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교수의 더불어 교육혁명 - 두려움과 불안을 넘어 행복한 연대로
강수돌 지음 / 삼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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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26



도시를 떠나는 ‘시골이웃’을 만나고 싶어

― 강수돌 교수의 더불어 교육혁명

 강수돌 글

 삼인 펴냄, 2015.7.30. 16000원



  먼 옛날부터 어버이가 아이를 낳는 일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른과 어른이 서로 아끼는 짝님이 되어 사랑으로 아이를 낳을 적에는, 둘레에서 모두 기쁘게 웃음짓고 노래해 주었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한테 이름을 곱게 붙여 주고, 언제나 따스하고 넉넉한 사랑으로 품어 주었습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면서 모든 삶을 어버이한테서 배웠습니다. 풀이름을 배우고 꽃이름을 배웁니다. 엉금엉금 기다가 아장아장 걸으면서 “이 풀은 뭐야?” “이 꽃은 뭐야?” 하면서 궁금함을 풉니다. 어버이는 늘 빙그레 웃으면서 풀이름도 꽃이름도 가르쳐 주고, 벌레와 나무와 새는 저마다 어떤 이름인지 가르칩니다. 짚을 엮어서 바구니를 짜는 모습을 몸소 보여줍니다. 흙을 갈고 씨앗을 심는 삶을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먼 옛날부터 따로 학교라는 곳이 없더라도, 아이들은 누구나 이녁 어버이한테서 모든 삶을 물려받으면서 배웠습니다.



아이를 그 자체로 ‘작은 우주’로 보거나 ‘우주의 선물’로 본다면 우리는 아이를 절대 ‘함부로’ 대할 수 없다. (15쪽)


자기 삶에 대한 자유로운 결정권을 자살이 아니라 멋진 인생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온전한 인격체로 수용하는 것이다. 성적이나 외모 따위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면 된다. 그러나 이 쉬운 해법이 통하지 않는 건 왜 그런가? 그것은 대학입시라는 관문, 나아가 대학 입학 서열화라는 사다리 질서, 그리고 직업 차별과 사회 차별이라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을 가지 않아도, 또는 어떤 대학을 나와도, 사회경제적으로 차별 받지 않고 자부심을 누리며 더불어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26쪽)



  《강수돌 교수의 더불어 교육혁명》(삼인,2015)을 읽습니다. 대학교수인 강수돌 님은 ‘더불어 교육혁명’을 외칩니다. 함께 짓는 교육을 꿈꾸고, 서로 사랑하는 교육을 바라며, 같이 일구는 삶을 노래해요.


  강수돌 님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교육혁명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강수돌 님 스스로 세 아이를 돌보던 삶을 돌아보면서 ‘삶과 교육’을 이야기합니다. 서울을 벗어나서 작은도시로 갔다가, 작은도시를 벗어나서 시골로 갔다가, 시골에서도 더 깊은 두멧자락으로 다시 삶자리를 옮기면서 ‘삶과 교육’을 이야기합니다.



대부분의 노동자 부모들은 ‘자식은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갖는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나처럼 노동자 또는 하위층으로 살지 말라’는 말이다. (56쪽)


어릴 때일수록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부모와의 친밀한 시간이지 더 많은 돈도 아니요, 더 많은 학원도 아니다 …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릴수록 행복해진다. 아이의 마음이 평온해지면 아이는 스스로 호기심이나 배움의 욕구를 발동시킨다. (85쪽)



  한국에서 스스로 서울을 떠나서 시골에서 사는 대학교수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 드물리라 봅니다. 정년퇴직을 할 무렵 시골로 가는 대학교수가 아니라, 한창 젊은 나이에 시골로 가는 대학교수는 참말 몇 사람이나 될까요? 입으로만 외치는 교육혁명이 아니라, 나부터 스스로 아이를 입시지옥에 밀어넣지 않으면서 ‘삶과 교육’을 함께 바꾸자고 외치는 지식인은 그야말로 얼마나 될까요?


  교육은 ‘교과서 수업 진도’가 아닙니다. 교육은 ‘삶을 보여주고 배우며 함께 가꾸는 하루’입니다. 교육은 책이나 이론으로 할 수 없습니다. 교육은 언제나 온몸으로 할 뿐입니다. 교육은 교사자격증이 있는 사람이 하지 않습니다. 교육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오롯이 펼칠 수 있는 ‘철든 어른’일 때에 할 수 있습니다.



지난 30∼40년간 우리 사회의 변화를 보면, 갈수록 대학 준비 시간이 빨라지고 있는 게 아닌가? (98쪽)


한 가지 짚을 점이 있다. 지금과 같은 팔꿈치사회, 곧 경쟁사회는 인류의 초기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인류 역사의 대부분(95퍼센트 이상)은 협동 사회요 공생 사회였다. 지금과 같은 경쟁사회는 불과 500년 내외의 일이다. (105쪽)



  곁님하고 나는 우리 집 아이들을 학교에 안 보냅니다. 곁님하고 나는 인천이라는 도시를 떠나서 충청도 음성이라는 시골로 한 차례 옮겼고, 이곳에서 다시 전남 고흥으로는 시골로 옮겼습니다. 2011년부터 전남 고흥에서 지내는 동안 아직도 둘레에서 우리한테 묻는 말이 있는데, ‘왜 그 좋은 도시에서 이 구석진 시골로 왔느냐?’입니다. 오늘날 시골은 하나같이 도시로 아이들을 모조리 보내려 하는데, 그 ‘좋은 도시’에서 뭔 일이 있었기에 시골로 왔느냐 하면서 궁금해 합니다.


  시골은 유배지일까요? 시골은 도피처일까요? 시골은 사람 살 곳이 못 될까요?


  그런데 말이지요, 시골이 있어야 도시가 삽니다. 도시에는 논도 밭도 없어요. 시골에서 늙은 할매와 할배가 논밭을 일구어야 도시사람이 밥을 먹습니다. 고기를 얹는 상추도 시골사람이 비닐집이든 맨땅이든 상추씨를 심고 돌봐야 도시사람이 먹을 수 있습니다. 토마토, 오이, 능금, 배, 수박, 포도, 딸기 할 것 없이 모두 시골에서 납니다. 도시사람이 즐겨먹는 소고기나 돼지고기나 닭고기는 어디에서 나올까요? 다 시골에 있는 짐승우리에서 자랍니다.


