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교육 어떻게 할까 - 초등학교 통일 교육 이야기
김현희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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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42



‘안보·분단’에 밀리는 ‘평화·통일’ 초등교육

― 통일 교육 어떻게 할까?

 김현희·박희나·양미정·이경아·장세영·함규진 이야기

 철수와영희 펴냄, 2016.12.25. 13000원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고 할 적에는 무기를 들지 않아요. 너랑 내가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면, 너뿐 아니라 나도 무기가 없어야 해요. 어느 한쪽에 다른 한쪽을 괴롭힐 무기가 있다면, 둘은 사이좋게 지낼 수 없어요. 그렇다고 둘 다 무기를 잔뜩 갖추어 놓는다면, 아무리 입으로는 사이좋게 지내자고 말한다 하더라도 막상 사이좋게 지내기는 어려워요.


  남녘하고 북녘 사이에 전쟁무기가 대단히 많습니다. 남북을 가르는 곳은 흔히 비무장지대라고 하지만, 이 이름하고 다르게 ‘어마어마한 무기’가 그곳에 있어요. 대인지뢰도 발목지뢰도 엄청나게 묻혔고, 총을 든 군인이 엄청나게 많으며, 남북은 서로 미사일과 대포로 겨누어요. 이러다 보니 남녘이든 북녘이든 ‘통일 교육’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남녘이나 북녘 모두 ‘안보 교육’으로 기울어요.



교사가 수학이나 과학을 한 번 더 봐 준다면 부모님들이 좋아하시겠죠. 하지만 자기 반만 데리고 통일 교육 현장 학습을 간다고 하면 부모님들이 높게 평가해 줄 것 같진 않아요. 오히려 ‘저 교사, 혹시 의식화된 거 아냐?’라며 사상을 의심한다거나 하는 게 보통이죠 … 교사 모임에서 대화를 해 보면 교사들도 학부모니까, 수학이나 영어는 어느 학원이 좋고 어디는 나쁘다는 등등의 이야기들만 정말 열심히 하거든요. 제가 통일 교육 이야기를 꺼내면 대부분 ‘도덕 교과서에 통일 이야기가 있었나?’ 하는 식이지요. (24, 27쪽)



  김현희·박희나·양미정·이경아·장세영·함규진, 이렇게 여섯 사람이 ‘통일 교육’을 놓고 이야기를 벌여서 엮은 《통일 교육 어떻게 할까?》(철수와영희,2016)를 읽으면서 오늘날 남녘에서는 어떤 통일 교육이 있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분단이나 전쟁이나 안보가 아닌, 평화나 통일이나 민주를 아이들한테 가르치고 싶은데, 막상 ‘평화·통일·민주’를 가르치기에는 교과서로는 턱없이 모자라다고 해요. 교과서로도 모자라고, 수업 시간도 모자라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교과서에서는 통일보다는 안보로 기울어지고, 북녘을 ‘통일을 이룰 한겨레’로 바라보려는 눈길이 매우 얕다고 합니다.


  어쩌면 북녘에서도 남녘 사회를 놓고 ‘통일을 이룰 한겨레’가 아닌 ‘안보’라는 허울로 덮어씌울는지 모릅니다. 남북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기 바란다면, 남녘뿐 아니라 북녘도 전쟁무기를 새로 만들거나 늘리려는 몸짓을 멈출 수 있어야 하거든요. 전쟁무기를 뒤에 감추어 놓는다면 어느 누구도 어깨동무를 못 하니까요.



북한 주민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은 이미 반공 교육과 언론 등을 통해서 오랫동안 우리한테 학습이 되어 왔습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남한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북한 주민들에 대해서 불신감과 우월 의식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 도덕 교과서에서도 북한에 대한 부정적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한의 좋은 점이나 우수한 점, 북한 출신 중에 누가 뛰어나다는 내용은 없고, 낙후됐고 살기 힘들고 너무 비안간적인 곳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53, 56쪽)



  남녘 정부는 갑작스레 ‘국정 역사 교과서’를 밀어붙였습니다. 아직도 이 ‘국정 역사 교과서’를 밀어붙이려 합니다. 그런데 사회 한쪽에서 불거진 모습으로는 ‘국정 역사 교과서’ 하나이지만, 막상 초등학교 다른 교과서를 보면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사회를 한쪽으로 치우치게 바라보도록 할 수밖에 없는 얼거리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국정 역사 교과서’만 몰아내면 될 일이 아니라고 해요. 분단과 전쟁과 안보로 치우친 ‘초등 교과서’ 모두를 깊이 파헤쳐서 제대로 다시 엮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역사 교과서뿐 아니라 ‘도덕’ 교과서도, ‘사회’ 교과서도, 그리고 ‘국어’ 교과서에다가 다른 교과서까지, 어떤 줄거리를 어떠한 눈길로 다루는가를 찬찬히 살펴서 슬기롭게 바로세울 때라야 비로소 평화와 통일과 민주를 아이들한테 가르치는 틀이 옳게 설 수 있다고 해요. 아찔한 노릇입니다.



