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호스
딕 킹 스미스 지음, 김서정 옮김, 데이비드 파킨스 그림 / 웅진주니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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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09



그대는 ‘괴물’인가, ‘바다이웃’인가?

― 워터 호스

 딕 킹 스미스 글

 데이비드 파킨스 그림

 김서정 옮김

 웅진주니어 펴냄, 2003.11.30. 8000원



  파란띠제비나비 애벌레가 우리 집 마당에서 놉니다. 우리 집 마당에 우람하게 선 후박나무에서 볼볼볼 기면서 후박잎을 갉는 애벌레는 사각사각 소리를 제법 크게 내면서 통통하게 살이 찝니다. 애벌레가 바삐 잎사귀를 갉아먹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꽤 빠르게 잎사귀가 사라집니다. 살이 많이 찐 애벌레는 한 마리씩 번데기가 됩니다. 퍽 오랫동안 번데기가 되어 잠을 자는 애벌레는 저마다 알맞춤한 때를 맞이하면 눈부시게 깨어나는 멋진 나비로 거듭나겠지요.



바람이 잠깐 잦아든 틈에 저 아래 바닷가에서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를 모두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바다가 뭘 실어 왔을까?’ 하고 커스티는 생각했다. 내일 바닷가로 나가 보면 뭘 보게 될까? 모두들 바다 빗질을 좋아했다. 투덜이 할아버지조차도 안 그런 척하면서 그랬다. (12쪽)



  영국에서 1990년에 《The Water Horse》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오고, 한국에서는 2003년에 《바다의 선물 크루소》라는 이름으로 처음 옮긴 뒤, 2008년에 《워터 호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다시 나온 어린이책을 읽습니다.


  어린이문학 《워터 호스》가 있기에 영화 〈워터 호스〉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문학하고 영화는 사뭇 달라요. 두 작품에 나오는 무대나 때는 비슷하지만, 어린이문학은 시골에서 조용히 사는 집안에서 두 아이(누나와 동생)와 할아버지와 어머니, 이렇게 네 사람이 ‘워터 호스’를 만납니다. 이와 달리 영화는 세계대전이 한창인 유럽에서 어린 아이(동생 혼자)가 ‘워터 호스’를 만나고, 누나는 딱히 눈길을 보내지 않으며, 어머니도 나중에서야 알아차립니다.


  어린이문학 《워터 호스》는 아이들이 ‘크루소’라는 이름을 붙인 ‘바다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듬뿍 보여줄 뿐 아니라, 아이를 둘러싼 어른(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들이 모두 이 바다이웃을 알뜰히 아끼는 숨결을 보여줍니다. 이와 달리 영화 〈워터 호스〉에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안 나오고, 어머니도 마지못해서 바다이웃을 바라볼 뿐이며, 누나는 아예 바다이웃한테 눈길조차 안 두는 얼거리로 나와요.



“우리가 먹은 거 아니에요. 엄마, 정말이에요. 그리고 진짜 바다 괴물이 있어요.” 커스티가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커스티. 너희 둘이서 새우인지 가재인지, 뭘 집에 가져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비싼 정어리를 그것한테 낭비할 순 없어. 당장 갖다 버려라. 알아듣겠니?” (33쪽)



  딕 킹 스미스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워터 호스》도 틀림없이 ‘유럽에서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고단한 나날’이 바탕이지만, 이 어린이문학에서는 전쟁 이야기가 한 마디도 안 나옵니다. 도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조용히 삶을 짓는 어른하고 아이는 먼먼 옛날부터 내려온 이야기에 나오는 바다이웃을 비로소 만난 기쁨을 한껏 누리면서 ‘삶이란 무엇이고, 이웃이란 누구인가’ 같은 대목을 찬찬히 짚고 다룹니다.


  그러고 보면, 딕 킹 스미스 님은 《소피는 농부가 될 거야》라든지 《도도새는 살아 있다》라든지 《레이디 롤리팝, 말괄량이 길들이기》라든지 《생쥐 볼프강 아마데우스》 같은 작품에서 ‘여러 짐승을 알뜰히 아끼는 넋’을 슬기롭게 보여줍니다. ‘엄청난 괴물’이 아니라 ‘덩치가 크든 작든 모두 사랑스러운 이웃’이라는 대목을 따스한 눈길로 보여줍니다.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말했다. “내가 쟤들만 했을 때 이런 걸 발견하고 싶어서 얼마나 안달을 했는지 아니? 그땐 이런 동물에 관한 이야기들이 참 많았는데, 난 그걸 죄다 믿었지. 하지만 이렇게 직접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35∼36쪽)



  한국에서는 어떤 바다이웃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는 아마 ‘워터 호스’처럼 커다란 바다이웃을 만나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남녘도 북녘도 바닷가는 아직 ‘쇠가시그물(철조망)’이 가득하고, 군인이 총을 들고 막아서는 곳이 많습니다. 휴전선하고 좀 떨어진 바닷가에는 공장이 많을 뿐 아니라, 핵발전소까지 있어요. 공장이나 핵발전소가 없는 바닷가는 관광지로 꾸미는데, 관광객이 버리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아요.


  호젓한 바닷가라든지, 사랑스럽고 조용한 바닷마을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한국입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바다에서 고래를 만나기도 어렵지요. 깊은 숲마다 송전탑을 박아대니, 범은 일찌감치 씨가 말랐고, 곰도 살 터가 없습니다. 이리나 늑대나 여우도 남녘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멧돼지하고 고라니가 조금 있다고 할 텐데, 이마저도 아이들이 만나기 어려워요. 오늘날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도시에서 학교하고 학원만 오가느라, 밭일을 거들지도 못하고 밭일이 무엇인지조차 몰라요.



