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카메라와 그녀의 계절 3
츠키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찾아 읽는 사진책 218



좋아하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는다

― 그녀와 카메라와 그녀의 계절 3

 츠키코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5.7.25. 4500원



  츠키코 님이 빚은 만화책 《그녀와 카메라와 그녀의 계절》(학산문화사)은 좋아하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는 푸름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면서 사진을 아주 좋아해서 아주 어릴 적부터 찍은 아이(유키)가 있고, 사진기를 늘 갖고 다니면서 무엇이든 찍는 아이한테 마음이 끌려서 이제 막 사진기를 손에 잡은 아이(미야마)가 있습니다. 사진이나 사진기나 사진찍기를 모두 잘 모르지만, 두 아이 사이에서 천천히 제 길을 걷는 아이(린타로)까지 모두 세 사람이 이야기를 이끕니다.



“여기서 싼 아파트를 빌려서, 이곳 사람이나 자연물을 찍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24쪽)


‘그렇게 많이 찍으면서, 남에게는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 외의 누군가에게 찍히는 걸 허락할 수 없다.’ (53쪽)



  사진을 오래 찍어 본 사람이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사진을 이제 막 찍는 사람이 사진을 못 찍지 않습니다. 사진을 오래 찍어 본 사람은 그저 사진을 오래 찍어 보았을 뿐입니다. 사진을 이제 막 찍는 사람은 이제 막 사진을 찍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사진을 잘 찍거나 못 찍는다는 매무새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찍으려 하는가를 알면 됩니다. 스스로 무엇을 바라보는가를 제대로 알 적에 사진을 제대로 찍어요. 스스로 무엇을 찍으려 하는가를 제대로 느낄 적에 사진을 제대로 찍지요.


  다시 말해서, 사진을 아무리 오래 찍어 보았다 한들, 스스로 무엇을 바라보는가를 제대로 모르는 채 사진기 단추만 누른다면, 누구 마음에도 와닿지 못하는 작품만 빚습니다. 아무리 값진 장비를 갖추어 사진을 찍는다 한들, 스스로 무엇을 찍으려 하는가를 제대로 마음에 세우지 않는다면, 아무 이야기도 없는 맨숭맨숭한, 이러면서 ‘그럴듯해 보이기만 하는’ 모습만 찍어요.



‘공기가 되고 싶다. 눈을 깜빡이듯 사진을 찍고 싶다. 아무것도 놓치고 싶지 않아. 나의 이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59쪽)


“찾았니? 뭔가. 찍고 싶은 걸.” (108쪽)


‘카메라를 든다. 린타로가 이쪽을 돌아봐 준다. 그걸 찍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히 든다.’ (120쪽)



  만화책 《그녀와 카메라와 그녀의 계절》에 나오는 유키는 오랫동안 사진을 찍기는 했으나 ‘좋아하는 사람’을 찍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틀림없이 좋아할 만한 사람을 찍은 사진이지만, 스스로 너무 높게 울타리를 세웠어요. 사진을 찍을 적에 ‘마음(감정)’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지요.


  이 만화책에 나오는 미야마는 사진기를 쥔 지 얼마 안 되었으나, 게다가 무엇을 찍으면 좋을는지도 아직 갈피를 못 잡았지만, 사진기를 손에 쥘 적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찍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고작 몇 장 안 찍어 본 미야마입니다만, 미야마가 찍은 사진은 늘 싱그럽게 살아서 움직이는 이야기요, 즐겁게 웃고 노래하는 이야기입니다.



‘언뜻 보기엔 사이좋고 훈훈한 풍경이지만, 두 사람 사이의 벽이, 언제나 안타까웠지. 그 벽만 없어지면, 얼마나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133∼134쪽)


‘그래도 유키가 필름에 집착하는 건 역시, 셔터의 무게, 집중력 같은, 디지털 카메라에는 없는 힘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145쪽)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와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사진강의를 오래 들어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이름난 사진가한테서 배운다거나, 이름난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심부름꾼 노릇을 해 보아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사진을 잘 찍고 싶다면 ‘사진으로 찍고 싶은 이야기’를 늘 마음에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제대로 알아야 하고, 스스로 좋아하는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채 사진을 못 찍지요.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기에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도 모르지요.


  사진은 ‘장비’나 ‘경력’이나 ‘졸업장’이나 ‘이름난 작가 문하생’ 따위를 내세워서는 도무지 못 찍습니다. 사진은 오로지 ‘내 마음으로 스며든 기쁜 이야기’를 가만히 마주하면서 반가이 맞아들이는 몸짓이 될 적에 찍습니다.