국가를 위해서 안보를 강화하면 할수록 개인의 안보는 점점 위협받는 상황인 거예요. 애당초 개인의 안보를 위하여 국가가 존재하는 것인데 말이지요. 하지만 인간 안보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남북한이 모두 군축을 하고, 긴장 완화를 하고, 서로간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만들자!’라고 하게 되죠. (149쪽)


통일 전망대에서 군인들이 안보를 강조한 설명을 하지 않나요? 그리고 땅굴 체험을 과연 통일 교육으로 볼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통일 전망대에서 이뤄지는 설명이나 땅굴 견학은 통일 교육이 아닌 반공 교육에 훨씬 가깝다고 생각해요. (169쪽)



  서울에 ‘전쟁기념관’이 있습니다. 전쟁을 ‘기념’한다는 일이 말이 될 수 없을 테지만, 전쟁기념관이 섰습니다. 전쟁기념관에는 한국이 그동안 치러야 했던 수많은 전쟁이나 아픔이나 슬픔이나 생채기를 다루기보다는 2/3에 이르는 전시물은 한국전쟁하고 얽힌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보다도, 이에 앞서 이 나라가 막아낸 숱한 전쟁보다도 한국전쟁하고 얽혀 안보와 분단을 내세우는 전시물이 지나치게 많다고 해요.


  기념관이나 박물관을 생각한다면, 또 이러한 기념관이나 박물관에 아이들을 이끌고 찾아가서 역사를 가르치는 길을 헤아린다면, 우리는 ‘전쟁기념관’이 아닌 ‘평화기념관’을 세울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평화를 기리고, 평화를 생각하며, 평화를 꿈꿀 수 있도록 해야지 싶어요.


  평화를 지키려고 몸을 바친 이야기를 기념관에서 보여주어야 하겠지요. 평화를 이루려고 힘을 쏟은 이야기를 기념관에서 다룰 수 있어야 하겠지요. 온갖 전쟁무기를 ‘유물’로 다루지 말고, 평화로운 삶과 살림과 사람 이야기가 흐르는 터전을 세워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어야 하겠지요.



우리나라 역사가 몇 천 년 동안 치러낸 전쟁이 1천 번에 가깝다는데 전쟁 기념관 전시물은 3분의 2가량이 한국전쟁 관련 전시물입니다. (171쪽)


전통 음악에 대해서 남한은 전해져 내려온 음악 체계를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재현해야 맞다는 식이고, 북한은 ‘음악이란 본래 당대의 인민이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아서 시대가 변한 만큼 서양적 요소 등도 통합시켜야 맞다고 보니까 접근법이 다르죠. (189쪽)



  《통일 교육 어떻게 할까?》를 읽다 보면 한국 사회나 학교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무척 답답할 만합니다. 통일을 바라지 않는 듯한 ‘교육부 통일 교과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니,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기보다 오직 ‘안보와 전쟁만을 바라는구나’ 싶은 교육부 교과서 모습을 엿볼 수 있어요.


  남녘하고 북녘은 서로 다른 정치로 나뉘면서 사회와 문화도 서로 다르게 흘렀습니다. 이 책에서 밝히기도 하는데, 남녘은 전통 음악이라 하면 손끝 하나 안 건드리는 노래로 여기고, 북녘은 전통 음악을 오늘날 새롭게 읽어서 가꾸는 노래로 여긴다고 해요.


  그러고 보면 남녘은 일제강점기에 스며든 수많은 일본 말투나 일본 한자말이나 번역 말투를 제대로 손질해 내지 못했고 고쳐쓰지도 못해요. 북녘은 수많은 일본 말투나 일본 한자말이나 번역 말투를 꽤 손질해 내거나 고쳐씁니다. 그러나 북녘은 당 정책이나 정치와 얽혀서 쓰는 말에는 일본 한자말이나 번역 말투가 있습니다. 북녘에는 ‘러시아말’이 퍽 많습니다. 남녘에서는 요즈음 들어 ‘쉬운 한국말’을 새로 지으려는 물결이 생겼습니다. 여기에 영어가 대단히 많이 스며들었지요.



북한말도 그냥 하나의 사투리로 받아들이면 거부감이 사라질 것 같아요. 오히려 동질성 차원에서 자꾸 똑같이 만들려고 하는 게 북한을 열등하게 만들고, 남한이 더 우월하니까 우리를 따라야 된다는 강제성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202쪽)



  ‘안보·전쟁’에 밀리는 ‘평화·통일’ 초등교육을 그대로 둘 적에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생각해야지 싶습니다. 교육부가 아직도 붙잡는 ‘국정 역사 교과서’는 어린이와 푸름이가 역사를 제대로 읽지 못하도록 뒤틀려는 속셈이라면, 안보와 전쟁으로 가득한 초등 교과서는 어린이와 푸름이가 역사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도 제대로 읽지 못하도록 가로막으려는 몸짓이라고 할 만하지 싶습니다.


  너와 내가 어깨동무를 하려면, 남녘하고 북녘이 어깨동무를 하려면, 우리가 서로 평화롭게 살림을 지으려면, 참말로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통일 교육이란 평화 교육이에요. 통일 교육이란 민주 교육이에요. 전쟁무기를 내려놓고서 어깨동무를 하는 길을 슬기롭게 밝힐 통일 교육이에요. 이제는 남북녘 모두 전쟁무기에 엄청난 돈을 퍼붓는 몸짓을 그치고서, 남북녘 모두 삶과 사회와 마을을 서로 아름답게 가꾸는 길에 온힘을 쏟는 얼거리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통일 교육이에요.



