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친구잖아 읽기의 즐거움 8
다카도노 호코 글.그림, 이서용 옮김 / 개암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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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24



꿈을 곱게 품어서 그림으로 빚는 이모는 멋져

― 달라도 친구잖아!

 다카도노 호코 글·그림

 이서용 옮김

 개암나무 펴냄, 2012.6.1. 9000원



  일본 어린이문학 가운데 하나인 《달라도 친구잖아!》(개암나무,2012)를 즐겁게 읽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이 만한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느끼지만, 일본에서는 이런 예쁜 어린이문학이 꾸준히 나옵니다. 이 어린이문학이 어떻게 대단하기에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가 하면, 이 어린이문학은 ‘학교를 다니는 아이’ 이야기를 학교에 얽매여서 들려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새롭게 짓는 삶을 꿈으로 가꾸는 숨결로 들려주기에 여러모로 돋보입니다.


  그러면 한국 어린이문학은 어떠할까요? 요즈음 나오는 한국 어린이문학은 ‘학교에서 생기는 말썽’을 줄거리로 삼기 마련입니다. 아니면, ‘집에서 겪는 골칫거리’를 줄거리로 삼아요. 생각이 홀가분하게 춤추는 꿈노래(판타지) 같은 어린이문학도 드물지만, ‘생활동화’라고 할 적에 ‘학교에서 동무끼리 따돌리거나 교사가 바보스러운 모습’을 흔히 그리고, ‘집에서 어머니가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시험공부로 들볶는 모습’을 자꾸 그립니다. 때로는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다투는 집안’을 그리고, ‘가난한 옛 골목마을이나 시골마을 이야기’를 되새기는 얼거리이곤 합니다. 한국 어린이문학에서 생활동화는 거의 다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すてきなルちゃん”라는 이름으로 2009년에 나온 이 어린이문학은 “멋진 루짱”입니다. 한국말로 옮기며 “달라도 친구잖아!”로 바꾸었는데, ‘루짱’은 이 어린이문학에서 ‘말하는 이(주인공)’한테 이모입니다.



나는 (이모) 루짱이 꽤 괜찮은 화가라고 생각해요. 엄마는 무슨 그림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하고, 뭐랄까, 왠지 기분을 좋게 하는 무척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거든요. (9쪽)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오늘도 루짱은 내 방에서 캔버스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어요.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했어요.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그림을 보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일이거든요. (19쪽)



  일본 어린이문학 《달라도 친구잖아!》에 나오는 루 이모(루짱)는 주인공 아이네 집에 찾아옵니다. 여느 돈벌이를 딱히 하지 않으면서 그림을 그리며 산다는 루 이모인데, 언니네 집에서 밥을 얻고 잠자리도 빌리면서 그림 한 점을 마무리하려고 했대요. 그러면, 루 이모는 왜 굳이 언니네 집에까지 와서 그림을 그리려 할까요? 바로 주인공 아이 때문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한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재미난 이야기를 고스란히 그림으로 담으면서, 이 그림을 기쁘게 마무리짓고 주인공 아이한테 선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루 이모는 돈을 버는 재주가 영 없다 할 만합니다. 퍽 오랜 나날을 들여서 천천히 마무리지은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지도 않고, 돈을 받고 팔지도 않으니까요. 이런 그림을 덜컥 누군가한테 선물하면서 사니까요.



소라는 파란 두건의 끝을 뾰족하게 세우고 깡충깡충 뛰며 들판의 외길을 따라 집을 향해 걸어갔어.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세 친구는 처음으로 두건이 정말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두건이 친한 친구처럼 소라의 머리에 붙어 있었거든. (14쪽)


나는 연필을 계속 깎다가 문득 〈들장미〉는 스기야마에게 좋아하는 걸 넘어 어떤 특별한 노래일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35쪽)



  루 이모는 그림을 이레에 걸쳐서 마무리짓습니다. 밑그림은 벌써 다른 곳에서 그려서 가져왔습니다. 이레에 걸쳐서 그림을 마무리짓는 동안 일곱 요일에 맞추어 한 가지씩 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인공 아이는 루 이모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참인지 거짓인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짓으로는 느끼지 않습니다. 더구나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는 마치 주인공 아이네 어머니, 그러니까 루 이모네 언니 이야기인 듯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루 이모하고 언니가 어릴 적에 곁에서 늘 지켜보던 이웃이나 동무하고 얽힌 삶을 가만히 마음 깊이 품었다가 주인공 아이한테 들려준다고 할 수 있어요. 나중에 ‘우리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한테 기쁘게 물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오래도록 가슴에 품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림 한 점은 이야기하고 맞물려서 삶을 고운 꿈으로 바라보도록 북돋우는 징검다리 구실을 할 테고요.


  왜냐하면 루 이모가 그린 그림을 주인공 아이는 방 한쪽에 걸 테고 이 그림을 늘 들여다볼 테지요. 그냥 그린 그림이 아니고, 멋지게 그린 그림이 아닌, 그야말로 온 사랑을 담아서 그린 그림이기에 이 그림을 들여다보는 동안 언제나 사랑스러운 숨결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포리의 거실 아래는 아주 신기한 소인들의 화랑이 있었던 거야! 걸려 있는 그림들은 모두 포리가 기부한 얼룩 하나 없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표들이었어. 소인들은 성냥개비로 만들어진 액자에 우표를 하나씩 정성스레 넣어 마루 밑 벽에 걸어 놓고 있었던 거였어. (45족)


기무는 언제나 바람이 부는 초록 들판을 상상했어. 아무것도 없이 공기만 반짝반짝 파랗게 퍼져 가는 그런 초록 들판을 말이야. 기무는 들판의 중앙에서 바람 아이가 되어 빛과 함께 빙글빙글 춤추고 싶었어. (63∼64쪽)



  한국말로 옮긴 이름은 “달라도 친구잖아”인데, 어느 모로 본다면 이 말마디는 이 일본 어린이문학을 한 마디로 잘 나타낸다고도 여길 만합니다. 이레에 걸쳐서 루 이모가 들려준 이야기에 나오는 일곱 아이는 “다 다른 아름다운 동무”이거든요. 그리고, “달라도 친구”라기보다는 “달라서 친구”입니다. 저마다 다른 동무요, 저마다 새롭게 살림을 짓고 살림을 가꾸려는 동무예요. 저마다 슬기로운 꿈을 품으려는 동무이면서, 저마다 기쁘게 웃고 노래하는 삶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동무입니다.



