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예가의 열두 달
까렐 차뻭 지음, 홍유선 옮김, 요제프 차뻭 그림 / 맑은소리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숲책 읽기 41



시골에서 지내는 열두 달

― 원예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 글

 홍유선 옮김

 맑은소리 펴냄, 2002.7.15.



  나는 카렐 차페크라는 사람을 잘 모릅니다. ‘로봇’이라는 말을 지었다 하고, 숱한 문학을 낳았다 하는데, 이도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이녁이 쓴 《원예가의 열두 달》이라는 책을 아주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장르 문학’을 하고, 1900년대 첫무렵에 체코에서 민주와 평화를 지키려고 온힘을 다해 싸웠다고 하는 카렐 차페크라는 분이 쓴 《원예가의 열두 달》은 그리 안 알려진 책이지 싶습니다. 새책방에서 아주 쉽게 사라졌거든요.  



.. 최상품의 잔디씨에서 어떻게 이런 가시투성이의 잡초가 자라는 것일까. 바로 이 점이 자연의 신비다 … 1월의 식물이라면,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창유리에 피는 얼음꽃이 있다 … 얼음꽃은 부잣집보다 가난한 집에서 더욱 화려하고 아름답게 피어난다. 부잣집의 창문에는 빈틈이 없기 때문이다 … 사나운 소리를 내며 세차게 퍼붓던 비가 그물을 끌어당기듯 갑자기 멈추면, 대지는 은빛으로 화려하며 쾌활해지고, 덤불 속에서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신나게 노래한다 ..  (10, 23, 104쪽)



  《원예가의 열두 달》은 열두 달로 한 해를 나누어 ‘원예가’라는 사람이 겪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책은 ‘원예가’라는 사람을 내세워 이야기를 엮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글쓴이’가 몸소 겪은 이야기에 살을 입혀 들려주는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카렐 차페크 님이 텃밭이나 앞뜰이나 꽃밭을 일구면서 겪은 일에 ‘웃음’을 살포시 얹어서 지은 이야기로구나 싶어요.


  처음에는 신나게 밭을 일구어 온갖 남새를 얻는다고 해요. 그런데, 밭에서 얻은 남새에 이내 다들 시들해진다고 합니다. 날마다 똑같은 풀만 먹어야 하니 식구들이 진저리를 친다고 합니다. 이웃들도 똑같은 밭에서 똑같은 남새만 거두니 둘레에 선물할 곳도 없다고 합니다.


  밭을 일구면서 풀과 싸우는 이야기를 살짝 우스꽝스럽게 그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풀과 싸우더라도 이동안 새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을 수 있고, 여름이 무르익는 동안 풀벌레와 개구리가 이루는 노래잔치를 누릴 수 있으니까요.



.. 당신이 이렇게 흙과 씨름하고 있는 사이, 구즈베리와 서양까치밥나무 가지에 처음으로 작은 싹이 돋아난다. 나무에 싹이 돋은 것을 당신이 처음 보았을 때 봄은 이미 그곳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이다 … 모든 거름들은 흙이 부드럽고 따뜻해지도록 영양을 공급해 주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흙에 이용할 수 있거나 이용할 수 없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 자연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새순과 꽃망울과 싹은 자연계의 가장 위대한 기적이다 ..  (11, 40, 69쪽)



  흙을 지으려면 눈앞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심고 저것도 심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먹으면서 삶을 어떻게 지을 때에 즐거울까 하는 대목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나무도 심고 저 나무도 심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보금자리를 아름다운 숲으로 가꾸어서 언제나 즐겁게 철 따라 우리 몸을 살리는 열매를 얻을 만한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무가 앞으로 어느 만큼 클는지 살피고, 이 나무를 나중에 아이들이 물려받아 기쁘게 누릴 수 있는 얼거리를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심은 나무는 오늘 우리가 누릴 수 있지만, 오늘 우리보다도 우리 아이들한테 훨씬 사랑스럽고, 우리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이 나중에 더욱 사랑스럽게 누립니다.


  나무 한 그루는 즈믄 해를 내다보고 심습니다. 나무 두 그루는 뒷날 우리 아이들이 새롭게 지을 집을 톺아보면서 심습니다. 오백 해는 너끈히 버틸 튼튼한 집을 짓고 싶다면, 오백 살을 살아낼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삼백 해쯤 훌륭히 버틸 멋진 집을 짓고 싶다면, 삼백 살을 살아낼 나무를 심어야 해요.


  나무를 심고 풀을 돌보며 꽃을 마주하는 삶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는 사랑으로 보살피는 기쁨을 누리는 일입니다. 이러면서 아이들한테 삶을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면서 가르치는 일입니다.


  어른인 우리가 할 일은 사랑입니다. 아이들이 어른한테서 배울 대목은 사랑입니다. 책을 아이한테 읽혀 가르칠 삶이 아니라, 사랑을 아이한테 보여주면서 물려줄 삶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 가깝게 다가가서 보면, 원예가는 꽃을 만드는 게 아니라 흙을 만들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 자신의 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정말 질 좋은 흙이라고 감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 국화는 그저 피어 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기 때문이다. 꽃은 강인하다. 단지 인간만이 내리막길에서 나약한 소리를 낼 뿐이다. 차가워지는 가을바람에도 국화는 절대로 주저앉지 않는다 ..  (43, 167, 188쪽)



  《원예가의 열두 달》을 쓴 카렐 차페크 님은 두 손으로 흙을 만지고, 두 손으로 풀을 뜯으며, 두 손으로 나무를 보듬었기에 힘있고 따스하며 사랑스러운 글을 쓸 수 있었으리라 느낍니다. 이녁 스스로 흙을 가꾸면서 숲을 지키고 삶을 일구려는 마음이었기에, 이녁이 나고 자란 체코에 민주와 평화가 싹터서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넋이 되었으리라 느낍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글을 쓰는 이들도 밭을 일구고 숲을 돌볼 수 있기를 빌어요. 시나 소설을 쓰든, 초·중·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든, 오늘날 한국에서 글과 책을 만지는 이들은 누구나 흙을 늘 만지면서 보살피는 일을 함께 해야지 싶어요.


  흙을 안 마지고 지식과 글과 책으로만 ‘자연’과 ‘환경’을 읊으니, 4대강사업을 홍보하는 공무원 자리에 떡하니 앉는 짓을 일삼습니다. 지식과 글과 책으로만 ‘자연’과 ‘환경’을 다루는 이야기를 읽기만 하니, 막상 몸을 움직여 손수 삶을 짓는 길로 나아가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늘 풀을 먹습니다. 쌀이든 김치이든 모두 풀입니다. 돼지고기이든 소고기이든 닭고기이든, 모두 풀을 먹는 짐승한테서 얻은 살점입니다. 비록 오늘날 공장 축산업에서는 사료와 항생제와 촉진제만 먹인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뭍고기는 흙에서 자란 풀을 먹는 짐승이에요. 바다에서 낚는 물고기도 숲에서 흘러내려서 바다로 가는 흙이 있어야 영양분을 얻어 목숨을 이어요. 지구별에서 모든 목숨은 흙에서 비롯하고, 지구별에 있는 흙은 풀이 있어야 기름집니다. 이러한 얼거리를 올바로 깨닫고 슬기롭게 살필 때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길을 열 수 있습니다.