정부가 통일을 정말 원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어요. 통일을 원한다는 나라에서 보여주는 것이 북한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만을 강조하고 있잖아요. (28쪽)


사실 학생들에게 우리나라의 해방과 분단 과정을 제대로만 다뤄 준다면, 학생들의 통일에 대한 관심을 충분히 이끌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교사들 또한 그에 대한 역사의식이 있어야 되겠죠. (42쪽)



  자꾸 안보에 힘을 실으며 ‘통일비용’이 많이 든다는 걱정을 정치권에서 비추기도 하지만, 남북녘은 서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분단된 채 있기 때문에 ‘분단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요. 남북녘 모든 전쟁무기는 바로 ‘분단비용’이에요. 비무장지대에 넘치는 전쟁무기가 바로 분단비용이지요. 남북녘 젊은이가 군대에서 서로 적이 되어 맞서야 하는 일이 바로 분단비용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깎아내리거나 미워하는 모든 짓이 바로 분단비용이에요. 평화와 민주를 바라는 통일을 가르치지 못하고 안보와 전쟁으로 기울어지는 모든 몸짓이 곧 분단비용이지요.


  초등 교과서가 안보와 전쟁으로 물든 때를 벗기지 못하는 우리네 학교라면, 《통일 교육 어떻게 할까?》 같은 책을 교과서 옆에 두고서 아이들하고 평화·통일·민주를 새롭게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는 서로 죽음길로 치닫는 분단비용을 몰아내고서, 서로 살림길로 거듭나는 통일비용을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갈 길은 분단과 전쟁이 아닌 평화와 통일과 민주이니까요. 2017.1.11.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인문책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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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로 가는 희망 버스 : 행복한 재개발 미래로 가는 희망 버스 2
이은영 지음, 문구선 그림 / 분홍고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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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62



삽질하기 앞서 우리 목소리 좀 들어 보렴

― 미래로 가는 희망버스, 행복한 재개발

 이은영 글

 문구선 그림

 분홍고래 펴냄, 2015.3.28. 12000원



  서울 용산에서 몇 해 앞서까지 ‘강제 철거’가 있었습니다. 이제 ‘철거 반대’ 목소리는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높다란 건물을 엄청나게 짓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길그림이 바뀌는 서울인데, 용산역 언저리는 그야말로 해마다 달마다 길그림이 바뀌지 싶습니다.


  ‘용산 철거 참사’라고 하는 안타까운 일이 2009년에 있었습니다. 이 안타까운 일이 터지기 앞서 서울시나 건설업자는 ‘용산 주민(원주민)’하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서울시나 건설업자는 ‘용산 재개발 확정’을 짓고서 발표를 하고 이 계획을 밀어붙였어요. 마을에 뿌리를 내려서 사는 사람이 어떤 생각이거나 마음인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지요. ‘마음을 붙이고 몸을 붙인 마을’에서 왜 갑자기 쫓겨나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말할 겨를이 없었어요.



교통이 좋아지니 동네가 발전할 거라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외곽과 연결된 도로에 교통량이 증가하며 동네 사람들은 소음과 매연에 시달려야 했다. 창문을 열면 보이던 숲은 이제 고가도로의 철제 울타리가 대신했다. 사람들은 모일 곳을 잃었고, 나와 친구들은 놀이터를 잃었다. (4∼5쪽)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라는 배가 가라앉은 지 천 일이 되어요. 용산에서 여러 사람이 아프게 숨을 거두어야 한 지 여덟 해가 되고요. 우리 사회는 아픔과 슬픔을 겪은 뒤로 좀 나아지거나 달라졌을까요?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슬픔이 다시 오지 않도록,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거나 평화로운 사회로 나아지거나 달라졌을까요?


  《미래로 가는 희망버스, 행복한 재개발》(분홍고래)이라는 책이 2015년 봄에 나왔습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이은영·문구선 님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까맣게 잊혀지는 ‘재개발 참사’가 아닌 ‘평화롭고 즐거운 재개발’이 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또 굳이 재개발을 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마을살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뜻으로 이 책을 지었다고 밝힙니다.



아빠는 이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했다. 턱없이 부족한 이주비가 문제고, 새 아파트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억대의 추가 분담금이 문제고, 세입자들은 고려하지 않은 재개발 정책이 문제고, 짧게는 3∼4년 길게는 40년 가까이 용산 4구역에서 장사를 해 온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쫓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주민들 사이에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70쪽)



  앞으로도 재개발은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멘트로 올려세운 아파트는 쉰 해를 못 버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재개발로 새로 올린 높은 건물’이라 하더라도 머잖아 허물어서 다시 지어야 해요. 한 번으로 그치는 재개발이 아니라 ‘때 되면 또 하는 재개발’이에요. ‘다음 재개발’이 닥치기 앞서까지만 서른 해 즈음 겨우 머물 수 있는 ‘짧은 재개발 살림’인 셈이에요.


  그런데 있잖아요, 한번 생각해 보아야지 싶어요. 아파트나 높은 건물이 들어선 곳을 쉰 해나 백 해를 그대로 둘 수 없지요? 이와 달리 ‘한두 층짜리 작은 골목집’이 가득한 골목마을은 쉰 해뿐 아니라 백 해도 고스란히 견뎌요. 집임자 스스로 조금씩 손질하면서 백 해뿐 아니라 이백 해를 거뜬히 살아낼 수 있어요.


  시골집을 보면, 흙하고 나무하고 돌로 지은 집은 이백 해뿐 아니라 삼사백 해를 너끈히 버티고, 때로는 오백 해나 즈믄 해를 살아내기도 해요. 재개발을 한다면서 똑같은 틀로 똑같은 시멘트로 똑같은 높이로 올리는 번듯해 보이는 건물은 오래 못 가지만, 작고 수수하며 투박한 마을집은 오래오래 느긋하면서 평화로운 보금자리가 되어요.



