시고 사랑놀이도 즐기면서 푸른날(청소년기)을 썩히고 있으니까요. 담배태우기와 술마시기와 사랑놀이가 나쁜 짓이 아니라, 왜 담배를 태우고 왜 술을 마시며 왜 사랑을 나누려 하는지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채, 그저 ‘어른 따라하기’로 치달을 뿐이니까요.

 학교에서는 시험만 잘 치르면 ‘착한 아이’가 됩니다. 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험을 잘 치르는 아이가 몹쓸 짓을 한다 해서 크게 꾸지람을 듣는 일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옆 짝꿍을 괴롭힌다든지 도둑질을 한다든지, 또는 청소 땡땡이를 친다든지 겉속이 다른 말을 한다든지, 애엄마나 늙어 힘든 사람을 뻔히 보면서도 안 돕는다든지, 새치기를 버젓이 한다든지, 쓰레기를 아무렇지 않게 버린다든지, 용돈이 넉넉해 군것질을 내키는 대로 한다든지, …… 타이르고 다독일 대목이 많다 하여도 ‘공부를 잘하는데요!’ 하면서 대충 얼버무리거나 잠자코 지나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시험성적이 좋은 아이는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어도, 이 아이를 때리는 교사는 몽둥이 세기가 달랐습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한테는 온힘을 다해 몽둥이질을 더 많이 했고, 공부 잘하는 아이한테는 살살 몽둥이질을 하는 데다가 몇 대 때리지도 않았습니다. 웬만한 잘못은 슬쩍 못 본 체하기도 했습니다. 담배 태우다 걸리는 동무들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뺨 한 대 맞고 풀려나는데, 공부 못하는 아이는 ‘너흰 임마, 수업 안 들어도 되잖아? 어차피 잘 텐데?’ 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동장 돌 줍기에다가 툭하면 발로 엉덩이 걷어찬다든지 하면서 갖은 모욕을 주면서 괴롭히기만 했습니다.


.. 논술공부를 한다는 것, 또는 그와 비슷하게 입시의 맥락에서 독서나 토론을 한다는 것은 사실 특정한 문화의 산물이었고, 그 문화는 정확히 말하면 중산층 가족의 것이었다 … 이렇게 ‘권력을 지닌’ 언어를 익히는 과정에서 다른 언어들 내지 하위주체의 언어들이 추방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  (193쪽)


 따지고 보면,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라는 책 하나까지 이루어 낸 아이들은 퍽 남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성적이 제법 잘 나오는 아이들인 가운데, 집안 형편도 썩 괜찮았던(그러나 아주 넉넉하지는 않은) 아이들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성적이 그럭저럭 어중간이었다면, 또 집안 형편도 그리 낫지 않았다면, 이 아이들 아빠 엄마 되는 분들께서 ‘그래, 너희가 좋은 생각을 하는구나. 잘해 보렴!’ 하면서 북돋워 주거나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치지 않았겠다고 느낍니다. 하물며 학교에서는 어떻겠습니까. 뭔가 ‘불량서클’을 ‘책읽기모임’이라는 이름을 입히면서 뻘짓거리 하지 않느냐고 눈을 번득이지 않겠습니까.

 그나마 ‘되는 아이’에다가 ‘있는 아이’라는 ‘타고난 재주’가 있으니, ‘책읽기모임’을 내걸면서 입시논술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오로지 대학교 가기만을 바라고 있고 내몰고 있고 밀어붙이고 있거든요. 제아무리 착하고 얌전하고 바르고 상냥한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시험성적은 젬병이라면 ‘저 병신!’ 하고 깎아내리는 교사요 부모요 어른입니다. ‘그래, 좋은 사람이구나!’ 하면서 어깨를 쓰다듬고 손을 맞잡아 주지 못하는 교사요 부모요 어른입니다.

 교사든 부모든 어른이든 아이들 스스로 ‘책읽기모임’을 하든 ‘야구모임’을 하든 ‘연극모임’을 하든 ‘인터넷게임모임’을 하든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거들 일은 거들면서 기쁨과 슬픔을 아이들이 온몸과 온마음으로 맞부딪칠 수 있게끔 부드러운 울타리가 되어 주지 않습니다. 어른들부터 돈에 매이고 이름에 팔리고 힘에 끄달리는 삶이거든요. 어른들부터 옳지 않게 살아가면서 아이들한테도 옳지 않은 삶을 ‘현실은 이러하니 어쩔 수 없더라’ 하는 핑계로 감추어 놓고 있거든요.


