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와 통하는 청소년 인권 학교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6
홍세화 외 지음, 인권연대 기획 / 철수와영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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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27



학교에 갇힌 푸름이한테 인권이란

― 10대와 통하는 청소년 인권 학교

 홍세화·오인연·안수찬·조광제·한재훈·오창익

 인권연대 기획

 철수와영희 펴냄, 2014.10.9.



  오늘날 아이들은 학교에 갇힙니다. 학교에서 벗어날라 치면 학원에 갇힙니다. 학원에서 벗어날라 치면 컴퓨터에 갇힙니다. 컴퓨터에서 벗어날라 치면 아파트 그득그득한 도시에 갇힙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갈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학교와 학원과 피시방이 아니면 도무지 깃들 만한 곳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쉴 데가 없어요. 아이들이 갈 만한 공원은 어디에 있나요? 공원이라 할 만한 데가 도시에서 몇 군데나 있나요?


  어른들이 가는 술집은 도시이든 시골이든 아주 많습니다. 어른들이 가는 찻집이나 옷집이나 밥집도 도시나 시골에 아주 많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갈 곳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돈을 마음껏 쓸 수 없으니 가게에 쉬 들어가기도 어렵습니다. 기껏 아이들이 가는 곳은 편의점입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아이들은 편의점이나 롯데리아 같은 데 빼고는 다리를 쉴 수 없습니다. 도시라는 데에는 다리를 쉴 걸상도 없고, 길바닥은 어른들이 술에 절어 왝왝 뱉은 것들이 곳곳에 널렸을 뿐 아니라 자동차가 쉴새없이 다니니 아무 데나 앉기도 어렵습니다.



.. 조금 전만 해도 같은 택시 기사 출신이라며 반기던 그분은 왜 읽어 보지도 않은 신문을 그렇게 매도했던 걸까요? 제가 올바른 정보를 알린다면 그분의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었을까요 … 한국 사회에서 학문은 입시와 취업의 도구가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배우는 목적이 개인의 인격과 지성을 높이는 데 있지 않아요 … 우리 사회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의미는 기존의 질서와 체제를 빠르게 인정하고 숙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환경 탓만 할 수는 없잖아요. 학교 분위기가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분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  (16, 22, 23, 31쪽/홍세화)



  오늘날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험공부만 합니다. 아이들은 제대로 무엇을 배우는 적이 없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엇 하나 제대로 가르치는 적이 없습니다. 그저 대학입시로 내몰 뿐입니다. 대학입시가 끝난 뒤에는? 네, 어른들은 대학입시 끝난 뒤에 아이들을 풀어놓습니다. 아니, 어른들은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그저 풀어놓았을 뿐이고, 대학교에 들어갈 적에도 풀어놓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삶을 배우는 적이 없고, 아이들한테 사랑을 가르치는 적이 없습니다.


  처음 태어나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아이들은 스무 해 내내 사랑을 배운 적이 없이 대학생이 되거나 스무 살을 넘깁니다. 그러고는 저마다 짝꿍을 찾아 헤매는데, 아이들은 ‘사랑’이 아닌 ‘짝꿍’을 찾을 뿐입니다. 마음을 아름답게 살찌울 사랑이 아니라, 살을 섞거나 부빌 짝꿍을 찾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무엇인지 배운 적 없이 학교에 갇혀서 지냈거든요. 이제 비로소 학교에서 풀려났으니, 아이들은 갑갑한 몸을 풀어내려고 서로서로 살을 섞거나 부빌 짝꿍을 찾을밖에 없습니다.


  할 줄 아는 것이 없거든요. 스무 살이 되도록 밥짓기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거든요. 옷짓기는 할 수 있을까요? 바느질을 할 줄 아는 스무 살 젊은이는 몇이나 될까요? 토익이나 토플 점수는 잘 받더라도 바느질 하나 못 하는 젊은이는 수두룩하리라 느낍니다. 집짓기는 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숲에 들어가 나무를 베어 손질한 뒤 기둥을 세울 줄 아는 젊은이는 아예 없다시피 해요.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월세에 전세에 ‘내 아파트’로 나아갈 생각만 겨우 합니다.



.. 자기표현이야말로 민주 시민의 소양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유와 권리는 표현하고 실천하고 다듬어 볼수록 더 커지거든요 … 한국의 자살률은 OECD 1위예요. 인구 10만 명당 31명, 한 해에 1만 5000여 명이 자살합니다. 브라질 사람이 총기 사고로 죽을 확률보다 한국 사람이 자살로 죽을 확률이 높습니다 ..  (74, 80쪽/안수찬)



  학교는 왜 아이들을 꽁꽁 가둘까요? 우리 어버이는 왜 하나같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어 꽁꽁 갇히게 할까요? 왜 학교는 아이들을 꽁꽁 가두어 아이들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지어서 삶을 가꾸도록 이끌거나 가르치지 않을까요? 왜 우리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가꾸는 삶을 물려주지 못하면서 사랑도 꿈도 아이와 나누지 못할까요?


  홍세화·오인연·안수찬·조광제·한재훈·오창익, 이렇게 여섯 사람이 저마다 이야기를 살풋살풋 들려주는 《10대와 통하는 청소년 인권 학교》(철수와영희,2014)를 읽습니다. 인권을 빼앗기거나 짓밟히거나 잃거나 잊은 푸름이한테 인권이란 무엇인가 알려주면서, 푸름이가 스스로 인권을 찾도록 하려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들려주는 이야기책입니다.



.. 생산력이 엄청나게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여전히 일에 매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자본은 계속 증식해 나가려고 노동력을 착취합니다. 일을 더 시켜야 생산성을 올릴 수 있잖아요. 개인들은 자발적으로 노동 시간을 연장합니다. 야근, 휴일 근로, 안 하면 돈을 적게 받으니까요 ..  (132쪽/조광제)



  《10대와 통하는 청소년 인권 학교》를 읽으면, 인권이 걸어온 발자취라든지, 인권이 ‘발명’된 까닭이라든지, 한국 사회에서 인권이 얼마나 짓눌리는가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살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푸름이 누구나 학교를 다니면서 인권이 억눌리는 얼거리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청소년 인권’에서 우리가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바로 ‘학교’이지 싶습니다. 학교를 다니기만 하면 인권을 빼앗기거나 짓밟히는 얼거리를 바로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아무리 뜻있거나 똑똑한 어른이라 하더라도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동안 아이들한테 인권을 찾아 주거나 지켜 주기 어려운 얼거리를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참말 학교를 바르게 살펴야 합니다. 오늘날 도시 문명 사회에서 학교는 ‘배우는 곳’ 구실을 하나도 안 합니다. 오늘날 도시 문명 사회에서 학교는 ‘입시지옥’ 노릇만 합니다. 대학입시와 얽힌 과목만 달달 볶듯이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합니다. 언제나 시험공부를 할 뿐입니다. 시험점수와 등수를 따지고, 등급과 성적표를 매깁니다. 아이들한테 사랑을 들려주는 교과목이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사랑을 가르치거나 이야기하는 교사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즐겁게 삶을 노래하는 시나 소설을 이야기하는 국어 교과목이 있는가요? 없습니다. 셈과 넋과 삶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밝히는 수학 교과목이 있는가요? 없습니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말을 익히면서 이웃나라 문화와 삶을 살피고 서로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지구별을 가꾸는 이야기를 북돋우는 외국어 교과목이 있는가요? 없습니다. 가장 굵직하다는 국·영·수조차 올바른 길이 아닙니다.