지금은 알아요. 빛과 바람의 녹색 들판도, 아이들의 웃음 소리도, 게다가 루짱이 이야기해 준 일주일 동안 여러 이야기도 모두 하나가 되어 이 그림에 녹아 있다는 것을요. (70∼71쪽)



  책 끝에는 루 이모가 아이한테 선물한 그림이라면서 그림 한 점이 조그맣게 실립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다케다 미호’라는 분이 그렸다고 합니다. 다케다 미호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그림책 작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분 그림책 가운데 꼭 세 권만 한국말로 나왔는데(《책상 밑의 도깨비》, 《우리 엄마 맞아요?》, 《짝꿍 바꿔 주세요!》), 한국말로 나온 그림책 세 권을 살피면 아이끼리 나누는 깊은 마음이라든지 아이와 어른이 따사로이 나누는 마음을 살가이 밝힙니다. 아이들이 가슴 가득 곱게 담을 숨결을 늘 헤아리는 그림책 작가이기에, 《달라도 친구잖아!》라는 책 끝에 ‘루 이모가 마무리지어서 선물한 그림’을 선뜻 그려서 담을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곧, 어린이문학이란 마음을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노래하고, 마음을 북돋우며, 마음을 사랑하기에 조그마한 이야기 한 자락이 어린이문학으로 태어납니다. 마음을 티없이 바라보고, 마음을 아낌없이 가꾸며, 마음을 즐거이 얼싸안을 수 있기에 따스한 꿈이 흐르는 어린이문학이 될 만합니다.


  바람을 타고, 또는 구름을 타고, 또는 햇살에 실려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예쁜 어린이문학 한 권을 읽는 아이들이 ‘내 동무는 어디에 있을까?’ 하고 슬기롭게 생각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 동무는 어떤 웃음을 지으면서 아침을 열까?’ 하고 반가이 마주할 수 있기를 빕니다. 꿈을 곱게 품어서 그림으로 빚는 이모는 더없이 멋지고, 이런 이모를 둔 아이는 날마다 기쁨이 넘치리라 생각합니다. 4348.12.7.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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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일하는 청소년의 권리 이야기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22
이수정 지음, 홍윤표 그림 / 철수와영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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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26



청소년도 ‘돈을 벌려’고 일합니다

― 10대와 통하는 일하는 청소년의 권리 이야기

 이수정 글

 홍윤표 그림

 철수와영희 펴냄, 2015.11.13. 12000원



  나는 중학교를 다니던 때에 두 가지 알바를 했습니다. 하나는 위층에 사는 국민학교 동생한테 과외를 했고, 다른 하나는 2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아파트에서 신문을 돌렸어요. 여느 날에는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하느라 열 시에 학교를 마치고 열한 시에나 집에 돌아왔기에 주말마다 두 시간씩 과외를 했고, 신문 돌리기는 방학에만 했습니다.


  한마을에 사는 이웃집 동생하고는 어릴 적부터 늘 같이 놀던 사이입니다. 이 아이가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 학교 성적을 높여야 한다고 여기셨기에 과외를 맡기셨을 테지요. 그동안 같이 놀기만 하다가 교과서랑 참고서랑 문제집을 옆에 놓고 주말마다 두 시간씩 과외를 하자니 진땀이 났습니다. 가르치는 저도 배우는 동생도 모두 진땀이 나요.


  신문을 돌리는 알바를 하는 곳은 집에서 이 킬로미터 남짓 떨어졌습니다. 이 알바를 하려고 늘 달리기를 했습니다. 집부터 신문지국까지 달리기를 하고, 신문지국에서는 신문을 받아서 광고종이를 끼운 뒤에 다시 달리기를 하면서 신문을 돌립니다. 5층짜리 아파트를 돌면서 넣는 신문이기에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알바를 했어요.




“돈 벌어서 사치품이나 사려고 한다.” 이것은 청소년 노동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이자 오해입니다 … 청소년 알바를 온전한 노동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먹고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소비를 위한 가욋일로 생각하는 것이에요. (14, 16쪽)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나눠 주는 것은 사업주(사장)의 의무 사항입니다. 이를 어기면 5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잘 안 지켜지다 보니 최근에는 처벌을 강화해서 2015년부터는 즉시 과태료 처분을 하기로 했습니다. (24족)



  이렇게 두 가지 알바를 하는데, 이때에 우리 어머니하고 아래층 아주머니는 우리 마을에서 신문을 돌리는 부업을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두 가지 신문을 돌리셨고, 아래층 아주머니는 한 가지 신문하고 우유를 돌리셨습니다. 주말이라든지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에는 으레 형하고 나는 어머니를 거들어 신문을 돌립니다. 신문을 돌리다가 아래층 아주머니를 만나면, 아래층 아주머니가 돌리는 신문하고 우유를 받아서 높은 층으로 쿵쿵쿵 달려 올라가서 넣곤 했습니다.


  이리하여 방학이 되면 어머니가 으레 묻습니다. 방학인데 다른 마을에서 신문을 돌리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그러마 하고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신문지국에 말해서 방학 때에 비는 자리가 있는지 알아보아 주셨습니다. 이러던 1989년 겨울 어느 날입니다. 한 달 동안 씩씩하게 신문을 다 돌리고 일삯을 받는 날입니다. 그런데, 신문지국장이 오천 원을 덜 줍니다. 이즈음 신문을 돌리면 ‘똑같은 부수’를 돌려도 나이에 따라 다 달리 일삯을 받았습니다. 120부를 돌린다 치면, 국민학생(초등학생)이 3만 원으로 가장 적게 받고, 중·고등학생은 5만 원으로 조금 더 받으며, 어른은 10만 원 남짓 받았습니다. 다만, 이 일삯은 신문만 돌린 값이 아니라 신문값까지 거두되 80∼90퍼센트 수금을 마칠 적에 줍니다.


  이때 신문지국장은 ‘광고종이를 신문에 끼운 일삯’ 오천 원을 주지 않았습니다. 지국장한테 주기로 한 돈을 왜 안 주느냐고 여쭈니 “내가 언제 주기로 했어?” 하고 큰소리를 칩니다. 광고종이를 넣은 일삯을 주기로 해서 다 넣지 않았느냐고 따지니 갑자기 따귀를 찰싹 때립니다.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지만, 따귀 맞은 일보다 오천 원을 받아야겠다고 다시 따지는데, 이번에는 발로 배를 확 걷어차서 지국 벽에 쿵 하고 찧었습니다. 신문지국장은 몇 마디 욕을 더 늘어놓은 뒤에 오천 원짜리 종이돈을 확 집어던졌습니다.




