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슈 코르착의 아이들
야누슈 코르착 지음, 노영희 옮김 / 양철북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들’을 우리에 가두는 어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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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아이들
- 지은이 : 야누슈 코르착
- 옮긴이 : 노영희
- 펴낸곳 : 양철북 (2002.12.18)
- 책값 : 8500원

 


 ㄱ. 1942년 8월 6일


  유럽에서 큰 전쟁이 다시 터지고 유대사람이 하나둘 끌려가던 1942년 8월 6일, 야누슈 코르착 님은 아이들 손을 잡고 폴란드 거리를 걸었습니다. 고아원 교사 스테파니아 님도 아이들 손을 잡고 걷습니다. 나라가 보살피지 못하고, 사람들이 내버린 아이들은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책을 손에 들고 단출하게 옷을 차려입은 채 트레블링카 가스실이 마지막역인 화물차에 올랐습니다.


  코르착 님을 아는 동무들은 독일군 손아귀에서 코르착 님이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애를 썼지만, “당신 아이가 아프고 불행하고 위험한데 이 아이를 버리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2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꾸하면서 폴란드 거리 곳곳에 버려진 고아들을 거두어서 보살피다가 가스실로 갔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1904년에 의사 자격을 얻은 뒤 러일전쟁 때 군의관으로 징병된 코르착 님은 전쟁을 겪은 뒤, “전쟁은 참으로 혐오스러운 것이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굶주리고 학대받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국가든 참전하기 전에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이 다치고 죽고 고아가 되어야만 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사회를 개혁하려면 먼저 교육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편, 아이들이 어른들한테 빼앗기고 잃어버린 ‘우러름’, ‘사랑, ‘믿음’을 되돌려 주고자 애쓴 사람이 야누슈 코르착이라고 하는 폴란드사람입니다.


아이가 어른과 다른 점은 단 하나,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뿐입니다.
생계를 어른에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어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35쪽)


  “아이들을 알려고 하기 앞서 나부터 먼저 알려고 애쓰라”고 말하는 코르착 님입니다.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되었으나 의술만으로는 아픈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고 느껴 교육자가 되고, 고아원장이 된 코르착 님입니다. “비밀을 캐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는 비밀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어린이가 누려야 할 권리, 어린이한테 지켜 주어야 할 권리를 말하고, 몸으로 한껏 지키려 애쓴 코르착 님입니다.


아이가 숟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고 있을 때
그 숟가락을 빼앗아 버린다면,
단지 물건 하나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에너지를 분출하고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을 표현하던
손의 일부를 빼앗는 것입니다. (38쪽)


  우리들은 무엇을 하는 어른일까요. 우리들은 아이들이 무엇을 누리거나 얻도록 힘을 쓰거나 마음을 기울이는 어른일까요. 아이들 권리조차 지켜 주지 못하면서, 아이들 손가락에서 숟가락마저 빼앗아 버리는 못난이는 아닐는지요. 주먹을 들어 머리통을 내갈기거나 손바닥을 펴서 뺨따귀를 때리는 바보는 아닐는지요.

 


  ㄴ. 아이한테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아주 알뜰히 ‘좋은 책’을 기꺼이 사줍니다. 돈이 얼마가 들든 그다지 마음쓰지 않습니다. 아이가 이 책들을 다 읽어내고 속으로 삭히는지는 그다지 헤아리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들은 깜냥으로 끝없이 책을 사줍니다. 그런데 이런 ‘책 사주기’는 아이가 중학생이 될 때부터 끊어집니다. 이때부터는 학원교재, 문제집, 참고서, 학습지뿐입니다. 이제는 과외비에 돈 대느라 바쁩니다.


  책이 아닌 문제집과 참고서를 어버이한테서 받는 아이들은 대학바라기만 합니다. 아니, 대학바라기만 하라는 뜻으로 아이들한테 문제집과 참고서를 잔뜩 안기는 어버이입니다. 다른 책 들출 겨를을 주지 않습니다. 다른 책은커녕 영화나 연극을 느긋하게 누리도록 이끌지 않는 어버이입니다. 아니, 아이들한테 꽃내음이나 나무내음 맡도록 북돋우지 않는 어버이입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아이들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숲에서 멀어지고 들에서 멀어집니다. 바다와 하늘에서 멀어지는 아이들이요, 논과 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까맣게 모르는 채 교과서를 비롯해서 문제집과 참고서에 코만 박는 아이들입니다.


무슨 놀이를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노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놀이를 할 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느냐가 중요합니다. (42쪽)


  내 어릴 적에, 내 어머니가 책을 사주신 일은 아주 드뭅니다. 아버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어릴 적에 책을 얼마 안 읽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노느라 바빴거든요. 놀이란 놀이는 다 하면서 놀던 그때를 생각해 보면, 요즘 아이들은 우리에 갇힌 짐승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좁은 우리에 틀어박혀서 주인이 주는 밥만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짐승과 오늘날 아이들이 무엇이 다를까 잘 모르겠습니다. 좁디좁은 우리에 갇힌 짐승들은 이녁 삶과 달리 ‘사람 눈에는 더럽게 보이고 살도 디룩디룩 찝’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아이들은 머릿속에 지식은 많이 들어가지만 사람답게 자라나는 사랑과 꿈은 익히지 못하고 배우지 못해요.


  책을 푸짐하게 사주는 어버이가 그 책들을 아이와 함께 읽고 즐기나요? 아닙니다. 그런 어버이는 아주 드뭅니다. 어린이책에 담긴 깊고 너른 뜻을 제대로 헤아리는 어버이는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저 ‘아이가 어리니까 사서 읽히게 하는 것’뿐인 어버이가 거의 모두입니다. 교양이니 교훈이니 학습이니, 또 독서훈련이니 글쓰기지도이니 하는 이름에 휘둘려 아이도 어버이도 제자리를 모르고 제길하고 동떨어집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사람다운 길을 모릅니다.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사람다운 길을 잃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삶을 배우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스스로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과 꿈을 물려받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이녁 스스로 사랑과 꿈을 한껏 즐기거나 펼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집안일조차 안 하면서 큽니다. 아이들은 밥하기나 반찬짓기조차 안 하면서 자랍니다. 아이들은 걸레빨기나 설거지를 제대로 못 배웁니다. 아이들은 씨앗 한 톨 심어서 거두는 손길을 배우지 못할 뿐 아니라, 구경조차 못합니다. 아이들은 꽃내음과 나무내음을 모르면서 어른이 되는데, 어른들도 꽃내음과 나무내음이 이녁 몸과 마음에 어떻게 이바지하는가를 깨닫지 않아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하늘빛을 보지 않아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바람맛을 살피지 않아요. 어버이가 낳아서 아이가 태어나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커서 어른이 되면 사랑을 어떻게 하고 꿈을 어떻게 키워 이녁 ‘새 아이들’을 만날 때에 즐거운가를 모릅니다. 아이와 함께 누리는 밥과 옷과 집을 어떻게 건사할 때에 아름다운가를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못합니다.