엄마는 그 동물을 당장 쫓아내라며 너무 딱딱거린 일에 대해서 은근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 동물이 뭐가 됐든지 간에 아주 특이한 녀석이었고, 아이들은 몹시 들떠 있는데다가, 할아버지까지 그랬다. 세상에, 할아버지 얼굴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렇게 행복해 보인 적은 없었다! 지금 할아버지는 불평 한마디 없이 앉아서 아침을 먹고 있는 중이다. (44쪽)



  밭에서 호미를 갖고 노는 아이들이 지렁이를 만납니다. 에그머니 하고 놀라지도 않습니다. 지렁이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며 흙을 뿌려서 몸이 뜨거워지지 않도록 하고는 얼른 땅속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흙을 쪼다 보면 공벌레도 나오고 온갖 풀벌레가 나올 뿐 아니라, 때로는 개미집이 무너지고, 어느 때에는 지네가 또아리를 틀고 쉬다가 깜짝 놀라서 부리나케 내뺍니다.


  한여름 풀밭이나 텃밭에서는 방아깨비와 메뚜기가 폴짝폴짝 뜁니다. 사마귀는 죽은듯이 가만히 있다가 먹이를 낚아챕니다. 잠자리가 내려앉고 나비가 납니다. 나무에는 곧 나비로 거듭나고 싶은 여러 애벌레가 잎사귀를 갉아먹느라 바쁩니다.


  자그마한 시골마을에서 아이들은 자그마한 이웃을 만납니다. 자그마한 이웃은 자그마한 손길에도 그만 다치거나 죽을 수 있습니다. 자그마한 이웃은 자그마하면서 따스한 손길을 기다립니다.



“사람들이 크루소를 잠깐 보더라도 자기가 뭘 봤는지 잘 모를 거다. 어쩌면 그냥 통나무 조각이거나 물 위에 비친 무슨 그림자거나, 튀어오르는 연어거나, 아니면 뛰노는 수달이거나, 물살이 실려 떠다니는 나뭇조각이라고 생각하겠지. 뭔지 잘 모를 거야. 그 호수에 수마가 산다는 걸 아는 사람은 우리뿐인걸.” 아빠가 말했다. (135∼136쪽)



  바다에서 만난 ‘워터 호스’는 괴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수마’라고 하기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이야기할 수 있어요. 바다에서 사는 이웃입니다.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노래하면서 이 지구별에서 삶을 짓는 어여쁜 이웃입니다.


  우리 바다가 깨끗하다면 북해에서 놀던 커다란 바다 이웃이 대서양을 지나고 태평양을 건너서 동해나 남해나 서해로도 나들이를 올 수 있을까요? 드넓은 바다에서 말 없이 말을 주고받는 고래가 우리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을 치면서 그윽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바다가 깨끗하고, 삶터가 깨끗하며, 어른들 마음이 깨끗할 적에, 아이들은 새로운 꿈을 키울 만합니다. 바다가 더러워지고, 마을이나 도시나 시골이나 숲마다 쓰레기와 핵발전소와 송전탑과 군부대가 늘면서 망가지면, 이러면서 어른들 마음도 무너지거나 더러워지면, 아이들은 새로운 꿈을 키우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아이들하고 어떤 곳에서 살아야 즐거울까요? 4348.8.13.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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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박경서 외 / 철수와영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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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23



전쟁무기와 핵발전소로는 인권을 못 지킨다

― 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

 박경서, 김창남, 오인영, 조효제, 안수찬, 이상재, 김희수, 이찬수, 오창익

 철수와영희 펴냄, 2015.8.15. 15000원



  아침에 미역국을 끓입니다. 미역국은 우리 식구가 즐겁게 먹습니다. 저마다 제 국그릇에 미역국을 덜어서 맛나게 먹습니다. 더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더 떠서 먹고, 배가 부르면 그만 먹습니다.


  미역국을 받는 아이들은 서로 종알종알 조잘조잘 노래를 부르듯이 놀면서 밥술을 비웁니다. 밥 한 술을 뜨면서 두 마디를 하고, 밥 한 술을 입에 넣으면서 세 가지 놀이를 하며, 밥 한 술을 씹어서 삼키는 사이에 이리 뛰고 저리 달립니다.


  아이들로서는 언제 어디에서나 놀이가 되니까, 밥상맡에서도 밥놀이입니다. 놀면서 크고, 놀면서 생각을 키우며, 놀면서 하루가 즐겁습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치지 않고 뛰어놉니다. 이 아이들을 바라보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삶을 짓는 뜻이란 바로 웃음이랑 노래랑 이야기로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인권의 도시 제네바는 다른 한편으로 환경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도시환경에 대한 관리가 치밀해요 … 우리나라의 보수세력들이 생각하듯이 인권이라는 게 북한을 압박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저는 인권에서만큼은 보수니 진보니 할 것 없이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1, 27쪽)


자본의 속성은 기본적으로 이윤추구예요. 그러다 보면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상품만 생산합니다. 획일화되지요. 우리가 TV를 켜면 10대들을 위한 노래만 흘러나온다고 불만을 털어놓지요. 10대들은 또 재미도 없는 막장드라마만 보느냐고 기성세대들을 비웃습니다. (84쪽)



  박경서 님을 비롯해 모두 아홉 사람이 함께 이야기꽃을 펼쳐서 묶은 《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철수와영희,2015)를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인권’을 다루는 책이고, 인권을 ‘인문학’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책입니다.


  인권은 “사람 권리”나 “사람 된 권리”나 “사람다운 권리”를 가리킵니다. 사람으로서 누리거나 즐기는 권리란 “사람으로서 살 기쁨”이나 “사람답게 누릴 아름다움”이나 “사람이 되어 가꾸는 사랑”이라고 할 만해요.