아무리 길어도 3개월을 넘는 수습 기간은 정할 수가 없습니다. 또 일하는 기간을 1년 미만으로 정했다면 수습 기간을 정했다 해도 그 기간 임금을 깎아서 최저 임금보다 적게 줄 수 없습니다. (33쪽)


최저 임금을 위반하는 사업장이 많고, 법을 악용하여 청소년 노동자의 노동인권을 침해하는 사례들이 많은데 행정 기관이 이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근로 감독 자체가 형식적이라는 점도 지적해야 합니다 … 미비하나마 근로 감독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후속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점도 문제입니다. (38∼39쪽)



  이수정 님이 글을 쓰고, 홍윤표 님이 그림을 넣은 《10대와 통하는 일하는 청소년의 권리 이야기》(철수와영희,2015)를 읽다가 불쑥불쑥 옛 생각이 떠오릅니다. 옛 생각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싸합니다. 내가 1989년에 겪은 일을 2015년 언저리를 사는 푸름이도 엇비슷하게 겪는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새삼스레 가슴이 저립니다.


  푸름이는 왜 알바를 하려고 할까요? 돈을 벌려고 일자리를 찾지요. 푸름이는 왜 돈을 벌려고 할까요? 살림이 넉넉하지 않으니 돈을 벌려고 하지요. 살림이 넉넉하기에 알바를 찾는 푸름이는 거의 없으리라 봅니다. 적든 많든 한푼이라도 더 벌어서 살림에 보태려고 하기에 알바 자리를 찾아요. 이른바 ‘용돈벌이’를 생각하며 알바를 할 푸름이는 매우 드물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용돈을 벌려고 알바를 하더라도 푸름이도 똑같이 ‘일(노동)’을 하지요. 어른들도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여행을 가거나 술을 마시거나 옷을 사 입거나 합니다. 푸름이만 ‘일해서 번 돈’으로 여행을 간다든지 극장에 간다든지 옷을 사서 입지 않아요.




사업주들은 청소년 노동자를 ‘미숙련’ 업무에 ‘싼값’으로 쓰려고 고용한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업무에 필요한 교육은 생략하고, 노동에 대한 대가는 헐값이에요. (47쪽)


폭력은 청소년의 인격과 신체를 훼손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실제로 사업주나 관리자에게 손찌검을 당하거나 욕설을 들어야 했던 청소년 노동자 대부분은 수치심과 공포를 견디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78쪽)



  《10대와 통하는 일하는 청소년의 권리 이야기》라는 책에서도 다루지만, 어른인 사업주(사장)가 푸름이를 뽑아서 일을 시키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다른 어른보다 돈을 적게 주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규직 일자리’가 아닌 ‘비정규직 일자리’로 쓰면서 세금도 적게 내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알바생한테 4대 보험을 챙겨 주려는 사업주는 참으로 드물어요. 알바생한테 ‘최저임금’이나마 제대로 챙겨 주려는 사업주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워요. 최저임금이란 ‘적어도 이만큼은 주어야 한다’는 돈이지만, ‘그냥 이만큼만 주면 된다’고 여기는 사업주가 그야말로 많습니다.


  아무래도 법을 마련하는 이들 스스로 ‘청소년 노동’을 제대로 모르기에 최저임금제를 내놓으면서도, 이를 잘 지키도록 이끌지 못하리라 느낍니다. 청소년 노동뿐 아니라 ‘어른 노동’도 제대로 모르기에 비정규직이 끝없이 늘어날 뿐 아니라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는 제도’가 생기는구나 싶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푸름이가 알바 자리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으려면 어떤 제도가 있어야 할까요? 오늘날 같은 최저임금제가 아니라 ‘적정임금제’가 있어야지 싶습니다. ‘적어도 이만큼은 주어야 한다’는 제도 말고, ‘제대로 이만큼은 주어야 한다’는 제도로 거듭나야지 싶어요.




모든 직장 내 성희롱은 권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주로 힘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행하지요. 이는 노동 조건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일자리가 줄고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속출합니다. (94쪽)


현장 실습 중 부당한 대우를 겪다 보면 특성화고 학생 중 일부는 ‘아, 이래서 대학을 가야 하는구나’ 생각하며 취업이 아닌 진학을 꿈꿉니다. (123쪽)



  일삯은 일한 대가로 받아야 합니다. 일삯은 나이에 따라 다르게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일삯은 졸업장에 따라 다르게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일삯은 성별에 따라 다르게 받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일삯은 정규직·비정규직으로 갈라서 받아서는 안 되며, 한국노동자·이주노동자로 갈라서 받아서도 안 되지요.


  《10대와 통하는 일하는 청소년의 권리 이야기》를 찬찬히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부터 알바를 할 적에 이 같은 책은 한 권도 없었습니다. 그무렵 이런 책이 한 권이라도 있었으면 어처구니없는 일에 씩씩하게 맞설 만했을 텐데 말이지요. 그러고 보면 1980년대는 ‘청소년 노동’뿐 아니라 ‘어른 노동’을 놓고도 차별이나 피해나 상처를 받지 않도록 도와줄 만한 길잡이책은 거의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1980년대에 크게 불거진 민주운동 물결이 있었기에 비로소 ‘어른 노동’을 놓고 벌어진 차별이나 피해나 상처를 줄일 수 있도록 노동조합이 생기고, 노동운동이 일어났어요.


  사회에 민주 물결이 없으니 어른도 푸름이도 ‘노동 차별’로 시달립니다. 나라에 민주나 평화나 평등과 같은 생각이 흐르지 못하니 어른 노동이나 청소년 노동 모두 아프게 짓눌리거나 짓밟힙니다.




우리는 살면서 세계 인권 선언과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에 대해 별로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파업은 무조건 불법이라고 여기는데 이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고약한 편견입니다. 사업주 일부도 이런 인식을 악용해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붙이면서 협상을 제대로 하지 않는 일이 벌어집니다. 파업으로 손해가 생겼다면서 엄청난 금액의 손해 배상액을 청구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법원에서 불법 파업이 아니라고 판단해도 회사는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파업을 불법으로 각인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1쪽)



  《10대와 통하는 일하는 청소년의 권리 이야기》를 쓴 어른은 이 나라 푸름이가 ‘일하는 권리’를 제대로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봅니다. 푸름이가 알바 자리를 얻을 적에 근로계약서를 제대로 쓰도록 알려주고, 근로계약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려주며, 푸름이 스스로 근무일지를 잘 써 두라고 알려줍니다. 푸름이가 일터에서 푸대접이나 폭력을 받았다면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를 차근차근 알려주기도 합니다.


  일하는 푸름이는 사랑받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일을 할 수밖에 없는 푸름이는 따스한 손길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일을 하지 않는 푸름이도 사랑받을 노릇이고, 일하는 어른이나 일하지 않는 어른도 모두 따스한 손길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어른은 푸름이한테 알맞춤한 일을 알맞게 맡기면서 일삯을 알맞게 줄 수 있는 마음과 몸짓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푸름이가 사회를 아름답게 맞아들이도록 이끄는 사업주가 되어야지 싶고, 푸름이가 나이나 졸업장 때문에 푸대접을 받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기울여야지 싶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기에 일하는 푸름이가 보람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우리 사회 어른들이 슬기롭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1.27.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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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초상화에 숨은 비밀 찾기 책과함께어린이 찾기 시리즈
최석조 지음 / 책과함께어린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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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23



어떤 얼굴을 그림으로 담을 적에 즐거울까?