희망이의 이야기는 마치 영화와 같았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테러리스트와 이를 진압하는 특공대의 모습. 하지만 우리 아빠와 하늘이의 아빠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용산 4구역에 대한 재개발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곡, 그 긴 시간 동안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들은 정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해 왔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해 왔었다. (81쪽)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나가라’고만 할 뿐,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 (83쪽)



  ‘사람 살고 있씀니다’라는 글월을 문득 떠올립니다. 서울 용산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는 언제나 재개발 바람이 부는데, 인천 동구 송현동 어느 골목을 걷다가 ‘사람 살고 있씀니다’라고 작게 써 붙인 글월을 본 적 있어요. 크게 써 붙인 글월도 아니고, 이름패 밑에 조그맣게 써 붙인 글월이에요.


  그야말로 작은 골목집에 사는 골목사람이 그야말로 작은 목소리로 ‘사람 살고 있씀니다’라고, 부디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 있다”는 대목을 알아 달라는 이야기예요.


  “사람 살고 있씀니다”를 읽지 않고 바라보지 않고 듣지 않은, 그러니까 눈을 닫고 마음을 닫은 공권력인 탓에, 지난 2009년 그날 여러 목숨이 안타깝게 숨을 거두고 말았으리라 느낍니다. 《미래로 가는 희망버스, 행복한 재개발》에서도 말하듯이 ‘재개발 대상 구역’에 사는 사람들은 늘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 하고 느꼈지 싶어요.



법원은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했다. 과도하게 진압을 시도한 경찰보다는 삶의 터를 지키기 위해 농성을 벌인 우리 아빠와 용산 4구역의 가족에게 그 잘못이 있다고 말했다. 엄마와 다른 주민들이 남일당 앞에서 천막을 치고 철거 반대와 구속된 사람들을 풀어 달라고 말했지만, 싸움이 길어질수록 그 힘이 약해졌다. 그리고 삶의 터전을 잃고 생계 수단을 잃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용산 4구역을 떠나야 했다. 낡은 건물과 낡은 도시를 정화하고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며 시작된 재개발은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됐을까? (88∼89쪽)



  삽질을 하기 앞서 마을을 바라볼 수 있어야지 싶어요. 삽질을 하려면 먼저 마을사람한테 말을 여쭙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지 싶어요. 멀쩡히 잘 살아온 사람들을 고향에서도 보금자리에서도 쫓아내려 하지 말고, 고향을 새로 가꾸고 보금자리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몸짓이 될 수 있어야지 싶어요.


  돈에 따라 움직이거나 경제논리로 밀어붙이지 말아야 한다고 느껴요. 사람을 보고,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다운 몸짓이 되어야 한다고 느껴요.


  《미래로 가는 희망버스, 행복한 재개발》은 어린이 인문책입니다. 어린이한테 우리 사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를 새롭게 가꿀 아이들이 ‘섣부른 막개발’이나 ‘무시무시한 막삽질’을 하지 말고, ‘함께 즐거울 마을 가꾸기’를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학교에 가도 예전처럼 애들이랑 놀 수도 없어. 재개발이라는 게 우리 동네를 더 좋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거라고 하는데, 어른들은 왜 싸울까?” (14쪽)



  개발업자나 정부한테 돈이 되는 재개발 사업이 아닌, 마을사람(주민)한테 도움이 되거나 즐거운 ‘마을 가꾸기’로 나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돈만 바라보느라, 또 ‘빨리 정책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만 하느라, 마을도 사람도 삶도 놓치거나 밀쳐내는 몸짓은 이제 사라지기를 빕니다. 싸움이 아닌 어깨동무로 마을을 아름다이 가꾸는 일을 꾀하고 정책을 펴기를 빕니다. 즐거운 마을이 되고, 즐거운 나라가 되며, 즐거운 살림이 될 때에 웃음꽃이 피어요. 2017.1.7.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어린이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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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재다 - 청소년이 만들어온 한국 현대사
공현.전누리 지음 / 빨간소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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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41



‘우리 앞날’을 입시지옥에 가두는 짓은 이제 그만

― 우리는 현재다, 청소년이 만들어 온 한국 현대사

 공현·전누리 글

 빨간소금 펴냄, 2016.12.12. 12000원



  한국말사전에서 ‘미래’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앞날’로 고쳐쓰도록 풀이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 어른들은 ‘앞날’이라는 낱말보다는 ‘미래’라는 한자말을 훨씬 즐겨씁니다. 앞으로 다가올 날을 뜻하니 ‘앞날’이지만, 이 낱말을 즐겁게 쓰려는 마음이 못 되곤 해요.


  어린이나 푸름이는 어릴 적에 ‘앞날’이라는 낱말을 배우면 아무 어려움이 없이 이 낱말을 써요. 이와 달리 ‘미래’라는 한자말이 입이나 귀에 익은 어른들은 ’앞날“로 고쳐쓰기 어렵습니다. 이미 굳어진 틀이나 버릇을 좀처럼 벗어던지지 못하고 말아요.


  사회를 바꾸는 일, 이른바 개혁도 어른들은 잘 못하곤 합니다. 새로움을 제대로 안 받아들인다고 할까요. 이리하여 어른 사회에 퍼진 잘잘못이 크게 불거질 때면 으레 어린이나 푸름이가 일어섭니다. 어른들은 어린이나 푸름이가 일어서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하면서 나무라려고 하지만, 정작 어른 스스로 잘잘못을 바로잡지 못했다는 대목을 못 보기 일쑤예요.



