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펴야 봄이 온다 - 다름이라는 사선을 넘어서, 탈북 청소년의 당당한 자기 길 찾기
셋넷학교 엮음 / 민들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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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먹다짐으로 맞서는 남·북녘이기 때문에
 [책읽기 삶읽기 15] 셋넷학교 엮음, 《꽃이 펴야 봄이 온다》



 《꽃이 펴야 봄이 온다》를 읽는다. 남과 북으로 갈라졌을 뿐더러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로 뿔뿔이 흩어진 채 살아가는 이 한겨레 조그마한 땅에서, 남녘땅으로 들어와 살아가는 북녘땅 푸름이들 삶과 넋과 꿈이 무엇인가를 담은 조그마한 책을 읽는.

 《꽃이 펴야 봄이 온다》는 북녘땅에서 살다가 남녘땅에서 살아가는 푸름이들 삶과 넋과 꿈을 담는 가운데, 사이사이 ‘남녘땅 셋넷학교 교사 목소리’를 곁들인다. 교사란 아이들을 이끄는 사람이고, 교사란 아이들보다 먼저 태어나서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아이들보다 한 가지라도 더 잘 알거나 많이 안다면서 이런저런 앎조각을 나누어 줄 사람이겠지.

 지난 2007년에 나온 《금희의 여행》(민들레)이라는 책을 떠올린다. 《금희의 여행》은 함경도 아오지에서 태어나 살다가 7000킬로미터를 거치고 헤치면서 남녘땅에 자리를 잡은 작은 아이 삶을 작은 아이 목소리 결을 고스란히 살린 이야기책이다. 《꽃이 펴야 봄이 온다》 또한 아이들 목소리 결이 잘 살아나 있으나, 남녘땅 교사들 목소리가 섣불리 자꾸 끼어든다. 아이들 글을 읽거나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관람기’와 같은 구경꾼 글을 끼워넣자면 맨끝에 몰아서 적바림을 하거나 아예 덜어야 하지 않았을까. 오늘 이 땅 이 둘레 사람들이 ‘다름을 안다지만 다름이 어떠한 다름인가는 모른다’고 한다면, 이들 푸름이들 목소리를 가만히 귀기울여 들을 노릇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정길·김영심·김하늘·박영명·박정혁·윤나영·최금희·하복란, 이렇게 아이들 이름을 당차게 적바림하고, 이 아이들 스스로 제 이야기를 털어놓도록 곁이나 뒤에서 조용히 거드는 한편, 이 아이들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어떤 꽃이 피어야 어떤 봄이 올까’ 하는 이야기를 길어올리도록 이끌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 처음 버스를 탈 때 잘못 타게 되었는데 ‘푸른마을까지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우물거리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한국사람들이 순간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한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모든 것이 달라 있었다. 한국 아이들이 입은 옷도 나와 달라 보였고, 그들의 말투 행동도 달랐다. 내 고향 아오지와 전혀 다른 서울에서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 ‘도대체 왜 강원도에서 왔다고 말한 거야? 함경북도 아오지가 내 고향이라고 말하면 어때서?’ … 차라리 굶더라도 북한에서 친구들과 마음껏 말하고 뛰어놀며, 어디를 가도 내가 아는 사람들이어서 낯설거나 두렵지도 않았으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 나 아오지 여자야. 그래서? 너희 한국사람들은 북한사람 사귀면 감옥에 가냐? 그게 그렇게 창피한 일이야?’ ..  (19∼21쪽)


 아이들은 그냥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한테 꼬리표나 이름표를 붙이려 한다면 ‘탈북 청소년’이 아닌 ‘함경도 아이 아무개’라든지 ‘평안도 아이 아무개’라든지 ‘해주 아이 아무개’처럼 불러야 옳다고 느낀다. 《꽃이 펴야 봄이 온다》라는 책을 살피면, 책날개에 아이들 소개하는 글을 적어 넣을 때에 ‘탈북 청소년’이라 하고 ‘아이들 학력’을 달아 놓았다. 책날개에서 ‘탈북 청소년’이라는 이름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아이들 학력을 굳이 달아야 했을까. 달아야 한다면 아이들 고향마을 이름을 달아야 옳지 않은가. 아이들은 남북녘·일본·중국·러시아라는 울타리를 넘어 서로 같은 한겨레임을 느끼면서 즐거이 어깨동무하기를 바랄 텐데, 이 아이들을 언제까지 이런 눈길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아이들은 탈북 청소년이 아닌 그저 청소년이다. 꼭 대학교를 다녀야 무언가 일할 솜씨가 생기는 아이들이 아니다. 대학교라는 곳이 아닌 삶자리를 찾으며 아름다운 나날을 일굴 아이들이고, 분단과 전쟁이 아닌 평화와 통일을 꿈꿀 아이들이다.

 남녘이든 북녘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러시아이든 전쟁무기 만드는 일을 그쳐야 한다. 남녘이랑 북녘이랑 ‘군대 시설 현대화’는 집어치워야 한다. 남북녘 모두 군량미를 차츰 줄이고 군인 숫자를 나날이 줄여, 바야흐로 군대가 이 땅에서 모조리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한테는 군사훈련이 아닌,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마음을 갈고닦는 올바른 일거리와 놀잇감을 베풀어야 한다. 아이들은 손수 땅을 일구어 내 밥그릇을 햇볕과 바람과 물과 흙 기운을 담아 고맙게 얻는 흐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부터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살가운 동무와 이웃을 사귀는 즐거움을 맛보아야 한다. 씩씩한 넋, 튼튼한 얼, 착한 마음, 고운 생각으로 푸르디푸른 삶을 보듬어야 한다. 나라에서는 군부대에 쏟아붓던 돈을 사람들 누구나 골고루 아늑하면서 즐거이 살아갈 수 있게끔 써서 문화와 복지와 교육과 의료를 가다듬는 데에 마음을 기울이고, 푸름이들은 서로를 한껏 사랑하고 아끼는 따스한 가슴을 북돋아야 한다.


.. 많은 교회가 북에서 온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지만 그 목적이 선교를 위한 것이다. 전도하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중국에서 일 년 동안 하루에 열두 시간씩 무릎 꿇고 성경을 읽은 경험이 있다 … 사람들한테 굳이 이런 공연을 보여주지 않아도 어디 가서든 당당하게 살 수 있는데, 하필 어릴 때 불렀던 노래를 부르게 하는지, 이해가 되면서도 반발심이 생겼어요 … 문제는 남과 북 모두 서로가 다름을 알고 있으나,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  (27, 166, 251∼252쪽)


 연평도에 폭탄이 떨어졌으니 황해도 해주에 폭탄을 돌려주어야 한다면, 황해도 해주에서는 인천이나 서울이나 경기도에 미사일을 되퍼부어야 할 테고, 인천이나 서울이나 경기도에서는 평양이나 평안도에 미사일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야 만다.

 서로서로 얼마나 믿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며 아끼지 못했기에 이렇게 툭탁툭탁 다투어야 하나. 서로서로 얼마나 살피지 못하고 보듬지 못하며 어루만지지 못했기에 이토록 주먹다짐에 윽박지르기에 손찌검으로 마주해야 할까.

 총 한 자루 만드는 돈은 너무 아깝다. 총 한 자루 만든다며 바칠 땀은 몹시 슬프다. 총 한 자루 만드는 일꾼 품이랑 총 한 자루 움켜쥘 사람들 손길이랑 더없이 딱하다. 총이 아닌 쟁기를 쥐어야 하고, 총이 아닌 책을 들어야 하며, 총이 아닌 연필을 들어야 한다.

 어른들부터 꽃다운 삶을 돌보고, 아이들 또한 꽃다운 삶을 가꾸도록 힘써야 한다. 어른들이 앞장서서 손을 맞잡고, 아이들이 나중에 기쁘게 어깨동무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 “아무리 내가 좋은 대학을 나와도 한국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어. 경쟁이 심하고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우리로선 이 땅에서 공부를 해도 힘들어.” … ‘탈북자’라는 이름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북에서 온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기 위한 사람이라고 인식하기보다, 살기 힘들어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더 강조하는 것 같다. 또한 이 이름은 북한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름이기도 하다 ..  (31, 243∼244쪽)


 《꽃이 펴야 봄이 온다》를 덮으며 생각한다. 가만히 보면, 이 땅 남녘나라에서는 북녘땅을 고향으로 둔 푸름이들 목소리를 찬찬히 담아낸 책 하나 거의 없지만, 정작 남녘나라에서 예쁘며 착하게 살아가는 푸름이들 목소리를 알뜰히 실어낸 책 하나 거의 없다. 아프고 힘겨이 살아가는 푸름이들 목소리조차 듣기 어렵다. 글쎄, 찾아볼 수 있을까? 다문 몇 권이나마 찾아낼 수 있으려나? 열다섯 푸른 아이 목소리를 어느 책이 실었을까. 열여섯 푸른 아이 삶무늬를 어느 책이 보여줄까. 열일곱 푸른 아이 마음결을 어느 책이 껴안을까.

 서로서로 사랑으로 꽃이 펴야 한다.