  인문학은 “사람이 지은 삶”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사람이 지은 삶”은 말과 문학과 역사와 생각이라 할 테고, ‘인문학으로 인권을 바라본다’고 한다면, 사람으로서 이 땅에 지은 삶을 바탕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누릴 아름다움과 사랑을 바라보려고 한다는 뜻이리라 느낍니다.



한국에서는 4년제 대학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 언론사 시험 치고 기자가 됩니다. 그들은 언론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고, 한국 대학 교육의 특성상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교양도 매우 부족합니다. 오직 논술과 작문의 글쓰기만 집중적으로 연습하여 기자가 됩니다. (171쪽)



  법에 적히기에 지켜 주어야 할 인권이 아닙니다. 법에 적히지 않아도 아끼고 보살필 수 있어야 할 인권입니다. 법에 적힌 만큼 지켜 주면 되는 인권이 아닙니다. 법에서 밝히지 않아도, 사람들 스스로 어깨동무하면서 아름다운 삶과 사랑스러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할 인권입니다.


  인권조례가 있어야 인권을 지킬까요? 아닙니다. 내가 나를 참다이 바라보면서 제대로 아낄 수 있어야 인권을 지킵니다. 네가 나를 꾸밈없이 바라보고, 내가 너를 스스럼없이 마주하면서, 기쁘게 어깨동무하는 자리에서 인권을 지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를 보면, 법에 적힌 인권을 제대로 지키는 일이 드물기도 하고, 법에 안 적힌 인권은 아예 안 쳐다보기까지 합니다. 함께 사는 이 땅을 헤아리기보다는 다툼과 경쟁으로 내모는 사회 얼거리입니다. 서로 돕는 이 터를 살피기보다는 저마다 밥그릇을 먼저 챙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다그치는 사회 틀입니다.



우리나라 빈곤층은 아르바이트, 계약직, 비정규직과 실업의 악순환을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 국가가 부강해진다고 해서 알아서 국민들의 가난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게 역사적 교훈입니다. 우리가 요구해야 해요. 복지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194, 196쪽)



  ‘서울’은 여러 ‘지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서울은 언제나 ‘서울’이기만 하면서, 이 나라에서 한복판이나 기둥으로 여기곤 합니다. 서울에 있어야 높이 여기기 일쑤이고, 서울에 있지 않으면 낮게 깎아내리기 마련입니다. 서울에서 살며 ‘서울 바깥’을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서울 바깥’에서 사는 사람들 스스로 ‘서울 바깥’을 깎아내리곤 합니다.


  사람들은 자꾸 서울로 모이고, 시골이나 작은 도시는 차츰 줄어듭니다. 아무리 커다란 도시가 되어도 ‘서울이 아니’면 ‘안 된다’고 여겨 버릇하고, ‘서울 아닌 커다란 도시’ 둘레에서는 ‘서울로라도 못 가면 다른 큰 도시로라도’ 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흐름은 시골에서도 똑같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제 고장이나 마을을 사랑하라는 마음을 배우기 어렵습니다. 신문도 방송도 인터넷도 책도 으레 ‘서울 이야기’입니다. 어쩌다가 서울 바깥 이야기가 나오면 ‘여행이나 관광’으로 ‘서울 바깥 이야기’를 다룰 뿐입니다. 한마을에서 즐겁게 뿌리내려 살아가는 사람들 수수한 이야기를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이나 책에서 거의 안 다루거나 제대로 못 다룰 뿐 아니라, 교과서에서도 이 대목을 못 짚습니다. 시골학교도 도시학교나 서울학교하고 똑같은 교과서를 쓰니, 시골학교를 다니더라도 ‘서울 교육’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서울을 으뜸으로 치고, 큰 도시를 버금으로 치며, 아무튼 시골을 떠나면 딸림으로 칩니다. 시골에 남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나마 읍내로 나가야 한다고 여기고, 읍내가 아니면 면소재지라도 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리하여, 시골에서 ‘여느 마을’에 남는 어린이나 젊은이는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은 좋든 싫든 시시콜콜 알게 되지만, 정작 내 삶의 터전에서 일어나는 일은 제대로 알 수 없는 불합리한 현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울 중심주의는 오래전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는 지역을 무시하는 서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서울만 바라보는’ 지역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 운이 좋아 서울로 간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지역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자리잡는 게 상식이에요. (206쪽)



  《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는 아홉 사람이 아홉 갈래 눈길로 인권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법에 적힌 인권이 아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서 누리는 사람다운 삶을 바라보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법에서 다루든 안 다루든, 법을 알든 모르든,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서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차근차근 짚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두레나 품앗이나 울력은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인권이라고 할 만합니다. 예부터 마을살이는 서로 아끼고 보살필 줄 아는 ‘인권사랑’이었다고 할 만합니다. 총이나 칼이 아니라 낫이랑 호미를 벼려서 흙을 일구는 사람은 흙을 아낄 뿐 아니라 ‘흙에 기대어 흙을 돌보는 사람’을 함께 아낍니다. 흙에서 나는 열매를 먹는 사람은 ‘흙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를 모두 아낄 뿐 아니라, ‘풀과 나무에 기대어 사는 모든 목숨’을 골고루 아낍니다.


  인권이란 언제나 평등이면서 평화입니다. 평등하지 않은 인권은 없습니다. 평화롭지 않은 인권은 없습니다. 사랑스럽지 않은 인권은 없고, 아름답지 않은 인권은 없습니다. 나한테만 도움이 될 인권이 아니라, 나와 너 모두한테 도움이 되면서, 풀과 새와 바람과 햇볕한테도 함께 도움이 될 인권입니다.



