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에서 온 소녀와 이야기 양탄자 희망을 만드는 법 3
안드레아 카리메 지음, 김라합 옮김, 아네테 폰 보데커 뷔트너 그림 / 고래이야기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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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32



이라크에 떨어지는 폭탄은 독일에는 안 떨어진다

― 바그다드에서 온 소녀와 이야기 양탄자

 안드레아 카리메 글

 아네테 폰 보데커 뷔트너 그림

 김라합 옮김

 고래이야기 펴냄, 2009.9.5. 9000원



  밤에 아이들을 고요히 재울 수 있는 까닭은 우리 보금자리와 마을이 차분하면서 따사롭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평화가 있기에 어버이는 아이를 기쁘게 보살피면서 하루를 지을 수 있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이라면 어버이는 아이를 느긋하거나 넉넉하거나 따사롭게 보살피기 어려워요. 평화가 있기에 즐겁게 하루를 열어서 기쁘게 살림을 짓습니다.


  안드레아 카리메 님이 글을 쓰고, 아네테 폰 보데커 뷔트너 님이 그린을 그린 《바그다드에서 온 소녀와 이야기 양탄자》(고래이야기,2009)를 읽으면서 평화와 전쟁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이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는 이라크 가시내입니다. 이라크에서 나고 자랐으나 더는 이라크에서 살지 못하면서 다른 나라로 가서 살아야 하는 아이입니다. 어머니처럼 고향을 그리고, 고향집을 그리며, 고향마을에서 즐겁게 노는 모습을 그리는 아이예요.



저는 지금 이모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그래도 엄마는 이모한테 편지를 쓰라고 했어요. 편지를 써서 바그다드에 있는 우리 집 주소로 보내래요. (5쪽)


여기에서는 엄마가 저를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에 보내세요. 이라크에서처럼 유괴를 당하거나 갑자기 폭탄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요. (10쪽)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네 식구는 이라크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이라크에 전쟁이 터질 무렵 적잖은 이라크 사람들은 이라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래저래 살림이 안 되어 이라크를 못 떠난 사람도 많고, 이래저래 살림이 안 되더라도 어떻게든 이라를 떠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라크를 떠난다고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즐겁거나 넉넉하게 살기는 만만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이라크에 남는다고 해서 그곳에서 즐겁거나 넉넉하게 살기에도 똑같이 만만하지 않아요.


  이라크에서는 폭탄 걱정을 하면서 살지만, 이라크를 떠나 독일로 온 아이는 학교에서 따돌림하고 괴롭힘을 받습니다. 이라크에서는 하지 않던 걱정을 독일에서 합니다. 이라크에서는 받지 않던 따돌림하고 괴롭힘을 독일에서는 고스란히 받습니다.




이모가 그랬죠? 이야기는 슬픔과 걱정을 잊게 해 준다고요. 정말 그런가 봐요. 제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나자 엄마가 웃었거든요. 그리고 누리야, 누리야, 이러면서 저를 몇 번이나 껴안았어요. (21쪽)


어젯밤에 파트릭이 저를 괴롭히는 꿈을 꾸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아이의 괴롭힘에서 스스로 벗어났어요. 제 양탄자가 저를 구해 준 셈이죠. (27쪽)



  《바그다드에서 온 소녀와 이야기 양탄자》에 나오는 아이는 고향집에 편지를 씁니다. 이라크에서 함께 빠져나오지 못한 이모한테 연락이 닿기를 바라면서 편지를 써요. 편지는 고향집에 제대로 닿을까요? 전쟁이 한창이더라도 우체국 일꾼은 폭탄 물결을 뚫고 씩씩하게 편지를 나를 수 있을까요? 아니, 전쟁이 한창이더라도 우체국은 꿋꿋하게 문을 열까요?


  아무튼, 이라크 아이는 다른 모든 걱정은 내려놓으면서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이 편지에는 이모를 그리는 마음뿐 아니라 아이 나름대로 짓는 이야기를 붙입니다. 집과 마을과 학교에서 느끼는 고단한 삶을 아이 나름대로 짓는 이야기로 풀어내어 날마다 조금씩 써요.




전쟁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갔어요. 밖에 나가 놀 수도 없게 되었고요. 그런데 여기(독일)에서는 모든 게 괜찮은 걸까요? (41쪽)


“알라신이 여기 사막에 살고 있는 거 맞아요?” “그래, 나는 알라신이 여기 어디엔가 살고 있다고 믿는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기가 어디라고는 말해 줄 수가 없구나.” (49쪽)



  이라크 아이는 ‘검은니 왕’ 이야기를 씁니다. 누구한테서도 들은 적이 없는 이야기를 아이 스스로 새롭게 씁니다. 드넓은 사막에서 작은 짐승하고 벌레를 괴롭히는 검은니 왕하고 얽힌 이야기를 써서 스스로 마음풀이를 하고 꿈짓기를 합니다. 동무도 이웃도 없이 모든 이를 괴롭히기만 하던 검은니 왕 이야기를 그리는 아이 마음속에는 동무랑 이웃이랑 사이좋게 어울리는 평화로운 꿈이 있어요. 검은니 왕이 무시무시하게 으르렁거릴 수 있던 ‘검은니’를 슬기롭게 몽땅 뽑아 버리는 이야기를 쓰면서, 이 지구별에, 그러니까 이라크뿐 아니라 온누리에 따사로운 평화가 흐르기를 바라는 꿈을 이야기 하나에 살포시 담아요.


  이라크에 떨어지는 폭탄은 독일에는 안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이라크 아이가 받은 생채기는 더없이 큽니다. 이라크 아이가 한국이라는 나라로 왔다면 어떻게 지낼까요? 이 아이는 한국에서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받지 않으면서 느긋하고 사랑스러우면서 기쁘게 하루를 누릴 만할까요? 한국 사회는 이웃나라 작은 아이들을 넉넉하게 품으면서 평화를 가르치거나 들려주거나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베풀 만할까요?