  강남 한복판에서 복숭아나무를 키우는 사람은 없어요. 서울 강남 땅값이 비싸기도 할 테지만, 매캐한 배기가스와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한 강남 한복판에서 과일밭을 일굴 사람은 없습니다. 깨끗하며 조용한 시골이라야 비로소 논밭을 일구어 아름다운 열매를 맛나게 얻습니다. 시골 아이들을 모조리 도시로 보내면, 한국 사회는 머지않아 무너지고야 말아요. 손수 밥을 얻는 길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면, 한국 사회 젊은이뿐 아니라 기성세대도 곧 ‘잃어버린 식량주권’ 때문에 크게 몸살을 앓아야 하리라 느낍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너도 나도 자기 자식을 전쟁과 같은 입시 경쟁으로 내모는 것은 그것이 행복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나은 대안을 스스로 찾지 못해서가 아닐까? (122쪽)


운동장이나 체육 시간까지 없앨 정도로 경쟁 분위기에 압도당한 학교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까? 당연히도 일부 학생들은 좋은 성과를 낸다. 하지만 대다수 학생들은 좌절감, 열등감, 절망감, 배신감, 무력감, 죄책감 따위에 시달리다 마침내 자살까지 감행하기도 한다. (227쪽)



  도시를 떠나는 ‘시골이웃’을 만나고 싶습니다. 도시를 떠나서 대학입시에 이제 그만 목을 매면서, 그러니까, 아이들이 대학입시에 목을 매지 않으면서 즐겁게 저희 꿈을 키우도록 북돋울 예쁜 시골이웃을 만나고 싶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일으킨 농약바람과 비닐바람이 아닌, 두 손으로 기쁘게 땀흘리면서 논밭을 사랑하는 시골이웃을 만나고 싶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하루 아이들하고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고 놀고 어울리면서 사랑을 누렸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시골이웃을 만나고 싶습니다.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아니라, 손수 길어올린 재미난 하루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시골이웃을 만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의 대부분 부모들은 초·중 교육과정이 ‘의무 교육’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강제’로 학교에 보내야 한다. 일단 보내고 나면 학교나 당국이 요구하는 각종 시험, 심지어 일제고사, 그리고 대학 입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사람 대접을 받는다. 그것도 이른바 ‘일류’ 대학을 가야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253쪽)



  학교에 안 가는 우리 집 아이들은 날마다 놉니다. 놀고 또 놀고 새로 놉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음껏 놉니다. 여덟 살하고 다섯 살인 두 아이는 저희가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실컷 합니다. 지칠 때까지 놀고, 곯아떨어질 때까지 놉니다. 풀벌레 노랫소리와 함께 놀고, 밤바람과 밤별을 맞이하면서 놉니다. 바다에서 바다와 하나가 되어 놀고, 골짜기에서 숲과 하나가 되어 놉니다.


  노는 아이는 맑게 웃습니다. 한참 놀다가 땀을 훔치면서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습니다. 때때로 글놀이를 하고, 곧잘 편지쓰기를 합니다. 언제나 나무하고 인사하고, 새랑 나비하고 마당에서 춤을 춥니다.



시골은 일 년 내내 새로움과 신기함의 연속이다. 자연이 최고의 교과서임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 아이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면 부모가 경험한 세상의 잣대를 아이들에게 들이밀지 말고 스스로 행복하게 살면서 아이가 행복한 길을 찾도록 등불이 되면 된다. (321, 322쪽)



  아이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아이는 ‘철’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는 봄에 봄을 배우고 가을에 가을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는 아침에 아침을 배워야 하고 밤에 밤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는 씨앗을 보며 씨앗을 배워야 하고, 열매를 보면서 열매를 배워야 합니다. 《더불어 교육혁명》을 쓴 강수돌 님은 시골에서 오순도순 살림을 가꾸면서 ‘교육혁명’이 무엇인지 온마음과 온몸으로 새롭게 배우셨지 싶습니다. “더불어 교육혁명”이라는 말은 바로 시골에서 흙을 만지고 바람을 마시며 숲을 마주하는 동안 새삼스레 깨달으셨지 싶습니다.


  호박넝쿨이 뻗어 마당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늘 지켜봅니다. 호박꽃이 피고 지면서 알이 굵는 모습을 날마다 새롭게 바라봅니다. 먹음직스럽게 굵어지면 낫으로 서걱 베지요. 호박 한 덩이를 얻으면 이레 즈음 실컷 호박국에 호박볶음을 누립니다. 오늘은 뒤꼍 무화과나무에서 첫 열매를 얻었습니다. 어제 낮에 보았을 적에 잘 익었네 하고 쓰다듬었더니, 오늘 아침에 멧새가 먼저 쪼아먹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뿐 아니라 멧새도 무화과알이 아주 잘 익을 때까지 기다렸나 봐요.


  비가 오는 밤에도 풀벌레는 노래합니다. 처마 밑에서 노래할까요? 아니면 커다란 호박잎 밑에서 노래할까요? 고즈넉한 밤노래를 들으면서 삶을 배우는 하루가 차분하게 저뭅니다. 4348.8.24.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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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미지의 빨간약 - 단편소설로 시작하는 열여덟 살의 인문학
김병섭.박창현 지음 / 양철북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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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24



네 아픈 마음에 ‘빨간약’을 발라 줄게

― 여고생 미지의 빨간약

 김병섭·박창현 글

 양철북 펴냄, 2015.7.31. 11000원



  국어교사로 일하는 김병섭, 박창현 두 분이 함께 빚은 이야기책 《여고생 미지의 빨간약》은 “단편소설로 시작하는 열여덟 살의 인문학”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국어교사는 단편소설 여덟 가지를 여고생하고 함께 읽습니다. 여고생은 저마다 단편소설을 읽은 뒤에 모둠을 꾸려서 저마다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러고 나서 단편소설마다 글쓴이가 들려주려고 하는 생각이 무엇인가를 밝히려 하고, 이 단편소설을 오늘 이곳에서 여고생으로서 읽는 아이들이 마음에 어떤 꿈을 품을 만한가 하는 대목을 돌아봅니다.