국가보안법은 역사적 기원을 봐도 그 성격을 알 수 있어요. 일제강점기 때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가져다 베낀 겁니다. 치안유지법이라는 게 천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자를 반역자로 처벌한다는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당시에 독립운동을 하거나 일제강점에 반대하는 사람은 죄다 범법자가 되는 거였어요. (243쪽)



  통일과 평화를 바란다면 ‘통일법’이나 ‘평화법’이 있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이나 ‘치안유지법’ 따위가 아닙니다. 미사일이나 탱크로는 평화를 지키지 않습니다. 오직 평화로운 손길과 마음일 때에 평화를 지킵니다. 괭이로 흙을 갈고, 호미로 흙을 다지며, 낫으로 풀을 베는 손길일 때에 평화를 나눕니다.


  밥 한 그릇을 함께 먹는 사람이 평화를 지키거나 나눕니다. 총부리를 겨누는 사람은 평화를 지키지도 않고 나누지도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이 대목을 배워야 합니다. 얘야,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주먹을 흔들거나 발길질을 한다면 평화로울까, 아니면 서로 빙그레 웃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놀 때에 평화로울까? 아이들은 곧 알 테지요. 인권이나 인문학이라는 말은 몰라도, 아이들은 평화로운 사랑과 아름다운 삶을 알 테지요.



후쿠시마에서 원전사고가 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후쿠시마 지역 주민이고요. 그런데 이 지역에 원전이 들어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일본 주요 대도시에 전기를 제공하기 위해서잖아요. 결과적으로 다수를 위해 지역의 소수자가 희생하게 된 겁니다.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강정, 신고리원전의 전기를 실어 나를 송전탑이 지어지는 밀양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305쪽)



  일본 후쿠시마에서 터진 핵발전소 때문에 후쿠시마에서 살던 사람은 거의 다 죽었고, 후쿠시마는 이제 아주 오랫동안 ‘버려진 땅’이 되어야 합니다.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터졌으니 ‘도쿄사람(서울사람)’은 걱정이 덜 하다고 할 텐데, 참말 도쿄사람은 걱정이 덜 할까요? 도쿄사람은 도쿄에서 핵발전소가 안 터져서 가슴을 쓸어내릴 만할까요? 도쿄가 아닌 ‘일본 다른 이웃’이 핵발전소 때문에 죽고 사라졌어도 걱정이 없을까요?


  인권과 평화라고 한다면, 해군기지는 강정에도 인천에도 속초에도 부산에도 들어설 수 없습니다. 인권과 평화라고 한다면, 송전탑은 밀양에도 청도에도 대전에도 서울에도 들어설 수 없습니다. 참말 어디에 해군기지나 송전탑을 때려지어야 할까요? 참말 어디에 군부대를 들이거나 전투기와 잠수함과 핵무기 따위를 거느려야 할까요?


  아무 곳도 없습니다. 해군기지가 들어서야 할 자리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송전탑이나 핵발전소가 들어서야 할 자리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이제는 전쟁무기가 아닌 평화로운 손길로 사람다운 삶(인권)을 지키는 길을 생각하고 찾아야 합니다. 이제는 대량소비와 대량생산을 되풀이하는 자본주의 대량발전이 아닌, 지역발전과 깨끗한 발전과 아름다운 삶(평화)을 가꾸는 전기를 살피고 헤아려야 합니다.


  《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는 인권이 묻는 말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문학을 다룹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대통령이나 정치꾼이나 지식인도 이야기를 해야 할 테지만, 다른 사람더러 이야기를 하라고 맡기거나 떠넘기지 말고, 여느 아이들하고 살아가는 여느 어버이요 어른인 우리 스스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인권은 무엇이고, 인권을 가꾸는 길은 무엇이며, 인권을 사랑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하루가 무엇인지, 바로 우리 스스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4348.8.11.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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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에 끝내는 영화영작 : 기본패턴 4시간에 끝내는 영화영작 시리즈
Mike Hwang 지음 / 마이클리시(Miklish)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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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98



영어를 배우고, 말을 배운다

― 4시간에 끝내는 영화 영작, 기본 패턴

 Mike Hwang 글

 Miklish 펴냄, 2014.8.15. 11800원



  《4시간에 끝내는 영화 영작》(Miklish,2014)이라는 얇으면서 단단한 책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얇기에 참 얇네 하고 여길 만한데, 막상 책을 펼치면 생각처럼 얇지 않은 책인 줄 알 수 있습니다. 책이름은 ‘네 시간’이면 끝낼 수 있다고 말하지만, 막상 나흘이나 넉 달이 걸릴 수 있으며, 네 해를 들여도 “영어로 글쓰기”라든지 “영어로 말하기”를 못 할 수 있어요.


  왜 그러할까요? 왜 네 시간 만에 영어로 글을 쓰거나 말을 할 수도 있는데, 왜 네 해를 들여도 영어로 글을 못 쓰거나 말을 못 할 수 있을까요?



왜 한국인들은 10년 이상 영어를 배우는데도, 600 시간 넘게 영화를 봐도 영어가 들리지 않는 걸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스스로 옳게 발음한다고 믿는 단어들이 실제로는 대부분 다르게 발음되기 때문입니다. (8쪽)



  인터넷이 발돋움한 요즈음에는 유투브에 들어가서 지구별 여러 나라 동영상을 무척 손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투브에서 온갖 동영상을 찾아보면, ‘표준 영어’로 이야기하는 동영상도 많으나 ‘고장에 따라 달리 쓰는 영어’라든지 ‘사람마다 달리 쓰는 영어’로 이야기하는 동영상도 많습니다.


  표준 영어만 생각한다면 이럭저럭 말을 익힐 테지만, 미국이나 영국에서 사는 사람은 표준 영어만 쓰지 않습니다. 중국말도 이와 같아요.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표준 중국말’을 들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너른 땅덩이만큼 ‘온갖 중국말’이 있어요. 쓰는 글은 같다고 하더라도, 나누는 말은 저마다 달라요.