그제야 검은니 왕은 사정을 알아차렸어요. 입 안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주 아주 작은 이빨뿐이었어요. 검은니 왕은 이제 자기가 더는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놀림당하는 왕을 왕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67쪽)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는 스스로 이야기를 지으면서 스스로 새롭게 일어서려고 합니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가 지은 이야기를 들은 아이 어머니는 아이한테서 듣는 이야기로 슬프며 고단한 마음을 달랜다고 합니다. 이라크에 남았던 이모도 뒤늦게 이 편지를 한꺼번에 받을 수 있으면서 전쟁 불구덩이에서도 밝은 꿈씨앗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이 땅에 씨앗을 심는 숨결이지 싶어요. 평화라는 씨앗을 심고, 꿈이라는 씨앗을 심으며,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는 숨결인 아이들이지 싶어요. 참말로 아이들은 전쟁무기를 만들지도 않고, 군대도 거느리지 않아요. 아이들은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고, 다툼질이나 싸움질도 좋아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포근하고 넉넉한 품을 좋아하고, 동무들이 서로 사이좋게 어우러지는 놀이를 즐겨요.


  이 어여쁜 아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적에 온누리에 평화가 흐르겠지요. 이라크에도, 독일에도, 한국에도, 그리고 모든 지구별 나라마다 아이들이 맑으면서 밝은 넋으로 평화와 꿈과 사랑을 노래할 수 있기를 빕니다. 4349.1.2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어린이책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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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에서 우리문화찾기 10살부터 읽는 어린이 교양 역사
배유안 지음,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 / 책과함께어린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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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29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온 모습

―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에서 우리 문화 찾기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

 배유안 글

 책과함께어린이 펴냄, 2008.12.5. 11000원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 님은 우리가 일제강점기로 지내야 하던 무렵 이 땅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은 꽤 있었을 텐데, 우리 이야기와 우리 문화를 가만히 살피면서 남긴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아요. 이녁이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서 그려서 남긴 그림은 오늘날 한국에서 지난날 발자취를 되새기도록 도와주는 조촐한 선물과 같습니다.


  어린이 인문책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에서 우리 문화 찾기》(책과함께어린이,2008)를 읽습니다. 엘리자베스 키스 님이 남긴 그림을 놓고, 배유안 님이 살을 붙여서 엮은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이 책은 역사 자료로 들려주는 한국 현대사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나라에서 수수하게 살던 사람들 발자취가 물씬 묻어나는 그림을 새삼스레 바라보면서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문화로 아로새겼는가 하는 대목을 들려주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인쇄까지 다 한 크리스마스실을 갑자기 일본이 압수해 간 거야. 산을 크게 그린 것이 군사법에 어긋난다나? 산을 작게 그리고, 또 그림에 1940년이라고 쓰지 말고 일본 연호를 써야 한다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화가 났지만 좋은 일에 쓸 거니까 참고 다시 그렸대. (15쪽)



  ‘풍속화’라는 이름으로 수수한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를 그림으로 담은 일이 지난날에도 더러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수수한 여느 사람들 삶은 그림이나 글이나 책에 거의 나타나지 않아요. 으레 임금님이나 신하나 지식인 모습이나 발자취만 그림이나 글이나 책으로 엿볼 뿐이에요.


  엘리자베스 키스 님이 남긴 그림에도 일제강점기 무렵 꽤 이름이 높거나 정치권력이 센 사람도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보다는 여느 시골집이나 살림집에서 수수하게 사는 사람들 모습이 더 자주 나와요. 마당에 멍석을 깔고서 맷돌을 돌리는 사람이 나옵니다. 마을 고샅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나옵니다. 연을 날리는 아이가 나오고, 널을 뛰는 사람하고 널뛰기를 구경하며 아기를 업은 사람이 나와요.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고 그 위에 얇은 천을 펴 놓았지? 맷돌에서 흘러나오는 마른 가루를 받도록 말이야. 삶은 콩이나 불린 쌀같이 젖은 걸 갈 때는 맷돌 아래에 커다란 함지를 받쳐 놓아야 해. (29쪽)


오다가 만나도 이야기 한 소쿠리, 가다가 만나도 이야기 한 소쿠리, 밤에는 바느질감 들고 모여 또 한 소쿠리, 해도 해도 끝도 없는 게 사는 이야기야. (35쪽)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그림에서 우리 문화 찾기》에 나오는 그림을 살피고, 이 그림에 붙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해방 뒤나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던 무렵이나 오늘날에도,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눈여겨보는 사람은 ‘수수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는 이들이 눈여겨보는 사람도 ‘수수한 사람’이 아니기 마련이에요.


  이름난 사람을 그리거나 찍어야 뭔가 이야기가 되는 줄 여기곤 해요. 힘(권력)이 있거나 돈이 있거나 내로라하는 자리에 선 사람을 그리거나 찍어야 뭔가 역사가 되거나 기록이 되는 줄 여기곤 하지요.


  수수한 이웃을 그림으로 담거나, 수수한 동무를 사진으로 찍으면서 ‘삶을 짓는 기쁨’을 그림이나 사진으로 드러내는 손길이 아직 퍽 모자라지 않느냐 하고 느낍니다. 수수한 이야기에서 수수한 사랑이 흐른다는 대목을 보여주는 그림이나 사진은 아직 한국에 얼마 없구나 싶어요. 일제강점기에는 외국사람 손길이라도 타면서 수수한 살림살이와 수수한 사랑이 남을 수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우리 손길로도 좀처럼 수수한 살림살이와 수수한 사랑이 남도록 하는 일이 드물구나 싶어요.