  돈을 벌 생각과 돈을 쓸 생각만 하면서 자라는 아이요 어른입니다. 돈에 얽매이기만 하는 하루를 보내는 아이요 어른입니다. 삶이 이루어지는 바탕을 모르지요. 삶을 가꾸는 넋을 모르지요. 삶을 빛내는 눈길을 모르지요.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도
그 안에는 수백의 다른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은 서로 다른 난제이고,
서로 다른 과업이며,
서로 다른 염려와 관심을 베풀어야 할 대상입니다. (58쪽)

 


  ㄷ. 사람다운 길


  국제연맹은 1924년에 어린이 인권선언을 뽑고 얼마 뒤에 다시 선언글을 만들지만 ‘말’뿐인 껍데기였답니다. 코르착 님은 국제연맹 선언문이 있기 앞서부터, “선언문은 선의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강요해야 한다. 호의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코르착 님도, 코르착 님네 고아원 아이들도 죽은 지 기나긴 나날이 흘러 1989년, 비로소 ‘어린이 인권협정’이 새롭게 나옵니다. 지구별 여러 나라에서 ‘어린이 인권’을 법으로 다스릴 장치를 마련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인권협정이 있어도 한국에서 살아가거나 자라는 어린이들 모습은 ‘인권을 누리는 모습’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푸름이는 푸름이대로, 또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온갖 짐과 굴레에 갇힌 채 숨조차 제대로 못 쉬며 허덕여요. “사실은 어린이들은 인류, 국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이고, 현재 여기에 있는 사람들”인 줄 어른들이 모르기 때문일까요.


“엄마는 어른이 차를 엎지르면 ‘괜찮아요’라고
말하면서 내가 엎지르면 화를 내요!”
아이들은 불공평한 대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종종 울음을 터뜨리지만 어른들은
대수롭지 않고 성가신 것으로만 취급합니다.
그리고 무시할 만한 것으로 여깁니다.
“또 칭얼거리고 징징대네!”
이 말은 아이들에게 쓰려고
어른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53쪽)


  스스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웃과 동무 누구나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손길 내밀어 도울 줄 압니다. 스스로 사람답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이웃과 동무 모두 어떻게 지내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이웃을 바라봅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내 아이들과 지내는 모습입니다. 교육책이나 육아책 백 권 천 권 읽지 않아도 돼요. 먼먼 옛날부터 어버이 자리에 있던 이들이 책을 많이 읽었기에 아이들을 슬기롭게 가르치지 않았어요. 먼먼 옛날부터 어버이나 어른은 아이들 앞에서 삶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누리려 했을 뿐입니다. 아이들은 그저 어버이와 어른들 곁에서 물끄러미 삶을 지켜보면서 삶을 배우고, 하루하루 꿈을 키웠습니다.


  풀을 베고 열매를 얻으면서 삶을 배웁니다. 풀노래를 듣고 하늘숨을 마시면서 삶을 익힙니다. 냇물이 들려주는 노래와 바다가 베푸는 잔치를 맞아들입니다. 제비춤과 나비춤을 바라보면서 신나는 놀이를 깨닫습니다.


어린이가 어른의 잘못을 따지는 것을
우리는 싫어합니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눈치챌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56쪽)


  교사들이 학생들을 때립니다. 교사들은 ‘사랑 매’라느니 ‘체벌’이라느니 하면서, 마치 ‘교육’을 하는 듯 내세우지만, 교사들이 하는 짓은 교육이 아닌 ‘훈육’이거나 ‘훈련’입니다. 그저 아이들을 길들일 뿐입니다. 아이들이 주먹다짐과 발길질에 길들이도록 몰아세울 뿐입니다. 어른이라는 핑계로 아이들한테 낮춤말과 반말을 일삼습니다. 어른이라고 을러대면서 아이들을 때리고 꾸짖고 들볶고 괴롭힙니다.


  그런데, 이런 어른들 모습 가만히 보면, 술 마시고 담배 태우는 것밖에 할 줄 몰라요. 이 다음으로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극장에 가거나 자가용 몰고 관광지 찾아다니는 것밖에 할 줄 몰라요.


  우리 어른들은 오늘날 놀이를 즐기지 못하고 사랑을 나누지 못해요. 우리 어른들은 오늘날 이녁 스스로 수렁에 갇힌 채 허우적거리기만 해요. 즐겁게 웃지 않는 어른이요, 기쁘게 노래하지 않는 어른이에요. 삶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스스로 지어서 부르는 어른이 없어요.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대중가요를 따라부를 뿐이에요. 먼먼 옛날부터 어느 시골 어느 마을이건 누구나 일노래를 삶노래와 사랑노래와 꿈노래로 스스로 지어서 불렀는데, 이제 어느 도시 어느 동네에서도 스스로 삶을 노래하지 않고 사랑도 꿈도 노래하지 않아요.


  사람다운 길은 아주 사라졌을까요.

 


  ㄹ. 흐르는 냇물


  코르착 님이 들려준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한테는 예부터 내려오는 훌륭한 말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어요. 윗물, 그러니까 어른들이 맑고 빛나며 아름다워야 아랫물인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배우고 따르고 우러르고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시원한 윗물일 때에 시원한 아랫물입니다. 따사로운 윗물일 때에 따사로운 아랫물입니다. 착하며 참다운 윗물일 때에 착하며 참다운 아랫물입니다.


  청소년범죄는 청소년이 못나거나 말썽만 일으키기에 터지는 범죄가 아닙니다. 어른들이 저지르는 온갖 범죄를 흉내내고 따라하는 범죄입니다. 청소년들이 범죄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터전을 만들고 만 어른들 탓입니다. 남녀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재산차별, 생김새차별, 지역차별, 학력차별이 곳곳에 퍼진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느끼면서 자랄까요. 이렇게 ‘차별 넘치는 나라’에서 동무들끼리 따돌리고 괴롭히는 짓이 안 생길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무심한 어른은 화가 났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이 물건들을 꺼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머니가 늘어진다거나 서랍 속에 복잡하다는 이유로요. 다른 사람의 소중한 재산을 이런 식으로 매정하게 다룰 수 있나요?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아이가 다른 사람이나 물건을 존중하는 마음을 배우겠어요? 그것은 쓰레기통에 들어갈 휴지 조각이 아니라 소중한 물건이고, 눈부신 꿈의 조각입니다. (131쪽)


  아이들을 아이들답게 받아들이고 껴안으며 토닥거리면서 감쌀 수 있는 마음이 소담스럽습니다. 고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마주할 때에 아이들이 좋아하는데, 아이들에 앞서 어른부터 스스로 좋아요.


  고운 마음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면 어른 스스로 즐겁습니다. 어른 스스로 즐겁게 삶을 누리면, 사회에 어두운 기운 서리지 않아요. 어른 스스로 즐겁게 삶을 누리지 않으니, 이 나라 이 사회 이 마을 이 학교에 갖가지 어두운 기운이 또아리를 틉니다. 어른들 스스로 잔뜩 만들어 놓은 ‘차별’이라는 굴레 때문에 아이들이 슬피 우는데, 이 울음소리를 못 듣거나 안 듣는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다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낮과 밤, 여름과 가을, 젊은이와 늙은이가 있고,
뜰에는 나비가, 하늘에는 새가 있고,
꽃 색깔이나 사람들 눈 색깔이 저마다 다르듯이
신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였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만 차이를 싫어하고,
생각하고 들여다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다양성을 불편해 합니다. (146쪽)


  배움책 《아이들》(양철북,2002)에는 코르착 님이 우리한테 건네는 속깊은 이야기가 담깁니다. 허리를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길 바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허리를 굽히지 말아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서로 같은 키가 되어 같은 눈높이가 되셔요. 아이들은 차별이나 따돌림도 싫어하지만, 허리를 굽실거리거나 알랑거리는 사람도 못마땅해요.


  아이들은 짐승우리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어른들도 짐승우리에서 살고 싶은 생각 없으리라 느껴요. 아이들은 따순 보금자리에서 살고 싶어요. 어른들도 따순 보금자리에서 살 때에 즐거우리라 느껴요.