  역사 교과목은 어떠한가요? 왕조 발자국이나 살필 뿐, 지난날 이 나라에서 99퍼센트 남짓 차지하던 여느 시골마을 수수한 시골사람 이야기는 한 줄로도 안 다룹니다.



.. 김상용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평범한 일상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작은 것에도 만족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행복은 사람이 살아가야 할 까닭입니다. 김상용 시인의 시처럼 소박한 것에서 찾아도 좋고, 인류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겠다는 커다란 포부여도 좋아요 … 인권은 사람을 존중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인권은 당연히 자기 존중의 토양에서만 싹틀 수 있습니다 ..  (171, 172, 202쪽/오창익)



  ‘청소년 인권’은 학교 안팎에서 찾아야 합니다. 한창 삶을 배우고 사랑을 맞아들일 푸름이인 터라, ‘학교 울타리’가 아닌 ‘배우는 터전’을 찾아야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보금자리에서 아름다운 꿈을 키우고, 아이들한테 동무와 이웃이 되는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마을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속삭이도록, 다 같이 힘을 기울여야지 싶습니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 ‘인권’입니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란, 서로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나날입니다. 서로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나날은 함께 꿈을 꾸고 함께 일과 놀이를 나누며 함께 노래잔치 춤잔치 밥잔치를 빚는 하루입니다. 4347.10.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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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 비폭력 교육혁명가 비노바 바베의 배움과 삶, 교육 이야기
비노바 바베, 김성오 옮김 / 착한책가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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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26



새롭게 가꾸어야 할 시골

―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비노바 바베 글

 김성오 옮김

 행복한책가게 펴냄, 2014.9.20.



  2013년 정부 통계를 보니, 한국에서 도시에 사는 사람이 92퍼센트라 하고, 한국에서 직업으로 농업을 적는 사람이 6퍼센트라 합니다. 앞으로 92퍼센트는 더 늘어날 테고, 6퍼센트는 더 줄어들리라 느낍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는 그대로 도시에 눌러앉을 테며, 시골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까지 도시로 들어갈 테지요.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를 학교에 넣으면, 도시에서는 도시살이만 가르치고 시골에서는 도시살이를 가르칩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모두 도시 이야기만 가르칩니다. 도시에서 시험을 치러서 잘 붙도록 하는 재주만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낸다고 한다면, 이 아이들이 ‘시험 잘 보는 재주’를 익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 되어 돈 잘 벌도록’ 하려는 뜻이라고 할 만합니다.


  시골 초·중·고등학교에서조차 모내기나 풀베기나 나물뜯기 같은 일을 가르치지도 않고 보여주지도 못하며 알려주지도 않습니다. 도시에 있는 초·중·고등학교는 이런 일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온 나라가 ‘입시지옥’ 잔치판이 됩니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온통 입시지옥 이야기입니다. 막상 가을에 가을걷이 일손을 거든다든지, 가을철 바쁜 시골마을을 돌아보려는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신문기자나 방송피디는 죄다 도시에서 살아요. 시골살림을 모릅니다. 시골살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도시이고 모든 것이 도시일 뿐입니다.



.. 37년 전, 나는 대학을 떠나 지혜를 찾아 나섰습니다. 학교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그중에 지혜는 없었습니다 … 오늘날 괴상한 교수법이 삶의 조화로운 일체성을 토막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육을 받는답시고 인생의 첫 십오 년 혹은 이십 년을 통째로 쓰면서도, 살아가면서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들은 회피합니다 … 인간은 이 무한한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에서 끊임없이 배웁니다. 시냇물은 막임없이 흘러갑니다. ‘돌 하나하나마다 교훈이 서려 있고, 흘러가는 실개천도 지식의 원천’입니다 … 아버지는 아이의 머릿속에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쑤셔넣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학교에서도 그와 똑같이 대합니다 … 신은 언제나 정말 경이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까닭에, 어느 한 구석에 잠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  (10, 39, 50, 54, 340쪽)



  요즈막에 ‘글쓰기’ 이야기가 많이 도드라집니다. 예전에는 ‘논술’이었는데, 이름만 살짝 바꾸어 ‘글쓰기’를 들먹입니다.


  글쓰기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글쓰기는 뜻있고 값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글쓰기를 왜 해야 하는가부터 살펴야지 싶습니다. 글쓰기를 하는 즐거움과 보람과 뜻부터 살펴야 한다고 느낍니다.


  글쓰기란 글을 쓰는 일입니다. 글을 쓰려면 말이 있어야 합니다.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없으면 글을 쓰지 못해요.


  말이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고받을 이야기가 있어 말을 꺼내는 삶이기에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글을 쓸 수 없어요.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학교나 사회에 이야기가 있을까요? 오직 시험공부만 시키는 학교에서 이야기가 있을까요? 교과서와 문제집만 들여다보도록 시키는 어른 사회에 무슨 이야기가 있을까요?


  이야기가 없는 학교요 교육이며 사회인데, 아이들더러 글쓰기를 하라고 시킵니다. 자, 그러면 아이들은 뭘 쓰나요? 아이들은 뭘 써야 할까요? 아이들은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데 아이들더러 글쓰기를 하라고 시키고, 글쓰기 책을 펴내며, 글쓰기 강의를 하고, 글쓰기 학원이 문을 엽니다.