이처럼 유관순은 3·1운동 만세시위의 단순 참가자가 아니라 만세시위를 하자고 동네의 어른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함께 계획을 짜고, 시위 준비에 필요한 많은 역할을 맡았던 주도자였다. 열여덟 살, 10대의 나이 때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발로 뛰어서 만세운동을 만든 것이다. (22쪽)


(1920년대에) 김기전은 전통사회의 ‘장유유서’ 사상이 ‘아이는 어른 마음대로 해도 되는 소유물’이라는 생각으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하고,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이놈’ ‘저놈’으로 부르거나 하대하지 말고 일제히 경어를 사용해야 함과 더불어 청소년들 사이의 남녀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45쪽)



  공현·전누리 두 분이 빚은 인문책 《우리는 현재다, 청소년이 만들어 온 한국 현대사》(빨간소금,2016)를 읽으면서 어린이·푸름이하고 어른 사이에 흐르는 발자취를 되새겨 봅니다. 어른도 아기로 태어났고, 어린 나날을 보냈으며, 푸른 나날을 배움에 힘썼어요. 우리 사회 모든 어른은 어린이라고 하는 한때를 지났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든 분이라 하더라도 풋풋하면서 싱그럽던 때가 있었지요. 그런데 어른이라는 자리에 들어서면서 그만 기득권이나 권력을 거머쥐고 말곤 해요.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기보다는 사회를 뒤틀거나 비틀곤 해요,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을 계속해서 정부의 행사에 동원해 왔다. 예컨대 1956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당선시키기 위해서 정부 기관들의 권력을 동원해서 그를 지지하는 시위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이때 중고등학생들은 강압적으로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시위에 끌려나왔고, 비가 오는 날에도 거리에 나와 이승만을 찬양해야 했다. (87∼88쪽)


(1975년) 당시에는 학교의 일상 자체가 학생들에게 ‘군인’이 될 것을 요구하는 과정이었다. 학생들은 교사와 상급 학생에게 “충성” “멸공”을 외치며 거수경례를 해야 했고, 등굣길에는 교문 지도를 하는 교사에게 하나하나 거수경례를 한 뒤 교문으로 들어서는 풍경이 펼쳐졌다. (107∼108쪽)



  2010년대에는 ‘청소년 강제동원 행사’가 사라졌을까요? 2020년을 앞둔 오늘날에는 ‘애국조회’가 더는 없을까요? 중·고등학생 머리 길이를 자로 재면서 함부로 가위질을 하거나 때리거나 벌점으르 주는 짓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을까요? 이름뿐인 자율학습이나 허울뿐인 보충수업은 이제 멀리 사라졌을까요?


  《우리는 현재다》를 읽다가 문득 깨닫습니다. 저는 1991∼1993년에 고등학교를 다녔고, 1988∼1990년에 중학교를 다녔는데요, 이무렵에도 학교에서 골마루를 지나다가 교사를 만나면 오른손을 번쩍 들어 이마에 척 붙이는 거수경례를 해야 했습니다. 군대가 아닌 학교인데 말이지요. 1970년대만이 아니라 1990년대에도 이런 일이 흔했어요. 어쩌다가 학교 아닌 마을이나 시내나 버스에서 교사를 마주칠 적에 깜짝 놀라서 “충성!” 소리를 붙여 거수경례를 한 적도 있는데, 이럴 때에 교사도 깜짝 놀라며 매우 남세스러워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혜는 학생들도 인간이고 인권이 있다는 당연한 내용의 조례가 반대에 부딪히는 현실에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 지혜는 중고등학생들이 두발자유를 요구하며 나섰던 것이 2000년에도 있었던 일이고,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최초로 제정되는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무려 10년이나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0∼231쪽)



  우리 사회 어른들은 흔히 말하지요. ‘어린이와 푸름이가 우리 미래’라고 말이지요. 비록 ‘미래’라는 낱말은 ‘앞날’로 고쳐써야 한다고 어른들 스스로 한국말사전 뜻풀이로도 밝히지만, 아무튼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우리 앞날(미래)인 줄 어른들도 알아요. 그러나 우리 사회 어른들은 우리 앞날인 어린이하고 푸름이를 입시지옥에 옭아맵니다. 우리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새롭게 꿈을 키워서 즐겁게 살림을 짓도록 북돋우는 일을 제대로 못하고 말아요. 평화를 가르치지 못하고, 민주를 보여주지 못해요. 어깨동무로 나아가지 못하고, 나눔을 베풀지 못해요.


  평화보다 안보를 앞세우면서 군대와 전쟁무기를 너무 부풀리는 어른 사회예요. 민주보다 수구기득권 논리랑 경제성장 논리를 앞장세우는 어른 사회입니다. 어깨동무보다는 비정규직이나 계급차별이 버젓이 있는 어른 사회이지요. 나눔보다는 독점이나 재벌이 불거지는 어른 사회이고요.