― 조선시대 초상화에 숨은 비밀 찾기

 최석조 글

 책과함께어린이 펴냄, 2013.4.20. 12000원



  그림을 그립니다. 눈으로 가만히 바라본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립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연필을 손에 쥐고 종이에 그림을 그립니다. 나뭇가지나 돌을 손에 쥐고 흙바닥에 그림을 그립니다. 맨손가락을 하늘에 대고 그림을 그립니다.


  어디에 그리든 모두 그림입니다. 화가나 예술가가 그릴 적에만 그림이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그린 그림도 즐거우면서 예쁜 그림입니다. 여느 어버이가 그린 그림도 재미있으면서 훌륭한 그림입니다. 역사책에 이름이 남아도 아름다운 그림이고, 역사책에 이름이 안 남아도 아름다운 그림이에요. 삶을 사랑하는 숨결을 담을 수 있으면 모두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왜 이렇게 초상화를 많이 그렸느냐고?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 때문이야. 유교에서는 제사가 매우 중요한 행사였잖아. 조상들을 사당에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낼 때 초상화가 필요했거든. (11쪽)


조선 시대 초상화가들은 실제 인물과 똑같이 그리려고 무척 애썼어. 터럭 한 올은 물론 사마귀, 점, 곰보 자국, 검버섯까지 있는 그대로 그렸지. (13쪽)



  최석조 님이 쓴 《조선시대 초상화에 숨은 비밀 찾기》(책과함께어린이,2013)를 읽습니다. 조선이라는 사회는 다른 때보다 ‘얼굴그림(초상화)’이 많았다고 합니다. 고려나 신라나 백제나 고구려 무렵에도 그림을 그렸다고 하지만 조선 무렵처럼 그림을 많이 자주 그리지는 않았다고 해요. 아마 옛 조선 무렵에도 그림을 그렸을 테고, 부여와 발해 무렵에도 그림을 그렸을 테지요. 더 헤아려 보면, 단군에 앞서 육천 해나 칠천 해 앞서에도 그림을 그렸으리라 생각해요. 다만, 팔천 해나 구천 해 앞서 누군가 그렸을 그림이 오늘날까지 남지는 않았을 뿐입니다. 벽에 남긴 그림이나 동굴에 새긴 그림은 더러 남았지만요.



옷차림을 보아하니 벼슬이 높았던 사람이야. 어떻게 아느냐고? 가슴에 두 마리 학을 수놓은 장식이 있잖아. (33쪽)


옛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남에게 함부로 보여주길 꺼렸어. 그래서 이렇게 손이 안 보이게 그렸지. 조선 시대 초상화가 대부분 이래. 조선 후기에서야 손이 드러나는 초상화가 나오게 돼. 손을 소매 속에 감춰 그리다 보니 정작 화가들은 손을 그릴 기회가 별로 없었어. (38쪽)



  조선 무렵을 살던 이들이 그린 그림은 거의 모두 ‘이름·돈·힘’이 있던 사람들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무렵에 그림 한 점을 그려 달라고 맡길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고, 그림 한 점을 그리기까지 돈이 무척 많이 들었다고 해요. 조선 무렵에도 ‘풍속화’라고 해서 여느 사람들이 누리던 여느 살림살이를 그림으로 담기도 했을 테지만, 여느 사람들 스스로 그린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 그림은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분하고 계급이 크게 갈리던 사회였기에, ‘위에 있는 이들이 더러 아래에 있는 이들을 그리는 일’은 있으나, ‘아래에 있는 여느 사람들 스스로 붓과 종이를 손에 쥐는 일’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초상화에 숨은 비밀 찾기》에 깃든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어느 한 토막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조선이라고 하는 사회에서 이름이 있거나 돈이 있거나 힘이 있는 사람들 얼굴과 차림새를 보여줍니다. 신분하고 계급에 따라 어떤 모습이요 어떤 옷을 입었으며 어떤 몸짓이나 입성이었는가를 보여주지요.




무관 4품은 문관 6품 벼슬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고 해. 그러니 무관들이 한눈에 자신을 알아보는 군복을 좋아할 리 있겠어. 심지어 흉배도 호랑이 대신 학으로 바꿔 다는 무관들이 있었지. (41쪽)


초상화를 그리는 데 든 비용은 얼마였을까? 초상화를 그릴 비단은 10냥에 샀고, 화가 이명기에게는 10냥의 수고비를 주었어. 족자를 만드는 재료비와 이득신에게 준 수고비가 13냥, 궤를 만드는 데 4냥 등 모두 37냥의 돈을 썼지. 지금 돈으로 치면 약 400만 원 정도래 … 경제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야. 그러니까 돈 많고 신분이 높은 벼슬아치들만 초상화를 남길 수 있었지. (53쪽)



  오늘날에는 흔히 사진을 찍습니다. 한식구가 한자리에 모여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그날 그때에 맞추어 가볍게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종이로 뽑은 사진을 벽에 붙이기도 하고, 손전화나 셈틀에 사진파일을 모아 놓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아주 적은 돈으로도 사진 한 장을 얻을 만합니다. 그림을 그린다고 할 적에도 누구나 손쉽게 어디에서나 그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누구이든 그림으로 그릴 수 있어요. 이름난 사람이나 돈 있는 사람이나 힘이 센 사람들 모습도 사진이나 그림으로 나오지만, 어버이가 아이를 그리고 아이가 어버이를 그리지요. 동무끼리 서로 그리고, 이웃이 스스럼없이 서로 그립니다.


  우리 집에서는 으레 그림잔치가 벌어집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저마다 저희 깜냥껏 저희 모습을 스스로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모습을 나란히 그려 줍니다. 나도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아이들 모습을 내 나름대로 그리고, 내 모습을 나 스스로 함께 그립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가운데 더할 나위 없이 곱구나 하고 느끼는 그림을 벽이나 문마다 붙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 그렸어. 선물.’ 하고 내미는 그림을 책상맡에 줄줄이 올려놓습니다. 나 스스로 우리 보금자리를 기쁘게 돌아보면서 그린 그림도 책상맡에 놓습니다. 앞으로 이루려는 꿈도 그림으로 그려서 책꽂이에 책과 함께 살짝 꽂아 놓습니다.