“대신 우린 공부를 하잖아. 내가 알바 하고 싶다고 하면 울 엄마 항상 하는 얘기가 그거야. ‘내가 언제 돈 벌어 오라고 그랬니?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랬지.’ 공부라는 것도 결국엔 그거 아냐? 나중에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가능성.” (20쪽)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머리부터 잘라야지.”라는 말을 들으면 없던 반항심까지 생겨나는 느낌이다. 머리 길이와 성적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81쪽)



  《여고생 미지의 빨간약》에서 국어교사 ‘리쌍’은 여고생들이 읽을 단편소설을 골라서 책을 건넵니다.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인문학을 배우기로 한 여고생은 모두 다섯이고, ‘체육복 바지 단비’, ‘정리왕 수정’, ‘얼음공주 지원’, ‘빨간약 미지’, ‘반대쟁이 혜민’입니다.


  다섯 아이는 다섯 아이대로 다 다른 이름을 스스로 붙이거나 동무가 불러 주거나, 아무튼 ‘다른 어버이한테서 태어나’서 ‘다른 보금자리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단편소설 하나를 놓고서 다섯 아이는 ‘다섯 가지 삶’으로 들여다봅니다.


  다섯 가지 삶으로 바라보는 한 가지 단편소설은 어떠한 이야기가 될까요? 똑같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다섯 가지 눈길로 읽을 수밖에 없을 테지요. 그리고, 다섯 가지 눈길로 읽은 단편소설은 ‘다섯 가지 새로운 이야기’로 뻗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다섯 아이는 다섯 아이대로 이제껏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살아갈 나날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헬렌이 로봇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헬렌의 사랑을 부정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다. 로봇이지만 사랑은 진짜라는 것, 그것이 데이브를 다시 헬렌에게 돌아오게 한 이유가 아닐까? (46쪽)


나를 개새끼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니까. 이런 낙서를 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72쪽)



  여고생 다섯 아이는 왜 단편소설로 인문학을 배우려고 할까요? 이 아이들은 왜 학교 수업을 다 마친 뒤에 따로 모여서 단편소설을 더 읽으면서 ‘교과서 바깥 세계’를 배우려 할까요?


  다섯 아이는 다섯 아이대로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를 배우려 합니다. 다섯 아이는 다섯 아이대로 동무들을 저마다 사랑하기 때문에 ‘동무가 어떤 마음인가를 헤아리면서 한결 가까이에 있’고 싶어서 단편소설로 인문학을 배우려 합니다.


  다섯 아이는 독후감 쓰기를 하려고 단편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게다가 ‘더 많은 책’을 읽지 않고, ‘더 많은 작품을 찾아서 읽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이 다섯 아이는 ‘문학소녀’가 되려는 뜻이 아니라, ‘내 삶을 스스로 똑똑히 바라보면서 씩씩하게 일어서서 즐겁게 노래하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미지가 나쁜 애가 아닌 건 안다. 아주 명랑하고, 착하고, 뭐든 열심히 하려고 하고……. 하지만, 아니 그래서 나는 미지의 웃음이, 미지의 대답이 좀…… 재수 없었다. 자존심도 상했다. 미지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보다는 못했다. 나보다 공부를 못하는 미지가 같은 소설을 읽고도 무언가 더 많이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109쪽)



  열여덟 해를 살아온 여고생 나이는 ‘어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리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열여섯 해를 살아온 남중생이나, 학교를 안 다니고 열세 해를 살아온 어린이한테는 ‘나이가 많’아요. 다섯 살 아이한테도 나이가 한참 많으며, 갓 태어난 아기한테도 나이가 많을 테지요.


  나이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대수로운 대목이란, 스스로 배우려 하느냐 아니냐입니다. 스스로 배우려고 할 때에 국어교사인 리쌍 님은 아이들한테 수수께끼를 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국어교사가 들려주는 수수께끼를 듣고는 ‘정답 찾기’나 ‘해답 찾기’를 하지 않습니다. 다섯 아이는 다섯 아이대로 저마다 ‘실마리 생각하기’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다섯 여고생은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생각’을 합니다. 단편소설을 쓴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생각하고, 단편소설에 나오는 사람들 마음을 생각하며, 이 단편소설을 읽는 내(여고생) 마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이 단편소설을 읽는 동무들 마음을 생각해요.




“그래, 나도 딱 그런 상황 오면 채널 돌리고 싶어지더라. 약자를 배려한다, 스포츠 정신이다, 말들은 많아도 그냥 메달에 굶주린 사람들 같아.” (193쪽)



  인문학은 지식학이 아닙니다. 인문학은 철학이나 과학이나 문학이 아닙니다. 인문학은 삶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나누는 길입니다. 단편소설로 열여덟 살 푸름이가 인문학 첫걸음을 뗀다고 할 적에는, 앞으로 스스로 두 다리로 서서 씩씩하게 나아갈 삶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남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삶이 아닌, 내가 스스로 길을 찾으려 한다는 뜻입니다. 남이 차려 놓은 밥상대로 먹는 밥이 아닌, 내가 손수 흙을 일구어 밥을 장만한다는 뜻입니다. 무턱대고 돈만 많이 벌려고 하는 일자리가 아닌, 내 가슴속에 품을 꿈을 찾아서 사랑을 노래하려는 뜻입니다.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떠올리다 문득 든 생각 하나가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건재하다면? 사춘기 시절에 저지른 철없던 장난쯤으로 여기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아간다면? 성인이 된 후 어린 시절의 무용담 속에서 그들의 더러운 입에 내 이름이 올려지기라도 한다면? 그러므로 나는 절대 죽을 수 없었다. (210쪽)



  뛰어난 아이가 없습니다. 모자란 아이가 없습니다. 훌륭한 아이가 없습니다. 어수룩한 아이가 없습니다. 대단한 아이가 없습니다. 바보스러운 아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아이가 있느냐 하면, 오직 한 아이만 있습니다. 바로 사랑스러운 아이만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서 태어나려 하던 아이가,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픈 아이로 자라고, 앞으로 사랑을 새로운 아이한테 물려주는 어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웁니다.