말간 하늘에 둥실둥실 연들이 춤추고 있어. 빨간 댕기를 늘어뜨린 여자아이가 얼레를 들고 높이 뜬 연을 올려다보고 있구나. (50쪽)


초가지붕에도 돌담에도 짚을 엮어 얹었어. 돌담 위에 빨래통 같은 걸 엎어 놓았네. 오른쪽에는 줄을 매서 빨래도 널어놓았어. (74쪽)



  임금님 밥상도 문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수한 사람들 밥상도 문화 가운데 하나예요. 임금님 옷차림도 문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수한 사람들 옷차림도 문화 가운데 하나이지요. 커다란 궁궐이나 절집도 문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수한 사람들 풀집이나 흙집도 문화 가운데 하나랍니다.


  문화란 멀리 있지 않다고 느껴요.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짓는 살림살이가 모두 문화라고 느껴요. 수수한 살림집에서 수수한 사람(서민이나 시민)이 수수하게 짓는 놀이랑 웃음이랑 이야기가 바로 문화라고 느껴요. 아이들이 그리는 어머니 모습이나 아버지 모습이 바로 문화이고, 어버이가 아이한테 종이접기를 해서 내미는 작은 종잇조각이 늘 문화이지 싶어요. 집집마다 아기자기하게 태어나는 문화이고, 사람들마다 새삼스레 앙증맞게 가꾸는 문화라고 봅니다.





이 초상화는 할아버지가 독립 청원서를 내서 붙잡혔다가 풀려난 뒤에 바로 그렸다고 해. 그러니까 가슴 한쪽을 누르던 부끄러움을 어느 정도는 씻어 내린 뒤의 고단한 얼굴이야. 그림을 그리고 나서 한 달 뒤, 할아버지는 죽었어. (98쪽)


이 사람은 대금의 명인 김계선(1891∼1944)이라고 추정하고 있어. 궁중 음악가로 제례에 나가 연주를 했는데 이제 나라가 멸망해 제례도 치르지 못하고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그가 창조하는 소리의 세계에는 슬픔이 섞여 있을 것 같아. (114쪽)



  엘리자베스 키스 님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찾아와서 머물며 ‘지구별 이웃’을 새롭게 만났다고 느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국을 벗어나서 다른 나라로 찾아가서 그림을 그린다면, 우리도 이웃나라에서 ‘이웃나라 수수한 사람’을 살가이 마주하면서 그림 한 점에 담을 만하리라 생각해요. 유명인사나 관광명소를 찾아가서 그림을 그려도 재미있을 테고, 그저 수수한 사람들을 스치고 수수한 골목을 걷다가 그림을 그려도 즐거울 테지요.


  따사로운 눈길로 아이를 보살피면서 따사로운 살림을 짓습니다. 따사로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따사로운 손길로 그림을 그립니다. 따사로운 눈길로 서로 마주하면서 말도 몸짓도 차림새도 다른 사람들이 기쁜 손길이 되어 살가이 어깨동무를 합니다. 4349.1.2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어린이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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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을 타고 온 아이 난 책읽기가 좋아
티에리 르냉 지음, 한지선 그림, 심지원 옮김 / 비룡소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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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130



별에서 온 따사로운 숨결이 내 곁에

― 별빛을 타고 온 아이

 티에리 르냉 글

 한지선 그림

 심지원 옮김

 비룡소 펴냄, 2003.6.23. 7000원



  아이는 한 살 두 살 자라면서 궁금한 것을 묻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다 궁금해 하기에 모두 다 물어요. 밥을 왜 먹는지도 묻고, 잠을 왜 자는지도 묻습니다. 이를 왜 닦는지도 묻고, 몸을 왜 씻는지도 묻지요. 그리고 어떻게 이 땅에 태어났는지도 묻습니다.


  아이가 태어날 수 있던 까닭이라면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만나서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오직 이 하나만을 아이한테 말할 수 없어요. 아이가 태어나는 일뿐 아니라, 사람이 늙거나 다치거나 아파서 죽는 일을 놓고도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고만 말할 수 없어요. 삶도 죽음도 아이한테는 이야기로 들려주어야 한다고 느껴요.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 곁에 있는 아이들뿐 아니라, 이 아이들을 낳은 나랑 곁님도 어버이가 있어요. 나도 예전에는 아이로 태어나서 자랐어요. 내가 오늘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어느 날 고요히 숨을 거둔다면, 그때에 아이한테 들려줄 이야기는 아이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도록 해야 하는가를 밝히는 실마리가 되어요.



나는 마로니에 나무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나무는 할아버지가 태어나던 날 할아버지의 아빠가 심어 놓은 나무였습니다. 나는 두 주먹으로 나무를 마구 때리면서 소리쳤습니다. “할아버지, 움직여 보세요! 움직여 보란 말이에요…….” (10쪽)


내가 롤라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그만 조용히 돌아서서 그 방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너희 부모님은 돌아가셨단다.” (23쪽)



  티에리 르냉 님이 글을 쓰고, 한지선 님이 그림을 그린 《별빛을 타고 온 아이》(비룡소,2003)를 읽습니다. 이 어린이문학은 두 가지 이야기를 다룹니다. 첫째, 죽음을 다룹니다. 둘째, 삶을 다룹니다.


  이 책을 읽으면 첫머리에서는 죽음을 먼저 다뤄요. 어느 마을에서 할아버지하고 사랑스레 살던 아이가 있는데, 어느 날 그만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해요. 아이는 죽음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해요. 어제까지 즐겁게 함께 놀고 웃던 할아버지가 오늘부터 없다고 하니 이 대목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아이 어머니나 아버지는 아이한테 죽음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해요. ‘죽었다’는 말하고 ‘다시 보지 못한다’는 말을 빼고는 더 이야기를 하지 못해요.


  아이한테는 할아버지일 테지만 어버이한테는 아버지예요. 아이도 할아버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테지만 어버이도 아버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셈이에요. 그러니 어버이도 아이도 그만 아픈 수렁에서 헤매기만 해요. 아이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 죽음’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요. 가슴이 뻥 뚫린 채 ‘눈물 없는 사람’으로 살아요.