(2008년) 청소년들의 이러한 참여와 활동은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에게는 활력을 주었지만 정부를 비롯해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과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청소년들의 집회 참여를 막으려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교육청에서는 교사나 장학사 등이 집회 현장에 나온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지도’에 나섰다. (265쪽)



  푸름이가 학교를 벗어나서 촛불을 듭니다. 2008년에도 2014년에도 2016년에도 이 나라 푸름이는 입시나 교과서를 내려놓고 촛불을 듭니다. 푸름이 스스로 ‘동무를 적으로 삼는 입시지옥’이 얼마나 스스로 옥죌 뿐 아니라 동무랑 이웃까지 괴롭히는가를 똑똑히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어른이라는 이들은 역사 교과서를 어설피 주무르려 하는 몸짓을 좀처럼 거두어들이지 못합니다. 부정입학과 부정시험을 저지르고도 잘못을 뉘우치지 못합니다. 대통령을 등에 업은 권력을 휘두른 잘못이 들통났으면서도 아직 이 권력이 그들 손아귀에 있는 줄 압니다.


  예부터 어른은 아이를 슬기롭게 이끄는 숨결이었습니다. 예부터 어른이라면 아이한테 아름답고 따사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살림을 물려주는 넋이었어요. 예부터 어른은 누구나 아이를 따사로이 어루만지고 넉넉히 끌어안는 기쁜 사랑이었어요.


  ‘우리 앞날’인 어린이와 푸름이는 바로 ‘우리 오늘’이기도 합니다. 우리 앞날을 새롭게 일굴 어린이와 푸름이는 언제나 ‘우리 오늘’이에요. ‘어른 여러분’이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 사회를 아름답게 고치는 데에 힘을 쏟을 수 있기를 빌어요. 이제라도 입시지옥은 걷어치우고 평화롭고 민주다운 배움마당을 열어야지 싶어요. 시험 과목이 아닌 살림살이를 배우고 가르치면서 다 함께 아름다울 이 나라로 새롭게 일굴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어린이와 푸름이뿐 아니라 우리 사회 어른 모두 ‘앞날이요 오늘’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2017.1.3.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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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응우웬티기에우짱 노란돼지 창작동화
신채연 지음, 김미정 그림 / 노란돼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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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64



베트남에서 온 사랑스런 우리 엄마

― 우리 엄마는 응우웬티기에우짱

 신채연 글

 김미정 그림

 노란돼지 펴냄, 2015.7.20. 1만 원



  전남 고흥군 읍내에 있는 군립도서관으로 나들이를 가서 어린이책을 놓은 칸에 가면 똑같은 그림책이 꽤 많이 꽂힌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군 읍내에 있는 군립도서관도 이와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이라 할 만한 지자체 군립도서관에는 일부러 ‘똑같은 그림책’을 잔뜩 갖추어요.


  매우 사랑받는 그림책이기에 잔뜩 갖추지는 않아요. 생김새는 똑같으나 다 다른 말로 적힌 그림책이에요. 이제 한국에는 다른 나라에서 시집을 와서 아이를 낳는 분이 매우 많아요. 그래서 이분들이 한국말을 익히도록 도우려는 뜻에다가 이분들이 고향나라 말로 아이를 가르칠 수 있도록 도우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엄마한테는 신기한 것도 많고 멋진 것도 참 많다. 우리 엄마는 내가 학교에서 가지고 오는 가정 통신문도 한 번만 읽는 법이 없다. 꼭 두 번, 세 번 읽는다. 오늘은 두 장이나 되니까 아마 열 번쯤은 읽을 거다. (9쪽)


맨 앞에 쓴 ‘응’ 자 옆에서 ‘우웬티기에우’가 점점 작게 쪼그라들고 있었다. 맨 마지막에 쓴 ‘짱’ 자는 진짜로 눈곱만큼 작았다. “엄마 이름 길어……. 그런데 여기 너무 좁아. 엄마 조그맣게 못 쓰겠어. 민재가 써 봐.” (12쪽)



  신채연 님이 글을 쓰고, 김미정 님이 그림을 그린 《우리 엄마는 응우웬티기에우짱》(노란돼지,2015)이라는 어린이문학을 읽으면서 ‘태어난 한국사람’하고 ‘옮겨 온 한국사람’을 헤아려 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아이는 ‘한국 아이’입니다. 이름도 ‘한국 이름’이고 말도 ‘한국말’을 써요. 이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베트남에서 왔습니다. 베트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한국으로 시집을 왔기에 이제는 ‘베트남이 아닌 한국에서 사는 사람’이요, 말 그대로 ‘한국사람’입니다.


  베트남 이름인 응우웬티기에우짱을 그대로 쓴다는 어머니는 한국 할머니(시어머니)가 지어 준 ‘한국 이름’이 있으나 그 한국 이름보다는 이녁 베트남 어머니랑 아버지가 지어 준 ‘베트남 이름’이 좋아서 베트남 이름을 쓴다고 해요.


  그런데 베트남에서 나고 자란 ‘한국사람 어머니’한테서 태어난 아이는 제 어머니 이름 때문에 학교에서 놀림을 받았대요. 어머니 이름이 길 뿐 아니라, 베트남 이름이 ‘짱’으로 끝나는 바람에 학교에서 동무가 그 ‘짱’이라는 말로 놀린대요.



엄마가 내 이름표를 보고 목걸이 같다며 멋지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름표를 목에 걸고 거울 앞에서 좋아하는 엄마 얼굴 뒤로, 킥킥거리며 웃고 있는 병식이 얼굴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 이름표를 걸고 엄마가 학교에 오면 친구들이…….’ 물에 젖은 솜바지를 입은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엄마는 왜 신청은 해 가지고. (22쪽)



  한국이 아닌 베트남이라면 ‘응우웬티기에우짱’이라는 이름으로 놀리거나 놀림받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해요. 거꾸로 베트남에서는 ‘한국 이름’이 어떤 소릿값으로는 웃음이 난다고 여길 수 있겠지요.