.. 놀이를 하는 동안 그 아이에게 바깥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놀고 있는 아이들은 오직 놀이에만 몰입합니다 … ‘교육은 의무’라는 식의 틀에 박힌 생각 대신에, ‘교육은 즐거움’이라는 아주 자연스럽고 고무적인 생각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류 전체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절망을 가르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인간이 그 근본부터 악하다면 교육에는 희망이 없게 됩니다 … 진짜 ‘나’는 결코 망가지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몸이 망가지고 때가 끼었을 때 그것을 고치고 씻어내는 존재가 나입니다 … 작은 무기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군인은 더 큰 무기를 집어듭니다. 그리고 그것들조차 충분치 않다고 판단되면 한층 더 파괴적인 무기에 의존합니다 … 우리는 아이들에게 자기를 때리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복종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은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일상적인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  (55, 56, 57, 66, 337, 353쪽)



  아이나 어른 모두 글쓰기를 할 만합니다. 글쓰기를 하면서 삶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쓰기에 앞서 먼저 삶이 있어야 합니다. 삶이란 이야기이지요. 이야기란 삶이지요. 다시 말해서, 삶이 없고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이 글솜씨나 글재주를 키운다고 하면 어떤 일이 생길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글솜씨나 글재주를 부려서 쓰는 글이 우리한테 얼마나 즐겁거나 반갑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울 만한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알맹이 없는 입시지옥이 되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교육이 아니라 입시지옥만 있는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무엇을 배울까요?


  배울 것 없는 학교에서 ‘시험 잘 치는 솜씨’와 ‘글 만지는 재주’만 키운다면, 이런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시험공부와 글재주만 키운 아이들이 사랑을 속삭일 수 있을까요? 시험공부와 글재주만 있는 아이들이 아이를 낳아 돌볼 수 있을까요? 시험공부와 글재주로만 살아온 아이들이 밥·옷·집을 어떻게 마련할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제도권 학교교육은 모든 아이들을 기계 부속품이 되도록 내몹니다. 모든 아이들이 밥·옷·집을 돈으로 사서 쓰고 버리도록 길들이려는 제도권 학교교육입니다.


  어느 교과서에도 밥을 짓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어느 교사도 옷을 짓는 이야기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어느 학교도 집을 짓는 이야기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밥도 옷도 집도 없는데, 지식만 있습니다. 밥과 옷과 집은 없으면서, 온갖 정보와 책은 넘칩니다. 인터넷과 신문과 방송도 넘치지요.



.. 얼마나 많이 배웠든 간에 세상은 여전히 모르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일수록 더 겸손할 것입니다 …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참된 지혜는 어떤 무기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수단입니다. 교육은 비폭력의 힘만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실천하지 않고는 결코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 정녕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만약 그 아이들이 날마다 두세 시간씩 책만 들여다보면서 보낸다면 다른 것들을 배울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 아이들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모국어도 엄마한테서 배웁니다. 정부는 단돈 1원도 안 들입니다. 이것이 제가 무상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67, 76, 83, 85, 119쪽)



  신문사와 방송국은 모조리 사라져도 됩니다. 대학교 또한 몽땅 문을 닫아도 됩니다. 초등학교뿐 아니라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죄다 없애도 됩니다. 이렇게 한다 한들 나라가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골 논밭을 모조리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덮어 보셔요. 어떻게 될까요? 다 죽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을 몽땅 도시로 끌어들여서 공장 노동자로 바꾸거나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바꿔 보셔요. 어떻게 될까요? 다 죽습니다.


  4대강사업이 끔찍한 까닭은 막공사를 밀어붙인 독재정권 때문이 아닙니다. 4대강사업은 시골을 무너뜨리고 숲과 들과 냇물을 짓밟았기 때문에 끔찍합니다. 새만금이나 시화호가 왜 무시무시했겠습니까? 밀양 송전탑이나 제주 강정마을이나 평택 대추리가 왜 슬펐겠습니까? 이는 모두 시골을 짓이기거나 죽음으로 내몰기 때문에 무시무시하고 슬픕니다.


  아이들은 손수 흙을 만지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쌀이 어떻게 나오고, 밥을 어떻게 지으며, 볍씨는 어떻게 심어서 돌봐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오이심기 가지심기 호박심기 당근심기뿐 아니라, 나무 한 그루를 돌보는 일도 찬찬히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흙을 살리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나물과 풀을 샅샅이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농약이나 비료나 항생제나 농기계를 배우지 말고, 시골과 들과 숲을 배워야 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쉰 해 앞서까지 이 나라 골골샅샅에서 이루어진 ‘숲살이’와 ‘들살이’와 ‘바다살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 도시가 농사와 유리되어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불행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이보다 더 큰 손실은 없기 때문입니다 … 풀과 나무와 돌과 흙, 햇살과 바람이 있는 탁 트인 자연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이며 얼마나 가슴 벅찬 축복인지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즐거움을 모릅니다. 그러니 그 가련한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인간이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되면 충분한 만족과 넘치는 기쁨을 누리게 되어서, 더는 다른 인공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 어떤 사람은 늘 약을 먹는데도 병세가 계속 악화되기만 합니다. 병과 약이 함께 넘쳐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 현대의 노동자들은 하루에 여덟 시간을 공장 안에 갇혀서 일합니다. 그곳에는 맑은 공기도 기쁨도 없습니다. 그들의 노동은 지식과 유리되어 있으며, 즐거움마저도 영화 등을 통해서 ‘제공받아야’ 합니다. 그들의 노동에는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  (89, 92, 98, 115쪽)



  삶이 서야 이야기가 흐릅니다. 삶이 서면서 이야기가 흘러야 사랑이 싹틉니다. 삶이 서면서 이야기가 흘러 사랑이 싹틀 때에, 비로소 가르치고 배우는 노래가 샘솟아요.


  예부터 한겨레뿐 아니라 지구별 모든 겨레는 어른이 아이한테 노래를 들려주면서 삶을 가르쳤습니다. 예부터 어느 겨레 어느 나라에서든,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노래를 들으면서 삶을 배우고 물려받았습니다.


  민요나 노동요가 아닌 ‘노래’입니다. 전래동화나 구전설화가 아닌 ‘이야기’입니다. 구비문학이나 민중문화가 아닌 ‘삶’입니다. 노래는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삶이 됩니다. 삶은 노래로 거듭나고 노래는 이야기로 태어납니다.


  아이들이 배울 것은 노래와 이야기와 삶입니다. 아이들이 물려받을 것은 노래와 이야기와 삶입니다. 어른이 가르칠 것은 노래와 이야기와 삶입니다. 어른들이 물려줄 것은 노래와 이야기와 삶입니다. 그리고, 어른은 사랑스러운 몸짓과 눈길과 손길로 노래와 이야기와 삶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즐겁게 노래와 이야기와 삶을 귀여겨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구별 어느 곳에서도 학교란 없었어요. 우리 집이 학교이고 우리 마을이 학교였습니다. 우리 숲과 들과 바다가 학교였어요. 우리 어버이가 교사요, 우리 아재와 아지매와 할배와 할매가 교사였습니다.


