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바바라 아몬드 지음, 김윤창.김진 옮김 / 간장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아버지가 아이 돌보기
[사랑하는 배움책 17] 바바라 아몬드,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간장,2013)

 


- 책이름 :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 글 : 바바라 아몬드
- 옮긴이 : 김진, 김윤창
- 펴낸곳 : 간장 (2013.4.11.)
- 책값 : 15800원

 


  아이들은 시외버스를 타면 갑갑해 합니다. 좁은 걸상에 꼼짝 않고 앉아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버티기 힘드니까요. 아이들 아닌 어른도 시외버스에서 견디기 벅찹니다. 시외버스에서 여러 시간 견디기 힘드니, 어른들은 시외버스에 텔레비전을 붙여서 들여다보곤 합니다. 그런데, 시외버스에 붙인 텔레비전에서는 ‘어른들이 보는 연속극이나 영화나 쇼’만 흐르지, ‘아이들이 볼 만한 영화나 만화나 이야기’는 흐르지 않아요. 아이들은 어른들 사이에서 괴롭고 슬프게 낑겨야 합니다.


  시외버스에서 창문이라도 열 수 있으면, 바깥바람 조금 쐬면서 버스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멧자락이든 들판이든 숲이든 시골이든 구경하겠지요. 그러나, 오늘날 이 나라 시외버스는 모두 통유리입니다. 아이들은 바람놀이도 창밖놀이도 즐길 수 없습니다. 과자를 우걱우걱 먹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꼼지락꼼지락 이리저리 움직일밖에 없어요.


  아이를 낳아 돌본 어른이라면, 이리하여 아이들 데리고 시외버스를 타며 돌아다닌 적 있는 어른이라면, 시외버스에 아이들 태우고 움직일 때에 얼마나 고단한가 알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젊은 날 아이를 낳아 돌보았어도 나이들며 이런 고단함을 잊는 어른이 많아요. 아직 많이 젊은 사람들이나 푸름이 들도 이런 대목을 제대로 못 짚기도 해요. 저희가 어릴 적에도 ‘시외버스에서 소리 지르거나 우는 아이’ 모습인 줄 떠올리지 못하지요.


  두 아이 데리고 고흥에서 일산까지, 또 일산에서 음성으로, 다시 음성에서 고흥으로, 이렇게 여러 날 걸쳐 시외버스를 타고 움직이며 생각합니다. 두 아이 어버이는 아이들 옷가지와 여러 짐을 커다란 가방과 작은 가방에 나누어 담고 나릅니다. 아이들 보듬습니다. 이래저래 온몸 쑤십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힘듭니다. 시외버스에서 세 시간 남짓 신나게 놀다가 드디어 마지막 한 시간 즈음 달게 잠들기도 하지만, 대여섯 시간 넘는 시외버스 마실길 내내 몸이 간지럽고 좀이 쑤셔서 이리저리 뒤척거리기도 합니다.


  이럴 때에 우리 둘레에 ‘아이를 데리고 태운 어버이’ 있으면 반갑습니다. 아마 그분도 우리가 반가우리라 생각해요. 그분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 내가 반갑고, 우리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 그분이 반갑겠지요. ‘아이를 데리고 태운 어버이’가 시외버스에 여럿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홀가분합니다. 아이들은 서로서로 눈 마주치며 잘 놀기도 하고, 어느 아이 하나 소리를 지르더라도 한결 가붓하게 아이들 보듬을 만합니다.


.. 50년 전에는 조부모, 숙모와 삼촌, 그리고 형과 언니들이 종종 아이 키우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확대가족의 붕괴는 이제 자녀보육의 부담을 온전히 부모에게, 대개는 어머니에게 지운다 … 어머니를 필요로 하는 우리의 마음은 온 사랑을 쏟고 모든 것을 다 주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를 이상화하며, 거기에는 양가감정 같은 정상적인 감정 반응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 확대가족의 도움 없이도 모두 다 해내고자 하는 것, 즉 일도 하고, 아이들도 ‘제대로’ 키우고, 남편과 친밀한 관계도 지속하고, 취미와 사회생활, 운동 일정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요즘 시대의 어머니들이 품고 있는 기대치이다. 양가감정은 오직 그런 목표들이 야기하는 기력 소진과 불가피한 실패에 의해 악화될 수 있을 뿐이다 ..  (35, 58, 165쪽)


  아버지 혼자 아이 둘 데리고 마실을 다니거나 저잣거리 나들이를 하면, 둘레 어른들이 자꾸 “애 어머닌 어디 갔수?” 하고 묻습니다. 할매가 묻든 할배가 묻든, 이런 물음을 들으면 나는 아무 대꾸를 않습니다. 대꾸할 값어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이 있으면 조용히 자리를 옮깁니다. 아이들 귀에도 이런 말이 흘러들거든요.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 있어요. 누런소와 검은소 두 마리를 바라본 어느 양반네가 흙일꾼한테 큰소리로 물었다지요. 어느 소가 일을 잘 하느냐고. 이 소리 들은 흙일꾼은 논에서 소 두 마리 부리다가 말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와 양반네를 데리고 멀리 자리를 옮기면서 귀엣말로 그런 소리 함부로 말라고, 소가 다 알아듣는다고 했다지요.


  아이들은 다 알아들어요. 아이들은 다 알아보아요. 어른들이 엉터리로 하는 말을 아이들은 다 알아들어요. 어른들이 엉터리로 하는 짓을 아이들은 다 알아보아요.


  어머니 혼자 아이 둘 데리고 마실을 다닐 적에, 아이 어머니더러 “애 아버진 어디 갔수?” 하고 묻는 어른은 없습니다. 아이들 데리고 어디를 다녀야 한다면, 아주 마땅히 ‘아이 어머니’가 도맡아서 움직여야 하는 줄 여깁니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이 뿌리내렸을까 알쏭달쏭합니다. ‘아이 아버지’는 아이를 돌볼 줄 모른다거나, 아이 아버지는 아이들 돌보지 않아도 된다거나, 아이 아버지는 아이들 돌보는 삶을 안 배우고 지내도 되는듯 잘못 흐르는 삶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 찾아보기 참 어렵습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는 사람일까요. 아버지는 어떤 어버이인가요. 아버지는 아이들하고 어떻게 지낼 때에 아름다울까요. 아버지는 집안일과 집살림을 어떻게 꾸려야 슬기로운가요.


.. 내 친구는 자신의 아이에게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고 상상해야만 했다. 아이가 자신과 꼭 닮았기 때문에 아이를 잘 안다고 여기는 것은 그녀에게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 어머니가 되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나은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일 뿐만 아니라, 예전의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을 제공한다 …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 이면에는 늘 어머니 자신이 유아기와 아동기에 겪었던 경험이 깔려 있다 ..  (46, 67쪽)


  아이들은 놀면서 자라야 합니다. 아이들은 즐겁게 놀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밥도 옷도 모두 놀이로 여기며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호미질도 흙일도 설거지도 빨래도 놀이하듯 어버이한테서 배울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놀자면 어른부터 홀가분한 삶이어야 합니다. 어른 스스로 삶을 재미나게 일굴 때에,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놀도록 잘 풀어놓을 만합니다. 어른 스스로 어떤 굴레에 매이거나 어떤 수렁에 갇히면, 아이들이 예쁘게 놀도록 지켜보지 못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아버지나 어머니 되는 사람들은 어떤 삶 일구는가요. 오늘날 아버지나 어머니 되는 젊은이는 ‘어버이 자리’로 오기까지 어떤 일 하고 어떤 놀이 하면서 마흔이 되고 서른이 되며 스물이 되는가요.


  입시지옥을 거치면서 사람다운 사람살이 배운 젊은이는 얼마나 있을까요. 대학교를 마치고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된 젊은이는 아버지다움이나 어머니다움, 아울러 어버이다움을 누구한테서 어느 만큼 배웠을까요. 사랑하는 짝을 만나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이 아이를 어떻게 돌보고 가르치며 키울 때에 아름다운가 하는 대목을 배운 적 한 차례라도 있을까요.


  어린이와 푸름이를 가르치는 초·중·고등학교에서 교사를 맡는 이들은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 다니면서 어떤 삶 배우고 어떤 삶 누리며 어떤 삶 사랑하는가요.


.. 여자들이 일에서 얻는 만족은 그들을 더 좋은 어머니로 만들고, 스스로에 대한 안도감을 키워 주고, 자신의 가치를 찾고자 아이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을 줄여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독한 갈등과 원망, 죄책감을 유발하여 어머니 노릇을 쉽사리 어긋나게 만들 수도 있다 … 자연스러운 수유 방법인 모유 수유는 1930년대 중·상류층 여자들 사이에서 유행에 뒤떨어진 방법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지금이라면 모유 수유를 했을, 그리고 모유 수유가 제공하는 친밀감과 보살핌의 느낌을 즐길 수 있었을 여자들이, 모유 수유는 곧 하류층을 뜻하며 옳은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아기에게서 그런 경험을 박탈했을지도 모른다 ..  (154∼155, 156쪽)


  바바라 아몬드 님이 쓴 배움책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간장,2013)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배움책은 ‘어머니’ 이야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어버이 가운데 어머니 이야기만 할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뿐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도 아이들 낳고서 ‘돌보고 가르치며 키우는 몫’은 온통 어머니한테 떠넘기니까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즐겁고 흐뭇하며 사랑스레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며 키우지 못하잖아요. 아니, 한국 사회나 미국 사회나 두 어버이가 어깨동무하면서 삶과 사랑과 믿음과 꿈을 북돋우도록 이끌지 않잖아요.