나 자신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인문학은 시작한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그래, 나는 나다. 내가 그 친구들, 그 아픈 마음들, 다 알거나 제대로 치료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작은 상처는 감싸 줄 수 있지. 빨간약을 바르고 후후 불어 줄 수는 있지. 곁에 있어 줄 수는 있지. 안아 줄 수는 있지. 엎어진 김에 누워도 된다고, 다시 일어날 거면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해 줄 수는 있지.’ (240∼242쪽)




  그나저나 다섯 여고생 가운데 왜 “빨간약 미지”라는 아이 이름으로 책을 엮었을까요? ‘체육복 바지 단비’나 ‘정리왕 수정’이나 ‘얼음공주 지원’이나 ‘반대쟁이 혜민’은 왜 책이름에 오르지 않을까요?


  《여고생 미지의 빨간약》을 읽으면, 다섯 아이 삶 가운데 ‘빨간약 미지’라는 아이 삶이 ‘가장 수수하다(?)’고 볼 만합니다. ‘빨간약 미지’라는 아이는 다른 동무들처럼 어릴 적부터 여러모로 ‘마음이 다친(상처를 받은)’ 일이 드물다고 떠올립니다. 미지네 어버이가 놀라운 부자도 아니고 엄청난 사랑을 베풀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웃음이 흐르는 삶을 즐겁게 누렸다는 대목을 헤아리니, 다른 아이들은 이런 ‘수수한 사랑’조차 못 느끼거나 멀리 떨어진 데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고 악을 썼구나 싶어서 어쩐지 혼자 외톨이가 된 듯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빨간약 미지’는 제 가방에 늘 있는 ‘빨간약’처럼, 아주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빨간약’으로 동무들을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딱히 도움말을 들려주지 못해도, 동무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힘들어 하는 동무가 부르면 천천히 다가가서 손을 맞잡고 일어서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나는 무심코 단비의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반으로 접혀 있던 단비의 낙서 종이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걸 보고 깜짝 놀란 나는 단비에게 참 미안하고 많이 부끄럽고 그러다가, 그냥 단비가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153쪽)



  네 여고생은 저마다 가슴에 새겨진 슬픔과 아픔이 있어서 ‘체육복 바지’가 되고 ‘정리왕’이 되고 ‘얼음공주’가 되고 ‘반대쟁이’가 되었습니다. 이 네 아이한테 ‘빨간약’을 발라 주면서 빙그레 웃을 수 있는 미지라는 아이인 터라, 이 이야기를 담은 책은 《여고생 미지의 빨간약》이 됩니다.


  사랑은 늘 가장 수수한 데에 있습니다. 바로 내 가슴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네 가슴에 있습니다. 내 가슴에서 흐르는 사랑이 네 가슴으로 날아가고, 네 가슴에서 자라는 사랑이 내 가슴으로 달려옵니다. 서로 아름답게 만나서 기쁘게 노래하는 하루가 되면서, 다섯 아이들은 새로운 삶에 눈을 뜨는 인문학을 단편소설로 국어교사하고 함께 배웁니다. 4348.8.2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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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내 동생 꿈터 어린이 1
키시카와 에츠코 지음, 노래하는 나무 옮김, 카리노 후키코 그림 / 꿈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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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10



‘소리 없는 곳’에서도 씩씩한 아이

― 힘내라! 내 동생

 키시카와 에츠코 글

 카리노 후키코 그림

 노래하는 나무 옮김

 꿈터 펴냄, 2005.1.26. 9000원



  애벌레가 기어갑니다. 애벌레는 잎사귀를 타고 바지런히 기어갑니다. 알에서 깨어나 잎을 먹는 애벌레로 사는 동안 새한테 잡아먹히기도 하지만, 씩씩하게 살아남아 나비로 거듭날 꿈을 꾸면서 바지런히 하루를 누립니다. 애벌레는 볼볼 기어다닐 수만 있다고 해서 제 몸을 서운하게 여기거나 싫어하지 않습니다. 애벌레인 몸으로 살 적에는 푸르고 싱그러운 잎을 배불리 먹자는 생각만 합니다. 푸른 숨결을 온몸으로 맞아들여서 새로운 몸으로 깨어나자고 꿈을 꾸어요.


  곁님이 닷새 즈음 마룻바닥과 방바닥을 천천히 기면서 지냈습니다. 그제 처음으로 일어설 수 있었고, 어제 비로소 걸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아기로 돌아간듯이 기면서 지내다가 다시 서고 걷는 모습을 지켜보니 ‘삶이 거듭난다(진화)’고 하는 모습이 참으로 이와 같구나 하고 느낍니다.



어느덧 마짱이 태어난 지 다섯 해가 흘렀어요.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난 나는 쪽마루로 갔어요. 맞은편 공원에 잎사귀가 모조리 떨어진 목련나무 위로 거울같이 맑은 파란 하늘이 펼쳐졌어요. (8쪽)



  아픈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요? 스스로 아픈 사람으로 살지 않는다면 ‘아픈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안 아픈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요? 스스로 안 아픈 사람으로 살지 않는다면 ‘안 아픈 마음’을 알 수 없어요.


  어버이로서 아기를 돌볼 적에는 똥기저귀도 갈고 오줌기저귀도 갈며 밥도 먹이고 몸도 씻깁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아요. 아기와 함께 놀고, 아기한테 노래를 들려주며, 아기한테 새로운 것을 기쁘게 보여줍니다. 아기를 안거나 업어서 마실을 다니지요. 반가운 이웃이나 살가운 동무한테 찾아가서 아기를 인사 시키지요.


  아기를 돌보는 어버이는 ‘아기를 안쓰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아기가 새롭게 자라는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면서 기쁩니다. 아픈 곁님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아픈 곁님을 ‘안쓰럽게 볼’ 수 없습니다. 몸이 아프든 안 아프든 똑같이 아름다운 넋이고 님이기에 여느 때와 같이 사랑으로 바라봅니다. 이리하여, 엉금엉금 기어야 할 적에 신나게 밥상을 차려서 올리고, 업어 주어야 하면 업고, 주물러 주어야 하면 주무릅니다. 닷새 만에 벽에 손을 짚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니 ‘아기가 처음 제 다리로 일어서던 모습’처럼 짠하며 아름다웠습니다.