  그런데 어느 이름이든 모두 어머니랑 아버지가 사랑으로 지어 줍니다. 사랑을 담지 않아서 짓는 이름이란 없어요. 아이들은 모두 어버이가 따사롭고 넉넉하게 품는 사랑으로 태어나고요. 몸도 이름도 어버이가 물려주는 사랑이에요.


  어린이문학 《우리 엄마는 응우웬티기에우짱》에 나오는 아이는 아직 철이 들지 않아 어머니 ‘베트남 이름’을 동무들 앞에서 부끄럽다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말이에요, 이 아이를 비롯해서 우리가 조금만 더 헤아려 본다면, 베트남 이름이든 미국 이름이든 일본 이름이든 중국 이름이든 우즈베키스탄 이름이든 몽골 이름이든 부끄러울 까닭이 없어요. 다 다른 나라에서 다 다른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숨결이 깃든 이름이에요.


  아직 어린 아이들로서는 이 대목을 짚기 어려울는지 모릅니다. 이때에는 둘레에서 어른들이 찬찬히 이끌어 주어야겠지요. 아이로서는 지도책을 펼치거나 지구본을 돌리면서 ‘베트남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머니가 베트남에서 어떤 삶과 살림을 누렸는가’ 하고 이 이름을 바탕으로 헤아려 볼 수 있어요. 언젠가 아이가 어머니랑 함께 베트남으로 나들이를 가서 ‘베트남 식구와 친척’을 만날 수 있다면, 이 ‘한국 아이’는 베트남 이름하고 한국 이름이 어떻게 다른가를 새삼스레 돌아볼 만할 테고요.



“항상 사이좋게 지내야 해. 친구들끼리 싸우는 싸움 대장은 짱 아니야.” 엄마가 이름표에 쓰여 있는 ‘짱’ 자를 손으로 콕콕 누르며 말했다. (56쪽)



  어머니 응우웬티기에우짱 님은 이녁 아이랑 동무 아이들한테 떡볶기를 대접해 주면서 이야기합니다. ‘짱’이란 ‘싸움 대장’이 아니라 ‘사이좋게 어울릴 수 있는 사이’에서 붙을 수 있는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말이에요. 빙그레 웃으면서 이녁 아이하고 동무 아이들을 받아들여 주어요. 아이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기를 바라고, 서로 돕기를 바라며, 서로 아끼기를 바라요.


  베트남에서 온 참말로 사랑스러운 우리 어머니입니다. 이 이야기처럼 아이들이 저마다 이처럼 어깨동무를 할 수 있다면, 앞으로는 베트남 이름이나 스리랑카 이름이나 티벳 이름 모두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새롭게 깨달으리라 봅니다. 2016.12.16.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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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타니 겐지로의 생각들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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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배움책 40



그러면 난 스스로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 하이타니 겐지로의 생각들

 하이타니 겐지로 글

 햇살과나무꾼 옮김

 양철북 펴냄, 2016.11.7. 12000원



  오늘날에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일을 아주 마땅하게 여깁니다. 나이가 찬 아이는 초등학교부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까지 가야 한다고 여겨요. 그러면 학교는 무엇을 하는 곳이기에 모든 아이가 가야 한다고 여길까요? 우리는 학교가 얼마나 학교다운가를 생각하면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일을 할까요?


  하이타니 겐지로 님이 쓴 《하이타니 겐지로의 생각들》(양철북,2016)을 읽으면 첫머리에 ‘자급자족을 하는 섬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이타니 겐지로 님은 도시하고 멀리 떨어진 섬에서 혼자 지내면서 밭을 일구고 물고기를 낚았다고 하는데, 섬에서 만난 거의 모든 이웃은 ‘딱히 학교라는 곳’에 기대지 않아도 스스로 배우고 서로 가르치면서 다 같이 사이좋게 어우러지는 살림을 짓는 모습을 늘 볼 수 있었다고 밝혀요.



섬 사람들은 대부분 자급자족 생활을 한다. 자연을 경외하고 자연에서 배우며 살아간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 조부모를 보며 자란다. (14쪽)


머리로 생각해서 얻은 것과 몸과 마음으로 느껴서 알게 된 것 사이의 불균형이 사람들로부터 배려와 상냥함을 빼앗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앗아갔다. (19쪽)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급자족을 배우지 못해요. 학교는 자급자족을 안 가르치거든요. 그렇지요? 학교는 교과서를 가르쳐요. 교과서는 흔히 국·영·수라는 이름처럼 지식을 가르쳐요. 그리고 이 지식을 놓고 시험을 치러서 점수를 따지고요.


  학교에서는 집을 짓거나 옷을 짓거나 밥을 짓는 살림을 가르치지 않아요. 학교는 시멘트로 다 지어 놓은 집이에요. 학교라는 집을 어떻게 지었는지 아이들은 하나도 모르고, 교사조차 하나도 몰라요. 학교옷이든 체육옷이든 손수 지어서 입도록 하지 않고 모두 돈으로 사서 입도록 해요. 학교에서 아이들더러 옷을 손수 짓거나 깁거나 손질하도록 이끌지 않아요. 학교에서 먹는 밥도 아이가 손수 지어서 먹는 밥이 아니라 급식실에서 조리사가 따로 한꺼번에 지어서 밥판을 들고 받아서 먹도록 해요. 학교에 손수 지은 밥으로 마련한 도시락을 싸서 오는 일이란 이제 거의 모두 사라졌어요.