롤라는 어떻게 나를 불쌍히 여길 만큼 강할 수 있을까? 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걸까? 왜 롤라는 죽음과 싸우기 위한 나무로 된 칼이 필요하지 않는 걸까? (33쪽)



  내 어릴 적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나한테 할아버지와 할머니인 두 분이 돌아가실 무렵에 우리 어버이가 나한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앞으로 어디로 가는가’를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저 ‘돌아가셨다’는 말만 해 주었습니다.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이 이 땅을 떠날 적에도 ‘죽었다’는 말만 들을 뿐이었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를 놓고도 ‘태어났다’는 말만 들었어요. 새로운 아이가 어떤 숨결로 이 땅으로 찾아왔는가 하는 대목을 제대로 이야기로 들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바로 이 대목을 오늘 우리 아이들이 나한테 묻습니다. 사람이 죽는 일은 무엇이고, 아기가 새로 태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하고 물어요.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하고 물으며, 사람은 왜 아기로 새로 태어나는가 하고 물어요.



“나는 별에 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많아요. 사실 진짜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곳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거든요. 그리고 나는 별똥별의 꼬리를 타고 여행을 다녔어요 … 처음에는 지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산이랑 숲, 바다, 이런 모든 것들이 참 예뻤지만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곧 떠나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그때 어떤 아름다운 마을 한가운데에서 작은 점 두 개를 발견했어요.” (36∼37쪽)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품에 안기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매일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갔죠.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엄마 아빠의 대화를 듣게 됐어요.” (38쪽)




  《별빛을 타고 온 아이》를 읽으면, 이 책에서는 삶(태어남)을 ‘기쁨을 누리려고 다른 별에서 이 땅으로 왔다’고 하는 이야기로 들려줍니다. 새로운 숨결이 별(별똥)을 타고 지구 둘레뿐 아니라 온 우주를 마음껏 돌아다니는데, 지구라는 별을 둘러보다가 매우 사랑스러운 두 사람을 보았대요. 별(별똥)을 타고 온 우주를 오랫동안 돌아다니던 숨결은 지구라는 별에서 문득 찾아내어 지켜보는 두 사람이 매우 사랑스럽기에 가만히 보고 또 보고 하다가 어느 날 이 두 사람이 마음으로 비는 꿈을 엿들었대요. 그러고는 이 두 사람한테서 태어나기로 마음먹었대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교통사고로 두 어버이를 잃은 아이’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죽은 뒤로 가슴이 뻥 뚫린 채 눈물이 말라붙은 채 사는 아저씨’한테 들려줍니다. 두 어버이를 잃은 아이는 오히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아저씨더러 기운을 내라면서 북돋아 주어요. 간호사 아저씨는 오히려 어쩔 줄 몰라 하고, 병원에 드러누워 꼼짝을 못 하다가 곧 죽음을 맞이하려는 아이는 둘레에 있는 사람들을 차분히, 따스히, 넉넉히 마음으로 보듬어 줍니다.



“떠나지 마……. 우리와 함께 있어, 롤라…….” 롤라의 입술이 움직였습니다. 롤라는 간신히 숨을 쉬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쥘 아저씨, 별빛 속에서…… 나를 찾으세요…….” 그리고 롤라의 눈은 감겼습니다. (45쪽)



  먼 우주에서 별을 타고 온 아이는 다시 먼 우주로 별을 타고 떠났을까요? 먼 우주에서 별을 타고 온 숨결은 이 지구에서 태어나려고 몸을 얻었다면, 이 지구에 나들이를 와서 기쁘게 한삶을 누린 뒤에 다시 먼 우주로 떠날 즈음에는 몸을 이곳에 내려놓고 고요히 숨을 멈춘 셈일까요?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뿐 아니라 오늘 내 곁에 있는 아이들도, 바로 나도, 그리고 우리 어버이도, 모두 이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이처럼 별을 타고 지구로 찾아와서는 다시 별을 타고 우주로 긴긴 나들이를 떠날까요?


  아홉 살 아이하고 ‘별아이’ 이야기를 나누어 봅니다. 아홉 살 아이는 ‘별아이’ 이야기를 듣고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다른 별에서 이 지구로 찾아와서 함께 사랑을 짓는 사이로 지낸다고 이야기하고, 저마다 이 지구라는 별에서 기쁜 살림을 가꾸면서 꿈을 키운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으면 모두 가슴에 담겠지요.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아직 잘 모르겠으면 아직 모르는 대로 가만히 귀를 기울일 테지요. 우리가 저마다 별아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저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면서 기쁜 넋이라는 뜻이에요. 별아이로서, 또 어버이로서, 또 우리 어버이한테는 아이인 삶으로서, 오늘 하루도 기쁨을 가슴에 담고 활짝 웃고 노래하자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4349.1.1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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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알파벳 두근두근 어린이 성장 동화 4
배리 존스버그 지음, 정철우 옮김 / 분홍고래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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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28



학교가 아닌, 삶을 배워야 할 아이

― 내 인생의 알파벳

 배리 존스버그 글

 정철우 옮김

 분홍고래 펴냄, 2015.12.10. 12000원



  자그마한 우리 집에서는 네 식구가 한 방에서 함께 잡니다. 옛날에는 이 자그마한 집에서 예닐곱 사람도 살고 열 몇 사람도 살았다고 합니다. 아마 옛날에는 집에서만 지내지 않고 집 바깥에서 일하거나 놀다가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 무렵 바글바글 이 자그마한 집에 모여서 잠을 이루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그마한 집에서 넷이 모여서 자면 밤이 한결 따스하기는 하되, 두 아이는 언제나 나한테 달라붙습니다. 자다가 발로 차든, 자다가 손을 휘두르든, 이 아이들은 마음껏 뒹굽니다. 차다가 썰렁하거나 춥다 싶으면 누군가 이불을 걷어찼기 때문이고, 자다가 무겁거나 아프다면 누군가(큰아이나 작은아이) 나를 걷어찼거나 몸뚱이를 내 몸에 얹었기 때문입니다.