케이타는 동생이 태어난 뒤로 나에게 갑자기 서먹서먹하게 굴었어요. 교실에서 내가 쪽지를 주어도 받지 않고 걸핏하면 내 머리를 잡아당겼지요. 게다가 귀머거리 동생을 두었다며 놀려대기도 했어요. (13쪽)


아빠는 소리 크기를 끝까지 울렸어요. 나는 슬퍼졌어요. 아무리 소리를 크게 틀어도 마짱에게는 이 소리가 들리지 않겠죠. 이런 내 기분에 아랑곳없이 울트라맨 노래는 거실 가득 울려퍼졌어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바닥에 드러누웠던 마짱이 리듬에 맞춰 두손으로 마루를 ‘탁탁’ 때리지 않겠어요! (15쪽)



  키시카와 에츠코 님이 글을 쓰고, 카리노 후키코 님이 그림을 빚은 어린이문학 《힘내라! 내 동생》(꿈터,2005)을 읽습니다. 우리 집 여덟 살 어린이는 혼자서 이 책을 읽습니다. 다섯 살 동생을 보살피면서 함께 노는 누나인 터라 ‘동생한테 힘내라!’ 하고 외치는 이야기책이 눈길을 끄는구나 싶습니다. 나는 우리 집 큰아이가 이 책을 다 읽고 덮을 때까지 기다린 뒤에 비로소 읽습니다.



농아학교는 아주 먼 곳에 있어 버스와 전철을 타고 가야 하죠. 마짱은 이제 우리와 헤어져 혼자 기숙사에 들어가야만 해요. 왜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을까요? 귀가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몹시 힘들 텐데. 아직 어린 마짱이 엄마와 헤어져 살아야 한다니, 너무 가여워요. (30쪽)


“게다가 동생은 귀가 들리지 않아요. 귀가 들리지 않아서, 그래서, 그래서 …….” 나는 눈물이 나서 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 이 아이는 듣지 못하는구나. 어쩐지 뭐라고 말해도 멍하게 있더라니. 아무것도 모르고 아저씨가 지레 짐작했구나. 내가 나빴다.” (36쪽)



  귀가 들리지 않아서 소리를 알 수 없는 삶이란, 귀가 들리지 않거나 소리를 듣지 못하지 않고서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하루쯤 귀를 꽉 막고 아뭇소리를 듣지 못하는 몸으로 지내 보기라도 해야 ‘귀가 들리지 않는 이웃’이 어떤 마음이 되어 삶을 어떻게 가꾸는가 하는 대목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리 없는 하루’를 스스로 겪어 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학교에서는 이러한 ‘하루 체험’을 시킬 만한 겨를이 있을까요? 교과서 진도를 하루쯤 멈춘 채 ‘소리 없는 하루’를 보낸다든지 ‘눈으로 보지 않는 하루’를 보낸다든지 ‘팔이나 다리 한쪽을 안 쓰는 하루’를 보낸다든지 ‘아예 걷지도 기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드러누워 지내야 하는 하루’를 보내도록 가르치는 학교가 있을까요?


  ‘0.5평 독방 체험’을 해 보는 사람이 제법 있습니다. ‘0.5평 독방’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로 힘쓴 분이 갇힌 곳이요, 민주와 평화와 자유를 바란 수많은 민주운동가와 평화운동가를 독재자가 가둔 곳입니다. 하루만 0.5평에서 꼼짝없이 지내 본다고 해서 이러한 곳에서 지내야 하는 삶을 알 수 없으나, 어렴풋하게 헤아릴 수 있어요.



“왠지 무서워요.” “그래? 무서웠니?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는 평생 그런 시간을 보내야 한단다. 그러니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를 괴롭히는 녀석은 사람도 아니야 … 앞으로 남을 아프게 하지 마!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든,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든, 장애가 있는 아이를 괴롭히거나 놀리는 짓은 그만둬.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인간쓰레기야.” 우리는 선생님 말을 들으며 가슴이 찡해졌어요. 묘한 얼굴로 선생님 이야기를 듣던 케이타는 공책에서 ‘눈 귀신’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지웠어요. (42∼43쪽)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방에서 살지 않은 사람은 지하방에서 지내는 삶을 알 수 없습니다. 햇볕이 들지 않는 곳에서는 아침도 낮도 저녁도 가리지 못합니다. 시계가 없으면 때를 살피지도 못할 뿐 아니라, 해가 흐르는 기운을 느낄 수 없으니 ‘배가 고픈지 밥때가 맞는지’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힘내라! 내 동생》이라는 책을 보면, ‘소리 없는 삶’을 보내는 동생을 둔 아이는 학교에서 선생님한테서 ‘소리 없는 잠깐 체험’을 배웁니다. 아주 살짝, 고작 10분 동안 귀마개로 귀를 막도록 시켰을 뿐이지만, 아이들은 모두 시끌벅적 북새통이 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초등학생인데에도 ‘고작 10분 체험’을 하느라 ‘교과서 진도를 나가지 못한다’면서 투덜대는 아이가 있다고 해요. 초등학생이지만 대학입시를 벌써 생각하면서 ‘10분 동안 다른 삶 겪어 보기’조차 할 겨를이 없다고 여기는 셈입니다.



나는 발돋움을 하여 마을회관 창문 안쪽을 들여다보았어요. 할머니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무언가를 해요. 팔을 크게 휘두르며 체조 같은 것을 하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체조가 아니었어요. 팔을 뻗거나 발을 굽히는 몸짓이 없었거든요. (66쪽)


“할머니, 뭘 배워요?” “수화란다.” “수화가 뭐예요?” “수화란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 손을 써서 말하는 것이지.” “마짱도 수화를 배워요?” (68∼69쪽)



  손수 밥을 지어서 차리는 사람은 밥짓기가 어떠한 삶인가를 압니다. 그러나, 밥짓기가 너무 지겹거나 괴로운 사람은 밥짓기가 어떠한 삶인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수 있습니다. 아이한테 밥을 차려 주거나 어버이한테 밥을 차려서 올리는 삶이 나한테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삶인가 하는 대목을, 참말로 날마다 느낄 수 있지만 참으로 어느 때도 못 느낄 수 있습니다.