휴버트 보스는 서양화가답게 조선의 물감이나 먹을 쓰지 않고 서양 물감을 썼지. 특이하게도 고종은 서 있어. 우리 어진에는 이런 모습은 볼 수가 없지. 임금의 위엄이 별로 느껴지질 않거든. 휴버튼 보스는 존엄한 임금이 아니라 한 인간의 모습을 강조한 거야. 만국 박람회에서 세계 여러 인종을 보여주는 전시회에 출품하려 했기 때문이지. 비록 임금의 옷차림이지만 한 사람의 평범한 조선인이 되었어. (98∼99쪽)



  《조선시대 초상화에 숨은 비밀 찾기》를 읽으며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조선 무렵에 궁중에서 임금님이나 여러 궁중 행사를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그무렵부터 임금이든 계급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든, 저희끼리 저희(권력자) 그림만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궁중 화가를 시켜서 ‘여느 사람(백성)이 사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했다면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임금은 궁궐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할 뿐 아니라, 계급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도 여느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를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들이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와 마을살이를 잘 알거나 살피거나 헤아리도록 도울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다른 한쪽으로 헤아린다면, 조선왕조실록처럼 ‘왕조 발자취’만 남길 노릇이 아니라, ‘백성실록’ 같은 기록도 남긴다든지 ‘백성화첩’ 같은 그림도 그렸다면, 조선 사회를 둘러싼 삶자락과 숨결을 훨씬 넓고 깊이 돌아보는 바탕이 되었으리라 느껴요.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 권력자 자리에 있던 이들은 이러한 데에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권력자 자리에 있는 이들은 이러한 데에 눈길을 두지 않습니다. 정치권력자 자리에 있는 이들은 이녁 입맛에 맞게 국정교과서를 바꾸려고 하는 데에 힘을 쏟을 뿐입니다.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를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갈무리한다든지, 여느 사람들 마음자리를 아름답게 북돋우는 길에는 좀처럼 나서지 못해요.




조선 시대 여인 초상화 중에는 이런 명작이 드물어. 명작은 고사하고 아예 여인 초상화 자체가 없어. 다 모아 봐야 겨우 한 손으로 꼽을 정도거든. 조선 시대에는 여인 초상화를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야. (106쪽)


특이하게도 사냥꾼 털모자를 쓰고 있어 …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해 뵈잖아. 관복 차림보다 훨씬 강인한 느낌도 들어. 털모자는 추운 겨울 바깥에서 활동할 때 쓰니까. 채용신은 의병장으로 온 산천을 누비던 최익현의 모습이 훨씬 인상 깊었나 봐. (140쪽)



  조선 끝무렵에 나온 ‘최익현 그림’은 조선 사회에서 쏟아진 다른 얼굴그림하고 사뭇 다르다고 합니다. 의병장 최익현을 담은 그림은 ‘권력자가 돈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니까요. 한 사회가 스러지고 다른 사회로 들어설 무렵 그림결이 천천히 바뀐다고 할 만합니다. 신분이나 계급을 허물면서 그림도 새로운 숨결로 거듭난다고 할 만합니다.


  조선 사회까지만 하더라도 궁중 화가가 아니면 임금 모습을 섣불리 그릴 수 없었으나, 이제는 누구라도 대통령 모습을 마음껏 그릴 수 있습니다. 한때 ‘원수 모독’ 같은 죄를 물리기도 했으나 이제는 이런 모독죄까지 춤추지는 않습니다. 〈로빙화〉라는 작품(책·영화)을 보면 시골마을 권력자가 권력을 새로 거머쥐려고 이녁 모습을 ‘멋있게 그려 줄 화가’를 찾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틀이나 굴레에 박힌 어른들은 그야말로 틀이나 굴레에 박힌 그림만 그리고 그런 그림이 좋다고 여기지만, 이 작품에 나오는 고아명이라는 아이는 오직 아이 마음에서 흐르는 사랑과 꿈과 삶을 그림으로 그려요.


  그래서 《조선시대 초상화에 숨은 비밀 찾기》를 읽는 동안 이 대목을 새삼스레 헤아려 봅니다. 조선 사회에서 이름과 돈과 힘이 있는 사람들 모습만 그릴 수밖에 없던 수많은 얼굴그림을 살필 적에는 ‘그림 기법’과 ‘표현 기법’을 살피는 테두리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권력자와 사대부와 임금 얼굴그림 아니고는 살펴보기 어려운 조선 사회 얼굴그림을 바라보면서 ‘조선 사회가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든지 ‘조선을 이룬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짚을 수도 없습니다. 이른바 ‘근엄해 보이려’는 몸짓으로 남은 얼굴그림이란, 그만큼 조선 사회가 틀에 박히거나 굴레에 갇혔다는 뜻이지 싶습니다. 더욱이 얼굴그림에 남을 수 있던 사람은 거의 모두 사내일 뿐입니다. 임금 곁에서 임금을 모신 이들은 모조리 사내이기도 했어요.


  이제 앞으로 백 해가 흐르고 이백 해가 흐르면 오늘날 20∼21세기를 돌아볼 뒷사람으로서는 조선 사회하고는 사뭇 다른 ‘그림 이야기’를 누리리라 생각해요. 앞으로는 이름이나 돈이나 힘이 있는 사람들 얼굴그림뿐 아니라 수수하고 투박한 이 나라 수많은 ‘여느 이웃’ 살림살이를 그림 한 점으로 읽을 만하겠지요. 4348.11.26.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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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스케이트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5
유모토 카즈미 지음, 호리카와 리마코 그림, 김정화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22



여우하고 들쥐가 서로 동무로 지내며

― 여우의 스케이트

 유모토 카즈미 글

 호리카와 리마코 그림

 김정화 옮김

 아이세움 펴냄, 2003.10.1. 7000원



  동무 사이라면 서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습니다. 너와 내가 동무 사이라면 이른바 ‘조건’을 걸면서 따지지 않아요. 동무이니까요. 동무는 기쁘게 어깨동무를 하는 사이입니다. 동무는 함께 웃고 노래하면서 춤출 수 있는 사이입니다. 동무는 ‘네가 이렇게 해 주어야 나도 너랑 같이 있지’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동무라면 ‘그래, 우리 같이 있자’ 하고 말할 뿐입니다.



호수 한가운데는 색이 왠지 어둠침침하고 칙칙했습니다. 그리고 호수 건너편에는 아주 넓은 숲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숲은 컴컴하고 빽빽했습니다. ‘저 숲에 가 보고 싶다. 저 커다란 숲에는 뭐가 있을가?’ (14쪽)


저녁놀이 비친 호수는 오렌지 맛이 나는 젤리 같았습니다. 여우는 손을 물에 살짝만 갖다 댔는데도 온몸이 달달 떨렸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앞발을 다 담그고 일곱까지 셀 수 있었는제, 지금은 아무리 참아도 셋까지밖에 셀 수 없었습니다. (25쪽)



  유모토 카즈미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가운데 하나인 《여우의 스케이트》(아이세움,2003)를 읽으면서 ‘동무 사이’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이 어린이문학은 ‘여우’가 주인공이고, 들쥐가 주인공하고 동무가 되는 숨결이며, 여우가 발에 끼워서 얼음을 지치는 스케이트가 수많은 동무하고 잇는 징검돌입니다.