  한국에서 나고 자라는 사람이 외국말을 배울 적에는 언제나 ‘표준 외국말’만 배웁니다. 그래서 이 표준 외국말로는 좀처럼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습니다. 학교에서는 ‘표준말’만 가르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한국말도 외국말도 모두 표준말입니다. 전라말이나 경상말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습니다. 제주에 있는 학교에서도 제주말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충청도에 있는 학교에서도 충청말이 아닌 서울 표준말을 가르칩니다. 학생도 교사도 학교에서는 오직 서울 표준말만 써야 해요.


  그러면, 교과서로 배우는 글은 어떠할까요? 글은 ‘표준글’일까요, 아니면 고장과 사람에 따라서 저마다 다르게 쓰는 말을 담는 글일까요?



이 책의 영작 문제를 보면 모르는 단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틀리게 영작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실제로 만들어 보지 않은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영작이 안 되는 문장은 잘 들리지 않고, 말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반면에 영작이 되는 문장은 머지않아 말할 수 있게 되며, 말할 수 있는 문장은 대부분 들립니다. (9쪽)



  《4시간에 끝내는 영화 영작》은 모든 길을 다 풀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이 영어를 배울 적에 오랫동안 갇히고 마는 틀을 하나 즐겁게 깨 줍니다. 영어를 배우려 하면, 무엇보다도 ‘표준 영어’라는 틀을 깨야 합니다. 교과서에만 나오는 영어가 아니라, ‘영어권 나라에서 사는 사람이 쓰는 말’인 영어를 듣고 읽으며 말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어떻게 네 시간 만에 ‘영화 영작’을 끝낼 수 있을까요? 이 같은 ‘표준 영어’ 틀을 신나게 깨서 즐겁게 배우려고 한다면, 네 시간이면 넉넉합니다. 또는 한두 시간에도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표준말이라는 틀에 갇힌 채 벗어나려고 하지 않으면, 네 시간은커녕 네 해에 걸쳐서 이 책을 아무리 되풀이해서 읽거나 다른 교재를 살피더라도 영어를 제대로 배우기 어렵습니다.


  가만히 보면, 한국에서도 똑같은 한국말을 쓰지는 않습니다. 요새는 서울과 부산 사이에 고장말이 거의 사라졌고,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고장말이 있다고 여기기 어렵습니다. 말투나 높낮이 같은 대목에서는 고장말 자국이 있으나, 낱말이나 말마디를 놓고 다 달리 쓰던 고장말은 거의 자취를 감추어요.


  한국사람이 배우는 한국말은 어떤 말일까요?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은 어떤 말인가요? 겉모습은 한국사람이지만, 정작 ‘내 마음을 나타내는 내 말’이라고 할 한국말하고는 사뭇 동떨어지지는 않나요?


  영어를 잘 하려면 영어만 잘 할 수 없습니다. 영어만 잘 하고 싶다면 한국을 떠나서 영어권 나라에서 살면 돼요. 한국에서 살며 영어를 즐겁게 쓰고 싶다면, 영어와 함께 한국말도 즐겁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말이 어떤 말인가 하는 대목을 찬찬히 헤아리면서 영어는 이 말을 쓰는 나라에서 그곳 사람들이 어떤 삶을 누리는가 하는 대목을 알뜰살뜰 들여다볼 수 있어야지요. 서로 아끼면서 어깨동무하는 마음이 되면, 한국말도 영어도 아름답고 알차게 잘 익힐 수 있습니다. 4348.8.7.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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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혁명가 한형석 - 조국 독립을 노래하다, 행복한아침독서 추천도서 상수리 인물 책방 5
최형미 지음, 김희영 그림 / 상수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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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08



독립과 평화를 바라던 ‘음악 혁명가’

― 음악 혁명가 한형석

 최형미 글

 김희영 그림

 상수리 펴냄, 2015.7.15.



  부산 서구에서는 2015년 8월 13일에 ‘한형석 자유아동극장 토크 콘서트’를 연다고 합니다. 한형석(1910∼1996) 님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부산 부민동에서 가난한 아이들한테 글을 가르칠 뿐 아니라 아동극을 누구나 돈을 내지 않고도 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먼구름’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여서 썼고,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이 부르던 군가를 지었으며, 중국에서 〈아리랑〉이라는 가극을 짓고 무대에 올려서 우리 겨레 아픔을 달래 주었다고 해요. 제국주의 일본을 이 땅에서 몰아내려고 광복군으로 뛰기도 했다지요. 항일독립운동을 문화로 예술로 하셨다고 합니다.


  1996년에 숨을 거둘 무렵 한형석 님을 국립묘지에 모시겠다고 했으나, 한형석 님은 ‘건국 매국노’가 묻힌 곳에 함께 누울 수 없다면서 손사래를 쳤다고 합니다. ‘건국 매국노’는 누구일까요?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왜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권력에 빌붙어야 한 사람이 많았을까요? 그리고 해방 뒤에 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친 사람은 드물었으며, 올바른 평화와 독립과 자유와 민주와 평등을 바라는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왜 많을까요?



인공 호수 속에는 돌을 깎아 만든 엄청나게 큰 배도 있었어요. “저것들을 사람들이 다 만들었다니. 얼마나 힘들었겠니? 엄청난 흙더미를 쌓아 올려서 만든 산 위에 나무를 심고 호수를 만들고……. 수많은 사람이 흙과 돌을 지게에 지고 저 산을 올랐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구나.” 형식이는 형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웅장하고 화려한 산이 하나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슬프고 끔찍해 보였어요. (41∼42쪽)



  최형미 님이 글을 쓰고 김희영 님이 그림을 그린 《음악 혁명가 한형석》(상수리,2015)을 읽습니다. 항일독립운동을 했으나 사회에나 사람들한테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분이라고 할 만한 한형석 님을 어린이들이 잘 알 수 있도록 빚은 예쁜 책입니다.