  복지제도가 없기 때문이 아니에요. 교육문화가 없기 때문이 아니에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복지제도이든 교육문화이든 엉터리입니다. 그러나, 제도나 문화가 있건 없건, 아이들 삶과 어른들 삶이 그리 살갑지 못해요. 아이들은 갓 태어나서 스무 살 되기까지 시험지옥과 입시지옥에 갇혀요. 홀가분하게 놀 겨를이 없고, 즐겁게 놀 터가 없어요.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이나 유치원이다 학원이다, 게다가 학교이다 하면서, 자꾸 여기저기 얽매이며 들볶여야 합니다. 아이들이 몽땅 얽매이며 들볶이니, 서로서로 동무 되지 못해요. 아이들은 놀이동무가 없어요. 아이들은 손전화나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이 ‘동무’ 구실을 해요.


  이렇게 큰 아이들이 스무 살 되고, 스물다섯 서른 서른다섯 마흔 되어 ‘아이를 낳는 어버이’ 되면 어찌 될까요. 게다가, ‘아이를 낳는 어버이’ 되는데, 아버지 자리에 설 사람은 회사에서 돈 버는 일 맡는다며 ‘아이 돌보는 몫’을 나누어 맡지 않거나 함께 하지 않으면, 어머니 자리에 서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자신의 아이를 사랑할 수 없는 어머니는 대체 어찌해야 할까?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는 아이는 대체 어찌해야 할까 … 어머니의 부재는 어떤 면에서 증오보다도 더 좋지 않다. 증오는 적어도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무언가가 살아 있는 것이니 말이다 … 오늘날 전문 직종과 기업계에 대거 진출한 교육받은 여자들은, 탁아소와 유모들이 아무리 좋고 배려 깊다 해도 자신들이 직접 함께 있을 때만은 못하다는 점(어머니 본인에게도, 또 아이들에게도)을 알아 가고 있다 ..  (206, 215, 349쪽)


  바바라 아몬드 님은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라 하는 배움책에서,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면서 미워한다고 밝힙니다. 그럴 만하겠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새롭게 생각해 봅니다. 자,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면서 미워한다는 ‘두 마음’을 품는다면,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떤 마음일까요? 아버지라는 사람한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오롯이 있기나 할까요? 아버지라는 사람한테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이나마 조금이라도 있기나 할까요? 아버지라는 자리에 서는 사람은 이런 마음도 저런 마음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엉성하게 흘리는 모습 아닐까요? 아버지라는 사람은 ‘두 마음’은커녕 ‘한 마음’조차도, 아니 ‘아무 마음’마저 없는 수렁에서 허덕이는 나날 아닌지요?


.. 나이 든 부모를 기꺼이 돌보고자 하는 딸(또는 아들)의 마음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들의 초기 관계가 어떠했는가와 많은 관련이 있다. 양가감정과 원망의 응어리가 충분히 풀려서 자녀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선뜻 보살핌을 준비하고 제공하는가? … 그저 남을 모방하기만 할 경우에는, 좋지 못한 자녀양육 관행들(사탕을 뇌물로 사용하거나 TV를 보모로 사용하는 것, 또는 과도한 신체적 훈육)을 영속시킬 수도 있다 ..  (345, 354쪽)


  아버지는 아이를 돌보아야 합니다. 할아버지는 아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이한테 밥을 차려 먹일 줄 알아야 하고, 아버지는 아이를 씻기고 옷을 빨래하며 집안을 쓸고 닦으며 치울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텃밭 일굴 줄 알아야 하고, 아버지는 나무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자가용 몰 줄 알기보다는 숲을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달빛과 별빛과 햇빛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풀꽃을 들여다보며 개구리와 제비 노랫소리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이 돌볼 줄 모르는 사회에서, 어머니 혼자 아이를 착하고 참다우며 곱게 사랑하며 따스하게 품기를 바란다면, 참 쓸쓸하고 슬픕니다. 4346.5.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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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전업주부 일공일삼 19
키르스텐 보예 지음, 박양규 옮김 / 비룡소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30

 


집안일과 집살림 배울 사람은 누구
― 아빠는 전업 주부
 키르스텐 보이에 글,박양규 옮김
 비룡소 펴냄,2003.3.14./8000원


 

  키르스텐 보이에 님이 쓴 청소년문학 《아빠는 전업 주부》(비룡소,2003)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참 재미난 책이네. 책이름으로 보건대, 틀림없이 ‘아빠 자리 있는 분께서 전업 주부 노릇 제대로 못한다는 이야기 나오겠구나’ 싶어요. 한국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아버지 자리에 서는 사내들이 ‘전업 주부’는커녕 ‘어버이 구실’ 제대로 못하는 모습을 에둘러 나무라는 이야기 보여줄 듯싶어요.


  책을 펼쳐 첫 쪽부터 끝 쪽까지 읽습니다. 참으로 이 생각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오랫동안 집안일과 집살림에만 얽매인 어머니가 바깥일 하고 싶다며 하니, 아버지 되는 분은 ‘그러라’고, 이녁은 전업 주부 노릇 하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말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바깥일을 하는 첫날부터 아버지는 집안일을 영 그르칩니다. 온 집안은 엉망진창 됩니다.


  문득 내 삶을 돌아봅니다. 지난 삼월 이십칠일부터 오늘 사월 십사일까지 옆지기 없이 열아흐레째 없이 두 아이 돌봅니다. 앞으로 이틀 있으면 옆지기는 시골집으로 돌아옵니다. 스무 날 즈음 시골집 떠나 홀로 공부할 것 있어 먼 마실 떠났습니다. 두 아이와 함께 살아오면서,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이렇게 긴 나날 집을 비운 적 처음입니다. 아이들은 오래도록 못 보는 어머니를 그리워 하면서도 날마다 꿋꿋하고 씩씩하게 잘 놉니다.


  옆지기가 늘 하는 말 한 가지 되새깁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가장 즐겁고 멋진 하루를 새롭게 지을 수 있어야 해요.’ 두 아이가 날마다 새 아침 맞이할 적마다 참말 새 하루로구나 하고 느끼도록 이끌 즐겁고 멋진 이야기를 지어야지, 하고 생각하다가는, 이런 하루란 아이한테뿐 아니라 어버이인 나 또한 누릴 노릇입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날마다 가장 새롭고 가장 멋지며 가장 즐거운 삶을 누릴 노릇입니다. 어른 스스로 새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면, 아이한테 새로운 삶 보여주지 못해요. 어른부터 새로운 삶 즐기는 마음 못 되면, 아이 또한 새로운 삶 즐기는 기쁨 맞아들이지 못해요.


.. “그래, 넬레. 하지만 우리 넬레도 두 손이 있지? 구둣솔과 구두약은 신발장에 있단다.” 엄마는 며칠 뒤에 내게 감자 깎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구스타프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신발 끈을 혼자서 매야 했다 … 사실 나도 나중에 일하는 여성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집에서 내 신발이나 닦고 있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9, 13쪽)


  들길을 걷습니다. 들길 걷는 동안 햇살 고루 받습니다. 아이도 아버지도 살결 탑니다. 들길에서 들꽃을 만납니다. 아이들은 들꽃 예쁘다고 들여다봅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바라보는 예쁜 들꽃이랑 아이들 모습 나란히 사진으로 담습니다.


  숲길을 걷습니다. 숲길 걷는 동안 숲바람 듬뿍 쐽니다. 아이도 아버지도 숲이 나누어 주는 푸른 숨결 마십니다. 숲이 있어 들이 살고 마을이 살며 우리 보금자리 살 수 있다고 느낍니다. 숲이 없으면 들도 마을도 보금자리도 살 수 없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나는 아이들을 보육시설에 맡기지 않습니다. 나는 바깥에서 다른 사람 불러 아이들 맡아 달라 하지 않습니다. 옆지기 또한 몸이 아무리 아프거나 힘들어도 스스로 아이들 건사하지, 다른 시설이나 사람한테 아이를 맡기지 않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삶은 나를 돌보는 삶이요, 아이를 바라보는 삶은 내 속마음 바라보는 삶입니다. 곧,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나날이란 내가 꿈꾸거나 바라는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고 느끼면서 차근차근 일구는 나날입니다.


.. “그렇다니까. 학교 생활이 재미없는 건 아닌데 몇 년 하고 나니 새로운 게 없어요. 그렇지만 남자로서 전업 주부라니, 이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나중에 제게 불평하지 않는다면 그렇겠죠.” … 아빠는 엄마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표정이었다. 짐작건대 아빠는 요리나 청소하는 일을 누워서 식은 죽 먹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  (20, 23쪽)


  옆지기는 아이 낳은 어머니 되기 앞서 집안일과 집살림을 얼마나 배웠을까요. 옆지기 어머님은 옆지기한테 집안일과 집살림을 얼마나 가르쳐 주었고, 여느 때에 어떤 집안일과 집살림 보여주었을까요. 옆지기 다닌 초·중·고등학교는 옆지기 스스로 집안일과 집살림을 어떻게 느끼거나 생각하도록 이끌었을까요.


  나를 낳은 어머니는 언제나 집안일과 집살림 도맡는 어머니였습니다. 아버지는 집안일이나 집살림에는 아주 손을 놓으며 바깥일만 했습니다. 나는 아들로 태어났으니, 어머니가 집안일을 하거나 말거나 집살림을 슬기롭게 꾸리거나 말거나, 하나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어요. 나도 내 아버지처럼 바깥일에만 마음 쏟는 사내로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러나, 나는 바깥일만 도맡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여기지 않았어요. 사내가 바깥일만 하는 일은 어딘가 걸맞지 않다고 느꼈어요. 가시내는 바깥일을 하더라도 집안일까지 아울러 맡도록 내모는 사회 얼거리는 여러모로 뒤틀렸다고 느꼈어요.