  《여우의 스케이트》에 나오는 여우는 아직 새끼 여우인데, 어미 품에서 씩씩하게 잘 자란 뒤 처음으로 어미 품을 떠나서 홀로서기를 하려 합니다. 혼자서 숲을 달리고, 혼자서 먹이를 찾으며, 혼자서 꿈을 짓는 삶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혼자 먼먼 길을 나서다가 어느 날 숲 가장자리 못가에서 풀썩 쓰러져요. 지치고 힘들어서 그만 넋을 잃습니다.


  이때에 여러 숲짐승이 여우를 봅니다. 이 여우를 본 숲짐승은 살짝 망설이는 듯했지만 따스한 마음으로 여우를 돌보기로 합니다. 여우는 따스한 손길을 받고는 다시 기운을 차리는데, 기운을 차린 여우는 숲 가장자리 못가 마을에서 아주 개구진 짓을 하면서 설치고 놉니다.



“나도 먹어 본 적은 없어. 우리 할머니한테서 들었어. 그 열매는 머리칼이 쭈뼛해질 정도로 맛있대. 할머니가 어렸을 때 이 숲에 그 파란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딱 한 그루 있었대. 엄청나게 큰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면 모두들 배부르도록 먹었대. 그 나무가 있었을 때는 이 숲도 이렇게 조용하지는 않았다고 할머니가 그러셨어.” (32∼33쪽)



  여우는 몸이 다 나았으나 ‘사는 재미’를 좀처럼 찾지 못합니다. 애써 홀로서기 길을 나섰으나 ‘심심한 곳’에 얽매인다고 느낍니다. 날이면 날마다 짓궂은 장난을 일삼습니다. 작고 여린 들쥐를 꽁꽁 묶어서 으르렁거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고 여린 들쥐는 여우가 무서우면서도 여우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작고 여린 들쥐는 여우 속내는 막상 무척 보드랍고 너른 숨결이라고 느낍니다. 작고 여린 들쥐는 여우를 저한테 둘도 없이 살가운 동무로 여깁니다.


  여우는 처음에 작고 여린 들쥐를 그냥 잡아먹을 생각만 했지만, 이 작고 여린 들쥐가 저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동무로 여기는’ 모습을 보고는 그악스럽다고도 여기지만, 어느새 천천히 마음이 바뀝니다. 아니, 이제 막 철이 들려고 하는 ‘어미 품을 떠난 지 첫 해째인 새끼 여우’는 차츰 어른이 되면서 너르고 따스한 마음이 찾아든다고 할 만합니다.



솜사탕처럼 달지는 않았지만, 여우와 들쥐는 눈 맛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37쪽)



  들쥐는 쉬지 않고 여우한테 말을 겁니다. 여우는 들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습니다. 이러면서 넓디넓은 못 너머에는 어떤 숲이 펼쳐질는지 궁금해 합니다. 아무도 저 못 너머로 갈 엄두를 내지 않지만, 여우는 숲 너머를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들쥐는 겨울이 되면 이 넓디넓은 못을 건널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여우는 왜 겨울에 이 못을 건널 수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또 들쥐가 하는 말을 못 미덥게 여기지만, 드디어 겨울이 되어 못물이 꽁꽁 얼어붙으니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얼음판을 가로지르면 되는 일입니다.



들쥐는 젤리를 딱 하나만 먹고 나머지는 서랍장 깊이 잘 넣어 두었습니다. 여우가 돌아오면 같이 먹을 생각이었습니다. (53쪽)



  숲마을 숲동무가 모두 힘을 모아서 스케이트를 하나 마련했습니다. 여우가 떠나고 싶어 하는 먼 마실길에 쓰라고 스케이트를 선물합니다. 여우는 숲동무가 선물로 준 스케이트를 신고 꽁꽁 언 못을 지치며 나아갑니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자꾸 앞으로만 나아갑니다. 작고 여린 들쥐는 여우가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보아 주기를 바라지만, 여우는 그야말로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내체 달리기만 합니다.


  여우는 못 너머로 건너간 뒤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까요? 들쥐는 저한테 둘도 없는 동무라고 여기는 여우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다른 숲짐승은 모두 여우가 다시 안 돌아오리라 여깁니다. 오직 들쥐만 여우가 꼭 돌아와 주리라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겨울이 저물고 봄이 되려 하기까지 여우는 돌아올 낌새가 없습니다.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면 이곳으로 다시 건너올 수 없는데 들쥐는 동무를 잃었다는 생각이 슬픕니다.



그때 작은 숲에서 나무가 일제히 흔들렸습니다. 호수에 작은 물결이 일었습니다. 여우와 들쥐는 향긋한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습니다. (74쪽)



  어린이문학 《여우의 스케이트》에 나오는 여우는 얼음이 모두 녹는 날 아슬아슬하게 들쥐 곁으로 돌아옵니다. 여우는 등에 큰 나무 한 그루를 짊어지고 돌아옵니다. 여우가 짊어진 나무는 들쥐가 할머니한테서 이야기로만 듣던 열매 나무입니다. 여우는 들쥐가 저한테 얼마나 사랑스러운 동무인가를 찬찬히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사랑스러운 동무가 바라고 꿈꾸던 ‘들쥐 할머니가 이야기한 열매 나무’를 숲 너머에서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이 열매 나무가 있으면 이곳 숲짐승 모두 맛난 열매를 실컷 누릴 수 있으리라 여겼다고 합니다. 들쥐뿐 아니라 다른 숲짐승한테도 고마운 뜻을 돌려주고 싶었을 테지요.



“야, 참말 맛있다! 여우야, 어쩜 넌 이렇게 나무 열매를 잘 따니. 넌 참말 참말 대단한 여우야.” 들쥐는 자기가 묶인 줄도 잊은 채 감탄했습니다. (29쪽)



  여우와 들쥐 사이에 따스한 마음은 언제부터 싹이 텄을까요? 아마 여우가 들쥐를 꽁꽁 묶으며 괴롭히던 때에도 들쥐가 여우한테 늘 상냥하게 말을 걸고 ‘여우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일’을 들쥐가 몹시 고마워하는 몸짓을 늘 느끼면서, ‘어미 여우한테서 홀로서기를 하려던 마음’에 문득 ‘사랑이라고 하는 씨앗이 싹이 텄’으리라 봅니다. 이때에 싹이 튼 작은 씨앗인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서 새끼 여우가 이제는 ‘의젓하게 철이 든 어른 여우’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되었구나 싶어요.