  오늘날 도시 문명 사회에서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면서 즐거운 배움터인 보금자리를 와장창 무너뜨리거나 깨부숩니다. 이러면서 시멘트 건물을 뚝딱뚝딱 올려 ‘학교’라는 이름을 붙이고 ‘교육’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씌웁니다.



.. 최근 30년간 저는 하루하루를 물 긷기, 곡식 찧고 빻기, 쓰레기 치우기, 실잣기, 천짜기, 면화 고르기, 목공일 등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런 일을 함으로써 저의 지적 능력이 감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나게 나아졌다는 것입니다 … 교사가 어린이가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어린이가 성장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 진정한 앎은 100퍼센트를 기억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차파티를 30퍼센트만 만들 수 있는 요리사를 누가 고용하겠습니까? 어중간하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완전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머리와 손발이 하나가 되어서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은 잘해 내지만 그 일의 전 과정을 말로 잘 설명해 내지 못하는 사람은 그 기능을 완전히 꿰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  (109, 155, 171, 186쪽)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부가 무슨 구실을 하는지 꿰뚫어보아야 합니다. 도시 문명 사회는 오직 돈으로 굴러갑니다. 학교도 늘 돈으로 굴러갑니다. 대학교 배움삯이 얼마나 비싼지 보셔요. 돈이 아니면 대학교가 없습니다. 대학교 졸업장은 돈으로 사고파는 ‘면죄부’와 같습니다. 성적표를 얻으려고 오늘날 거의 모든 어버이가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몰아세웁니다. 여느 어른들도 가녀린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기보다는 성적표를 들이밀면서 다그칠 뿐입니다.


  교육 없는 한국이고, 사랑 없는 한국입니다. 제도권과 입시와 졸업장만 있는 한국입니다. 돈만 판치는 한국입니다. 꿈이나 노래가 흐르지 않는 한국입니다. 상업주의와 경제개발만 춤추는 한국입니다.


  우악스럽고 어리석은 한국이라 할 텐데, 이런 한국에도 한 줌짜리 조그마한 빛줄기가 흘러 반짝반짝 어여쁜 책이 한 권 나옵니다. 비노바 바베 님이 쓴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행복한책가게,2014)입니다.



.. 진정으로 삶에 유익하다면 그것은 삶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들을 배울 때에는 즐거운 방법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 역사는 권력을 가진 자의 입장에 따라서 기술됩니다. 그들은 과거의 사건들을 사람들의 정신을 호도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합니다 … 역사라는 미명 하에 모든 사람들의 사고가 강제로 특정 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온 국민이 선입견으로 가득 차게 되어서 … 새로운 역사를 만들겠습니까, 아니면 그저 낡은 역사책이나 읽겠습니까 … 우리의 삶에서 그토록 귀중한 사실인 어머니의 사랑은 결코 역사에 나오지 않습니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역사는 결코 쓰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인간성에 위배되는 역사만을 씁니다 ..  (209, 221, 222, 225쪽)



  인도사람 비노바 바베 님은 ‘학교 없는 마을’을 이야기합니다. 이녁은 ‘돈을 들이지 않는 배움’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 ‘시골에서 꽃피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마땅합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마을에는 학교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마을은 마을 그대로 배움터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흙짓기와 흙살림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아이낳기와 동생보기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밥짓기와 옷짓기와 집짓기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이웃사랑과 들놀이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모든 삶을 고스란히 배웁니다. 마을은 통째로 배움터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지구별 어느 나라에서도 고작 쉰 해 앞서까지만 해도 ‘모든 시골’은 ‘스스로 삶을 지어서 가꾸는 터전’이었습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고작 쉰 해 앞서까지만 해도 지구별 모든 시골은 ‘완전한 자급자족’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작 쉰 해 사이에 지구별 거의 모든 시골이 경제 식민지가 되고 문화 식민지가 되며 종교 식민지까지 되고 맙니다. 게다가 시골마다 쓰레기가 넘쳐요. 비닐과 농약 쓰레기뿐 아니라, 도시 관광객이 버린 쓰레기까지 넘칩니다. 이뿐인가요? 도시사람이 쓸 전기를 뽑는다면서 시골에 엄청나게 큰 발전소를 짓고 송전탑을 수없이 때려박습니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다면서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를 끝없이 자꾸 때려짓습니다. 도시사람 ‘여가생활’ 때문에 시골에 골프장이나 관광단지나 호텔 따위를 새롭게 때려잡습니다.



.. 모든 종교에서, 순수한 마음을 갖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어떤 의례적인 형식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들을 해야만 덕을 쌓을 수 있다는 믿음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 지성을 가꾸는 것은 영혼입니다. 그리고 지성이 영혼을 버리고 육체의 집에서 노예가 되면 지성은 부정을 행합니다 … 사람들은 시골에서 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렇지만 도회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시골 마을의 정감 어린 분위기와 비교해 본다면, 도회지의 생활이 얼마나 쓸쓸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낡은 관습에 젖은 학교들은 감옥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방학이 필요합니다 … 베짜기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옷이며, 농사일에서 생겨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음식이며, 목공일에서 얻는 것은 돈이 아니라 집이라는 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  (248, 263, 268, 269, 272쪽)



  새롭게 가꾸어야 할 시골입니다. 학교나 도시나 문명이나 경제나 교육 따위는 새롭게 가꿀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도 새롭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학교나 도시나 문명이나 경제나 교육 따위는, 여기에 스포츠라든지 영화라든지 소비문화 모두 새로움이 하나도 없을까요?


  철이 없기에 새로움이 없습니다. 봄철과 여름철과 가을철과 겨울철이라고 하는 철이 없으면 새로움이 없습니다.


  시골은 철이 있기에 새롭습니다. 다만, 오늘날 시골은 도시 문명에 너무 길들고 찌들어서 웬만한 시골은 거의 다 철을 잊거나 잃었습니다. 도시를 떠나 망가진 시골로 간다 한들 달라지지 않습니다. 도시만 떠난대서 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도 새로운 숲을 지어야 합니다. 시골은 오늘날처럼 망가진 시골 모양이 아닌 ‘숲으로 되살아나는 새로운 시골’로 고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 잘 알아야 하는데, 비노바 바베 님이 말하듯이 ‘참답게 배우고 가르치는 삶’은 돈이 한푼조차 안 듭니다. 시골을 참답게 가꾸어 돌보고 누리는 삶도 돈이 한푼조차 안 듭니다.