  사랑받고 싶은 아이들이고, 사랑을 나누고 싶은 아이들이에요. 어른들도 사랑받을 때에 흐뭇하고, 어른들도 이웃하고 사랑을 나눌 때에 하하호호 웃음꽃 터뜨리면서 삶이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리라 느껴요. 아이들과 걸어갈 길에서 씩씩하게 두 손 맞잡으면서 노래해요. 아이들과 가꿀 길을 맑은 눈빛과 밝은 꿈으로 보듬어요. 4337.11.8.달/4346.8.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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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8-04 0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책 중 하나랍니다. 함께살기님의 이 글도 참 좋네요. 부모가 일방적으로 골라서 사다준 수십권의 책 속에 파묻힌 요즘 아이들보다 어쩌면 책 몇권 없이도 맘껏 뛰어놀고 크던 예전 아이들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 공감하고 또 반성해보게 됩니다.

숲노래 2013-08-04 04:21   좋아요 0 | URL
이 글은 2004년에 처음 썼어요. 그무렵 쓴 글 뼈대는 거의 그대로 두고, 지난 열 해 동안 새로 배운 '우리 말'에 따라 군데군데 손질을 하고 살을 살짝 덧붙였어요. 둘레에 교사가 되고 싶다 하는 사람 있으면, 맨 먼저 이 책을 읽어 보라 하고, 다음으로 이오덕 선생님 책 읽어 보라고 얘기해요.

오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어른들은 모두 어릴 적 즐겁게 뛰놀던 아이로 살았으리라 생각해요. 오늘 행복을 제대로 못 누리거나 잊은 어른들은 모두 어릴 적 즐겁게 뛰놀지 못한 채 학교공부만 죽어라 해야 했던 분들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러니까... '어른이 되어도 놀아야' 하는걸요... 술 담배 외식 살곶이 관광여행 취미여가 말고, '놀이'를 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 하는걸요...
 
동시란 무엇인가
최지훈 글, 박경희 그림 / 비룡소 /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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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37

 


평론이 할 일
― 동시란 무엇인가
 최지훈 글
 민음사 펴냄,1992.10.20./7000원

 


  아름다움을 그릴 때에 문학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그리지 않을 때에는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은 예쁘장한 빛깔이나 무늬가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비싼 보석이나 옷차림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사랑스레 나누는 웃음과 눈물입니다. 아름다움은 살가이 주고받는 이야기입니다.


  즐겁게 웃으며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모습이 모두 아름다움입니다. 슬퍼서 울지만 씩씩하게 일어서며 새 길 꿋꿋하게 걸어가는 여느 사람들 하루가 모두 아름다움입니다. 환한 노래를 불러 따사로운 마음 나누는 사람들 삶이 모두 아름다움입니다. 따사로운 손길이 아름다움이요, 너그러운 눈길이 아름다움입니다. 나뭇가지 뭉텅뭉텅 자르고 이리저리 휘도록 억지로 만든 가녀린 소나무는 아름다움이 아니에요. 이렇게 괴로운 나무는 그만 비싼 값에 사고팔리는 상품이 되고 말아요. 아름다운 숨결 되도록 태어난 나무인데, 바보스러운 사람들 손을 타면서 아픈 생채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 아픈 생채기를 보듬는 누군가 있으면, 새삼스레 아름다움으로 거듭납니다. 권력을 노리거나 이름값에 사로잡히거나 돈에 휘둘리는 슬픈 사람들을 살살 타일러 착하면서 참다운 길로 접어들도록 이끄는 누군가 있으면, 이 또한 아름다움이에요.


..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때 그 어린이들은 우리의 새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튼튼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몸을 튼튼히 하면서 정직한 마음들을 가꾸며 자랐습니다. 어려운 시절, 전쟁까지 겪으면서도 꺾이거나 절망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고 가꾸어 오늘날 세계에 자랑하는 훌륭한 나라를 이룩한 어른들이 되었고,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이 노래를 배우고 즐겁게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우리 나라는 언제나 싱싱한 새라나이며, 이 노래를 부르는 어린이는 서로 돕고 정직하게 자라면서 싸움하지 않는 평화의 나라를 지켜 가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유명하고 훌륭한 노래를 지으신 분도 육석중 선생입니다 ..  (16쪽)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밝히면 평론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 하고 보여줄 때에도 평론이 됩니다. 어떤 예술 흐름이나 문예 흐름에 따라 재거나 따진다고 해서 평론이 되지 않습니다. 문학은 동심천사주의도 아니고 사실주의도 아니며 현실주의니 이상주의도 아닙니다. 문학은 그저 문학이지, 문학에 다른 이름을 붙이지 못해요.


  그림이나 사진이나 노래나 춤을 바라볼 때에도 이와 같습니다. 그림은 그림일 뿐입니다. 사진은 사진일 뿐입니다. 물감으로 그리거나 연필로 그리거나 크레파스로 그리거나 모두 그림입니다. 붓으로 그리거나 먹으로 그리거나 모두 그림이에요. 목탄이나 숯으로 그려도 그림이며, 모래밭에 나뭇가지로 그려도 그림이지요.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 모두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 자락 실어서 보여줍니다. 곧, 아름다움을 보여주기에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고,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을 적에는 이야기 한 자락 나눌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겉이나 틀, 한자말로 하자면 형식으로는 문학 꼴이나 그림 꼴이나 사진 꼴을 갖추었어도,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면, 문학이 될 수 없고, 그림이 될 수 없으며,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문학평론이라면,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밝힐 때에만 문학평론입니다. 예술 흐름이나 문예 흐름을 놓고 재거나 따지면 연구논문이에요. 이런 글은 학술논문입니다. 이런 글에는 ‘평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연구논문은 연구논문이지 평론이 아닙니다. 학술논문은 학술논문일 뿐, 문학평론이 되지 않아요.


  문학평론으로 주고받을 글을 쓰고 싶다면, 스스로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 하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 깃든 문학을 읽으면서, ‘문학 즐김이’로서 어떻게 문학을 즐기면서 내 삶에 어떠한 새 이야기 샘솟는가 하는 대목을 밝히면 됩니다.


.. 동요시는 일제 강점기부터 6·25전쟁 이후까지 활발하게 발표되었으나, 5·16 이후에는 자유시로서 동시가 왕성하게 발표되었고, 동요시는 20년 동안 푹 쭈그러들었습니다. 새로운 동요시의 발표가 없으니 좋은 새 동요 가사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동시는 세련되었으나 어린이들이 쉽게 즐기기엔 무리한 점이 많았고, 새로 불리는 동요 가사들의 대부분은 시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  (62쪽)


  칭찬을 하는 글은 칭찬글입니다. 추켜세우는 글은 추켜세움글입니다. 기리는 글은 기림글입니다. 칭찬글이나 추켜세움글이나 기림글은 평론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문학작품을 읽고서 참 좋았다고 느껴, 이렇게 좋은 문학작품 내놓은 사람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겠지요, 하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글은 칭찬글이나 추켜세움글이나 기림글이에요. 이런 글을 쓰면서 섣불리 평론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돼요.


  평론이란 아주 다른 글이에요. 그렇다고 평론은 차갑게 쓰는 글이 아닙니다. 아무나 못 쓰는 글도 아니면서, 아무렇게나 쓸 수 없는 글이 평론입니다. 칭찬에도 추켜세움에도 기림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쓸 수 있을 때에 평론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떻게 아름다우며 어떤 이야기인가를 밝히는 한편, 내 삶에서 어떤 아름다움과 새 이야기가 샘솟는가를 드러내는 글에는,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칭찬이나 추켜세움이나 기림이 끼어들지 못하겠지요.


