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테리 트루먼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픈 나날이기에 힘들며 고마운 삶
 [푸른책과 함께 살기 58] 테리 트루먼,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



- 책이름 :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
- 글쓴이 : 테리 트루먼
- 옮긴이 : 천미나
- 펴낸곳 : 책과콩나무 (2009.6.20.)
- 책값 : 9800원


 (1) 아픈 몸으로 고구마밭 함께 캐며


 요 며칠 몸이 무척 힘들다고 느끼지만, 곰곰이 따지면 요 며칠만 몸이 무척 힘들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저보다 어린 사람한테는 제 나이가 많고 저보다 늙은 사람한테는 제 나이가 적으나, 저 또한 더 늙은 쪽으로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으니까요. 한창 젊을 때라기보다 훨씬 젊을 때처럼 고단함을 쉽게 훌훌 털며 새 기운을 내며 일할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머리로가 아닌 몸으로 느낍니다.

 어제와 그제 고구마밭 일손을 거들었습니다. 그제는 일손을 거들지 않으려 했으나 그냥 거들었습니다. 이른아침부터 아이하고 복닥이며 밥하고 빨래하고 밥 먹이고 하다가 한숨 돌리며 쉴 무렵이 낮 두어 시입니다. 이런 흐름을 이웃사람이라 해서 잘 헤아리지는 않고, 이런 흐름을 애써 말해 준들 잘 헤아려 주기란 어렵습니다. 흔히 하는 말이란 ‘왜 남자가 집안일을 하느냐?’이니까요.

 ‘왜 여자가 집안일을 도맡아야 하느냐?’고 묻기 어렵습니다.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적게 배운 사람 앞에서건 많이 배운 사람 앞에서건 똑같습니다. 흔한 텔레비전 연속극을 들여다보셔요. 집안일을 맡는 사람은 오로지 여자입니다. 뻔하디뻔하게 여자들만 집안일을 도맡습니다. 지식인이건 지성인이건 가리지 않고 여자들만 집안일을 하도록 그립니다. 남자들은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수다를 떱니다.

 돈 좀 있는 살림이라면 집일을 맡아 주는 ‘도움이 아줌마(밥어미)’를 부립니다. 어찌 되었든 집안일을 맡는 사람은 여자들입니다.


.. 우리 부모님은 10년 전에 나 때문에 이혼했다. 나의 출생이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아빠가 이혼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다. 그렇다고 누나나 형도 아니다. 바로 나다. 아빠는 내 상태를 견디지 못했고, 그래서 떠나야만 했다 ..  (9쪽)


 생각이 있다는 남자 지식인이나 지성인 가운데 스스로 밥하고 빨래하며 쓸고닦는 밑살림을 즐겁게 하면서 다른 큰살림을 짊어지는 이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남자 지식인이나 지성인들 입에서 살림살이 꾸리는 이야기는 거의 튀어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자 글쟁이 가운데 집안일 하는 ‘즐거움과 고단함’을 스스럼없이 적바림하여 나누는 사람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꾼들은 으레 ‘서민 경제’를 들먹입니다. 예나 이제나 ‘서민처럼 살아 보지 않’으면서 서민 경제를 북돋우겠다고 외칩니다. 서민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처럼 가난한 집에서 가난한 살림을 꾸리며 살아가지 않고서 서민 경제를 북돋우는 길을 어떻게 찾아서 나누려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이제까지 서민 경제를 지키거나 북돋운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인이나 지성인들은 으레 개혁이나 진보를 외칩니다만, 개혁이란 무엇이고 진보란 어떻게 이루나요.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자그마한 사람들 삶자리를 건드리지 못하면서 펼친다는 개혁과 진보란 어떤 일이 될는지요.

 어쩌다 툭툭 내뱉는 ‘서민 경제 살리기’로는 가난한 여느 사람 살림살이를 북돋우지 못합니다. 어쩌다 툭툭 내뱉지조차 못하는 ‘집안일과 집살림 이야기’라면 이 나라 지식인과 지성인이란 뜬구름 잡으려고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달밖에 없습니다.


.. 상당히 확신하건대, 아빠가 나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거다. 좋은 소식은, 아빠가 그러한 계획을 세운 이유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나쁜 소식은, 아빠의 동기가 얼마나 대단하든 내가 곧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 내 고통을 끝낸다고? 그 말을 듣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아빠가 무슨 권리로 나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단 말인가? 대체 아빠가 무슨 권리로 내 고통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품는단 말인가? 내 곁을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 아빠는 내가 정말로 죽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20, 67, 72쪽)


 힘든 몸을 움직여 고구마밭에서 줄기를 걷고 고랑을 삽으로 판 다음 호미로 고구마 씨알을 캐면서 생각합니다. 고구마 한 알을 얻기까지 ‘걷이’를 할 때에만 이와 같은 품과 땀과 겨를을 내놓아야 하는데, ‘걷이’뿐 아니라 ‘심기’와 ‘가꾸기’와 ‘돌보기’까지 헤아린다면, 고구마 한 알을 어떻게 맞아들이며 어찌어찌 즐겨야 좋을까 하고.

 힘든 가운데 힘을 꽤 쓰니 저녁에는 까무룩 곯아떨어집니다. 힘들도록 뛰어논 아이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며 밤새 칭얼거립니다. 아이는 칭얼거리며 고단하다고 드러냅니다. 어른은 곯아떨어지며 고달프다고 보여줍니다. 애 아빠는 고달프면서도 기저귀를 갈아야 합니다. 이듬날 아침이면 금세 새 기운을 얻어 일찍부터 깨어나는 아이랑 다시금 새롭게 복닥이며 놀아야 합니다.

 참말 예전 사람들은 숱한 농사일을 하며 숱한 딸아들을 거느리는 집살림을 어찌 일구었을까 궁금합니다. 요즘 사람들처럼 텔레비전이나 시사나 교육이나 정치나 자질구레한 데에 눈길을 안 두고 집과 마을 둘레에서 조촐하게 살아갔으니 수많은 아들과 살붙이랑 복닥이면서 얼마든지 집살림을 잘 꾸렸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곳저곳 눈길을 많이 두면서 돈을 참 많이 벌어야 한다고 얽매이니까 집살림은 집살림대로 엉망이며, 농사일을 할 마음을 못 품지 않느냐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고단하고 버겁지만, 하고 보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농사일은 아니에요. 우리 살붙이 먹고살 푸성귀와 곡식과 열매를 얻을 땅은 그렇게까지 넓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집식구 즐길 먹을거리는 자그마한 땅으로 넉넉합니다. 더 많이 누리려 하니까 더 많이 벌어야 할 뿐입니다. 옛날에는 소작삯을 많이 떼어야 했으니 몹시 힘겹게 농사를 지어야 했고요.


.. 내가 죽은 뒤, 혹시라도 누군가는 아빠의 시 〈숀〉을 읽게 되겠지. 내가 죽고 일 년 뒤, 어쩌면 이 년, 아니면 이백 년 뒤가 될까? 시를 읽고 감동에 젖은 그 사람은 어쩌면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누구를 알게 될까? 그들은 무엇을 알게 될까? 그 시에는 시인인 시드니 E.맥다니엘이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는 특별 주석이라도 달려 있을까? 그 독자는 아빠나 나를 조금이라도 더 잘 알게 될까? ..  (139∼140쪽)


 몸이 꽤 튼튼했다면 고구마밭에서 고구마를 더 빨리 캐내어 더 빨리 일을 끝마치자고 생각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몸이 퍽 튼튼했으면 서울이든 다른 도시이든 볼일 보러 마실을 간다고 길을 나서느라 고구마밭 일손 거들기란 아예 안 했을 수 있구나 싶습니다. 해롱거리는 몸이라 집에서 더 힘들게 아이랑 복닥입니다. 비틀거리는 몸이기에 지난날 어머님들이 몸이 아플 때에도 어김없이 집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으며 하루하루 살아낸 나날이 어떠했을까 하고 곱씹습니다. 하루를 살고 이틀을 살며 고마운 날들뿐입니다.


 (2) 코 훌쩍이는 아이를 품에 안고


 어림이란 둘도 없는 고마움이라고 느낍니다. 젊음이란 대단한 고마움이라고 여깁니다. 늙음이란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버이한테서 고운 목숨 물려받으며 어린 나날을 뜻깊고 사랑스레 보냅니다. 이러한 어린이 나날은 참으로 고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버이한테서, 또는 이웃한테서 보살핌을 받으면서 푸른 나날을 무럭무럭 자라며 젊은이로 우뚝 섭니다. 이와 같은 젊은이 나날은 무척 고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른 자리에 들어서면서 당신 어버이가 당신한테 했듯이 당신 피와 살과 뼈를 깎아 아이들한테 새 목숨을 물려줍니다. 당신이 사랑을 받아 왔든 미움을 받아 왔든 당신 아이들한테 새 삶을 이어주면서 당신과 당신 아이들이 꾸릴 새 나날을 함께 일굽니다. 이 늙은이 나날이란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지 모릅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햇수는 열두 해이고, 대학교까지 다닌다면 열여섯 해인데, 대학원을 더 다닌다든지 대학교를 좀 오래 다닌다면 스무 해쯤 학교를 다니기까지 합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다닌다면 스물다섯 해나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있고, 나라밖으로 더 배우러 다녀온다면 서른 해 안팎을 배움터에서 지새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움터를 드나드는 동안 집에서 머무르거나 보내는 나날은 줄어듭니다. 집에서 먹고잔다지만 정작 하루 가운데 집에 있는 동안은 얼마 안 되고 으레 배움터에서 지새웁니다. 새벽나절 별을 보며 학교에 가서 밤나절 별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오늘날 수험생이잖아요. 중학생 때부터. 어버이랑 함께 살아간다지만, 가만히 따지면 어버이란 이름이나 허울뿐입니다. 아이들이 사귀는 사람이란 바로 교과서이고, 책이며, 지식입니다.