 남녘나라 어른들이 남녘나라 아이들을 참다이 사랑하지 않으니, 이런 메마르고 거친 곳에서는 북녘나라 아이들이 찾아왔을 때이건 일본땅이나 중국당 아이들이 찾아들 때이건 곱고 따스한 봄이 찾아오지 못한다. 찬바람 씽씽 부는 이 남녘땅에 무슨 꽃 무슨 봄이 있는가. 매몰찬 이 남녘나라에서 어떤 푸름이가 꽃다운 나이를 누릴 수 있는가. 꽃다운 푸름이를 군대에 집어넣어 살인기계로 바꾸어 내는 남·북녘 모두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수 없는 슬픈 불지옥이다. (4343.11.29.달.ㅎㄲㅅㄱ)


― 꽃이 펴야 봄이 온다 (셋넷학교 엮음,민들레 펴냄,2010.2.27./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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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어디에서 올까?
나카무라 유미코 외 지음, 이시바시 후지코 그림, 김규태 옮김 / 초록개구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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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읽기로 가르칠 수 없는 ‘전쟁과 평화’
 : 오노 카즈오·나카무라 유미코+이시바시 후지코,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


- 책이름 :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
- 글 : 오노 카즈오·나카무라 유미코
- 그림 : 이시바시 후지코
- 옮긴이 : 김규태
- 펴낸곳 : 초록개구리 (2009.3.25.)
- 책값 : 8500원



 (1) 청소년책이 있기는 있을까


 푸름이한테 읽히려는 책이 푸른책입니다. 푸름이가 푸른날을 말 그대로 푸르게 보내며 몸과 마음을 아름다이 일구도록 손길을 내미는 책이 푸른책입니다.

 나라안 어른이 일구는 좋은 푸른책이 있을 테고, 나라밖 어른이 마련한 좋은 푸른책이 있을 테지요. 그러면 나라안 어른은 이 나라 푸름이한테 어떤 책을 읽히려 할까 궁금합니다. 나라밖 어른은 당신이 살아가는 나라 푸름이한테 어떤 책을 읽히려 하나 궁금합니다.

 시골 살림집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와 복닥이며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한테 가장 사랑스러우며 기쁜 책은 무엇일까 하고.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책 하나가 우리 아이한테 가장 사랑스러운 책이 될까요. 우리 아이가 쏙 빠져드는 이야기책 하나가 우리 아이한테 가장 좋은 책이 되려나요.

 아이는 책을 읽으며 웃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엄마나 아빠가 가슴과 가슴을 맞대어 포옥 안으면 으레 웃습니다. 가슴과 가슴을 맞대며 포옥 안을 때에 웃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낑낑대더라도 제아무리 졸립더라도 가슴과 가슴을 맞대어 포옥 안을 때처럼 따사롭거나 넉넉한 때는 없다고 느낍니다.


.. 유타는 도모미가 까닭 없이 때리거나 발길질만 하지 않으면 정말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 유타의 마음도 모른 채 갑자기 도모미가 다가와 또 유타가 메고 있는 가방에 발길질을 하고는 도망가 버렸어요. 유타는 더는 참을 수 없어 도모미를 쫓아가 때려 주려 했지요. 그때 짝이 유타를 말리며 말했어요. “그러지 말고 그냥 말로 해. 아니면 너도 똑같아지잖아.” ..  (25쪽)


 지지난달에 일 때문에 아이 아빠 혼자 자전거를 끌고 서울로 마실을 나왔습니다. 이때에 좋은 벗님을 만나 신나게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고는 잠자리를 찾아 비틀비틀거리면서 자전거를 끌었습니다. 자전거를 어딘가에 묶어 두고 택시를 타면 좋았으련만, 또는 가까운 잠집으로 찾아들었다면 좋았으련만, 술이 들어간 아이 아빠는 제 마음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습니다.

 언덕길을 힘겨이 오르며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힘들게 자전거를 타야 할까 하고. 그러다가 어두운 밤거리에서 길바닥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데 미처 살피지 못했고, 미처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무언가에 걸려 확 고꾸라집니다.

 어깨가 긁히고 무릎이 깨집니다. 안경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전거는 크게 다칩니다.

 이 망가진 자전거를 겨우 손질해서 이듬날 인천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망가진 자전거를 낑낑거리며 시골집까지 끌고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놓고 돌아옵니다.

 바야흐로 날이 쌀쌀해지며 겨울이 코앞입니다. 임자 잃은 자전거가 안쓰럽게 홀로 우는 소리를 날마다 듣습니다. 도무지 이 자전거를 그대로 인천 골목동네 한켠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비를 맞지 않게 지붕 밑에 놓았으나 걱정스럽습니다. 더 추워지기 앞서 얼른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바보스러운 짓을 했기에 바보스러운 짓을 씻고자 아이 아빠는 몸이 더 고단합니다. 이러는 동안 시골 살림집에는 몸이 무거워 고단한 아이 엄마가 홀로 아이하고 부대껴야 합니다. 아이 아빠가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저지른 잘못 하나로 여러 사람이 고달픈 셈입니다. 아이 아빠가 먼저 깊이 생각하며 차근차근 알뜰살뜰 살아내야 비로소 아이 아빠부터 즐겁고, 아이 아빠랑 함께 살아가는 아이 엄마랑 아이 모두 즐겁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바보스러운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 스스로 얼마나 바보스러운가를 새삼스레 깨닫는달 수 있습니다. 넘어져 무릎이 깨져 보아야 아픔이란 얼마나 고단한가를 깨우치니까요. 뜨거운 물에 데어 보기도 하고, 칼질을 하다가 손가락을 베어 보기도 하며, 조그마한 텃밭을 쟁기로 갈며 이 조그마한 텃밭을 갈 때조차 힘이 얼마나 드는가를 느껴 보기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온몸으로 살아내야 내가 살아숨쉬는 한 사람임을 느껴요.

 좋아하는 노래를 조용히 읊습니다. 노래 한 가락 조용히 읊으며 되뇝니다. 나한테 가장 사랑스러울 책일 때에 내 아이한테도 가장 사랑스러울 책이 된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나부터 나 스스로 가장 사랑스럽다고 느낄 책이란 바로 내 삶이요, 내 삶을 담은 책을 내 아이하고 가장 사랑스레 즐길 수 있다고 느낍니다.

 이 나라에 청소년책이 있다면 아이 아빠나 아이 엄마로서 아이 아빠 삶이나 아이 엄마 삶을 담은 책이 있다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에 청소년책이 없다면 아이 엄마나 아이 아빠 되는 사람이 제 아이를 알뜰히 사랑하는 마음이 아직 없거나 얕다는 소리라고 느낍니다.


 (2) 청소년한테 책읽기란


 이제 곧 전철을 타고 길을 나서면 머잖아 인천에 닿을 테며, 인천에 닿으면 골목마실을 살짝 한 다음 자전거를 찾을 테지요. 전철길에는 가방에서 책 하나 꺼내어 읽습니다. 전철길은 털털탈탈 흔들한들 하는데 이 흔들거림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며 고개를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 하는 가운데 책을 읽습니다.

 전철길에 책 하나 다 끝내기도 하지만, 부러 몇 쪽을 남기기도 하며, 일부러 몇 쪽만 읽고 다른 책을 꺼내기도 합니다. 책읽기란 어느 책 하나를 첫 줄부터 끝 줄까지 빠짐없이 재빨리 읽어치우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줄을 즐기며 한 줄을 다시 즐길 수 있는 책읽기입니다. 한 줄로도 즐거운 책이요, 한 줄로 넉넉히 고마운 책이에요.

 전철길에서든 버스길에서든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듭니다. 흔들리는 탈거리에서 책에 푹 빠지다 보면 고개가 아프거든요. 목을 풀고자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립니다. 이럴 때에 으레 둘레를 한 번 휘 둘러봅니다. 아, 이 전철길이나 이 버스길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나 혼자뿐이구나. 어, 오늘은 모처럼 책을 읽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이네, 저이는 어떤 책에 저렇게 푹 빠졌으려나.

 흔들거리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며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한 사람입니다. 흔들거리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며 책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어릴 적부터 책을 가까이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 말할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다고 대단하거나 훌륭하지만은 않고, 책을 안 읽는다고 안 대단하다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또 대단하다 할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책읽기란 삶읽기이거든요. 책읽기를 삶읽기로 깨우치며 살아간다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아름다운 매무새로 거듭납니다. 책읽기를 삶읽기로 받아들이는 몸가짐일 때에는 비록 책을 손에 쥐지는 못하지만 살결 그을리며 일하는 기쁨을 압니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고, 머리가 아닌 몸에 새기는 일이며 놀이예요. 다른 사람이 적바림한 다른 사람 삶 담긴 책은 모르지만, 내가 적바림할 만한 내 삶 담을 책을 알아요.


.. 할아버지가 어릴 때에는 집 가까이 있는 개울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살았답니다. 그래서 물고기를 잡아 저녁 반찬으로 먹었다고 해요. 그때에는 물고기를 잡는 일이 아이들 몫이어서 많이 잡아 오는 날이면 식구들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개울이며 시내가 사람들이 함부로 버린 쓰레기로 시궁창이 되고 말았어요 … 요즘처럼 아무 때나 가게에 가면 바로 살 수 있는 채소는 제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  (29∼30쪽)


 이 땅 푸름이가 책을 가까이한다면 이 땅 푸름이를 키우는 어버이가 책을 가까이한다는 뜻입니다. 이 땅 푸름이가 책을 가까이하지 않으나 책삶과 땀삶과 눈물삶과 웃음삶을 고이 일군다면 이 땅 푸름이를 돌보는 어버이 스스로 알뜰한 살림꾼으로 힘차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청소년범죄란 따로 없습니다. 이리하여 청소년문화란 따로 없습니다. 마땅하게 청소년책이란 따로 없습니다. 그예 범죄이고 문화이며 책이에요.

 어른만 몰래 즐기는 놀이란 없고, 청소년만 몰래 노닥거리는 놀이란 없습니다. 어른만 살짝 맛보는 삶이란 없고, 청소년만 살짝 맛보는 삶 또한 없어요. 누구나 한 사람 고운 목숨으로 살아내는 하루요, 어디에서나 다 함께 어깨동무할 나날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터는 참 바쁘고 퍽 메마릅니다. 애써 ‘청소년한테 청소년책을 읽히려고 힘을 쏟는 모임이나 출판사’가 있어야 하고, 교사들은 아이들한테 아이들 눈높이에 걸맞는 책을 찾아 주려고 용을 써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따로 이러저러한 책을 읽도록 해 주어도 나쁘지 않지만, 아이들과 더 오래오래 어울리면서 삶을 누리지 못하니까, 그나마 책이라도 쥐어 주려 합니다.