  갓난쟁이였던 때에는 밤새 기저귀를 갈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면, 한창 무럭무럭 자라는 요즈막에는 밤새 이불깃을 여미어 준다든지 잠자리를 다시 챙긴다든지 하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똑바로 누이고 이불깃을 새로 여민 뒤에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면서 볼을 토닥이면 모든 시름이 사라져요. 이 어여쁜 아이들하고 누리는 하루가 더없이 고마우면서 기쁘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아빠의 근육은 주로 경직돼 있고 눈은 슬퍼 보인다. 동물 학대 방지 광고에 나오는 학대받는 강아지들 같다. 학대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듯 인생의 참혹함에 단념한 눈빛 말이다. 하지만 비행기……. 비행기를 날릴 때만큼은 근육은 긴장을 풀고 눈은 부드러워진다. 정말 평화로워 보인다. (24쪽)


“펌프킨 너는 너만의 노래를 부르고 너만의 춤을 춘다는 거야. 너는 우리와 다르게 세상을 바라봐. 그거 알아? 삼촌은 가끔 우리 모두가 너처럼 세상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44쪽)



  배리 존스버그 님이 빚은 어린이문학 《내 인생의 알파벳》(분홍고래,2015)을 읽습니다. 이 책은 어린이문학에 넣을 수 있을 테지만 청소년문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도 청소년도 함께 즐길 만한 문학이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둔 어버이도 기꺼이 누릴 만한 문학입니다.


  《내 인생의 알파벳》은 알파벳으로 a부터 z까지 이야기를 잇습니다. 학교에서 내 준 글쓰기 숙제를 하려는 아이는 ‘알파벳 하나’마다 한 가지씩 이야기를 쓰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어떻게 알파벳 하나에 이야기 한 가지를 쓰는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 합니다.


  이 아이는 왜 고개를 갸우뚱해 할까요? 다른 아이들은 글쓰기 숙제가 지겹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이 아이로서는 ‘고작 한 가지 이야기’만 쓸 수 없다고 여깁니다. 알파벳 하나로 여는 이야기로도 얼마든지 책 한 권이 될 만하다고 여겨요.



우리 아기는 분명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고 내 눈 속에서 뭔가를 봤다. 아기 눈은 연한 파란색이었지만 그 속에 다른 색들도 있었다. 나는 깊이를 모르는 눈을 들여다보았고, 아기의 시선 뒤에는 끝없는 하늘이 펼쳐져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 하늘 속을 들여다보면서 스카이(하늘)가 아기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61쪽)



  《내 인생의 알파벳》에 나오는 아이한테는 두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캔디스’이고, 다른 하나는 ‘펌프킨’입니다. ‘펌프킨’은 어머니와 아버지와 큰아버지 셋만 쓰는 이름인데, 아이를 사랑스레 부를 적에만 쓰는 이름이라 할 만합니다. ‘캔디스’는 어버이 스스로 차분해질 적에 쓰는 이름이라 할 만해요.


  아이는 제 어버이가 저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를 잘 압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한 이름으로 저를 부르더라도, 이름 때문이 아니라 어버이 마음에 따라서 느낌이 사뭇 다르다는 대목도 잘 압니다. 두 어버이와 큰아버지는 아이 앞에서 이녁 마음을 숨기거나 감추려 하기도 하지만, 아이가 그런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는 이 책에서만이 아니리라 느껴요. 우리 삶자리에서도 아이들은 어버이 마음을 잘 느끼고 살피며 헤아리리라 봅니다. 다만, 아이들이 모르는 척할 뿐이겠지요.


  입으로 읊는 말이 ‘모두’이지 않습니다. 종이에 적은 글이 ‘모두’이지 않습니다. 갓난쟁이는 ‘말’이 아니라 ‘결’로 알아챕니다. 아무리 겉으로 듣기에 부드러운 말씨라 하더라도 사랑이 깃든 말인지 아닌지 결로 다 알아채요. 어린이와 푸름이도 말투나 말씨가 아니라 ‘말결’로 속내를 환하게 알아챕니다.


  이를테면 이런 얘기도 할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교육정책을 해마다 새로 내놓는다고 하는데, 나라에서 내놓는 교육정책은 막상 이 나라 어린이나 푸름이를 헤아리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제껏 나온 교육정책 가운데 입시지옥을 떨칠 만한 정책은 아직 나온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나온 교육정책은 모두 입시정책을 어떻게 손질하느냐 하는 대목만 살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목을 누구보다 아이들이 잘 압니다.



“고맙습니다. 그건 냉장고에 넣을게요. 아니면 쓰레기통에 버리던가요. 전자레인지 말고 음식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만든 음식을 드세요.” “왜지?” 이렇게 얘기하다가는 밤 11시까지 여기 있을 것이고 잠발라야는 냄비 바닥에 까맣게 눌러 붙을 것이다. 나는 아빠에게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제가 엄마를 위해 특별 음식을 만들었어요.” (113쪽)



  아이들은 누구나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시험공부를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제 어버이한테서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구태여 학교에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나가거나 학교를 얌전히 다니는 까닭은, ‘아이가 학교에 다닐 적에 어버이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학교에 나가 주어야 어버이가 회사에 가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대목을 아이들이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아이들은 왜 제 어버이 품이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서 자라야 해도 기꺼이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은 왜 제 어버이 품이 아니라 보육시설 품에서 커야 해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은 저마다 제 어버이가 어떤 삶인지 다 알기에 모두 받아들여 줍니다. 제 어버이가 얼마나 바쁜가를 잘 알기에, 아이들은 느긋하게 제 어버이를 품어 주어요.