.. 내 방식대로 인생을 경험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오로지 보고 듣는 것을 통해서만 인생을 경험하다 보면 무언가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 된다. 달리는 사람을 보기는 했지만 막상 달릴 때 다리가 어떤 느낌일지 도대체 알 리가 없다. 야구공을 던질 때 팔의 느낌은 어떨까? 손가락으로 연필을 잡을 때는? 누군가와 입맞춤을 할 때 입술과 입술이 닿는 느낌은 어떨까? ..  (16쪽)


 사람 목숨이 꽤 늘어 일흔이나 여든은 아무것 아니라 하는데, 이 가운데 1/3이든 1/4이든 꼭 반토막이든 학교 울타리에서 지새우는 오늘날 사람이 되었습니다. 학교 울타리 바깥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복닥이며 어깨동무하는 나날은 몹시 줄었습니다. 아니, 학교 울타리 바깥에서 사람들과 처음으로 어울리거나 복닥이며 어깨동무할 ‘나이’가 자꾸자꾸 높아만 갑니다.

 열 살부터 사회살이를 부대껴야 한다고 슬픈 삶일 수 없습니다. 열 살부터 사회살이를 겪는다고 기쁜 삶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삶입니다. 다만, 열 살부터 사회살이를 마주하는 사람하고 스무 살부터 사회살이를 마주하는 사람이랑 서른이나 마흔 살부터 사회살이를 복닥이는 사람은 사뭇 다릅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회살이를 꾸밈없이 맞아들여 나와 내 이웃을 고루 살피려는 매무새는 옅습니다. 학교 울타리에서 보내는 햇수가 길면 길수록 학교 울타리에서 내 머리속에 집어넣은 지식에 따라 더 움직이고야 만다고 느낍니다.


.. 발작을 하며 경험하는 웃음의 순간들이 나에게는 진정한 행복처럼 느껴진다. 나는 왜 그런 행복을 좀 즐기면 안 되나? ..  (49쪽)


 예부터 슬기를 깨우친 어른들은 한결같이 ‘생각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요. 생각을 해야겠지요. 그러면, 생각이란 무엇이고 생각이란 어떻게 하며 생각이란 누구랑 어디에서 하는 가운데 이러한 생각들로 내 삶을 어찌어찌 일구어야 좋을까요. 머리를 굴리는 일이 생각이 되나요. 머리를 쓰면 생각하기가 될는지요.

 집살림은 어머니라는 자리에 서는 여자가 도맡을 일이 아닙니다만, 예나 이제나 어머니라는 여자들만 집살림을 도맡고 있는데요, 집살림을 도맡은 어머니들은 날마다 생각을 안 할 수 없습니다. 아침밥 낮밥 저녁밥을 어찌 차리는가, 밥과 반찬은 어떻게 마련하나, 쌀을 어느 만큼 푸고 불리나, 봄에는 무얼 하고 겨울에는 무얼 하며 아침과 저녁은 어떻게 차리면 좋을까, …… 집구석 어디에 먼지가 쌓이고, 마룻바닥이나 방바닥을 쓸고닦는 데에 어느 만큼 걸리며, 아이들을 어떻게 뛰놀도록 내보내며, 아이들 주전부리는 또 어찌어찌 마련하는데다가, 아이들한테 무슨 심부름을 시키고 무슨 일을 맡기며 밤에는 어떻게 재우나, …… 나날이 무럭무럭 크는 아이들 몸에 걸맞게 어떤 옷을 지어 입히고, 씩씩하게 자라나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좋으며, …… 이웃집 살림살이는 어떠하고 우리 집 살림살이는 어떠하며, 길손이나 동냥하는 거지한테는 어떻게 대접하고, …… 텃밭과 논밭은 어찌어찌 돌보며, 나물은 어느 만큼 언제 뜯어서 삶고 무치고 볶고 데치고 말리고 해야 하며, 명절과 제사는 언제 돌아오는지, 아이들과 어른들 난날은 언제이고, …….

 살림이란 옷과 밥과 집입니다. 차례를 따진다면 옷·밥·집이라기보다 밥·집·옷이 되지 않으랴 싶은데, 차례가 이리 되든 저리 되든 우리들은 옷과 밥과 집을 모두 알뜰히 건사할 때 비로소 살림을 한다고 말합니다. 옷·밥·집을 건사하지 못하면 살림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설거지 좀 한다거나 밥 한번 했다거나 걸레질 몇 번 했다고 살림을 했다 말할 수 없어요. 아이랑 몇 시간 놀아 주었다느니 아이한테 그림책 몇 번 읽어 주었다느니 하면서 아이키우기를 했다고 우쭐댈 수 없고요.

 살림이란, 여자만 한다거나 남자가 거든다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 살림을 건사할 일입니다. 내 옷과 내 밥과 내 집을 내 몸과 마음을 써서 가다듬으며 붙잡을 수 있어야 비로소 우뚝 서는 ‘어른’ 한 사람입니다.

 시집장가를 간다 해서 어른이 아니고, 사랑놀이를 홀가분하게 즐기거나 술담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나이라 해서 어른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았대서 어른이 아니며, 아이를 둘이나 셋쯤 낳았다고 어른이 되지 않아요. 어른은 “살림할 줄 알며, 살림을 즐거이 하는 사람”만을 일컫습니다.


.. 내가 기침을 하다가 아빠 얼굴에 밥과 으깬 채소를 한입 가득 뱉어 내자, 아빠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제기랄!” 아빠는 나한테 점심을 먹이던 중이었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얼굴에 묻은 침과 음식 찌꺼기들을 닦아 내며 아빠가 투덜거렸다. “도무지 적응이 안 돼.” 아빠는 건너편 주방 벽으로 숟가락을 내동댕이쳤다. 아빠의 입에서 또다시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짓은 애기들이나 하는 줄 알았지! 그런데 넌…… 어휴, 젠장!” ..  (69쪽)


 아이가 코를 훌쩍입니다. 아빠도 코를 훌쩍입니다. 아이에 앞서 아빠부터 코가 나쁩니다. 어쩌면, 아빠를 낳은 어머니(아이한테는 할머니)부터 코가 안 좋았는지 모르며, 할머니를 낳아 기른 어버이부터 코가 궂었을는지 몰라요. 아이는 가을로 접어들고부터 늘 코를 훌쩍입니다. 아빠 또한 노상 코를 훌쩍입니다. 아이는 아직 스스로 코를 시원하게 풀지 못합니다. 코에 소금물을 넣어 준 다음 엄마나 아빠가 풀어 주어야 하고, 면봉으로 살살 코딱지나 콧물을 빼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도 아이는 코훌쩍임이 그치지 않습니다.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아이이지만 도시와 견주어 맑은 바람과 물만으로는 몸이 금세 튼튼해지지 않습니다. 한 해를 살고 두 해를 살며 열 해와 스무 해를 보내야 여리거나 아픈 몸이 비로소 제법 튼튼하거나 퍽 단단하게 거듭나리라 봅니다.

 그러나 한결 맑은 물과 바람과 햇살과 곡식을 받아들인다 해서 언제나 튼튼하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시골에서도 여린 몸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노상 골골 앓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한결 맑은 물과 바람과 햇살과 곡식으로 내 몸과 마음을 한결 맑고 밝으며 싱그럽게 다스릴 수는 있다고 느낍니다. 여리고 아프지만, 여리고 아픈 내 몸을 고이 껴안으면서 내 삶을 맑고 밝으며 씩씩하게 일구며 하루하루를 즐길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 만약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알아줄 그런 사람이 생긴다면? …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고, 반대로 진정한 나 자신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 ..  (83, 84쪽)


 코를 훌쩍이는 아이를 품에 안습니다. 어제 읍내에 마실을 가며 사 온 능금을 반토막으로 잘라 껍질을 벗겨 건네고, 아이가 까까 사 달래서 쥐어 준 뻥과자 한쪽을 건넵니다. 물을 끓여 따숩게 마시도록 합니다. 아빠도 따뜻한 물을 한 잔 천천히 마십니다.

 아빠는 아빠 일을 조금 하고 싶어 어린이 만화영화를 하나 셈틀에 걸어 놓습니다. 슬슬 아이가 배고플 무렵이라, 두부를 썰고 김에 밥을 말아 아이 입에 넣어 줍니다. 아이는 밥과 두부를 냠냠 받아먹으면서 만화영화를 들여다봅니다. 아빠는 살짝 숨을 돌립니다. 나란히 밥을 먹고 나란히 놀며 나란히 일을 한다면 가장 좋겠지요. 아직은 어렵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느긋이 지낼 수 있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우리 식구가 도시에서 지낸다면 달삯을 치르느라 무척 버거워 그저 꿈만 꿀 테지만, 시골집에서는 달삯을 치르지 않기 때문에 이제부터 꾸준히 살림돈을 추슬러 본다면 돈 몇 푼 더 벌려고 도시로 볼일 보러 오가는 일을 줄이면서 시골집에서 밭이랑 논이랑 일구며 오순도순 조용히 지낼 날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아주 똑똑한 탓에 너무 바보스러운 아빠들


 푸른문학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를 읽습니다. 이 작품은 ‘줄거리 읽기’에 눈길을 둘 까닭이 없기에 줄거리를 말씀드리자면, 책이름 그대로 ‘아빠가 나를 죽일까 걱정하는 아이’ 눈높이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작품 끝자락을 보면 ‘아빠는 끝끝내 나를 죽이고야 마는구나’ 하는 실마리를 남긴 채 맺습니다.


..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나는 바보천치다. 의사들이 내가 왜 멍청한지 엄마 아빠한테 설명하고, 엄마 아빠가 친구들한테 설명하는 말을 수억 번도 넘게 들었다. 그들은 내 뇌가 작동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들은 알지 못한다 … 내 손을 붙잡아 점자판에 대 보는 사람도, 가슴에 대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그려 보려는 사람도 없다 … 나는 바보가 아니며 이 쓸모없는 몸뚱이 안에 진짜 내가 있다는 사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난 단지 이도저도 아닌 어딘가에 갇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안다면, 아니 단 한 사람이라도 알게 된다면 과연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하고 이따금 정말로 궁금해진다 ..  (10, 12, 18쪽)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를 이끌어 가는 목소리는 ‘장애를 앓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아기였고, 나중에는 어린이였으며, 죽을 무렵에는 푸름이입니다. 이 사람이 아기였을 때에는 장애가 있으리라 여기지 않습니다. 나중에 어린이가 될 무렵 아빠랑 엄마 되는 사람은 ‘아이한테 장애가 있군!’ 하고 느끼는데, 엄마는 아이한테 장애가 있건 없건 똑같이 사랑하지만 아빠는 아이한테 장애가 있기 때문에 ‘다르게 사랑하려’ 합니다. 이를테면 ‘안락사’입니다.