.. 노동을 한다면 좋아서 해야 할 것이다. 또는 기량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도 좋다. 결국은 살아가기 위해서 한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이념을 위해 장화를 만드는 것이라든가, 단지 이념을 위해 또는 도덕적인 동기에 의해 이루어지는 노동은 거의 무가치한 노동에 불과하다 … 관청의 창가에는 아무것도 피어 있지 않거나 빨강과 흰색의 제라늄만이 피어 있을 뿐이다 … 철도청 관리 아래서 식물은 가장 왕성하게 성장하며, 우체국과 전화국에서는 도무지 아무것도 피지 않는다 … 그 중에서도 세무서는 황폐해진 사막으로 표현하면 딱 알맞다 ..  (84, 138쪽)



  카렐 차페크 님이 쓴 다른 글이 궁금합니다. 손수 흙을 가꾸는 삶을 돌보면서 바라본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지구별 얼거리를 읽으면서 지구별을 아름답게 스스로 보듬는 길을 알아차린 이녁이 어떤 문학을 꽃피우면서 우리한테 기쁨을 베풀려 했는지 궁금합니다.


  《원예가의 열두 달》이라는 책에서 카렐 차페크 님이 밝히기도 하지만, “노동을 한다면 좋아서 해야” 합니다. 즐겁게 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생각하면서 해야 합니다. 웃고 노래하면서 일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럴 때에 온누리에는 민주와 평화가 싹틉니다. 즐거움도 웃음도 기쁨도 노래도 없다면, 이때에는 노예나 종이 되면서 굴레나 쳇바퀴나 톱니바퀴가 되어요. 전쟁무기를 만들고 군대를 세우는 이들은 즐거움도 기쁨도 모르는 바보입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을 일삼는 이들은 웃음도 노래도 모르는 얼간이입니다. 이들은 흙을 만진 적이 없을 뿐 아니라, 흙을 사랑하는 손길을 모릅니다. 나무를 심은 적 없기에 이웃을 해코지합니다. 풀을 손수 뜯어서 풀밥을 지은 적 없기에 동무를 못살게 굽니다.



.. 어떤 혁명도 싹이 트는 시기를 미룰 수는 없으며, 5월 이전에 라일락을 피울 수 없다. 즉, 영리한 인간이라면 지금껏 계속되어 온 법칙과 습관에 따르고 순종하게 된다 … 우리는 흔히 봄을 일러 싹을 품는 시기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을이 그렇다. 과연 자연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한 해의 주기는 분명 가을로 끝난다. 그러나 가을에 한 해가 시작된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 가을에 꽃이 시드는 것 역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꽃이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  (82, 206, 207쪽)



  정치나 경제를 뜯어고쳐야 나라가 살지 않습니다. 해마다 봄이 찾아와야 나라가 삽니다. 문화나 예술을 북돋아야 나라가 살지 않습니다. 여름에 들과 숲에 잎이 우거져야 나라가 삽니다. 교육과 복지를 키워야 나라가 살지 않습니다. 가을에 온갖 풀열매와 나무열매가 익어야 나라가 삽니다.


  발전소와 공장과 관광단지와 골프장과 고속도로 따위로는 나라를 살리지 못합니다. 들과 숲이 비로소 나라를 살립니다.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나라를 살리지 않습니다. 시골지기나 시골내기나 흙지기나 흙일꾼이 나라를 살립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나요? 학교에서 어른들은 무엇을 가르치나요? 사회에서 아이들은 무엇이 될 수 있나요? 사회에서 어른들은 무엇이 되는가요?


  시골에서 지내는 열두 달은 다달이 새로운 노래요 숨결입니다. 도시에서 지내는 열두 달은 다달이 똑같은 직업이고 월급입니다. 시골에서는 철마다 달마다 날마다 늘 다른 일을 합니다. 도시에서는 달력 숫자만 바뀔 뿐 하루 내내 똑같은 몸짓을 되풀이합니다.


  가을에 가을바람을 쐬면서 가을하늘을 누리는 사람이 싱그러이 웃습니다. 겨울에 두툼하게 옷을 입고 눈을 뭉치면서 노는 아이가 해맑게 노래합니다. 봄에 두꺼운 옷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들을 누비는 사람이 신나게 뛰어놉니다.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들딸기와 멧딸기를 훑는 사람이 기쁘게 사랑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일로 삶을 지을 사람인가 되돌아봅니다. 4347.11.6.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숲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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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투데이 2014.11
월간 해피투데이 편집부 엮음 / 혜인식품(월간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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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읽기 삶읽기 174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온 이웃

― 해피투데이 2014.11. (51호)

 혜인식품 펴냄



  지난달에 서울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서울에서 전남 고흥까지 먼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습니다. 서울에서 찾아온 손님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철수와영희 펴냄,2014)이라는 책을 읽으셨고, 이 책을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며 쓴 사람이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인데 제대로 대접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무렵 우리 곁님이 셋째를 막 배어 몸이 많이 힘들었어요. 집 안팎으로 어수선할 때였기에 나도 몸이 고단했지만, 두 시간 남짓 이모저모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서울 손님은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면서, 우리 집안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해피투데이》라는 잡지 51호(2014.11.)에 실립니다.



.. 그는 아이들에게 ‘국어사전 말풀이’로 말을 가르치지 않는다. 가만히 마음 소리에 귀를 기울인 다음, 마음으로 느끼는 이야기로 말을 들려준다. ‘꽃을 생각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 어여쁜 꽃말이 자랍니다. 꽃을 헤아리면서 내 가슴속에 즐거운 꽃 그림이 태어납니다. 꽃을 이야기하니 어느새 내 꿈속에 즐거운 이야기 한 자락이 피어납니다(《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에서).’ … 새로움을 찾고 이야기를 짓는 건 말의 뿌리를 찾는 과정이다. 그것은 또한 말을 만드는 밑거름이기도 하다. 과거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어떻게 말을 지었을까 물으므로, 우리 스스로 우리의 말을 짓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남이 모르는 말을 짓는 게 아니라 처음 꺼냈을 때 다른 사람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는 말을 짓는 것, 쓰다 보면 익숙해져 그 말을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  (80, 83쪽/박상준)



  옛날부터 사람들은 누구나 말을 지으며 살았습니다. ‘없는 말’을 억지로 만들며 살지 않고, ‘쓸 말’을 즐겁게 지으며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지구별 어느 곳에서든 누구나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지었어요. 지구별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 삶을 지었습니다.