  우리가 어버이로서 아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바깥일을 줄일 노릇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어버이로서 아이 마음을 살짝이나마 헤아린다면, 바깥일을 줄이기 어렵더라도 집에서 아이하고 살갑고 사랑스레 어우러지는 한때를 날마다 기쁘게 누리리라 봅니다.



오래전 우리 가족이 화목했던 때가 어렴풋이 생각났다. 우리는 ‘버스 바퀴가 빙글빙글 돌아요’라는 동요를 목청껏 부르곤 했다 … 그 시절의 아빠는 다른 운전자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147쪽)


나는 부두에서 바닷물로 몸을 던졌다. 정말 축축했지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매우 차갑기는 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현명한 일인 것 같았다. 나는 돌처럼 가라앉았고, 기다렸다. 구조든 죽음이든 먼저 오는 것을 기다렸다. (154쪽)



  《내 인생의 알파벳》에 나오는 아이 펌프킨 또는 캔디스는 제 생일잔치를 하는 날에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이 아이 어버이는 큰아버지하고 사이가 대단히 나쁘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나쁜 사이는 아니었으나 ‘자존심하고 돈’ 때문에 사이가 갈려서 말도 안 섞고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는다고 해요.


  아이는 제 어버이하고 큰아버지 사이를 마음껏 오갑니다. 이러면서 두 어른한테 찬찬히 묻습니다. 왜 두 사람(또는 세 사람)이 말도 안 섞고 다투기만 하느냐 하고. 한쪽(아이 어버이)은 아뭇소리를 안 하고 고개를 돌립니다. 다른 한쪽은 한숨만 폭 쉽니다. 아이는 두 집안 어른(모두 세 사람)이 모두 못마땅합니다. 더군다나 갓난쟁이일 적에 갑자기 저승으로 가고 만 어린 동생 때문에 어머니하고 아버지는 한집에서도 거의 따로 살듯이 지냅니다.


  어른들은 이러한 대목을 얼마나 살필까요? 어른들은 작은아이(어린 동생)가 너무 일찍 죽은 일 때문에 슬픔에 잠긴 채 여러 해를 바보처럼 사는데, 이동안 큰아이(오늘 살아서 코앞에 있는 아이, 이 책에서는 펌프킨/캔디스)도 얼마나 괴롭고 아픈가를 어느 만큼 헤아릴까요?


  집에서 사랑도 눈길도 못 받는 아이는 ‘살았어도 죽은 삶과 같다’고 여깁니다. 이 엉킨 실타래를 풀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다가, ‘고향 별나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날마다 높은 나뭇가지에서 땅바닥으로 뛰어내리는 동무를 보고는, 이 동무한테서 ‘배워서’ 바닷물에 풍덩 뛰어들어 보기로 합니다. 제 생일잔치를 일부러 큰아버지 요트에서 치르기로 하면서 제 어머니하고 아버지를 억지로 큰아버지 요트로 이끌고 오다가 바닷물로 뛰어들면 ‘내(아이)가 죽든, 두 어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바닷물로 뛰어들어서 나를 살리면서 서로 앙금을 풀든’ 하리라 여겨요.



“아빠, 왜 계속 비행기만 쳐다봐야 해요?” 아빠가 한숨을 쉬었다. “너무 뻔한 거 아니냐, 캔디스. 비행기를 보지 않으면 조종을 못하게 되고 그러면 비행기는 박살날 거야.” “가족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내가 그 말을 하자 아빠가 나를 보았다. 비행기가 괴상하게 우는 소리를 냈다. (185쪽)



  《내 인생의 알파벳》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 책 이야기를 이끄는 아이를 낳은 두 어버이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만 하지 않고, 집에서 가르치면서 늘 함께 지낸다고 할 적에도 이처럼 ‘아이 삶에 눈길을 못 두는’ 바보스러운 몸짓이었을까요? 아이 아버지는 혼자서 무선비행기를 하늘에 날리면서 ‘짜증풀이’를 한다지만, 아이는 무엇으로 짜증풀이를 할 만할까요?


  두 어버이가 한쪽은 무선비행기만 쳐다보고 다른 한쪽은 방구석만 쳐다본다면, 아이는 도무지 어디를 쳐다보아야 할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두 어버이가 서로 ‘아픔에 짓눌린 삶’에 허덕인다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아니, 캔디스?” “사랑이요?” 내가 제안했다. “그리고 새로운 원격 조종 비행기요?” “휴가. 휴가를 가지면 우리 가족이 훨씬 좋아질 거야.” (193쪽)



  아이는 모두 압니다. 아이는 모두 알면서 기다립니다. 아이 어버이는 아직 모릅니다. 아이 어버이도 틀림없이 알리라 여기지만, 아이 어버이는 아직 스스로 깨닫거나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지 못합니다.


  이 책에서도 나오듯이 아이는 참으로 슬기롭지요. 한집안이 새롭게 일어서려 할 적에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바로 아이가 말하듯이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휴가’가 아니라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어버이라면, 그러니까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면 아이를 그냥 학교에만 맡길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면 아이하고 ‘학교에서 겪거나 느끼거나 한 이야기’를 집에서 도란도란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다른 어른(교사)이 아이를 가르치는 일을 도맡도록 하지만 말고, 집에서도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삶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학교에서 교과서만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집에서 삶을 배워야 하고, 집에서 어버이 몸짓과 말결마다 흐르는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책에서뿐 아니라 우리 삶자리에서도 아이랑 어버이 사이에 따스한 사랑이 흐를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 마음을 어버이가 읽고, 아이 생각을 어버이가 살찌울 수 있는 슬기로운 길을 모든 보금자리에서 저마다 따사롭고 고운 몸짓과 말결로 열 수 있기를 빕니다. 4349.1.1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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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 2016-01-14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삶을 배우는 시기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숲노래 2016-01-14 21:10   좋아요 0 | URL
틀림없이 그런 기쁜 날이 올 테고
우리가 오늘부터
새롭게 지으면 되리라 여겨요.

