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금붕어 난 책읽기가 좋아
스테파니 블레이크 지음, 심지원 옮김 / 비룡소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시험공부 때문에 망가지는 어린이
 [어린이책 읽는 삶 19] 스테파니 블레이크, 《빨간 금붕어》(비룡소,2008)

 


- 책이름 : 빨간 금붕어
- 글 : 스테파니 블레이크
- 옮긴이 : 심지원
- 펴낸곳 : 비룡소 (2008.1.18.)
- 책값 : 6500원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다니는 동안 시험을 참 많이 치렀습니다. 학교는 무엇인가 배우러 다니는 곳이라 하지만, 그때나 이때나 가만히 돌아보면, 학교는 시험을 치르는 곳이 아니랴 싶습니다. 늘 시험을 치르고, 언제나 시험문제를 외도록 내모는 곳이라고 느껴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배우는 즐거움’이나 ‘배운 무언가를 나누는 기쁨’을 맛볼 겨를이 없어요. 어쩌면, 처음부터 이러한 이야기하고는 동떨어진 데가 학교라 할 수 있어요. 배움도 가르침도 나눔도 없이, 시험문제와 성적표만 남는 데가 학교인지 몰라요.


.. 나는 알리스와 함께 교실에 들어갔어요. 곧 수학 시험이 시작되었지요.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어요. 옆을 슬쩍 보았더니 알리스는 거의 다 푼 거 있죠. 난 하나도 풀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나는 알리스의 시험지를 베끼려고 했어요. 그러자 알리스가 신경질을 내더니 큰 소리로 외쳤어요. “선생님! 잔이 내 걸 훔쳐봐요.” ..  (8∼9쪽)


  학교가 학교다움을 잃은 모습이 ‘한국땅다운 학교 모습’으로 뿌리내렸다고 느낍니다. 초·중·고등학교 모두 대학교만 바라보도록 이끌어요. 대학교를 바라보는 눈길은 내 꿈이나 뜻이나 사랑이 아닌 성적표 한 가지입니다. 막상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꿈이나 뜻이나 사랑은 아랑곳없이 학점과 자격증과 이력서만 살피고 맙니다. 학문도 자유도 생각과 사랑도 없는 톱니바퀴입니다.


  왜 학교에서는 삶을 가르치지 않을까요. 왜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어울려 즐거이 놀도록 놓아주지 않을까요.


  학교를 세우는 까닭은 모든 아이들 머리속에 틀에 박힌 지식조각을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학교를 보내는 까닭은 모든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도록 미리 담금질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외우는 교과서로 아이들 모두 똑같은 넋 똑같은 몸짓 똑같은 차림새로 닦달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동무를 만나고 언니 오빠 동생 누나 형하고 어울리려고 학교에 갑니다. 저마다 다른 보금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마을에서, 저마다 다른 어버이한테서, 그동안 차근차근 받으며 북돋운 꿈과 뜻과 사랑을 다 함께 예쁘게 나눌 뜻으로 한 자리로 모입니다.


  이야기가 있을 때에 학교입니다. 회초리가 있거나 출석부가 있거나 교과서가 있으면 학교가 아닙니다. 마음이 있을 때에 학교입니다. 시험지가 있거나 성적표가 있거나 행동발달사항을 따질 때에는 학교가 아닙니다. 흙이 있고 나무가 있으며 풀이 자랄 때에 학교입니다. 시멘트 건물에다가 플라스틱 잔디를 운동장에 깔고는 주차장이 자동차로 득시글거린다면 학교가 아닙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삶을 함께 나눌 때에 비로소 학교입니다. 아이들이 서로서로 생각을 주고받을 때에 바야흐로 학교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여러 해 먼저 더 살아온 나날을 슬기로이 빛내며 좋은 꿈을 들려줄 때에 시나브로 학교입니다.

 


.. 수학은 아무래도 모르겠는데 어쩌라고요 … “수학을 빵점 맞았어요. 아무것도 모르겠단 말이에요. 이제 학교에도 가기 싫어요!” “잔, 들어 보렴.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야. 넌 국어랑 체육, 음악, 미술을 아주 잘하잖니.” ..  (10, 13쪽)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던 일은 언제나 괴롭게 떠오릅니다. 수도 없이 치른 시험 가운데 즐거웠던 일은 한 차례조차 없습니다. 시험공부도 괴로울 뿐이요, 시험을 치르고 나서 온 학교가 몽둥이찜질 소리로 가득 퍼질 때에도 괴로울 뿐입니다. 가을이면 시골집마다 콩 터는 소리 가득하다지만, 시험을 치르고 나면 교실마다 교사란 이름을 단 어른들이 학생이란 꼬리표 붙은 아이들을 흠씬 두들겨패며 엉덩이 살점 떨어지도록 털어대는 소리만 맴돌았어요. 나로서는 이런 끔찍한 감옥살이를 학교라 느낄 수 없어요.


  문득 생각합니다. 왜 옆 짝꿍한테 답을 알려주면 안 될까요. 왜 나는 옆 짝꿍한테서 답을 들으면 안 될까요. 서로서로 잘 모르니, 서로서로 머리를 맞대어 문제 하나 풀 수 없는가요. 여럿이 모둠을 지어 어려운 길을 헤쳐 나가도록 할 수 없을까요. 조금 더 잘 하는 아이는 조금 더 못 하는 아이를 돕습니다. 조금 더 똑똑한 아이는 똑똑한 머리를 씁니다.


  몸이 재거나 튼튼한 아이만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던지며 놀아야 하지 않아요. 몸이 굼뜨거나 여린 아이도 함께 섞이고 얼크러지면서 즐거이 공놀이를 할 수 있어야 해요. 서로 돕고 서로 마음을 기울이며 웃음꽃이 피고 땀열매를 맺을 때에 ‘체육’이고 ‘교육’이며 ‘학교’예요.

 


.. 안느 아줌마는 예순 살이에요. 아줌마는 화가이기 때문에 자기 집에서 일해요. 아줌마는 여러 가지 색깔이 들어간 아주 크고 화려한 그림을 그려요. 나는 아줌마가 쓰는 색깔들을 무지무지 좋아하지요. 그 색깔들을 보고 있으면 빨래 집으로 돌아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져요. 안느 아줌마는 늘 즐거워 보여요. 자기 일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 같아요 ..  (18쪽)


  이 사회가 온통 돈 이야기로만 흐르는 까닭이 어디 한 가지 때문이겠습니까만, 아이들이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과외니 영어니 뭐니 뭐니 하면서 지식조각만 머리에 집어넣다가는 초등학교 들어서기 무섭게 입시지옥 굴레에 가두니까,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돈 아니고는 헤아리지 않으리라 느껴요.


  이 사회가 몸이 아프거나 힘든 이웃을 살피지 못하는 밑뿌리도, 이 사회가 서로서로 예쁘게 얼크러지는 길로 나아가지 않는 밑바탕도, 이 사회가 오직 도시를 키우고 불리며 먹여살리는 흐름에서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밑모습 또한, 하나같이 학교 때문이라고 느껴요. 시험만 치르는 학교, 성적표만 만드는 학교, 아이들 머리통만 커다랗게 부풀리는 학교, 이런 학교가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삶터를 망가뜨리는구나 싶어요.