  곡괭이를 들어 시멘트를 걷으면 됩니다. 한쪽에 시멘트 쓰레기를 잘 쌓아 두면 됩니다. 흙이 드러난 땅을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잘 쓰다듬으면 됩니다. 바람 따라 풀씨가 날아오도록 하면서, 콩씨를 심고 옥수수씨를 심으면 됩니다. 차근차근 흙을 살리고, 능금씨도 심고 살구씨도 심으며 도토리도 심으면 됩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시멘트를 걷고 씨앗을 심는 일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씨앗은 돈으로 사지 말아요. 들과 숲에 있는 씨앗을 받아서 쓰거나 이웃한테서 얻어서 쓰셔요. 도시와 시골 모두 숲으로 푸르게 우거진 터전이 되도록 되살릴 수 있어야 비로소 ‘배우고 가르치는 삶’을 이룹니다. 입시지옥이나 졸업장이나 교과서 따위가 아닌 ‘사람과 사랑과 삶’을 배우고 가르치려면, 도시와 시골 모든 곳에 숲이 우거져야 합니다.


  도시 문명 사회가 숲을 없애는 까닭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정치 권력자와 경제 권력자와 문화 권력자와 종교 권력자가 서로 한통속이 되어 우리들을 ‘종(노예, 기계 부속품, 톱니바퀴)’으로 부리려고 하기 때문에 돈을 내세워 숲을 없애고 시골을 무너뜨립니다. 무상교육이나 무상급식을 해 보았자 교육은 하나도 안 나아져요. 잘 알아야 해요. 우리가 할 일은 무상교육이나 무상급식 따위가 아닙니다. ‘숲’입니다. 학교 운동장에 인조잔디를 못 깔게 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학교로 못 들어오게 막고, 학교에는 주차장을 마련해서는 안 됩니다. 교사도 학생도 손님도 모두 학교에는 두 다리로 걸어서 들어와야 합니다. 학교 건물을 둘러싸고 나무가 우거져야 하며, 조경이나 정원 따위로 나무를 망가뜨리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돈을 들이는 일은 교육이 될는지 모르나, 배움이나 가르침하고는 동떨어집니다. 돈벌이를 알려주는 일은 교육이 될는지 모르나, 삶이나 사랑하고는 멀어집니다. 아무쪼록, 어른과 아이가 모두 푸른 숲에서 삶을 노래하고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즐거운 하루를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4347.10.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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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유일해 베틀북 철학 동화 2
루드비히 아스케나지 지음, 헬메 하이네 그림, 이지연 옮김 / 베틀북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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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68


 

우리 서로 사랑하자

― 너는 유일해

 루드비히 아스케나지 글

 헬메 하이네 그림

 이지연 옮김

 베틀북 펴냄, 2002.1.20.



  아이들은 오롯한 숨결입니다. 몸은 어른과 견주어 조그맣지만, 아이들은 누구나 오롯하게 살아가는 숨결입니다. 비노바 바베라는 분이 쓴 글을 읽으니, 아이와 어른을 견주면서, 둘 모두 눈 둘이요 팔다리도 둘씩이라고, 크기만 다를 뿐 똑같은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될 적에 눈 하나에서 둘이 되지 않고, 눈 둘인 오롯한 몸으로 새롭게 깨어날 뿐이라고 얘기해요.


  아이들을 데리고 버스나 기차를 탈 때면, 표를 끊는 곳에서 으레 아이들을 ‘반표’로 여깁니다. 표값을 반토막 치르면 된다는 뜻이기는 하지만, 영 못마땅합니다. 어린이는 어린이표이지, 반표가 될 수 없어요. 어린이도 똑같은 한 사람이라, 어린이도 자리 하나를 어엿하게 차지하고 앉아야 합니다. 그러나, 적잖은 어른들은 어른이 앉을 자리가 없으면, 아이더러 일어서라 하면서 어버이 무릎에 앉으라고 재촉합니다. 어린이도 똑같이 표를 끊었는데 말이지요.



..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유명해진다고 저절로 친구를 얻을 수는 없답니다 … 흔들의자가 낡게 되자 다락방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어요. 흔들목마는 슬펐습니다. 햇살과 아이들 대신 온갖 잡동사니와 거미줄로 가득한 다락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하루는 검은 고양이 메피스토가 오더니 예전처럼 목마를 태워 달라고 졸랐어요. 흔들목마는 매우 기뻤지요. “네가 녹색으로 변할 때까지 목마를 탈 수 있단다.” ..  (8, 12쪽)



  밥상에 수저를 놓습니다. 어른 수저와 어린이 수저를 놓습니다. 어른 수저는 어린이 수저보다 큽니다. 어른 밥그릇은 어린이 밥그릇보다 커요. 그러나, 어린이도 어른도 똑같이 밥을 먹습니다. 똑같이 배고픕니다. 똑같이 배부르고 싶습니다. 먹는 부피가 다르지만, 둘은 모두 똑같은 숨결이요 목숨입니다.


  사회를 돌아봅니다. 사회에서는 사람들을 여러 갈래로 가릅니다. 졸업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가릅니다. 졸업장이 더 많은 사람과 몇 안 되는 사람을 가릅니다. 자격증이 있거나 경력이 길거나 짧은 틀로 가릅니다. 여기에다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고, 한국사람인지 이주노동자인지 가릅니다. 그러면, 이들은 서로 다른 일을 할까요? 이들이 맡은 몫은 얼마나 벌어질까요?


  힘이 센 사람은 짐을 더 많이 나를 테지요. 힘이 여린 사람은 짐을 덜 나를 뿐 아니라, 짐 하나를 못 나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몸이 아프면 그예 드러누워서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힘이 세어 짐을 많이 나르는 사람은 밥을 한 그릇 더 먹고, 짐을 하나도 못 나르고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한 그릇을 몸속에서 뱉어야 할는지 헤아려 봅니다. 아니겠지요. 외려 몸져누운 아픈 사람한테 더 나은 밥을 주어야 합니다. 아무런 짐을 나르지 않고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한테 가장 먼저 밥을 챙겨 주어야 합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한테 누구보다 먼저 밥을 챙겨 주어야 해요.