풍문 님 삶에
아름다운 이야기와 꿈이 고요히 흐르면서
삶을 아이와 어른이 즐거이 배우고 나누는
살림을 함께 일구어요 ^^
 
외교관 엄마의 떠돌이 육아 - 격렬하기 짝이 없는
유복렬 지음, 세린.세아 그림 / 눌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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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36



아이들이 ‘어머니 일기’를 읽으며 자라다

― 외교관 엄마의 떠돌이 육아

 유복렬 글

 세린+세아 그림

 눌와 펴냄, 2015.12.22. 13000원



  한국말에 ‘아이키우기’나 ‘아이돌보기’는 따로 한 낱말로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으레 붙여서 쓰는 분도 있지만, ‘아이키우기’나 ‘아이돌보기’는 한국말사전에 안 나옵니다. 한국말사전에는 한자말 ‘육아(育兒)’만 나와요.


  한자말 ‘육아’는 “아이 기르기”를 뜻합니다. ‘기르다’는 씨앗을 심어서 남새나 나무를 기르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러한 몸짓처럼 아이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말과 생각으로 심어서 기르는 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얼거리를 아우르면서 “사람을 가르치는 일”도 ‘기르다’로 나타내요. 다음으로는 몸을 다스리는 일이라든지 버릇을 몸에 익히는 일도 ‘기르다’라고 해요.



매일 벌어지는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외할아버지가 역정을 내셨다. “기저귀 못 떼서 학교 못 간 아이는 내 생전 본 적이 없다! 때가 되면 다 가리게 될 것을 왜 아이한테 쓸데없이 스트레스를 주고 야단들이냐!” (34쪽)


나는 아이의 말에 대꾸를 하려다 그만뒀다. 할 말이 없었다. 밥, 국, 반찬, 이것들을 한 상에 차려놓고 함께 먹는 우리 식습관이 프랑스에서는 아무렇게나 ‘돼지처럼 먹는’ 식습관으로 취급받은 것이다. (55쪽)



  나는 아이를 하나씩 낳아서 두 아이하고 함께 사는 동안 ‘아이키우기·아이돌보기·육아’를 늘 새롭게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마땅한 노릇일 텐데, 아이를 낳아서 함께 살지 않고서는 키우기이든 돌보기이든 기르기이든 알 길이 없어요. 아이를 낳아서 함께 살기에 비로소 이 아이들을 어떻게 보살피거나 아끼거나 사랑할 때에 즐거운 삶이 되는가를 알아요. 함께 살면서 늘 지켜보고 언제나 마주하는 동안 어버이로서 들려줄 이야기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함께 살면서 밥을 함께 먹고 잠을 함께 자는 동안 어버이로서 보여줄 몸짓을 새롭게 알아차려요. 함께 살면서 말을 섞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버이로서 어떤 사람으로 슬기롭게 서는 마음이 될 때에 아름다운가 하는 대목을 새롭게 익힙니다.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두 아이를 낳아 돌본 나날을 되새긴 이야기를 담은 《외교관 엄마의 떠돌이 육아》(눌와,2015)를 읽으면서 키우기나 돌보기나 기르기란 무엇인가 하고 다시금 되짚습니다. 우리는 어른으로서 어버이가 되었기에 아이를 낳습니다만,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밥만 ‘얻어먹’거나 옷만 ‘받아입’거나 잠만 ‘한집에서 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는 어버이가 보여주는 모든 몸짓을 고스란히 바라보면서 배워요. 아이는 어버이가 들려주는 모든 말씨를 낱낱이 들으면서 따라하지요.


  외교관 어머니를 둔 아이라면 아주 마땅하고도 부드러이 여러 외국말을 듣고 자랍니다. 이러면서 여러 이웃나라 삶과 사람을 마주하고요. 여러 외국말을 듣는 대서 더 열린 마음이 되지는 않습니다. 여러 외국말은 그저 여러 외국말일 뿐이고, 어버이로서 열린 마음으로 살림을 가꿀 적에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열린 마음을 익힐 수 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프랑스에서 겪었던 힘겨운 과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단호한 태도는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68쪽)


프랑스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때 가하는 가장 큰 벌은 엉덩이 때리기 같은 게 아니라 바로 ‘디저트 생략’이다. (87쪽)



  《외교관 엄마의 떠돌이 육아》를 읽어 보면, 이 책을 쓴 유복렬 님은 외교관으로서 몹시 바쁩니다. 그래서 갓난쟁이인 아이들을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한테 맡기면서 이녁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러고 나서는 퍽 이른 나이부터 유치원에 다녀야 하고, 어린이집을 거쳐서 학교를 다니지요.


  유복렬 님은 어머니 자리에 있습니다만, 집 바깥에서 보내는 겨를이 훨씬 긴 터라, 아침하고 저녁(웬만하면 밤)에서야 아이들 얼굴을 마주합니다. 아이를 가르치는 몫은 시설(유치원·어린이집)하고 학교가 맡지요. 다만, 아이들이 시설하고 학교에서 배우더라도 유복렬 님은 집에서 할 일을 젖혀두지 않아요. 집에서는 집살림이 있고, 집은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보금자리입니다. 프랑스를 돌고 알제리에 머물다가 미국에도 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삶이라 하더라도, 언제 어디에서나 유복렬 님네 아이들은 ‘집 아닌 보금자리’에서 삶하고 살림을 새로 가꾸는 하루를 누려요. 비록 아이들로서는 좀 고단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할 터인데, 아이들은 아예 새로운 말을 써야 하는 곳에 가더라도 의젓합니다. 그냥 받아들여서 그냥 배우거든요.