 어린이책이라 할 수 있고 청소년책이라 할 수 있으며 어른책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 《달걀 한 개》라는 이야기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훌륭하다 여길 수 있고 썰렁하다 볼 수 있으며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찌 되든 이야기책 하나인 《달걀 한 개》인데, 이 책에는 ‘몸 여린 시골 교사 한 사람이 아이들하고 살아 있는 공부’를 했던 이야기 한 자락 실립니다. 이 시골 교사가 얼른 몸이 나으라며 시골 어머님들은 아이 손에 달걀을 하나둘 쥐어 주며 선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시골 교사는 시골 어머님들한테서 달걀을 잔뜩 받습니다. 왜냐하면 한 집에서 한두 알씩 주었지만, 열 집이면 열이나 스무 알이요, 스무 집이면 서른이나 마흔 알이 되거든요.

 시골 교사는 달걀을 홀로 먹지 않습니다. 홀로 먹을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습니다. 어찌 할까 헤아리다가 이 달걀로 ‘산 배움’을 나누기로 마음먹고, 아이들을 불러 아이들 스스로 달걀을 삶아 먹도록 이끕니다.

 이 달걀 삶기는 교과서에 안 나옵니다. 요리책에 딱히 안 실립니다. 왜냐하면 시골 아이들이랑 시골 교사가 즐긴 ‘달걀 삶기’는 아이들이 산에서 삭정이를 주워 와 손수 불을 지핀 다음 가마솥에 불을 붓고 달걀을 넣어 삶는 일이거든요. 이렇게 달걀을 삶으라고 이야기하는 요리책이란 없어요. 그렇지만 시골 교사는 이렇게 달걀 삶기를 함께 즐겨요. 그러니까, ‘시골 교사 달걀 삶기’란 바로 ‘책 하나’인 셈이요, 아이들 모두하고 ‘책읽기’를 즐긴 셈입니다.


 (3)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를 읽으려면


 청소년책이라 해도 되고 어린이책이나 어른책이라 해도 되는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나라 오늘날 도시 교사 가운데, 또 시골 교사 가운데 《달걀 한 개》에 나오듯 아이들하고 어울리면서 달걀 삶기를 할 만한 분이 한 사람쯤 있을까 궁금하거든요.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 같은 이야기책을 아이들한테 들려주어도 좋으나, 어른과 아이가 함께, 교사와 학생이 함께, 어버이와 아이가 함께, 달걀 삶기를 하듯이 삶읽기를 즐기면 더욱 좋거든요.


.. 지금 대인지뢰를 없애기 위해 국제연합과 전 세계 여러 나라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1997년 12월에는 세계 여러 나라 대표들이 캐나다 오타와에 모여, 대인지뢰를 모두 없애고 더는 만들지 말자는 뜻으로 ‘대인지뢰 금지 협약’을 채택해 서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뢰를 만들고 있는 미국, 러시아, 중국 같은 나라가 이 협약에 서명하지 않고 있답니다 ..  (57쪽)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에 담은 이야기는 남다르지 않습니다. 대단한 지식을 다루지 않습니다. 놀랍거나 새롭거나 어마어마하거나 훌륭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저 누구나 어디에서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전쟁이란 늘 우리 곁에 있고, 평화 또한 노상 우리 둘레에 있어요. 우리 스스로 못 느낄 뿐인 전쟁이고 평화예요. 그래서 《평화는 어디에서 올까》를 읽으며 전쟁과 평화를 가르칠 수 있으나, 이 책을 함께 읽는달지라도 전쟁이든 평화이든 가르칠 수 없기도 합니다.

 제아무리 빼어나거나 좋은 책이더라도 추천목록이나 권장목록에서 박제처럼 굳을 수 있습니다. 그냥 아이 스스로 깨달으라 하면서 던져 줄 수 없는 책입니다. 아이한테 책을 읽히자면 아이 삶으로 스며들도록 해 주어야 하고, 아이 삶으로 책 하나 스며들자면, 아이한테 책을 건네는 어버이나 교사가 먼저 당신 몸으로 책을 녹여 놓아야 합니다.

 아이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볼에 뽀뽀 한 번 하고 영차 하고 안아올려 까르르 웃음짓게 하는 여느 삶에 평화가 듬뿍 배어 있습니다. (4343.11.1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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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 - 생활 팬터지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22
윌리엄 스타이그 지음, 서애경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사랑과 꿈을 가슴에 품고 있나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67] 윌리엄 스타이그, 《도미니크》



- 책이름 : 도미니크
- 글·그림 : 윌리엄 스타이그
- 옮긴이 : 서애경
- 펴낸곳 : 아이세움 (2003.1.30.)
- 책값 : 7500원


 (1) 이웃을 사랑하는 삶


 온누리에는 책이 참으로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운 책이 제법 있으나,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아름다운 책이 참 많습니다. 짓궂은 책만큼 훌륭한 책이 많고, 못난 책만큼 거룩한 책이 많으며, 볼썽사나운 책만큼 아름다운 책이 많습니다.

 잘 팔리는 책이면서 훌륭한 책이 있습니다. 잘 팔리지만 짓궂은 책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책이면서 거룩한 책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졌으나 못난 책이 있습니다. 두루 손꼽히는 책이면서 아름다운 책이 있습니다. 두루 손꼽히기는 하나 볼썽사나운 책이 있어요.

 책을 마주하는 매무새는 삶을 마주하는 매무새하고 닮습니다. 나로서는 참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아름답다고 여기는 삶을 붙잡으며 씩씩하게 걸어간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정작 내가 걷는 이 길이란 더없이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울 수 있습니다. 나 홀로 못 느낄 수 있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더할 나위 없이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운 책을 즐겨읽으면서 이 책이 얼마나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운지를 못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책을 찾아 읽지 못해요. 내가 살아가는 만큼 책을 찾아 읽어요.


..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낯선 세상에 나가면 자기 앞에 무슨 일이 닥칠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관없었다 … “나도 내 운수에 관심이 많습니다만,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때그때 맞혀 보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 도미니크에게 도전은 기쁨이었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일은 무엇이든 한 생명의 재주와 능력에 대한 이런저런 시험이었다 ..  (11, 13, 26∼27쪽)


 내가 아는 대로 책을 읽지 못하는 얼거리 그대로, 내가 아는 대로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대로 이웃을 사랑해 준다지만, 내 이웃은 내가 보내는 사랑이 싫거나 못마땅하거나 껄끄럽거나 괴롭거나 힘들 수 있습니다. 나로서는 사랑을 보낸다며 보내지만, 내 사랑을 받는 쪽에서는 못 견뎌 할 수 있어요,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나 속으로는 앓거나 아파할 수 있답니다.

 참말로 사랑이라 한다면 ‘보내는 사랑’이기 앞서 ‘받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보내는 내가 ‘나로선 할 만큼 하는’데 ‘저이는 왜 이렇게 못 받아들이느냐’고 투덜댄다면, 이는 사랑일 수 없습니다. 받는 사람이 ‘저이가 사랑을 보냈나?’ 하고 느끼지 못할 만큼 찬찬히 스며들 때라야 비로소 사랑입니다. ‘내가 이만큼 해 주었다’고 하면서 우쭐거리는데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이런 마음씀이란 권위이거나 권력이라는 이름이 붙는 못난 짓입니다. 흔히 이웃사랑이라는 이름을 내걸며 ‘불우이웃돕기’ 같은 일을 벌이는데, 이웃을 돕겠다면 그냥 ‘이웃돕기’를 해야지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일은 말이 안 됩니다. ‘불우’란 무엇이며, 누가 ‘불우’한 삶인가요(더 살핀다면 이웃‘돕기’라는 이름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돕는다니 뭘 도와? 돈푼 좀 보탠다고 돕는 셈인가?). 나한테 돈이 조금 더 있다고 나보다 돈이 더 적은 이를 섣불리 ‘불우’하다고 깔볼 수 없습니다. 내가 돈 좀 보태 줄 수 있다면서 나한테서 돈을 얻는 이를 얕볼 수 없어요.

 사랑이라 한다면, ‘사랑을 받아 주는 쪽’이 훨씬 거룩하며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받아 주는 가슴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사랑을 베푼다는 쪽’은 으레 못 느끼거나 못 알아채거나 못 깨닫곤 합니다.


.. 두 시간 전만 해도 바솔러뮤 배저 노인은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저 세상으로 가고 없었다 … 많은 이들이 지금 도미니크가 하듯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질문을 하겠지. 새로운 목숨들의 세상이 오면 도미니크의 세상은 끝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시간을 과거로 생각하겠지. 그때가 되면 미래는 현재가 될 테고 … 슬픔이 밀려들자 그 아름다움도 빛을 잃었다. 슬픔이 물러가면 아름다운 세상이 다시 얼굴을 드러내겠지 ..  (50, 51, 52쪽)


 천주교나 기독교 같은 서양 종교를 믿는 한국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서양 종교를 밝히는 성경책에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아끼라 이야기하는 한편, 이런 이야기를 노래로 지어 자주 부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길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내 이웃한테 사랑을 베푼다 할 때에 내 이웃이 ‘불우’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내 배가 고프면 금세 알지요? 하루에 한 끼니만 걸러도 배가 고프며 기운이 딸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 이웃이 하루 내내 배를 곯는다든지 살림돈이 모자라 몇 달째 허덕인다든지 대물림을 하듯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다면 어찌해야 하나요? 나중에 내 이웃이 파산신고까지 하고 나서야, 달삯방조차 얻지 못해 길바닥에서 구르고 있을 때라야, 라면 몇 상자와 쌀 몇 봉지와 연탄 몇 장 가져다주면 사랑이 되겠습니까.