 


.. 오늘은 아빠가 쉬는 날이에요. 아빠는 하루 종일 나와 함께 있었어요. 아빠는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방바닥에 커다란 천을 깔아 주었지요. 나는 온종일 그림을 그렸어요. 학교나 뱅상, 알리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죠 ..  (27쪽)


  스테파니 블레이크 님이 빚은 조그마한 이야기책 《빨간 금붕어》(비룡소,2008)를 읽습니다. 시험공부 때문에 망가지는 어린이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 슬픈 어린이 곁에는 지난날 똑같이 시험공부 때문에 망가질 뻔하다가 씩씩하게 살아난 ‘예순 살 그림쟁이 할머니’가 있습니다. 예순 살까지 살아오며 즐거이 그림을 빚는 할머니는 고작 열 살쯤 되었을까 싶을 어린 벗한테 슬기로운 꿈을 곱게 들려줍니다. 열 살쯤 되었을까 싶을 어린이는 예순 살 그림쟁이 할머니를 좋은 벗으로 삼아 ‘삶넋’을 맞아들입니다.


  학교에서는 한 마디조차 듣지 못하던 삶넋입니다. 동무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 아이한테 속삭이지 않던 삶넋이에요. 교사도 교장선생도 어느 누구도 이 가녀린 어린이한테 예쁜 꿈이나 멋진 뜻이나 좋은 사랑을 나누지 않았어요. 학교에서는 어른이나 어린이나 몽땅 삶넋하고는 동떨어지고 말았어요.


  《빨간 금붕어》에 나오는 어린이는 학교 따위 금세 때려치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이는 학교를 굳이 때려치우지 않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무 가운데 하나를 좋아하거든요. 이 어린이는 아프고 슬픈 마음을 스스로 달래고 북돋웁니다. 예순 살 할머니를 동무로 삼으며 삶넋을 찬찬히 받아들이면서 제 꿈을 살찌우고 사랑을 꽃피웁니다. 이리하여, 바보스러운 학교 바보스러운 교사 바보스러운 학급동무를 차근차근 바꾸어 내요. 살가운 손짓 하나로 바꿉니다. 따스한 눈짓 하나로 바꿉니다. 포근한 몸짓 하나로 바꿉니다.


  살아가는 밑힘은 사랑입니다. 살아가는 밑넋은 꿈입니다. 살아가는 밑앎은 슬기입니다. 이제라도 학교가 학교다움을 찾으려 한다면, 바로 사랑·꿈·슬기가 무엇인가를 헤아리면서 곱게 아낄 수 있어야 합니다. (4345.3.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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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 - 아마존 예콰나족에게서 ‘인간 본성을 존중하는 육아법’을 배운다
진 리들로프 지음, 강미경 옮김 / 양철북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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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어른들은 왜 아이들을 안 사랑하는가
 [사랑하는 배움책 4] 진 리들로프,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양철북,2011)

 


- 책이름 :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
- 글 : 진 리들로프
- 옮긴이 : 강미경
- 펴낸곳 : 양철북 (2011.6.10.)
- 책값 : 13000원

 


 아이를 돌보는 일이란 어버이인 내 삶을 돌보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어버이로 살아가며 내 삶을 사랑한다면, 나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을 똑같이 사랑하는구나 싶어요. 어버이로 지내는 내 꿈을 북돋운다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며 가슴으로 품을 꿈을 곱게 보듬는구나 싶어요.

 

 어버이인 내 삶을 돌보지 않으면서 아이들만 잘 지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버이인 내 삶을 내팽개치면서 아이들만 씩씩하게 자라라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도록 뒷배를 한대서 어버이 노릇을 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대학교 배움값을 대준대서 어버이 구실을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꿈과 사랑을 북돋우는 어버이가 아니라면, 어버이로서 옳고 바르게 살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착한 꿈과 맑은 사랑을 꽃피우도록 이끈 어버이가 아니라면, 어버이답게 즐겁고 아름답게 살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 서구의 아기들이 사무실이나 가게, 작업실, 심지어는 저녁 모임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기들은 대개 시끄럽게 울어대며 발길질을 하거나 팔을 휘두르고 온몸이 뻣뻣하게 긴장돼 있다. 그래서 아기를 얌전히 있게 하려면 누군가의 두 손과 엄청난 관심이 필요하다 … 물론 가장 좋은 의도를 가지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 온 행동을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하다. 하지만 우리 못지않게 무지하고 순진했던 부모님이 우리를 대하던 태도와 그 때문에 그분들이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 어머니나 아버지의 역할에 여성이냐 남성이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출산을 앞두고 육아 책을 사들이는 것이 관행이다 … 젊은 엄마들은 자신의 타고난 능력은 깡그리 무시한 채, 아직은 완벽하게 분명한 신호를 보내는 아기의 ‘동기’도 깡그리 무시한 채 책을 읽고 그대로 따른다 ..  (11, 15, 73, 74쪽)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무릎에 누입니다. 옆지기는 지난밤 몇 시간이나 애먹으며 아이를 안고 달랬습니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고이 잠들지 못할까요. 무서운 꿈이라도 꾸었을까요. 몸 어디가 아플까요. 낑낑거리며 자꾸 우는 아이를 번쩍 안고 마당으로 나옵니다. 방문을 열고 깜깜한 바깥을 내다 보면, 이제 별들이 찬찬히 사라지는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면, 저 멀리부터 시나브로 동이 트려고 옅은 빛이 바뀌는 모습을 살펴보면, 아이는 얌전합니다. 마당을 걷거나 마을을 한 바퀴 돌거나 뒤꼍에서 어르는 동안, 아이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조용합니다.

 

 잠자리가 아이한테 더웠을는지 모릅니다. 살짝 바람을 쐬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아니, 더 따사로이 보듬고 더 포근하게 감싸는 손길을 바랐을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하루하루 조금씩 크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란, 내가 이 아이들만 한 나이를 어떻게 살아내며 내 어버이한테 빛과 사랑과 꿈이 되었는가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내 아이들은 나한테 고운 빛이요 사랑이며 꿈입니다. 나는 내 어버이한테 고운 빛이요 사랑이며 꿈입니다. 내 아이들은 앞으로 저희 아이들을 낳아 저희대로 새로운 빛이며 사랑이랑 꿈을 느끼겠지요.


.. 아기는 끊임없는 신체 접촉을 통해 나중에 직접 맛보게 될 경험을 하나씩 눈에 담는다. 가만히 품에 안겨 있는 동안에도 아기의 감각은 모두 깨어 있다 … 갓 태어난 아기는 자궁 밖으로 나오면서 겪게 되는 이런 급속한 변화와 그 밖의 느낌을 놀랍도록 침착하게 견뎌낸다 … 어떤 상태든 아기는 어른보다 자신의 경험에 더 민감하다. 자신이 받은 인상을 완화해 줄 선례가 없기 때문이다 … 하지만 (아기는) 죽음과도 같은 무의 상태나 안에 천을 깔아 놓은 바구니, 움직임이나 소리, 냄새, 기타 생명의 느낌이 전혀 없는 플라스틱 상자로 뛰어오를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자궁 안에 있는 동안 형성되었던 어머니와 아기의 견고한 관계가 갑자기 단절될 경우 아기만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도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  (17, 66, 67, 75쪽)


 목숨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 목숨도 어버이인 내 목숨도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어버이로 지내는 나를 갓 낳으며 막 어버이가 된 내 어머니와 아버지도 아름다운 목숨이요,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낳은 웃 어머니와 아버지 또한 아름다운 목숨입니다.

 

 아름다운 목숨이기에 한삶 고이 누리고서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름다운 목숨인 만큼 한삶 고이 누리려 신나게 태어납니다. 흙에서 이 땅을 박차고 일어섭니다.