.. 열네 해를 사는 동안 아빠가 내 앞에서 내 이름을 소리내어 부른 게 전부 해서 열여섯 번이다 … 아빠의 눈에 내가 식물인간이라면, 식물인간이라면, 나는 절대로 삶을 즐기거나 생산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 지체라는 말은 ‘느리다’라는 뜻이면서 동시에 단지 느린 부류의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기도 한데,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똑같은 방식과 똑같은 속도로 처리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정상인들이 우리를 저능아라고 하니까 우리는 저능아가 되는 거다 ..  (29, 39, 59쪽)


 푸른문학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에 나오는 어머니는 집안살림을 도맡습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아버지는 집안살림을 거의 하지 않을 뿐더러 잘 모릅니다. 아버지 되는 분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두루 알려진 시인이며 작가이자 지식인입니다. 어머니 되는 분은 그예 ‘어머니’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생각에 잠깁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생각을 잇습니다. 시인이든 아니든 작가이든 아니든 지식인이든 아니든, 아이 하나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라 한다면 집안살림을 함께 해야 합니다. 밥을 마련하든 옷을 장만하든 집을 짓는 어버이 된 사람은 어버이 당신과 아이가 함께 살아가도록 살림을 꾸려야 합니다.

 앤서니 브라운 님이 빚은 그림책 《돼지책》을 보면 ‘아주아주 커다란 일’을 하는 남자들(아버지와 아들들)은 집안살림을 도무지 안 할 뿐 아니라, 눈길조차 안 두고, 알아야 할 까닭이 없다고 여기지만, 모든 권리와 권력과 물질을 누립니다. 푹신한 걸상에 몸을 기대어 “엄마!(또는 여보!)” 하고 부르면 밥이 나오고 옷이 나오며 주전부리가 나옵니다. 아침에 ‘아주아주 커다란 일’을 하고자 일터(또는 학교)에 가서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오면 집은 늘 말끔하며 가지런한데다가 코를 건드리는 맛난 냄새가 집안을 감돕니다. 옷을 벗어 아무 데나 휙휙 던져 놓아도 이듬날 옷을 챙겨 입으려고 옷장을 열면 보송보송 잘 마르고 개킨 채 알뜰살뜰 놓여 있습니다. 밥 걱정 옷 근심 집 끌탕이란 한 번도 하지 않는 “버르장머리없는 돼지들”이에요(돼지한테는 안 된 말씀입니다만).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이자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나’를 끝내 죽이려 드는 아빠라는 사람 또한 “버르장머리없는 돼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집안일이란 모르며 살림살이 또한 생각하지 않는데다가 ‘다른 사랑’을 하고자 할 뿐입니다. ‘다른 사랑’이란, 한자말로 하자면 ‘다양성을 살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을 다르게 보는’ 사람, 또다른 한자말로 하자면 ‘차별을 하는 사랑’입니다.


.. “당연히 보수는 전부 다 지급될 겁니다. 오늘 밤 내가 따로 할 일이 없으니까, 난 그냥 좀 돕는 것뿐이니까요.” “와, 그러면 좋겠네요.” “그럼 거래가 끝난 겁니다.” 평생을 통틀어 아빠 혼자서 나와 함께 밤을 지새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빠가 나를 돌보겠다며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뭐, 거래가 끝났다고? 내가 끝난 거래란 말인가? ..  (151∼152쪽)


 책을 읽으며 느낍니다. 좋다고 하는 책을 더 많이 읽어도 괜찮을 테지만, 좋다고 하는 책이라 해서 굳이 더 안 읽어도 괜찮습니다. 좋은 책을 많이 읽어 ‘온누리에 이런저런 좋은 책이 있답니다’ 하고 떠들기 앞서, 좋은 책은 한 가지조차 모르지만 ‘우리 아이를 사랑하고 이웃 아이를 우리 아이처럼 똑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삶’을 꾸리면 몹시 아름다워요.

 좋은 책 한 권에 깃든 좋은 속살을 받아먹으며 내 마음밥을 살찌우는 일은 틀림없이 즐겁습니다. 이와 함께, 좋은 책 한 권이 얼마나 좋은가를 까맣게 모르지만, 내 코앞에 있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깨달으며 따사롭고 넉넉하게 껴안을 수 있을 때에도 대단히 즐거워요.

 이리하여, 저로서는 아무리 돈 많이 준다고 하는 일터라 할지라도 아침저녁으로 오가며 달삯을 받을 수 없습니다. 돈은 거의 못 벌어 살림이 쪼들린다 할지라도 아이랑 엄마랑 아빠가 올망졸망 복닥이며 하루를 길면서 짧게 느끼며 보내는 이 삶이 반갑습니다. (4343.10.18.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 일공일삼 10
피에르 루키 글, 퓌그 로사도 그림, 김화영 옮김 / 비룡소 / 200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른 이들한테는 재미있을는지 몰라
 [책읽기 삶읽기 17] 피에르 루키,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



 1991년에 ‘민음사의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을 달고 열 번째로 나온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를 읽다. 아니, 읽다 읽다 끝내 못 읽고서는 덮고야 말다. 이 책은 ‘민음사의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던 다른 책하고 마찬가지로 비룡소 출판사로 이름을 바꾸어 새 판으로 다시 나왔다. 2000년에 새로 나온 판은 번역을 손질했을까. 나는 헌책방에서 1991년판을 만나서 읽는다. 120쪽이 채 안 되는 어린이책인데 70쪽까지 읽고는 더 읽지 못한다. 조금 더 읽으면 끝인데, 도무지 따분하고 재미없어서 읽을 수 없다. 끝까지 읽고 나서 ‘이 책은 이렇습니다’ 하고 말한다면 더 좋겠지. 그러나 이렇게까지 읽을 수 없게끔 쓴 작품이 있다니 슬프다.

 책날개에는 “최고의 샹송가수인 조르쥬 브라상스는 엉뚱하면서도 달콤한 세계를 펼쳐 주는 작가, 작사가, 작곡가로 피에르 루키를 극찬했다”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아마 나라밖 프랑스에서는 널리 사랑받을는지 모른다. 퍽 좋은 작품인데 번역이 좀 얄딱구리할는지 모른다.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썩 재미있게 못 즐긴다 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같은 출판사에서 이무렵 함께 내놓은 《초록색 엄지소년 티쭈》라든지 《노랑 가방》이라든지 《아이와 강》이라든지 《내일은 맑을까요》 같은 작품은 참 신나게 잘 읽었다.

 섣불리 말할 수 없으나, 다른 이들한테는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값있다 하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나한테까지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값있을 수는 없다. 거꾸로, 내가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값있다고 느끼는 작품을 다른 이들이 재미있거나 뜻있거나 값있게 여길 수는 없다.


.. 아버지는 부족한 게 없을 만큼 행복하다. 그런데도 그게 아닌지 기어코 연극을 하겠다는 것이다! ..  (12쪽)


 연극을 하고 싶어하는 시계수리공 아빠 이야기를 적바림한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이다. 줄거리로만 살핀다면 갖가지 시끌벅적한 일을 일으키며 터무니없다 싶은 꿈을 꾸며 ‘조용하고 아늑한’ 집안에 큰 물결을 일으키는 못 말리는 아빠 삶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줄거리를 펼쳐 보이는 ‘말하는 이 눈높이(아이 눈높이로 이야기합니다)’가 어중간하고, 집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새앙쥐 이야기는 좀 어설피 끼어들었다. 뭔가 아기자기한 맛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딘가 생뚱맞거나 뚱딴지 같다 싶은 아빠 몸짓과 말마디가 톡톡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번역 탓이라 해야 할까. 번역이 맛깔스럽거나 신바람이 난다면 이 작품은 그야말로 빼어나며 재미난 작품이라 할 만할까.

 김화영 님은 어린이책도 곧잘 우리 말로 옮겼는데, 이분이 옮긴 어린이책 글줄은 썩 내키지 않는다. 프랑스 어른문학은 모르겠으나 프랑스 어린이문학 번역은 ‘어른문학 번역과는 아주 다르게’ 해야 한다고 느낀다. 《아이와 강》이라는 작품도 김화영 님이 옮겼는데, 이 작품 번역도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손꼽히는 숱한 번역쟁이들은 어른문학이 어린이문학보다 훌륭하거나 높다고 생각하는 굴레를 털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린다기보다 어른문학 번역쟁이는 아무도 못 말린다고 해야 할까. 어린이를 사랑하면서 어린이 마음이 되고, 어린이 눈높이에서 동무 어린이랑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며, 신나게 뛰노는 몸가짐으로 어린이문학을 살갑고 따스하며 가만가만 어루만질 수 있는 ‘철이 퍽 없는’ 개구쟁이 번역쟁이를 만나고 싶다. (4343.10.15.쇠.ㅎㄲㅅㄱ)


― 우리 아빠는 아무도 못 말려 (피에르 루키 글,김화영 옮김,1991년:민음사+2000년:비룡소/65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7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롤프 레티시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른 아닌 좋은 사람 되고픈 삐삐
 [책읽기 삶읽기 9]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삐삐’를 생각하면 ‘말괄량이’라는 이름이 퍼득 떠오른다. 삐삐 하면 척 하고 “말괄량이 삐삐”가 된다. 스물여섯 달이 거의 차고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갈 우리 집 딸아이를 볼 때면 으레 ‘말괄돼지’라는 낱말이 튀어나온다. 언제나 딸아이 스스로 하고픈 대로 하려 들고, 주는 밥은 안 먹으려 하기에. 신나게 노래부르며 춤추는 녀석은 밥 안 먹는 돼지요 마음껏 뛰노는 말괄량이이다.