  내가 다닌 초·중·고등학교를 떠올립니다. 열두 해 학교를 다니는 동안 ‘사내한테 집안일 가르친 교사’는 없습니다. 열두 해 학교에서 교과서 배우는 동안 ‘사내가 집살림 배우도록 북돋우는 교과서’는 못 보았습니다. 국민학교에서는 사내와 가시내를 가리지 않고 한 달에 한 차례씩 학교에서 밥을 지어 먹는 시간 있었어요. 국민학교에서는 사내라 하더라도 바느질과 뜨개질을 가르쳤어요. 중학교에 가고부터 ‘가정’이나 ‘가사’ 같은 수업 시간 없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사내한테 바느질이나 뜨개질 가르치지 않고, 학교에서 손수 밥 지어 먹는 시간 또한 없습니다.


.. 엄마는 기분이 좋아 보였고 힘이 철철 넘쳐 보였다. 엄마는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과 끈적끈적한 부엌 바닥을 보고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뽀뽀하며 말했다. “오, 불쌍한 내 남편!” … 아빠는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아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했는데도 부엌 꼴이 그랬으니, 엄마는 아빠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 “처음엔 어차피 엉망진창이 될 거라고 우리 모두 짐작한 거잖니. 너한테도 바뀐 환경이 쉽지 않다는 거 엄마도 알아.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아빠를 거들어 주어야 해. 아빠가 우리보다는 훨씬 더 힘들 테니까 말이야.” ..  (47, 48, 49쪽)


  밥은 누가 지어서 차려야 할까요. 아이를 아직 안 낳은 어른이 스스로 살림을 꾸린다 할 적에, 집에서 밥은 누가 차려야 할까요. 빨래는 누가 해야 할까요. 빨래기계가 빨래를 해 준다 하더라도, 빨래 마친 옷가지는 누가 개야 할까요. 집에서 비질과 걸레질은 누가 해야 할까요. 집살림 다스리고 집안을 돌보는 일은 누가 해야 할까요.


  사내와 가시내가 서로 사랑한다면서 짝을 짓는다고 할 적에, 나중에 아기를 낳아 돌보는 일까지 헤아리는 사람 얼마나 될까요. 아기씨앗 몸에 건사하며 열 달에 걸쳐 찬찬히 사랑하는 길은 어떠한 삶이 된다고,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나 집에서나 제대로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어른은 몇이나 있을까요. 따로 임신교실·출산교실 같은 데를 다녀야 하나요. 집에서 어른들은 무엇을 보여주거나 물려주거나 가르치나요. 따로 책을 찾고 인터넷을 뒤져야 하나요. 초·중·고등학교는 무엇을 하는 데인가요.


  집안일을 배울 수 없다면 학교라는 데는 어떤 몫을 할까요. 집살림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학교라는 데는 어떤 구실을 하나요. 집안일을 가르치지 못하는 교사는 얼마나 교사다울까요. 집살림을 물려주지 못하는 어버이라면 어느 만큼 어버이다운가요.


  아이들이 스무 살 언저리 되어 대학생 되도록 이끌면 교사 구실은 끝이라고 여겨도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시집장가 간다 할 적에, 자가용 장만해 주거나 아파트 마련해 준대서 어버니 노릇 다했다고 여겨도 되지 않습니다. 교사라면, 아이들이 제 힘으로 스스로 씩씩하게 살아가며 살림 꾸리고 꿈을 이루도록 북돋우는 몫을 맡아야 합니다. 어버이라면, 아이들이 저희 슬기를 빛내어 스스로 튼튼하게 서도록 살림과 일을 즐겁게 누리는 빛을 보여주거나 물려주어야 합니다.


.. “말은 잘하네요. 어떻게든 해 보자고요? 어떻게는 뭘 어떻게 해요? 결론은 뻔하죠. 내가 항상 일을 다 하는 거잖아요!” … 엄마는 커피 잔을 거세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엄마는 일하는 게 재미있어. 그래서 계속 일할 거라는 엄마 생각에는 변함없어. 아빠도 같은 생각일 거야. 왜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청소도 못하고 애 키우는 것도 잘 못하고 가구도 반들반들하게 닦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리고 왜 여자 판사나 의사는 남자 판사나 의사보다도 못하다고 여겨지고, 수공업 일이나 해야 하는 거지? 이제는 이런 걸로 싸우는 사람조차 없단다. 하지만 어려움은 정작 이렇게 살려고 할 때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거란다.” ..  (135, 155쪽)


  청소년문학 《아빠는 전업 주부》를 생각합니다. ‘전업 주부’나 ‘가정 주부’라는 이름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런 말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바른 한국말은 ‘일꾼’이요 ‘살림꾼’입니다. 집안일 살뜰히 꾸리는 일꾼이며, 집살림 슬기롭게 추스르는 살림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꾼이면서 살림꾼입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일꾼이면서 살림꾼으로 자란다고 느낍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아름다운 일꾼이자 살림꾼 모습을 늘 보여주면서 보살필 때에 즐거운 삶 일군다고 느낍니다. 어른 스스로 아름다운 일꾼이면서 살림꾼이 되지 못한다면, 어른 스스로 하나도 안 즐거운 삶 되리라 느낍니다.


  아름답게 일하면서 아름답게 살림 꾸립니다. 기쁘게 일하면서 기쁘게 살림 꾸려요.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놀지요. 예쁘게 살림하고 예쁘게 사랑하지요. 어버이답게 일을 하고, 어버이다운 살림을 꾸려요. 어버이로서 일을 맡고, 어버이 넋 빛내어 살림을 아낍니다. 4346.4.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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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4-1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빠는 전업주부... 많이 공감하셨겠어요. ^^
님도 쓰실 수 있는 책인 듯...^^

숲노래 2013-04-15 19:24   좋아요 0 | URL
그런데 그다지...
생각보다는 마음이 안 끌리더라구요.
뭐랄까, 집안일을 하는 줄거리보다는
작품에 나오는 청소년 아이가
반에서 짝사랑 하는 이야기가 3/5쯤 차지하다 보니,
뭐랄까... 김이 샌달까요 @.@
흠,,,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 - 아이에게 준 최고의 선물, 발도르프 학교
강성미 지음 / 샨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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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우는 곳은 아름답다
[사랑하는 배움책 16] 강성미,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샨티,2013)

 


- 책이름 :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
- 글 : 강성미
- 펴낸곳 : 샨티 (2013.3.30.)
- 책값 : 15000원

 


  읍내 저잣거리에 가면, 길바닥에 앉아 장사하는 아지매와 할매를 만납니다. 아이들과 읍내 저잣거리에 가면, 아이들 눈에 뜨이는 곳은 떡집입니다. 떡집 앞을 지나칠 적에 떡이 먹고 싶다며 조릅니다.


  면소재지나 읍내에 있는 가게, 이른바 마트에 가면, 가지런하게 쌓은 가공식품을 잔뜩 만납니다. 아이들과 함께 마트에 가면, 아이들 눈에는 여기에도 과자 저기에도 얼음과자입니다. 아이들은 이것도 저것도 집어서 사자고 조릅니다. 마트 같은 데에 가서 아이들한테 과자를 안 사 주는 일이란 아이를 괴롭히는 일하고 같구나 싶습니다.


  아이가 아직 과자가 무엇인지 모를 적에 가게에 가면, 아이는 아무것도 집거나 쥐지 않습니다. 아이가 과자상자랑 과자봉지 알고 나면, 이제 아이는 과자를 집으려고 합니다. 마을에 조그마한 가게 하나 없는 시골이나 멧골에서 아이들과 살아가면, 아이들은 가게에 갈 일도, 가게에 가득한 과자를 볼 일도 없습니다. 가만히 헤아리면, 아이들이 과자를 노래하거나 바라는 까닭은, 어른 스스로 ‘과자 있는 가게’에 자주 들른다는 뜻이고, 어른 스스로 ‘과자를 자주 먹는다’는 소리입니다.


.. 나의 아이들은 물론 모든 인간이 다른 무엇이 되지 않고도 지금 존재하는 그대로 저마다 소중한 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발도로프 교육의 경험을 … 벌써부터 아이가 행복하지 않은 생활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1년을 채 마치기도 전 유치원을 그만두고 집에서 보내게 했더니 민주는 펄쩍 뛰며 좋아했다 … 내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 선생님, 일부러 유치원을 찾아가 아이의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눈 선생님, 그렇게 아이를 자세하게 봐 주는 선생님에게 민주를 맡겨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졌다 ..  (12, 18, 29쪽)


  어른이 손으로 글을 써서 글월을 자주 띄우면, 아이는 곁에서 글씨쓰기를 으레 봅니다. 어른이 손으로 연필이나 붓이나 크레파스 쥐고 그림을 자주 그리면, 아이는 곁에서 그림그리기를 으레 봅니다. 아이는 저절로 글씨놀이 하고 그림놀이 합니다.


  어른이 조그마한 밭뙈기이든 널따란 들판이든 호미나 괭이나 삽을 쥐고 흙을 파거나 보듬으면, 아이도 호미나 괭이나 삽을 쥐고 흙을 파거나 보듬으려 합니다. 어른이 씨앗 하나 심어 돌보면, 아이도 씨앗 하나 심어 돌보고 싶습니다. 어른이 나뭇잎 쓰다듬고 꽃망울 어루만지면, 아이도 나뭇잎 쓰다듬고 꽃망울 어루만져요.