 

 얼마만큼 살아야 좋다 여길 만한 삶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마흔 해를 살아내면 즐거이 살아낸 나날인지, 예순 해는 살아내야 즐거이 살아낸 나날이 될는지, 여든 해나 백 해쯤 살아내야 즐거이 살았다 할 만한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를 더 먹기에 더 기쁜 삶이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돈을 좀 많이 모았기에 기쁜 꿈이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책을 많이 읽거나 글을 많이 썼다면 더 기쁜 사랑이라 할까요.

 

 바야흐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오는 날씨입니다. 마을 논둑에는 봄까치꽃이 핍니다. 아직 다른 꽃은 피지 않습니다. 드문드문 동백꽃이 봉오리를 열곤 합니다만, 아직 봉오리를 닫은 동백나무가 훨씬 많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새봄 기운을 곳곳에서 마주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이 새봄은, 해마다 맞이하는 새봄은, 언제 보아도 즐겁습니다. 열일곱 차례 맞이하던 새봄도, 스물일곱 차례 맞이하던 새봄도, 서른일곱 차례 맞이하는 새봄도 언제나 즐겁습니다. 앞으로 새봄을 얼마나 더 볼는지 모르지요. 한 차례 더 보고 삶을 마감할는지, 서른일곱 차례를 더 볼 수 있을는지, 쉰일곱 차례를 더 볼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더 볼 수 있대서 더 좋은 삶은 아니요, 더 볼 수 없어서 더 나쁜 삶은 아니에요.


.. 전문가들이 만족스럽게 사는 법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하지만 발견하는 데 실패하면 할수록 그들은 이성의 힘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면서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 문화가 지성에 의존할수록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선 개인에게 더 많은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다 … 문명사회의 구성원에게서 나타나는 출생외상이라는 현상의 주된 원인은 철제 도구나 눈부신 조명, 고무장갑, 살균제와 마취제 냄새, 왕왕거리는 목소리, 기계 소리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출생 과정에서 외상을 입지 않으려면 아기의 경험이 아기와 아기 어머니의 태곳적 기대에 부합해야 한다 ..  (54, 61, 102∼103쪽)


 진 리들로프 님이 쓴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양철북,2011)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참모습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를 다루는 책입니다. 아마존 예콰나겨레 사람들이 아이를 어떻게 낳아 어떻게 돌보며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는 대목을 가만히 살펴보면서 ‘서양사람이 나날이 잃거나 잊는 사랑과 꿈’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책입니다.

 

 책을 읽지 않았을 때에도 알고, 책을 읽고 나서도 알 만한 이야기인데, 아마존 예콰나겨레한테 학교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익히 아는 북중미 붙박이한테도 학교란 없습니다. 북극 붙박이한테도 학교란 없습니다. 한겨레 옛사람한테도 학교란 없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임금이나 사대부나 권력자한테조차 학교란 없습니다. 흙을 일구거나 길에서 장사하던 여느 사람들한테만 학교가 없지 않았어요. 누구한테나 학교란 없습니다.

 

 임금이나 사대부나 권력자한테는 ‘늘 곁에 붙어 무언가 가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한테는 ‘늘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여느 사람들 어버이나 살붙이는 ‘늘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으로 삶과 사랑과 꿈을 가르쳐요. 삶을 가르치고 삶을 배웁니다. 삶을 보여주고 삶을 물려받아요.

 

 김치를 담그든 밥을 하든 벼를 빻든 베틀을 밟든 물레를 잣든 바느질을 하든, 어떤 학교를 다녀야 배우지 않습니다. 따로 어떤 교과서나 교재가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며 배울 대목이란 학교나 교과서로는 가르치지 못하고 배우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며 배울 모든 것은 ‘내가 사랑할 사람하고 살아가는 오늘 하루’ 서로서로 가르치며 배웁니다.


.. 아이를 이해해서도 신뢰해서도 안 된다고 배우는 ‘특권’을 갖지 못하는 제3세계 부모들은 네 살이 넘은 아이에게는 예외 없이 집안일을 시키면서 온 가족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 곰곰이 따져 보니 물을 긷는 시간을 그보다 ‘더 알차게’ 보낼 수는 없었다. 적어도 행복의 관점에서 보면 그랬다. 반대로 진보나 그 부산물인 속도, 효율성, 새로운 방식이 기준이라면 물을 길러 가는 것은 누가 보아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 아이들은 흉내 내기 좋아하고 잘 어울리고 개인과 종을 보존하려는 성향을 보이지만, 갓난아기를 어떻게 하면 잘 돌볼 수 있는지 같은 세부 사항도 알고 있다 ..  (20, 43, 147쪽)


 서양사람은 아이를 돌보며 사랑하는 길을 잃습니다. 미국사람이든 유럽사람이든 거의 매한가지입니다. 한국사람도 일본사람도 아이를 아끼며 사랑하는 길을 잊습니다. 도시사람이든 시골사람이든 한결같이 슬프도록 사랑을 잊습니다.

 

 아이는 아이답게 배울 대목을 배우며 살아야 합니다. 아이는 사람답게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길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지내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돈이야 물려주고 싶으면 얼마든지 물려주겠지요. 돈이야 벌려 하면 언제라도 얼마든지 벌겠지요. 지식이나 졸업장이야 얻고 싶으면 얼마든지 얻겠지요. 지식이나 졸업장이란 얻으려 하면 언제라도 마음껏 얻겠지요.

 

 한 살 갓난쟁이가 한 살일 적 사랑을 받지 못하면, 이 한 살 때 사랑은 어떻게든 돌이키지 못합니다. 이 사랑을 돌이키려 하면 아주 힘들며 아주 오래 걸립니다. 두 살 아이가 두 살일 적 사랑을 누리지 못하면, 이 두 살 때 사랑은 어떻게든 갚지 못합니다. 이 사랑을 갚으려 하면 몹시 힘겨우며 매우 오래 걸립니다.

 

 세 살, 네 살, 다섯 살 아이들한테는, 또 여섯 살, 일곱 살, 여덟 살 아이들한테는 학원이나 영어나 유치원이나 만화영화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저를 낳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으며 나날이 즐겁게 누리는 꿈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 경제력이 웬만큼 뒷받침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손을 움직이고 싶어하는 본능을 골프장에서, 지하실 작업장에서, 요트 정박소에서 해소한다 … 큰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려고 갈망하고, 권력을 쥔 사람들은 그 권력으로 더 많은 권력을 탐한다. 하지만 최종 목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밖에서 주어진 갈망에 사로잡힌 채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면 아무리 갈망을 채워도 마음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 남편을 차갑거나, 무심하거나, 냉담하다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거의 절반이 아이가 사고를 당할 때 남편으로부터 따스한 애정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우리 사회에서 권리가 주어진다면 그 이유는 고통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당사자가 나서서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불평하기 때문이다 ..  (117, 180, 195, 250쪽)


 돈이 좀 없으면 없는 대로 그럭저럭 살림을 꾸립니다. 돈이 꽤 많이 없으면 많이 없는 대로 그야말로 허리띠 졸라매며 살림을 꾸립니다.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어떻든 살림을 꾸립니다.

 

 사랑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곧 죽음입니다. 사랑을 누리지 못하거나 사랑을 받지 못하니,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쓸쓸하거나 허전하거나 괴롭거나 힘겨워 그만 목숨을 놓고 맙니다.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삶이기에, 이름이 높거나 동무가 많거나 돈이 많거나 무엇무엇이 많다지만, 살아갈 뜻을 찾지 못해 그예 목숨을 내려놓고 맙니다.