  참말로 사랑이란 아무것도 토를 달지 않습니다. ‘조건 없는 마음’이기에 사랑입니다. 동무 사이에서도 토를 달 까닭이 없습니다. 짝을 짓는 두 사람뿐 아니라, 어깨를 겯는 두 사람 사이에서도 토를 달지 않으면서 빙그레 웃고 노래하기에 동무가 되면서 사랑이 흐릅니다.


  아이들이 어버이한테 바라는 마음도 바로 이 ‘토를 안 다는 사랑’이리라 봅니다. 어버이가 아이들한테 물려주거나 가르치거나 보여줄 수 있는 마음도 바로 이 ‘토를 안 다는 사랑’이리라 느낍니다. 사랑이 싹트는 자리에서 웃음하고 노래가 흐릅니다. 사랑이 싹트는 두 사람은 기쁘게 손을 맞잡으면서 춤을 추고 삶을 새롭게 짓습니다. 4348.11.20.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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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물고기 독깨비 (책콩 어린이) 38
린다 멀랠리 헌트 지음, 강나은 옮김 / 책과콩나무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21



너와 나는 달라서 더없이 아름답다

― 나무 위의 물고기

 린다 멀랠리 헌트 글

 강나은 옮김

 책과콩나무 펴냄, 2015.10.30. 13000원



  학교나 사회를 보면, 언제나 ‘안 아픈 이’ 틀에 따라 맞춥니다. 그리고 언제나 ‘힘이 센 이’ 틀에 따라 맞추기 일쑤입니다. 이러면서 ‘아픈 이’나 ‘힘이 여린 이’를 돕는 틀을 살짝 곁들이려 합니다. ‘아픈 이’가 ‘안 아픈 이’한테 따라가야 하고, ‘힘이 여린 이’가 ‘힘이 센 이’한테 맞추어야 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힘이 여린 이가 힘이 센 이한테 맞추어야 하는 사회’나 ‘아픈 이가 안 아픈 이한테 맞추어야 하는 사회’라는 말은, 말이 안 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말 이와 같지 않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아파서 집 바깥으로 나다니지 못하는 사람은 으레 ‘복지’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회입니다. 여느 삶자리에서 ‘똑같은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아요. 이를테면, 버스나 전철이나 배나 비행기 같은 데에서 어린이나 늙은 할매와 할배를 헤아리는 틀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버스나 전철에 경로석이나 어린이석이 있다고는 하지만, 자리에 이름표만 붙일 뿐, 버스를 타러 가기까지, 또 전철을 타러 오가는 길에, 어린이나 늙은 할매와 할배를 헤아리는 사회 얼거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만 살펴도 알 수 있지요. 지하도 계단은 언제나 ‘안 아픈 어른’ 키높이에 맞춥니다. ‘아픈 어른’ 키높이라든지 ‘어린이’ 키높이는 하나도 살피지 않아요. 여느 버스 계단도 ‘안 아픈 어른’ 키높이에 맞을 뿐, ‘아픈 어른’ 키높이라든지 ‘어린이’ 키높이에는 너무 높고 가파르며 좁습니다. 온 나라에 생기는 ‘자전거길’은 어른이 타는 자전거만 생각할 뿐, 어린이나 늙은 할매와 할배가 자전거를 타고 달릴 만하도록 생각해서 마련하지 않습니다.



난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입을 열지 말자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일곱 군데의 학교를 전전하면서 나는 아무 말 않는 편이 유리하다는 걸 배웠다. (23쪽)


나는 책을 한 권 꺼내 펼쳤지만 글자들이 꿈틀거리고 춤을 추었다. 움직이는 글자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는 걸까? (29쪽)



  린다 멀랠리 헌트 님이 쓴 어린이문학 《나무 위의 물고기》(책과콩나무,2015)를 읽다가 얼굴이 화끈해집니다. 내 어릴 적 일이 환하게 갑작스레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문학 《나무 위의 물고기》에 나오는 ‘앨리’라는 아이는 열세 살쯤 되는데 글을 제대로 못 읽습니다. 책을 펼치면 글씨가 마치 춤을 추는 듯이 날아가거나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를 가리켜 ‘난독증’이라고 한다는군요. 아마 글을 잘 읽는 사람이라든지, 글을 읽으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붙인 이름일 테지요.


  나한테 난독증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나는 혀짤배기이고, 말을 조금만 빨리 하려고 하면 혀가 꼬여서 소리가 샙니다. 어릴 적에는 학교에서 교사들이 언제나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윽박질렀고, 교과서 읽기를 시킨다든지 발표를 시킬 적에 하나라도 틀리면 어김없이 몽둥이가 춤을 추고 손찌검으로 불을 뿜었어요. 이런 학교 얼거리에서 교과서 읽기를 시키면 몹시 떨린 나머지 말소리가 샜습니다. 말소리가 새지 않도록 천천히 읽으려 하면 굼벵이가 기어가느냐 하면서 다그치니 동무들이 깔깔거리며 웃어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교과서 읽기를 시킬 적마다 웃음거리가 됩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하는 일이 언제나 두렵고 무섭도록 내몰던 예전 학교 모습이라고 할까요. 《나무 위의 물고기》를 읽는 내내 어릴 적 학교가 떠올라서 자꾸 소름이 돋았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엄마 목소리에 담긴 피곤함에, 졸라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터덜터덜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말이야, 사람들이 널 싫어한다는 소리는 하지 마!” 엄마가 외쳤다. “세상에 누가 너 같은 아이를 싫어하겠어?” (43쪽)


학교 선생님들은 대부분 학생들이 전부 똑같기를 바라는 것 같다. 모든 학생들이 완벽하고 얌전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런데 대니얼스 선생님은 모두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좋아하는 것 같다. (71쪽)



  어린이문학 《나무 위의 물고기》를 보면, 앨리 곁에 앨리를 돕는 동무가 둘 있습니다. 두 아이는 앨리한테 ‘다른 아이하고 참으로 다른 모습’이 있는 줄 압니다. 그리고 ‘다른 모습’은 그저 ‘다른 모습’일 뿐이라고 여기면서, 이 대목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는 앨리가 ‘다른 아이하고 참으로 다른 모습’을 놓고 끈질기게 꼬리를 잡으면서 놀리거나 괴롭히려고 하지만, 앨리 곁에서 동무로 함께 지내는 두 아이는, ‘서로서로 아름다운 동무’라고 여기는 마음으로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되어 줍니다.