  가르침은 따로 없습니다. 삶이 모두 가르칩니다. 배움은 따로 없습니다. 삶에서 늘 배웁니다. 어른은 하루하루 누리는 삶을 언제나 아이한테 가르칩니다. 아이는 하루하루 누리는 삶에서 노상 어른한테서 배웁니다. 어른이 책을 손에 펼쳐서 아이한테 이것저것 들려주어야 가르침이 아니에요. 어른이 여느 때에 읊는 말이 모두 가르침이에요. 어른이 여느 때에 보여주는 몸짓과 낯빛이 모두 가르침이에요.


  아이라면 누구나 어른이 여느 때에 쓰는 말마디를 귀담아들어 아이 말마디로 삼습니다. 아이라면 누구나 어른이 여느 때에 보여주는 몸짓을 살펴보고는 아이 몸짓으로 삼아요.


  아이만 따로 똑똑하게 크라고 바랄 수 없어요. 아이와 함께 어른 스스로 늘 똑똑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아이만 따로 슬기롭게 자라라고 꾀할 수 없어요. 아이와 나란히 어른 또한 스스로 언제나 슬기롭게 지낼 뿐입니다.


.. 일생에서 8년이라는 긴 시간을 같은 교실에서 같은 선생님과 보내게 될 아이들, 또 그 아이들의 부모들, 보통 인연이 아닐 것이다 … 아이들의 성장을 도우며 동시에 자신도 같이 성장해 갈 수 있는 … 간식을 다 먹고 나면 아직 남은 시간을 바깥에서 햇볕을 쬐며 놀기 위해 쏜살같이 운동장으로 달려나간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덥거나 춥거나 빼먹지 않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바깥 놀이 시간이다 … 교실 안, 학교 안, 운동장, 어디라도 아이들이 접하는 공간은 부드러운 색과 부드러운 재료로 꾸며진 발도로프 학교의 자상함을 자주 볼 수 있었다 ..  (38, 44, 50, 65쪽)


  모든 어버이는 교사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어버이는 날마다 아이한테 모든 삶을 보여주며 모든 것을 가르치니까요.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비질과 걸레질 하는 모든 몸짓이 가르침입니다. 어머니만 집일을 하고 아버지는 집일을 안 한다면, 이 모습 그대로 아이들이 물려받습니다. 우리 사회가 제법 남녀평등 이룬다고 이론으로는 읊더라도, 정작 젊은이 사이에서도 집일과 집살림 돌볼 줄 아는 사내가 늘지 않는 까닭을 잘 헤아려 봐요. 막상 여느 살림집에서 여느 집일과 집살림 맡는 이는 으레 가시내예요. 할머니, 어머니, 또 어린 가시내, 이렇게 가시내들만 집일과 집살림 맡는 흐름 이어져요. 오늘날 아이들은 사내이든 가시내이든 집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해요. 오늘날 아이들은 집에서 이녁 어버이와 함께 보내는 겨를보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끌려다니면서 ‘집 바깥 어른’하고 누리는 겨를이 더 깁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이녁 어버이가 집에서 일구는 일과 살림을 제대로 들여다볼 틈이 없어요. 곧, 오늘날 아이들은 ‘삶’을 하나도 못 배워요. 삶은 하나도 못 배우면서 갖가지 이론과 지식은 머릿속에 넣지요.


  오늘날 아이들은 제 양말이나 속옷 하나 빨래할 줄 모르는 몸가짐으로 유치원을 마치면서 초등학교에 들어갑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제 밥그릇 설거지할 줄 모르는 몸놀림으로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옮깁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제 방뿐 아니라 집안 곳곳 쓸고 닦으며 손질하고 돌보는 버릇 익히지 못한 채 고등학교로 갑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바느질이나 호미질이나 망치질이나 톱질이나 도마질 하나 살뜰히 몸에 붙이지 않고서 대학교에 가요. 오늘날 아이들은 ‘어버이가 아이 사랑하는 손길’ 조금도 익히거나 배우지 않는 몸으로 대학교를 마치고 회사원이 되거나 노동자가 된 뒤, 짝꿍을 사귀어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아요.


.. 발도로프 학교의 모든 교실 한쪽에는 ‘자연 탁자’라는 게 있는데, 탁자 위에는 그 계절에 얻는 아름답고 특별한 것이나 자연 재료로 만든 인형 등을 올려놓고 아이와 선생님이 같이 그 공간을 꾸며 나간다 … 이 작물들은 판매 위주의 대량 생산이 아닌 자급자족을 위한 소량 생산을 하다 보니 기계 대신 인간의 손을 타고 자란다. 자기 가족에게 먹일 채소들을 가꾸기 위해 흙에 손을 댈 때는 인간이 내뿜는 기운도 달라지는 게 아닐까 싶다 … 음식은 단순히 배만 부르려고 먹는 게 아니다. 마음에도 영양을 공급한다. 아침이면 엄마가 정성들여 싸 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가는 아이들 모습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잘 자리잡힌 듯한 평화로운 삶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  (74, 153, 155쪽)


  한국 사회 어른은 이녁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 어른은 이녁 스스로 어떤 꿈을 이루는 삶이요, 이녁 스스로 어떤 사랑을 나누는 하루인가 되짚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는가요. 우리 어른들은 집에서 아이하고 무엇을 하는가요. 아이들을 시설이나 학교나 학원에 보내는 데에만 마음을 사로잡히고 말아, 정작 집에서는 아이들과 아무것 안 하거나 못 하는 삶 아닌가 톺아보아야 해요.


  집에서 아이와 함께 김치를 담그는가요. 집에서 아이와 함께 도시락을 싸는가요. 집에서 아이와 함께 만두를 빚는가요. 집에서 아이와 함께 쑥을 뜯고 냉이를 캐며 된장국 끓이는가요. 집에서 이불 한 채 함께 꾹꾹 밟아서 빨래하는가요. 집에서 아이들과 옷가지를 개어 옷시렁에 두는가요. 집에서 아이들과 즐겁게 비질이랑 걸레질을 하는가요.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는 삶을 아이가 몸소 느끼도록 이끌지 못하면, 이 아이들이 자라 푸름이가 되고 어른이 되어도, 슬기롭게 제 몸을 돌보거나 아끼지 못합니다. 아이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하루를 아이가 늘 느끼도록 꾀하지 않으면, 이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되건 서른 살이 되건, 제 숨결을 비롯해 이웃 숨결을 곱게 보살피는 마음씨 다스르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말과 넋과 삶을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습니다. 어버이는 어버이 스스로 가꾸는 말과 넋과 삶을 아이한테 고스란히 물려줍니다. 어버이 스스로 아름답고 맑으며 올바른 말을 쓸 때에, 아이도 아름답고 맑으며 올바른 말을 써요. 어버이 스스로 아름답고 맑으며 올바른 넋으로 온누리 바라볼 때에, 아이도 아름답고 맑으며 올바르게 온누리를 헤아려요. 어버이 스스로 아름답고 맑으며 올바른 삶 되도록 하루하루 일구어야, 비로소 아이도 아름답고 맑으며 올바른 삶 즐겁게 맞아들여 씩씩하게 일구지요.


.. 훗날 누구든 이 학교를 거쳐 갈 아이들을 위해서 씨앗을 뿌려놓은 것이고, 그 씨앗의 결실은 지금 나의 아이들에게까지 전해졌다 … 회사의 이름이 박힌 옷을 입지 않으니 아이들의 몸이 그 회사의 광고판이 되지 않았다 … 우리는 교육을 통해 무엇을 배운 것일까? 성공한 모습을 고작 가방이나 옷으로 뽐내고 싶어 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선뜻 말해 주기가 망설여졌다 … 발도로프 학교의 교실에는 거울도 없다. 우리가 거울을 자꾸 보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거울이 없어야 하는 이유도 알 수 있다 ..  (152, 174. 175, 177쪽)


  아이들은 ‘학교에 가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른이라면 스스로 생각해 보셔요. 아이들은 왜 태어나는가요. 아이들을 왜 낳습니까.


  아이들은 ‘사랑을 받으려고 태어납’니다. 오직 이 한 가지입니다. 어른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요? 아주 쉽고 마땅하겠지요? 어른은 ‘아이를 사랑하려고 낳’아요.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사랑을 받아야 해요. 아이들은 집에서 어버이와 즐겁게 살아가며 ‘삶을 배우’면 돼요. 굳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다면, 아이들이 ‘사랑받고 사랑하며 사랑 나누는 배움터’인가 아닌가를 찬찬히 살피고 따져야 합니다. 지식 잘 집어넣고 대학교 잘 보낸다는 지옥구렁텅이 아닌, 아이와 어른이 어깨동무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숨결 건사하는 아름다운 배움터에 아이들이 다닐 수 있도록 힘쓸 노릇입니다.


.. 처음에 발도로프 학교에 가서 놀란 것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어떤 예방주사도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어떨 땐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들이 예방주사를 맞히지 않겠다는 결정을 했다면, 또 그 자녀들이 건강하다면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신뢰감이 생겼다. 더구나 그런 부모 중엔 의사들도 있었다 … 그런데 발도로프 학교에 가서 주사를 맞히지 않고도 잘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생각해 보니, 우리 부모 세대는 온갖 예방주사를 안 맞고도 아직까지 건강하게 살아왔고, 내 세대만 해도 지금처럼 많은 주사를 맞지 않았는데, 지금 우리는 새로 개발되는 모든 주사를 당연히 아이에게 맞혀야 한다고 여기게 된 것이 신기했다 ..  (158, 159, 160쪽)


  강성미 님이 쓴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샨티,2013)라는 책을 읽습니다. 강성미 님은 당신 딸아이 민주를 ‘발도로프’라 하는 학교에 보냈다고 합니다. 발도로프라 하는 학교에서 여덟 해 보낸 나날을 여덟 해 지나고 또 더 지난 어느 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갈무리해서 책 하나로 선보입니다.