 지난날, 굳이 이웃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으며 이웃으로 지내던 이들은 ‘쌀이 없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가마솥에 불을 끓이며 굴뚝에 연기를 내보내는지, 참말 밥을 하며 굴뚝에 연기를 내보내는지’ 알아챘습니다. 왜냐하면 밥을 하면 밥냄새가 나잖아요. 숟가락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날 테고요. 오늘날처럼 자동차가 드글드글대지 않던 지난날에는, 흙으로 벽을 바른 자그마한 이웃집에서 내는 조그마한 소리조차 다 들리곤 했습니다. 구태여 숟가락 숫자가 몇인지 세지 않아도 뻔히 아는 살림입니다.

 요즈음은 이웃을 돕고자 돈을 내어놓기보다, 내 살림을 지키고자 감시카메라 마련하여 달아 놓는 데에 돈을 씁니다. 이웃하고 오순도순 나누고자 돈을 덜기보다, 내 자동차를 더 크고 빠른 녀석으로 바꾸는 데에 돈을 씁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어른한테만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른들이 이와 같이 살아간다면, 푸름이와 어린이도 이와 같이 살아간다고 느낍니다. 어른들 이야기를 하나하나 따질 때에 우리 푸름이와 어린이 앞날을 하나하나 톺아보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우리 푸름이와 어린이 들이 학교에서 시험을 치를 때에 옆 짝꿍 시험지를 훔쳐보거나 어딘가에 쪽글을 적바림해 놓고 몰래 베낀다 한다면, 어른들이 이런 짓을 하니까 푸름이와 어린이가 따라하지, 푸름이와 어린이 스스로 새로 만들어서 못된 짓을 일삼지 않아요. 푸르거나 어린 넋이 새로 만드는 못난 짓이란 없습니다. 구지레한 짓을 일삼는 어른이 푸르거나 어린 넋을 못난 사람으로 물들입니다.

 내가 착하게 살고 싶으면 내 이웃도 착하게 살도록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스레 살고 싶다면 내 이웃 또한 사랑스레 살도록 어깨동무를 해야 합니다. 내가 즐겁게 살고 싶을 때에는 내 이웃이 언제나 즐겁게 살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 착한 이들하고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 세상 누군가가 악당과 싸우고 있는 한, 착한 이들과 함께 있다고 마냥 행복해 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  (182쪽)


 (2) 살붙이 사랑하는 삶


 어제 낮,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가는 딸아이가 똥을 누고 나서 밑을 씻기고 머리를 감기며 몸을 씻어 줄 때에 좀 미지근한 물로 씻겼습니다. 미리 보일러를 돌려 물을 덥혔어야 했는데 보일러를 늦게 돌리는 바람에 따뜻한 물을 쓰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몸을 말끔히 씻은 다음 덜덜 떱니다. 여느 때에는 양말을 벗는다느니 바지를 한 벌만 입겠다느니 웃옷을 얇게 입겠다느니 그러더니, 어제는 어머니 품에 꼭 안기며 이불을 뒤집어쓴 채 꼼짝을 안 합니다. 저녁이 되니 몸이 후끈거립니다. 여느 때에는 말괄량이인 아이가 아주 얌전합니다. 고단한 아버지가 자리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워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를 눕히고 그림책을 읽습니다. 아이는 이불을 폭 쓴 채 그림책을 너덧 권 함께 봅니다. 그런데 아이 눈에 눈물이 송글송글 맺히더니 또르르 구릅니다. 이런, 아이가 참으로 몹시 아프구나.


.. 도미니크는 생각했다. 만약 만물을 창조하는 일이 자기에게 주어졌다 해도, 만물을 하나도 똑같지 않게 만들었을 것 같았다. 나뭇잎마다 꼭 알맞은 자리에 있었다. 자갈, 돌멩이, 꽃, 이 모든 것들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물은 흘러야 할 곳으로 흘렀다. 하늘은 꼭 알맞게 푸르렀다. 모든 소리는 조화로웠다. 모든 것들이 알맞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었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  (33쪽)


 아이를 일찍 재우려 하지만, 아이는 일찍 잠들려 하지 않습니다. 일찍 안 자려 하는 모습은 아플 때에도 마찬가지로군요. 하는 수 없이(?) 아이 아버지는 일찌감치 쓰러집니다. 이내 아이도 잠자리에 듭니다. 아주 고맙게. 아이는 자는 내내 아버지 곁에서 “쫀!” 하면서 아버지보고 손을 달라 하며 붙잡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잠들고 나서 잘 깨어나지 못하거든요. 아니, 깨어나지 못한다기보다 몸이 무거워 머리는 깨었어도 몸을 못 움직입니다. 이리하여, 지난주부터 어젯밤까지 밤새 아이하고 아이 아버지는 잠을 못 잡니다. 잠들라 치면 아이가 “아부지, 쫀!” 하면서 손을 달라 합니다. 조금 잠이 들어 쉴라치면 어느새 기저귀에 오줌을 누고는 “젖었어!” 하고 외칩니다. 새벽 네 시 사십오 분까지 어영부영 버티다가는 조용히 큰방으로 건너와 셈틀을 켜고 글쓰기를 하자니, 또 다섯 시 반까지 이렇게 복닥복닥합니다. 그나마 후끈 달아오르던 아이 몸이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며 늘 내 어머니하고 내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내 어머니하고 내 아버지는 내가 우리 아이만 한 나이였을 적에 나를 어떻게 돌보았을는지 궁금합니다. 내 몸은 그리 튼튼하지 않아요. 어릴 적에 늘 갤갤거렸습니다. 우리 아이는 꽤 씩씩하고 튼튼해서 어버이한테 걱정을 끼치는 일이 드뭅니다. 어쩌다 한 번 이렇게 몸앓이를 해요. 그렇지만 아이 아버지인 저는 어릴 적에 자주 몸앓이를 했는데, 이때마다 내 어머니하고 아버지는 어떤 마음 어떤 느낌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저처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단해야 했을 텐데 어떻게 받아들여 주었을까요.

 아이를 낳아 기른다고 모두 어른이 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지만 아이하고 보내는 겨를이 몹시 짧거나 거의 없는 어버이가 이 나라에 얼마나 많습니까. 나이 서른 마흔 쉰이 된다고 어른이지 않습니다. 아이를 하나 둘 셋 넷 낳아 기른다고 어른이지 않아요. 삶과 넋과 말이 오롯이 어른이어야 해요. 삶과 넋과 말을 오롯이 아이하고 부대끼면서 살아내야 어른으로 자리잡아요.


.. 도미니크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도미니크는 어떤 종류의 악한 짓도 증오했다 ..  (57쪽)


 집일을 남자가 하는 집은 썩 많지 않습니다. 예전보다는 늘었다 하겠으나 집일은 으레 여자가 합니다. 또는 밥어미를 두겠지요. 아니면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 하면서 집일을 할머니한테 맡기든지요.

 아무리 몸이 힘들다 할지라도 그날그날 저녁을 먹은 다음 설거지를 하면서 이듬날 아침에 새로 밥을 할 쌀이나 곡식(콩이나 옥수수나 다른 곡식)을 씻어서 불려야 합니다. 누런쌀이라면 저녁에 불려놓고 이듬날 아침에 하고, 흰쌀이라면 새벽에 씻어서 불린 뒤 아침에 밥을 지으면 됩니다.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며 품을 많이 들입니다. 그나마 저는 살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닌 터라, 밑반찬은 거의 안 하고 찌개 하나를 끓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하는 데에도 얼마나 많은 품과 땀과 틈을 들여야 하는지요. 밑반찬을 꼬박꼬박 새로 만들거나 도시락을 싸는 이 나라 수많은 어머님들은 집살림에 아주 온삶을 바치는 셈입니다. 이 나라 남자들은 이 나라 여자들 땀과 품과 틈으로 먹고산달 수 있어요. 이른바 ‘가사노동’은 돈이 나오지 않는다 하고, 돈으로 따지지 않으며, 아예 노동으로 안 치기까지 합니다. 죽은 전태일 열사는 생각하지만 산 이소선 어머님은 생각하지 못해요. 그나마 이소선 할머님이 오래오래 살아가니까 이소선 ‘어머님’을 기리거나 모시는 이들이 있지, 당신이 일찍 숨을 거두었으면 ‘(남자) 노동자’만 돌아볼 뿐, ‘(여자) 살림꾼’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소선 할머님을 떠올릴 때에도 으레 ‘전태일 어머니’라고만 여기지, ‘집살림을 하는 여자’로는 살피지 못합니다.