 

 일삯을 많이 쳐주는 일터가 더 좋다고 느끼지 않아요. 일삯이 조금 적어도 즐거이 일하며 사랑스러운 꿈을 키울 만한 일터가 더 좋다고 느껴요. 아니, 일하는 곳이라면 일하는 동안 즐거이 사랑을 키울 만해야지요. 즐거울 수 없고 사랑스러울 수 없다면, 일하는 뜻이나 값이란 없어요. 즐거이 읽는 책이고, 즐거이 먹는 밥이며, 즐거이 마주하는 아이들입니다. 서평을 쓰자며 읽는 책이거나, 끼니를 때우려 먹는 밥이거나, 낳았으니 할 수 없이 학교에 넣는 아이들이라면 얼마나 슬프며 괴로울까요.


.. 삶의 목적은 삶이며, 행복의 목적은 행복의 느낌을 고양하는 데 있다. 출산의 목적은 계속해서 생명을 낳는 데 있다. 이런 순환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으며, 모든 종류의 순환을 통틀어 가장 좋은 것이다 … 아이는 고통을 참거나 갓난아기처럼 어머니의 품에서 위안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전혀 억누르려 하지 않았다. (예콰나족에서는) 다들 그런 아이를 이해했지, 혀를 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낯선 곳에서 어머니 곁에 최대한 붙어 있으려는 욕구는 아기의 본성이다 … 우리에게는 지성을 사용해 예콰나족과 우리 조상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저 지식으로 되돌아가는 길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1년 동안은 곁에 있어 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다면 아기의 평생에 나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어머니 자신에게도 두고두고 짐이 될 박탈을 막기 위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  (116, 130∼131, 143, 168, 247쪽)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를 쓴 진 리들로프 님은 아마존 예콰나겨레를 살펴보며 ‘서양사람 스스로 잃거나 잊은 사랑과 꿈’을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간추려, 사람을 사람답게 섬기며 돌보는 고운 손길을 아마존 예콰나겨레한테서 찾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지구별 모든 겨레가 아마존 예콰나겨레처럼 해야 할까요?


.. 아이들은 어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닐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거의 불가능한 우리 문화권에서는 누가 가르쳐 줄 때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따라하고 학습하려는 아이들의 성향을 학교와 교사가 잘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 지속적인 신체 접촉 욕구를 모두 충족하며 자신의 연속성 안에서 편안히 지내는 아기는 굳이 에너지를 배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남는 에너지는 자신을 안고 분주하게 활동하는 어른이나 아이한테 넘겨주면 되기 때문이다 … 품을 박탈당한 어른들 사이의 사랑은 개인이 경험한 박탈의 성격에 따라 형태만 다를 뿐 두 가지 욕구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본질은 모두 똑같다 ..  (219, 236, 239쪽)


 서양사람 누구한테나 있었으나 서양사람 누구나 쉬 내버린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한국사람 누구한테나 있었으나 한국사람 누구나 함부로 내팽개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제도권 울타리에서는 사랑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회 테두리에서는 사랑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학교 틀거리에서는 사랑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내 보금자리에서 사랑길을 찾아야 합니다. 내 보금자리 깃든 마을에서 사랑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내 살붙이와 복닥이는 조그마한 집에서 하루하루 삶을 누리고 생각하면서 사랑말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요즘 어른들이 왜 아이들을 안 사랑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요즘 어른들 스스로 사랑스레 일구지 않는 삶을 옳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즘 어른들부터 맑은 사랑하고 등지는 슬픈 모습을 참다이 헤아려야 합니다.

 

 아이들이 거친 말을 일삼거나 못된 짓을 벌인다면, 이 모든 거친 말을 어른들이 즐겨쓰기 때문이요, 이 모든 못된 짓을 어른들이 자꾸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배우지, 따로 어떻게 나쁜 짓을 스스로 생각해 내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꾸리는 삶일 때에, 아이들은 이 어른들 삶을 날마다 가만히 바라보면서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돌볼 제 삶을 사랑으로 빛낼 수 있습니다. (4345.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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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두 얼굴의 역사 인류의 작은 역사 1
실비 보시에 글, 장석훈 옮김, 메 앙젤리 그림, 한정숙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아이들은 사랑을 배우며 자라야지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90] 실비 보시에, 《전쟁과 평화, 두 얼굴의 역사》(푸른숲,2007)

 


- 책이름 : 전쟁과 평화, 두 얼굴의 역사
- 글 : 실비 보시에
- 그림 : 메 앙젤리
- 옮긴이 : 장석훈
- 펴낸곳 : 푸른숲 (2007.3.26.)
- 책값 : 1만 원

 


 실비 보시에 님이 푸름이한테 읽힐 뜻으로 쓴 《전쟁과 평화, 두 얼굴의 역사》(푸른숲,2007)를 읽다 보면, 싸움터 군인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놓고 아주 또렷하게 잘 간추렸습니다. “어떤 군인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직업 군인이라면 그것이 직업이기 때문에, 어떤 군인은 군복이 멋있어서, 어떤 군인은 전쟁에 참가하는 게 정의롭다고 사람들이 얘기해서, 어떤 군인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군인은 국법에 의해 전쟁에 끌려왔기 때문에(72쪽).”라 하면서, 어리석게 믿는 사람이나 슬프게 휩쓸리는 사람 모두 싸움터에서 서로서로 죽고 죽이는 짓을 하고야 만다고 밝힙니다.

 

 책을 읽으며, 프랑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알맞고 좋은 이야기를 찬찬히 들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어린이한테나 푸름이한테나 이처럼 이야기할 줄 아는 어른이 몹시 드물거든요.

 

 군인이란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만, 군인이란 무엇보다 ‘사람 죽이는 짓을 하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법으로 사내들을 군대로 내모는 일이란 하나도 올바르지 않아요. 법으로 무언가를 세우려 한다면, 아름다운 삶을 세워야 합니다. 아름답게 꿈꾸고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는 길을 튼튼히 세울 때에 비로소 법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어떤 나라에서는 군대에 들어가 총을 들고 사람을 죽여야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군대에 스스로 들어가지 않고서야 도무지 살아남을 길이 없게끔 꽉 막히거나 닫힌 나라가 있어요. 정치를 거머쥐거나 경제를 움켜쥔 이들이 사람들 삶을 옥죄거든요. 언론이 제구실을 못하고 교육이 참길을 이끌지 않거든요.


.. 모두가 평화를 원한다고 하면서 왜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 수 없을까요 …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 전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전쟁이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  (12쪽)


 사람들 스스로 평화를 바랄 때에는 평화로이 살아갑니다. 사람들 스스로 평화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평화로이 살아가지 못합니다. 마음 한구석에 ‘평화를 바란다며 무기를 갖추지 않으면 두렵잖아?’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화가 깨집니다. 마음 한켠에 ‘평화를 바라지만 군대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고 근심하기 때문에 평화가 흔들립니다.

 

 전쟁과 평화는 서로 두 얼굴이 아닙니다. 전쟁은 평화를 갉아먹으면서 무섭게 퍼집니다. 평화는 전쟁을 타이르며 보드랍게 녹입니다. 전쟁은 죽음을 먹으면서 사람을 괴롭힙니다. 평화는 삶을 사랑하면서 사람을 살립니다.

 

 나는 군대에 끌려가서 스물두 달을 보내며 어느 하루도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나는 군대에서 사랑을 배우거나 들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군대에서 스물두 달 내내 죽음과 죽임을 듣고 보며 지내야 했습니다.