..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런 것들은 분명히 다른 사람과 함께 부대끼면서 배워 나가는 것임에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입시’가 가까워질수록 다른 삶들과 만날 기회는 점점 적어졌다 … 내가 어째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그런 것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  (210∼211쪽)


 이리하여,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는 조금도 대단한 책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라꼴이 이러하기 때문에 외려 대단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뒤죽박죽 엉키고 꼬이고 다투고 갈팡질팡하는 모습만 잔뜩 담긴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야말로 아이들 오늘날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힐 수밖에 없는 고등학교 삶자락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교육방송 교재’와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입시지옥 속알맹이를 더 깊이 파고들거나 파헤치는 눈썰미를 기르지 못해 겉핥기에 그치기는 했지만, 이렇게 겉모습이나마 핥으면서 잘잘못을 깨닫는 눈썰미를 스스로 길러내려고 한 아이들은 얼마나 있습니까. 교사나 부모가 시키는 교과서 외우기와 논술대비를 벗어나, 스스로 ‘참답게 알고 싶다’는 마음외침을 따르면서 손수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을 골라드는 아이는 이 나라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빈틈없이 나올 수 없던 책이요, 처음부터 허술함 가득한 채 이루어질 수밖에 없던 ‘책읽기모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빈틈많음과 허술함이야말로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를 읽는 즐거움입니다. 이렇게 깨지고 까이고 넘어진 발자국이야말로 ‘앞으로 중고등학생인 나이에 스스로 책읽기모임을 꾸려 나가는 좋은 앞사람 보기’가 되어 주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2) 왜 관두지 못할까


.. 토론이 잘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일이 모두에게 처음일뿐더러, 어려운 책을 고르는 바람에 모두가 읽는 것조차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토론을 해 본 경험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수업 시간에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아직도 60년대식 사고에 멈춰 있는 틀에 박힌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고, 모두에게 똑같은 것들을 암기시키는 식으로 수업을 한다. 우리는 그동안 10년을 학교에서 공부했으나 친구들과 함께 자유로운 토론을 해 본 일은 손에 꼽을 정도다 … 무조건 풀고 답을 적기만 강요했던 수학이, 암기만 죽어라 했던 역사가 진짜 공부일까? 아무리 흥미 있는 내용이라도 문제 풀기나 암기에 치중해 공부하면 따분하고 지루해진다. 학생들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공부를 피해 수능을 준비하는 것이다 ..  (36, 109쪽)


 고등학생 아이들 네다섯이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가며 책을 읽으려고 아득바득 애쓰는 모습을 책으로 읽으면서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제가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 나이였을 때에는 어떠했는가를 돌아봅니다.

 제가 책읽기에 눈을 뜬 때는 중학교 2년이고, 한 반에 《영웅문》을 교과서 뒤에 숨기고 읽는 녀석이 있었습니다. 이 책이 좋은 책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리고 제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느냐 마느냐를 떠나, 지루하고 따분하고 재미없고 쓸데없는 시험지식 외우기 수업이 골이 난 저로서는 딱히 할 일도 없어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나 하고 있었는데, 그 교과서 밑에 책을 감추어 놓고 읽는 모습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제 뒤통수를 그지없이 후려갈겼습니다. ‘수업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구나!’ 하고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뭐 마땅히 읽을 만한 책이 우리 집에 없었고, 학교에서 어디 빌려 주는 데도 없습니다. 그래도 기껏 읽는답시고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300원 주고 빌려서 읽었습니다. 그런 다음 중학교 3년 때에는 얇은 ‘빨간 책(시사영어사에서 펴낸 영한대역본)’을 한 권에 1000원에 사서 읽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고 고2로 올라선 무렵, 바야흐로 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제가 입시를 치를 1993년 가을부터 수학능력시험으로 바뀐 틀에 맞추어야 했고, 제 또래는 수능뿐 아니라 논술도 맨 처음으로 치르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나중에 논술시험은 몇몇 대학교에서만 치르는 틀로 다시 달라졌습니다). 갈팡질팡 입시제도 때문에 갈피를 잡기 어려웠지만, 저로서는 한 가지 빛줄기를 보았으니, ‘외워서 잘 쓰는 시험문제 풀이에서 벗어나, 교과서 아닌 책도 읽고 생각하는 테두리를 넓힌다’고 하는 입시방침이라고 밝힌 대목입니다. 그래서, 중학교 2년 때부터 하던 ‘교과서 아닌 책’ 읽기를 마음놓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논술시험을 준비해야 했기에, 제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딱 두 사람만 ‘대학 독일어 논술시험’을 따로 준비해야 했는데, 학교에서는 ‘두 사람한테만 가르치자고 독일어 수업을 할 수 없다(그러나 우리 학교는 제2외국어로 버젓이 독일어를 가르쳤고, 수업도 한 주에 두 번 있었으나, 1학년 때에만 수업을 하고, 그 뒤 이태 동안은 국영수 보충수업과 다름없이 해 버렸습니다)’고 밝히며 우리 둘보고 학원에 가서 배우라고 내밀었습니다.