  동생한테 힘내라고 외칠 줄 아는 아이는 동생이 어떠한 삶을 보내면서 얼마나 씩씩한가를 압니다. 아이한테 힘내라고 따순 말을 건넬 줄 아는 할머니는 아이가 어떠한 삶을 누리면서 얼마나 야무진가를 압니다.


  씩씩한 이웃하고 동무한테 힘내라고 눈짓을 합니다. 야무진 아이들한테 힘내라고 손짓을 합니다. 아픈 아이가 아픔을 털고 새로운 기쁨을 찾아나설 수 있기를 빌면서 손을 맞잡습니다. 슬픈 이웃이 슬픔을 씻고 새로운 노래를 찾아서 부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어깨동무를 합니다.



난 할머니를 가리키며 오른손을 쥐고 ‘똑똑’ 하고 이마를 두드렸어요. 그런 다음, 마짱을 가리키며 왼손 엄지손가락을 뺀 네 손가락을 가슴에 대고 위로 두 번 움직였어요. ‘할머니는 병에 걸려 이제 마짱을 알아보지 못한단다.’ (81쪽)



  어린이문학 《힘내라! 내 동생》은 문학이면서 삶입니다. 이 책에서 흐르는 이야기와 같은 한식구가 있으며, 씩씩하게 서로 돕는 한집안 삶을 어린이문학이라는 틀로 새롭게 담았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한국에도 ‘농아학교’가 따로 있습니다. ‘장애 어린이’를 ‘일반 교실’에서 함께 배우도록 하는 얼거리는 아직 한국 사회에 없습니다. 학교교육이라고 하면 ‘비장애 어린이’와 ‘비장애 청소년’만 따로 모아서 ‘대학입시 교육바라기’로 나아가도록 하는 ‘교과서 수업 진도 채우기’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돕는 마음을 가꾸면서 서로 사랑하는 숨결을 북돋우도록 하려는 학교교육이라면, ‘일반 교실’과 ‘장애 어린이 교실’을 따로 나눌 까닭이 없습니다. 참다운 사랑으로 흐르는 학교라면 ‘일반 학교’과 ‘장애 어린이 학교’를 따로 세울 까닭이 없습니다.


  내 동생이 ‘장애 어린이’라고 해서 한집안에서 동생만 딴 집을 지어서 따로 혼자서만 살도록 하지 않습니다. 한식구이니 한집에서 함께 살며, 밥을 함께 먹고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일과 놀이를 함께 해요. ‘한 나라’라고 하는 틀을 헤아린다면, 또 ‘한 학교’라고 하는 배움터를 살핀다면, 우리는 이웃과 동무를 어떻게 마주하면서 손을 맞잡을 때에 아름다울까요?



마짱은 눈물이 가득 고인 채 할머니 앞에서 수화를 해요. 두손을 펼쳐 책을 읽는 몸짓을 한 다음, 손으로 지붕을 만들고 집게손가락을 비스듬하게 앞으로 내밀었어요.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수화로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어요. (88쪽)



  어린이문학 《힘내라! 내 동생》에 나오는 할머니는 손자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혼자 수화를 배우다가 그만 몸이 무너져서 드러눕습니다. 몸져누운 할머니는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누워서 지내야만 합니다. 소리 없는 곳에서 사는 아이는 할머니를 아끼고 사랑하기에 할머니한테 죽을 떠먹이고, 자꾸자꾸 수화로 말을 겁니다. 한동안 집에서 머물다가 농아학교 기숙사로 떠나야 하는 아이는 마지막으로 할머니한테 수화로 말을 겁니다. 이때 할머니는 ‘처음으로’ 손등을 겨우 움직이면서 이녁 손자한테 ‘힘내렴’이라는 수화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너와 나는 이웃입니다. 나와 너는 동무입니다. 우리는 모두 고운 사람입니다. 이 지구별에서 서로 따사로이 보살피는 사랑이 싱그러운 바람이 되어 불 수 있기를 빕니다. 다 같이 힘을 내면서 즐겁게 웃는 삶을 지을 수 있기를 빕니다. 4348.8.2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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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민주화운동가 이야기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8
김삼웅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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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사진을 넉 장 보내 주셔서

이 글에 이렇게 지난날 민주화운동 사진을 붙입니다.

고맙습니다.


푸른책과 함께 살기 123



광주일고 일학년 김남주가 화가 난 까닭

― 10대와 통하는 민주화운동가 이야기

 김삼웅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5.8.15. 13000원



  민주 사회인 나라 가운데 입시지옥이 있는 나라가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아시아이든 유럽이든 미국이든, 사회에 민주 바람이 푸르게 부는 곳에는 입시지옥이 깃들 틈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민주 바람이 불지 못하는 곳에는 독재가 춤을 추기 마련이고, 독재는 불평등하고 이어지며, 불평등은 평화 아닌 전쟁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평등을 이루는 사회라면 대학입시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까닭이 없으리라 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회라면 대학입시로 중·고등학생뿐 아니라 초등학생까지 옥죄는 학원천국은 깃들 수 없으리라 봅니다.


  한국 사회는 ‘민주 선거’를 치르기는 하지만 아직 ‘민주 사회’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민주 사회가 아닌 ‘군사독재 사회’였을 무렵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 사회를 이루려고 온몸을 바쳤습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민주 사회를 꿈꾸면서 군사독재와 맞섰고,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웃음꽃을 피우는 민주 사회를 바라면서 모든 전쟁과 맞섰어요.