 대한민국 이 나라에는 스웨덴말을 가르치는 대학교가 있다. 나는 다섯 학기를 다니다 그만두었으나 네덜란드말을 가르치는 대학교 학과 또한 있다. 이탈리아말과 포르투갈말과 체코말과 유고말 또한 함께 가르친다. 그러나, 이탈리아말 학과를 나와 이탈리아 문학을 번역하는 사람은 더러 보았으나, 스웨덴말 학과를 나와서 스웨덴 문학을 우리 말로 옮기는 사람은 아직 못 본다. 버젓이 포르투갈말 학과가 있으며 포르투갈말 학과 교수들이 있는데에도 포르투갈 문학을 포르투갈말로 된 책에서 옮기지 못한다. 이는 네덜란드 문학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네덜란드말-한국말 사전이 있으면 무엇하나. 네덜란드말 학과 교수가 있으나 무엇이 다른가.

 삐삐 이야기를 쓴 분은 스웨덴사람이다. 그렇지만 1982년에 종로서적에서 나온 《말괄량이 삐삐》(김인호 옮김) 말고는 스웨덴말에서 한국말로 옮긴 책이 더 없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다른 문학도 똑같다. 이분 문학을 스웨덴말에서 한국말로 옮기는 번역쟁이는 찾아보지 못한다. 예나 이제나 ‘스웨덴말에서 독일말로 옮긴 책’을 바탕으로 옮길 뿐이다.


.. 스웨덴에 그림같이 멋진 작은 마을이 있었다. 판판한 돌이 깔린 거리에 마당 있는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을 찾아온 사람이면 누구나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참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볼 때, 볼거리가 많은 마을은 아니었다 ..  (9쪽)


 나는 꿈을 꾼다. 누군가 네덜란드말 학과를 마친 젊은이 가운데 ‘안케 드브리스’ 문학이나 ‘안니 M.G.슈미트’ 문학이나 ‘리타 페르스휘르’ 문학을 네덜란드말로 된 책에서 우리 말로 옮겨 주기를. 하다못해 《안네 일기》라도 네덜란드책에서 우리 말로 옮기기를. 그리고 제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어린이문학을 스웨덴말을 배우는 학생과 스웨덴말을 가르치는 교수가 힘과 슬기를 모두어 스웨덴말로 된 책에서 우리 말로 옮겨 내기를.

 그러고 보면 덴마크사람 한스 안데르센 문학을 덴마크말에서 우리 말로 옮긴 적이란 없다. 노르웨이 문학이 되어도 마찬가지일 테지. 핀란드 문학은 어떻고.

 이디쉬말을 쓰는 사람들 문학은 어떻게 옮기는가. 베트남 문학은, 라오스 문학은, 스리랑카 문학은, 티벳 문학은 …… 우리는 어떠한 말로 된 책을 바탕으로 한국말로 옮겨서 읽는 셈일까.


.. 아니카는 삐삐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누가 삐삐한테 화를 내는 것이 싫었다 ..  (30쪽)


 모르는 노릇이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말괄량이 삐삐 이야기를 제대로 옮겨 낸 판으로 읽기는 힘들겠다고 느낀다. 우리 딸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아가씨가 되고 아줌마가 되며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말괄량이 삐삐는 노상 독일책에서 옮겨서 읽을밖에 없는 이 나라일 뿐이라고 느낀다.

 삐삐 이야기책을 내놓아 그렇게 많이 팔고 돈을 많이 번 출판사는, 이제라도 독일책이 아닌 스웨덴책을 바탕으로 다시금 새롭게 옮길 마음이 있을까. 스웨덴말 학과가 있는 대학교는 누구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같은 분들 문학을 대학교 돈이라든지 나라에서 얻는 돈이라든지 들여 이제라도 꼼꼼하며 알차게 새롭게 옮기도록 땀을 흘릴 뜻이 있을까.


.. 삐삐는 토미와 아니카를 즐겁게 해 주려고 사다리를 내려갈 때 항상 물구나무를 서서 내려갔다 ..  (78쪽)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를 읽는다.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인문책방 〈이음책방〉에 마실을 갔다가 이 책이 눈에 번쩍 뜨여 집어들어 읽는다. 첫판은 1996년 6월 15일에 나왔고, 고침판은 2000년 11월 15일에 처음 냈으며, 내가 산 판은 2010년 4월 10일 45쇄이다. 고침판은 45쇄인데 첫판으로는 얼마나 많이 찍었을까. 헌책방을 찾아가도 이 책은 어렵잖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이음책방〉이 잘 되기를 빌면서 부러 이 책을 〈이음책방〉에서 7000원을 꼬박 치르며 장만한다.

 1982년 종로서적판 《말괄량이 삐삐》를 읽고 나서 1996년에 시공주니어에서 내놓은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겹쳐 읽다가 참말 갑갑해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삐삐 이야기를 장만하여 읽을 생각을 오래도록 접고 지냈다. 독일책에서 옮겼기 때문에 번역이 떨어진다 할 수는 없다. 삐삐 책은 나라안에서 손꼽는 번역모임에서 우리 말로 옮겼다. 이분들이 번역을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 틀에 매여 있다. 이분들이 옮긴 책은 어느 책이나 어슷비슷하다. 글을 쓴 사람에 따라 다른 넋과 삶과 말이 보이지 않는다. 하이타니 겐지로 책이라면 하이타니 겐지로 맛과 냄새가 나야 하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책이라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맛과 냄새가 나야 한다. 삶과 삶터와 삶자락이 다른데 우리 말로 옮겨진 글월 매무새는 거의 똑같다.


.. 토미와 아니카네 반 친구들이 모두 부두로 나와서 친구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부러움도 섞인 눈물이었다. 내일이면 친구들은 평소처럼 학교에 가야 한다. 게다가 하필이면 지리 숙제가 남태평양의 섬들을 죄다 공부해 가는 것이었다. 토미와 아니카는 한동안 숙제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  (96쪽)


 나는 아름다운 외국 문학을 아름다운 번역으로 읽고 싶다. 이 아름다운 외국 문학 하나에 온마음을 쏟은 따뜻하고 넉넉하여 사랑스러운 책을 가슴에 안고 싶다. 낱말 하나하나를 더 살뜰히 고르는 번역문학을, 말투 하나하나를 더욱 살가이 어루만지는 번역문학을 마주하고 싶다.


.. 토미와 아니카의 엄마가 지금 두 아이를 본다면 얼마나 깜짝 놀랄까? 둘의 창백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와 건강한 모습뿐이었다 ..  (100쪽)


 씁쓸한 번역 이야기는 이제 집어치우자. 아름다운 어린이문학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를 이야기하자. 그러나 한 가지를 더 짚을 수밖에 없다. 삐삐 이름은 ‘삐삐 긴양말’이지 ‘삐삐 롱스타킹’이 아니다. 삐삐는 ‘영어를 모르’는 북쪽 나라(스웨덴) 어린이이다.


.. 이윽고 삐삐가 꿈을 꾸듯이 말했다. “얘들아, 파도 소리 좀 들어 봐. 내가 전에 ‘쿠르쿠르두트 섬이 너무 좋아서 영원히 살고 싶어질지도 몰라’라고 했던 말 기억나?” ..  (110쪽)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에 나오는 삐삐는 쿠르쿠르두트 섬에서 함께 놀다가 물에 빠진 토미를 살리며 상어를 번쩍 들며 말한다. “(상어를 보며) 부끄럽지도 않니(122쪽)?” 토미를 뭍에 건져 놓고는 엉엉 울며 이렇게 말한다. “아니. 상어가 아침도 못 먹고 배고파할 것이 가엾어서(123쪽).”

 ‘뒤죽박죽 별장’에서 삐삐랑 함께 노는 토미와 아니카는 “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173쪽).” 하는 말을 절로 내뱉는다. “그리고 어른들은 놀지도 않아. 후유, 어른이 되는 건 너무 끔찍해(174).” 하는 말을 한숨과 함께 뱉어 낸다.

 1948년에 나온 어린이문학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인데, 온누리에 손꼽히는 문화복지 나라 스웨덴조차 어른들은 따분하고 답답하며 재미없다는구나. 2010년 스웨덴은 1948년 스웨덴과 견주어 좀 즐거워졌을까. 좀 홀가분해졌는가. 좀 재미있어졌나.

 2010년 대한민국하고 1948년 대한민국은 어떠할는지 궁금하다. 경제성장에 목을 매는 이 나라는 차츰차츰 살기 좋을 뿐 아니라 즐거운 나라라 할 만한지 궁금하다. 삐삐와 토미와 아니카가 살아가는 작은 마을은 ‘관광지’가 아닐 뿐더러 ‘관광할 만한 유적이나 박물관’조차 변변하게 없으나 “그림같이 멋”지며,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참 살기 좋”다고 했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더 많은 돈이나 더 높은 이름값이나 더 센 힘이란 부질없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착하거나 참되거나 고운 삶이 빛난다.

 누가 누구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할 까닭이 없다. 누가 누구보다 큰 집에서 살아야 할 까닭이 없다. 누가 누구보다 잘난 대학교에 들어가야 할 까닭이 없다. 학교를 안 다니고 빵집에서 일꾼으로 지내더라도 손가락질할 사람이 없다. 구멍가게를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아 이어간다 하더라도 나무랄 사람이 없다. 교사나 경찰이나 공무원이나 시장쯤 되어야 무언가 뜻을 이루었다고 하지 않는다. 곰셉을 잘하건 못하건 그리 대수롭지 않다. 모두들 아름다운 삶을 바란다. 다들 사이좋은 이웃을 생각한다. 다만, 어린이일 때에는 그토록 신나게 뛰어놀면서 막상 어른이 되면 뭐 그리 바쁘고 힘든지 아이들하고 놀 겨를을 못 낼 뿐 아니라 어른들끼리도 제대로 놀지 못하고 만다.


.. “삐삐가 아주 외로워 보여. 아, 토미. 지금이 아침이면 좋겠어. 그러면 당장 삐삐한테 달려갈 텐데!” ..  (180∼181쪽)


 삐삐는 외롭다. 그리고, 삐삐가 외로워 보인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니카뿐이다. 삐삐는 제 한삶을 신나며 알차게 보내고 싶지만, 삐삐처럼 내 한삶을 신나며 알차게 보내고픈 동무나 이웃이 몹시 드물기 때문에 외롭다. 다들 돈·이름·힘(재산·명예·권력)에 얽매여 참된 내 삶을 껴안거나 어루만지지 못하니까 삐삐는 쓸쓸하다.