  평론글은 수수하게 쓰기 마련입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수수한 자리에서 샘솟거든요. 평론글은 투박하게 쓰기 마련입니다. 즐거이 나누는 이야기란 서로 투박하게 주고받는 말씨에서 자라거든요.


.. 대개 시인은 시를 쓸 때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아껴서 나타냅니다. 깊고 큰 생각이라도 될수록 적은 수의 말로 나타내어야 좋은 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의 시어에는 수많은 생각과 느낌을 담게 됩니다. 시를 이해하기 힘든 까닭도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시를 어렵게 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해하기 쉬울수록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짧은 글 속에, 큰 생각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담는 일, 그것이 시를 빚는 기본입니다. 그러나 정작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율격으로 된 형태에 있습니다. 짧은 글 속에 큰 뜻을 담은 말이라면 속담이나 격언이나 경구나 표어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시가 될 수 없는 것은 율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  (74∼75쪽)


  최지훈 님이 한국 동시 작가 이야기를 적은 책 《동시란 무엇인가》(민음사,199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최지훈 님은 1977년에 문덕수·이재철 추천으로 아동문학평론가로 되었다 하며, 《동시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1986∼1988년 사이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는 열다섯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윤석중, 권오순, 신현득, 이오덕, 유경환, 김종상, 박경용, 석용원, 김녹촌, 문삼석, 최춘해, 김구연, 공재동, 전원범, 정두리, 이렇게 열다섯 사람입니다.


  열다섯 사람을 이야기하며 붙인 글이름을 보면, ‘노래 할아버지 윤석중 선생’, ‘통일을 기원하는 만년소녀의 기도’, ‘동요시의 즐거움’, ‘평화를 갈구하는 시정신’, ‘인간을 살리는 자연’, ‘땀에 젖은 무명치마’, ‘어른은 모르는 불빛과 빛깔’, ‘썩어야 다시 사는 생명’, ‘바닷마을, 산마을’, ‘이슬의 노래’, ‘생명의 젖줄, 흙의 노래’, ‘사랑과 그리움’, ‘별, 풀잎, 이슬 그리고 새’, ‘꿈의 공을 차라’, ‘물음표 시인의 정결한 행복’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 《동시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자꾸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맙니다. 이 책을 평론책이라 할 만한지 알쏭달쏭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작가 작품인가를 떠나, 〈새나라의 어린이〉라는 동요를 어릴 적부터 익히 들었고, 학교에서는 이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지만, 나는 하나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가 무엇이 좋은지 알 노릇이 없는데, 어느 어린이라 하더라도 잠꾸러기가 될 턱이 없습니다.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아이들 가운데 잠꾸러기는 거의 없습니다. 아니, 없다시피 합니다. 아이들은 늦게까지 놀고, 아침에 또 일찍 일어나서 놉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일이 많아 바쁘면, 아이들은 퍽 어린 나이에도 어버이 일손을 거듭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아이들은 스스로 나서서 어버이 곁에서 도우면서 살아요. 나는 국민학생 때부터 〈새나라의 어린이〉 같은 동요나 동시가 거짓말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어린이)한테 어른이 들려줄 말이란 고작 이뿐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퐁당 퐁당 돌을 던져라’ 하는 동요를 어른들이 부르라 하니 어쩔 수 없이 부르지만, 도시에는 냇물이 없는데 이런 노래 불러서 뭐 하자는 뜻인지 알 수 없었어요. 냇물에서 누나가 나물을 씻는다니, 이런 모습을 본 적도 없는데, 노랫말만 이쁘장하게 붙인 셈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우리(어린이)를 얕잡거나 낮추어 본다 하더라도 이렇게 바보스레 얕잡거나 낮추어도 되는가 궁금했어요.


  내가 즐기던 동요로는 〈고향의 봄〉과 〈겨울나무〉가 있어요. 두 가지 노래에 나오는 이야기도 도시 아이였던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길을 이 동요에서 읽을 수 있었어요. 다만, 어릴 적에는 〈고향의 봄〉과 〈겨울나무〉를 쓴 사람 이름을 몰랐고,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동요를 쓴 사람 이름을 제대로 알았으며, 이 동요를 쓴 사람 작품도 어른이 된 뒤에 처음으로 읽었어요.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하는 동요도 재미나게 부르면 깜찍하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래는 두 번 세 번 부르면 머리가 아파요. 이야기가 보이지 않고, 그저 이쁘장한 말만 죽 늘어놓으려 하니, 마음으로 와닿지 않아요. 우리 집 두 아이한테는 이런 동요 불러 주지 않기도 하지만, 누군가 이런 동요 불러 준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런 동요는 ‘동심천사주의’조차 아니라고 해야 하는구나 싶어요. 아이들을 철부지나 인형으로 삼는 슬픈 어른들 허수아비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야지 싶어요.


  어린 두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나는 아이들한테 이원수 님 동시에 가락을 입힌 〈햇볕〉 같은 작품을 날마다 여러 차례 부릅니다. “햇볕은 고와요,하얀 햇볕은, 나뭇잎에 들어가서 초록이 되고, 봉오리에 들어가서 꽃빛이 되고, 열매 속에 들어가선 빨강이 돼요.” 하는 노랫말에서 이야기를 느끼고 사랑과 생각과 꿈을 읽습니다. 그렇구나, 햇볕이 이렇게 고운 손길로 나무와 풀을 살리고 꽃과 열매를 맺으니, 사람들도 아름답게 삶을 누리는구나, 사람들은 서로서로 햇볕 같은 마음씨로 어깨동무할 때에 즐겁겠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원수 님 동시 〈겨울 물오리〉도 아이들한테 날마다 들려주는 동요이자 동시입니다.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나도 이젠 찬 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하는 노랫말에서 삶을 느끼고 웃음과 눈물을 함께 깨닫습니다. 그렇구나, 오리들은 한겨울에도 얼음장에서 노는구나,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오리뿐 아니라 다른 짐승들은 어떻게 지내지, 또 풀과 나무는 겨울을 어떻게 나고, 씨앗은 새봄을 어떻게 기다리는가, 하고 곰곰이 헤아려요. 아이들한테 이 동요와 동시를 들려주면서도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자꾸자꾸 틔웁니다.


.. 박경용 시인은 1960년대 이래 신현득·유경환·김종상 시인 들과 더불어 우리 나라 동시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린 분입니다 … 박경용 시인은 동시뿐 아니라 어른을 위한 일반 자유시도 쓰고 시조도 열심히 발표했기 때문에 그 방면에도 만만치 않은 업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어린이를 위한 시조, 이른바 동시조를 처음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조 운동을 열심히 펼쳐 나가기도 했습니다 ..  (127쪽)


  최지훈 님이 쓴 《동시란 무엇인가》에서 이원수 동시를 미처 못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윤동주와 백석, 권태응과 권정생 동시를 아직 못 다루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최지훈 님은 시와 동시를 아이들한테 어떻게 밝히려 하는지 좀 궁금합니다. “정작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은 율격으로 된 형태에 있습니다(75쪽)” 하고 말하는데, 율격이란 무엇일까요. 율격이라 하는 틀(형식)이 없으면 시도 동시도 동요도 될 수 없을까요.


  그러면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빚는 한국 동시와 시에서 율격은 어떤 틀을 보여줄까요. 아쉽게도, 최지훈 님이 쓴 《동시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는 한국 동시와 시에서 갖출 율격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밝히지 않습니다. 3·4조나 4·4조나 7·5조가 어떻게 해서 태어나고, 이러한 율격은 한국말 빛깔과 어떻게 어울리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합니다.