  한형석 님을 낳은 아버지는 ‘의술로 펼치는 독립운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독립운동을 할 적에 모든 사람이 총을 들 수는 없다고, 다친 사람을 다스리고 고쳐 주는 일을 할 사람이 있다고 여겨서 의술을 펼친 아버님이요, 의술로 번 돈을 조용히 독립군 자금으로 대었다고 합니다. 한형석 님도 아버지 길을 이어서 의사가 되려고 했는데, 의사가 되는 공부가 한형석 님한테는 도무지 안 맞았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한참 갈팡질팡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일 무렵, 임정요인이자 광복군을 여는 일에 이바지한 조성환 님이 도움말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한형석 님더러 무엇을 잘 하느냐고 물을 적에 한형석 님은 서슴지 않고 ‘음악’을 잘 한다고 말했고, 이에 조성환 님은 그러면 ‘예술 구국’을 하라고 이야기했다지요.




“대학은 만주에 있는 의과대학으로 가거라. 어려운 때일수록 의술이 꼭 필요하다. 독립운동은 총칼로만 하는 게 아니다.” 형석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가슴 깊이 새겼어요. (47∼48쪽)


“네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 형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어요. “음악입니다.” 뜻밖의 대답이었지만 조성환 선생은 무릎을 치며 말했어요. “그거 아주 좋구나. 넌 조국 독립을 위해 애쓰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예술 구국을 하거라.” (57쪽)



  총을 들어야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지 않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는 광복군이 쓰는 총을 만들려고 쇠를 달구는 일꾼도 독립운동가입니다. 광복군이 입는 옷을 지으려고 바느질을 하는 이들도 독립운동가입니다. 독립운동에 힘쓰는 이들이 먹을 밥을 지으려고 땅을 부치는 모든 농사꾼도 독립운동가입니다.


  정치 일꾼이 되어야 나라를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 삶자리를 지킬 수 있는 씩씩하고 슬기로우면서 아름다운 마음이 된다면, 어느 곳에서라도 나라를 지키고 마을을 지키며 나 스스로를 지키는 튼튼한 사람으로 섭니다.


  학교를 일으키는 사람도 독립운동이요 민주운동이자 평화운동입니다.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사람도 독립운동이요 민주운동이자 평화운동입니다. 저잣거리에서 남새를 파는 아지매와 할매도 똑같이 독립운동이요 민주운동이자 평화운동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총칼을 앞세워서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다고 해서 고개를 떨굴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저마다 제자리에서 씩씩하고 올바른 넋으로 아름다운 손길을 나누며 어깨동무할 적에는 어느 누구도 이 땅을 함부로 넘보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부모님과도 소식이 닿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되자 형석이는 창작 활동에 더 열심히 매달렸어요. 1937년 6월, 여름방학을 맞은 형석이는 첫 종합 예술 작품이면서 중국 최초의 가무극인 〈리나〉를 아동극장에서 발표하게 되어썽요. 〈리나〉는 나라 잃은 폴란드의 음악가가 자신의 딸 리나를 데리고 연주 활동을 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애쓰는 이야기예요. (67쪽)




  《음악 혁명가 한형석》을 읽으면서 ‘구국’이나 ‘독립’을 이루려고 애쓰는 몸짓과 넋을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곰곰이 따지면, 군관학교를 세우려고 벽돌을 나르던 사람들 손길도 모두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발치에서 마음으로 힘을 북돋우려고 하는 사람들도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총칼을 든 제국주의는 서른여섯 해에 이르도록 군홧발로 이 땅을 짓눌렀지만, 이동안 적잖은 사람들이 제국주의 권력에 빌붙는 길로 접어들기도 했지만, 훨씬 많은 여느 사람들은 꿋꿋하게 섰습니다. 마치 풀처럼 서고, 마치 나무처럼 섭니다. 밟히고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풀처럼, 뽑히고 뽑혀도 다시 싹을 틔워서 자라는 풀처럼 섰어요. 베이고 베여도 다시 가지를 내놓고, 아예 뿌리를 뽑히면 어린 씨앗을 떨구어 천천히 아기나무를 키우는 어미나무처럼, 이 땅 수수한 사람들은 저마다 제자리에서 씩씩하게 섰습니다.



전쟁이 무서운 것은 사람들의 목숨도 빼앗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도 빼앗고, 마음도 병들게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전쟁 중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해 주는 예술은 무척 중요해요. (79쪽)


(1940년 5월에) 〈아리랑〉은 모두 우리말로 공연되었지만 중국 사람들의 반응도 대단했어요. 〈아리랑〉은 실험극장에서 열흘 동안 공연을 마친 뒤 중국 곳곳을 옮겨 다니며 공연을 했어요. 그 덕분에 중국 사람들에게도 〈아리랑〉 노래가 유행할 정도였어요. 또한 공연으로 번 돈은 독립군의 겨울옷을 마련하는 데 쓰였어요. (88쪽)




  전쟁이란 무엇이고, 침략이나 식민지란 무엇이며, 다툼이나 싸움이란 무엇일까 하고 되새겨 봅니다. 서로 아끼지 못하기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서로 이웃이 되지 않으니 침략이나 식민지를 일삼습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지 않는 마음이기에 다툼이나 싸움을 벌입니다.


  우리는 어른과 아이가 함께 ‘전쟁이라고 하는 바보짓’이 다시 이 땅에 들어서지 않도록 슬기를 모으고 힘을 모으려는 마음을 키울 노릇이라고 봅니다. 한겨레 사이에 너와 내가 ‘적군’이 되는 짓부터 내려놓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모든 전쟁무기를 쓸어없앨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할 때에 비로소 평화를 이루리라 느낍니다.


  평화가 이 땅에 깃들어야 비로소 통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함께 이루는 길로 나아가려 할 적에, 독재라든지 막개발이라든지 차별이라든지 불평등 같은 씁쓸한 것들을 쓸어낼 수 있어요.