 그러나 삐삐 곁에는 토미와 아니카가 있으니까. 쿠르쿠루두트 섬 아이들이 있으니까. 거의 모든 아이들과 어른들은 다람쥐 쳇바퀴에 갇혀 있으면서 다람쥐 쳇바퀴인지 안 느끼면서 바보걸음을 한다지만, 마음을 나누며 사랑과 믿음으로 어깨동무하는 동무가 있어 삐삐는 외롭거나 쓸쓸하지만 또다시 기쁘게 웃으며 새 하루를 맞이하니까.

 어른이 되기 싫은 삐삐는 틀림없이 어른이 안 되겠지. 삐삐는 어른이 아닌 좋은 사람이 되겠지.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벗이 되며 좋은 이웃이 되는 삐삐일 테지. 좋은 사랑을 나누고 좋은 믿음을 베풀며 좋은 웃음과 눈물로 얼싸안는 삐삐로 살아갈 테지. (4343.10.13.불.ㅎㄲㅅㄱ)


―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롤프 레티시 그림,햇살과나무꾼 옮김,시공주니어 펴냄,1996.6.15./7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는 스무 살, 아니 만 열아홉 살 사계절 1318 문고 38
박상률 지음 / 사계절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빛나는 문학이 있는 삶자리
 : 박상률, 《너는 스무 살, 아니 만 열아홉 살》



- 책이름 : 너는 스무 살, 아니 만 열아홉 살
- 글쓴이 : 박상률
- 펴낸곳 : 사계절 (2006.4.15.)
- 책값 : 8500원



 (1) 배추값


 한 해 두 해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자꾸자꾸 늘어납니다. 아니, 굳이 알아야 할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 누리에서 시끌벅쩍 떠드는 이야기가 늘어납니다.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느는 한편, 이웃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늘어납니다.

 시골집에서 지내는 동안 신문을 읽거나 방송을 보거나 인터넷을 뒤적일 일이 없습니다. 우리 마을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돌아볼 겨를이란 없고, 산골자락 바깥에서 어떤 일이 생기는가에 굳이 눈길을 둘 틈을 마련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옆지기 식구들 살아가는 일산집에 모처럼 마실을 가서 함께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면, 텔레비전은 스물네 시간 내내 쉴 겨를을 주지 않고 볼거리를 베풉니다. 그야말로 스물네 시간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도록 합니다. 옆에 앉은 사람하고 말을 섞을 일이 없고, 밥술을 뜨면서 이 밥술에 얹힌 밥이나 반찬을 마련하고자 어머님이 얼마나 애쓰고 품을 들였는가를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저 화면에 눈이 꽂힐 뿐입니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개혁이든 수구이든 무어이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갖가지 지식과 정보가 넘실넘실합니다. 사람들 입맛에 맞추어 재미나게 이야기하자면 연속극이나 영화나 운동경기 이야기를 들어 빗댈 노릇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통령 자리에 앉은 분이 ‘배추값이 비싸면 양배추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는 대목을 꼬투리 잡으며 겨우 ‘푸성귀 값이 올랐음’을 들먹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농사짓는 사람한테는 ‘껑충 오른 푸성귀 값에 걸맞게 땅을 부치며 땀을 흘린 보람을 얻었는지 못 얻었는지’ 살피지 않습니다. 푸성귀 값이 쌌을 때이든 비쌀 때이든 농사꾼 살림살이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값이 쌀 때에는 싼 대로 등허리가 휘고, 값이 오를 때에는 오르는 대로 힘겹습니다. 왜냐하면 푸성귀 값이 오를 때에는 어디에서나 농사가 엉망이 되었을 때이니 값이 제아무리 올랐다 한들 얼마나 내다 팔 수 있겠습니까. 값이 쌀 때이든 비쌀 때이든 노상 ‘샛장수’ 노릇을 하는 농협이나 할인매장에서만 돈을 법니다.

 배추값 얘기가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배추 한 포기에 5000원은 조금도 비싸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배추씨를 심어 길러 보면 배추 한 포기 값으로 얼마를 쳐야 하는가를 어렵잖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배추 한 포기가 소담스레 자라기까지 며칠이 걸리고, 이동안 얼마만 한 땅에 배추를 심으며 물과 거름은 어떻게 주고 벌레는 언제 잡으며 김은 어느 만큼 매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심은 배추씨가 모두 싹이 트는지를 헤아려야 하고, 농사짓는 동안 들인 품을 생각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애호박 하나에 1800원도 하고 2500원도 하며 3000원도 합니다. 얼마 앞서까지는 애호박 셋에 1000원도 했습니다. 참 오르락내리락입니다. 그런데 2000년에는 애호박 값이 얼마였나요. 1990년과 1980년에는 또 애호박 값이 얼마였지요. 배추는 2000년에 얼마였고 1990년과 1980년에 얼마였을까요. 1980년과 1990년과 2000년에 버스삯은 얼마에서 얼마로 올랐고, 여느 일터 일꾼 일삯은 이동안 어느 만큼 올랐는지요. 기름값은 얼마에서 얼마가 되었고, 자동차 한 대 값은 얼마에서 얼마나 되었습니까. 전세집이든 달삯집이든 얼마를 치러야 네 식구 살림집을 마련할 수 있는지요. 지난 스무 해에 걸쳐 쌀값은 어떠한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파 한 묶음 값, 무 한 뿌리 값, 양파 한 알 값이란 지난 스무 해 동안 얼마나 달라졌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 너는 난리통에 변을 당했다. 난리통, 난리통이었다. 8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사는 거대한 도시가 열흘 간이나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고, 전쟁도 아닌데 군인들이 완전무장한 장갑차를 앞세워 사람들을 총으로 쏘고 칼로 쑤시고 곤봉으로 내리쳤다면 분명 난리통은 난리통이었다 … 그것도 햇살 좋고 바람 좋고 하늘 빛깔까지 고운 5월에 ..  (52∼53쪽)


 초등학교를 다니건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니건, 오늘날 한국땅에서 도시에 살거나 시골에 살거나 농사일을 어느 만큼 거든다거나 헤아리는 어린이나 푸름이란 찾아보기 힘듭니다. 제 어버이가 농사를 짓더라도 농사일에 눈길이나 마음길을 쏟는 어린이나 푸름이란 몹시 드뭅니다. 농사일을 못 거든다 하여도 농사를 해서 얻는 곡식과 푸성귀 값이 얼마쯤 하는가를 살피는 어린이나 푸름이란 아예 없다 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은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어마어마하게 많은 지식과 정보를 교과서와 제도권교육과 인터넷과 방송과 대학입시 들로 쏟아부으니까요. 아이들 스스로 제 넋을 차릴 수 없게끔 머리속을 갖가지 지식과 정보로 꽉꽉 채워 넣으니까요. 숱한 지식과 정보에 가로막혀 내 삶과 내 이웃 삶과 내 동무 삶을 돌아볼 줄 모르니까요.

 수학능력시험 문제로 안 나오는 과목은 아예 안 배워도 괜찮다고 여기도록 이끄는 교육 행정입니다. 정치권력은 정치권력대로 아이들을 더 바보가 되도록 닦달하고, 머리통만 굵은 멍청이가 되도록 내몹니다. 스스로 진보라 밝히든 보수라 밝히든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살아가도록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밥하기 한 번 시키는 어버이란 찾아보기 힘들고,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 스스로 마땅히 개도록 가르치거나 몸소 보여주는 어버이란 만나기 어려우며, 아이들이 먹는 온갖 먹을거리를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하고 손질하여 밥상에 오르는지를 들려주는 어버이란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배추 한 포기는 값이 얼마여야 알맞을까?’를 생각하도록 이끌지 못하면서, 아이들 또한 바보스러운 어른과 마찬가지로 ‘배추값이 너무 비싸!’ 하고 생각하도록 내몰고 맙니다.


 (2) 사람값


 볼일을 보러 읍내로 자전거나 시골버스를 타고 찾아가 보면, 읍내 중고등학교 아이들 치마가 참 짧습니다. 인천에 살던 때에는 인천 아이들 치마는 엉덩이와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도록 하며 그리 짧지 않고, 서울 아이들은 살짝 나폴거리며 짧았는데 시골 아이들 치마는 서울 아이들보다 훨씬 짧습니다. 인천이나 서울이나 시골 사내아이 바지나 웃도리는 제 눈으로는 퍽 우스꽝스럽습니다. 키 훤칠하고 얼굴 갸름하며 뚱뚱한 몸집 거의 없이 좀 마르다 싶은 아이들한테 걸맞을 옷을 제대로 입은 아이들을 만나기 참 힘듭니다.

 똑같이 맞춰서 입히는 학교옷이기에 다 다른 아이들 몸에 알맞도록 입히는 옷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이들 스스로 제 몸이 어떠한가를 옳게 헤아리지 못하며, 제 몸에 알맞을 옷을 옳게 가누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요즈음은 푸름이들이 얼굴차림하고 옷차림에 눈길을 많이 둘밖에 없는데에도 이렇습니다. 학교옷이란 하나같이 칙칙한 빛깔에 우중충한 느낌이요, 한껏 푸르게 피어날 넋을 고우며 맑게 어루만지지 못합니다. 어쩌면 어른들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이와 같기 때문일까요. 어른들은 아이들이 마음껏 생각하고 힘껏 뛰놀며 재주껏 꿈을 키우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인가요. 아이들을 ‘제복과 머리길이 굴레’에 가두어 놓고는 이 굴레에서 부처님 손바닥 손오공처럼만 바둥거리도록 붙잡기 때문인지요.