  한국말에서 프랑스말로 넘어가든, 프랑스말에서 다시 한국말로 넘어오든, 한국말에서 또 프랑스말로 넘어가거나 영어로 건너뛰든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아이들은 저희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함께 짓는 보금자리에서 스스로 씩씩하게 일어서는 길을 슬기롭게 알아요. 그래서 아이들 나름대로 새로운 외국말을 즐겁게 배우고, 새로운 생각을 기쁘게 키우면서, 어머니랑 아버지하고 아기자기하고 재미난 하루를 누립니다.



우리나라는 환경보호 차원에서 일회용 물건을 쓰지 못하도록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일회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싫어서 일회용 물건을 쓰지 않는다. 좋은 물건을 사서 반질반질하게 손때가 묻도록 오래 쓰는 것을 좋아하고, 또 남이 그렇게 아끼면서 썼던 중고품을 사서 쓰는 것을 전혀 꺼려하지 않는다. (116쪽)


“왜 다음 학년에 배울 것을 미리 공부하는 거죠? 그럼 학교에서는 뭘 하죠?” 아이의 얼굴은 정말 심각해 보였다. “아마 좀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겠지. 선행 학습을 한다고 해도 완전히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면 확실하게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럼 학교에서는 복습을 하는 거네요. 좀 이상해요.” (121쪽)



  어느 나이에 꼭 무엇을 알아야 할 교육이나 육아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모든 아이가 다 다르니까요. 다만, 나이에 맞추어서 하는 교육이나 육아는 아니더라도 늘 지키거나 다스려야 할 대목은 하나가 있어요. 바로 사랑입니다. 아이가 어느 나이라 하더라도 어버이는 늘 사랑으로 아이를 마주할 노릇이에요.


  유복렬 님이 ‘떠돌이’ 같은 외교관 노릇을 하며 여러 나라를 서너 해마다 올겨야 하지만, 아이들은 어머니를 떠돌이로 여기지는 않아요. 그저 어머니인걸요.


  한곳에 뿌리를 내려 내처 살기에 아이들이 더 잘 배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 나라를 두루 돌면서 다니기에 더 열린 마음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언제나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어떤 몸짓하고 눈빛하고 마음하고 사랑으로 아이를 마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한곳에 뿌리를 내리며 살더라도 어버이 마음이 흔들리면 아이들도 흔들려요.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도 어버이 마음이 씩씩하고 의젓하면 아이들도 씩씩하고 의젓하지요.


  《외교관 엄마의 떠돌이 육아》라는 책에서 들려주는 살가운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대목이로구나 싶어요. 어머니로서(또 아버지로서) 수많은 어버이가 아이하고 함께 나눌 삶이란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보듬는 살림입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서로 눈빛을 나누며, 서로 손을 맞잡을 수 있는 보금자리를 가꾸면 돼요. 



일본어를 배우는 세린을 지켜보면서 아이들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데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배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임하는 것이다. (152쪽)


아이들은 자기가 속한 환경에서 또래와 어울려 놀면서 각자의 방법으로 언어를 체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늦다고 조급해 할 필요도, 오류가 많다고 잔소리할 필요도 없다. (183쪽)



  아이는 어버이를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어버이도 아이를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새로운 곳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가르칩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 새로운 웃음이랑 노래랑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새로운 사랑을 가르쳐요.


  어버이만 아이를 가르치지 않고, 아이만 어버이한테서 배우지 않아요. 예부터 어느 나라 어느 겨레에서도 ‘키우기·돌보기·기르기’는 함께 주고받는 사이가 될 때에 이루어졌지 싶습니다. 오늘날에도 앞으로도 아이를 키우거나 돌보거나 기를 적에는 즐겁게 웃으면서 가르치고 기쁘게 노래하며 배우는 동안 이루리라 느껴요.



이 책을 쓰는 내내 아이들은 엄마가 자기들 이야기를 쓴다는 사실에 신나 보였다. 꽤 관심을 보이며 이따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둘이 붙어 앉아 엄마는 모르는 자기들끼리의 속내를 서로 주고받기도 했다. 내가 초고를 완성하여 원고를 건네자 두 아이 모두 끝까지 읽어 주었다. (238쪽)



  외교관으로 일하며 무척 바쁠 유복렬 님이지만 늘 아이를 헤아리는 하루이기에 아이들이 더없이 사랑스레 잘 자라리라 생각합니다. 더욱이 이렇게 이쁘장한 육아일기를 쓰면서 아이한테 읽히기에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새로운 숨결을 바라보고 배우고 마주하면서 즐겁게 자라겠네 하고 느껴요.


  어버이는 어떻게 육아일기를 쓸 수 있을까요? 아이한테서 배우니까 육아일기를 쓸 수 있습니다. 어버이는 육아일기를 왜 쓸까요? 아이한테서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이야기를 가슴에 품으면서 짠한 눈물이랑 웃음이 피어나기에 육아일기를 씁니다.


  오늘 어버이가 쓰는 육아일기에는 오늘 아이하고 마주한 삶을 되새기면서 즐겁게 배운 이야기가 깃듭니다. 앞으로 아이들이 읽을 ‘어머니 육아일기’는 앞으로 아이들이 새로운 어른이 될 무렵 저희 어릴 적이랑 발자국을 되돌아볼 뿐 아니라 저희 어머니가 어떠한 마음으로 저희를 사랑하며 돌보았는가 하는 마음자리를 살피는 길잡이가 되어요. 나도 시골집에서 두 아이랑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열고 닫으면서 살몃살몃 육아일기를 씁니다. 나 스스로 우리 아이들한테서 새롭게 배운 이야기를 쓰는데, 이 이야기는 머잖아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찾아 읽으면서 새로운 삶이랑 사랑을 배우며 슬기롭게 일어서는 밑돌이 될 수 있겠지요. 4349.1.10.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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