.. 고슴도치는 톱새에게 가서 가시를 뽑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사랑에 푹 빠졌기 때문에 뽑혀 나간 가시더미에선 노란 버섯과 산딸기가 열렸고, 조그만 고슴도치꽃이 피어났으며, 초록색 이끼가 자라났어요 … 다른 고양이들이 떠들어대는 것을 들은 시세로가 말했어요. “나와 질비가 왜 이야깃거리가 되는지 모르겠어. 포도주통에서 술에 취한 쥐가 나오더니 내 발에 머리를 얹지 않겠어. 내가 어떻게 그 쥐를 잡아먹을 수 있겠어? 뭐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지?” ..  (20, 26쪽)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서로 아끼면서 살아갑니다. 이 땅에 오직 하나인 내 목숨입니다. 이 지구별에 오직 하나인 내 숨결입니다. 이런 내 목숨처럼 내 이웃도 이 땅에 오직 하나인 목숨이에요. 오직 하나인 내 숨결마냥 내 동무도 이 지구별에서 오직 하나인 숨결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면서 이웃과 동무를 사랑합니다.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면서 나를 사랑합니다. 오직 하나인 목숨과 숨결인 줄 깨달으면서 즐겁게 어우러집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할 때에 즐겁게 웃는 삶인 줄 느끼면서 기쁘게 어깨동무를 합니다.


  루드비히 아스케나지 님이 글을 쓰고, 헬메 하이네 님이 그림을 담은 《너는 유일해》(베틀북,2002)를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따사롭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짤막짤막 담긴 이야기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생각을 기울입니다.


  우리는 서로 얼마든지 기쁘게 동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얼마든지 남남이 되어 고개를 돌리거나 등을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스레 손을 맞잡으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미워 하거나 괴롭히면서 제 밥그릇만 챙기려 할 수 있습니다.



.. 어부는 사람일까요, 물고기일까요? 아니면 사람도 물고기도 아닌 다른 무엇일까요? 어부는 삶에서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느꼈고, 물고기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그래서 작은 그물로 물고기를 잡았어요. 어부는 물고기를 집어들고는 다정하게 말을 걸었어요. “사랑스러운 친구야, 물로 돌아가고 싶다면 눈을 깜빡거리거나 팔딱거리는 걸로 충분해.” … 잉어는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탔어요. 스케이트를 잃어버린 소녀가 강가에 가서 잉어를 보았어요. “잉어에게 내 스케이트를 줘야겠어. 잉어가 자기 발에 딱 맞는 스케이트를 다시는 얻지 못할 테니까.” 소녀는 잉어에게서 스케이트를 빼앗을 수는 없었어요. 잉어가 정말로 즐겁게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으니까요 ..  (40, 50쪽)



  새들이 노래합니다. 숲에서 깃들며 노래하는 새는 누구한테나 맑은 노래를 베풉니다. 가을볕이 따사롭습니다.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는 해는 온누리를 골골샅샅 내리쬡니다. 바람이 숲을 가르고 바다를 가로지르며 온 마을을 감쌉니다. 언제나 흐르는 바람은 모든 사람과 목숨이 씩씩하게 살아가도록 푸른 내음을 실어 나릅니다.


  나 혼자 들어야 하는 멧새 노랫소리가 아닙니다. 나 혼자 쬐면 될 햇볕이 아닙니다. 나 혼자 마시면 될 바람이 아닙니다. 함께 누리고, 함께 즐기며, 함께 맞아들입니다. 내가 너를 돌보고, 네가 나를 보살펴요. 내가 너를 어루만지고, 네가 나를 쓰다듬어요.


  어른은 아이를 사랑으로 감쌉니다. 아이는 어른을 사랑으로 바라봅니다. 어른은 아이를 따뜻하게 안습니다. 아이는 어른한테 따뜻하게 안깁니다.



.. 사슴은 별이 반짝거리는 집 밖으로 나갔어요. 아이들이 사슴을 따라갔어요. 아이들은 이 크리스마스 트리가 너무 좋았지요. 크리스마스 트리가 말했어요. “축제를 벌이고 있는 숲으로 가자. 숲 속 친구들도 크리스마스 트리가 필요하니까.” 아이들은 사슴 두 마리를 따라갔어요. 거기에는 많은 동물들이 모여 있었지요. 모두들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기뻐했어요. 크리스마스 트리가 된 사슴이 노래를 부르자, 다른 동물들도 다 같이 불렀어요. 그러고 나서는 금빛 호두와 별 모양 비스킷을 선물로 나누어 주었어요. 푸르스름한 불빛이 숲 속으로 멀리 퍼져 나갔답니다 ..  (62쪽)



  사람이 낳은 아이와 짐승이 낳은 새끼가 저마다 사랑을 받으면서 자랍니다. 사람도 짐승도 어린 숨결이 즐겁고 기쁘게 뛰놀도록 애씁니다. 어릴 적에 마냥 신나게 뛰놀 수 있을 때에 몸이 튼튼하게 자랍니다. 햇볕을 쬐면서 까무잡잡하게 타고, 숲바람을 마시면서 노래를 부르며, 두 다리로 이 땅을 박차고 달릴 적에 아름답게 자랍니다.


  풀 한 포기가 밥이 됩니다. 꽃 한 송이가 상그레 웃음짓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어서 올라타라며 부릅니다.


  풀을 먹고 자라기에 풀내음 가득한 몸이 되고, 푸른 생각을 짓습니다. 꽃을 바라보며 자라기에 꽃웃음 그득한 마음을 가꾸어, 따스한 사랑을 짓습니다. 나무와 어울려 놀며 자라기에 나무처럼 듬직하고 믿음직한 마을지기로 우뚝 서서, 씩씩하게 꿈을 이룹니다.


  너는 오직 하나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인 아름다운 숨결이 오직 하나 있는 지구별에서 사랑스레 바라보면서 춤을 춥니다. 4347.9.2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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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우유와 소보로빵 마음이 자라는 나무 8
카롤린 필립스 지음, 전은경 옮김, 허구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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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16



너도 내 동무이니?

― 커피우유와 소보로빵

 카롤린 필립스 글

 허구 그림

 전은경 옮김

 푸른숲주니어 펴냄, 2006.2.3.



  요즈음 시골에서는 까치 우짖는 소리를 듣기 만만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시골에서 까치를 무던히도 싫어합니다. 아니, 오늘날 시골에서는 까치를 끔찍하게 미워합니다.


  어느 은행은 무척 오랫동안 까치를 이녁 은행 상징그림으로 썼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슬그머니 까치 그림을 치웠습니다.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니며, 이때에 학교에서 배우기를, 까치는 언제나 반가운 손님을 부른다 했어요. 요즈음은 어떠할까요? 요즈음도 학교에서 이렇게 가르칠까 궁금합니다.