  ‘삶짓기’를 한자말로는 ‘자급자족’이라 일컫습니다. 삶을 스스로 짓기에 말도 스스로 짓습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이에요. 손수 나물을 뜯고 손수 밥을 끓이며 손수 돗자리를 짜고 손수 기둥을 세우며 손수 짚을 엮어 지붕을 얹고 손수 아이를 낳아 손수 지은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손수 기저귀를 갈아 손수 빨래를 하는 …… 삶이니, 삶을 누리면서 쓰는 모든 말을 스스로 짓습니다. 예부터 한겨레가 고장마다 스스로 짓던 말은 ‘고장말’, 곧 ‘사투리’입니다.


  이와 달리 오늘날은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짓지 않습니다. 밥도 옷도 집도 ‘남이 만든’ 것을 돈으로 사다가 씁니다. 더욱이, ‘남이 만든 것’조차, 남이 스스로 삶을 지으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똑같이 찍은 것’이기 일쑤입니다. 남이 스스로 지은 것이라면, 이때에는 ‘누군가 스스로 지으며 붙인 이름’이 있지만, ‘공장에서 똑같이 찍은 것’일 때에는 상품이름(상표)만 있어요.


  삶을 녹여서 제대로 지은 이름이 아닌 상품이름만 있을 적에는 광고와 상업주의만 있습니다. 이때에는 ‘상품이름’이 삶에서 우러나지 않기 때문에 ‘고장말’이나 ‘한국말’을 안 쓰기 일쑤예요. 영어를 쓰든 한자말을 쓰든 일본말을 쓰든, 아무렇게나 흐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쓰는 말도 이런 굴레에 갇힙니다.


  이리하여, 나는 “시골에서는 도시와 달리 사람이 살아가는 얼거리나 바탕을 늘 겪으며 살아요. 똑같이 꽃 사진을 찍어도 날마다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어요. 우리 마당에 핀 꽃과,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본 꽃이 다르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예쁜 꽃만 찍으려 하잖아요. 거기에는 이야기가 없어요.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를 보고 듣고 느끼다 보니 저절로 즐거워요.” 같은 말을 들려줍니다. 글을 쓰는 일은 ‘문학 창작’이 아닌 ‘즐겁게 삶을 지으면서 쓰는 글’입니다. 사진을 찍는 일은 ‘예술 창작’이 아닌 ‘즐겁게 삶을 노래하면서 찍는 사진’입니다.


  ‘타성’이라는 한자말을 쓸까 말까 망설이다가, “시골에 살면서 흙을 만지는 일이 타성에 젖으면 고단한 일밖에 안 돼요. 누구보다 나부터 즐겁고 아름답게 살아야 해요. 고단한 사람은 노래를 부르지 않아요. 도시에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사람 가운데 노래하는 사람이 없어요. 즐거우면 노래가 저절로 나와요. 옛날 시골에서는 무슨 일을 하건 누구나 노래를 불렀어요. 그 노래를 들으며 아이들은 말을 배우고 일을 배우고 삶과 사랑과 꿈을 배웠어요. 그리고 어른 곁에서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 놀았고요. 시골스러운 삶을 찾는 일은 스스로 노래와 이야기를 찾는 일이에요. 학교나 책이 아닌 내가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서 찾아야 해요.” 하고도 말합니다.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은 스스로 노래를 합니다. 손수 삶을 일구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말을 손수 짓습니다. 아이한테도 손수 이름을 지어서 붙이고, 밥·옷·집을 지으면서 손수 만든 연장에도 손수 이름을 붙여요.


  ‘토박이말을 찾아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스스로 삶을 찾으면 됩니다. 한자말을 안 쓰거나 영어를 몰아내거나 일본 말투를 씻어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깨닫고 제대로 바라보면서 즐겁게 가꾸면 됩니다. 서울에서 찾아온 손님한테 말·넋·삶이 어떻게 얽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신문과 TV가 보여주는 작금의 세상을 읽다 보면 세상이 과연 진보하고 있는지, 인류가 과거보다 더 지혜롭고 현명한 세상으로 향해 가고 있는지 자못 의심이 들 때가 많다 ..  (11쪽/이희인)



  이제 《해피투데이》 51호가 나옵니다. 내가 서울 손님한테 들려준 이야기를 나부터 가만히 되새겨 읽은 뒤, 다른 이웃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잡지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으며 빙긋 웃는데, ‘신문·방송’을 보면 앞날이나 꿈을 느끼기 어려워요. 왜 그러할까요? 오늘날 신문이나 방송은 우리 앞날이나 꿈을 다루거나 건드리지 않아요. 상업주의에 물들고 광고와 시청율에 목을 매달아요. 그러니, 신문이나 방송을 보아서는 “의심이 들” 일만 많습니다.


  신문과 방송을 모두 내려놓고는, 삶을 보아야 합니다. 내 삶을 보고 이웃들 삶을 보아야 해요. 내가 나한테서 꿈을 찾고, 나를 둘러싼 이웃한테서 꿈을 느껴야 합니다.



.. 바로 옆으로 흐르는 ‘또 다른’ 모습의 한강을 구경했다. 노을이 지고 있었고, 강에는 파도가 전혀 없었다. 멀리 반대편을 보니 길이 막혀서 갈 수 없는 한강의 저편이 보였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은 한 번도 만진 적 없는 속살 같은 곳. 어지럽게 풀이 엉켜 있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던 강변을 멀리서 바라보며, 나는 한강의 오래된 모습을 상상해 봤다. 당시 보이던 낯선 풍경 앞에서 조금 더 집중했더니 예전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들까지 떠올랐다. 나무로 만든 배들이 잔뜩 떠 있거나 아주 깨끗한 물로 가득 찬 뭐 그런 장면들 ..  (46∼47쪽/전진우)



  자가용을 씽씽 달려도 서울에서 한강을 느낄 수 있지만, 자가용에서 내린 뒤 두 다리로 천천히 걷거나 자전거로 슬렁슬렁 달리면, 여느 때에는 못 느끼던 한강을 느낄 수 있어요. 여느 때에 못 느끼던 한강을 새롭게 느낀다면, 아주 깨끗하게 흐르던 냇물과 아주 착하게 살던 사람들 모습을 마치 꿈처럼 눈앞에서 떠올릴 수 있어요.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스스로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면 참말 얼마나 즐거우면서 사랑스러울까요.


  오늘날 시멘트 문명을 바라볼 노릇이 아닙니다. 굳이 먼 옛날을 되찾자고 할 까닭도 없습니다만, 사람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참답고 착하면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면 됩니다. 즐거운 모습을 그려서 스스로 즐거움을 찾으면 돼요.