  율격을 곰곰이 살피면, 율격은 글을 읽는 사람 스스로 빚습니다. 낱말 숫자가 4·5나 4·6으로 이루어졌어도, 읽는 사람으로서는 4·4나 3·4로 얼마든지 읽을 수 있어요. 율격은 글잣수가 아니에요. 율격은 마음으로 그리는 가락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글잣수로는 율격을 따지지 못해요. 글을 쓴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이 마음속으로 찬찬히 가락에 맞추면서 율격을 누립니다. 생김새만으로는 율격을 이야기할 수 없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생김새만으로는 율격을 이야기할 수 없기에, 율격은 처음부터 따질 까닭이 없기도 하고, 율격은 작가와 독자가 얼마든지 새롭게 지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동시 작가들이 동요를 널리 짓지 못한다 하더라도 작곡가들이 아름다운 동시에 아름다운 가락을 입히면 아름다운 동시이면서 동요가 돼요. 이런 모습은 백창우 님이 아주 잘 보여줍니다. 율격이나 운율이 겉으로 드러나기에 아름다운 동요 가락을 짓지 않아요. 동시에 깃든 아름다운 이야기를 느껴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름다운 가락으로 옷을 입히니 아름다운 동요가 됩니다.


  평론이란,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밝히는 글이라고, 또한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 하고 보여주는 글이라고, 앞서 이야기했어요. 동요란, 아름다움을 그리는 문학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가락을 입혀서 밝히면서 태어나는 열매입니다. 아름다움을 그린 문학을 어떻게 즐겼는가를 가락을 입혀서 보여주기에 동요가 태어납니다.


  모든 실마리는 아름다움과 이야기에 있어요. 아름다움을 밝히고 이야기를 찾자는 뜻에서 쓰는 글인 평론입니다. 아름다움인지 아닌지 밝히지 못한 채 칭찬만 한다면 평론이 아닌 칭찬글입니다. 칭찬만 하는 글이란 문단을 이리저리 줄세우기 하듯 쪼갭니다.


  최지훈 님은 “박경용 시인은 1960년대 이래 신현득·유경환·김종상 시인 들과 더불어 우리 나라 동시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린 분입니다(127쪽)” 하고 말하기는 하지만, 최지훈 님은 ‘동시 수준’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고, ‘높은 동시 수준’이란 무엇인지 얘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 때에 이 나라 동시 눈높이가 올라갈까요? 동시 눈높이는 왜 높이 올라가야 할까요?


  아이들이 즐겁게 누리면서 어른들은 이 나라 삶과 삶터와 삶자락을 아름답게 일구는 몫 즐거이 맡으면 될 노릇 아닐까요?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밥을 동시라는 그릇으로 나누어 주려는 어른일까요? 동시 평론을 할 적에는 아이들 삶을 꾸밈없이 바라볼 뿐 아니라, 슬기롭게 살펴보면서, 아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똑똑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시지옥이 고스란히 있고, 사회차별과 분단과 불평등이 언제나 드러나는 이 나라에서,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아이들은 어떻게 기운을 내야 하는가를 함께 밝힐 때에 비로소 문학도 되고 평론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 어린이는 설움에만 젖어 있을 수 없습니다. ‘미래의 인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새 세계를 열어야 할 생명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이는 아무리 기림을 받고 격려를 받아도 부족합니다. 어린이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날기도 하고, 꽃과 같이 아름다움도 창조하고, 창공 높은 곳에 이상으로 빛나는 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254쪽)


  ‘미래의 인간’과 ‘희망’과 ‘설움’이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새 세계’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최지훈 님이 《동시란 무엇인가》를 쓴 때는 1986∼1988년입니다. 이무렵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는가요? 이무렵 한국에서 동시를 쓴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들려주려 했는지요?


  최지훈 님은 책 머리말 첫 줄에서 “나는 여의도 광장 같은 데서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활발하게 도는 아이들을 보면 참 건강하고 씩씩하게 보여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5쪽).” 하고 말합니다. 뛰노는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튼튼하고 씩씩해 보일 테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여의도 광장 같은 데 빼고 어디에서 이렇게 놀 수 있나요? 서울이나 큰도시 아이들은 몇 군데 광장 빼놓고 어디에서 홀가분하게 뛰노는가요? 아니, 서울이나 큰도시 아이들은 제대로 뛰놀 겨를조차 없이 학원과 입시에 어린 나이부터 휘둘리지 않나요? 시골 아이들도 시골에서 뿌리내리며 사는 길이 아니라 도시로 내몰리거나 떠나게끔 등떠밀리지 않나요?


  어린이문학평론이라 하는 《동시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으며 어린이문학과 평론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어린이문학은 어떤 길로 나아갈 때에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고 곱씹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평론하는 글은 사회와 나라와 교육과 문화와 삶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어떤 이야기를 빚을 때에 즐겁게 나눌 만한가 하고 되새깁니다. 4346.7.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어린이문학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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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일기 세트 - 전5권 이오덕 일기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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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일기> 다섯 권 느낌글을 모두 마무리짓습니다. 이제 다섯 가지 느낌글을 한 자리에 모둡니다. 즐겁게 천천히 살피시면서, 이 책에 깃든 넋과 꿈과 사랑 잘 받아먹으시기를 빕니다. 마지막 느낌글을 올리면서 다섯째 권 느낌글에는 '이제껏 공개 안 한 여러 사진'을 붙였습니다. 모둠 느낌글에도 이제 비로소 보여주는 사진을 몇 가지 붙입니다. 아무쪼록 이 책들 널리 사랑받기를 빌면서, 사람들 가슴에 고운 빛줄기 샘솟는 밑거름이자 책동무로 삼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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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aladin.co.kr/hbooks/6428075 (갑갑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빛)

이오덕 일기 1 :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http://blog.aladin.co.kr/hbooks/6437083 (오직 마음속 사랑만 생각하며 산다)

이오덕 일기 2 : 내 꿈은 저 아이들이다

 

http://blog.aladin.co.kr/hbooks/6443845 (서로 배우는 아이와 어른)

이오덕 일기 3 : 불같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


http://blog.aladin.co.kr/hbooks/6457789 (‘죽은 말’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오덕 일기 4 : 나를 찾아 나는 가야 한다

http://blog.aladin.co.kr/hbooks/6484851 (숲으로 가는 길)
이오덕 일기 5 : 나는 땅이 될 것이다

 

 

 

 

 

 

 

 

 

 

 

 

 

 

이오덕 선생님 사진과 원고는 제가 선생님 원고를 정리하던 때에 스캔한 파일이고,

선생님 무덤과 집과 방은 제가 찍은 사진입니다.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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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7-2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살기님 덕분에, 좋은 책과 느낌글 귀한 자료와 사진까지 잘 받아
마음에 새기며..오래오래 찬찬하고 기쁘게 <이오덕 일기> 책동무 삼겠습니다. ^^
여러모로 애쓰셨고 마음밥, 마음빛..함께 나누어 주시어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

숲노래 2013-07-24 11:26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책동무가 곁에 있으면
하루하루 삶이 새롭게 빛나리라 생각해요~
 
오래된 흙벽집 하늘파란상상 2
이상교 글, 김원희 그림 / 청어람주니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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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36

 


사람은 나면 시골로 보내야
― 오래된 흙벽집
 이상교 글,김원희 그림
 청어람주니어 펴냄,2009.7.7./9000원

 