 

 평화를 생각하는 총이나 칼은 없습니다. 평화를 부르는 총이나 칼이 아닙니다. 평화를 부수는 총이나 칼입니다. 평화를 짓밟는 총이나 칼이에요.

 

 군인으로 지내야 하던 스물두 달 동안 들판과 멧자락을 군화발로 짓이깁니다. 참호를 파고 교통호를 낸다며 애먼 멧자락을 파헤칩니다. 멧등성이를 빙 두르면서 지뢰를 묻고 쇠가시그물을 새로 칩니다. 방공호를 짓는다며 조용하며 맑은 숲을 망가뜨립니다. 군사훈련을 한다며 나무를 베고 들판을 더럽힙니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묻습니다. 수백 사람에 이르는 군인은 군사훈련을 하는 동안 깨끗한 멧자락 어디에나 똥오줌을 내갈깁니다. 고된 행군을 하며 건빵이나 밥 봉지를 들길과 멧길에 함부로 버립니다.

 

 환경을 헤아리지 않는 군인입니다. 환경을 헤아릴 까닭이 없는 군인이랄 수 있습니다. 내 목숨이 간당간당하니까 다른 자리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고된 훈련으로 넋이 빠지니 착한 사랑하고는 동떨어집니다. 주먹다짐과 거친 말이 넘치니 참다운 꿈하고는 등집니다.

 

 사내들은 군대에 간대서 사람이 되지 않아요. 사내들은 군대에 끌려가면서 사람다운 빛과 슬기를 잃어요. 사내들은 군대에서 길들여지며 사랑이랑 평화하고 멀어져요.


.. 갈 길이 멀지만,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꿈을 접어서는 안 됩니다. 평화를 꿈꾸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평화가 실현될 날도 그만큼 앞당겨질 테니까요 … 간디는 영국인들의 부당한 지배에 폭력으로 맞서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걸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싸워 나갔습니다. 비폭력 투쟁은 폭력 투쟁보다 더 힘겨운 일입니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  (31, 117쪽)


 누구나 사랑을 배우며 살아야 아름다울 수 있다고 느껴요. 사랑을 배우지 못하며 살아간다면, 산 목숨이 아니라 죽은 목숨이 아닌가 싶어요. 사랑을 꿈꿀 때에 비로소 사람이요, 사랑을 꿈꾸지 못하다면 살가죽만 사람 모양이 아닌가 싶어요.

 

 사랑으로 살아가는 어른일 때에 사랑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되도록 도울 수 있어요. 사랑을 배우며 기뻐하는 어른일 때에 사랑을 배우며 기뻐하는 아이들이 되도록 이끌 수 있어요.

 

 평화란 사랑하는 삶입니다. 전쟁이란 사랑하지 않는 죽음입니다. 평화란 서로 믿고 좋아하는 꿈입니다. 전쟁이란 서로 등치거나 들볶는 미움입니다.

 

 평화를 아끼는 나날이기에 내 손으로 땀흘려 흙을 일굴 줄 압니다. 전쟁에 사로잡힌 나날이기에 내 손으로 땀흘리지 않고 내 몸으로 흙을 일구지 않습니다. 평화를 돌보는 사람이기에 이웃하고 어때동무를 하며 두레를 합니다. 전쟁에 휘둘리는 사람이기에 따돌림과 괴롭힘을 내세워 등수와 계급을 세웁니다.

 

 학문이 아닌 시험성적이 된 대학교는 평화가 아닌 전쟁입니다. 대학교를 바라보도록 이끄는 학교 틀거리는 평화하고 동떨어진 전쟁입니다. 학문 또한 새 전쟁무기와 더 큰 경제개발에 끄달린다면 전쟁하고 마찬가지입니다. 학문 또한 삶과 가깝지 못하고 돈과 권력하고 가깝고 만다면 전쟁하고 똑같습니다.

 

 총소리 울려퍼져도 전쟁이고, 총소리 없어도 전쟁입니다. 사랑스레 돌보며 어깨동무하는 삶이 아니라면 언제나 전쟁입니다. 사랑을 배우고 가르치며 나눌 수 없을 때에는 늘 전쟁입니다.


.. 전쟁을 일으킨 나라들은 자기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평화’는 핑계일 뿐이고, 다른 속셈이 있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 칼과 총은 서로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싸울 때 공정한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  (36, 80쪽)


 아이들을 입시경쟁으로 내모는 어버이는 전쟁을 일으키는 셈입니다. 아이들을 대학바라기에 가두는 어버이는 전쟁터 지휘자인 셈입니다. 입시학원을 열어 시험성적만 따지도록 이끄는 어른은 전쟁을 일으켜 돈을 버는 재벌기업하고 같은 셈입니다. 대입시험 이야기로 돈벌이를 일삼는 신문과 방송은 군수공장을 차린 재벌기업하고 같은 셈입니다. 입시공부 아니면 아무것도 못 가르치는 제도권학교 교사는 첨단무기 새로 만드는 과학자하고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삶을 바라보아야 해요. 삶을 사랑하는 눈길을 터야 해요. 삶을 사랑하는 눈길로 꿈을 키우는 마음을 북돋아야 해요.

 

 이런 지식 저런 지식은 덧없어요. 이런 졸업증 저런 자격증으로는 아이들이 즐거이 살아가지 못해요.

 

 아이나 어른이나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일을 누려야 해요. 아이나 어른이나 스스로 가장 기뻐할 만한 놀이를 함께해야 해요.

 

 좋은 삶이거든요. 좋은 하루이거든요. 좋은 이야기 꽃피우는 좋은 벗이거든요.


.. 과연 무엇이 문명이고, 무엇이 야만인가요? 수천 수만의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유럽 정복자들이 문명의 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전 세계 인구가 1년 동안 각각 128달러(약 12만 8천 원)를 군사비에 쓰는 셈입니다. 10억 명 이상이 하루에 1달러(약 1000원)도 못 되는 돈으로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 도대체 이 많은 돈이 어디로 가는 걸까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군인들에게 워러급도 주어야 하고, 무기를 개발하고 유지하는 데에도 돈이 듭니다. 전투기, 폭격기, 전차, 무인 전투기와 같은 첨단 무기를 제작하거나 구입하는 데에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  (55, 89쪽)


 자연은 누구한테나 너그러워요. 자연은 누구한테나 밥과 옷과 집을 내주어요. 자연은 몇몇이 홀로 차지하도록 내몰지 않아요. 자연은 스스로 사랑하는 삶을 아끼는 누구한테나 좋은 빛을 베풀어요.

 

 가난이 있는 까닭은 무엇이든 홀로 차지하려는 권력자와 지배자 때문이에요. 배고픔이나 굶주림이 떠도는 까닭은 사랑을 나눌 뜻이 없는 권력자와 지배자가 자꾸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이에요.

 

 살아가는 즐거움을 모르니까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거머쥐면서 이웃을 아끼지 않아요. 살아가는 보람을 등지니까 평화 아닌 전쟁으로 기울어요. 살아가는 멋과 맛을 누리지 않으니까 사랑을 깨닫지 않아요.