.. 가서 보니 학생이 가르쳐 준 곳은 대학 본부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넥타이 차림의 젊은이에게 야간대학, 아니 이부대학 건물을 물었다. 젊은이는 월산댁을 한 번 훑어보더니 이부대학이 어디 있는지 일러 주었다. 월산댁은 젊은이가 훑어보는 게 마땅찮았지만 내색을 하진 않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아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옷은 매끄롬하게 차려입었음시롱, 젊은것이 버르장머리는 디럽게 없네잉. 뭐 잠 물어 보면 보드랍게 갈쳐 주면 안 되는 것이여?’ ..  (83쪽)


 중학교는 왜 중학교이고 고등학교는 왜 고등학교인지 모르겠습니다. 구태여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갈라 놓는 까닭을 알 길이 없습니다. 교과서를 엮으며 학교에 몸담으며 교과서를 가르치는 어른은 무슨 생각으로 아이들과 사귀거나 어울리는지 궁금합니다. 바깥에는 햇볕이 따사로이 내리쬐는데, 불을 켜지 않으면 어두운 시멘트 교실에 왜 아이들을 잔뜩 몰아넣고는 아이들이 꾸벅꾸벅 졸거나 아예 대놓고 책상에 엎어져 자도록 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볕 좋은 날 골목마실을 하면서 언제나 느낍니다. 이 좋은 볕을 듬뿍 받으며 ‘내가 사는 동네’를 찬찬히 헤아리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우는 동네사람을 만날 수 없습니다. 볕이 좋든 말든 동네 푸름이들은 후미진 골목을 찾아 담배 피우기에 바쁩니다. 아이들로서는 후미진 골목일 테지만, 저 같은 사람으로서는 골목 할매와 할배가 어여삐 꽃그릇 마련하거나 텃밭을 일구며 푸른빛이 살아숨쉬도록 마련한 쉼터입니다. 아이들은 꽃을 보면서 꽃이라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예쁘다거나 남다르게 생겼다거나 이름이 궁금하다거나 느끼지 않습니다. 꽃이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꽃이 몇 송이 있다고 무엇이 달라지는지 깨닫지 않습니다.

 후미진 골목에서 담배 태우는 푸름이들 얘기를 했습니다만, 푸름이들만 이와 같지 않습니다. 어른도 매한가지입니다. 틀림없이 어른들 매무새 그대로 푸름이들이 따릅니다. 어김없이 어른들 몸짓 그대로 푸름이들이 물려받습니다. 어른들은 한길에서 담배 뻑뻑 피우며 걷다가 아무 데나 꽁초를 버립니다. 아이들은 골목에서 담배 빡빡 피우며 구시렁거리다가 할매 할배가 아리땁게 가꾼 꽃그릇이나 텃밭에 아무렇지 않게 꽁초를 버립니다.

 아이들 서넛쯤일 때에는 골목마실을 하는 저를 슬금슬금 곁눈질을 하며 다른 데로 내뺍니다. 대여섯쯤이거나 예닐곱을 넘으면 버젓이 드러내고 담배공장을 차립니다. 끼리끼리 놀 뿐 아니라 힘여린 이를 무리지어 괴롭히는 어른들 슬픈 얼굴을 아이들 몸가짐에서 낱낱이 느낍니다. 이 아이들을 중학교와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머리길이를 짧게 다그치고 물을 못 들이도록 하며 수염은 하얗게 밀도록 닦달하면서 ‘학교에 있을 때만큼은’ 담배를 못 피우게 꽁꽁 옥죄어 놓는들, 기껏 열여덟이나 열아홉까지입니다. 열아홉이 되고 스물이 되면 그야말로 깽판이며 막놀이판입니다. ‘공부 좀 했다’는 아이들이 대학교에 가고, ‘공부를 조금 더 했다’는 아이들이 서울에서 손꼽히는 대학교에 간다는데, 대학생들 술담배 사랑놀이 하며 노는 짓과 이름있다는 대학교 앞 술집거리 엉망진창 꼬락서니를 보면 이 나라 제도권 교육이 아이들한테 무슨 짓을 해대는지 눈에 선합니다. 아이들을 사람답게 가르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이들한테 사람다운 길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아이들한테 사람답고 아름다운 삶을 깨닫도록 안 하는 안타까운 곳을 가리켜 배움터라 할 수는 없다고 늘 느낍니다.


 (3) 아이들한테 역사를 보여주는 문학


 어린이문학을 하는 박상률 님이 쓴 《너는 스무 살, 아니 만 열아홉 살》을 읽습니다. 어른문학에서는 곧잘 다루지만 어린이문학에서는 좀처럼 못 다루는 ‘1980년 5월 광주’ 이야기를 찬찬히 풀어낸 책입니다. 조곤조곤 차분하게 1980년 5월 광주를 들려주는데, 피가 튀거나 곤봉이 춤추는 이야기는 하나도 깃들지 않으나 눈에 그리듯 이와 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 광주 이야기를 제법 읽거나 아는 어른으로서 ‘눈에 그리듯 떠올릴’ 뿐입니다. 1980년 5월 광주 이야기를 모르는 어린이와 푸름이는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아로새길 수 있을는지요. 책을 덮으며 《달맞이 언덕에 뜨는 달》(정해천 씀,일과놀이 펴냄,1994)이라는 책을 떠올립니다. 아직 《달맞이 언덕에 뜨는 달》처럼 1980년 5월 광주 이야기를 풀어낸 고운 책을 찾기란 어렵지만, 1980년 5월 광주뿐 아니라 숱한 다른 이 나라 삶자락 이야기를 이 책만큼 알뜰히 다룬 책 또한 찾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1980년 5월 광주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광주학생운동’ 또한 옳게 풀어내지 못하며, 1970년 11월 청계천 이야기도 참다이 풀어내지 못하는 가운데, 2002년 미선이와 효순이 이야기를 살뜰히 풀어내지 못합니다. 곰곰이 살피면, 나라밖에서 나라밖 역사를 알뜰살뜰 풀어낸 이야기책은 신나게 옮기기는 하는데, 나라안에서 나라안 역사를 한 올 두 올 다잡거나 다스리는 이야기책은 열 해에 한 권조차 못 나오는구나 싶습니다.


.. “근데 대통령은 할아버지가 다 되어 가지고도 배우고 가수고 맘에 드는 여자 있으면 불러다가 같이 술 마시고 데리고 놀아도 되는 거야? 우리 같은 젊은 청춘들은 여학생하고 어울려 극장에도 못 가게 하면서?” “히! 그런다고 네가 여학생하고 극장 안 갔냐? 몰래 할 건 다 했으면서 뭘 그래.” ..  (97쪽)


 어린이하고든 푸름이하고든 1980년 5월 광주 이야기를 비롯해 이 나라 여느 자리 여느 삶터 여느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기란 퍽 어렵습니다. 고속철도 여승무원 이야기라든지 천성산과 낙동강 지율 스님 이야기를 오늘날 어린이랑 푸름이하고 얼마나 오붓이 나눌 수 있는가요. 골목동네를 허물며 아파트만 올려대면서 ‘가난하다지만 가난하다 여기지 않고 알뜰살뜰 재미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오늘날 어린이랑 푸름이하고 얼마나 살가이 주고받을 수 있는지요.

 다시금 생각하면, 이러한 이야기는 어린이랑 푸름이하고만 못 나눌 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여느 어른하고도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습니다. 교장선생님들은, 구청장님들은, 시의원님들은, 산부인과 의사님이나 국정 변호사님들은 …… 우리 둘레 낮은 자리 낮은 사람들 삶을 어느 만큼 가까이 다가서거나 어깨동무하면서 마주하고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기자님들은, 작가님들은, 학자님들은, 교수님들은, 시민단체 활동가님들은 …… 얼마나 스스로 가난한 삶을 사랑하며 가난한 사람들하고 손을 맞잡으며 울고 웃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너는 스무 살, 아니 만 열아홉 살》 하나만을 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터전이 한결 아름다울 때라야 《너는 스무 살, 아니 만 열아홉 살》 또한 한결 아름다운 옷을 입습니다. 한국땅 사람들 삶이 한껏 아름다이 거듭날 때라야 1980년 5월 광주를 비롯하여 이 땅 아픔과 생채기와 눈물과 얼룩을 살포시 담아낼 빛나는 문학이 태어납니다.

 문학은 대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을 뿐더러 어떤 글쟁이한테서 배울 수 없습니다. 문학은 바로 우리 삶터에서 여느 어버이들이 여느 아이들한테 가르칠 수 있으며, 여느 살림집에서 여느 아이가 여느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배울 수 있습니다. (4343.10.5.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노스 높새바람 5
안니 M.G. 슈미트 지음, 경히 언니 그림, 김경태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은 어른으로 살아갈 우리들
 안니 M.G.슈미트, 《미노스》



- 책이름 : 미노스
- 글 : 안니 M.G. 슈미트
- 옮긴이 : 김경태
- 펴낸곳 : 바람의아이들 (2004.7.15.)
- 책값 : 7800원


 (1) 내 둘레에서 마주하는 말과 이야기


 동무나 이웃이나 둘레 사람들이 자동차 이야기를 하면 저는 거의 알아듣지 못합니다. 골프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아파트나 주식이나 펀드 이야기를 하면 하품이 나옵니다. 서울 홍대 앞 무슨 카페라든지 옷 상표라든지 이야기할라치면 조금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우리 아이는 엄마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가루젖을 먹지 않았고, 딱히 가루젖을 먹일 까닭이 없이 자랐습니다. 둘레에서 무슨무슨 가루젖 회사 무슨무슨 물건을 이야기하면 저로서는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한테는 천기저귀를 댔으니 종이기저귀 값이 어떠하고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 식구는 빨래기계 없이 살아갑니다. 천기저귀를 빨든 이불을 빨든 신을 빨든 손으로 빨래합니다. 손으로 빨래하며 빨래비누 한 장을 쓰니까 무슨무슨 세제라든지 표백제라든지 이야기하면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거꾸로, 동무나 이웃이나 둘레 사람들한테 자전거 이야기를 들려주면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전거를 어떻게 장만하고 어찌어찌 손질하는가를 이야기하면 마치 전문가들만 아는 테두리에서 말하는 양 생각합니다. 자동차를 닦듯 자전거를 닦을 뿐이고, 손쉬운 자동차 손질처럼 손쉬운 자전거 손질이 있습니다만, 이러한 대목을 살피는 분이 무척 드뭅니다. 자전거 바퀴에 바람이 샌다든지 브레이크슈가 다 닳았을 때에 손수 고칠 줄 아는 분은 매우 적습니다. 이 나라 적잖은 여느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여느 회사 출퇴근을 한다든지 학교를 오간다든지 하는 일이란 거의 꿈조차 꾸지 않고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함께 아이를 돌보며 키운다는 삶을 꾸밈없이 받아들이는 동무나 이웃이나 둘레 사람은 드물게 있습니다. 참으로 드물게 있습니다. 제아무리 남녀평등이니 여남평등이니를 들먹이고, 육아휴직을 외친다 할지라도, 아이를 돌보는 몫이 엄마와 아빠 모두한테 있음을 헤아리는 지식인이나 지성인이나 대학생이나 전문가나 교사나 어른이나 몹시 드뭅니다. 아이를 돌보는 몫뿐 아니라 집안일을 하거나 집살림을 꾸릴 때에 서로서로 돕고 거들며 함께하는 길을 살피는 이 또한 대단히 드뭅니다. 아이는 엄마 품이 따스하다고 느낀다지만, 아이가 아빠 품을 따스하게 안 느낄 까닭이란 없습니다. 어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함께 일컫는 말이지 어머니 혼자만 어버이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밖에 나가 돈을 많이 벌어온다고 아버지 몫을 제대로 하는 셈이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애 아빠인 제가 집에서 애 엄마랑 함께 아이를 돌보는 한편, 숱한 집살림을 함께 나누어 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곧이 받아들인다든지 스스럼없이 헤아린다든지 하는 이웃을 만나기는 힘듭니다. 으레 ‘왜 애 엄마가 할 일을 애 아빠가 하지?’ 하고 묻거나 ‘애 아빠가 밖에 나가서 돈 좀 벌어와야 하지 않아?’ 하고 묻습니다. 하다못해, 애 엄마보고 ‘애 엄마가 밖에 나가 돈 좀 벌어와요.’ 하고 말하는 사람을 아직 못 만났습니다.