.. 바로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샘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몸이 굳어 버렸다. “저기, 깜둥이다!” … 샘은 갑자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듯했다. 이렇게 즐거움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이 도시의 한쪽 거리에서 불과 두 시간 전에 돌과 화염병이 날아다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  (19, 37쪽)



  까치나 멧새나 텃새가 곡식을 쪼아먹는다고 합니다. 시골에 있는 새들이 밭뙈기에 심은 콩알을 마구 파먹는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과 새와 벌레가 콩을 한 알씩 나누어 먹었다 해서 ‘콩 석 알’을 노래했다는데, 이런 노래는 새마을운동 언저리부터 아주 사그라들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시골마다 ‘석면(슬레트) 지붕’을 씌우도록 들볶았을 뿐 아니라, 온 들과 숲에 농약을 뿌리라고 다그쳤으며, 흙밭으로 된 고샅과 마당을 시멘트를 들이부어 메꾸라고 닦달했습니다.


  가만히 보면, 새마을운동 때부터 시골에서 아이들이 사라집니다. 새마을운동 때부터 시골은 텅 빈 외톨이가 됩니다. 그리고, 시골에서 아이들이 사라지면서, 시골 어른들이 새를 미워하거나 싫어합니다. 시골에서 새와 놀거나 노래할 아이들이 사라지면서, 시골 어른들은 새하고 콩 한 알 나누던 마음을 몽땅 잃거나 잊고 맙니다.



.. 대체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고향으로? 집으로? 그것이 어디 있는데? 태어나서 자라던 마을과 부모님, 그리고 가족은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에리트레아는? 에리트레아는 이제 전쟁이 끝나고 한창 제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샘 엄마는 새롭게 세워지는 에리트레아에 이렇다 할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에리트레아보다는 독일에서 사는 게 더 익숙했다 … 사진 속의 아이들은 샘처럼 갈색 피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공통점은 그게 전부였다. 샘은 자신이 그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는 모습을 도무지 머릿속에 그려 볼 수가 없었다 ..  (64, 69쪽)



  옛날에는 새와 벌레하고 콩을 한 알씩 나누어 먹을 뿐 아니라, 겨울에는 빈 그릇에 곡식을 덜어서 바깥에 내놓기도 했습니다. 눈 덮인 들과 숲에서 텃새가 굶거나 추위에 떨까 근심하면서, 시골사람은 누구나 으레 이녁 밥그릇에서 곡식을 덜어 기꺼이 ‘이웃’하고 나누었어요. 이웃이란, 바로 토끼요 새이며 작은 숲짐승입니다.


  사람만 이웃이 아닙니다. 사람만 서로 동무가 되지 않습니다. 예부터 어느 나라 어느 겨레에서든, 사람들은 누구나 짐승하고도 이웃과 동무로 지냈어요. 새하고 서로 아기자기하게 노래하며 어울렸어요.


  시골에서 벌과 나비와 벌레가 꽃가루받이를 해 줍니다. 벌과 나비와 벌레는 새가 잡아먹습니다. 벌레가 너무 많으면 애써 꽃가루받이를 해 주었어도 모두 갉아먹겠지만, 새가 벌레를 알맞게 잡아먹습니다. 그리고, 새는 기쁘게 노래하지요. 마을마다 온갖 새가 찾아들면서, 들판마다 갖은 새가 날아다니면서, 사람들한테 맑고 그윽하며 구수하고 싱그러운 노래를 들려줍니다.


  고단하게 일하던 사람들은 새노래를 듣고 새로운 마음이 됩니다. 마당에서 고샅에서 들에서 숲에서 냇가에서 놀던 아이들은 새노래를 들으며 새로운 꿈을 키웁니다. 새가 들려주는 노래는 참말로 새노래입니다. 새가 불러서 새노래인 한편, 새로운 사랑과 삶을 속삭이기에 새노래입니다.



.. 샘에게 피부 색깔만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전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문제였다. 독일사람들 중에는 피부색을 진한 갈색으로 바꾸기 위해, 한여름에 햇볕에 나가 그을리려고 안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알았어? 네 피부는 죽을 때까지 갈색이야. 그리고 난 내 아들의 피부가 희어지는 것 싫어! 지금 이대로가 좋아. 정말로 중요한 건 여기, 그리고 이쪽에 뭐가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야!” 엄마는 이렇게 말하며, 샘의 머리와 가슴을 쿡쿡 찔렀다 ..  (83, 86쪽)



  카롤린 필립스 님이 빚은 푸른문학 《커피우유와 소보로빵》(푸른숲주니어,2006)을 읽습니다. ‘커피우유’는 독일에서 흰둥이가 검둥이를 놀리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소보로빵’은 독일 이주노동자가 낳은 검둥이 아이가 흰둥이 독일 아이를 바라보며 똑같이 놀리려고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흰둥이는 검둥이를 놀리고, 검둥이는 흰둥이를 놀립니다. 그러면, 이들 사이에서 누렁둥이는 어떤 말로 서로서로 마주하거나 바라볼까요. 우리는 우리 둘레에 누가 어떻게 있다고 여기는가요. 흰둥이, 검둥이, 누렁둥이, 이렇게 살빛으로 바라보는가요? 아니면, 너도 나도 우리도 모두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면서 바라보는가요?



.. “그냥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한 사람들도 돌을 던지는 것에 반쯤은 찬성한 거야. 머릿속으로는 같이 돌을 던진 거나 마찬가지란다. 다만 나서서 던질 용기가 없었을 뿐이지.” … 엄마 아빠의 피부색이 하얗다면 난 어땠을까. 사람들이 거리에서 날 쳐다보는 일도 없을 거고, 또 내가 독일어를 잘 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도 않을 테지. 그런데 내가 독일어 말도 대체 어느 나라 말을 잘 해야 한다는 거지? ..  (93, 172∼173쪽)



  한국에도 이주노동자가 대단히 많습니다. 한국에 시집온 아가씨가 아주 많습니다. 오늘날 시골에서 한국 아가씨가 낳은 아이는 차츰 줄어듭니다. 도시에서도 외국 아가씨가 낳은 아이가 차츰 늘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도 외국 아가씨가 낳은 아이는 참 얄궂게 따돌림이나 푸대접을 받습니다.


  우리는 어떤 눈길로 서로서로 바라보는가요. 눈을 감고 헤아려 보셔요. 눈을 감으면 이녁 살빛이 보이는가요? 손으로 살결을 쓰다듬으면 살빛을 알 수 있는가요? 목소리로 들으면 살빛 다른 겨레인 줄 알아챌 수 있나요?


  몸뚱이라는 껍데기가 아닌, 몸뚱이에 깃든 넋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요. 내 동무가 누구인지 똑똑히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요.