 

 나는 우리 집 아이들하고 좋은 보금자리를 일구면서 좋은 꿈을 꾸고 싶어요. 우리 집 아이들이 좋은 삶을 누리고 좋은 사랑을 먹으며 자라도록 마음을 쓰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 집 아이들을 보육원이나 유아원이나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으며 함께 지내요. 아버지인 나부터 집에서 일하고 살림을 꾸려요. 아버지로서 집에 머문다면 바깥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아주 적거나 아예 없기까지 하달 수 있어요. 그렇지만, 집에서 아이들이랑 복닥이며 얻는 웃음과 기쁨과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삶도 사랑도 사람도 돈으로는 사지 못하거든요. 비싼값 치르며 바깥밥 사먹는대서 기쁜 하루가 아니거든요. 자가용을 굴리지 못하는 살림이지만, 아이들이랑 나란히 걷고 뛰면서 즐거워요. 들길을 걷고 멧길을 걸어요. 들꽃을 보고 멧꽃을 봐요. 풀포기와 나무를 언제나 벗삼아요.

 

 집에서 아이들과 살아가기에 두 아이는 천기저귀를 쓸 수 있어요. 천기저귀는 아버지가 도맡아 손빨래를 해요. 환경이니 전쟁이니를 떠나, 아이들 몸을 헤아리며 즐거이 천기저귀를 써요. 아니, 천기저귀를 대고 천기저귀를 빨래하는 삶이 즐거워요. 아이들을 씻기고 아이들을 먹이며 아이들하고 얼크러지면서 날마다 새 마음이 될 수 있어요. 내 어린 나날을 돌이키고 아이들 앞날을 꿈꿀 수 있어요.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따사로이 재우고,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작은 가슴에서 샘솟는 좋은 씨앗을 느낄 수 있어요.

 

 전쟁을 막거나 그치도록 하자며 평화를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사랑을 꿈꾸거나 생각하면서 천천히 평화로운 나날을 누리거나 즐길 수 있구나 싶어요. 평화는 평화를 말하거나 외친대서 찾아오지 않으니까요. 평화는 평화로운 삶을 사랑하는 하루하루가 바로 평화일 테니까요. (4345.2.2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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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벼라, 인생 고박과 남쌤이 청소년들에게 들려주는 인생론 1
고성국.남경태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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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아이들은 푸르게 사랑해야지
 [책읽기 삶읽기 98] 고성국·남경태, 《덤벼라, 인생》(철수와영희,2012)

 


 이 나라 아이들 푸른 마음을 새까맣거나 잿빛으로 바꾸는 굴레는 대학입시라고 느낍니다. 대학입시 때문에 아이들 푸른 마음은 멍들거나 흐리멍덩해진다고 느껴요.

 

 대학입시는 대학교에 붙으려는 시험만이 아닙니다. 대학입시는 바로 고등학교 교육 얼거리요 중학교 교육 얼거리인데다가 초등학교 교육 얼거리예요. 더 살피면, 유치원과 어린이집부터 대학입시 굴레입니다. 이 나라에서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교육과 문화와 복지와 육아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대학입시 때문에 꽁꽁 얽매이거나 갇혀요.

 

 아이들은 아름다운 나날을 꿈꿀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사랑스러운 나날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입시 아닌 참다운 공부를 해야 하고, 대학입시 아닌 착한 삶을 배워야 해요.

 

 아이들은 어머니가 차리는 밥을 먹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밥을 차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급식을 먹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먹는 밥이 어디에서 어떻게 일구어 거두는가를 스스로 겪으면서 알아야 합니다.

 

 옳게 배우지 않으니 옳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옳게 부대끼지 않으니 옳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철학을 익히거나 역사를 다룬대서 사회를 올바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거나 책을 많이 읽는대서 사람과 삶과 사랑을 곱게 헤아리지 않아요.


.. 아는 만큼 안 사랑할 수도 있을 거 같아 … ‘성찰’하라는 말이 감정을 버리라는 말은 아니지. 인간은 자기가 느끼는 감정에 충실해야 해. 사랑도 나름의 합리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느낌을 존중하면서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 정말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회는 잘못될 수가 없어 ..  (26, 39, 55쪽)


 푸른 아이들은 푸르게 사랑하며 살아야 아름답습니다. 푸른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른들은 푸른 아이들한테 걸맞다 싶도록 푸른 어른답게 사랑하며 살아야 아름답습니다.

 

 푸른 어른들이 낳는 푸른 아이들이에요. 맑은 어른들과 살아갈 맑은 아이들이에요. 고운 어른들이랑 어우러질 고운 아이들입니다.

 

 착하지 않은 어른들 매무새는 착하지 못한 푸름이들 매무새로 이어집니다. 곱지 않은 어른들 말투는 곱지 못한 아이들 말투로 이어져요.

 

 다소곳하며 상냥한 어른들 몸가짐이기에 다소곳하며 상냥한 아이들 몸가짐이에요. 넓으며 포근한 어른들 마음씨인 터라 넓으며 포근한 아이들 마음씨예요.


.. 한순간 배설하듯이 풀고 가다 보면 스트레스는 사라질지 모르지만 문제는 계속 남아 있잖아. 오히려 깊어지지. 그러다 어느 순간 파국이 오는 수가 있다고 … 그 사람의 삶을 돈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서라도 가진 걸 베푸는 게 좋거든 ..  (36, 81쪽)


 고성국 님과 남경태 님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그러모은 《덤벼라, 인생》(철수와영희,2012)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아저씨 두 분이 주고받은 이야기처럼, 아줌마 두 분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책으로 그러모으면 참 재미있으리라 생각해요. 학문을 하고 책을 쓰는 아저씨들 이야기도 여러모로 푸름이한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는데, 학문하고도 책하고도 동떨어진 채, 날마다 밥하고 빨래하며 집살림 도맡는 아줌마 두 사람이 삶과 사랑과 사람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삶꽃 사랑꽃 사람꽃을 북돋운다면 얼마나 어여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마, 아줌마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책으로 엮는다 할 때에는 “덤벼라, 인생”이 아닌 “좋아라, 내 삶” 하는 실타래를 솔솔 풀지 않으랴 싶어요.

 

 참말 좋으니까 살아가는 나날이거든요. 참으로 좋아서 예쁘게 누리는 하루예요.


.. ‘여성성’이야말로 미래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해. 무엇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야 … 힘의 지배가 실행되면서 남성이 여성을, 같은 남성끼리도 강한 남성이 약한 남성을 지배하게 되잖아 … 죽음이 너무 멀리 있으면 삶을 성찰하는 게 어려워 … 죽음을 생각하고 자기를 돌아볼 때 우리의 삶이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  (47, 103쪽)


 만화책 《아따맘마》를 읽으며 생각했어요. 《아따맘마》에 나오는 아줌마는 학교를 오래 다니지 않았고, 책을 딱히 읽지 않으며, 날마다 집에서 살림하는 데에 온 품과 땀과 마음을 쏟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아줌마 이야기는 끝이 없어요. 하루하루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밭이에요. 언제나 남다른 이야기누리예요. 한결같에 빛나는 이야기꾸러미예요.

 

 아저씨들은 으레 ‘집안일 나눠 맡기’나 ‘아이 함께 돌보기’를 이야기합니다만, 아저씨 스스로 집안일을 도맡아 본다든지 아이를 홀로 돌보아 본다든지 하지는 않아요. 어쩌다 한 차례쯤 집안일을 하루 내내 하거나 어쩌다 하루쯤 아이를 홀로 돌볼 뿐이에요.

 

 우리 푸름이들한테는 어떤 이야기꽃이 예쁠까 헤아려 봅니다. 우리 푸름이들한테는 어떤 이야기열매가 맛날까 헤아려 봅니다. 우리 푸름이들한테는 어떤 이야기밥이 구수할까 헤아려 봅니다.