  첫 쪽부터 끝 쪽까지 차근차근 읽으며 생각합니다. 글쓴이 강성미 님은 당신 딸아이를 ‘학교에 보냈다’고 할 만할까요? 틀림없이 이름은 학교가 맞겠지요. 그런데, 발도로프 학교는 학교가 맞을까요?


  어린 민주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어버이 강성미 님은 아이를 학교에 넣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을 누리고 사랑을 키울 곳’을 찾아보았습니다. 어린 민주는 ‘사랑을 누리면서 아름다움을 한껏 껴안을’ 곳을 다녔어요. 어버이 강성미 님은 아이가 ‘사랑을 받으면서 아름다움을 한껏 북돋울’ 곳을 찾았어요.


.. 학교 수업 중 영상으로 진행하거나 컴퓨터를 이용하는 수업도 없다. 학부모들에게도 녹음된 이야기를 틀어 주지 말고, 엄마가 직접 읽어 주라고 하고, 음악도 전문가들이 연주해 녹음한 레코드보다는 어설프더라도 직접 부르고 직접 연주하는 소리를 들려주는 게 더 낫다고 한다 … 열 살이 된 아이에게 지금 대통령 선거를 하고 있는데 누가 될 것 같으냐, 누가 더 좋으냐를 묻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이들이 그런 사실을 안다 해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아름다움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 성인이 되어 행복한 삶을 꾸리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을 어린이답게 보낸 사람들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  (180, 183쪽)


  누군가는 발도로프 학교에 아이를 보내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여느 제도권 입시지옥 학교에 아이를 보내더라도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시설이나 제도나 원칙이나 규칙이 훌륭한 시설에 보내기에 더 좋다고 하지는 않아요. 시설이나 제도나 원칙이나 규칙은 대수롭지 않아요. 어린 민주로서는 발도로프 학교에 앞서, 어린 민주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 스스로 ‘아름다운 사랑’을 생각하는 집살림을 꾸리고 집일을 했기에, 어느 곳에 다니더라도 즐겁게 하루하루 누리며 자랄 만해요.


  다만, 강성미 님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알지는 못해요. 이를테면, 예방주사를 마치 ‘미신(?)’처럼 믿으며 모든 예방주사를 맞히던 이야기가 이 책에 나와요. 발도로프 학교에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예방주사를 안 맞힌다고 밝혀요.


  잘 따져 봐요. 아이한테 유기농 곡식 먹이는 까닭이 무엇이겠어요? 아이한테 아무것 함부로 안 먹이지요? 아이가 입는 옷도 화학섬유인지 천연섬유인지 따지지 않나요? 휴지 하나조차 형광물질 깃들었는지 안 깃들었는지 따지지 않나요? 빨래를 손으로 하든 기계한테 맡기든, 세제 성분이 어떠한지 꼼꼼히 따져서 쓰지 않나요? 그러면, 몸이 아프지 않도록 몸속에 곧장 약품 집어넣는 예방주사를 맞힐 때에 어떻게 해야겠어요? 예방주사 맞히기 앞서 주사 성분이 무엇인지 낱낱이 따지고 알아본 뒤에라야 비로소 맞힐 노릇이지요. 그런데, 참 많은 어버이들은 ‘밥·옷·집’은 그럭저럭 따지거나 살피면서 예방주사만큼은 안 따지고 ‘미신(?)’처럼 믿지요. 발도로프 학교에 아이를 넣은 어버이 가운데 ‘의사가 있지’ 않았다면, 어버이가 의사이면서 아이한테 예방주사 안 맞히는 집이 있는 줄 못 보았다면, 강성미 님으로서도 예방주사가 무엇인지 슬기롭게 살피거나 바라볼 마음을 못 품었겠구나 싶어요.


  어쩌면, 강성미 님도 어린 나날부터 당신 어버이한테서 ‘집에서 어버이와 누리는 사랑을 한껏 맞아들이지 못했’기에, 이런 대목 저런 구석 꼼꼼이 못 짚었을 수 있어요. 저부터 지난삶 돌아보면 그래요. 저도 제 숨결은 제 어버이가 따순 사랑을 모두어 낳았지만, 먹고 입고 자는 삶을 조금 더 슬기롭게 가르치거나 보여주지 못한 대목 많다고 느껴요. 그렇다고 저도 제 어버이처럼 제 아이한테 ‘어설프거나 어수룩한’ 대로 마주할 수 없어요. 스스로 새로 배워야지요. 스스로 새로 사랑을 생각해야지요.


  누군가는 스스로 새로 배우거나 사랑을 찾는 길을 시골마을 시골집에서 조그맣게 품을 수 있어요. 누군가는 대안학교를 찾아다니며 이 사랑길 찾을 수 있어요. 누군가는 강성미 님처럼 발도로프 학교에서 사랑길 찾을 만해요.


  어느 길을 가더라도 다 좋아요. 어느 길을 가더라도, 한 가지를 늘 아낄 수 있으면 돼요. 어느 길에서건, 내가 걷는 이 길이 나와 아이 모두 사랑으로 푸르게 숨쉬는 길인가 하고 살피면서 아낄 수 있으면 되지요.


.. 우리는 자신의 몸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된다고도 하셨다. 엄마가 나를 그 몸 안에서 키우셨듯이 나도 생명을 키울 수 있다는 뜻이니 그건 축복이라고 하셨다 … 아이들이 마음껏 정직할 수 있게 해 주는 건 어른들의 몫이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들을 살펴보면 거짓말을 하도록 만드는 어른들이 주변에 있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를 보면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문화가 그 사회에 있다고 한다 … 줄리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선물하기를 좋아하셨다 … 민주는 학년마다 며칠씩 자고 오는 학급 여행을 갔을 때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  (218, 241, 254, 255쪽)


  사랑을 배우는 곳은 아름답습니다. 살림돈 넉넉하든 가난하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살림돈이 넉넉해서 잘 가르치는 집은 없습니다. 살림돈 가난해서 못 가르치는 집은 없습니다. 사랑이 넉넉하면 어느 집 어느 어버이나 잘 가르칩니다. 사랑이 가난하면 어느 집 어느 어버이나 못 가르칩니다.


  제가 제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얼마만큼 물려받았든, 저는 제가 받은 사랑을 슬기롭게 키우고 보듬어 제 아이를 더 즐겁고 아름답게 사랑하면서 고운 꿈 물려주면 넉넉합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어버이한테서 고운 꿈 물려받으면서 날마다 새로운 사랑 아름답게 북돋우면 됩니다.


  이런 수업을 해야 하지 않아요. 저런 교재를 장만해야 하지 않아요. 아파트에서 살더라도 아파트 꽃밭 한쪽에 나무씨앗 심어요. 능금나무도 좋고 배나무도 좋아요. 살구나무도 좋고 복숭아나무도 좋아요. 나무를 심고 나무를 돌보아요. 도시에서도 빈터가 보이면 씨앗 하나 정갈히 심어요. 어디에서나 풀이 돋고 나무가 자라 숲이 되도록 힘써요. 시골집에서 살아간다면, 알맞춤한 자리에 씨앗 꾸준히 심으면서 집숲 가꾸어요.


  들풀 한 포기 아껴요. 들꽃 한 송이 사랑해요. 들새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여요. 들놀이 누리면서 들노래 불러요. 되도록 두 다리로 걷고, 좀 멀다 싶으면 자전거를 타요. 자가용 없이 하루를 보내고, 자가용 없는 채 한 달 한 해 열 해 살아요. 자동차 써야 하면 택시나 짐차를 불러요. 사람들마다 집 한켠에 주차장 마련하지 말고 텃밭을 마련해요. 자동차 몰면서 여기저기 다니지 말고,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움직여요. 자동차 닦느라 품을 들이지 말고, 집안 유리창 함께 닦고, 집안 마룻바닥 함께 닦아요. 자동차 놓을 만한 넓이에 집집마다 텃밭을 일구면서, 이 텃밭에서 자라는 온갖 풀과 꽃 한껏 누려요. 자동차가 먹는 기름값만큼 이웃사랑 나누는 데에 돈을 써요. 자동차 한 대 장만하는 물건값만큼 책을 사서 아이와 함께 읽어요.


  사랑을 배우는 곳이 내 보금자리와 내 마을과 내 나라가 되도록 삶을 가다듬어요. 지구별 어디에서나 사랑을 배우고 가르치는 아름다움 누릴 수 있도록 마음을 착하고 참답게 추슬러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사랑을 받을 때에 웃지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사랑을 베풀 때에 웃어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웃지 않는 곳이라면, 이런 데에서는 일하지도 놀지도 살지도 말 노릇이에요. 함께 웃고 서로 사랑하며 나란히 삶 누리는 빛 하나 느낄 수 있기를 빌어요. 4346.4.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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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 따뜻한 신념으로 일군 작은 기적, 천종호 판사의 소년재판 이야기
천종호 지음 / 우리학교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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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작고 여린 사람들
[사랑하는 배움책 15] 천종호,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우리학교,2013)

 


- 책이름 :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 글 : 천종호
- 펴낸곳 : 우리학교 (2013.2.18.)
- 책값 : 14000원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납니다. 아이들은 창호종이문으로 스미는 볕살을 느끼며 일어납니다. 아이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기도 하고, 해가 퍽 올라온 뒤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른새벽부터 제비가 노래하고, 멧새와 들새가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노래합니다. 제비들이 처마 밑 옛 둥지로 찾아와서 노래하니, 다른 멧새와 들새도 우리 집에 걱정없이 찾아오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보다는 우리 집 마당 한켠 후박나무 그늘이 좋고, 바로 옆에 동백나무가 있으니 나들이 할 만하다 여기는구나 싶어요. 동백꽃은 사월로 접어들며 소담스러운 꽃송이 하나둘 떨구는데, 바야흐로 후박나무도 후박꽃 피우려고 꽃봉오리 하나둘 단단히 여물려고 합니다. 후박꽃은 사월 한복판을 지나 오월이 다가올 때에 피어나요.


