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닷 Photo닷 2015.1 - Vol.14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200



사진 한 장을 나누고 싶어서

― 사진잡지 《포토닷》 14호

 포토닷 펴냄, 2015.1.1.



  사진잡지 《포토닷》 14호(2015.1.)를 읽습니다. 한국에 처음 찾아왔다고 하는 세바스치앙 살가두 님 모습을 사진으로 바라봅니다. 지구별에서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닌 살가두 님은 한국에 와서 무엇을 느끼거나 보았을까 궁금합니다. 이녁 사진잔치가 열리는 자리에만 찾아가느라 바쁠는지, 심부름꾼을 옆에 두지 않고 홀가분하게 한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겨를이 있을는지, 심부름꾼이 옆에 있다면 심부름꾼은 살가두 님을 어디로 이끌고 무엇을 보여줄 만한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도시 문화와 문명만 만날까요. 새마을운동 뒤로 크게 뒤바뀐 시골살이를 돌아볼까요. 고속도로로 서울과 부산을 가로지르면서 창밖으로 스치는 모습을 지켜볼까요. 핵발전소에서 큰도시로 뻗는 송전탑을 바라볼까요. 끊이지 않는 자동차 물결이나 지하철을 둘러볼까요. “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찍고 현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번역이나 해석이 필요 없는 강력한 도구다(17쪽/세바스치앙 살가두).”와 같은 말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사진 한 장이면 ‘다른 말’을 쓰더라도 이야기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 어떤 이야기를 헤아릴 수 있을까요. 저마다 즐겁게 삶을 짓는 이야기를 헤아릴까요. 저마다 아름답게 삶을 가꾸는 이야기를 헤아릴까요. 저마다 아프거나 슬프거나 고단한 삶을 헤아릴까요.


  “낮에는 극명하게 다른 공장이지만 밤이면 양쪽 모두 크게 다르지 않은 힘 같은 게 느껴져요. 버려진 곳과 살아 움직이는 곳, 모두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바라본 작업이에요(25쪽/장태원).”와 같은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공장을 사진으로 담는다 할 적에도 두 가지 모습을 엿본다고 합니다. 어느 한 가지로만 바라볼 수 없으리라 느낍니다. 왜냐하면, 한 가지 모습만 있지 않을 테니까요. 온갖 물질과 문명을 만드는 공장이면서, 온갖 쓰레기와 매연을 내놓는 공장입니다. 공장에서 만든 물건으로 갖가지 문화와 예술이 피어나도록 하지만, 공장을 만들고 공장으로 자원을 가져가느라 지구별을 파헤치거나 망가뜨립니다.






  공장은 무엇일까요. 공장이 있어야만 돌아가는 도시란 무엇일까요. 도시란 무엇이고, 도시는 왜 공장이 없이는 버티지 못할까요. 공장이 없이 삶이 있으면 안 될까요. 공장도 도시도 아닌 보금자리와 삶자리가 있으면 어떤 이야기가 흐를까요.


  사진을 읽든 글을 읽든 늘 물음표입니다. 내가 나한테 묻습니다. 내가 내 이웃과 동무한테 묻습니다.


  “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자신과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길 바라요(35쪽/이송희).”와 같은 이야기처럼, 사진 한 장으로 ‘내 이야기’를 너한테 들려주면서, 너는 ‘네 이야기’를 새롭게 그립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로 읽으면서, 어느새 내 이야기를 가만히 그립니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를 그릴 수 있도록 이끌기에 ‘사진 한 장이 지구별을 넘나들면서 읽힙’니다. 군말이나 덧말이 없어도 마음으로 이야기가 흐르기에 사진 한 장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만히 퍼집니다.


  “현재 쿠바 사진계의 가장 특별한 점은 다큐사진과 예술사진 사이에 전통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59쪽/넬슨 라미레즈 드 아레야노 콩드).”와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합니다. 다큐멘터리와 예술이 달라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다큐멘터리와 예술을 갈라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상업이나 패션을 나누어야 할 까닭이 없고, 보도사진이나 스냅사진이나 생활사진이 달라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사진은 똑같이 ‘사진’입니다. 사진답지 않으면 사진이 아니고, 사진다울 때에는 사진입니다.





  신문에 실려야 사진이 아니고, 영화 포스터나 광고 전단지에 실려야 사진이 아닙니다. 전시회에 걸린다든지 책으로 나와야 사진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이곳에서 즐겁게 누리는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야 비로소 사진입니다. 오늘 내가 이곳에서 즐겁게 누리는 이야기를 담지 않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웃음뿐 아니라 눈물도 이와 같아요. 오늘 내가 이곳에서 아파서 흘리는 눈물을 담지 않으면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한 장의 사진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98쪽/남택운)?”와 같은 이야기처럼, 사진 한 장으로 두고두고 이야기를 합니다. 사진 백 장이나 사진 만 장이 있어야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사진 한 장이면 넉넉합니다.