.. 혈맹파 패거리가 세상을 파괴하는 온갖 짓을 일삼는 동안, 말 못 하는 나무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둘러서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꾹 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슬픔과 모욕감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무들이 사랑하는 개 도미니크는 나무들 가운데서, 숲의 심장 한가운데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무들은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뜻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가지를 꺾고 분질렀다. 도미니크는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모든 상황을 알아차렸다. 악당들은 무기를 높이 쳐든 자세를 하고 있었지만 두려움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나무들이 악당들을 향해서 몸을 굽히고 말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  (187쪽)


 날마다 밥을 새로 하고 설거지를 잔뜩 하며 이불을 털고 방바닥을 쓸고닦는데다가 빨래를 해서 털고 널고 걷고 개면서 생각합니다. 아이를 안고 어르며 놀면서 생각합니다. 새벽에 졸립고 지친 몸을 일으켜 글을 쓰면서 생각합니다. 빛나는 옛 어르신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목구멍에 가시가 돋힌다 말씀하셨는데, 저로서는 하루라도 밥을 하지 않거나 걸레질을 하지 않거나 손빨래를 하지 않거나 아이하고 복닥이지 않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구나 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손빨래가 퍽 고단하다고 느끼지만 빨래를 기계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아직 힘이 있어 할 만한지 모르지만, 서두르지 않으며 차근차근 나누어 하면 손빨래를 얼마든지 할 만합니다. 밥하기이든 쓸고닦기이든 이불털기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아이하고 놀 때에도 신나게 놀다가 드러누워서 “얘야, 좀 쉬면서 놀자.”고 말할 수 있으며, 아이 스스로 다른 놀이를 하도록 놀잇감이나 책을 내어 주고서는 한동안 등허리 펴자며 드러누울 수 있습니다. 아이가 이것저것 잔뜩 늘어놓거나 어지른다면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아이가 스스로 치울 수 있게끔 잘 타이르며 가르치면 됩니다. 어쩌면, 아이가 이것저것 늘어놓기 때문에 차곡차곡 갈무리하도록 가르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을 뿐더러, 이름값이나 권력으로 지키거나 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3) 나를 사랑하는 삶


 이야기책 《도미니크》를 읽습니다. 이야기책 《도미니크》를 이끄는 주인공은 멍멍이인 ‘도미니크’입니다. 도미니크는 새로운 삶을 찾아 고향마을을 떠나기로 하며 이야기 첫머리를 엽니다. 도미니크는 길디긴 모험을 해 보고자 합니다. 낯선 땅으로 찾아가 낯선 사람을 만나며 낯선 삶을 부대끼는 가운데 낯선 일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멍멍이 도미니크는 한창 젊은 나이이거든요. 이대로 고향마을에서 눌러 지내도 좋을는지, 다른 무슨 일을 찾아야 좋을는지, 이제껏 모르던 꿈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먼 나들이를 떠납니다.


.. “내 나이는 올해로 백 살이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전부 다 하려면 백 년이 걸릴 걸세.” ..  (40쪽)


 도미니크가 만난 돼지 할아버지는 백 살이랍니다. 백 살치 이야기는 백 해에 걸쳐 해도 다 못할 수 있어요. 그러면 도미니크는? 글쎄요. 아마 며칠쯤 하다 보면 금세 동이 날는지 모릅니다. 도미니크가 살아온 햇수가 스무 해라 할지라도 스무 해치 이야기를 ‘어떻게 어느 만큼 어찌어찌’ 풀어내면 즐거울는지를 도미니크 스스로 아직 모르거든요.


.. “세상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려서 살아 있는 것들에 경의를 표하지요.” … “나는 아주 위대한 예술가인 코끼리의 작품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코끼리는 섬세한 그림을 그리지 못해요. 그럴 능력도 인내심도 없지요.” … “온 세상이 눈에 뒤덮여 있을 때면 나뭇잎을 볼 수 있소? 쓸쓸한 한겨울에 봄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면, 내 그림에서 수선을 보고 봄이 눈앞에 있으니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오. 여름 무더위에 고생하고 있다면, 맨프레드 라이언이 그린 차가운 겨울 풍경을 보고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거요. 내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곁에 없는 친구나 사랑하는 이랑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거요.” ..  (113, 114, 115쪽)


 도미니크는 짓궂은 사람을 만날 때이든 반가운 사람을 만날 때이든 ‘내가 만난 사람이 나한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들을 만한 이야기이든 들을 만하지 않은 이야기이든 어찌 되든 귀담아듣고 봅니다. 그런 다음 받아들일 만하다 싶으면 받아들이고, 아니다 싶으면 손사래를 칩니다.

 왜냐하면, 바로 도미니크는 도미니크로 지내는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다만, 도미니크는 내 삶을 사랑하기는 사랑하는데, 무엇을 사랑하는지 모르고, 어떻게 사랑해야 할는지 모르며, 어느 만큼 사랑하는지조차 모릅니다. 모름투성이입니다. 알쏭달쏭투성이요, 아리송투성이예요.

 앞으로 도미니크 삶이 어떻게 이어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모험을 하러 떠났다가 하루 만에 숨을 거둘 수 있고, 두어 해쯤 살다가 저승사람이 될는지 모릅니다. 부자가 될 수 있으며, 가난뱅이가 될 수 있겠지요. 어찌 되든 좋습니다. 도미니크는 ‘도미니크다운 도미니크 삶’을 누리고 싶을 뿐입니다. 도미니크로서 도미니크 삶을 꾸릴 수 있다면 부자라고 더 기쁘지 않으며 가난하다고 더 슬프지 않아요. 스스로 알차게 여미는 삶을 붙잡을 수 있고, 스스로 힘차게 일구는 삶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도미니크》를 쓴 윌리엄 스타이그 님은 멍멍이 도미니크를 빌어 이야기 한 자락 풀어놓습니다. 내 삶에 걸맞게 내 길을 걸어가자고. 내 삶을 사랑하면서 내 이웃 삶을 사랑하자고. 내 삶을 즐기면서 내 살붙이와 어우러지는 하루하루를 고맙게 받아들이자고. 도미니크는 모험가이기 앞서 젊은이이고, 이 책에서는 영웅이기 앞서 수수한 한 사람입니다. 밥 한 그릇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나무 한 그루를 사랑스레 보듬을 줄 아는 따스한 목숨붙이입니다. (4343.1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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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 한 개 보리피리 이야기 1
박선미 글, 조혜란 그림 / 보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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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가 가장 즐겁습니다
 [책읽기 삶읽기 21] 박선미+조혜란, 《달걀 한 개》


 어린이한테 이 나라 어른들 지난 삶자락을 들려주는 이야기책 《달걀 한 개》를 읽다. 《달걀 한 개》라는 이야기책은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작은 마을 백산에서 1970년대에 어린 나날을 보내던 한 사람이 달걀이란 먹을거리를 놓고 겪거나 부대낀 삶을 담는다. 어떤 이한테 1970년대는 까마득한 옛날일는지 모르지만, 나이 서른을 넘은 사람한테는 그다지 먼 옛날이 아니고, 나이 마흔을 넘은 사람한테는 어렵잖이 떠올릴 어린 나날일 테고, 나이 쉰이나 예순을 넘은 사람한테는 어린 동생이나 아이를 돌보며 보내는 나날일 테지. 흔히 옛날이야기라 하면 범이 담배 피워 물던 이야기라든지 고려나 조선 때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일쑤이다. 그렇지만 바로 하루가 지난 어제 이야기만 하여도 옛날이야기가 될 수 있다. 지난해에 겪은 이야기 또한 옛날이야기라 할 만하다. 멀디멀어 아주 까마득해야만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옛날이야기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옹기종기 모여 오순도순 살아온 이야기이다.

 살아온 이야기는 기쁠 수 있고 슬플 수 있다. 웃음이 넘치던 지난 삶일 수 있고 눈물이 가득한 지난 삶일 수 있다. 기뻐 웃음이 넘치던 삶이라 하여 아름다운 삶이라고 여길 수 없고, 슬퍼 울음이 가득한 삶이라 하여 못마땅하거나 어설픈 삶이라고 여길 수 없다. 기쁘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 배만 부른 볼꼴사나운 이야기일 수 있고, 슬프다 하지만 뭇사람들 가슴을 저미는 촉촉한 이야기일 수 있다.


.. 병아리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여름쯤이면 마당이 그득해. 다른 집은 닭을 장에 내다 팔아서 돈벌이가 된다는데, 아야네는 그걸 한 마리 팔 새가 없어. 배 타는 삼촌 오면 고아 줘, 공부하러 간 오빠 오면 한 마리 잡아야지, 고모가 친정 오면 한 마리 해 먹이고, 또 돌아갈 때 보따리에 한 마리 묶어 보내야지, 큰 손 왔다고 상에 올려, 실한 놈은 키워서 씨암탉 해야지 ..  (24∼25쪽)


 내가 떠올릴 수 있는 1970년대는 조각조각 잘린 몇 토막 이야기이다. 다닥다닥 촘촘히 붙은 집들로 이루어진 인천 골목동네에서 놀던 일, 심부름하러 구멍가게에 달려 내려갔다가 달려 올라온 일, 겨울날 몹시 추웠다고 떠오르는 달삯집에서 네 식구가 쪼르르 모여 이불 돌돌 말아 자던 일, 어린 형하고 더 어린 내가 시멘트 담이 퍽 높구나 싶은 골목 한켠에 서 있던 일, 5층짜리 아파트 동네로 짐차를 타고 살림집 옮기던 일 ……. 고모 댁에 찾아갔을 때에 방에 다락이 있어 나무계단을 타고 다락에 올라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뒹굴던 일이 살짝살짝 떠오른다.

 《달걀 한 개》를 읽으면 “아야는 흰자만 까 먹고 노른자는 사탕 녹여 먹듯이 입에 넣고 굴리면서 아껴 아껴 먹었어(44쪽).” 하는 대목이 있다.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던 나도 달걀을 마음껏 먹었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해가 갈수록 차츰차츰 좀더 자주 먹을 수 있었다고 느끼나 해를 거스를수록 드물었다고 느끼며, 충청도 시골집으로 방학 때마다 찾아올 적에는 닭장에서 한 알 고맙게 꺼내어 먹는 달걀이란 더없이 드물며 소담스러운 밥거리였다고 느낀다. 입이 짧은 나한테 외할머니가 날달걀 하나를 톡 깨서 밥에 풀어 주던 일은 오래도록 떠오른다. 이제 와 헤아리면 내 몸에는 삭인 밥거리들, 이를테면 동치미나 김치국물이나 찬국수물이 받지 않는다. 이제는 매운김치를 건드리지도 못하지만 맵지 않은 김치라 하더라도 삭인 밥거리인 만큼 잘 안 맞는다. 사람들은 으레 한국사람이 김치를 못 먹는다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김치처럼 삭인 밥거리가 몸에 안 맞는 사람이 없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물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기도 하는데, 삭인 밥거리 못 먹는 사람이야 마땅히 있을밖에. 아주 어릴 때하고 푸름이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는 나한테 찬국수를 사 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느끼는데, 아마 내가 떠올리지 못해서 그렇지, 아버지가 바깥밥 먹자며 식구들이 신포시장이나 동인천으로 마실을 나와 함께 찬국수를 먹다가 내가 크게 탈이 나는 바람에 나한테는 더는 안 사 주었을는지 모른다. 나한테는 따로 만두를 사 주거나(찬국수집에서는 으레 만두를 함께 파니까) 다른 뜨거운 국물을 사 준다. 오랜 동무가 내 몸을 잘 모르는 가운데 찬국수 잘하는 집이 있어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해서 억지로 한 그릇 먹은 다음 한 주 내내 배앓이를 하며 괴로운 적이 있다.