  새들은 후박꽃을 먹습니다. 우리는 후박꽃을 못 먹습니다. 마당 한켠 후박나무가 꽤 높이 자라 손이 안 닿으니 못 먹습니다. 새들은 마음껏 날갯짓하며 우듬지에도 앉고 나뭇가지 흐드러진 안쪽에도 깃듭니다. 후박꽃이 필 무렵부터, 마을 새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놉니다. 새들은 후박꽃 따먹으며, 또 후박꽃 지며 맺는 이쁘장한 바알간 열매 따먹으며 놉니다. 새들은 꽃송이랑 열매 따먹으며 후박나무 자라는 흙땅에 똥을 누겠지요. 이 똥은 후박나무 더 씩씩하게 자라는 밑거름 되겠지요.


  가을날 마당을 가만히 바라보면 작은 새들은 재피나무 까만 열매도 따먹어요. 재피나무 열매는 좀 확 하고 올라올 텐데, 새들은 아랑곳하지 않아요. 어쩌면 그 확 하고 올라오는 맛 때문에 부러 재피나무 까만 열매 즐겨먹을 수 있어요.


.. 처벌을 위해 과거의 사실관계를 들추는 대신 소년의 미래를 위해 그의 내면의 문제와 환경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도록 소통해야 한다 … 만일 그때 법정으로 뛰어들어 온 현수에게 건방지다며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소년원에 보냈다면 지금 현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 건강한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해 본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세심하게 살펴야만 이들이 보내는 마음의 신호를 읽을 수 있다 ..  (26, 36, 37쪽)


  아이들과 들마실을 하며 너른 들판 바라봅니다. 너른 들판 신나게 날아다니는 제비 네 마리 봅니다. 아직 마을 다른 곳에서나 면소재지에서나 읍내에서나 다른 제비를 구경하지 못합니다. 우리 집 처마 밑에는 삼월 둘째 주 무렵부터 제비가 찾아왔습니다. 지난해 깨어난 제비들이 씩씩하게 커서 돌아왔어요. 왜 다른 동무들하고 나란히 찾아오지 않고 먼저 찾아왔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다른 어느 집보다 제비 노랫소리 일찍부터 듣고, 한결 오래 들을 수 있구나 싶어 즐겁습니다.


  제비 둥지 밑에 올해에는 똥받이를 붙입니다. 그런데 제비들이 똥받이에 앉아 똥을 눕니다. 이런. 얘들아. 이렇게 똥을 누면 똥받이를 다나 마나이잖아. 너희가 둥지에 앉아 똥을 누니 밑에 똥받이 달았는데, 똥받이에 앉아 똥을 누면 그 밑에 다시 새 똥받이를 달아야 하니.


  봄풀 뜯어서 밥상을 차리다가 제비 노랫소리 듣고, 아이들과 마당에서 해바라기하며 놀다가 제비 노랫소리 듣습니다. 작은아이도 큰아이도 제비가 먹이 물어 둥지로 찾아들 때에 목이 빠져라 올려다봅니다. 재빠른 날갯짓 바라보고, 째째째째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 제비 모습 넋이 나간 듯 바라보는 모습을 새삼스레 보면서, 내 어릴 적 인천에서도 흔히 보던 제비를 떠올립니다. 1980년대에는 공장도시 인천에서조차 제비를 쉽게 보았어요. 제비뿐 아니라 박쥐도 쉽게 보았어요. 그무렵 멧새나 들새 이름을 거의 모르기는 했어도, 여러 가지 새를 흔히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도시에서는 참새와 비둘기 아니고는 만날 길 거의 없어요. 조용한 골목동네에서는 직박구리나 박새나 어치를 가끔 만나기도 하지만, 서울 한복판이나 부산 한켠에서 어떤 멧새나 들새가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람조차 돈이 없으면 살 터 마련하지 못하는데, 참말 도시에서는 어떤 새가, 어떤 짐승이, 어떤 벌레가, 어떤 개구리가, 어떤 뱀이, 느긋하게 보금자리 마련하며 새끼들 곱게 낳아 정갈하게 보살피며 키울 수 있을까요.


  가만히 따지면, 도시에서 새나 들짐승이나 개구리가 살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도시 어디나 사람조차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리라 느껴요. 사람 스스로 이웃사람 아끼지 못하는 도시 문명사회 얼거리인 탓에, 사람 아닌 여느 목숨붙이 또한 곱게 깃들이기 힘들구나 싶어요. 우리네 도시에 사람들이 걱정근심 내려놓고 웃음과 기쁨으로 노래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서울이든 부산이든 제비 다시 찾아들고 노랑할미새 꾀꼬리 아리땁게 노래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 나는 다만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따뜻한 온기를 받아 보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절망으로 자신을 성급히 포기하는 일만은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 중학교 때 선생님께 경태한테 갈취당한 사실을 알렸는데도 선생님이 별다른 조치를 취해 주지 않았고, 오히려 고자질했다는 이유로 경태한테서 심한 보복성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 그런데 그 시설에서 일수는 또 다른 폭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소년들을 보호하고 선도해야 할 시설에서 소년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룬 것이다. 일수는 그곳에서 거의 매일 맞거나 기합을 받곤 했는데, 어떤 날은 몽둥이로 100대를 맞기도 하고, 앉았다 일어서기만 2000개씩 한 날도 있었다고 했다 ..  (58, 116, 148쪽)


  모두 다 작고 여린 사람들입니다. 서로 밟고 밀치며 1등 되려고 다투면, 1등 아닌 모든 사람들은 그만 쓰러지거나 고꾸라지거나 다치고 말아요. 작고 여린 사람들이거든요. 게다가, 1등 자리에 올라선 이조차 얼마 못 지나 1등에서 밀려나겠지요. 다른 사람한테 1등 자리를 내주겠지요. 그러면, 이 사람, 1등 자리에서 밀려난 이 사람은 어찌 될까요. 그동안 다른 사람 밟거나 밀치며 올라서던 이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밟히거나 밀려날 때에 무엇을 느낄까요. 이제서야 지난 일 돌이켜면서 뉘우칠까요. 끝도 없는 벼랑에서 미끄러진다고 느낄까요. 이제부터 이웃사랑 나누면서 아름다운 삶 일구어야겠다고 느낄까요.


  모두 다 작고 여린 목숨들입니다. 풀포기도 나무도 참으로 작고 여린 목숨들입니다. 지게차로 밀거나 파헤치면 뿌리뽑혀 숨을 거두고 마는 작고 여린 목숨들입니다. 자동차 배기가스와 공장 연기와 발전소 열폐수 때문에 시름시름 앓는 작고 여린 목숨들입니다.


  사람들은 고속도로를 얼마나 더 내야 하나요. 사람들은 찻길을 얼마나 더 넓혀야 하나요. 고속도로를 낸다 해서 우리 사회가 발돋움할까요. 고속도로 때문에 숲을 망가뜨리고 논밭을 밀며 멧골에 구멍을 내면, 정작 사람 사회까지 망가지거나 무너지지 않나요.


  자동차 없어도 누구나 살아갈 수 있지만, 늘 마시는 바람이 더러워지면 사람들 누구나 아프거나 앓다가 숨이 막혀 죽습니다. 가공식품 세겹살 소고기 없어도 사람들은 굶지 않지만, 늘 마실 물이 지저분해지면 사람들 누구나 아프거나 앓다가 목이 말라 죽습니다.


  사람들이 지킬 첫째는 바람이고, 둘째는 물이요, 셋째는 햇볕과 흙이에요. 바람과 물과 햇볕과 흙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리하여 도시에서 논밭과 숲과 들이 사라진다면, 시골 논밭과 숲과 들조차 망가뜨리고 갯벌을 메우는 짓 멈추지 않는다면, 이 푸른 터전에서 살아가던 작고 여린 목숨들도 죽을 뿐 아니라, 바로 사람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어요.


.. 무엇보다 집단성폭력사건을 처리할 때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절실하다. 피해자가 입은 상처는 가해자들에 대한 엄벌만으로는 치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동안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온 모임과 비행내용은 치기 어린 학생들의 실수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사뭇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소년들의 부모, 교사, 사건 관계자들은 가벼운 처분으로 서둘러 사건을 종결하려고만 하고 있었다 … “민웅이가 학교를 그만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져 보셨습니까? 이렇게 화해가 되는 것을 그동안 왜 안 하셨습니까? 좀더 일찍 성규와 화해가 됐더라면 민웅이가 학교를 떠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릅니다. 꼭 아이를 볼모로 잡아야만 화해를 합니까?” ..  (89, 124, 180쪽)


  천종호 님이 쓴 책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우리학교,2013)를 읽습니다. 경상도 창원에서 판사 일을 하는 천종호 님이 법정에서 재판을 하며 만난 아이들 삶을 적바림한 이야기책입니다. 법정으로 붙들려 온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미안하다’고 말한다지요. 그러나, 정작 ‘미안하다’ 말할 사람이란 어른들이라지요.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따스한 보금자리 마련하지 못했기에, 아이들이 사랑을 펼치며 누리는 삶 아닌, 사랑을 모르는 채 미움과 따돌림과 괴롭힘과 다툼으로 얼룩진 채 살아야 한다지요.