.. 호두가 나무에 달려 있을 때는 두껍고 딱딱한 녹색의 과육 안에 들어 있다. 그걸 깨면 흔히 알고 있는 갈색 호두가 들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딱딱한 갈색 껍질은 속껍질인 셈. 갓 딴 호두는 그 갈색 속껍질을 손으로 깰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다. 햇빛이 며칠 널어 말리는 새에 달그락 달그락 단단해지는 것이다. 갈색 껍질 속의 호두알 역시 나무에서 갓 따면 아주 얇은 막 같은 껍질을 손쉽게 벗길 수 있는데, 그렇게 나온 호두알은 정말 영양가를 듬뿍 머금은 듯 희고 뽀얗다 … ‘나무에서 바로 따서 먹으면 정말 좋은 열매구나’ 단박에 느껴진다 ..  (52∼53쪽/이후)



  시골사람 이야기를 자주 찾아볼 수 있어 《해피투데이》가 반갑습니다. 이 잡지를 엮는 분들은 서울에서 살 테지만, 그래서 서울 이야기도 많이 나오지만, 서울 이야기만 나오지 않고, 이 나라 골골샅샅 여러 마을 이야기를 조곤조곤 엿볼 수 있어 반갑습니다.


  서울과 경기에서 사는 사람이 이 나라 절반이라 하니까, 서울과 경기 이야기만으로도 잡지 한 권쯤 뚝딱 엮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서울과 경기에 사람이 많이 산달지라도 서울과 경기 이야기만 하면 좀 메말라요.


  생각해 보셔요. 한국은 ‘서울나라’나 ‘경기민국’이 아닙니다. 전라남도 시골 군은 서울이나 경기에 있는 동 한 군데 인구보다 훨씬 적습니다만, 내가 사는 전남 고흥은 기껏 6만 즈음 될까 말까 합니다만, 이곳도 ‘사람이 사는 마을’입니다. 인구가 적다고 해서 이러한 시골사람 이야기를 모른 척하거나 아예 안 다루어도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서울이나 경기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그리 재미없어요. 신문이나 방송에서 넘치는 이야기는 생각을 북돋우지 않습니다.


  호두나무와 호두알 이야기는 얼마나 재미있나요. 갓 딴 호두알을 손으로 살살 벗겨 하얀 단물을 먹는 이야기는 얼마나 싱그러운가요. 호두뿐 아니라 밤도 이와 같습니다. 밤나무에서 갓 딴 밤도 새하얗습니다. 갓 딴 밤은 겉껍질이 아주 보드랍습니다. 손으로도 벗길 수 있지만, 겉껍질째 씹어먹어도 대단히 보들보들 맛나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사람들이 집집마다 밭이나 숲을 거느리면서 ‘내 집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바로바로 열매를 얻어서 먹으면 누구나 몸이 튼튼하다는 뜻입니다. 아플 일이 없습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와 촉진제를 엄청나게 쏟아부어서 더 빨리 더 많이 뽑아내는 ‘대규모 공장 농업’으로 얻은 열매는 겉보기에만 굵거나 예뻐 보이지, 몸에는 도움이 안 되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돈은 많이 벌지만, 몸은 외려 나빠요. 오늘날 사람들은 돈으로 한겨울에도 딸기와 수박을 사다 먹을 수 있지만, 막상 몸뿐 아니라 마음도 많이 아파요.


  《해피투데이》라는 잡지가 앞으로도 싱그러운 시골 이야기를 넉넉히 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손수 삶을 짓는 사람’ 이야기를 알뜰히 실어서 나누어 주기를 빕니다. 4347.10.2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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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작사계 - 자급자족의 즐거움
김소연 지음 / 모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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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65



시골에서 일하고 노는 예쁜 삶

― 수작사계, 자급자족의 즐거움

 김소연 글·사진

 모요사 펴냄, 2014.9.22.



  도시에 사는 이웃이 나더러 묻습니다. 왜 시골에 가서 사느냐고, 도시에 있으면 일거리도 많을 뿐 아니라, 이름을 날릴 자리도 많을 텐데, 하면서.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별을 보고 싶어서요.’


  시골에서 만나는 이웃이 나한테 묻습니다. 왜 시골에 왔느냐고, 다들 도시로 가는 판에 거꾸로 시골에 오는 까닭이 무어냐, 하면서.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긴 뒤 이야기합니다. ‘맑은 바람을 쐬고 싱그러운 물을 마시고 싶어서요.’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이웃들이 더 묻지 않으나, 나는 굳이 덧붙여서 한 마디를 합니다. ‘시골에서 살면 멧새와 풀벌레와 나무가 들려주는 노랫소리가 즐거워서 날마다 웃을 수 있어요.’



.. 두려움보다 즐거움이 더 컸던 것은 만드는 일 자체가 가져다준 기쁨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구든 필요한 물건이든 손수 땀 흘려 만들면서 목수는 만족했다 … 빈집에 들어가 쐐기 모양을 배웠다는 대목에서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시골마을이라면 어디나 외딴 곳의 빈집 한두 채는 있게 마련인데, 그런 곳에 들어가 요행히 부패를 면한 나무 등걸을 주워 오거나 부서진 옛날 살림살이를 쳐다보는 것이 목수의 낙이었다 ..  (28, 34쪽)



  우리 보금자리는 퍽 조그맣습니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꽤 작습니다. 우리는 아직 땅을 넉넉히 누리지 못합니다. 앞으로 돈을 푼푼이 모아서 집을 손질하고 땅도 장만할 생각입니다.


  요즈음 시골로 삶터를 옮기는 분들은 으레 땅이며 집을 넉넉히 장만하지만, 우리는 집만 가까스로 장만해서 들어왔습니다. 돈이 없이 어떻게 시골로 가서 사느냐 하고 걱정하거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많은데, 돈이 있건 없건 사람들은 스스로 살고 싶은 데에서 살기 마련입니다. 도시에 그대로 눌러앉아서 지내는 사람들이 ‘돈이 있어’서 도시에서 살지 않습니다. 그저 도시에서 살 길을 찾으려고 하니까 도시에서 살 뿐입니다.


  살 길은 어디에서건 찾을 수 있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맨손과 빈주먹으로도 얼마든지 살 길을 찾을 수 있어요. 부탄이나 네팔에 가더라도 살 길을 찾을 수 있어요. 어느 나라이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시골에서 안 사는 까닭은, 시골에 살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서 시골에서 안 살지 않아요. 돈이 있어도 시골에서 안 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초·중·고등학교 교육이 오로지 ‘도시에서 일자리 얻어 돈을 벌어 살림 꾸리는 이야기’에 얽매이고, 대학교는 죄다 도시에 있을 뿐 아니라, 대학 교육도 그저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 되기’만 보여줍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든 시골에서 나고 자라든, 초등학교만 들어가면 모든 아이들이 ‘도시바라기’가 되고 맙니다.



.. 재봉틀을 쓰면 바늘담이 탄탄하고 속도가 붙어서 좋고, 손바느질은 바늘땀의 모양이 정감 있고 직접 손을 놀리는 재미가 있어 좋았다. “만들 수 있는 물건을 굳이 돈 주고 살 필요 없잖아.” … 우리 딸도 저렇게 자라날까? 쪼개진 나무껍질만 봐도 참나무, 밤나무 구분할 줄 아는 사람 … 바느질의 즐거움은 바늘에서 오는 게 아니라 바늘을 쥔 사람의 마음에서 오는 게 분명했다 ..  (83, 91, 93쪽)



  시골살이는 시골살이입니다. 시골살이는 ‘전원생활’이 아닙니다. 시골살이는 시골살이일 뿐, ‘귀촌’도 ‘귀농’도 아닙니다.