 《달걀 한 개》를 쓴 박선미 님은 달걀 노른자를 살살 녹여서 먹었다고 했다. 나도 어릴 때에 달걀 노른자를 살살 녹여서 먹었다. 박선미 님처럼 흰자를 먹을 때에는 아주 조금씩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어머니는 옆에서 이 꼴을 지켜보며 꾸짖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이 맛있는 먹을거리를 금세 먹어치울 수 없는 노릇.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가는 어린 딸아이랑 도시로 마실을 나가면 전철간에서 으레 어르신들이 아이한테 사탕을 먹으라 건네주는데, 아이는 사탕을 받으면 늘 오래오래 낼름낼름 돌리며 녹여 먹는다. 길에서 얼음과자를 하나 사 줄 때에도 베어 먹는 법이란 없다. 얼음이 녹아 줄줄 흐르는 데에도 혀로 날름날름 핥아 먹는다. 그만큼 맛나고 좋다는 뜻일 테지.


.. 여자 아이들이 물을 이고 와서 솥에다 붓고, 달걀을 조심 조심 조심 …… 한참을 넣었어. 소금도 몇 줌 넣었나? 불을 때는 아이들은 코끝이 시커매진 것도 모르고 열심이야. 학교 밭에서 일할 때는 요리조리 빠져서 선생님한테 야단을 듣던 남자 아이들도 부지런히 삭정이를 주워 오고. 달려오다 넘어져 무르팍이 까지고 ..  (40쪽)


 이야기책 《달걀 한 개》에 나오는 시골학교 선생님은 몸이 퍽 여렸나 보다. 크게 병치레를 하고 일어나니까 마을사람마다 선생님 어여 몸 추스르라며 달걀을 보내 왔다는데, 선생님은 “아이구, 이 귀한 거를, 너거나 하나 더 먹이지. 엄마한테 잘 묵고 어서 낫겠다고 말씀디리라(39쪽).” 하고 얘기하더니, 얼마 뒤 아이들을 모두 모아 놓고는 “자아, 인자부터 달걀 삶아 먹는 공부를 할 끼다(39쪽).” 하면서 마을 어른들이 내어 준 달걀을 알뜰히 그러모아 한꺼번에 삶아서 아이들한테 골고루 나누어 준다. 이때 아이들 모습이 참 재미나다. 여느 때에는 개구쟁이에 말썽쟁이였다지만, 선생님이 ‘달걀 삶아 먹는 공부’를 하자니까 스스로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면서 삭정이를 주워 오고 물을 길어 오고 불을 때며 함께 달걀 삶기를 했다지.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공부를 이렇게 아이들 스스로 신나게 할 수 있게끔 교육 얼거리를 짠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다. 대학바라기가 맨 첫째로 눈길을 둘 일이라 할지라도, 아이들과 살아숨쉬는 공부를 하면서 숨돌리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학교에서 함께 맛난 밥을 지어 먹기도 하고, 나무그늘에서 쉬기도 하며, 나무열매를 따먹는 날을 맞이하기도 하는 가운데, 흙과 바람과 해와 물과 풀을 가슴으로 살포시 껴안도록 이끌어야 비로소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서로서로 살가이 어깨동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그나저나, 이 책에 붙은 이름은 왜 “달걀 한 개”일까. 달걀을 셀 때에는 ‘한 알’ ‘두 알’ 하고 세야 옳지 않나. 올바로 말하자면 “달걀 한 알”이다. 그나마 “계란 한 개”라 하지 않으니 낫다 할 만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들한테 우리 어른들 살갑던 삶자락을 곰곰이 되씹도록 이끌어 주고자 하는 책이라 한다면, “달걀 한 알”이라고 책이름을 고치고, 책에 깃든 서너 대목에서도 “한 개”를 “한 알”로 고쳐야 마땅하다. 또는 “달걀 하나”라 해 볼 수 있겠지. ‘알’로 세기도 하지만 그냥 ‘하나 둘 서이 너이’ 하기도 하니까. 아니면, 책이름을 “달걀 이야기”라 해 보아도 된다. 말 그대로 달걀하고 얽힌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한 알’만 갖고 풀어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달걀을 둘러싼 이야기를 그리는 만큼 “달걀 이야기”라고 책이름을 고쳐도 잘 어울린다.

 왜 책이름을 따지느냐 하면, 《달걀 한 개》란 뭐 대단한 이야기책이 아닐 뿐더러, 아주 거룩한 이야기책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달걀 한 개》는 여느 사람들 여느 자리 수수한 이야기책이다. 이리하여 이 책에 깃든 말마디라든지 이 책에 붙이는 이름은 가장 수수한 자리를 찾아들어야 한다. 학교 문턱을 오래 밟았든 한 번도 밟지 못했든, 시골 농사꾼이든 도시 회사원이든, 똑똑한 어린이이든 시험 성적이 잘 안 나오는 어린이이든, 누구나 손쉽고 즐거우며 살가이 마주하여 읽도록 글월 눈높이를 맞출 뿐 아니라, 가장 바르면서 곱고 착한 말씨로 가다듬을 수 있어야 한다. ‘임금님 달걀’이나 ‘대통령 달걀’도 아닌 ‘시골사람 달걀’ 이야기 아닌가. 조금 더 말결을 보듬으며 가다듬는다면 좋겠다.

 책끝에 ‘추천글’을 쓴 윤구병 님이 “그 입담에 스며 있는 건강한 교육관, 인생관도 퍽 대견합니다”라고 적는데, 어른들이야 윤구병 님이 박선미 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줄 알며, 이렇게 말할 수 있겠거니 생각할 테지만, 이 책을 읽는 어린이한테는 둘 다 똑같은 ‘어른’이다. 한 어른이 다른 어른한테 ‘대견하다’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자리에서는 ‘훌륭합니다’라든지 ‘알뜰합니다’라든지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해야 알맞다. 어른책에서도 말 한 마디 어설피 하면 안 되지만, 어린이책이라면 말 한 마디 더더욱 곱씹고 살피면서 해야 한다. 이밖에 박선미 님 말투에서 바로잡을 대목을 한두 가지 들어 본다면, 6쪽과 14쪽과 29쪽에 ‘것’을 너무 자주 쓴다. “소리질러 대는 게 자주 들리거든(6쪽)”은 “질러대는 소리가 자주 들리거든”으로 바로잡고, “알에서 모두 잘 깨어 나온 거거든(14쪽)”은 “알에서 모두 잘 깨어 나왔거든”으로 바로잡으며, “침 삼키는 것도 조심하면서(29쪽)”는 “침 삼키기도 잘 살피면서”로 바로잡으면 좋겠다. ‘조심’ 같은 한자말이야 익히 쓰기는 하는데, 예전 어르신들은 이 말을 안 썼다. 늘 ‘살피다’라는 말을 썼다. 사람들이 어른들을 떠나 보낼 때에 요사이는 “조심해서 들어가셔요.” 하는 말을 곧잘 하는데, 예전 어르신들은 노상 “살펴 들어가셔요.”나 “살펴 가셔요.” 하고 말했다. 《달걀 한 개》같이 옛날이야기를 구수히 들려주려는 책이라 할 때에는 ‘살피다’ 같은 낱말을 잘 갈무리해 주면 좋겠다. 10쪽에서 “너무 급한 나머지”는 “너무 바쁜 나머지”로 다듬고, 25쪽에서 “실한 놈”은 “통통한 놈”이나 “살찐 놈”으로 다듬으며, 30쪽에서 “머리가 아주 복잡해”는 “머리가 아주 어지러워”나 “머리가 너무 어수선해”로 다듬어 본다. 마지막으로, 54쪽을 보면 글쓴이가 따로 적바림한 글이 있는데, 이 글에서 “어린 아야만 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선생님이 되었어.”라고 했다. 이 대목은 아주 틀렸다. 내가 나 스스로를 일컬어 ‘선생님’이라 말할 수 없다. 내가 나 스스로를 일컬을 때에는 ‘교사’라 해야 알맞다. “어린 아야만 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교사가 되었어”라든지 “어린 아야만 한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있어”라든지 “어린 아야만 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처럼 고쳐야겠다.