.. 용규는 어머니의 냉정한 독설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친어머니로부터 그런 말을 듣는 용규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 사랑과 절대적인 믿음은 때로 사막을 숲으로 만들기도 하고 폐허 위에서도 생명을 자라게 한다 … 민철이는 아주 어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아버지마저 돌봐 주지 않아 부모의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채 험하게 살아왔고, 성민이도 일곱 살에 어머니가 자살한 이후 가정의 따뜻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비행세계를 전전하며 살아왔다 ..  (218, 235, 273쪽)


  어른이 할 일이란 무엇일까요. 어른이 살아갈 곳은 어디일까요. 어른들 스스로 이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느껴요. 참말, 어른은 무엇을 하며 살아갈 때에 아름다운 숨결이 될까요. 참으로, 어른은 어디에서 살아갈 때에 착하며 참다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돈을 얼마나 벌어야 하느냐는 어리석은 생각 내려놓기를 빌어요. 이름값 얼마나 높여야 하느냐는 어리숙한 생각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라요. 권력을 거머쥔다거나 패거리 질서를 내세워 서로서로 다투거나 괴롭히는 짓 그칠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웃으며 노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지요. 즐겁게 춤출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해야지요. 아이들하고 신나게 뛰놀 마당과 빈터가 마을마다 넉넉히 있어야지요. 어른들도 자동차 시끄러운 소리나 가게에서 새어나오는 짓궂은 소리에서 홀가분한 채 이야기꽃 피울 만한 살가운 삶터 누려야지요.


  아이들이 살아가기에 좋은 터는 어른들도 살아가기에 좋은 터입니다. 아이들이 놀기에 좋은 자리는 어른들도 일하기에 좋은 자리입니다. 아이들이 싱그럽게 꿈꿀 수 있는 마을은 어른들도 꿈과 사랑 펼치기에 좋은 마을이에요.


.. 마음의 상처가 깊은 아이들일수록 보기에 겁이 날 정도로 음식에 욕심을 내는데, 음식을 입에 넣고 두 번 이상 씹지도 않고 그냥 꿀꺽 삼켜 버리거나 하루에 여덟 끼를 먹는 등 상상 이상의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 식사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그 나이 또래의 소녀들답게 연신 재잘거리고 웃음을 터뜨리고 장난을 치며 즐거워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 역시 즐거웠다. 판결을 내리는 판사와 그 판결을 기다리는 보호소년으서가 아니라 평범한 아저씨와 아이들로서의 만남이 너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려는데 한 아이가 무심결에 말했다. “판사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대접을 잘 받았어요.” ..  (280, 287∼288쪽)


  예부터 어느 마을에서고 이웃집 밥숟가락 숫자를 모두 알았습니다. 예부터 어느 마을에서고 아궁이에 불을 땔 적에 밥을 끓이는지 물을 끓이는지 뻔히 알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돕고 아끼며 살았습니다. 가멸찬 사람들은 가멸찬 사람들대로 이웃한테 마음을 나누어 주고 밥을 함께 먹으며 살았습니다. 너무 마땅한 노릇인데, 서로 돕고 함께 품앗이를 할 적에 모두 즐거운 삶 누리거든요.


  봄들판 바라봐요. 봄들판에 얼마나 많은 풀이 돋고 꽃이 피어나는지 바라봐요. 봄숲 거닐어요. 봄숲에 얼마나 많은 나무가 자라고 얼마나 많은 새잎 나는지 바라봐요. 봄들판에 돋는 풀은 마을사람 모두 먹어도 넉넉합니다. 봄숲에서 자라는 나무는 마을사람 땔깜으로 쓰기에 넉넉합니다.


  작고 여린 사람들은 작고 여린 숲을 작고 여린 손길로 보듬으며 살아갑니다. 작고 여린 사람들이기에 작고 여린 목숨들 아끼며 살아갑니다. 작고 여린 사람들이 작고 여린 마을 사랑하면서, 작고 여린 이야기 빚습니다.


  크거나 대단한 이야기 되어야 하지 않아요. 크거나 대단한 도시 될 까닭 없어요. 크거나 대단한 나라 될 때에 살기 좋지 않아요. 봄바람 누리고 봄볕 쬘 수 있을 때에 살기 좋아요. 여름노래 부르며 여름놀이 즐길 때에 살기 아름답지요.


  살기 좋은 곳에서는 살기 좋은 살림 꾸립니다. 살기 좋은 곳에서는 서로 아끼며 돌보는 삶 누립니다. 살기 좋은 곳이 못 되기에 자꾸 다투고 자꾸 싸우며 자꾸 미워하고 맙니다. 그러나, 살기 좋은 곳이 못 되더라도 살기 좋은 곳이 되도록 애쓸 수 있어요. 마음을 기울이면 되고, 사랑을 쏟으면 돼요. 처음부터 살기 좋은 곳이란 없거든요. 차근차근 마음을 기울여 아름답게 일군 곳이 살기 좋아요. 차근차근 사랑을 쏟아 넉넉하게 일구는 살림이기에 삶이 즐겁습니다.


.. “내가 왜 네 엄마야? 선생님이지.” 상준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엄마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을 엄마라고 부르게 해 주세요.” … 너무 이른 나이에 불친절한 삶에 내던져져 이곳에 와 있지만 아직은 모두 순수함을 지니고 있는 아이들일 뿐이다. 그들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듣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어 감성을 일깨우는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일이야말로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  (300, 327쪽)


  천종호 님이 하는 일이란 ‘판결’이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천종호 님은 재판장에서 아이들과 살가이 사귀면서 ‘사랑’을 나누어 주는 일 한 가지 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제도권 법 테두리에서는 법리를 따지고 법해석을 하며 법에 맞추어 판결을 하겠으나, 판결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은 재판을 받을 아이들 아닌 사랑을 받을 아이들이에요.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한테 이런 판결 저런 법리를 들이민대서 아이들 마음속에서 사랑이 움틀 수 없어요.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은 더 사랑받아야 해요.


  사랑받지 못한 어른들도 더 사랑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누리지 못한 어른들은 참말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어른들한테도 법리와 법해석과 법판결 떠난 사랑과 꿈과 믿음을 들려주어야 해요. 어른들도 고운 사랑 누리면서 이녁 삶을 아름답게 누리는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모진 말을 내뱉거나 짓궂은 짓 일삼은 어른들을 가만히 살펴봐요. 당신들도 어릴 적부터 사랑을 못 받았어요. 사랑을 못 받은 굴레가 되풀이되고, 사랑하고 동떨어진 채 힘겹게 꾸린 수렁이 이어집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슬픈 굴레에서 벗어나야지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기쁜 삶을 누려야지요. 서로 따스한 말을 나누고, 함께 즐거운 하루 빛내야지요. 4346.4.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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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창작의 즐거움
황선미 지음 / 사계절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어린이책 읽는 삶 31

 


즐겁게 쓰고 읽는 어린이문학
― 동화 창작의 즐거움
 황선미 글
 사계절 펴냄,2006.3.29./10800원

 


  어린이문학을 꾸준하게 내놓는 황선미 님은 어느덧 대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자리에 섭니다. 어린이문학을 꾸준하게 내놓는 분들이 대학교수 되어 문학을 가르치는 일이 반갑습니다. 평론가나 비평가들만 가르치는 문학이 아닌, 스스로 문학을 일구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문학이 될 때에, 문학을 배우려 하는 젊은 넋한테 푸른 숨결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더욱이, 어린이문학을 이야기할 자리에는 바로 어린이문학을 일구는 사람이 서야겠지요.


  《동화 창작의 즐거움》(사계절,2006)이라는 책은 황선미 님이 한창 ‘동화 창작 교육’을 하던 때에 내놓은 이론책입니다. 동화쓰기를 하고 싶은 이들한테 들려주는 ‘동화는 어떻게 쓰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동화란 무엇인가를 살피고, 동화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동화를 쓸 때에 어떤 얼거리를 살펴야 ‘읽을 만한 작품이 되는지’를 차근차근 밝힙니다.


  그런데, 황선미 님은 《동화 창작의 즐거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이야기를 자꾸 되풀이합니다. 9쪽부터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동화 창작은, 독자 대부분이 어린이인 데 반해 이 작업을 어른(작가)이 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모순을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어른은 결코 어린이가 될 수 없고, 어린이는 결코 자신을 속속들이 설명할 수 없는 탓이다.” 하고 말합니다. 어른은 어린이가 될 수 없고, 어린이는 누구인지 밝힐 수 없다, 이 이야기를 꾸준하게 들려주어요.


  참말 그럴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생각을 기울입니다. 어른은 어른이고 어린이는 어린이일 테니까, 어른이 어린이를 안다 할 수 없다 할 만하고, 어린이 또한 어른을 안다 할 수 없다 할 만하겠지요. 그러나, 참말 그럴까요.


.. 삶의 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 작가일수록 인간미를 다룰 줄 아는 따스한 감성의 소유자로, 거대담론에 집착하는 작가보다 소중할 수 있다 … 문학에는 정답이 없고 새로운 가치 창조란 작가만의 독창성에서 나온다.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만이 제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세계를 계획하고, 그 세계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  (35, 53쪽)


  어른은 누구나 어린이로 살았습니다. 어른이라 하더라도 누구이든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어른 모두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받아 태어난 목숨입니다.