 대단히 엉뚱한 학교입니다만, 전교조도 없던(이제 막 꿈틀거리던) 때에 무슨 수업권이 있겠습니까. 하는 수 없이 인천에서 독일어를 어디에서 가르치느냐 알아보니 딱 한 군데 있었고, 그나마 그 학원에서도 독일어 수업은 고작 일곱 사람만 들었습니다. 학원강사는 당신 스스로도 우리를 가르치기 쉽지 않음을 느꼈을 텐데, ‘학교에서 안 가르치는 독일어를 기본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니, 알맞춤한 교재가 딱히 없어, 당신이 예전부터 쓰던 교재를 장만해 오라 했는데, 그 교재는 인천 시내 어느 책방에서도 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울까지 마실을 가서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도 갔으나 그곳에서조차 팔지 않았습니다. 일찌감치 판이 끊어졌더군요. 빈손으로 학원으로 가니, 학원강사는 우리 두 사람한테 ‘헌책방에는 갔느냐?’고 물었고, 안 가 보았다 하니, 헌책방도 안 가 보고 없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줄곧 입시에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아끼려고 발버둥쳤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공부해서 숨막히는 경쟁에서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잃는 게 많았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못하면서,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소홀히 하면서 입시에만 매진하다 보니, 내 삶에서 내가 없어졌던 것이다 … 이 시대와 절대 발맞추지 않으려는 듯한 꽉 막힌 이야기도 (교과서에) 많이 실려 있어 공부하기가 무척 괴로웠다. 고리타분하고 뻔한 내용이어서 흥미가 일지도 않고 공부할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 뛰어난 인재들을 동원하면서도, 내용을 시대에 맞춰 더 개정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교과서를 무조건 암기하게 한다는 것이다 … 교실에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이 금기시된 듯한 느낌이었다 ..  (47, 92∼93쪽)


 이리하여 토요일 보충수업이 끝난 세 시 반에 부리나케 인천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골목으로 갔고, 이곳에서 세 시간 남짓 뒤진 끝에 꼭 두 권을 찾아냈습니다. ‘있구나, 있어!’ 하면서 기뻐하는 가운데 책값을 치렀고, 책값을 치르고 나오려는데 책방 뒤쪽이 궁금해 슬쩍 돌아보다가, 헌책방에 ‘교과서와 교재 아닌 책’도 많이 갖추고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판이 끊어진 독일어 교재 하나 찾아낸 일은 기뻤지만, 이 기쁨을 잠재울 만큼 ‘뭐야? 헌책방은 이런 곳이었나? 난 이런 헌책방에서 고작 판끊어진 교재나부랭이나 찾는답시고 몇 시간을 헛되이 버렸나?’ 하고 생각하며 부끄러웠습니다.

 이날부터 제 책읽기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제 책읽기뿐 아니라 책을 읽는 매무새도 바뀌었고, 책을 읽으며 바라보는 세상도 바뀌었습니다. 여느 새책방에는 꽂혀 있지 않던 책을 헌책방에서 잔뜩 만났고, 교재와 부교재에는 대충 이름만 걸쳐 놓던 ‘시인과 소설가 작품집’이 얌전하게 꽂혀 있어 들뜬 마음으로 하나둘 장만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좋고 나쁨을 떠나, 통으로 책 하나를 살피면서 앞사람들 넋과 얼을 돌아보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ㄱ대학교 한국사학과를 꿈꾸면서, 고등학교 3년 때에는 일찌감치 그 ㄱ대학교 역사학과에서 교재로 삼는 역사책을 모두 읽어냈고, 그 대학교 교수들이 쓴 웬만한 역사책은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었습니다.