 알뜰하고 알찬 이야기책 《달걀 한 개》인 만큼 곁다리라 할 만한 글투와 글쓰기를 이렁저렁 짚어 본다. 이런저런 글투와 글쓰기를 더 가다듬거나 추스를 수 있을 때에 이 이야기책은 훨씬 빛이 나면서 고운 물이 들리라 생각한다. ‘입말로 생생하고 재미나게 풀어써’서 어린이문학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과 즐겁게 나눌 좋으며 곱고 착한 말’을 ‘살아숨쉬는 기운을 살며시 불어넣으며 한결 따스하고 사랑스레 펼칠’ 수 있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살아가는 이야기가 가장 즐겁다.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 스스로 신나게 나눌 수 있을 때에 가장 즐겁다. 남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 너머로 구경하거나 호박씨를 까는 이야기보다, 나 스스로 내 온몸 바쳐 힘차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꾸밈없이 나눌 수 있으면 참으로 즐겁다. 문학이란 바로 삶에서 비롯한다. 어린이문학이든 어른문학이든, 또 판타지라 하든 공상과학이라 하든 뭐라뭐라 하든 삶에서 비롯하거나 삶에 바탕을 두지 않는 문학이란 없다. (4343.11.2.불.ㅎㄲㅅㄱ)


― 달걀 한 개 (박선미 글,조혜란 그림,보리 펴냄,2006.5.3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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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헤아리며 카르페디엠 4
로이스 로리 지음, 서남희 옮김 / 양철북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너와 내가 살가운 벗일 때
 [푸른책과 함께 살기 61] 로이스 로리, 《별을 헤아리며》


- 책이름 : 별을 헤아리며
- 글 : 로이스 로리
- 옮긴이 : 서남희
- 펴낸곳 : 양철북 (2003.3.14.)
- 책값 : 9000원


 (1) 좋은 벗


 좋은 벗을 만날 때하고 달갑잖은 사람을 만날 때 똑같기란 힘듭니다. 누구한테나 서글서글하거나 살가이 마주할 수 있으며, 좋은 벗님한테 한결 따사로우며 넉넉하게 마주할 수 있습니다.

 좋은 벗이란 서로 마음을 활짝 열면서 어깨동무하는 사람입니다. 달갑잖은 사람이란 서로 마음을 꽁꽁 닫아걸며 쳐다보기 싫은 사람입니다. 내가 너한테서, 네가 나한테서 뭔가를 얻어내거나 등을 후리거나 할 뜻이 없을 때에 좋은 벗으로 사귑니다. 무언가 내 배를 채을 꿍꿍이로 사귀려 할 때에 달갑잖은 사람이 됩니다.


..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억양이 어색한 덴마크말이었다. ‘3년이나 되었으면서……. 우리 나라를 점령한 지 3년이나 되었는데도 우리 말을 저렇게 못하다니.’ 안네마리는 속으로 그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  (12쪽)


 오래도록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 해서 좋은 벗이 되지 않습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좋은 벗이 될 수 없지도 않습니다. 열 해를 알고 지낸 이가 다섯 해를 알고 지낸 이보다 살가운 사이가 되지 않습니다. 스무 해에 걸쳐 얼굴을 늘 마주보았다 해서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챈다거나 마음 깊은 자리가 어떠한지를 깨닫지는 못합니다.

 스치는 손길에서 살필 수 있어야 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손바닥과 손가락에 아로새겨진 굳은살을 보면서, 발바닥에 박힌 꾸덕살을 보면서, 얼굴에 온통 파인 주름살을 보면서 한 사람 삶을 헤아립니다. 손톱에 밴 흙때를 들여다보면서, 두툼하거나 하이얀 손가락을 보면서, 몸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으면서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나 스스로 당신한테 좋은 벗이 되고자 할 때에는 나 스스로 좋은 삶을 일굴 노릇입니다. 좋은 삶이란 돈을 많이 버는 삶이 아니요, 좋은 삶이란 이름을 떨치는 삶이 아니며, 좋은 삶이란 큰힘을 거머쥐는 삶이 아닙니다. 좋은 삶이란 내 깜냥과 그릇과 몸에 걸맞게 즐거이 일구는 나날이 쌓이며 이루어집니다. 좋은 삶이란 내 손으로 차근차근 갈고닦으며 돌보는 마음밭입니다. 가슴으로 끌어안는 삶이요, 두 다리로 씩씩하게 선 삶이며, 두 팔로 얼싸안는 삶일 때에 바야흐로 좋은 삶으로 이어갑니다.


.. “단추 가게가 뭐 어때써? 단추 가게가 무슨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잖아? 히르슈 아줌마는 좋은 분이고, 사무엘도 좀 멍청해 보이긴 하지만 아무한테도 나쁜 짓을 하지 않을 애야. 나쁜 짓을 할래야 할 수도 없지, 뭐. 안경을 벗으면 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때 문득 안네마리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만약에 히르슈 아줌마네가 단추를 팔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 ..  (37쪽)


 좋은 벗하고 마주한 자리에서는 절로 좋은 말이 샘솟습니다. 좋은 벗님하고 손을 맞잡으며 일을 할 때에는 좋은 꿈이 시나브로 피어납니다. 좋은 벗들과 어울리며 지내는 동안 좋은 일을 좋은 넋으로 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자꾸자꾸 좋지 못한 쪽으로 기우는 까닭이란, 나 스스로 나부터 좋은 마음이지 못할 뿐 아니라, 서로서로 궂은 꿍꿍이를 키우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참말, 국가보안법부터 4대강이라고 하는 토목건설까지 우리 삶을 어느 만큼 좋은 쪽으로 이끈다 할 만할까 궁금합니다. 법은 누구한테 도움이 되는 틀이고, 의사라는 자리는 얼마나 돈을 벌어들여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교사는 얼마나 거룩한 일꾼이며, 어버이 되는 사람은 어떤 마음씨여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내 마음속에서 고요히 솟아오르는 좋은 말을 나누면서 내 사랑스러운 벗님과 좋은 삶을 꾸릴 수는 없는 노릇인지 궁금합니다.

 좋은 벗하고 좋은 밥 한 그릇 조촐히 나누려는 매무새로, 좋은 벗하고 좋은 술 한 잔 기쁘게 나누려는 몸가짐으로, 좋은 벗하고 좋은 책 한 권 즐거이 나누려는 몸짓으로, 좋은 벗하고 좋은 길을 두 손 맞잡으며 걸으려는 모양새로 좋게좋게 살아가면 아름다웁지 않나 궁금합니다.

 나한테 더 있는 힘을 쏟고, 나한테 더 있는 돈을 바치며, 나한테 더 있는 사랑을 들입니다. 나한테 덜 있는 힘을 얻고, 나한테 덜 있는 돈을 받으며, 나한테 덜 있는 사랑을 채웁니다. 하루하루 고맙게 살아갑니다.


.. “설마 군인들이 버터까지……, 그 말이 뭐더라……, 재배치하는 건 아니겠죠?” 엄마는 슬픈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단다.” 하고 대답했다.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 그래. 모든 농부들의 버터를 걷어다가 자기네 군대의 뱃속에다 갖다 넣는 거지! 삼촌이 이렇게 조금이라도 숨긴 것을 알면 아마 당장에 총을 들고 달려올 거다!” ..  (91쪽)


 세 살짜리 우리 딸아이를 번쩍 안아 어르는 일곱 살짜리 언니를 바라봅니다. 일곱 살짜리 이웃 언니는 세 살짜리 어린 동생하고 신나게 놀아 줍니다. 말을 받고 손을 잡으며 예쁘게 감싸안습니다. 세 살짜리 우리 딸아이는 언니한테서 받는 따스함을 자그마한 몸뚱이로 잘 삭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따스함을 고이 건사해서 저보다 세 살 어릴 동생한테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랑을 받았기에 다시금 사랑을 물려준다기보다, 사랑을 받으며 사랑이 얼마나 따스한가를 새삼 깨닫습니다. 따로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더 너른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 줄 아는 가운데, 나 스스로 내 자리에서 새롭게 사랑을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어디에나 언제나 사랑이라는 씨앗은 고요히 잠들어 있으니까요. 내 마음속에서 잠자는 씨앗을 살짝 깨워 내 좋은 벗님하고 나눌 사랑으로 이을 때, 내 하루하루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우며 고운 빛깔로 물든다고 느낍니다.


 (2) 궂은 벗


 어린 나날, 둘레에는 으레 좋은 벗과 궂은 벗이 있었습니다. 좋은 벗은 좋은 벗대로 마음이 여리고, 궂은 벗은 궂은 벗대로 마음이 여립니다. 모두 작은 사람 작은 아이이거든요.

 동무들한테 짓궂게 구는 녀석이 마음 깊은 데까지 몹쓸 생각이나 버릇으로 젖어 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짓궂은 동무녀석네 집에 놀러가 보면 이 짓궂은 동무녀석 또한 집에서는 둘도 없이 사랑스러운 아들이거나 딸입니다. 집에서건 동네에서건 참으로 작은 아이랍니다. 고만고만한 또래에서는 주먹으로 을러대거나 구지레한 못난 짓을 저지를지라도, 덩치 큰 형이나 언니 앞에서는, 또 어버이나 동네 어른 앞에서는 더없이 자그마한 아이입니다.


.. 안네마리는 빙긋 웃으며 어둠 속에서 동생을 꼭 껴안았다. 덴마크 아이들은 누구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이름난 이야기꾼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도 바로 덴마크사람이다 ..  (22쪽)


 하루를 더 살고 새 하루를 다시 살면서 헤아립니다. 이제까지 만나거나 스친 숱한 궂은 벗들 가운데 딱하거나 안쓰럽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국민학교 때라든지 중·고등학교 때라든지 군대에서라든지 회사에서라든지 길에서라든지 …… 수없이 많은 짓궂은 사람을 스칩니다. 까닭없이 주먹다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돈에 눈이 멀어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며, 아예 생각을 안 하며 막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된 짓을 하는 어른 가운데 당신 집에 토끼 같은 아이를 애틋하게 돌보는 사람이 있기 일쑤입니다. 아니, 제아무리 막되게 산달지라도 제 아이 앞에서까지 막되게 살지는 못하기 마련입니다. 바깥에서 여린 사람을 들볶을지라도 겉으로 우쭐거리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어설픈 허울을 쓰면서 어줍잖게 제 살을 갉아먹는 셈입니다.