  어린이와 젊은이가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갑니다. 시골에는 늙은 사람만 남습니다. 도시로 간 어린이와 젊은이는 학교를 다니거나 회사에서 돈을 법니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나 푸름이는 흙일을 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회사를 다니는 어른도 흙을 만질 겨를이 없습니다. 도시 아이와 어른 모두 돈을 내고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를 가게에서 사다 먹습니다. 시골에 남은 늙은 사람은 늘 흙을 만지며 일굽니다. 그러나 일손이 모자라거나 힘이 달린 나머지, 농약과 비료를 자꾸자꾸 씁니다. 시골에 젊은 일손이라도 있으면 농약과 비료를 덜 쓸 만하지만, 시골에 남은 젊은 일손이래서 똥오줌 거름을 삭혀서 쓰려는 생각을 키우지 못합니다. 1960∼70년대부터 풀지붕 없애고 흙길 밀며 논도랑을 시멘트로 바꾸는 따위로 시골사람 길들인 탓에, 이제 시골에서 똥오줌 거름 잘 삭혀서 젊은이한테 가르치거나 물려주는 어르신은 매우 드물어요. 소몰이를 가르치거나 물려줄 어르신도 아주 드뭅니다. 시골에서도 돈을 벌어 농기계를 장만해야 하고, 돈을 더 벌어 농기계 움직일 석유값 대어야 합니다.


  갈수록 텅 비는 모습이 되는 시골에는 어린이와 젊은이가 돌아와야 합니다. 흙을 아끼며 사람과 지구를 사랑할 마음 키우고 싶은 어린이와 젊은이가 시골로 돌아와야 합니다. 돈 될 만한 농사짓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닌, 스스로 집을 짓고 옷을 지으며 밥을 짓는 즐거움 흐뭇하게 누리면서 아이들한테 물려주거나 가르치고 싶은 어른들이, 바로 시골로 돌아와야 합니다.


  시골은 물이 맑아야 시골입니다. 시골은 바람이 시원해야 시골입니다. 시골은 햇살이 따스해야 시골입니다. 시골은 풀빛이 가득하고 나무가 우거져야 시골입니다. 곧, 시골에서 냇물과 땅밑물 맑게 마실 수 없다면 시골이랄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 시원한 바람 어디에서나 맛나게 마실 수 없다면 시골이랄 수 없어요. 농약 때문에 냇물과 땅밑물을 못 마신다면, 농약 뿌리는 냄새 때문에 창문을 열 수 없다면, 이런 곳은 시골이 될 수 없어요. 풀밭이 없거나 숲이 없을 때에도 시골이랄 수 없지요.


.. 삼촌을 따라 집 구경을 갔던 삼촌 친구 종도 아저씨도 똑같이 말했다고 했다. “삼촌, 왜 하필 그런 집으로 이사했어?” 그런 집 말고도 깨끗하고 살기 좋은 집이 많을 텐데, 싶었다. “벽이 진흙으로 발려 있어 맘에 들었거든.” 꼬라비 삼촌은 생각도 하지 않고 단숨이 대답했다. “흙벽?” … “무슨 새인데, 참새?” 내 머릿속에서 참새 한 마리가 폴짝 날아올랐다. “재현이 넌 새라면 그저 참새밖에 모르지?” ..  (12∼14, 16쪽)


  예부터 어떤 사람들이 얄궂은 말을 퍼뜨렸습니다. 이른바,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라”와 같은 말입니다. 참 엉터리라 할 말입니다만, 오늘날에도 이 말이 널리 뿌리내립니다. 부산이나 대구나 인천처럼 커다란 도시에서조차 이런 도시에 안 남고 서울로 가야 무언가 번듯하게 할 수 있는 듯이 잘못 생각해요. 오직 서울바라기요, 그예 서울바라기입니다.


  서울이 커지면서 시골이 줄어듭니다. 서울이 커지며 서울사람 쓸 공산품과 전기와 물이 모자라다 보니, 시골에 공장을 짓고 댐을 지으며 발전소를 짓습니다. 서울만큼 커지고 싶은 부산이며 대구이며 인천이며 광주이며 대전이며 울산이며, 곳곳에 도시가 자꾸자꾸 커지니, 이런 큰도시와 서울을 이으려는 고속도로를 자꾸자꾸 닦습니다. 고속도로 닦으며 시골마을 무너지고 둘로 쪼개집니다. 발전소 시골에 세워 큰도시로 전기를 보내면서 논밭과 숲에 우람한 송전탑 섭니다. 깨끗한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를 바라는 도시사람이지만, 그러니까 유기농이니 무농약이니 친환경이니 하고 바라는 도시사람이지만, 정작 시골마을 깡그리 무너뜨리거나 짓밟습니다.


  고속도로를 내는 도시사람은 시골마을 무너뜨려요. 4대강사업 하나 갖고 시골마을 무너지지 않습니다. 고속도로, 고속철도, 공장, 발전소 따위가 나란히 시골마을 무너뜨립니다. 조금 깨끗하고 조용하다 싶으면 관광지로 만들겠다며 삽질을 해대니 시골마을 망가집니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남 고흥은 바닷가 어디나 다도해 국립공원에 들 만큼 정갈하며 좋은 삶터였지만, 차츰차츰 바닷가 ‘국립공원 지역’을 슬그머니 풉니다. 이러면서 바닷가에 시멘트로 옹벽을 세우지요. 그저 개발짓이고 그저 삽질입니다.


.. 나는 물고기가 정말 좋다. 딱 한 번 물고기를 손으로 잡아 본 적이 있었다. 작은 송사리였는데 손바닥을 간질이는 것처럼 꼬물거려 얼른 놓아주었다. 그 일은 생각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난다 ..  (26쪽)


  도시에서도 그리 멀지 않던 지난날까지 집은 나무와 흙과 돌로 지었습니다. 도시에서도 그리 멀지 않던 지난날까지 ‘골목동네 작은 집’을 허물면, 나무와 흙과 돌을 새로운 집 지을 적에 다시 쓸 수 있었어요. 이른바 ‘건축폐기물’이 거의 안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집을 허물면 온통 쓰레기입니다. 시멘트로 짓고 스티로폼과 합판과 석면 따위를 쓰니, 이런 것들은 집을 허물 때에 모두 쓰레기가 됩니다. 어디 갖다 버릴 데가 없는데, 자꾸자꾸 ‘나중에 쓰레기로 버려질 집’을 짓는 한국 사회가 되었어요. 아파트만 걱정거리 아니에요. 시멘트로 짓는 모든 집이 걱정거리예요. 슬레이트지붕만 치운대서 될 일이 아니에요. 시멘트로 지은 모든 집을 걱정해야 해요. 앞으로 이 시멘트 쓰레기를 어찌할 생각일까요.

  생각해 보셔요. 지난날 흙집은 허물어 얼마든지 새로 지을 수 있어요. 흙집 허물어 나온 흙은 땅에 뿌리면 그대로 밭흙 논흙 숲흙 되지요. 아니, 무너진 집을 그대로 두기만 해도 되었어요. 나무와 흙과 돌로 지은 집이 허물어지면, 백 해쯤 지나면 저절로 흙으로 돌아가 깨끗한 새 숲이 이루어져요.