  사진책 한 권이면 넉넉하고, 사진기 한 대면 넉넉합니다. 사진기 한 대와 필름 한 통이어도 넉넉하며, 작은 메모리카드 하나여도 넉넉합니다. 이리하여, “사진이 오직 기계질이나 기록뿐이라면 우리가 굳이 사진을 문화나 예술로 다룰 까닭이 없을 테고, 사진이 그저 기계질이나 기록뿐이라면 사진을 즐기거나 읽거나 나누거나 누릴 까닭이 없으리라 봅니다. 사진은 기계질이나 기록에서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기계를 빌어서 우리 마음을 나타내고 생각을 나눌 수 있기에, 사진을 문화나 예술로 다루면서 이야기를 한다고 봅니다(125쪽/최종규).”처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려고 사진을 찍고 읽습니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사진을 찍고 읽습니다. 우리는 다 함께 이야기잔치를 누리려고 사진을 찍고 읽습니다.


  남한테 보여주려는 사진이 아니라,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려는 사진입니다. 남 앞에서 자랑하려는 사진이 아니라, 이웃과 손을 맞잡고 빙그레 웃으려는 사진입니다.






  그런데, “외국 사진가들은 높은 비용을 주고 대접을 해 주면서 우리나라 사진가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느냐고 많이도 싸웠다(108쪽/안성진).”와 같은 이야기처럼, 한국사람 스스로 아직 한국 사진문화를 일구지 못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이름난 사진가라고 해서 한국에서도 돋보이는 사진가이지는 않습니다. 손놀림이 뛰어나거나 손짓이 대단한 사진가는 있을 만합니다만, 이야기 한 자락을 일굴 적에는 손놀림이나 손짓은 대수롭지 않아요. 투박한 손놀림도 사랑스럽고, 수수한 손짓도 아름답습니다. 이리하여, “한국 현대사진은 겉으로 화려하고 풍요로워 보이지만 속빈 강정이다. 작가들은 여전히 배고프고 사진적 기반은 취약하다. 수도 서울 사대문 안에 사진가들이 제집처럼 드나들 곳이 있는가(115쪽/진동선)?”와 같은 이야기가 불거집니다. 온갖 사진잔치는 꾸준하게 있고, 여러 사진축제도 꾸준하게 있으나, 막상 ‘사진놀이터’라든지 ‘사진마당’은 마땅히 없습니다.


  사진책을 두루 갖춘 도서관이 한국에 몇 군데 있습니까. 사진책을 씩씩하게 펴내도록 하는 밑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런데, 진동선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쪽으로는 맞지만, 한쪽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글을 쓰는 사람이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든 어디에서나 만나서 어울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골목에서 어울리고, 시골마을에서 어울리면 됩니다. 숲에서 어울리면 되고, 바닷가에서 어울리면 됩니다.


  대학교에 사진학과가 있어야 사진이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사진학과 교수가 꾸준히 늘고, 사진학과 졸업생이 꾸준히 나와야 사진이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남다른 ‘사진마당’이 있어야 하기도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나 스스럼없이 사진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따사로운 눈빛으로 사진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바탕이 되면서 사진마당이 있어야 사진마당이 제대로 굴러갑니다. 이러한 삶을 바탕으로 다지지 않으면서 사진마당만 세운다면, 또다시 건축물 하나 늘릴 뿐입니다.


  “사랑이 어린 손으로 사진기라는 기계를 손에 쥘 적에 비로소 ‘사진’이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사랑이 어리지 않은 손으로 사진기라는 기계를 쥔다면, 자칫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좋은 뜻으로 사진기를 손에 쥐었어도, 사진에 찍힐 사람한테서 허락이나 동의를 받지 않고 찍는 사진이라면,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 모델을 찍거나 피사체를 다루는 사진이 아니라, 구도와 장면을 연출하는 사진이 아니라, 주제를 일방통행으로 강요하는 사진이 아니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사진이 될 때에 비로소 ‘사진’입니다(125, 127쪽/최종규).”와 같은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기계가 있어야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있어야 사진이 태어납니다. 기계가 빼어나야 사진이 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아름다울 때에 사진이 아름답습니다. 마음이 고울 적에 사진이 곱고, 마음이 착할 적에 사진이 착합니다. 마음에 꽃이 피어야 사진문화에 꽃이 피고, 마음에 사랑이 싹터야 사진문화가 사랑스럽게 발돋움합니다.


  사진 한 장을 나누고 싶어서 빙긋 웃는 사진벗이 살가이 어깨동무하는 앞날을 꿈꿉니다. 4348.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 너를 꽃이라 부른다
고홍곤 지음 / 지누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98



우리를 곱게 둘러싼 꽃

― 굽이 굽이 엄마는 꽃으로 피어나고

 고홍곤 사진

 지누 펴냄, 2013.4.20.



  우리는 언제나 꽃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누구나 꽃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꽃이 피지 않으면 사람은 밥을 먹지 못하고, 꽃이 피기에 사람은 밥을 먹습니다.


  우리가 늘 먹는 밥은 언제나 꽃밥입니다. 밥그릇에 꽃송이를 놓기에 꽃밥이 아닙니다. 꽃처럼 곱게 지은 밥이라서 꽃밥이 아닙니다. 사람이 먹는 모든 밥은 꽃이 피어서 열매를 맺어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꽃밥입니다. 사람이 먹는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벼꽃과 보리꽃이 피고 난 뒤 천천히 시들어 차근차근 무르익은 열매입니다.