 청소당번이면서 몰래 내빼는 괘씸한 동무들은 늘 있습니다. 몰래 내뺀 녀석을 담임한테 일러바칠 수 있습니다. 한 번쯤 일러바칩니다. 그러나, 일러바치고 나서 뉘우칩니다. 괘씸한 녀석이 우락부락한 선생들한테 얻어터지며 쫄아드는 가녀린 모습을 보니, 몰래 내빼며 혀를 쭉 내밀던 그 짓궂은 모습이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예 불쌍하고 여린 동무입니다. 아마 무슨 일이 있겠지요. 그냥 귀찮거나 번거로와서 더 뛰어놀고 싶기도 하겠지요. 그러면 청소당번을 내빼지 않은 얌전한(?) 내가 동무녀석 몫을 더 해 주면 됩니다. 혼자서 교실을 쓸고 닦으며 치우더라도 삼십 분이면 다 해낼 수 있습니다. 청소당번을 맡은 동무들이 모조리 내뺐을지라도 그러거나 말거나 나 스스로 천천히 책걸상을 치우면서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면 됩니다. 청소당번 어느 누구도 칠판을 안 지우고 지우개를 안 털어 놓았다 한들, 내가 청소당번이 아니라 한들, 조용히 일어나서 나 스스로 치우고 지우고 털어 놓으며 깔끔히 마무리지어 놓으면 됩니다. 꼭 당번이 하란 법은 없으며, 당번이 안 하더라도 손가락질하거나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하고, 할 만한 사람이 하면 되니까요. 길에 떨어진 꽁초를 밟아서 끄거나 골목에서 뒹구는 비닐봉지를 주워서 쓰레기통으로 옮기는 일은 ‘꽁초를 버린 사람’이나 ‘쓰레기 버린 이’ 스스로 할 때에 가장 낫겠지요. 그러나, 버려진 꽁초나 쓰레기를 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치워 줄 수 있습니다. 이곳까지 청소부를 불러서 치우라 하지 않아도 돼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열두 해를 다니는 동안, 국민학교 때에 몇 차례 ‘당번이 아니면서 칠판을 지우고 지우개를 터는 동무’를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어, 야, 너 당번 아니잖아?” “당번이 아니어도 지워야 하잖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동무 옆에서 함께 거듭니다. 동무는 씨익 웃습니다. 저도 따라서 웃습니다. 동무녀석은 요 깜찍한 짓을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제 어머님한테서 배웠을까요, 제 아버님한테서 익혔을까요, 동네 어르신한테서 받아들였을까요. 당번 노릇을 하지 않은 동무는 참 짓궂지만, 이 짓궂은 동무가 있어 한결 고운 동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얄궂은 동무가 있기에 더욱 착한 동무를 깨닫습니다.


.. “내 단짝 친구였던 헬레나가 저 집에 살았지. 그 집에 가서 가끔 같이 밤을 새우기도 했어. 그 친구가 주말이면 더 자주 우리 집에 왔지만. 시골이 도시보다 더 재미있는 것 같아.” 엄마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  (77쪽)


 궂은 벗 때문에 학교 가기 싫은 적이 잦았습니다. 조그마한 학교 울타리에서 무슨 힘다툼을 한다며 툭하면 여린 아이를 괴롭히거나 주먹질을 하거나 주머니를 터는 동무들이 참 못마땅하며 밉살스러웠습니다. 학교를 다니며 대학바라기 공부만 죽어라 하는 가운데 이런 공부라면 굳이 학교라는 데에 안 나오더라도 홀로 할 만하다고 느꼈습니다. 따분하며 재미없는 교과서와 시험지만 푸느라 햇살 밝은 날에도 어두컴컴한 시멘트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한다면, 어떠한 동무이건 착하거나 밝거나 고운 마음결을 지키기 만만하지 않겠다고 느꼈습니다. 우중충한 옷을 ‘학교옷’이랍시고 입혀 놓으니까 저마다 다르며 고운 동무들은 빛을 잃습니다. 까까머리가 되도록 머리카락을 밀어 버리니, 볼썽사납게 죄수 차림이 됩니다. 군대와 학교와 감옥이란 똑같은 불지옥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하고 느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지 못하는 군대요 학교요 감옥입니다. 저절로 궂은 사람으로 굴러떨어지도록 내모는 군대이며 학교이며 감옥이라고 느낍니다. 숲에서 뒹굴고 논밭이랑 벗삼으며 삶을 살찌우는 슬기를 깨우치도록 하는 곳이 학교여야 할 텐데, ‘학교’라는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쇠사슬이 된다고 느낍니다. 토박이말 사랑으로 외치는 ‘배움터’가 아닙니다. 이름 그대로 배우는 터가 되어야 할 배움터입니다. 이름 그대로 보금자리나 집터가 되어야 하고, 나눔터가 되어야 하며, 살림터가 되어야 합니다. 참다운 놀이터야 하고 즐거운 일터여야 합니다. 너그러운 쉼터여야 하고, 반가운 만남터여 하며, 기쁜 새터로 자리잡을 노릇입니다.

 궂은 벗이란 처음부터 따로 있지 않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사람들 마음밭에는 사랑스러운 씨앗과 함께 구질구질한 씨앗이 나란히 있어, 오늘날 이 땅 학교와 군대와 감옥은 사람들 마음밭에서 구질구질한 씨앗이 우람하게 커지도록 부추긴다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사회에서도, 회사에서도, 전철이나 버스에서도, 길거리에서도 …… 사랑스러운 씨앗이 올망졸망 돋아나게끔 이끌지 못하거든요.


.. 여기서부터는 덤불이 너무 자라 오솔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네마리는 키 큰 블루베리 덤불 옆에 감춰진 오솔길 입구를 찾아냈다. 늦여름에 그 달콤한 블루베리를 따려고 얼마나 자주 여기서 멈춰 섰던가! 입과 손은 금방 퍼렇게 물들곤 했다. 그러고 집에 가면 엄마가 늘 웃으셨다 ..  (139쪽)


 평화는 평화를 부릅니다. 전쟁은 전쟁을 찾습니다. 고운 벗은 고운 벗을 부릅니다. 궂은 벗은 궂은 벗을 찾습니다. 그런데 평화는 전쟁을 평화로 바꿀 줄 알며, 고운 벗은 궂은 벗을 고운 벗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전쟁 또한 평화를 전쟁으로 끌어당길 줄 알며, 궂은 벗 또한 고운 벗을 궂은 벗으로 사로잡을 줄 압니다.


 (3) 평화문학 《별을 헤아리며》


 전쟁 이야기를 다룬 문학 《별을 헤아리며》를 읽습니다. 책을 찬찬히 읽으며 마지막 쪽을 덮습니다.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이 문학을 일컬어 으레 ‘전쟁문학’이라 말할 수 있겠다 싶으면서 어딘가 찜찜합니다. 글쎄, 모두들 ‘전쟁문학’이니 무어니 하고 말하는데, 이러한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다른 전쟁문학을 놓고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이러한 이름을 붙이는 사람이 있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별을 헤아리며》와 같은 문학을 가리킬 때에는 ‘평화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어울리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전쟁 때문에 아프고 힘겨운 나날을 그리니까 ‘전쟁문학’이라 할 수 있는데, 곰곰이 살펴보면 전쟁통에 평화를 꿈꾸는 삶을 그리기에 ‘평화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 살펴보면 전쟁이건 아니건 언제나 평화롭게 살아가며 평화로운 사람들과 평화로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기에 ‘평화문학’이라는 이름이 아니면 안 어울리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 전쟁은 언젠가는 끝난다. 헨리크 삼촌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정말이었다. 전쟁은 거의 2년이나 지나서 끝났다. 안네마리는 열두 살이 되었다 … 거의 2년 동안 이웃들은 탈출한 유대인들을 위해 화분도 돌봐 주고 가구의 먼지도 털어 주고 촛대도 닦아 주었다. 엄마도 엘렌의 가족을 위해 그렇게 해 주었다. “친구란 그렇게 하는 거야.” 엄마가 말했다 ..  (164∼165쪽)


 전쟁문학으로 《별을 헤아리며》를 읽을 때하고, 평화문학으로 《별을 헤아리며》를 받아들일 때에는 크게 다릅니다. 평화문학인 《별을 헤아리며》라 한다면, 작품에 나오는 ‘딱하거나 안쓰러운’ 독일 병사들한테 당신들이 얼마나 바보스러우며 어리석은가를 깨닫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당신들 독일 병사한테도 사랑스러운 딸아이가 있고 고마운 어머니가 있으며 믿음직한 벗이 있음을 깨닫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당신들 독일 병사 고향마을에도 맑은 해가 돋아나고 밝은 달이 비추며 너른 들판에 아름답고 구수한 곡식이 익는 줄을 깨닫도록 손길을 내밀 수 있어요.

 평화란 사랑입니다. 평화는 해코지가 아닙니다. 평화란 호미이자 쟁기입니다. 평화는 무기가 아닙니다. 평화란 믿음입니다. 평화는 따돌림이 아닙니다. 평화란 나눔입니다. 나한테 있는 돈이든 힘이든 무어든 스스럼없이 이웃과 나누는 마음이 평화입니다. 남한테 있는 돈이든 힘이든 빼앗으려 하거나 가로채려 하거나 후려치려 하는 마음은 평화일 수 없습니다.

 평화문학 《별을 헤아리며》는 좋은 벗으로 사귀는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아끼며 사랑하는가를 찬찬히 그립니다. 좋은 벗으로 언제까지나 아름다이 살아가고픈 이들이 당신들 하루를 어떻게 빛내거나 일구는가를 알뜰히 그립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그리고, 참다이 어깨동무하는 기쁨을 그리며, 곱게 사귀는 멋을 그립니다. 밤하늘을 달과 함께 빛내는 별 하나는 모든 사람 가슴에 고즈넉히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별을 잘 알아채고, 누군가는 이 별을 죽는 날까지 못 알아챕니다. 별을 알아채는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고, 별을 못 알아채는 사람은 전쟁에 눈이 멉니다. (4343.10.3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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