  《수작사계, 자급자족의 즐거움》(모요사 펴냄,2014)이라는 책을 쓴 김소연 님은 충청남도 서천에서 보금자리를 가꾼다고 합니다. 《수작사계》 끝자락을 보면, 김소연 님이 시골에서 사는 뜻을 “서해 우리의 집. 필요한 것은 많지 않다. 우리가 일구고 싶은 것은 부나 성공 같은 것이 아니다. 고향이다(327쪽).” 하고 밝힙니다.


  옳고 맞는 말씀입니다. 시골에 뿌리를 내리면서 사는 사람은 누구나 ‘내 집을 고향으로 삼’습니다. ‘스스로 고향이 되’려고 시골에서 삽니다.


  사내 쪽 집안이 시골이라서 시골에서 살지 않고, 가시내 쪽 집안이 시골이라서 시골에서 살지 않습니다. 굳이 사내 쪽 집안과 가까운 시골에 살아야 하지 않고, 애써 가시내 쪽 집안과 가까운 시골에 살아야 하지 않습니다. 한집을 이루는 한솥밥지기가 즐겁게 살림을 꾸려서 보금자리를 이룰 만한 시골에서 살면 됩니다. 즐겁게 노래하고, 기쁘게 춤추면서, 아름답게 사랑을 꽃피울 수 있는 곳이 ‘집’이며 ‘보금자리’이자 ‘고향’입니다.



.. 자그마한 맨발, 동그란 배가 톡 튀어나온 내복 바람.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주저없이 토마토 밭으로 향한 아이는 커다란 찰토마토 하나를 뚝 따 쪽쪽 빨고 우적우적 씹는다 … 읍의 살림은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읍은 내가 생각했던 시골과 달랐다. 무엇보다 새소리, 그 소리가 없었다 … 내가 원하는 것은 그냥 쓸 만한 가구가 아니었다. 가슴을 울리는 가구였다 ..  (144, 174, 202쪽)



  우리 집에서 돋는 풀은 바로 나한테 피와 살이 되는 밥입니다. 우리 집에서 자라는 나무는 바로 나한테 숨결과 목숨이 되는 밥입니다.


  예부터 집안에 아기가 태어나면 나무를 심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지구별 모든 나라가 아기한테 맞추어 나무를 심고 별자리를 살핍니다. 아기는 나무와 함께 자라고, 아기를 낳은 어버이한테 맞추어 심은 나무는 벌써 우람하게 자랐을 테니, 아기는 ‘어머니 나무’나 ‘아버지 나무’를 타고 놀다가, 제법 나이를 먹으면 ‘내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놀아요.


  아이는 자라고 자라 어른이 되는데, 어른이 된 아이는 ‘먼먼 할아버지 나무’를 베어서 집을 짓습니다. ‘삼백 살 먹은 할아버지 나무’나 ‘오백 살 먹은 할머니 나무’가 바로 ‘새롭게 어른이 된 아이’가 베어서 집을 짓는 기둥으로 삼는 나무입니다.


  고향이라는 곳은 바로 이런 곳입니다. 보금자리라는 데는 바로 이런 데입니다. 내 숨결을 느끼고, 내 어버이 사랑을 헤아리며, 내 삶을 가꿀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집이에요.



.. 아무것도 없는 맹물(감물)만 핥아 먹고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햇빛은 조금씩 더 진한 색으로 천을 물들였다. 가만히 손을 대 보면 햇빛에 구워진 천이 따뜻했다 … 완성된 옷에 목수가 원한 것이 하나 있었다. “잘 보이는 곳에 꽃수를 놔 줘.” … 밭에서 솜이 난다. 모든 것의 시작은 자연이라는 사실이 나는 여전히 놀랍다 … 가구는 숲에서 시작되므로 그 안에 반드시 숲의 흔적을 담고 있다 ..  (239, 250, 305, 318쪽)



  《수작사계》를 쓴 김소연 님은 “자급자족의 즐거움”을 조그마한 책에서 네 갈래로 나누어 들려줍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에 맞추어 누리는 삶을 조곤조곤 보여줍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시골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어요. 시골살이는 봄살이 여름살이 가을살이 겨울살이, 이렇게 네 갈래로 나눕니다. 시골사람이라면 봄맞이 여름맞이 가을맞이 겨울맞이, 이렇게 네 철을 듬뿍 누립니다.


  철을 익히고자 시골에서 삽니다. 철이 들면서 시골에서 자랍니다. 철을 알면서 시골사람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먹고 입고 자는 삶을 손으로 스스로 돌봅니다. 먹으면서 사랑하고, 입으면서 꿈꾸며, 집에서 잠이 들면서 즐거운 노래가 흐릅니다. 꿈나라를 누리는 우리 집 둘레에서 봄에도 가을에도 멧새와 풀벌레가 노래합니다. 바람이 휙 불어 나뭇가지를 흔들면, 나뭇잎이 파르르 떨면서 재미난 노래잔치가 됩니다.


  전기가 있어야 살지 않습니다. 인터넷이 되어야 살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몰아야 살지 않습니다. 은행이나 극장이나 학교가 있어야 살지 않아요. 관공서나 쇼핑센터가 있어야 살지 않지요.


  숲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들이 있고 냇물이 흘러야 살 수 있어요. 골짜기가 깊고 앞뒤로 멧자락이 이어져야 삶을 꾸립니다. 냇물은 바다로 닿고, 바다는 드넓게 펼쳐집니다.


  사람들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야 슬기롭습니다. 사람들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며 살림을 스스로 지어서 누려야 슬기롭습니다.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은 호미와 낫을 쓸 뿐,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이루는 사람은 언제나 노래하고 춤추면서 두레와 품앗이를 나누니, 인문책을 안 읽어도 평화와 민주와 자유와 평등을 삶으로 즐깁니다. 진보정치가 있어야 평화나 민주나 자유나 평등이 퍼지지 않아요. 숲을 품고 들을 안으며 멧골과 바다를 어루만질 때에 아름다운 마을이 태어납니다.


  물질문명만 가득하면서 매캐한 도시에 숲이 퍼질 수 있기를 빕니다. 고속도로를 걷어치우고 숲을 되살릴 수 있기를 빕니다. 학교마다 강당이나 체육관은 없애도 되니, 숲을 가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국회의사당도 법원도 병원도 모두 숲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작사계》에도 나오지만, 아이들은 들과 숲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가장 맛있고 즐거우면서 재미나게 먹습니다. 숲을 먹는 아이들은 숲을 지키면서 숲마음이 되어요. 4347.10.2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숲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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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초 편지 - 출간10주년 개정판 야생초 편지 1
황대권 글.그림 / 도솔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6



풀 한 포기와 나누는 사랑

― 야생초 편지

 황대권 글

 도솔 펴냄, 2002.10.1.