  풀꽃은 풀알을 맺습니다. 풀알은 풀이 맺는 열매입니다. 나무꽃은 나무알을 맺습니다. 나무알은 나무가 맺는 열매입니다. 모든 알은 꽃이 깃들던 자리요, 모든 열매는 꽃이 새롭게 태어난 모습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꽃에 둘러싸여 살아간다고 할밖에 없습니다. 꽃이 있어 열매가 맺어 밥을 먹으니, 우리 곁에는 언제나 꽃이 있습니다. 꽃이 피어 열매를 맺고 밥을 나누어 주는 풀과 나무는, 밥뿐 아니라 싱그럽고 푸른 바람을 베풉니다.






  꽃이 없으면 밥을 못 먹을 뿐 아니라, 꽃이 없을 적에는 숨을 못 쉽니다. 한쪽에는 밥이 되는 꽃이요, 다른 한쪽에서는 숨이 되는 꽃입니다.


  고홍곤 님이 사진으로 찍어 책으로 정갈히 엮은 《굽이 굽이 엄마는 꽃으로 피어나고》(지누,2013)를 읽습니다. 고홍곤 님은 꽃송이를 바라보면서 어머니를 느낍니다. 그래요, 꽃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느낄 만합니다. 어머니는 아기한테 젖을 물리면서 사랑을 베풉니다. 어머니는 아기한테 말을 가르치면서 삶을 물려줍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놀리기 입히고 씻기고 돌보면서 꿈을 짓습니다. 어머니는 꽃이요, 꽃인 어머니가 열매인 아기를 낳습니다. 열매인 아기는 가슴에 씨앗을 품으면서 무럭무럭 자라 새로운 꽃으로 피어나고, 새로운 꽃으로 피어난 아기는 어느새 어머니가 되어 다시 새로운 꽃을 피울 열매를 내놓아 씨앗 한 톨을 물려줍니다.


  꽃은 어떤 모습일까요? 온갖 모습입니다. 꽃은 어떤 빛깔일까요? 갖은 빛깔입니다. 꽃은 어떤 무늬일까요? 숱한 무늬입니다.


  사진책 《굽이 굽이 엄마는 꽃으로 피어나고》를 들여다보면 꽃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잔잔하게 흐릅니다. 꽃마다 한들거리며 짓는 춤사위가 조용히 흐릅니다. 구름을 등에 진 꽃, 오래된 골목집과 함께 살아온 꽃, 시골자락에서 무리를 지어 자라는 꽃, 관광지에 잔뜩 심긴 꽃, 아주 조그맣게 올라오는 수수한 들꽃, 꽃대를 올린 풀줄기가 나부끼는 풀잎사귀, 어머니가 아이한테 물려주고 베푸는 사랑처럼, 꽃이 지구별에서 흔들리고 춤추고 나부끼고 노래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사진마다 그득히 흐릅니다.






  우리를 곱게 둘러싸는 꽃은 싱그럽습니다. 우리를 곱게 둘러싸는 꽃은 사랑과 꿈을 속삭입니다. 귀를 기울여서 꽃노래를 들어요. 사랑노래와 꿈노래를 들으면서 우리 가슴을 살찌워요. 내가 받은 사랑이기에 이웃한테 나누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으며 가슴이 부풀고 기쁘기 때문에, 이토록 기쁘며 고운 사랑을 새삼스레 이웃과 동무하고 나누면서 웃고 싶은 마음이기에 사랑을 찬찬히 펼칩니다.


  어머니는 굽이 굽이 꽃으로 피어납니다. 아버지도 굽이 굽이 꽃으로 피어납니다. 어린이도 할매도 할배도 모두 굽이 굽이 꽃으로 피어납니다. 우리는 모두 꽃을 먹으면서 살고, 우리는 언제나 이웃한테 꽃을 베풀면서 삽니다. 꽃처럼 웃고 꽃처럼 노래해요. 글을 쓸 적에는 글꽃이 되도록, 사진을 찍을 적에는 사진꽃이 되도록, 노래를 부를 적에는 노래꽃이 되도록, 삶꽃을 가꾸고 사랑꽃을 키우면서 하루하루 아름답게 살아가요. 4347.12.2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천 원의 식사 눈빛사진가선 5
김지연 지음 / 눈빛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198



수수한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사진

― 삼천 원의 식사

 김지연 사진

 눈빛 펴냄, 2014.11.25.



  아이들한테는 삼천 원이든 삼천만 원이든 삼천조 원이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장난감 하나가 대수롭고, 함께 놀 동무와 이웃이 대수로우며, 맛난 밥 한 그릇이 대수롭습니다. 느긋하게 쉴 집과 기쁘게 꿈을 꿀 잠자리가 반가우며, 생각을 열도록 이끄는 그림책이나 만화책이 재미있습니다.


  삼천 원짜리 책이든 삼만 원짜리 책이든 아이들한테는 똑같습니다. 삼천 원짜리 인형이든 삼천만 원짜리 인형이든 아이들은 인형을 물에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며 모래밭에서 함께 뒹굴며 소꿉놀이를 하는 장난감이나 벗님이 됩니다. 헌 이불을 덮든 새 이불을 덮든 새근새근 잠들 수 있으면 포근합니다. 오래된 집이든 커다란 호텔이든 꿈나라로 빠져들 수 있으면 살가운 보금자리입니다.