  그러면, 한 가지를 더 생각해야지요. 오늘날 아파트와 빌라를 백 해쯤 그대로 두면 어찌 될까요. 아마 아주 으스스한 곳이 될 테지요. 사람도 풀도 가까이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쓰레기터가 되겠지요. 핵발전소 핵쓰레기가 자연으로 돌아가자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린다 하는데, 아파트 쓰레기가 자연으로 돌아가자면 얼마나 기나긴 시간이 걸려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 “처음엔 몰랐는데, 이곳에 와서 살다 보니 저절로인 것이 참 많아요. 일부러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돋아나 저절로 열매를 맺고, 지고, 또 봄이면 다시 저절로 돋아나고.” “그렇지요? 네발 달린 동물들도 깃털 달린 새도 하다못해 흙 속을 기어 다니는 벌레들까지도요.” 삼촌이 덧붙여 말했다. “삼촌, 물고기들도.” 윗개울에 가는 걸 미루게 될까 봐, 나도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  (101쪽)


  이상교 님 동화책 《오래된 흙벽집》(청어람주니어,2009)을 읽습니다. 동화책에서는 ‘흙벽집’이라 말하지만, 옛날 집은 벽만 흙이 아니에요. 방바닥과 지붕도 흙입니다. 서까래에 흙을 잔뜩 올리고, 방바닥도 흙을 잔뜩 깔아요. 그래서 ‘흙벽집’이 아닌 ‘흙집’입니다. “오래된 흙집”이라 해야 올바릅니다.


  이 흙집은 마당도 흙이지요. 예전에는 울타리도 흙으로 쌓기도 했다고 해요. 바닷가나 섬처럼 바람이 많은 데에서는 돌로 쌓지만, 여느 시골마을에서는 울타리 아예 없거나 흙으로 쌓곤 했습니다. 때로는 탱자나무나 찔레나무가 울타리 구실을 해요.


  《오래된 흙벽집》 99쪽을 보면 ‘개밥별’이라는 풀을 얘기하며, 이 풀이 ‘환상덩굴’이라고 적는데, ‘환삼덩굴’을 잘못 적었습니다. 글쓴이도 잘못 적고, 편집부 일꾼도 풀이름을 잘 모른 탓에 그대로 책에 찍혀 나왔구나 싶습니다. 그나저나, 환삼덩굴을 가리켜 ‘개밥별’이라고도 하는군요. 이 동화책은 경기도 가평을 바탕으로 썼다고 하는데, 경기도 가평 시골말로는 ‘개밥별’ 풀이라고 일컬을까요?


.. 꽃이며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이 모두 드르렁 푸우 드르렁 푸우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 “쉿!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사람의 숨, 나무, 꽃, 새, 풀, 물고기, 흙 같은 것들의 숨은 모두, 서로서로 바꿔 쉬는 거래.” 발명가 아저씨가 그물을 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  (126쪽)


  동화책을 덮으며 가만히 생각합니다. 우리 네 식구 살아가는 집은 시골 흙집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 집에서 신나게 뛰고 달리며 구릅니다. 마당에서도 뛰놀고 고샅에서도 뛰놉니다. 시골집에서 아이들은 거리낌없이 노래를 하고 춤을 춥니다. 아래층 위층 소음공해 피해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쉴 적에는 바람소리를 듣고 풀벌레소리와 개구리소리를 듣지요.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듣습니다. 전남 고흥 시골은 눈이 거의 안 오니 눈소리 듣기는 어렵지만 한 해에 한두 차례쯤은 눈소리를 들어요.

  어른한테나 아이한테나 어떤 집이 사랑스럽거나 즐거울까요. 부동산이 되는 집이 사랑스럽거나 즐거울까요. 아이들이 기쁘게 뛰놀며 어른들은 느긋하게 쉬며 새 기운 차려 하루일 힘차게 여는 집이 사랑스럽거나 즐거울까요.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집에서 이 나라 사람들 누구나 활짝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요. 사람은 사람답고 풀과 나무는 풀과 나무다우며, 새와 짐승은 새와 짐승답게 이녁 삶 빛낼 수 있기를 빌어요. 우리는 모두 지구별 따사로운 이웃이에요. 4346.7.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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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톨이 동물원 일공일삼 47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허구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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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35

 


동무와 놀고 싶은 마음
― 외톨이 동물원
 하이타니 겐지로 글,허구 그림,햇살과나무꾼 옮김
 비룡소 펴냄,2003.11.17./7500원

 


  시골에서 살아가는 우리 아이를 바라보는 어느 어른은 ‘또래가 없어서 심심하겠어요.’ 하고 말합니다. 아이 앞에서 할 말과 안 할 말이 있지, 이렇게 생각이 없는 채 말을 해도 되는가 싶지만, 이런 말에는 빙그레 웃음지으면서 짧게 대꾸합니다. ‘도시에서는 자동차 때문에 아이들이 놀 데가 없어서 어쩌지요?’


  도시라는 데라 해서 아이들이 또래를 널리 만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온통 자동차투성이라서 아이들이 마음껏 나다니지 못합니다. 어른들 스스로 자동차 때문에 걱정하는 나머지 아이들을 함부로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습니다. 그래, 아이들은 도시에 있다 해서 ‘또래를 쉬 만나지 못’해요. 그리고, 도시 어른들은 왜 도시에서 아이들이 또래를 쉬 못 만나는지 못 깨닫습니다.


  더군다나,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수많은 학원에 얽매이느라 또래놀이를 할 겨를이 없습니다. 학원에서 또래끼리 어울린다 하지만, 놀이를 하지 않아요. 그저 손전화 갖고 노닥거리거나, 텔레비전에서 본 이야기를 시시껄렁하게 주고받을 뿐입니다.


.. 두 사람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는, “업어 주면 될 텐데.” “저러다가 해 떨어지겠네.” 하는 따위의 말을 했다. 어머니를 속상하게 하고 마리코한테는 제발 들리지 않았으면 싶은 말을 내뱉는 사람도 있었다. “기분 나빠.” “저런 애는 무슨 낙으로 살까?” 200미터를 40분 만에 걸어가는 아이한테는 아무 즐거움도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 “마리코는 채송화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해.” 하루미 이모는 채송화가 필 무렵이 되면 항상 그렇게 말한다. “이렇게 뽐내지 않는 꽃도 드물 거야. 그렇지, 마리코? 봐,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우려고 채송화는 얼마나 오랫동안 견뎠는지 몰라. 알고 있니? 메마른 땅에서도 뙤약볕이 며칠씩 쏟아져도 채송화는 끄떡도 않고 항상 예쁜 꽃을 피운다는 거.” ..  (13, 23∼24쪽)


  아이들끼리 놓으면, 아이들은 ‘또래’를 굳이 안 따집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나이를 하나하나 캐묻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나이에 따라 누구는 동생 누구는 오빠 누구는 누나 하고 틀을 짓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나이를 안 물어요. 아이들이 나이를 묻는 버릇이 있다면, 어른들이 언제나 ‘나이 묻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나이를 궁금하게 여기지 않아요. 아이들은 오직 한 가지만 궁금하게 여깁니다. “이름이 뭐니?”


  아이들은 이름을 궁금하게 여깁니다. 풀 한 포기 이름을 궁금해 합니다. 나무 한 그루 이름을 궁금해 합니다. 나비를 보면서, 벌레를 보면서, 새를 보면서, 구름을 보면서, 저마다 어떤 이름인지 궁금해 합니다.


  도시에서는 가게를 보고 간판을 보고 자동차를 보고 기계를 보고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어마어마한 것들 보면서 하나하나 가리키며 묻지요. “저건 (이름이) 뭐예요?”