  어제 낮에 집부터 면소재지까지 걸어갑니다. 2킬로미터 길이니 가깝습니다. 잰걸음이라면 삼십 분이면 갈 만합니다. 그러나 굳이 서두르지 않습니다. 천천히 걷습니다. 가을내음을 맡습니다. 아무도 들에 없기도 하지만, 들길을 걸어가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에 맞춰 살랑살랑 춤을 춥니다.


  깊은 가을로 접어들기에 살그마니 꽃을 피우는 환삼덩굴을 봅니다. 환삼덩굴꽃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새삼스레 들여다봅니다. 이제껏 나물로 신나게 뜯어먹기만 했을 뿐, 정작 환삼덩굴꽃은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쑥꽃을 본 지 몇 해 안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우리 보금자리 한켠에 쑥대를 그대로 두었기에 비로소 쑥꽃을 볼 수 있었어요.


  햇볕은 알맞게 따스합니다. 바람은 알맞게 시원합니다. 시골 논둑길이 예전처럼 흙길이라면 훨씬 싱그럽겠지만, 시멘트 논둑길도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시골마을이 예전처럼 농약 없는 들길이라면 한결 아름답겠지만, 비가 한 차례 지나간 들길인 터라 농약내음은 얼마 안 납니다.



.. 오늘 비디오를 보면서 영화로도 사람을 얼마든지 고문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주윤발이나 유덕화, 왕조현 등과 같은 톱스타들이 그토록 저질영화에 무분별하게 출연한다는 사실이다 … 교도소가 왜 이리 삭막해지는지 모르겠어. 풀 한 포기 없이 삭막해야만 잘 돌아간다고 여기는 건가? 심지어 구 척 담장 밑에 한 줄로 쪼로니 피어난 제비꽃마저 깨끗이 뽑아 버리니 말이야 ..  (27, 57쪽)



  환삼덩굴꽃을 한참 바라보는데 풀뱀 한 마리가 옆으로 슬슬 지나갑니다. 풀꽃을 보다가 풀뱀을 봅니다. 풀뱀은 나를 보았을가요. 풀뱀은 내 발자국이나 몸짓을 느꼈을까요.


  뱀은 사람을 무서워 합니다. 뱀은 사람이 무섭습니다. 사람은 옛날부터 뱀을 잡아서 먹었고, 뱀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뱀을 끔찍하게 잡거나 죽입니다. 참말 뱀은 깃들 곳이 없습니다. 논밭에 하도 농약을 쳐대니 개구리나 도룡뇽뿐 아니라 작은 풀짐승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뱀은 먹이가 자꾸 사라져서 괴롭습니다. 뱀은 지구별에서 사라져야 할까요? 뱀이 지구별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논둑길은 조용합니다. 그러나 저 먼 큰길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는 퍽 멀리까지 울립니다. 몇 킬로미터쯤 떨어져야 자동차 소리를 안 들을 만할까 헤아려 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지 돌아봅니다. 자동차 바퀴소리가 우리 삶을 살찌울는지, 풀벌레와 멧새 노랫소리가 우리 삶을 북돋울는지 가만히 생각합니다.


  어떤 소리를 들어야 할까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방송과 인터넷에서 흐르는 대중노래가 우리 마음을 살찌울 만한가요. 사람들은 저마다 이녁 삶에 맞추어 스스로 노래를 지어서 부를 수 없는가요. 먼먼 옛날 누구나 일을 하며 노래를 불렀듯이, 놀이를 하며 노래를 즐겼듯이, 일노래와 놀이노래는 이제 어디로 갔을까요. 삶을 가꾸는 삶노래는 어디에 있을까요.



.. 우리는 이미 박통 시절에 이런 생태적 재앙을 겪었다. 바로 통일벼에 의한 싹쓸이 경작이 그것이지. 이 통일벼 심기는 새마을 운동과 결합되어 생태적 재앙뿐 아니라 우리 농촌에 문화적 재앙까지 몰고 왔다 … 우리 산야에 자라나는 풀꽃들의 이름은 참으로 예쁘고 친근한 것들이 많다. 그 많은 풀들에 일일이 그런 예쁜 이름을 붙여 준 우리 민중들의 슬기에 감사드리고 싶다 ..  (106, 114쪽)



  황대권 님이 교도소에 갇혀서 지내야 하던 때에 쓴 짤막한 글을 모아서 엮은 《야생초 편지》(도솔,2002)를 읽습니다. 2002년에 처음 나온 이 책은 2012년에 새롭게 옷을 입고 다시 나왔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은 책에 붙은 띠종이를 보면, “야생초는 단순한 풀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여는 상징입니다”와 같은 글월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기울입니다. “단순한 풀”은 무엇이고 “새로운 문명을 여는 야생초”는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을 펼칩니다. ‘야생초(野生草)’는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서 자라는 풀”이라 합니다. ‘야초(野草)’는 “들에 저절로 나는 풀”이라 합니다. ‘산초(山草)’는 “산에 나는 풀”이라 합니다. ‘잡초(雜草)’는 “= 잡풀”이라 합니다. 그러면 ‘풀’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은 ‘풀’을 “초본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풀이합니다.


  요즈음 사회에서는 이런저런 한자말을 쓰는데, 이런저런 한자말이 이 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습니다. 1950년대 시골에서 ‘야생초·야초·산초·잡초’ 같은 말을 썼을까요? 1900년대 시골이나 1800년대 시골이나 1500년대 시골이나 1000년대 시골이나 500년대 시골에서 이런 한자말을 썼을까요? 기원전 시골이나 단군 무렵 시골에서 이런 한자말을 썼을까요?


  턱없는 소리입니다. 고작 쉰 해 즈음 앞서만 해도 이런 한자말을 쓸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지난날 시골사람은 누구나 ‘풀·들풀·멧풀·김(지심)’이라는 한국말을 썼어요. 여기에 ‘풀·나물·남새·푸성귀’라는 한국말을 썼습니다.


  2012년에 새로운 옷을 입고 나오는 《야생초 편지》라 한다면, “풀 편지”나 “들풀 편지”처럼 제대로 된 이름으로 고쳐서 제대로 내놓을 수 있기를 바랐는데, 글쓴이와 출판사 모두 풀이름 하나 제대로 살피지 못합니다.



.. 이담에 내가 살 집의 마당은 아마도 야생초 전시관이 될 거다. 어디 갔다 올 때마다 하나씩은 파올 테니까. 그러자면 마당을 아주 넓게 잡아야 하겠지, 그렇게 십여 년 가꾸다 보면 아마 자식놈은 꽃만 보고도 책 한 권 분량의 야생초 이름 정도는 줄줄 외워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집안엔 늘 야생초차 향기가 가득할 것이구 … 안동교도소 청소부는 야생초에게뿐만 아니라 내게도 천적과 같은 존재이다. 도대체가 풀이 좀 자라서 뜯어먹을 만하면 어느샌가 와서 엎어 버리니 ..  (155, 166쪽)



  풀이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풀이 없으니 사람이 미칩니다. 풀이 없기에 사람이 싸우거나 다툽니다.