형석이의 바람과는 달리 연합국이 들어오면서 극장은 미군 전용 위안 극장으로 쓰였어요. 형석이는 단순한 극장 관리자가 되고 말았어요. 형석이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어요. 그의 새로운 꿈이 물거품이 되어서가 아니에요. 그토록 힘들게 되찾은 조국인데 동족끼리 총을 겨누게 된 현실이 너무 슬펐기 때문이에요. (104쪽)


당시 형석이는 부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월급을 받았는데 자유아동극장을 (무료 공연으로) 운영하느라 늘 빚에 허덕였어요. 하지만 극장 공연은 물론이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야학원까지 운영했어요. 형석이는 자유아동극장에서 낮에는 공연을 하고 밤에는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108쪽)



  《음악 혁명가 한형석》을 읽는 어린이들이 가슴속에 고운 꽃을 피울 수 있기를 빕니다. 이 책을 어린이한테 읽힐 어른들도 가슴속에 맑은 노래를 고운 씨앗으로 심을 수 있기를 빕니다. 노래 한 가락으로 부르는 독립과 평화를 함께 돌아볼 수 있기를 빕니다. 노래를 부르며 어깨동무하는 우리가 다 함께 아름다운 평화를 이루고 민주와 평등과 통일로도 씩씩하게 나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4348.8.3.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어린이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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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가 나빠 동화는 내 친구 39
오이시 마코토 글, 햇살과나무꾼 옮김 / 논장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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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06



신나게 놀던 아이가 멋진 어른이 된다

― 장화가 나빠

 오이시 마코토 글

 오보 마코토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펴냄, 2005.7.25.



  마실을 다닐 적마다 커다란 가방을 짊어집니다. 내가 짊어지는 가방에는 아이들 옷가지랑 아이들 그림책이랑 아이들이 쓰는 여러 가지 살림이 깃듭니다. 아이들도 저마다 제 가방을 하나씩 들고 마실을 다니면서 저희 장난감을 저희 스스로 챙깁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적에는 아이들 장난감까지 내 가방에 챙겨야 했으나, 다섯 살 작은아이도 제 가방에 제 장난감을 가득 넣고 의젓하게 걸어다닙니다.


  장난감을 스스로 챙길 줄 아는 아이들은 마실길에 화장실에 들를 적에도 혼자 쉬를 할 수 있습니다. “자, 쉬를 좀 해 볼까?” 하고 물으면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저마다 화장실로 달려가서 쉬를 눈 다음 손이랑 낯까지 씻고 나옵니다.


  도시에서는 거님길이 좁고 자동차가 쉴새없이 지나갑니다. 이런 곳에서는 아이들더러 “자, 서로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서 가자.” 하고 얘기합니다. 두 아이는 서로 손을 맞잡으면서 재미나고 신나는 걸음걸이가 됩니다.



사유리가 큰 소리로 울자, 오빠는 허둥지둥 사유리를 달랬어요. “이거 가짜야, 가짜. 껌으로 만든 가짜 송곳니라고. 그러니까 그만 울어, 응? 내가 껌 줄게.” 그래도 사유리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어요. (11쪽)


비가 온 다음 날, 아키라는 노란 장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어요. 여기에도, 저기에도 물이 괸 웅덩이가 보여요. 웅덩이마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비쳐요. (20쪽)



  오이시 마코토 님 글에 오보 마코토 님 그림이 어우러진 어린이문학 《장화가 나빠》(논장,2005)를 읽습니다. 이 책에는 예닐곱 살이나 여덟아홉 살 어린이라면 으레 겪는다 싶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어린 동생을 장난으로 놀리다가 그만 울리고 말아서 어쩔 줄 모르는 오빠가 나오고, 새로 얻은 장화가 좋아 웅덩이를 신나게 첨벙거리고 돌아다니는 아이가 나옵니다. 인형하고 말을 섞을 줄 아는 아이가 나오고, 사람 아닌 여러 짐승이나 나무하고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아이가 나와요.


  《장화가 나빠》를 읽으며 우리 집 아이들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큰아이는 작은아이를 더러 놀리기도 하지만, 살뜰히 아끼면서 함께 놉니다. 작은아이도 큰아이를 가끔 놀리기도 하지만, 알뜰히 아끼면서 같이 놀아요. 두 아이는 둘도 없이 살가운 동무이면서 누나 동생입니다. 두 아이는 곰살궂게 어우러지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는 시골순이요 시골돌이입니다.



“난 동물원에서 태어났어. 엄마는 내가 태어나자 몹시 슬퍼하면서 울었어. 내가 죽을 때까지 동물원의 우리에서 살아야 하는 게 너무 슬프기 때문이래. 우리 엄마는 엄마가 자란 아프리카의 넓은 풀밭에서 나를 기르고 싶어 했지.” (31∼33쪽)


아저씨의 세 살배기 딸에게 앵무새한테 고운 말을 가르쳐 주라고 했어요. 예를 들면 이런 말이죠. 할머니, 안녕하세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다녀오세요. 다녀오셨어요? 같은 말. (48쪽)



  아이들은 재미나게 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웃고 떠들면서 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무엇이든 하면서 놀고 싶습니다. 아이들 마음속에는 언제나 놀이가 있어요.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놀면서 자라요.


  아이를 낳은 어버이도 처음에는 아이였습니다. 신나게 뛰놀고 개구지게 뛰놀며 다부지게 뛰놀던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이 됩니다. 마음껏 뛰놀고 실컷 뛰놀며 거침없이 뛰놀던 아이가 사랑스레 자라서 어른이 됩니다.