.. 특정 시기에 좋은 성적을 거두는 개념이 아니라, 내가 어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가장 기본적인 문제부터 생각해 봐야 하거든 … 대학입시와 군대가 한창 나이에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없게 하는 건 사실이야 …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부모에게서 독립해 진정한 개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필요해 여전히 정신적·경제적으로 부모에게 예속된 경우가 많잖아. 그러니 자기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고 스스로 설 기회가 없는 거지 ..  (107, 131, 233쪽)


 아무쪼록 푸름이를 곱게 사랑하는 어른들이면 좋겠습니다. 푸름이한테 이름값이나 졸업장이나 자격증이나 학문이나 철학을 바라기 앞서, 푸름이 누구나 고우며 맑게 사랑하는 길을 아끼는 어른들이면 고맙겠습니다.

 

 푸름이들이 굳이 대학교에 안 가도 즐거이 살아가는 길을 밝히는 어른들이면 기쁘겠습니다. 푸름이들이 대학교뿐 아니라 중·고등학교나 초등학교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조차 안 다녀도 아리땁게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어른들이면 반갑겠습니다. (4345.2.7.불.ㅎㄲㅅㄱ)


― 덤벼라, 인생 (고성국·남경태 글,철수와영희 펴냄,2012.2.10./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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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2-07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글이 있을 줄 알고 들러 봤지요. 아니나 다를까...ㅋ

덤벼라 인생, 그러면 무서울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네요.

도리를 아는 삶, 착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우리 모두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이 리뷰를 보고 새로운 다짐을 하고 갑니다. ㅋ

숲노래 2012-02-07 13:37   좋아요 0 | URL
좋은 길을 착한 마음으로 걷는다면
누구나 아름다운 삶이 되리라 생각해요~
 
달려라, 탁샘 - 탁동철 선생과 아이들의 산골 학교 이야기
탁동철 지음 / 양철북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즐거울까요
 [책읽기 삶읽기 97] 탁동철, 《달려라, 탁샘》(양철북,2012)

 


 강원도 양양과 속초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탁동철 님이 1998년부터 2010년 사이에 쓴 교사일기를 그러모은 《달려라, 탁샘》(양철북,2012)을 읽습니다. 탁동철 님은 “아이들한테 행복해지는 걸 가르칠 게 아니라 실제로 행복해 보기도 해야지, 노는 걸 가르치고 배우기만 할 게 아니라 실제로 놀아 보기도 해야지, 이건 뭐 하루 종일 가르치기만 하고, 하루 종일 배우기만 하고,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노는 시간이 하나도 없고……(304쪽)”처럼 이야기할 줄 압니다. 아이들과 글쓰기를 하면서 “본 대로 쓴 것은 잘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318쪽)” 하고 말할 줄 압니다. “사람 패는 버릇 고칠 거냐고, 고친다고 대답하면 나도 너 때린 것 사과한다고 했더니 녀석이 고친다고 해서 그럼 나도 너 때린 것 잘못했다고 했어요.(9쪽)” 하고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줄 압니다.

 

 교사일기 《달려라, 탁샘》(양철북,2012)은 초등학교 평교사로 일하는 어른 한 사람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배우는 나날을 꾸밈없이 드러내는 좋은 이야기꾸러미라고 느낍니다. 아이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삶을 보여주고, 아이들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삶을 찬찬히 적습니다.

 

 교사 탁동철 님은 섣불리 교육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교사 탁동철 님은 어설피 교사론을 드높이지 않습니다. 잘못이라고 느낀 일을 잘못이라 말합니다. 잘했다고 여긴 일을 잘했다고 말합니다.


.. 어수선하다. 그래도 첫날인데 ‘어떤 선생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으면 좋겠는데, 다들 별 관심이 없다는 얼굴이다 … 공부 시간에 왜 이런 문제도 모르냐고 나는 딱딱한 얼굴로, 사랑 없이 말했고 아이는 한숨을 쉬었다 … 옆에 있던 2학년 예원이가 “선생님은 왜 맨날 야단쳐요?” 한다. 참 야무진 말이다. 그 말 맞다 …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한쪽 길로 잡아끄는 것 또한 폭력이다. 반성했다 … 내 욕심만 없었다면, 그대로 보아줄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였나 ..  (17, 84, 131, 238, 279쪽)


 책을 펼쳐 찬찬히 읽으며 생각합니다. 내가 초등학생이고, 내 초등학교 담임으로 탁동철 님이 있다면, 나는 하루하루 즐거이 맞이할 수 있을까 하고.

 

 내 어린 나날 국민학교 적을 떠올립니다. 그무렵 국민학교 교사들은 왼손에 출석부 오른손에 몽둥이를 들었습니다. 어느 교사는 오른손에 몽둥이를 든 채 교실로 들어옵니다. 이런 교사가 수업을 할 때에는 당번이 교무실에 가서 미리 출석부를 챙겨야 합니다. 출석부를 미리 챙기지 않으면 맨 먼저 당번이 교탁으로 불리고 흠씬 얻어맞습니다. 다음으로 반장과 부반장이 불리고 이들도 똑같이 얻어맞습니다. 골마루를 울리는 달음박질 소리가 이어지고, 출석부를 받은 교사는 ‘날과 달과 요일’에 따라 번호를 외면, 이 번호에 따라 ‘복습 문제 묻고 말하기’를 합니다.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앞으로 불리고, 열 스물 서른이 줄줄이 앞으로 늘어서면,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빈 교사가 오른손으로 몽둥이를 쥐고는 엉덩이나 허벅지를 펑펑 두들겨팹니다.

 

 나는 내 국민학교 여섯 해를 떠올릴 때에 얼마나 많은 교사가 얼마나 많이 꾸짖고 윽박지르고 때리고 욕하고 했는가부터 떠오릅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담임을 맡다가 다른 학교로 옮긴 한 분만 몽둥이 없이 교실로 찾아와 한 차례도 때리지 않고 한 해를 보냈다고 떠올립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2학기부터 담임을 맡은 분은 가끔 때리기는 했으나 웬만해서는 소리를 높이는 일 없고 몽둥이를 드는 일 없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에 개구진 짓을 많이 하던 나는 이분 넉살이 좋아 뒤에서 몰래 업히듯 찰싹 달라붙으며 놀곤 했습니다. 아이들이 달라붙을 때에 성가셔 하지 않고 웃은 교사는 이때에 딱 한 번 만났습니다.

 

 강원도 양양과 속초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탁동철 님은 학교에서 아이들하고 어떻게 마주할까 궁금합니다.