  우리가 먹는 밥이란, 쌀알이고, 쌀알이란, 벼이며, 벼란, 풀이요, 쌀알이란, 풀알, 곧 풀 열매입니다. 풀 열매인 풀알이 없으면 사람은 모두 굶을 뿐 아니라 죽습니다. 밥으로도 풀알을 먹지만, 사람이 먹는 돼지이든 소이든 닭이든 풀을 밥이나 모이로 삼아서 먹고 자라요. 예부터 한겨레가 먹은 고기란, 그냥 살점이나 살덩이가 아니라 ‘풀을 먹고 자란 고기’입니다. 고깃덩이를 먹어도 고기가 아닌 ‘풀로 이룬 살점’을 먹은 셈입니다.


  풀이 있기에 나무가 살 수 있습니다. 나무가 있기에 둘레에서 풀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숲은 풀과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우거진 곳입니다. 풀과 나무가 어우러져 숲이 될 때에, 사람들은 숲에서 나무를 얻어 집을 짓고 장작을 패며 다리를 놓습니다. 풀에서 실을 얻어 옷을 짓습니다. 풀이 없으면 밥도 못 먹지만 옷도 못 입습니다. 풀이 있기에 싱그럽게 바람이 붑니다. 나무뿐 아니라 풀이 지구별 온누리에 싱그러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온누리에 돋는 풀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썼어요. 첫째, 먹는 풀입니다. 둘째, 옷을 짓는 풀입니다. 셋째, 지붕이나 울타리로 삼는 풀입니다. 넷째, 약으로 쓰는 풀입니다. 다섯째, 그대로 지켜보면서 푸른 바람을 얻도록 해 주는 풀입니다.



.. 문명이란 그 풀 냄새를 점차로 지워 없앤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야채가 그것이지. 야생의 풀 냄새를 제거하고 인간의 미각에 맞추어 특정한 맛만을 선택하여 육종, 발전시킨 것이 오늘의 야채이다 … 어제 이감을 오는데 대구 시내에 들어서서 다시 화원읍으로 빠지는 길이 마침 퇴근 시간과 겹쳐서 어찌나 밀리던지. 호송차의 창 틈 사이로 간신히 보는 풍경이었지만, 저 엄청난 차와 매연과 시멘트덩이 속에서 어찌들 살아가고 있는지. 참으로 나로서는 엄두가 나질 않는다. 괴물이 아니고서야 저런 환경 속에서 어찌 사나 싶었다 ..  (176, 194쪽)



  《야생초 편지》라는 책에 나오듯이 “풀내음을 자꾸 지워서 없애는 오늘날 사회요 정치이고 문화이며 교육이자 과학”입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풀을 끔찍하게 미워할 뿐 아니라, 없애느라 바쁩니다. 왜 풀밭에 농약을 칠까요? 곡식이나 남새를 망가뜨리는 풀일까요? 아니에요. 나물을 뜯을 줄 모르고 약풀을 건사할 줄 모르니 함부로 농약을 칩니다. 요즈음 시골에서 모시풀을 함부로 베어 없애거나 태워 없애는 까닭은, 지난날처럼 모시에서 실을 얻어 모시옷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골에 모시풀이 많이 돋는 까닭은 지난날 어느 시골에서나 모시풀에서 실을 얻어 옷을 지었기 때문이에요.


  풀을 모른다면 시골에서 살 수 없습니다. 풀을 아끼지 않는다면 농사를 짓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풀을 알려 하지 않는다면 인문학 지식이 아무리 넘쳐도 바보스러운 삶으로 나아가고 맙니다. 풀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면 채식도 육식도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풀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구별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풀 한 포기에서 평화가 자랍니다. 모든 꽃은 풀줄기에 달립니다. 풀씨에서 풀뿌리가 내리고, 풀씨에서 풀줄기가 오르며, 풀씨에서 풀잎이 돋아야, 비로소 꽃망울이 맺히고 꽃봉오리가 터져서 꽃잎이 벌어집니다. 4347.10.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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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왜? - 우리 동식물 이름에 담긴 뜻과 어휘 변천사
이주희 지음 / 자연과생태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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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4



풀이름을 읽는다

― 내 이름은 왜?

 이주희 글

 자연과생태 펴냄, 2011.7.20.



  시골에서 사는 분들은 시골일을 합니다. 시골일은 으레 흙을 만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시골사람이 하는 일이란 흙일이라 할 만합니다. 시골사람은 시골을 지키니 시골지기라 할 수 있고, 시골지기는 흙을 만지는 일을 하면서 흙을 보살피거나 지키니까 흙지기라 할 수 있습니다.


  흙은 어떻게 지킬 수 있는가 하고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울타리를 세우면 흙을 지킬까요? 울타리를 높게 쌓아서 빗물에 흘러넘치거나 쓸리지 않게 하면 흙을 지킬까요?


  오늘날 시골을 보면 어디에서나 농약을 엄청나게 씁니다. 오늘날 시골을 살피면 어디에서나 비료를 가볍게 많이 씁니다. ‘유기질’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름을 흙에 뿌리는 시골이 차츰 늘어나는데, 정부에서 돈을 들여 마련해서 시골 흙지기한테 나누어 주는, 아니 싼값에 파는 ‘유기질은 무엇일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돼지나 소를 키우는 곳에서 거둔 돼지똥이나 소똥일까요? 돼지똥이나 소똥이라면, 돼지나 소는 무엇을 먹고 어떤 똥을 눌까요? 아마 사료를 먹고 사료내음 가득한 똥을 누겠지요. 항생제를 먹고 나서 항생제 기운이 가득한 똥을 누겠지요.


  이제는 풀 먹는 소가 거의 없습니다. 이제 시골에서는 풀을 먹고 자라는 소가 매우 드뭅니다. 왜냐하면, 이제 시골에서는 풀이 몹시 드물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풀밭 찾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시골에 풀밭이 있으면, 누군가 풀밭에 농약을 뿌립니다. 농약으로 풀을 태워 죽입니다.