함석헌의 저항은 민족의 독립과 민주주의, 평화 통일을 위한 것이었고, 수단은 비폭력 무저항의 방법이었어요. 그의 삶은 이 땅의 주인인 민중(씨알)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투쟁의 길이었고, 그 과정에서 숱한 탄압과 고난이 따랐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24쪽)


송건호는 어째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지, 왜 학교에서는 일본 학생들이 우대받고 한국 학생들은 차별을 당하는지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교사나 선배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친 것입니다. (38쪽)



  김삼웅 님이 청소년한테 들려주는 책으로 쓴 《10대와 통하는 민주화운동가 이야기》(철수와영희,2015)를 읽습니다. 민주화운동가 이야기는 말 그대로 ‘민주화운동’에 몸을 바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한국 사회가 민주 사회가 아니었기에, 이 나라에 민주라고 하는 씨앗을 심으려고 애쓴 사람들 이야기요, 이 땅에 민주라는 바람이 불도록 힘쓴 사람들 이야기이며, 한국뿐 아니라 이웃한 여러 나라에서 민주라는 꿈이 자라도록 온마음을 바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갓 일학년이던 김남주는 광주일고도 시위(19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동참하게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어요. 하지만 당시 학생들은 그저 일류 대학 진학에만 몰두하여 뒷짐만 지고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 바람에 김남주는 명색이 일제시대 광주 학생 운동 선봉대였던 광주고등보통학교에 뿌리를 둔 광주일고가 그 모양이라는 데 지독한 배신감을 느꼈지요. (58쪽)



  ‘민주(民主)’라고 하는 한자말은 “사람 + 임자”를 나타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임자라는 뜻을 가리킵니다. 제도도 법도 권력도 전쟁도 늘 사람을 아끼고 섬겨야 한다는 뜻을 드러냅니다. 교육도 문화도 정치도 경제도 언제나 사람을 사랑하면서 우러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밝히지요.


  그러면, 한국 사회는 왜 민주 사회하고 동떨어졌을까요? 가까운 지난날을 돌아보면, 군사독재 정권이 으르렁거렸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은 꽤 오랫동안 으르렁거리면서 총칼과 군홧발로 사람들을 찍어 눌렀습니다. 평화나 평등이나 통일을 바라는 목소리는 모두 짓밟던 군사독재였어요.


  군사독재 정권이 있기 앞서는 일제강점기에 친일부역을 했던 이들이 서슬 퍼렇게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비록 일제강점기에서 풀려났다고 하더라도 친일부역자가 외려 떵떵거리면서 온갖 권력을 부렸습니다.



전태일은 비록 불우한 환경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양심과 정의, 진실의 가치를 알고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희생을 통해 노동자들의 영원한 벗이 되고자 했습니다. (82쪽)




  한국전쟁이 남북녘을 휩쓸면서 남녘과 북녘 모두 민주하고 멀어졌습니다. 남녘도 북녘도 군대를 키우고 전쟁무기를 많이 갖추는 길로 치달았습니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를 살리는 길이 아니라, 전쟁무기와 군대를 더 갖추려는 길로 가고 말았는데, 이러한 흐름은 아직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국주의 칼바람이 불었는데, 일제강점기가 들어서기 앞서 한국 사회는 양반이라고 하는 신분제로 수많은 사람이 억눌렸습니다. 착하고 수수하게 흙을 일구던 여느 사람들은 양반 계급이 부리는 권력에 언제나 등이 굽은 채 소작인으로 한삶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에 민주 바람이 불도록 힘쓴 사람은 군사독재 정권하고 맞서 싸운 사람일 뿐 아니라, 전쟁무기와 군대하고 맞서 싸운 사람이면서, 제국주의 권력하고 맞서 싸운 사람이고, 신분제와 계급제 같은 봉건제하고 맞서 싸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익환은 1993년 3월 6일 형 집행 정지로 21개월 만에 출옥합니다. 76세의 노령도, 거듭되는 투옥도, 그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 없었지요. 출옥한 그는 ‘통일맞이 7천만 겨레 모임 운동’을 제창하고. (127쪽)


‘최초 여성 법조인 탄생’이라는 화려한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법조계에 등장한 이태영은 이승만 대통령이 ‘야당 의원 부인’과 ‘여성’을 이유로 판사 임명을 거부한 데 충격을 받고 변호사를 개업한 이래, 줄곧 가정법률상담소를 운영하면서 무지하고 가난한 이들, 약자를 위한 ‘법의 서민화’, ‘법의 생활화’를 모토로 하여 살았지요. (172쪽)



  《10대와 통하는 민주화운동가 이야기》라는 책은 민주화운동가 가운데 스무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입시공부로 바쁠 청소년한테 이 나라에 민주라는 씨앗을 심으려고 힘쓴 사람들 목소리와 발자취와 숨결을 찬찬히 들려주려고 합니다. 청소년이 앞으로 나아갈 길은 ‘서울에 있는 일류 대학교에 뽑히기’가 아니라, ‘서로 돕고 아끼며 사랑하는 삶을 가꾸는 슬기로운 마음’이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몇몇 이름난 활동가나 운동가 이야기인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우리 모두 저마다 제 삶자리에서 참다운 평화와 평등과 통일을 찾아서 민주를 이루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을 마구 짓밟으면서 장기 집권을 획책하고, 부정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어요. 국가 안보나 국민 경제는 뒷전이었고,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민주 헌정을 유린하고, 1960년 3·15 부정 선거를 자행합니다. (6쪽)




  민주 사회를 바라지 않는 이들은 무엇을 바랄까요? 아무래도 평등하지 않은 사회라든지 평화롭지 않은 사회를 바라겠지요. 평등하지 않은 사회는 경쟁이 넘치는 사회입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만 살아남거나,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모든 권리를 차지하도록 하는 제도를 바라는 이들이 민주 사회를 안 바랍니다.


  그리고, 평화롭지 않은 사회는 전쟁이 넘치는 사회입니다. 전쟁무기로는 평화를 찾지 못해요. 총칼을 코앞에 들이미는데 평화가 있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너도 나도 손과 손에 전쟁무기를 단단히 움켜쥐고서 툭탁거리면서 싸우기를 바라는 기득권자나 권력자입니다. 기득권자나 권력자는 왜 평화 아닌 전쟁을 바라는가 하면, 사람들이 서로 적으로 삼아서 경쟁을 하거나 전쟁을 벌여야 ‘독재 권력’을 숨기면서 잇속을 챙길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박정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어요. 1972년 10월 17일에는 이른바 ‘10월 유신’을 감행하면서 또 다시 헌정 질서를 짓밟고 자신의 영구 집권을 기도합니다. 유신 체제는 임기 6년의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도록 하였어요. 또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긴급조치권을 부여하여 대통령이 초법적인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였지요. (7쪽)