.. 아무 일 없다는 듯 공부 시작하려는데 남자아이가 따진다. “왜 선생님 책상에는 우유 안 쏟고 우리 책상에만 우유 부었어요?” … 다른 학교에서는 다 하고 있는 급식을 우리 학교만 안 하게 된 것은 처음부터 부모님들이 급식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작년 2학기부터 학생 수가 늘어났고, 공수전분교도 급식을 하면 좋겠다는 말을 몇 사람한테 들었습니다. 저도 그게 옳다고 여겨서 올해는 급식이 되도록 해야지, 마음먹었습니다 … 정택이가 내 얼굴을 보며 “저희가 어떻게 하면 선생님 얼굴이 확 펴질까요?” 아, 미안. 잔뜩 굳었나 보다. 아이들도 고민이 많은데 학교에 와서 찌푸린 담임 얼굴을 또 보고 있어야 하는 건 불쌍하다 ..  (29, 126, 231쪽)


 교사일기 《달려라, 탁샘》에 차근차근 적은 이야기가 있을 테고, 이 교사일기에 미처 못 담았다든지 굳이 안 담은 이야기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탁동철 님은 아이들하고 살가이 어울리고픈 꿈을 날마다 새롭게 꿉니다. 그러나, 꽤 자주, 어쩌면 날마다 아이들 앞에서 찌푸린 낯이 되기 일쑤입니다. 아이들한테 괜히 목소리를 높입니다. 곧잘 아이들을 때리거나 윽박지릅니다. 교사 자리에 서면 예나 이제나 어쩔 수 없나, 남자 교사는 다들 ‘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나, 싶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참말 교사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길 일이 있어요. 아이들은 학교에서만 아이들이 아니라, 집에서도 아이들이고 마을에서도 아이들이거든요. 탁동철 님은 “나는 다가가서 멱살을 잡았다. 과장되게 화를 냈다. 겁먹고 고분고분 당해 줄 아이가 아니다. 나한테 덤벼들었다. 식식거리며 ‘그래서 어쩌라고요?’ 하며 주먹을 쥐고 노려보고 욕을 했다. 이대로 물러서면 끝장이다. 나는 더욱더 크게, 힘껏 소리 질러 가며 화를 냈다.(258쪽)” 하고 밝힙니다. 동무들한테 돌을 던지는 아이를 마주하며, 이 아이 돌팔매를 그치게 할 길이란 이때에 이러는 수밖에 없는지 모르니까요.

 

 참말 돌팔매 아이는 왜 돌팔매까지 해야 했을까요. 돌팔매 하던 아이는 왜 교사한테까지 욕을 하고 주먹을 흔들어야 했을까요. 이 아이는 집에서 어떤 아이로 살아갈까요. 이 아이는 마을에서 어떤 아이로 지낼까요.

 

 아이들은 몽둥이나 손찌검 맛을 보아야 좋은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오늘 어른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예전에는 어른들한테서 몽둥이 맛이나 손찌검 맛을 보았을 테니, 오늘 어린이로 살아가는 이들도 똑같이 몽둥이랑 손찌검 맛을 보아야 할까요.


.. 4학년 여자아이가 말한다. “아니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 들어요. 내가 그린 그림을 그냥 콱 찢어 버리고 싶어요.” 아, 그렇구나.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인가 … 밥 냄새 맡으며 공부하는 게 즐겁다 … 요즘 아이들은 그런 일 해 본 적 없다. 아이들이 일을 못해 본 건 어른 탓이다. 그러니 아저씨가 버럭 소리 질러야 할 대상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어야 한다 … 오늘은 신나는 시험 보는 날. 학생이야 고생스럽지만 선생은 할 일이 없다. 엉덩이 털썩 붙이고 앉아서 랄랄라, 시험 채점 마치고 나서 이렇게 쉬운 걸 왜 틀렸냐고 물어 보면 그만이다 ..  (37, 93, 250, 293쪽)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우유를 먹입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급식을 먹입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예방주사를 놓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교과서를 읽히고 시험을 치릅니다.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어른은 아이들한테 우유를 마시도록 이끕니다.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어른은 아이들이 줄을 맞추고 조용하며 얌전히 급식실에 앉아 찌꺼기 남기지 말고 그릇을 비우도록 이끕니다.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어른은 예방주사가 무엇이요 어떤 성분인가를 헤아리지 않고 모든 아이가 제때 맞을 수 있도록 이끕니다.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어른은 아이마다 다 다른 삶 다 다른 꿈인 줄 알기는 하더라도 다 같은 교과서 다 같은 지식 다 같은 학년과정을 이끕니다.


.. 광복이 덕에 처음으로 오소리 똥을 보게 되었다. 그걸 보더니 어떤 아이가 “나는 내일 토끼 똥 가져와야지.” 했다. 이거 좋은 공부가 되겠구나 … 오늘 아침에도 과자 너무 먹으면 뼈가 약해진다, 힘들어 번 돈을 함부로 까먹어서야 되겠나, 이야기를 하고 정 먹고 싶으면 일주일에 한 번만 먹으면 어떻겠냐 해서 모두 그러겠다고 하더니 아무 소용없다 … ‘그런 고통도 겪어 보고 분노도 느껴 봐.’ 눈을 부릅뜨고 그 모든 것을 살피는 것 또한 공부 아니겠나. 아니, 또 한편으로는 사람 막 대한다는 그따위 시시한 곳 과감하게 거부하고 자기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사람이 더 맞는 것 같기도 하고 ..  (46, 49, 188쪽)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집이나 마을에서 늘 아이들과 마주하며 삶을 가르치기 어려운 오늘날입니다. 따로 학교로 보내 따로 교사한테서 지식과 삶을 보고 배우도록 맡겨야 합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아이 나이와 몸과 마음을 그때그때 살피면서 아이와 어른이 다 함께 누릴 꿈과 사랑을 보듬기 어려운 오늘날입니다. 수학이든 국어이든 과학이든 영어이든 따로 전문 지식을 쌓은 이들한테서 배워야, 좋다 하는 대학교에 들어가거나 돈 많이 번다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오늘날입니다.

 

 아이들은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좋을까요. 아이들한테 하나라도 더 옳은 이야기를 보여주거나 가르치기 앞서, 아이들은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좋은가를 듣고 어깨동무해야 할 노릇이 아닐까요. 아이들이 앞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함께 찾고 알아보지 않고서, 학교 울타리 안팎에서 ‘좋은 지식’이나 ‘좋은 공부’만 찾는다면, ‘좋은 놀이’와 ‘좋은 꿈’만 생각하려 한다면, 참말 ‘좋은 무엇’부터 찾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달려라, 탁샘》을 덮습니다. 이 책은 교사일기입니다. 교사일기에서 내가 무엇을 더 바랐는가 곰곰이 헤아립니다. 제도권 울타리인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사람이 스스럼없이 하루하루 밝히는 틀을 넘어, 어떤 사랑과 꿈을 이야기 하나로 그리기를 바랐는가 하나하나 헤아립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해야 좋은지 생각해 봅니다. 학교에서는 좋은 교사를 만나 좋은 지식을 배워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은 졸업장을 따야 하고, 아이들은 더 높은 시험성적을 거두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은 참말 왜 학교에 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어른들은 왜 교사자격증을 따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서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왜 일기를 쓰며 하루를 뉘우치고, 교사는 왜 교사일기를 쓰며 아쉽거나 안타까운 대목을 뉘우치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런 울타리도 자격증도 이름값도 졸업장도 돈벌이도 없이, 서로서로 두레를 하고 품앗이를 하면서 예쁘게 살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습니다.

 

 탁동철 님 할머님은 “(밤) 까먹어. 이 좋을 때 부지래이 까먹어.(416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마따나 이가 좋을 때에 밤을 부지런히 까먹고, 눈이 밝을 때에 책을 부지런히 읽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응어리가 풀리지 않습니다. 탁동철 님은 강원도 양양과 속초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사랑씨앗을 심으려 했느냐 하는 응어리 한 가지가 풀리지 않습니다. 나는 이 대목 하나를 찾고 싶지만, 450쪽까지 읽고 한숨을 쉬며 책을 덮을 때까지 왜인지 모르게 답답합니다. 어떤 글을 쓰고 어떤 말을 하며 어떤 이야기로 서로서로 어깨동무할 때에 다 같이 즐거울까요. (4345.2.2.나무.ㅎㄲㅅㄱ)


― 달려라, 탁샘 (탁동철 글,양철북 펴냄,2012.1.2./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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