도쿄는 게다를 신고 걸어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절실히 느꼈다. 도시라면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바닥이 너무 딱딱해서 힘껏 내디디며 걸을 수가 없닫. 미끄러지기 쉬워 너무나 위태위태하다. (64쪽)


자신과 관계없다는 생각이 이 사회를 얼마나 나쁘게 만들어 왔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98쪽)



  《하이타니 겐지로의 생각들》은 오늘날 사람들더러 ‘이제라도 자급자족을 해야 하지 않느냐?’ 하고 묻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가지를 물어요. ‘자급자족을 잃거나 잊은 우리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가?’ 하고 물어요.


  곰곰이 돌아봅니다. 자급자족을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이고, 자급자족을 가르치지 못하는 학교인 터라,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 대학교에 가든 돈을 버는 일자리를 얻든 해야 합니다. 손수 집·옷·밥을 얻도록 살림을 지을 줄 모르니, 오직 돈으로 집을 얻고 옷을 사며 밥을 마련해야 해요. 밭을 일구거나 논을 가는 일손을 배우지 않으니, 늘 먹는 밥이 어떻게 나오는지, 또 한국이 쌀을 자급하는지 수입하는지, 손수 지은 쌀이나 농약을 치는 쌀이나 나라밖에서 들여오는 쌀이 어떠한가를 도무지 모를 수밖에 없어요.


  어느 모로 본다면 우리는 학교를 다니면서 ‘사회’를 배우기보다는 ‘오직 돈으로 움직이는 사회’에 길든다고 할 만해요. ‘사이좋게 어우러지는 사회’나 ‘스스로 짓거나 가꾸는 사회’가 아닌 ‘톱니바퀴처럼 맴돌며 돈을 벌고 돈을 쓰는 사회’에 얽매인다고 할 만하지요.



아이들은 야무지다. 앞뒤 문장을 보고 구덩이의 깊이를 추측한다. 그것도 지혜이다. 경험과 상상력으로 삼 미터 사십오 센티미터라는 길이를 생각해낸 아이는 훌륭하다. (114쪽)


아이들은 꾸며서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상냥한 마음이, 눈빛이 전해진다. (117쪽)



  하이타니 겐지로 님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실마리를 풀면서 《하이타니 겐지로의 생각들》이라는 책을 엮습니다. 지식에 갇히지 않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지핍니다. 아이들은 꾸미지 않을 적에 상냥하고, 이 상냥한 눈빛으로 따스히 말을 건다고 해요. 이 아이들은 둘레 어른이나 어버이한테서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요, ‘시험성적을 잘 받는’ 아이가 아니라 ‘삶을 스스로 짓는’ 아이가 될 수 있는 길을 눈빛 밝은 아이들한테 가르치거나 물려줄 수 있어야 아름답겠지요. 대학교에 잘 붙도록 시험공부를 잘 하는 아이가 아니라 손수 살림을 가꿀 줄 아는 씩씩하고 다부지며 알뜰한 아이로 자라도록 이끌 때에 사회가 넉넉하면서 따사롭겠지요.


  학교에서 급식만 하기보다는 아이하고 교사가 함께 밥을 짓도록 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적어도 한 주에 한 번은 아이도 교사도 손수 지은 밥을 먹도록 가르치고 배울 만하리라 생각해요. 학교옷을 값비싸게 맞추어 입기보다는 갓 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이 한 주나 한 달에 걸쳐서 손수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익혀서 짓도록 함께 배우고 가르쳐 볼 만해요. 학교 한켠을 주차장으로 삼기보다는 텃밭으로 삼아서 ‘손으로 지어 거두는 기쁨’을 누리도록 해 볼 만해요.



“밭일 잘하는 비결 같은 건 없습니까?” “그런 건 없어요. 밭에 있는 녀석들에게 선생님의 발소리를 되도록 많이 들려주세요.” 찌릿찌릿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153쪽)



  하이타니 겐지로 님은 늘 끊임없이 물었다고 해요. 섬마을 아이들한테 묻고, 섬마을 어른들한테 물었대요. 아이들한테는 티없이 흐르는 생각이 샘솟는 기쁜 웃음을 지켜보면서 어쩜 그렇게 사랑스러운가 하고 묻고, 어른들한테는 무엇이든 손수 지으며 이웃하고 넉넉히 나누는 너른 숨결을 마주하면서 어쩜 그렇게 아름다운가 하고 물었대요. 그리고 하이타니 겐지로 님 스스로 물었다지요. 자, 이 아름다운 이웃들 곁에서 하이타니 겐지로 님 스스로 ‘바로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대요.


  책을 읽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책을 다 읽고 나서 덮은 우리는 무엇을 할 적에 즐겁거나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울까요? 책을 읽어서 무엇을 배울 만하고, 삶에서 무엇을 새롭게 지을 만할까요? 어른인 우리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물려주거나 가르칠 만할까요? 오늘날 학교 얼거리를 입시지옥으로 그대로 두어도 될 만할까요? 삶을 가르치는 학교, 살림을 함께 배우는 학교, 사랑을 서로 나누는 학교, 이러한 참된 학교가 되도록 이제부터 뜻을 모으고 손을 모으고 힘을 모으고 마음을 모아야지 싶습니다. 2016.12.15.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배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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