 손빨래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손빨래하는 고단함과 즐거움을 느끼기란 어렵습니다. 즐거움과 함께 고단함이 있고, 고단하면서 즐거운 손빨래인 줄 느끼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다른 집살림도 마찬가지인데, 집살림이란 참으로 고단하면서 즐겁습니다. 홀가분하면서 괴롭습니다. 멋지면서 슬프고, 사랑스러우면서 얄궂습니다. 아이를 수레에 태우고 슬슬 밀며 다닐 수 있겠지만, 아이를 한 팔에 안고 다른 한 팔에는 저잣거리에서 장만한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아 끙끙대며 들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삼십 분을 거닐다 보면 아주 팔이 빠질 듯합니다. 무더운 여름날 잠든 아이를 안거나 업고 삼십 분 남짓 걸어서 집으로 돌아올라치면 애 엄마 아빠나 아이나 온몸이 땀투성이가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땀투성이가 되는 몸으로 부대끼는 삶과 사람과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땀투성이가 되는 몸뚱이가 느낄 고단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 한 사람으로 고운 목숨 선물받아 꾸리는 삶을 아낌없이 누리는 하루하루란, 이와 같이 살아가며 몸으로 복닥이는 사람끼리 오순도순 나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집일 할 사람을 돈을 주어 둔다든지, 아이를 안고 다닐 짬에 자동차를 몰며 차에 아이를 싣고 다닌다든지, 포대기를 넣을 가방에 화장품이나 책을 넣는다든지, 아이 얼굴을 닦아 줄 손수건을 넣을 주머니에 디엠비나 엠피셋을 넣는다든지 하는 이들하고는 아이랑 복닥이는 삶을 나눌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보고 신문을 읽는 숱한 사람들한테는 박세리라는 이는 골프여왕이라 할 만하고, 박찬호라는 이는 이름난 야구선수라 할 만하며, 박지성이라는 이는 잘나가는 축구선수라 할 만하며, 박태환이라는 이는 손꼽히는 수영선수라 할 터이며, 김연아라는 이는 빼어난 피겨선수라 하겠지요. 그러면 텔레비전을 안 보고 신문을 읽지 않으면서 땅을 부치고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한테는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주노동자들한테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고, 신문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터넷을 켤 때에 따로 무슨무슨 새소식을 읽지 않습니다. 정치이든 경제이든 사회이든 문화이든 종교이든 운동이든 이런저런 새소식을 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식구 둘레에 기쁘며 슬프고, 재미나며 지루하고, 반가우며 구지레한 수많은 이야기가 넘쳐 있기 때문입니다.

 바깥마실을 하다가 때때로, 밥집이나 술집이나 이웃집에 켜져 있는 텔레비전을 함께 들여다봅니다. 밥집이나 술집이나 이웃집에 놓인 신문을 들춰봅니다. 우리 누리를 옳고 바르게 일구겠다고 외치는 이들이 엮는 매체라 할지라도 ‘이주노동자 눈길’로 기사를 다루거나 쓰는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농사꾼과 여느 공장노동자 눈매’로 기사를 만지거나 가꾸는 모습을 마주하기 힘듭니다. ‘고졸자나 가정주부 눈높이’로 기사를 꾸리거나 엮는 모습을 만날 길은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론은 있고 주장은 있는 신문이요 방송이며 책입니다. 학문으로 갈고닦았고 사상으로 서 있는 신문이고 방송이며 책입니다. 그렇지만, 뜨거운 땀방울과 따순 손길과 너그러운 넋으로 이루어진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이란 더없이 드물거나 찾을 길이 없습니다. 살가운 손짓과 고운 사랑과 애틋한 마음씨로 어우러진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이란 참으로 없거나 마주할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나비 한 마리를 이야기할 때에도 ‘나비 이야기를 참 잘 엮은 좋은 그림책’을 읽으며 나비를 이야기하지, 우리 둘레에서 팔랑거리는 나비와 부대낀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엊저녁 갑작스레 퍼붓는 빗줄기를 따라 나비 한 마리가 우리 집에 살며시 들어왔는데, 비를 그으려고 여느 살림집으로 들어온 나비 한 마리를 놓고 우리 스스로 이야기를 일구는 몸짓을 둘레에서 마주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두들 나비 도감을 보고 나비 그림책만 보며 나비 다큐멘터리를 볼 뿐입니다.

 여느 사람들 삶이 살가이 복닥이는 이야기를 담은 좋은 그림책 《엄마의 의자》(베라 윌리엄스,시공주니어,1999)가 있습니다. 이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는 참 쉽습니다. 고되게 일하는 엄마가 느긋하게 쉬는 걸상 하나를 어렵사리 다시 마련했다는 줄거리입니다. 집에 난데없이 불이 나서 걸상이고 뭐고 다 타고 말아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웃집에서 이것저것 도와주어 다시 살림을 꾸렸고, 그림책 주인공은 한 푼 두 푼 모아서 드디어 푹신한 걸상 하나 새로 장만한다는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쉬운 줄거리 흔한 이야기를 그림책 아닌 우리 삶에서 마주하려고 하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멋진 이야기를 텔레비전 연속극이나 스포츠중계 아니고서는 찾지 못하는 요즈음 우리들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영화나 책 아니고서는 마주하지 못하는 요즈막 우리들입니다.

 이야기는 없는데 사람은 득시글합니다. 이야기는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는데 돈은 흘러넘칩니다.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으나 자동차며 아파트며 경제성장이며 우뚝우뚝 치솟습니다.


 (2) 어린이책 《미노스》 읽기


 어린이책 《미노스》를 읽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책을 애써 읽을 생각이 없었으나, 아이 엄마와 함께 책방마실을 할 때에 아이 엄마가 골랐습니다. 네덜란드사람이 고양이를 글감 삼아서 쓴 《미노스》이기에, 저보고 이 책이 어떠할 듯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흘끗 살피며 “고양이 이야기네.” 하다가는 한낱 고양이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느끼며 함께 책값을 셈했고, 아이 엄마보다 제가 먼저 읽었습니다. 책 겉에는 글쓴이가 네덜란드에서 아주 손꼽히는 어린이책 작가이며, ‘어린이책에서 노벨상으로 일컫는 안데르센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곳곳에 적혀 있습니다. 아무래도 ‘안데르센’ 같은 이름이야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안니 M.G. 슈미트’ 같은 이름은 알아볼 이가 아주 드물 테지요. 아니, 우리 나라에는 이분 책이 고작 세 권 옮겨졌을 뿐이요, 그나마 하나는 예전에 판이 끊어졌고, 다른 하나는 2009년에 나왔습니다. 《미노스》(2004)라는 책을 내놓은 출판사로서는 이 작품이 아무리 빼어나고 재미있다 할지라도 선뜻 작품만으로 사람들한테 알리거나 나누기는 힘들었으리라 봅니다.

 늘 그렇지만, 이 작품 《미노스》를 써낸 ‘안니 M.G.슈미트’라는 네덜란드사람이 네덜란드에서 아주 손꼽히는 분이기 때문에 이 작품 《미노스》가 읽을 만하지 않습니다. ‘어린이책에서 노벨상으로 일컫는 안데르센상’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 작품 《미노스》가 훌륭하다거나 재미있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삶은 삶이며 작품은 작품입니다. ‘자선단체에 기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일 수 없고, 널리 이름난 사람이라 해서 아름다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착하고 참되며 곱게 제 한길을 걷는 가운데 사랑과 믿음을 따뜻하고 넉넉하게 나누는 사람일 때라야 비로소 훌륭합니다. 권정생 할아버지 같은 분은 더도 덜도 아닌 돈을 그때그때 이웃돕기로 내놓으며 살아왔습니다. 누구처럼 몇 백 몇 천만 원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십만 원 이십만 원씩 푼푼이 퍽 자주 내놓았습니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어디이든 십만 원이나 이십만 원을 내놓는 사람 이름은 실어 주지 않습니다. 싣는다 할지라도 코딱지만큼 자잘한 글씨로 한 귀퉁이에 실어 놓으니 권정생이든 박정생이든 최정생이든 누구이든 알아볼 수 있지 않아요. 누군가를 돕는 삶이란 나 스스로를 돕는 삶이고, 누군가한테 사랑을 나누는 손길이란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손길입니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시골 저잣거리에 마실을 다니며 먹을거리를 손수 장만하면서 당신 삶을 꾸리는 가운데 시골 저잣거리 장사꾼들마다 장사하는 삶을 꾸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어린이책 《미노스》에 나오는 ‘미노스’는 사람이 아닌 고양이입니다. 고양이 가운데 도시 골목동네 한켠에서 살아가는 골목고양이입니다. 그런데 이 고양이 미노스는 무슨 화학 실험실 곁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가다가 쓰레기통에 있던 무언가를 먹으며 사람이 되고 맙니다. 꿈 같은 소리라 여길 만합니다만, 오늘날 과학자들이 벌이는 숱한 실험이란 몹씨 끔찍할 뿐 아니라 사람 유전자까지 건드리고 있음을 돌아본다면, 그저 문학책에서 ‘거짓말처럼’ 다루는 이야기가 아닌 ‘참말처럼’ 우리 삶터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따이이따이병이나 미나마따병 피해자들이라든지, 미국 군인이 베트남에 뿌려댄 고엽제 때문에 2세와 3세가 받는 피해를 살피면, 사람이 벌인 생화학 실험과 과학 실험과 무기 실험과 전쟁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 몸이 뒤틀리거나 비틀리며 엉망이 됩니다. 이뿐 아니라 푸나무와 짐승마저 엉망이 되고 있어요. 오늘날 우리 밥상에 오르는 먹을거리 가운데 ‘유전자 안 건드린 곡식’이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고기 가운데 ‘유전자 건드린 곡식으로 만든 사료와 항생제’를 안 먹고 큰 돼지나 닭이나 소 들이란 거의 없습니다.