  오늘 이곳에서 두 아이 어버이로 사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돌아봅니다. 무더운 한여름 밤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부채질을 하는 내 모습을 찬찬히 돌아봅니다. 잠든 아이들이 시원하게 자기를 바라면서 밤새 부채질을 하는 동안 제대로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지만, 나는 밤잠을 잊더라도 아이들은 느긋하면서 넉넉하게 잘 수 있기를 바라요. 내가 어릴 적에는 우리 어버이가 나한테 부채질을 해 주셨을 테고, 우리 어버이가 어렸을 적에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 어버이한테 부채질을 해 주셨을 테지요.



어느덧 해가 지고 밤이 되었어요. 달이 환하게 떠올랐어요. 목장의 풀이 젖은 듯 반짝거렸어요. 그때까지도 푸른 말과 닷짱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쉬지 않고 달렸어요. (58쪽)


나는 캐러멜 다섯 개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는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지요. 내가 말했습니다. “엄마, 이거 다 줄게.” 엄마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보더니 환히 웃으며 말했습니다. “고맙구나. 하지만 엄마는 하나만 있으면 된단다.” (79∼81쪽)



  어린이문학 《장화가 나빠》는 짧은 동화를 묶습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한 꼭지씩 읽어 줄 만하기도 하고, 아이가 혼자서 한 꼭지씩 씩씩하게 읽을 만하기도 합니다. 짧은 동화는 짤막한 숨으로 서로 아끼는 삶을 넌지시 보여줍니다. 아이들끼리 서로 아끼는 삶을 보여주고, 아이와 어른이 나란히 아끼는 삶을 보여주며, 사람(아이)하고 사람 아닌 숱한 숨결(도깨비 같은 넋이나 자연하고 뭇짐승)이 함께 아끼는 삶을 보여줍니다.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여름철에 아이들이 잠들 적마다 끝없이 부채질을 합니다. 겨울철에 아이들이 잠들 적에는 끝없이 이불깃을 여밉니다. 아이들은 여름철에 곧잘 “내가 아버지한테 부채질 해 줄게.” 하면서 땀방울을 구슬처럼 흘리면서 부채질을 하겠노라 하고 말합니다. 겨울날에 온갖 집안일을 하다가 힘들어서 살짝 허리를 펴려고 누우면 아이들이 어느새 다가와서 “이불 덮으세요.” 하고 말하면서 이불을 덮어 줍니다.



마사루가 토끼 가슴에 손을 갖다 대 보니까 사람처럼 콩닥콩닥 심장이 뛰어요. (62쪽)



  삶이란 무엇일까요? 너와 내가 함께 가꾸는 하루일 테지요. 어버이와 아이가 서로 북돋우는 하루일 테고요. 먼 마실길이든 읍내 마실길이든, 아버지가 짊어지는 가방이나 짐이 으레 무겁고 커다랗기에 두 아이는 으레 “내가 들어 줄게!” 하고 외치곤 합니다. 그러나 두 아이가 함께 붙잡고 용을 써도 아버지 가방이나 짐을 바닥에서 떼지도 못하기 일쑤입니다. 수박 한 통을 장만할 적에도 그래요. 아이들은 둘이 온힘을 쏟아도 수박 한 통조차 나르지 못합니다. 수박 반 통조차 아이들이 나르기 벅차요. 수박을 반에서 다시 반으로 가른 조각도 아이들한테는 대단히 무겁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수박을 아주 잘 먹어요. 스스로 나를 만한 무게는 아니어도, 수박이 아주 맛있다고 합니다. 이때에 어버이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씩씩하게 수박을 장만해서 나르든, 우리 집 밭자락에 수박을 심어서 거두든 해야 합니다. 내 몫은 따로 안 남기더라도 아이들이 맛나게 먹도록 알맞게 썰어서 접시에 담아야지요.



내 자리 맞은편 자리에서는 내 또래 여자 아이가 큼직한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 초등학교 1학년처럼 떠듬떠듬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무슨 책을 저렇게 못 읽냐? 바보같이.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버스에서 내릴 때 그 아이의 책을 슬쩍 넘겨다보았다. 어, 책이 새하얗잖아!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 나는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까, 그 아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였다.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점자책을 읽고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씩 힘겹게. 나는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 자신이 너무너무 부끄러웠다. (101∼102쪽)



  신나게 놀던 아이가 멋진 어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적에 신나게 놀 수 있어야,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마음이 아름다이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나게 놀지 못한 아이는 신나게 일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어릴 적부터 신나게 못 놀던 아이는, 어른으로 자라면서 제 꿈을 신나게 가꾸는 길로는 좀처럼 못 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어린이문학 《장화가 나빠》는 어린이한테 어떤 책이 될까요? 아무래도 ‘씩씩하게 놀고, 착하게 놀며, 곱게 놀자’는 꿈을 들려주는 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학교 공부를 더 잘하는 길보다는, 스스로 즐겁게 뛰놀 수 있기를 바라는 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잘나거나 멋지거나 놀라운 어른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책이 아니라,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착하며 슬기로운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책이리라 느낍니다.


  아이들은 “장화가 나빠!” 같은 말을 쉽게 뱉을 수 있어요. 이런 말을 들은 어른은 “음, 모두 예뻐!” 하고 대꾸할 수 있어요. 아이가 울먹이거나 핑계를 들면서 “나빠!” 하고 외치거나 말거나, 어른은 빙그레 웃으면서 “사랑해!” 하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린이문학이란 바로 ‘늘 웃는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문학이라고 한다면 참말로 ‘언제나 웃으면서 노래하는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어린이도, 중·고등학교 푸름이도, 학과 공부는 한동안 젖혀 놓고 마음껏 뛰놀 수 있기를 바라요. 맑고 밝은 넋으로 신나게 놀다가, 마음 가득 따사로운 꿈을 키울 수 있기를 바라요. 동무랑 이웃을 아끼는 아이들이 곱게 자랄 수 있기를 빌어요. 4348.7.2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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