  한국 사회는 아직 제대로 된 민주 사회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아직도 한국 사회에는 불평등과 차별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참다이 평등과 평화가 자리잡아서 널리 퍼질 때에 비로소 민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민주 사회에서는 이웃이 서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해코지를 하거나 비아냥거리거나 막말을 일삼는 곳에서는 아무런 민주가 없습니다. 민주 사회는 ‘마음을 여는 이야기’와 ‘서로 돕는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웃사람 마음을 따스히 헤아리지 않는 말로는 아무런 평등도 평화도 이루지 못하니, 이러한 곳에서는 민주가 싹트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 청소년이 《10대와 통하는 민주화운동가 이야기》를 읽으면서 민주를 생각하고, 참다운 평등과 평화를 헤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서로 돕는 사랑을 생각하고, 서로 아끼는 꿈을 즐겁게 키울 수 있기를 빕니다. 평등한 곳이 살기에 좋은 곳입니다. 평화로운 곳이 살기에 아름다운 곳입니다. 민주 바람이 부는 곳이 바로 웃음과 노래가 흐르는 기쁜 삶터입니다. 4348.8.20.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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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자유 사계절 1318 문고 11
채지민 지음 / 사계절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푸른책과 함께 살기 121



내 마음속에 모두 다 있으니

― 내 안의 자유

 채지민 글

 사계절 펴냄, 1999.4.20. 7500원



  채지민 님이 쓴 성장소설 《내 안의 자유》(사계절,1999)를 읽습니다. 이 작품에는 ‘매서운 아버지한테 억눌리’면서 ‘마음꽃을 좀처럼 스스로 피우지 못하’는 아이가 나옵니다. 이 아이는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느라 제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 눈치나 말에 휘둘리느라 막상 제 삶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내가 조금씩 어두운 아이로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과 대놓고 마음을 털어낼 만한 상대가 없다는 현실에 의해, 나는 말을 심하게 더듬는 언니보다 더 말이 없는 아이로 나도 모르게 바뀌어지고 있었다. (19쪽)



  밝은 아이나 어두운 아이는 따로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마음속에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자랄 적에는 어두움이라 할 텐데,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천천히 자라면서 ‘어두웠다’고 느끼는 아기는 없습니다. 포근하거나 넉넉했다고 느끼지요. 어머니 뱃속에서 바깥으로 나와서 눈부신 빛을 처음으로 쐬면서 ‘밝은 빛’이 싫다고 느끼는 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곳에서 밝은 자리로 나오면서 새롭게 겪거나 부딪힐 이야기가 날마다 넘칩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마음 깊은 곳을 차분히 돌아봅니다. 밝은 곳에서는 온갖 일을 스스로 부딪히면서 겪습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제 마음을 찬찬히 다스립니다. 밝은 곳에서는 온몸을 움직여 새로운 하루를 짓습니다.



저러한 손길은 내게 주어질 수 없는 걸까? 유치원 같은 곳에는 다니지 않아도 좋았다. 단지 소망이 있다면, 출근하는 아버지한테서 따스한 말 한 마디를 듣고 싶었을 뿐. (21쪽)



  따스한 말은 어버이가 아이한테만 들려주지 않습니다. 아이도 어버이한테 따스한 말을 들려줍니다. 아이한테 좀처럼 따스한 말을 들려주지 못하는 어버이는 바보스럽기 때문에 따스한 말을 못 들려주지 않아요. 오늘은 어버이라 하지만, 어제는 ‘또 다른 어버이가 낳은’ 아이였던 어버이입니다. 나한테는 어버이라 하더라도 다른 분한테는 아이예요. 우리 어버이도 예전에 따스한 말을 못 듣고 자랐을 수 있고, ‘어른이 되어 새로 낳는 아이’한테 따스한 말을 어떻게 들려주어야 할는지 못 배웠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먼저 스스로 따스한 말을 들려주면 됩니다. 어버이가 나한테 다 해 주기를 바라지 않아도 됩니다. 어버이한테 안기고 웃고 노래하면서 스스로 집안 흐름과 바람을 바꾸면 돼요.



고등학교의 분위기는 중학교와는 확실히 달랐다. 교육 과정도 그랬고, 학생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법까지도 새로운 변화를 요구했다. 나는 기계가 움직이는 공장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45쪽)


쏟아져 나오는 신간 서적 앞을 지나치면서 내가 읽었던 책 이외의 것이 이렇게도 많다는 사실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90쪽)



  삶이 아름답다고 하는 까닭을 생각해 봅니다. 온갖 일을 스스로 겪으면서 새롭게 배울 수 있기에 삶이 아름답다고 할 만합니다. 스스로 이 일 저 일 맞닥뜨리면서 새롭게 배우고 누리고 마주하고 가다듬을 수 있으니 삶은 그야말로 아름답다고 할 만해요.


  그런데 오늘날 사회에서 아이들은 학교만 들어가면 새로움하고 동떨어집니다. 입시교육만 받아야 하는 아이들한테 새로움을 베풀려는 어른이 너무 없습니다. 교사는 입시교육을 시켜야 하는 공무원이 되고, 어버이는 어버이 아닌 학부모가 되어야 하는 오늘날 사회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너의 인생은 너만의 것이야. 그건 아무도 방해할 수 없어. 아버지께서도 이젠 응원해 주실 거야. 멋진 대학생, 훌륭한 사회인이 되길 기원할게. 꼭 대학에 가는 게 중요한 건 아니야. 네 결정과 노력이 실현된다는 게 중요한 거지.” (124쪽)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사회인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곧게 서서 맑게 노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삶을 일구어 새롭게 짓는 어른이 될 때에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삶을 사랑하여 기쁘게 노래하는 사람으로 설 때에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주변 정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교실 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 운동장에 발을 내딛었다. 저만치 교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들 앞에 아버지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가까이 마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151쪽)



  성장소설 《내 안의 자유》는 책이름 그대로 ‘내 마음속’에 자유가 있다는 대목을 보여줍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자유도 평화도 모두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꿈도 사랑도 모두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면 됩니다. 내가 나를 아끼면서 보살피면 됩니다.


  스스로 자유로울 때에 이웃하고 자유롭게 사랑하고, 스스로 사랑스러울 때에 이웃하고 즐겁게 어깨동무를 합니다.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면 눈을 뜨지 못하고, 스스로 눈을 뜨지 못하면 삶은 늘 고단하거나 괴롭습니다. 4348.8.20.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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