  전주에서 ‘서학동사진관’을 꾸리는 김지연 님이 전주를 발판으로 삼아서 만난 이웃 이야기를 《삼천 원의 식사》(눈빛,2014)라는 이름을 붙여 사진책으로 선보입니다. “삼천 원의 식사”라 했지만, “삼천 원짜리 밥”이 되기도 하고, “삼천 원어치 밥”이 되기도 합니다. “삼천 원으로 꿈꾸는 밥”이라든지 “삼천 원으로 나누는 사랑”이 되기도 해요.


  김지연 님은 “천 원어치 붕어빵을 사면서, 혹은 이천 원짜리 두부 한 모를 사면서 그들에게 모델을 서 줄 것을 간청했다. 미안한 마음이 크다. 장사를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때로는 뜨거운 국사발을 나르는 늙은 주인장 앞에서 단 2초의 시간을 할애받는다.” 하고 속삭입니다. 김지연 님이 찍은 사진에 나온 분들은 ‘모델’이 되었다고 하지만, 모델이라기보다는 ‘이웃’입니다. 전주에서도 볼 수 있고, 서울에서도 만날 수 있으며, 고흥에서도 사귈 수 있는 이웃입니다.




  이웃을 찍은 사진인 《삼천 원의 식사》이고, 이웃이 누리는 삶을 보여주는 사진인 《삼천 원의 식사》이며,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는 사랑을 사진으로 들려주는 《삼천 원의 식사》입니다.


  김지연 님은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지체할 때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물이 식을까 봐, 국수가 불을까 봐 걱정을 한다.” 하고 소근거립니다. 어쩌면, 김지연 님은 자존심이라는 대목을 걱정하거나 마음을 쓰셨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자존심이란 대수롭지 않아요. 서로 아끼는 마음이면 되고, 서로 보살피는 손길이면 됩니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면 넉넉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면 아름답습니다.


  사진책 《삼천 원의 식사》를 낳은 사진기는 어떤 사진기일까요? 값비싼 사진기를 썼을까요? 그럭저럭 쓸 만한 사진기를 썼을까요? 제법 값이 싼 사진기를 썼을까요? 어떤 사진기를 쓰든 다 괜찮습니다. 이야기를 낳을 수 있으면 어떤 사진기를 쓰더라도 사진이 즐겁고, 이야기를 낳지 못하면 어떤 사진기를 쓰더라도 사진이 따분합니다.





  양은 그릇에 국밥을 팔든 질그릇에 떡국을 팔든 나무그릇에 붕어빵을 올리든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국밥을 먹습니다. 우리는 그릇을 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떡국을 먹는 사람이지, 질그릇을 먹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진을 찍고 읽을 뿐, 사진기를 읽거나 살피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김지연 님은 “할머니는 처음엔 사양하더니 이내 보따리를 이고 따라왔다. 그이는 뜨거운 장터국수 국물을 마시며 ‘아, 맛있네!’ 하고 중얼거렸다. 양은 국수 그릇을 움켜 든 두 손은 손톱이 닳고 살결은 거칠었다. 삼천 원짜리 식사가 이런 것일 수도 있구나 하고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하고 귀띔합니다. 저잣마실을 하다가 만난 할매하고 장터국수 한 그릇을 함께 나누었다고 해요. 저잣거리 할매는 국수 한 그릇에 “아, 맛있네!” 하고 말씀하셨대요.


  사진책 《삼천 원의 식사》는 “아, 맛있네!”를 노래하고 싶습니다. 사진책 《삼천 원의 식사》는 “아, 즐겁네!”를 함께 노래하고 싶습니다. 사진책 《삼천 원의 식사》는 “아, 고맙네!”를 서로 나누면서 노래하고 싶습니다.


  사진은 늘 이곳에 있습니다. 사진은 늘 이곳에 수수한 이웃과 함께 있습니다. 사진은 늘 이곳에 수수한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는 내 손에 있습니다. 4347.12.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ppletreeje 2014-12-18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도 좋은데~ 함께살기님 따사롭고 정다운 느낌글 읽으니 더 읽고 싶네요 ^^
감사히 담아갑니다~~

숲노래 2014-12-18 10:50   좋아요 0 | URL
이 책 내신 분이
전주에서 `서학동 사진관`을 꾸리셔요.

언제 전주로 나들이 가셔서
전주비빔밥과 전주막걸리(모주)를 드실 일이 있으시면,
서학동 사진관이라고 하는
이쁘장한 곳에도 마실해 보셔요.

겨울에는 살짝 쉬신다고 들었는데,
골목 안쪽에 곱다라니 깃든 사진관이
아주 아름답다고 들었어요
(저도 아직 가지는 못하고 사진으로만 보았습니다 ㅠ.ㅜ)

appletreeje 2014-12-18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책 배송 받아 잘 보고 있습니다~
책이 말씀대로 참 좋네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전주 갈때엔 `서학동 사진관`도 꼭 가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숲노래 2014-12-19 06:14   좋아요 0 | URL
사진으로 나누는 수수하면서 따사로운 이야기를
조촐히 누리시기를 빌어요.