.. 생각해 보면 슬픈 일이다. 어째서 우리 나라의 많은 고등학생들은 스무 살이 가까워져서야 생각하기와 글쓰기를, 그것도 ‘입시를 위해서’라는 옹색한 이유로 해야만 하는 것일까 … 동시에 우리는 글쓰기 영역에서도 자유로운 글쓰기가 아닌 논술에 맞춘 글쓰기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조차 우리는 별 무리 없이 수긍했다. 대학에 가야 한다는 절박함은 어찌 보면 쉽게 생길 법한 고민들을 없애 버렸다 …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로부터 이를 극복할 전망을 발견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나조차 중고등학교 내내 공부를 잘했지만 말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에게는 늘 ‘사탕’이 주어진다 ..  (140, 147, 161쪽)


 1993년 입시에서 저는 제가 바라던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로 바라던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로 바라던 곳을 다니며, 대학교가 학문을 하는 곳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다쳤습니다. 내 학생증은 복학생이었다가 졸업까지 했어도 일자리를 못 얻고 도서관을 헤매는 선배한테 선물로 남기고 그 대학교를 관뒀습니다. 이럴 바에는 고등학교부터 관뒀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속이 아팠으나,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고등학교를 때려치운다’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일찌감치 그만두었으면 내 삶이며 생각이며 더 단단하고 슬기롭게 다스리지 않았겠느냐고 가슴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더 아름다운 제가 되었겠습니다마는, 얄궂고 어줍잖은 길을 어느 만큼 걷기도 한 탓에, 얄궂고 어줍잖은 길에서도 아픈 이웃이 있으며 아픈 이웃을 돕는 길을 생각할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거꾸로, 얄궂고 어줍잖은 길을 안 걸으면서 더 크고 너른 아름다움을 나눌 길을 찾았을 수 있는데, 스스로 잘잘못하고 맨몸으로 부딪히면서 까이고 차이고 넘어지고 얻어맞고 쫓겨나고 밟히고 하던 하루이틀이 제 몸을 한결 단단하게 갈고닦는 밑거름은 아니었을까 싶으며 고맙게 받아들입니다.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를 덮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이만큼 생각밭을 일구는 매무새라 한다면, 이 아이들 스스로 제 기득권을 얼마든지 내버리면서 아이들 꿈과 뜻에 튼튼한 날개를 달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대안학교도 많고 뜻있는 괜찮은 대안학교 교사도 많은 요즈음은 얼마든지 “책의 바다에 빠지는 노란잠수함”이 더 즐겁고 신나게 바다밑을 넘나들고 누빌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찌감치 ‘입시를 관두지 않았’고, ‘시험성적이라는 기득권을 더 꼭 움켜쥐었’기 때문에 이렇게 책 하나로 갈무리하는 아이들 푸른날을 남길 수 있었으며, 이 푸른날을 발판으로 삼아 아이들 스스로 ‘곧바른 지식인으로 걸어갈 길’을 차근차근 다지지 않겠느냐 싶기도 합니다. ‘노란잠수함’ 아이들은 아직 제대로 까이지 않았거든요. 남김없이 밟히고 짓이겨지고 차이고 밀리고 쫓겨나고 들볶이지 않았거든요. 이제부터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부딪히면서 까이고 아파하고 밟히고 슬퍼하고 차이고 괴로워하며 쫓겨나고 고달픈 가운데, 세상 살아가는 보람을 저마다 다르게 붙안지 않겠느냐 믿어 봅니다.

 저한테는 ‘책읽고 대학 갔다가, 책만 들고 대학 관둔’ 삶이지만, 이 아이들한테는 ‘대학 가려고 책읽고, 책도 들고 대학도 다니는’ 삶으로 일구면서, 이 나라에서 함께 어깨동무할 수 있다면, 이런 삶으로도 서로서로 반갑고 기쁠 수 있다고 믿어 봅니다. (4342.6.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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