  이리하여, 세 동무가 씩씩하게 학교를 다니면서 어려움을 헤치고 즐거운 삶을 찾는 이야기가 흐르는데,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새삼스레 또 한 가지 일이 떠오릅니다. 수업을 하며 무시무시한 교사들이 몽둥이를 들고 으르렁거리면서 나처럼 뭔가를 ‘잘 못 하’거나 ‘어설프게 하’는 아이를 다그치거나 놀림감이나 웃음거리로 삼는 짓을 하더라도, 이런 짓에 웃지 않는 동무들이 있어요. 그리고, 이 동무들은 제가 여느 때에 함께 걷거나 놀거나 어울리다가 ‘말소리가 샐’ 적에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냅니다. 이러면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 알아차립니다. 이 동무들은 나한테 “너 혀짤배기네!” 하면서 놀린 적도 없고,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무렵에 그 모습을 제대로 못 느꼈습니다. 내가 또 말소리가 샜구나 하고 느껴서 얼굴이 발개지고 창피하다고 느꼈을 뿐, 내 동무들은 내 말소리 샌 모습을 하나도 놀리지 않고 따지지 않는데, 이렇게 고맙고 훌륭한 동무들이 있는데, 이 동무들한테 고맙다는 마음을 그때에는 미처 밝히지 못했어요. 내 창피를 감추느라 바빴습니다. 이제서야 그 마음을 깨닫습니다.



“깜깜한 방이 어째서 너에 대한 그림이야, 앨리?” 선생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무척이나.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깜깜한 방에 있으면 아무도 날 못 볼 테니까요.” (76쪽)


‘글 읽기가 서툴다’는 표현 하나로, 사람들은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를테면, 내가 깡통에 담긴 수프인데, 깡통에 쓰인 재료를 읽기만 하면 나에 대해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것처럼. (122쪽)



  누군가는 학교에서 시험성적이 잘 나올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운동을 잘 할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책을 잘 읽을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글씨를 잘 쓸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동무들을 잘 이끌거나 타이르거나 다독일 줄 알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새로운 놀이를 끝없이 빚어서 다 함께 웃고 떠들면서 놀도록 선보일 줄 알 테지요. 누군가는 학교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잘 지어내면서 따스한 바람이 불도록 할 테지요. 누군가는 어린 나이에도 밥을 잘 짓고 집일도 알뜰히 거들 테지요.


  참말 모두 다릅니다. 참으로 모두 다른 마음이요 생각이며 넋입니다. 그러니, 이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사랑하는 삶길을 걸을 수 있도록 북돋우거나 가르칠 때에 아름다운 학교라고 여겨요. 성적에 따라 등수를 매겨서 줄을 세우려는 학교가 아니라,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꿈을 키워서 모두 새롭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이끌 학교여야지 싶습니다.



나비들이 나에게 날아왔다. 나비들의 색과 무늬를 보며 왜 지금껏 한 번도 나비를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비들이 나는 방식은 새들과 달랐다. 온갖 방향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날았다. 나도 일부는 나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148쪽)


“앨리, 넌 남달라. 나도 남달라. 앨버트도 남달라. 그리고 속하고 말고를 누가 결정하는데? 셰이 같은 애들이? 걔는 못돼 먹은 애야. 걔가 뭐라고 하든 신경 쓸 필요 없어.” (175쪽)



  《나무 위의 물고기》에 나오는 아이를 둘러싸고 여러 교사가 나옵니다. 여러 교사를 살피면, 앨리라는 아이뿐 아니라 ‘다 다른 아이’를 다 다르게 바라볼 줄 아는 교사도 있고, 다 다른 아이를 그저 ‘다 똑같은 아이’로 맞추어서 줄을 짓거나 판에 박도록 이끌려는 교사도 있습니다. 학교에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미처 모든 아이를 제대로 못 살피는 교사도 있어요.


  어느 모로 보면, 앨리라는 아이는 동무와 교사를 잘 만났다고 할 만합니다. 참말 이렇게 좋은 동무와 교사를 만나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다른 자리에서 살피면, 앨리라는 아이는 제 마음자리에 아프고 괴로운 앙금이 있는 터라, 다른 동무들이 힘들거나 아파할 적에 살며시 다가가서 어깨를 쓰다듬어 줄 줄 압니다. 앨리라는 아이 곁에 좋은 동무가 있을 뿐 아니라, 앨리도 다른 동무한테 좋은 벗님이에요.



“학교에 오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알면서도 매일 학교에 오잖니. 학교에서의 하루가 힘들 거란 걸 알고 다른 아이들이 놀릴 거란 걸 알면서도, 너는 매일 학교에 와서 다시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하잖아.” (196쪽)


나는 반장이 되고 싶어지는 내 마음이 두렵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내가 교실 앞에 서 있고 선생님이 나를 축하해 주는 영화가 상영되었고, 그게 현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연필을 집어 들고 최선을 다해 집중했다. 최선을 다해. (248쪽)



  나는 어릴 적에 내 좋은 동무들한테 어떤 벗님이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내 혀짤배기 말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한 번도 나를 놀리지 않던 그 동무들한테, 나는 얼마나 사랑스럽고 재미나며 아름다운 벗님으로 함께 지냈을까 하고 되새겨 봅니다. 짓궂은 장난도 꽤 많이 쳤고, 우스꽝스러운 장난도 자꾸 치던 개구쟁이였는데, 그래도 나는 내 좋은 동무들한테 착하면서 맑은 몸짓과 웃음을 보여주었는가 하고 참말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어쩌면, 나도 내 동무들한테 좋은 벗님이 될 만했기에 나를 따스히 아낀 동무들이 있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내 동무들도 그 아이들대로 누구한테나 좋은 벗님이 될 만한 아름다운 넋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 다른 동무가, 키도 다르고 몸집도 힘도 모두 다른 동무가, 씩씩하게 손을 맞잡고 걷습니다. 키가 좀 어긋나도 어깨동무를 합니다. 걸음걸이가 좀 달라도 깔깔깔 웃고 노래하면서 걷습니다. 내가 아플 적에는 동무가 나를 보살피고, 동무가 아플 적에는 내가 동무를 보살핍니다. 내가 힘들 적에는 동무가 나를 돕고, 동무가 힘들 적에는 내가 동무를 돕습니다.


  책을 잘 못 읽으면, 책은 안 읽어도 됩니다. 글을 잘 못 쓰면, 글은 안 써도 됩니다. 힘이 여리면 힘을 써야 하는 일은 안 해도 됩니다. 스스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스스로 아름답게 걸을 수 있는 길을 걸으면 돼요. 학교에서 교사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빌어요. 그리고, 학교를 다니는 모든 아이들이 스스로 ‘너와 나는 다르지만, 너와 내가 다르기에 서로 아름답지’ 하는 마음으로 삶을 사랑하는 길을 배울 수 있기를 빌어요. 4348.11.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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