삶이 언제나 사진으로 태어나고
사진에서 새롭게 사진을 읽으면서
함께 노래하는 이야기가 흐르는구나 하고 느껴요
 
손에 관한 명상 - 전민조 사진집 눈빛사진가선 10
전민조 지음 / 눈빛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89



내 아름다운 손으로 빚는 사진

― 손에 관한 명상

 전민조 사진

 눈빛 펴냄, 2014.11.25.



  테드 랜드 님 그림에 빌 마틴 주니어 님과 존 아캠볼트 님이 글을 넣은 그림책 《손, 손, 내 손은》(열린어린이,2005)이 있습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을 보면 첫머리를 “손, 손, 내 손은 슝 던지고 꽉 잡아요.” 하고 엽니다. 이윽고, “발, 발, 내 발은 또박또박 걷고 우뚝 멈춰요.” 하고 이어지지요. 다음으로, “코, 코, 내 코는 흠흠 냄새 맡고 쌕쌕 숨쉬어요.” 하고 말하다가 “눈, 눈, 내 눈은 또랑또랑 쳐다보고 뚝뚝 눈물 흘려요.” 하고 말해요. 이렇게 손이며 발이며 코와 눈이며 하나씩 이야기하면서 다 다른 아이들이 나옵니다. 지구별에 있는 온갖 겨레 아이들이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옷차림과 생김새로 지내는 모습이 흘러요. 그림책을 조금 더 넘기면, “무릎, 무릎, 내 무릎은 콰당탕 엎어질 땐 따따금 아파요.” 하는 이야기와 “뺨, 뺨, 내 뺨은 쪽 뽀뽀해 주면 발그레 빨개져요.” 같은이야기가 흐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어린이와 어른 모두 콰당탕 엎어지면 무릎이 아픕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 누군가 뺨에 쪽 뽀뽀해 주면 발그레 빨개지면서 기쁜 사랑이 흐릅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 두 손을 써서 공을 던지거나 받을 뿐 아니라, 밥을 지어서 차리고 수저를 들어 밥을 먹어요. 어린이와 어른 모두 두 발을 써서 걷고 달리고 뛰고 구릅니다.



.. 서로 먼저 이해를 구하고 용서하면서 손을 먼저 내미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





  사진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사진(寫眞)’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나도록 찍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으로 풀이합니다. 영어사전에서 ‘photograph’를 찾아보면, “A photograph is a picture that is made using a camera.”로 풀이합니다. 한국말사전과 영어사전 모두 ‘기계를 다루어 기록하는 것’을 ‘사진’이라 말해요. 그러나, 우리는 사진을 이야기할 적에 ‘기계질’이나 ‘기록’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이 오직 기계질이나 기록뿐이라면 우리가 굳이 사진을 문화나 예술로 다룰 까닭이 없을 테고, 사진이 그저 기계질이나 기록뿐이라면 사진을 즐기거나 읽거나 나누거나 누릴 까닭이 없으리라 봅니다. 사진은 기계질이나 기록에서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기계를 빌어서 우리 마음을 나타내고 생각을 나눌 수 있기에, 사진을 문화나 예술로 다루면서 이야기를 한다고 봅니다.


  나는 사진을 볼 때마다, ‘내 아름다운 손으로 빚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내가 찍은 내 사진은 내 손으로 빚은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내 이웃이 찍은 사진은 내 이웃이 이녁 손으로 빚은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전문가가 찍든 전문가 아닌 사람이 찍든 모든 사진은 ‘아름다운 손으로 빚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사진을 가르치거나 배울 적에는 기계질이나 기록 값어치만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습니다. 학교나 강단에서 기계질이나 기록 값어치만 가르치거나 배운다면, 어느 모로 본다면 학교나 강단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계질’은 사진기를 장만할 때 상자에 함께 담긴 ‘사용 설명서’를 읽으면 얼마든지 익혀서 ‘사진기라는 기계를 다룰 수 있’고, ‘기록’은 사진 역사를 다룬 두툼한 책 한 권을 읽기만 하더라도 지식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이 사진이 되는 까닭은, 사진이 기계질이나 기록이 아닌 ‘손질’이요, ‘손질’이란, 내 마음을 기울이는 손길이며, 내 생각을 써서 움직이는 손놀림이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요리가가 호텔에서 지어서 차리는 밥이기에 아이들이 맛나게 먹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여느 살림집 여느 어버이가 된장국에 나물무침 하나만 밥상에 올려도 맛나게 먹습니다. 아이들은 ‘값진 밥’이나 ‘비싼 밥’을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이 어린 밥’을 바랍니다. 사랑이 어린 손으로 지은 밥을 먹을 때에 아이들이 즐겁습니다. 사랑이 담긴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길 때에 아이들이 기쁩니다.