.. 함경도 지방에서는 황새를 한새라고 하며, 한새봉이나 한새골처럼 지명에 한새가 들어간 곳도 모두 황새와 관련 있다 … 누런색을 제외한 다른 색깔 한우가 사라지게 된 것은 1920년대 말부터 일제가 우리 소를 누런색으로 통일하려는 운동을 펼치면서다 … 박쥐가 복을 상징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 전통 공예품이나 가구 및 건축 장식에 박쥐 문양이 많이 들어간다 ..  (15, 18, 184쪽)



  농약 머금은 풀이라면 돼지나 소한테 먹일 수 없습니다. 농약 머금은 풀을 먹다가는 돼지도 소도 아프거나 죽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농약 듬뿍 쳐서 키운 쌀과 남새를 먹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먹는 능금이나 배나 포도나 복숭아나 딸기 따위에 농약을 얼마나 많이 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도시에서는 학교급식을 합니다. 학교급식은 거의 한국쌀을 씁니다. 그러면, 학교에서 급식으로 먹이는 쌀은, 한국쌀은 얼마나 깨끗할까요? 우리는 급식이라는 제도를 마련한 뒤, 아이들한테 ‘농약쌀’을 마구 먹이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게다가, 시골에서 흙에 뿌리는 유기질은 싱그러운 거름이 아니기 일쑤입니다. 화학약품 가윽한 사료를 먹고 자라는 돼지나 소가 눈 똥으로 만든 유기질을 흙에 뿌리니, 농약을 한 방울조차 안 썼다 하더라도, 무엇을 믿어야 할는지 아리송할 뿐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수천만에 이르는 사람을 먹여살릴 만한 ‘정갈하고 아름다우며 착한’ 곡식이나 남새나 열매는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이 나라 오천만 사람을 먹여살리는 곡식과 남새와 열매는 그예 농약덩어리요, 화학약품덩어리입니다.



.. 우리 나라는 스스로 생물을 조사하고 분류학적으로 정리한 역사가 짧다. 그래서 생물학의 후발주자인 우리 학자들이 우리 나라 생물 이름을 지을 때 어쩔 수 없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학명이나 이미 다른 나라 학자들이 붙인 이름을 많이 참조했다 … 멧토끼는 우리 나라 고유종으로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다. 남한 지역에서는 멧토끼만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토끼라고 하면 멧토끼를 일컫는 것이다. 멧토끼가 생물학적인 정식 우리 말 이름이기는 하지만, 민간에서는 산토끼라고 더 많이 부른다. 실제로 많은 종류의 국어사전에는 멧토끼라는 말은 없고 산토끼라는 말만 있다 ..  (25, 166쪽)



  이주희 님이 쓴 《내 이름은 왜?》(자연과생태,2011)라는 책을 읽습니다. 풀이름, 나무이름, 벌레이름, 새이름, 짐승이름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이주희 님은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이 나라 ‘이웃님’ 이름을 하나씩 살펴봅니다.


  그렇습니다. 이웃님입니다. 멧토끼도 이웃님이고, 고라니와 고니도 이웃님입니다. 해오라기도 이웃님이요, 박쥐도 이웃님이에요. 도룡뇽도 지렁이도 이웃님입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까치가 우는 소리를 듣고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는 뜻으로 여겼습니다. 까치가 우는 소리를 그냥 소리가 아닌 아름답고 즐거운 노래로 받아들였어요.


  예부터 한겨레는 제비가 봄에 찾아올 적에 몹시 반겼습니다. 제비집을 허무는 짓이란 아주 나쁜 짓이라고 여겼습니다. 제비집에서 제비똥이 쏟아질라치면 똥받이를 달았어요. 한집을 이루는 제비를 우리와 같은 님이요 이웃이요 동무로 삼으면서 언제나 즐겁게 마주했습니다.



.. 해는 태양에서 유래해 희다는 뜻을 갖게 되었으며, 그렇게 본다면 해오라기는 ‘흰 오리 같은 새’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 예전 사람은 고니보다 백조란 말을 더 많이 썼다. 지금도 생물에 관심 없는 많은 사람에게는 백조란 이름이 더 익숙하다. 그런데, 이미 잘 알려졌듯 백조는 일본인이 만든 한자어다 … 오랜 언어 순화 노력에도 별자리 중에 백조자리를 ‘고니자리’라고,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고니의 호수’라고 고치자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  (45, 198∼199쪽)



  학자가 이런 이름이나 저런 이름을 붙이기 앞서, 모든 이웃님한테는 이름이 있습니다. 학자는 모르겠지요. 고장마다 우리 이웃님을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 잘 모르겠지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하는 아주 작은 것이라면 모르되, 우리 곁에 있는 나무나 풀이나 꽃이나 벌레나 짐승이나 새라면, 아주 마땅히 어느 고장에서든 이 이웃님을 가리키는 이름이 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학자로 일한 이들은 이웃님 이름을 살피거나 알아보려고 그리 나서지 않았습니다. 일본 학자가 붙인 이름을 슬그머니 따랐습니다. 얼토당토않다 싶은 이름을 학자 마음대로 붙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가 이 나라 마을과 고을에 엉뚱한 한자 이름을 마구 붙였듯이, 이 나라 학자는 이 나라 이웃님한테 터무니없는 이름을 붙이기 일쑤였어요.



.. 고려 시대에 이르러 잦은 전란과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새로 건물을 짓거나 축대를 쌓는 데 많은 목재가 필요했다. 급기야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목재로 쓸 만한 곧게 자란 느티나무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느티나무를 대체할 목재로 소나무를 선택한 것이다 … 고라니는 우리 나라와 중국 동북부 지역에만 사는데, 중국에서는 심각한 멸종위기에 놓여 법으로 엄격히 보호하고 있다. 눈에 많이 띈다고 흔하다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며, 실제로 흔하더라도 지금처럼 인간의 간섭으로 심각하게 왜곡된 자연생태계에서 어떤 계기로 일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  (76, 178쪽)



  마늘은 왜 ‘마늘’일까요? 박은 왜 ‘박’일까요? 흙은 왜 ‘흙’일까요? 나무는 왜 ‘나무’일까요? 아마 어느 누구도 말밑을 못 알아내리라 생각합니다. 누가 맨 처음에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알 길이 없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고장마다 고을마다 마을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엇비슷한 이름을 썼어요. 옛날에는 인터넷도 자동차도 학교도 없는데, 다 다른 고장에서 태어나서 그 고장을 떠날 일이 없는데, 풀이건 짐승이건 벌레이건 나무이건, 고장이나 마을마다 사뭇 비슷하거나 아예 똑같기까지 한 이름을 썼습니다.


  풀이름을 읽습니다. 미나리를 읽고 쑥을 읽고 냉이를 읽고 꽃다지를 읽습니다. 흙을 만지며 숲을 사랑한 우리 옛사람이 저마다 어떤 사랑을 품고 어떤 꿈을 키우면서 이런 이름을 즐겁게 지어서 썼을까 하고 가만히 되뇝니다.


  이웃님한테 이름을 붙여서 부른 옛사람이라면, 이웃님을 해코지하거나 괴롭히는 일이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와 달리, 오늘날은 시골에서 사는 사람이 아주 드물고, 흙을 만지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이웃님과 가까이에서 만나면서 살갑게 어울려 지내는 사람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님이 아니니, 이름을 제대로 모르고, 이름을 제대로 모르는 이웃님이니, 그저 경제개발과 막공사를 일삼습니다.


  풀이름을 읽어요. 우리 함께 풀이름을 읽어요. 목소리에 사랑을 실어 풀이름을 읽어요. 즐겁게 노래하고, 아름답게 춤추어요. 삶을 노래하고, 하루를 누려요. 4347.9.2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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