  어린이는 모두 푸르게 자라고 크면서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어린이는 커다란 몸뚱이로 씩씩하게 이 땅을 일구면서 살림을 꾸립니다.


  나는 내 어린 나날 돌아보면서 ‘내 어린이 마음’을 헤아립니다. 나는 ‘내 어린이 마음’을 헤아리면서 ‘다른 사람 마음’과 ‘다른 어린이 마음’을 헤아립니다. 우리 집 두 아이를 돌보는 하루 누리면서 ‘이 아이들 마음’이 되지는 않아요. 그러나, ‘우리 집 두 아이와 같은 눈높이’에 서도록 ‘나 스스로 내 지난날 어린이 눈높이’가 되어 생각을 하고 마음을 기울입니다. 우리 집 두 아이하고 마주하려고, 나는 우리 집 두 아이하고 함께 어울리는 ‘어린 내 모습’으로 몸과 마음을 바꿉니다.


  어른은 어른이지요. 그러나, 어른은 어린이로 지낸 나날이 있어 어른입니다. 그리고, 몸뚱이는 어른이 되었어도 어릴 적 마음과 꿈과 넋과 사랑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아름답게 보듬는 사람이 있어요. 큰 마음 작은 아이요, 작은 마음 큰 어른일 수 있어요.


  어른이 어린이를 모른다는 말이 참이냐 거짓이냐 하고 가리려는 뜻이 아닙니다. 어른 스스로 어린이를 모른다고 여기면 참말 모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도 스스로 어린이 넋과 꿈과 마음과 사랑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눈높이를 맞추고 삶을 어깨동무할 적에는 ‘마음읽기’와 ‘생각나누기’를 할 수 있어요. 나는 이를 어른이 되고서 깨닫습니다. 내가 어린이일 적에는 마땅히 스스로 어린이이니까 어린이를 헤아린다고 할 테고, 어른으로 살아가는 오늘날은 ‘내가 누린 어린이 나날은 이러했구나’ 하고 하나하나 짚으면서 어린이 속살을 곱씹어요.


  거꾸로, 어린이일 적에도 어른을 생각합니다. 어린이였던 나는 ‘내가 저 어른과 같은 자리에 있으면 어떤 마음이 되고 어떤 생각을 할까’ 하고 가만히 되뇝니다. 속으로 오래도록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가눕니다. 이렇게 하면, 어린이인 나는 어른인 내 둘레 누군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꽃을 마주할 때에도 똑같아요. 꽃하고 눈높이를 맞추고 마음을 주고받으려고 하면 꽃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나무하고도 이와 같고, 새와 벌레와 풀과 들짐승하고도 이와 같아요. 스스로 마음을 기울일 때에 마음을 나누어요. 스스로 생각을 쏟을 때에 생각을 주고받아요.


  그래서, 동화를 쓰든 어른소설을 쓰든, 글을 쓰는 사람은 생각을 쓰는 사람이요 마음을 쓰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 나무마음을 글로 씁니다. 스스로 마음을 바쳐 이웃사람 꿈과 사랑을 글로 빚습니다.


.. 작가가 어린이의 본질과 염원을 고스란히 내포한 인물을 그려내면, 어린이는 이야기와 주인공들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에게 기쁨이 되고 자신의 소망을 대신 이루어 줄 수 있는 주인공을 용케도 알아보고 찾아 갖는다 …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 동화의 문장이지만, 작가는 이 평범한 언어로 특별하고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만 한다 ..  (75, 121쪽)


  글을 쓰는 사람은 늘 ‘글을 쓰는 바로 나 스스로’를 이야기합니다. 언제나 ‘나를 한복판에 둔 채’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읽거나 동무를 읽거나 푸나무를 읽거나 하늘이나 바람을 읽거나, ‘내가 마음을 기울여서 읽기’ 때문입니다. 이기주의나 개인주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 목소리 들려주는 눈높이’를 이웃한테 맞추고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삶을 읽고 삶을 쓴다는 뜻입니다. 곧, 내 넋을 제대로 읽을 때에, 내 아이들 넋을 제대로 읽을 수 있어요. 내 마음을 슬기롭게 알아차릴 때에, 내 이웃들 마음을 슬기롭게 알아차립니다. 내 생각을 사랑스레 보듬을 때에, 내 동무들 생각을 사랑스레 보듬을 수 있어요.


  글쓰기란, 언제나 마음을 씁니다. 마음쓰기가 글쓰기입니다. 글쓰기는, 늘 생각을 씁니다. 생각쓰기가 글쓰기예요. 글쓰기이기에, 노상 사랑을 씁니다. 사랑쓰기가 바로 글쓰기이지요.


  판타지동화가 되든 생활동화가 되든, 모두 마음을 쓰고 생각을 쓰며 사랑을 씁니다. 글쓴이가 내놓은 글틀이 ‘판타지’나 ‘생활’이 되었을 뿐이고, ‘동화’나 ‘소설’이 될 뿐이에요.


  그래서, 《동화 창작의 즐거움》이라는 이론책은 다른 무엇보다, 이 책을 쓴 황선미 님 스스로 ‘동화를 쓰는 즐거움’이 무엇을 밝히는 책이 될 때에 올바르면서 아름답습니다. 황선미 님 스스로 ‘동화를 즐겁게 쓰는 모습’을 이 책에서 드러낼 때에 환하게 빛나면서 널리 따스한 숨결 나눌 수 있어요.


  다만, 황선미 님은 이 대목까지 건드리지 않습니다. 동화쓰기 새내기한테 ‘동화를 어떻게 써야 읽을 만한 작품이 되는가’ 하는 대목만 건드립니다. 동화를 즐겁게 쓰는 삶을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동화를 읽는 즐거운 나날을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동화를 말하는(비평하는) 즐거운 생각나눔을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 쉽고 짧고 단순한 문장에 작가의 의도를 모두 담아야 한다 … 호기심을 돋울 만한 아무런 복선도 장치도 없이 예쁜 언어들만 나열하는 것은 언어 낭비에다 지면 낭비이다 … 어린이는 읽고도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모호한 문장에는 흥미를 갖지 못한다. 은유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로 가득 찬 문장 때문에 결국 책읽기를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작가가 아무리 대단한 사상을 가졌어도 결국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  (109, 111, 116쪽)


  여러 비평가 목소리를 따서 ‘정의’를 하거나 ‘결론’을 내야 하지 않습니다. 동화 하나를 놓고 문학평론이 꼭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강의해야 하지 않습니다. 동화쓰기를 다루는 이론책을 꼭 써내야 하지 않습니다.


  즐겁게 동화를 쓰면 됩니다. 즐겁게 동화를 읽으면 됩니다. 즐겁게 동화를 말하면 됩니다. 한결같이 헤아릴 대목은 오직 하나, 즐거움입니다. 이리하여, 사랑씨앗이 즐거움에서 비롯합니다. 웃음꽃이 즐거움에서 샘솟습니다. 눈물나무는 즐거움을 먹고 자랍니다.


  예쁜 낱말 얽는대서 동시나 동화가 될 수 없듯, ‘읽을 만한 작품이 되는 뼈대를 어떻게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이론을 밝힌대서 ‘동화 창작법’이 되지 못합니다.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도, “은유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로 가득 찬 문장 때문에 결국 책읽기를 포기해 버리”지요. 어린이문학에서만 이런 말을 하지 않아요. 어른문학도 이와 똑같아요. 그런데, 이런 말조차 너무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은유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란 무엇일까요. 어쩌면, 이런 말마디가 춤추기 때문에 문학평론이나 동화이론조차 사람들이 멀리하지 않나 궁금해요. 굳이 이런 말마디로 춤을 추지 않아도 얼마든지 아름다이 춤출 문학평론이 되거나 동화이론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모든 문학은 바로 ‘즐거움’ 때문에 짓고 읽으며 말하거든요.


  즐겁게 밥을 짓습니다. 즐겁게 빨래를 합니다. 즐겁게 아이들하고 복닥거립니다. 즐겁게 옆지기하고 이야기꽃 피웁니다. 즐겁게 사진을 찍고, 즐겁게 그림을 그리며, 즐겁게 글을 써요. 어제도 오늘도 모레도 즐거움이에요. 지난날에도 오늘날에도 즐거움이에요. 옛날이든 앞날이든 즐거움입니다. 즐거움으로 삶을 일굽니다. 즐거움으로 일군 삶을 글 하나로 담습니다. 즐거움으로 일군 삶을 담은 글을 책으로 묶습니다.


  동화책을 아이들이 좋아한다면 즐겁기 때문입니다. 옛날이야기를 아이들이 좋아한다면 즐겁기 때문이에요. 판타지문학을 좋아하는 까닭도 즐겁기 때문이지, 다른 까닭은 없어요. 앞으로 황선미 님이 새로운 이야기 하나 쓸 수 있기를 빌어요. ‘읽을 만한 동화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같은 이야기 말고, ‘황선미 님 스스로 그동안 동화를 쓰면서 얼마나 즐거웠고 얼마나 웃고 울었으며 얼마나 아름다운 삶 누렸는가’ 같은 이야기를 쓰기를 바랍니다. 4346.4.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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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4-04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마음을 쓰는 사람-이라는 말.

숲노래 2013-04-05 00:10   좋아요 0 | URL
네, 작가이든 독자이든,
일기를 쓰든 문학을 쓰든,
모두 마음을 쓰는구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