  사랑이 어린 손으로 사진기라는 기계를 손에 쥘 적에 비로소 ‘사진’이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사랑이 어리지 않은 손으로 사진기라는 기계를 쥔다면, 자칫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좋은 뜻으로 사진기를 손에 쥐었어도, 사진에 찍힐 사람한테서 허락이나 동의를 받지 않고 찍는 사진이라면,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초상권 문제가 불거지지요. 저작권 문제도 이런 바탕에서 비롯해요. 어느 한 가지 모습은 꼭 한 사람만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누구나 어느 곳이든 가서 ‘어느 한 가지’ 모습을 비슷하게 찍을 수 있고 조금 바꾸어서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가지 모습을 왜 비슷하게 찍거나 조금 바꾸어서 찍을까요? 어떤 마음이 되어 이렇게 사진을 찍을까요? 굳이 이렇게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이나 애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애무하는 모습은 쳐다보는 모습만으로도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풍경이다 ..



  전민조 님이 선보이는 사진책 《손에 관한 명상》(눈빛,2014)을 읽습니다. 이 나라에서 저마다 다른 꿈을 가슴에 품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온갖 사람들 이야기를 ‘손’을 바라보면서 들려줍니다. 손길에서 이야기를 읽고, 손길에서 꿈을 읽습니다. 손길에서 사랑을 읽고, 손길에서 눈물과 웃음을 읽습니다. 손길에서 고단한 하루를 읽고, 손길에서 기쁜 웃음을 읽습니다. 손길 하나를 바라보아도 모든 이야기를 읽을 만합니다.


  손이 아닌 발을 바라보아도 모든 이야기를 읽을 만합니다. 손과 발뿐 아니라, 눈을 읽어도, 어깨를 읽어도, 엉덩이를 읽어도, 머리카락을 읽어도, 안경을 읽어도, 손에 쥔 책을 읽어도, 손에 든 호미를 읽어도, 발에 꿴 신을 읽어도, 발가락에 낀 때를 읽어도, 온몸에 묻은 먼지와 때를 읽어도, 얼굴에 짓는 웃음과 눈물을 읽어도, 뒷모습을 읽어도, 앞모습을 읽어도, 우리는 늘 언제 어디에서나 수많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야기를 읽기에 사진이 됩니다. 이야기를 나누려 하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사진을 찾아 읽습니다. 이야기를 짓기에 사진을 찍는 사람이 되고, 이야기를 지어서 기쁘게 이웃과 나누려 하기에 ‘사진가’라는 이름을 아름답게 얻습니다.



.. 아름다운 손도 사랑이 식으면 폭력을 휘두르는 공포의 손으로 변하는 경우도 많다 ..





  사진을 찍는 사람은 무엇을 헤아려야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초점이나 셔터빠르기나 조리개값이나 빛값을 헤아려야 즐거울까요. 사진기에 눈을 박아 내 곁에 있는 이웃과 동무를 바라볼 적에, 사진가 마음에 ‘이웃을 아끼는 숨결’과 ‘동무를 사랑하는 넋’이 없다면, 사진기라는 기계를 손에 쥔 사람은 어떤 작품을 빚을까요.


  사진이 창작이 되려면, ‘남이 안 찍은 모습’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이 창작이 되려면, ‘남이 찍은 모습과 똑같지 않도록 살짝 바꾼 틀과 장면 연출’로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이 창작이 되려면, 사진에 ‘사진기를 손에 쥔 내 이야기’를 담고, ‘사진기를 바라보는 이웃과 동무가 살아온 이야기’를 싣되, 두 사람은 따사로운 사랑과 너그러운 믿음으로 어우러져야 합니다.


  공모전을 마음에 두고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전시회를 마음에 두고 사진을 만드는 사람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작품집을 내거나 문화재단 지원금을 마음에 두고 사진을 조합하는 사람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사진이 사진이 되도록 사진을 찍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진에 사랑을 담도록 마음을 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방통행으로 강요하는 사랑’이 아니라, 사진에 찍히는 사람이 너그러이 받아들이면서 서로 이웃과 동무가 될 수 있도록 따사로운 사진을 찍을 줄 아는 참다운 사랑을 먼저 가슴에 심은 뒤 사진기라는 기계를 들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민조 님이 선보이는 사진책 《손에 관한 명상》은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사진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찍을 모습은 대단한 작품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나(사진가)와 네(사진에 찍히는 이웃)가 모두 아름다운 사람인 줄 알면 됩니다. 나는 ‘사진가’이고, 너는 ‘모델’이나 ‘피사체’가 아닙니다. 사진에 찍히는 사람은 바로 ‘내 얼굴’입니다. 모델을 찍거나 피사체를 다루는 사진이 아니라, 구도와 장면을 연출하는 사진이 아니라, 주제를 일방통행으로 강요하는 사진이 아니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사진이 될 때에 비로소 ‘사진’입니다.


  《손에 관한 명상》 첫머리를 열면서 마지막을 닫는 사진은 아기와 어른이 서로 맞잡은 손입니다. 아기와 어버이일 수 있고, 아기와 아버지일 수 있으며, 아기와 할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한쪽이 어떤 어른이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다만, 두 사람은 ‘사진을 찍으려고’ 손을 맞잡지 않습니다. 아기한테 손을 내민 어른도, 어른 손에 제 작은 손을 맡긴 아기도, ‘사진 작품이 될 뜻’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오직 둘 사이에 사랑이 따스하게 흐르기에 손을 맞잡거나 맡깁니다.