  도시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사랑스러운 이름으로 부를 만한 동무를 가까이에 두지 않습니다. 갖가지 지식만 아이들 곁에 둡니다. 도시 어른들은 아이들이 살가이 마주하면서 따사로이 보살필 동무를 가까이에 두지 않습니다. 풀도 나무도 벌레도 짐승도 새도 가까이에 두지 않아요. 도시 어른들은 아이들 곁에 텔레비전을 놓아요. 도시 어른들은 아이들 곁에 놀이터조차 아닌 주차장만 잔뜩 놓아요. 도시 어른들은 아이들 곁에 가게를 놓고 오락실을 놓으며 학원을 놓습니다.


  동무와 놀고 싶은 아이들은 놀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동무를 만날 수 없으니 못 놀고, 동무를 만나더라도 무엇을 해야 놀 만한지 모릅니다. 도시 아이들 사이에서는 놀이가 뚝 끊겼어요. 도시 아이들은 언니 오빠 누나한테서 놀이를 물려받지 못했어요. 도시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랑과 꿈을 물려받지 못했어요. 도시 아이들은 오직 시험공부와 대학입시 두 가지에만 목을 매달아야 해요.


.. “까꿍까꿍, 착하지. 선생님이 노래 불러 줄게.” 야마자키 선생님은 스물다섯 살로 아직 총각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서투른 솜씨로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웠다. 여자 아이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 “학교에서 쉬할 텐데?” “응.” “기저귀 잘 갈 줄 알아?” 그러자 굼벵이는 “으응.” 하고 힘없이 대답했다. 아기는 낯선 곳에 오면 기저귀를 갈 때마다 온몸을 뒤틀며 마구 뻗댔다. “난 동생들 기저귀를 천 번도 넘게 갈아 줬어.” “정말이야?” 굼벵이는 기타를 존경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네 동생 기저귀 갈아 주러 내일 학교에 가야겠구나.” … 기타는 콩조림도 조그맣게 쪼개서 먹였다. 굼벵이가 기타를 흉내 내어 사과를 잘게 쪼개고 있었더니, 기타가 타박을 주었다. “그런 건 그냥 손에 쥐고 빨게 하는 거야. 안 그러면 이빨이 약해진단 말이야.” “끄으응.” 하고 야마자키 선생님이 신음 소리를 냈다. 기타를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도 기타를 새삼 다시 보았다 ..  (36, 47, 52쪽)


  두 아이와 함께 시골에서 살아가며 가만히 생각합니다. 시골에서는 ‘또래 아이’가 없어도 됩니다. 시골에 있는 또래 비슷한 아이라 하더라도, 여느 도시 아이와 똑같다면, 아이들 스스로 가까이 다가서지 않습니다. 재미없거든요.


  시골에서는 장난감이 있어야 놀지 않아요. 마냥 뛰고 달리면 놀이예요. 풀잎을 만지고 또랑물을 첨벙첨벙 밟다가는 샘물을 두 손으로 떠서 마시면 놀이예요. 꽃을 꺾어 목걸이와 반지와 팔찌를 만들어요. 꽃을 귀에 꽂아요. 꽃을 들고 달려요. 잠자리를 좇고 나비와 함께 춤을 추어요. 힘들면 나무그늘에 털썩 주저앉아 시원한 풀바람을 쐬지요. 이 모두가 놀이예요. 달리 놀이가 아니에요.


  자치기니 굴렁쇠니 해야 놀이가 아니에요. 공기나 소꿉을 해야 놀이가 아니에요. 자전거나 딱지나 물총이 있어야 놀이가 되지 않아요. 제비를 올려다보고 먼발치에서 해오라기를 바라보아도 놀이예요. 풀을 뜯어서 맛보고, 꽃잎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놀이예요.


  도시 어른들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돼요. 시골에는 놀이터가 없어요. 시골에는 놀이터가 없어도 돼요. 시골에서는 숲과 들과 멧골과 바다와 냇물이 오롯이 놀이터예요. 숲과 들과 멧골과 바다와 냇물은 아이들한테뿐 아니라 어른한테도 놀이터예요. 쉼터이고 만남터이며 잔치터가 되지요.


.. ‘차코를 태워 줘야지. 차코를 태우고 여기저기 다닐 거야. 차코는 탐험가가 될지도 모르니까.’ ..  (72쪽)


  하이타니 겐지로 님 동화책 《외톨이 동물원》(비룡소,2003)을 읽습니다. 짧은동화 다섯 꼭지를 실어, 다섯 갈래로 다섯 삶을 일구는 아이들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섯 갈래로 보여주는 다섯 가지 아이들 삶은 모두 다른데, 꼭 한 가지는 비슷합니다. 다섯 갈래 아이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외롭습니다. 슬픕니다.


  그러나, 다섯 갈래 아이들은 어버이 주머니가 가난할 뿐, 어버이와 아이 마음은 넉넉해요. 다섯 갈래 아이들은 짓궂은 어른들 때문에 외롭지만, 스스로 마음속에서 사랑을 길어올리고픈 꿈을 키워요. 다섯 갈래 아이들은 바보스러운 어른들 때문에 자꾸 슬픔을 맛보지만, 동무들과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 땅에 고운 눈빛 밝히는 꽃이야기를 노래하고 싶습니다.


.. “너구리처럼 인기 없는 동물을 좋아하는 이유가 뭐지?” 소년은 안심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는 소년이 “으응.” 하고 힘든 소리를 냈다. “조용한 동물이랑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 먹이 저장실에 가자, 소년은 감탄한 듯이 외쳤다. 마른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향긋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소년은 마른풀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산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아니야, 들판 냄샌가?” ..  (90, 91쪽)


  우리 어른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궁금해요. 아이들은 ‘동무와 놀고 싶은 마음’인데, 우리 어른들은 ‘어떤 이웃이나 동무를 사귀면서 무엇을 하고픈 마음’일는지 궁금해요.


  술자리 아닌 즐거운 놀이를 생각할 줄 아는 어른인가요? 담배 아닌 기쁜 놀이를 떠올릴 줄 아는 어른인가요? 극장이나 쇼핑이나 관광 말고, 호젓한 이야기잔치 이루는 살가운 놀이를 헤아릴 줄 아는 어른인가요? 돈 한 푼 안 쓰면서 다 함께 활짝 웃음짓는 놀이를 꿈꿀 줄 아는 어른인가요?


  어른들 스스로 꿈꾸지 않고서 아이들더러 꿈꾸라 말할 수 없어요. 어른들 스스로 서로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이들더러 이웃을 사랑하라 말하지 못해요. 어른들부터 참답고 착한 삶 일굴 때에, 아이들은 참답고 착한 마음을 품어요. 어른들부터 슬기롭고 올바른 삶 빛낼 적에, 아이들은 곱고 맑은 말씨로 예쁜 벗님 되어 날마다 신나게 뛰어놉니다.


.. ‘이런 글을 써도 될까. 술장수는 꿈이 없는 직업일까…….’ 가즈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쩐지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즈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연필을 들었다 ..  (108쪽)


  아이들은 아이다운 몸가짐으로 놀 적에 튼튼히 자라요. 아이들은 아이다운 낯빛으로 활짝 웃을 적에 씩씩히 커요. 어른들은 어른다운 마음가짐으로 일할 적에 꿋꿋하게 살아요. 어른들은 어른다운 눈빛으로 티없이 웃을 적에 아름다운 길 걸어요.


  아이들한테 말미를 주셔요. 아이들이 스스로 놀 만한 말미를 주셔요. 아이들이 걱정없이 뛰놀 빈터를 주셔요. 아이들한테 돈 말고 꿈을 주셔요. 아이들한테 문제집이나 참고서나 교과서 말고 사랑을 주셔요. 아이들한테 직업훈련이나 입시지옥 말고 놀이를 주셔요. 4346.7.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어린이책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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