 고양이 미노스는 사람이 저지른 끔찍한 일 때문에 얼결에 사람 모양이 되고 맙니다. 사람 말을 하고 사람처럼 걷고 움직입니다. 미노스는 사람 꼴이 되었어도 스스로 고양이요 고양이 말을 하고 고양이 노래를 부릅니다. 고양이처럼 새를 잡아먹으려 하고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며 고양이처럼 나무를 타고 지붕을 타며 잠을 잡니다. 그런데 미노스는 고양이 꼴이 아닌 사람 꼴인 까닭에, 미노스를 마주하는 사람들은 미노스를 얄궂게 바라봅니다. 미노스한테 ‘고양이 짓’이 아닌 ‘사람 짓’을 하라고 들볶습니다. 똑같은 틀에 똑같은 울타리에 똑같은 고리를 채우려 합니다.

 둘레 사람들이 들볶는 가운데에도 ‘사람고양이(또는 고양이사람)’ 미노스는 고양이하고 사귀며 지냅니다. 고양이하고 사귀며 지내다가 당신 몸 하나를 건사해 주고 밥(먹이)을 챙겨 주는 토마한테서 따스함과 넉넉함을 느낍니다. 미노스는 사람들한테 잔뜩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람내음을 살가이 받아들이거나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고양이인 이녁을 꾸밈없이 받아들이거나 맞아들이는 토마라고 하는 사람 하나한테 이끌립니다. 미노스로서는, 고양이 몸에 고양이 삶일 때이든 사람 몸에 고양이 삶일 때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제 목숨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즐길 뿐입니다. 사람 껍데기를 썼다고 해서 제 삶을 잃거나 버리지 않아요. 고양이 껍데기를 쓴다고 해서 제 삶이 더 아름답거나 알차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어떤 껍데기이든, 어디에서 지내든, 누구하고 어울리든, 미노스 스스로 미노스를 사랑하고 아끼는 길을 깨닫습니다. 아직 어린 고양이였던 미노스는 사랑과 삶과 웃음과 눈물을 고이 헤아리면서 ‘어른’ 고양이사람(또는 어른 사람고양이)인 이녁으로 새로 태어나는 나날을 누립니다.

 삶을 따져야지 가방끈이라는 학력을 따질 일이 아닙니다. 사랑을 살펴야지 얼굴이나 몸매를 살필 일이 아닙니다. 믿음을 섬겨야지 이름값 따위를 섬길 노릇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을 찾아야지 돈을 찾을 노릇이 아닙니다. 눈물과 웃음을 골고루 맞아들여야지 권력이라는 주먹다짐을 맞아들일 노릇이 아니에요.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우리들입니다. 좋은 어른이 될 우리들입니다. 좋은 삶을 사랑할 우리들입니다. 좋은 이웃하고 어깨동무할 우리들입니다. 좋은 일과 좋은 놀이를 붙잡을 우리들입니다. 좋은 밥과 좋은 집이란 돈이 아닌 사랑과 믿음으로 이루며 따스함과 넉넉함으로 장만할 수 있음을 깨달을 우리들입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나이를 더 먹었다고 더 어른이지 않습니다. 나이값을 해야 어른이고, 나이에 따라 알맞춤하게 값을 하는 아름다운 삶이어야 바야흐로 아름다운 어른입니다. 아름답게 살아가야 아름다운 사람이면서 아른다운 어린이나 어른으로 자리잡습니다. 아름답게 살아가지 않으면서 ‘경로우대’만을 바란다면 참으로 슬픕니다. 어른이란, 아니 모든 사람이란, 저마다 제 땅 제 터전 제 누리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땀흘리고 손을 맞잡는 사람들이에요. 《미노스》에 나오는 미노스는 아름다움이라는 열매를 찾고 즐기고 누리며 나누는 살가운 길을 부드럽고 맛깔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사람은 왜 ‘고양이 말’을 듣지 못하는가


 어린이책 《미노스》를 읽다 보면, 사람은 왜 고양이 말을 듣지 못하는가 하고 자꾸자꾸 고개를 갸웃할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사람들 가운데 고양이 말을 듣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개 말을 듣는다거나 새 말을 듣는다거나 보리 말을 듣는다거나 복숭아 말을 듣는다고 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뭅니다. 쉬리가 하는 말이라든지 송사리가 하는 말을 듣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밤나무가 하는 말이라든지 봉숭아가 하는 말을 들으려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요.

 모두들 돈이 들려주는 말만 들으려 합니다. 저마다 아파트가 들려주는 말만 들으려 합니다. 자꾸자꾸 자가용이 들려주는 말 아니고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우리 아이가 들려주는 말뿐 아니라 이웃 아이가 노래하는 말은 아예 귀담아듣지 못하기까지 합니다.

 《미노스》라는 책을 읽을 때에는, 사람들 말인지 고양이들 말인지, 아니면 우리가 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말인지를 찬찬히 가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따로 고양이 말이라든지 사람 말로 가른다기보다, 사랑스레 살아가는 뭇목숨 말마디라고 느끼며 새삼스레 《미노스》를 다시 한 번 읽어 봅니다. (4343.8.4.물.ㅎㄲㅅㄱ)


[11∼12쪽] “이 봐. 내가 자네 좋아하는 거 알지? 자넨 아주 똑똑한 친구고. 재미있는 기사도 쓸 줄 알아. 하지만 여긴 신문사야. 신문에는 뉴스가 나와야 하는 법이야.” “뉴스라면 이미 신문에 많이 나와 있는걸요! 전쟁 소식도 있고. 뭐 그 비슷한 다른 소식들도 있고요. 살인 사건도 있잖아요! 제 생각엔, 사람들이 가끔 고양이나 새로 난 잎에 대한 얘기를 읽으면서 서로 이런저런 생각을 나누는 것도 뉴스를 읽는 것만큼 좋은 일인 것 같은데요 …….”

[19쪽] “벌써 생선 냄새를 맡았구나! 부엌으로 가자. 요리해서 같이 먹어야지. 플루프(고양이 이름). 생선 한 마리 통째로 줄게. 너한테 생선을 사 주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왜냐면 말이지. 내일. 나 해고당할 거거든!  길거리에 나앉을 거야! 쫓겨나고 말 거라고! 그러면 돈 한 푼 못 벌고, 너랑 나랑 같이 구걸이나 해야겠지.” “야옹!”

[53쪽] “가지 마! 떠돌이 고양이로 살라고! 자유롭게 말야! 그렇지 않으면 한 달만 지나도 주사를 맞으러 동물병원에 다니는 신세가 될 거야.”

[59쪽] 그는 예전처럼 숫기가 없었다. 이 뉴스는 모두 고양이들한테서 들은 것이었다. 그는 받아적었을 뿐이다. 그것 말고 다른 일을 한 게 있다면 …… 아주 부지런히, 고양이들이 얘기한 것이 정말로 사실인지 확인해 보는 것 정도였다.

[65쪽] “토마 씨, 그건 못하겠어요! 사람들이 무섭거든요.” “바보같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미노스는 긴 눈을 가늘게 드고는 잠시 그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어색해져서 얼굴을 돌렸다. 토마는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얘길 할 수 있지? 나도 수줍음 많고 겁 많은데! 나 역시 사람들보다 고양이들을 만나는 게 좋은데 말야!’

[93쪽] “저 여자가 바로 그 토마 시네 여자래!” “비서래요 …… 상자 안에서 잔다는!” “밤에는 지붕 위를 걸어다닌다지!” “정말 이상한 여자야!” 빵집 주인이 그 얘기를 다 듣고는 말했다. “이상해 보이긴 하지만, 나한테는 은인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면 됐지요. 호밀빵 반 덩이 달라고 하셨나요?”

[116∼117쪽] “시장님인가요?” 미노스가 속삭였다. “아뇨. 탈취제 공장 사장 말베르 씨예요. 아주 유명한 사람이죠. 좋은 일을 많이 하거든요.” “어떤 종류의 좋은 일인데요?” 미노스가 궁금해했다. “자선 단체에 돈을 내죠.”

[188쪽] “기사를 스실 건가요?” “예.” “어머! 그 기사를 쓰신다고요? 말베르에 관해서요?” “맞아요. 증거가 있든 없든 신경 안 쓸래요. 증인이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아요!”

[217쪽] “사진이 잘못됐습니다!” 강당 안이 술렁거렸다. 그때 다음 슬라이드가 나타났는데 이번엔 아주 분명하게 말베르 씨가 개를 때리는 채찍으로 외퀴메니 고양이를 때리는 장면이었다. 말베르 씨는 정말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건 우리 고양이예요!” 목사가 소리쳤다.

[239쪽] 플루프는 그에게 몸을 비벼대며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것 같았다. 고양이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게 그렇게 안타까운 적이 없었다! 어쨌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건 알 수 있었다!

[250쪽] “고양이들이 하는 평범한 짓은 뭐든지 다시 할 수 있어! 뭘 생각하고 망설이는 거야?”

[270쪽] 토마는 부엌 창 밖으로 몸을 빼고 소리쳤다. “아침 식사 준비 다 됐어요! 고양이랑 사람이랑 모두들 오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