  즐겁게 빚은 사진은 우리가 서로 나누는 즐거운 삶이 무엇인가 하는 실마리를 풀어 줍니다. 꾐수를 부려 빚은 사진은 우리 사이에 엉성한 울타리를 쌓고 마는 안타까운 실타래를 보여줍니다. 사진은 모든 실마리를 풀고, 사진은 온갖 실타래로 엉킵니다. 어느 길이 즐거울까요. 어느 길이 고단할까요. 우리는 서로 즐겁게 어우러지면서 살고 싶을까요, 아니면 우리는 서로 미워하거나 다투면서 고단하고 싶을까요. 사진기를 손에 쥔 손은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4347.12.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토닷 Photo닷 2014.12 - Vol.13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97



내가 지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

― 사진잡지 《포토닷》 13호

 포토닷 펴냄, 2014.12.1.



  사진을 찍다 보면 누군가 찍은 사진하고 내 사진이 비슷하거나 똑같을 수 있을까요? 어느 멋지거나 아름답거나 놀랍구나 싶은 곳에 찾아가서 사진을 찍는다면, 이 멋지거나 아름답거나 놀랍구나 싶은 곳에 나 아닌 다른 사람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서로 엇비슷하구나 싶은 사진을 찍을는지 모릅니다. 일부러 엇비슷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어쩌다 보니 엇비슷한 사진이 나올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찍은 멋지거나 아름답거나 놀랍구나 싶은 사진에서 몇 가지만 바꾸거나 손질해서 ‘다른 사진’이라고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달력 사진’이라는 말이 나돕니다. 달력에 나옴직한 사진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달력에 넣어 한두 달 동안 쳐다보는 사진이라면 ‘여느 사진’은 아니라 할 만합니다. 생각해 보셔요. 한 달이나 두 달 내내 똑같은 사진만 바라보아야 한다면 아무 사진이나 넣을 수 없습니다. 잘 찍은 사진이든 아름답다 싶은 사진이든 놀랍다 싶은 사진을 넣어야 할 테지요.


  그런데 ‘달력 사진’이라고 하면 몇 가지 틀에 얽매입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손길이나 숨결이나 마음이 드러나는 사진보다는, 달과 철에 따라 숲이나 시골이나 바다를 보여주는 사진이기 일쑤입니다. 보드랍게(자연스럽게) 흐르는 사진이 아니라 어떤 틀을 억지로 짜서 맞추는 사진이기 마련입니다. 우스갯소리처럼 ‘달력 사진 찍느냐?’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찍은 사진이 달력에 넣을 만하다면 여러모로 값있다 할 수 있으나, ‘달력에 넣을 만한 틀에 사로잡힌 사진’이라고 한다면 내 손길도 내 눈길도 내 마음도 제대로 담지 못한 사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잡지 《포토닷》 13호를 읽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누리면서 저마다 다른 눈길로 사진을 찍는 여러 사람 이야기를 읽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서 사진은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보다 자기 내면의, 내 안으로의 잠수를 의미해요. 조금 더 깊이 잠수할수록 더 깊은 골짜기의 감정을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26쪽/김정아).” 같은 이야기는 무엇을 말할까요. 나는 내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 사진을 가장 잘 찍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브레송을 흉내낸다면 ‘브레송을 흉내낸 사진’이 됩니다. 살가도를 흉내낸다면 ‘살가도를 흉내낸 사진’이 됩니다. 쿠델카를 흉내낸다면 ‘쿠델카를 흉내낸 사진’이 되어요. “이방인이 찍은 이방인, 아저씨(오형근)가 찍은 아줌마와 소녀와 군인은 우리 주위에 늘 있었으나 잘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오형근에 의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주체가 되었다(50쪽/최연하).” 같은 이야기는 무엇을 말할까요. 이방인이란 누구일까요. 한국말사전 풀이를 살피면 ‘이방인 = 외국사람’입니다. 오형근이라는 분이 찍은 ‘이방인’이라면, 너와 내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지 싶습니다.


  누가 누구를 찍든 너와 나는 다릅니다. 어버이와 아이도 다릅니다. 이웃과 동무 사이도 다릅니다. 두 사람이 아무리 한마음이라 하더라도 둘은 다른 목숨입니다. 다른 목숨은 서로 다른 눈길로 삶을 바라봅니다. 서로 다른 몸짓으로 삶길을 걷습니다. 어떤 사진가가 누군가를 찍었기에 ‘더 이방인스러운 사진’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를 찍더라도 ‘다 다른 사람 숨결과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밤에 하늘을 보면 까맣습니다. 밤에 둘레를 바라보면 새까맣습니다. “처음에는 컬러로 촬영했는데,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진이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했고 그나마 살아 있는 색상은 모두 파란색뿐이었다. 그래서 흑백으로 찍어 보고 싶었다. 흑백으로 바꾸고 나니 콘트라스트를 내 마음대로 바꾸는 것이 가능해졌고, 사람들이 헤엄치고 지나간 자리가 초현실적으로 보였다(71∼72쪽/웨인 레빈).” 같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밤에 둘레를 살피며 조용하거나 한갓진 길을 걷는다면 ‘까망과 하양으로 어우러진 누리’를 마주합니다. 밤하늘 별빛은 까망과 하양으로 빚은 아름다운 빛물결입니다.