  까치도 까마귀도 참새도 제비도 모두 우리 이웃이면서 동무입니다. 멧토끼도 멧돼지도 노루도 고라니도 모두 우리 이웃이면서 동무입니다. 잠자리도 개똥벌레도 사슴벌레도 하루살이도 모두 우리 이웃이면서 동무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주노동자’라는 이름은 거추장스럽습니다. 노동자이면 그냥 노동자입니다. 그리고, ‘노동자’라는 이름도 거추장스럽습니다. 그저, 우리 ‘이웃’이요 ‘동무’입니다. 함께 일하는 ‘일동무’이고 ‘일이웃’입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놀이를 즐기는 ‘놀이동무’이며 ‘놀이이웃’입니다.


  어깨를 겯고 노래해요.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노래를 불러요. 밥 한 그릇씩 장만해서 도르리도 하고 조촐히 잔치도 열어요. 삶을 아끼고 사랑해요. 오늘 하루를 아끼면서 사랑해요. 다 같이 웃는 삶을 생각해요. 다 같이 노래하면서 꿈을 키우는 하루로 살아요. 4347.9.2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른책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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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대소동 - 저학년 문고 3018 베틀북 리딩클럽 9
미셸 코르넥 위튀지 글, 레온 베르샤드스키 그림, 류재화 옮김 / 베틀북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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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66


 

나한테는 내 모자가 즐거워

― 모자 대소동

 미셸 코르넥 위튀지 글

 레온 베르샤드스키 그림

 류재화 옮김

 베틀북 펴냄, 2001.4.15.



  내 모자는 네 모자보다 좋지 않습니다. 네 모자는 내 모자보다 좋지 않습니다. 내 옷은 네 옷보다 좋지 않습니다. 네 옷은 내 옷보다 좋지 않습니다. 내 모자는 내 몸이나 쓰임새에 맞는 모자입니다. 내 옷은 내 몸과 삶에 맞는 옷입니다. 그래서 내 모자나 옷은 나한테 쓸모가 있으며 나한테 애틋하고 나한테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길동무가 됩니다. 네 모자나 옷은 내가 아닌 바로 너한테 쓸모가 있으면서 애틋하고 이야기샘이 됩니다.


  어떤 모자를 쓰기에 더 훌륭하거나 뛰어나지 않습니다. 남들이 쓰는 모자를 써야 나도 그들과 같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남을 좇아야 하지 않고, 남이 나를 좇아야 하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나로 있으면서 내 삶을 누립니다. 남들이 내 삶을 따라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남들 뒤꽁무니를 좇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 미모사 부인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창가에 놓아 둔 부인의 일본식 정원 모자에 물을 주었어요. 부인의 모자는 하나의 완전한 세상 같았지요 ..  (5쪽)



  나무는 모두 ‘나무’라는 이름으로 하나입니다. 그런데, 나무에는 참나무와 잣나무와 소나무와 밤나무처럼 저마다 다른 갈래로 묶을 수 있습니다. 다 같은 나무이면서 다 다른 나무입니다. 참나무를 보아도 떡갈나무와 신갈나무와 굴참나무가 있어요. 참나무라면 다 같은 ‘참나무’이고 ‘도토리’를 맺지만, 다 다른 참나무이면서 다 다른 도토리예요. 더 나아가, 굴참나무를 들여다보셔요. 굴참나무가 만 그루 있다고 한다면, 만 그루 굴참나무가 어떠할까요? 생김새가 똑같은 굴참나무가 있을까요? 똑같은 잎사귀가 하나라도 있을까요? 똑같은 도토리가 한 톨이라도 있을까요?


  참으로 놀랍게도, ‘같은 갈래 같은 이름’인 나무라 하더라도 생김새가 모두 다를 뿐 아니라, 한 그루에서도 잎사귀와 열매가 모두 다릅니다. 해마다 새로 내놓는 잎사귀와 열매도 모두 달라요.


  똑같은 목숨이란 없습니다. 똑같은 목숨이란 태어날 수 없습니다. 똑같은 목숨으로서 똑같은 삶을 누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 “미모사 아줌마 모자는 다른 거랑은 달라요! 그 모자에는 진짜 식물이 산다구요. 그래서 물을 주는 거예요!” ..  (5, 13쪽)



  사람들은 학교를 다니거나 회사를 다닙니다. 학교에서는 다 다른 아이들한테 다 똑같은 지식을 가르칩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꿈과 사랑을 키우도록 돕는 학교가 아니라,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똑같은 지식을 쌓아 다 똑같은 점수를 받도록 하는 한편, 다 똑같은 일자리를 얻어 다 똑같은 돈을 벌도록 짜맞추는 학교입니다.


  학교가 하는 노릇이 모두 똑같기 때문에, 오늘날 지구별에서는 제도권학교와 대안학교 모두 제길을 걷지 못합니다. 다 다른 아이들한테 다 다른 삶을 보여주면서 다 다른 길을 다 다른 아이들 스스로 사랑하고 꿈꾸도록 하지 않는다면, 어떤 틀로 짠 학교라 하더라도 비틀거릴밖에 없습니다.



.. 그날 밤 내내, 동글이 씨는 일본식 정원 모자 꿈을 꾸었답니다. 꿈 속에서 모자들은 산과 사막과 바다 위를 새처럼 날아다녔어요. 하늘을 가득 메우고는 아름다운 춤을 추기도 했답니다. 그러더니 바주빌 마을 위로 사뿐사뿐 내려와서 ..  (32∼33쪽)



  미셸 코르넥 위튀지 님이 글을 쓰고 레온 베르샤드스키 님이 그림을 그린 《모자 대소동》(베틀북,2001)을 읽습니다. 짧고 굵은 줄거리가 흐르는 《모자 대소동》은 아주 쉽고 단출하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한테는 내 모자가 즐겁다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어요. 어느 작은 마을에 ‘유행’처럼 ‘일본식 정원 모자’가 널리 퍼지지만, 똑같이 생긴 모자는 아닙니다. 똑같이 생길 수 없는 모자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자한테는 물을 주어야 하거든요. 사랑으로 돌보면서 아껴야 하거든요. 처음에는 ‘다 똑같이’ 보일는지 모르나, 모자를 가꾸는 사람에 따라서 모자는 빛깔과 냄새와 무늬와 쓰임새가 모두 달라집니다.


  텃밭에서 일구는 남새는 텃밭을 돌보는 사람 손길에 따라 달라집니다. 꽃밭에서 키우는 꽃은 꽃밭을 가꾸는 사람 손길에 따라 바뀌어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즐거울까요? 내가 나인 줄 제대로 바라보고 느끼면서 살아갈 때에 즐겁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때에 아름다울까요? 내가 나인 줄 똑똑히 바라보고 깨달아 사랑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내가 내 삶을 누려야 내 이웃과 동무가 함께 즐겁습니다. 내가 내 삶을 아끼고 사랑해야 내 이웃과 동무가 서로 아름답습니다. 4347.9.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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