  어느 곳을 바라보든 내가 바라봅니다. 어떤 사람을 바라보든 내가 바라봅니다. 나는 내가 바라본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는 내가 마주한 삶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버마 정부는 이를 묵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잔혹한 학살을 돕고 있다. 버마 정부는 로힝야 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저널리스트는 물론 외국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이들의 눈을 피해 촬영을 계속해 왔다. 그러다 몇 번 체포되기도 했는데 그러면 버마에서 추방당한다. 다행히 버마 경찰 안에도 온건파가 있어 무사히 풀려나기도 하지만(81쪽/수텝 크립사나바린).”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버마 정권’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누군가는 ‘미얀마 정권’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어느 한쪽에 서야 올바른 모습을 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버마’를 그리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독재이든 아니든 ‘미얀마’라는 새 이름이 붙은 나라에 녹아들며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정치권력은 다르지만 같은 하늘을 등에 지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그곳에서 수수하게 삶을 잇습니다.




  “일곱 살짜리 아들이 묻는다. 바닷가에서 잡아온 집게는 죽어서 어디로 갔느냐고. 아들의 생애 최초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변기에 버렸다고 답한다(97쪽/강홍구).” 같은 이야기를 읽다가 우리 집 아이를 떠올립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 ‘형이상학적 질문’을 했을까요? 이는 오로지 어버이 눈길이자 생각입니다. 아이는 그저 궁금해서 물을 뿐입니다. 어버이는 아이가 궁금해서 물은 말에 제대로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이가 궁금한 대목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그저 ‘궁금할’ 뿐이지만, 어버이는 ‘달리 보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사진을 찍는 눈길로 보자면, 사진은 늘 바라보는(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이와 어버이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니, 아이와 어버이는 똑같은 일을 겪어도 서로 다르게 움직이고 생각합니다. 강홍구라는 분은 강홍구 님 눈길대로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생각이 고스란히 강홍구 님 사진이 될 테지요.


  “늪에는 생명 탄생의 비밀이 숨어 있어요. 생명체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자연과 동화될 수 있는 터미널 같은 곳이죠. 황폐해진 도시를 벗어나 회색빛에서 녹색빛으로 장면전환을 하듯 죽음과 삶, 전쟁과 평화처럼 서로 상치되는 접경지대 같은 탈출구가 늪인 것 같습니다(106쪽/조성제).”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 늪을 바라보는 조성제 님 눈길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성제 님은 조성제 님 삶에 따라 늪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다른 사람 눈길이 아닌 바로 조성제 님 눈길입니다.





  이제 4대강사업은 엄청난 막개발이요 돈날림 막삽질인 줄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4대강사업을 밀어붙이던 지난날 이 4대강사업에 빌붙어 돈을 벌거나 이름을 얻은 이들이 무척 많습니다. 차윤정 같은 이들은 4대강사업에 한몸을 실으면서 냇물과 숲과 마을이 무너지는 일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은 지난날 ‘막삽질을 꼭 해야 냇물과 숲과 마을이 산다’는 말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똑같은 일을 놓고 누구는 왜 이렇게 보고 누구는 왜 저렇게 볼까요?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 하고 뻔히 알 수 있는 일이라는데, 왜 누구는 앞일을 내다보지 않거나 잘못 내다볼까요?


  삶이 다르기에 눈길이 다릅니다. 삶이 다르기에 ‘삶을 읽고 찍으며 헤아리는 마음’이 다릅니다.


  아주 마땅한 이야기인데, “뻘이 있는 어촌으로 사진 여행을 떠나려면 일출, 일몰 시간과 함께 썰물과 밀물 시간도 미리 알아두어야 합(128쪽/황성찬)”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미리 알아야 합니다. 바닷마을로 사진을 찍으려고 나들이를 간다면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무엇을 모르면 사진을 잘 못 찍을까요?




  스스로 생각해서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해서 알아낸 만큼 스스로 사진을 더 즐겁게 찍거나 더 엉성하게 찍습니다. 일본말을 모르는 채 일본에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과 일본말을 잘 익힌 채 일본에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얼마나 다를까요? 중남미에서 쓰는 말을 모르는 채 중남미에 가는 사람과 중남미에서 쓰는 말을 익힌 채 중남미에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얼마나 다를까요? 시골에 가서 사진을 찍으려 하면서 시골이 어떠한 곳인지 하나도 안 알아본 사람과 찬찬히 알아본 사람은 저마다 어떻게 다른 사진을 찍을까요?


  “누가 찍어도 사진일 때에는 사진입니다. 누가 찍어도 사진이 아닐 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름난 전시장에 작품을 걸거나 작품집을 책으로 묶어야 ‘작가’나 ‘프로’가 아닙니다.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고, 삶을 가꾸면서 이야기를 꽃으로 피울 때에 작가입니다(137쪽/최종규).”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입니다. 삶은 그저 삶입니다. 사랑은 그저 사랑입니다. 더 나은 사진이나 삶이나 사랑은 없습니다. 덜떨어지는 사진이나 삶이나 사랑은 없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일구는 삶만큼 사진이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어떤 사랑으로 삶을 일구느냐에 따라 내 사진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랑으로 하루를 짓는가요? 어떤 사랑을 담아 삶을 지어서 사진을 이루려는 생각입니까? 4347.1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