“아, 셀프타이머 쓸 줄 알게 됐구나.” “응, 맞아! 우리 둘이서 ‘교복’ 입은 걸, 찍어 두고 싶어서!” (156쪽)


‘지워지질 않아.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카메라를 써도, 나는 영원히 찍을 수 없는 사진.’ (172쪽)


“오늘은 카메라 안 가져왔어.” “응? 왜?” “왠지, 뭘 찍으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져서.” (179쪽)



  만화책 《그녀와 카메라와 그녀의 계절》에서 늘 사진기를 목걸이처럼 갖고 다니던 유키가 어느 날 사진기를 손에서 뗍니다. 스스로 무엇을 찍으면 좋을는지 알 수 없다고 털어놓습니다. 이 말을 들은 미야마는 날카롭게 따집니다. 너는 네 속마음을 감추기 때문에 네가 찍고 싶은 사람을 찍지 못한다고 외쳐요. 그러니까, 네가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참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마음을 열라는 뜻입니다. 네(유키)가 아직 마음을 열지 못하니까, 네가 찍고 싶은 사진을 못 찍을 수밖에 없다고 외치는 셈입니다.


  미야마라는 아이는 사진책을 읽은 적도 없고, 사진 수업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알지요. 사진은 작품이나 예술을 하려고 찍지 않는 줄 알지요. 사진은 공모전에서 상을 받거나 작품집을 내려고 찍지 않는 줄 알지요.


  사진은 왜 찍을까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사진은 누구하고 찍을까요?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찍히고 싶어서 ‘셀프타이머’를 배워서 함께 찍지요.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로 기쁘게 웃는 아름다운 사진을 얻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어서 고이 가꾸면 참말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로 밝게 노래하는 고운 사진을 빚습니다. 4348.11.3.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영수 : 꿈결 같은 시절
한영수 지음 / 한스그라픽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00



‘어린이 사진’은 ‘다큐 작품’이 아닙니다

― 꿈결 같은 시절

 한영수 사진

 한영수문화재단 펴냄, 2015.4.30. 4만 원



  한영수문화재단에서 두 권째 펴낸 한영수 님 사진책 《꿈결 같은 시절》(2015)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책 《꿈결 같은 시절》을 보면, 이 사진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강원도 아이나 경기도 아이도 있지만, 아무래도 서울 아이가 가장 많습니다. 서울에서도 물지게를 지고, 서울에서도 널뛰기를 하며, 서울에서도 얼음지치기를 합니다. 아이들은 어른을 도와 일도 할 뿐 아니라, 신나게 놀고, 마음껏 온누리를 두 발로 씩씩하게 밟으면서 자랍니다.


  1950∼60년대에 서울에서 흔히 만날 수 있던 아이들 모습이 사진책 《꿈결 같은 시절》에서 흐릅니다. 그런데 이 사진책은 1950년대나 1960년대가 아닌 201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옵니다. 2000년대나 1990년대에도 이 사진을 담은 사진책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삶》이라는 사진책이나 《내가 자란 서울》 같은 작은 책에 한영수 님이 찍은 어린이 사진이 더러 나오기는 하지만, 두 책 모두 어린이 사진을 차곡차곡 그러모아서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삶》이라는 사진책은 말 그대로 ‘삶’을 크게 아우르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내가 자란 서울》은 이 책에 글을 쓴 동화작가 이야기에 맞추어 몇 가지 사진을 보여줄 뿐입니다.


  한영수 님이 어린이를 찍은 사진은 왜 1960년대나 1970년대나 1980년대에 사진책으로 나오지 못했을까요? 왜 이만 한 사진을 눈여겨보거나 알아보거나 살펴보는 손길이 그동안 나타나지 못했을까요? 왜 1990년대나 2000년대에도 이들 사진을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하는 몸짓은 일어나지 못했을까요?





  가만히 보면 2010년대인 오늘날에도 ‘어린이 사진’을 제대로 들여다보거나 알아보는 비평가는 아주 드물거나 없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어린이를 찍는 사진’을 들여다보거나 알아보는 비평가도 드물지만, ‘어린이가 읽을 사진’을 헤아리거나 생각하는 비평가도 드뭅니다. 사회 문제나 정치 문제를 다루는 사진이 될 때에 비로소 ‘다큐멘터리’라고 여길 뿐, 어린이가 다녀야 하는 학교라든지 어린이가 늘 지내는 집이나 마을 이야기를 다룰 적에 ‘다큐멘터리’가 되는구나 하고 깨닫는 비평가는 참으로 드뭅니다.


  《멈춘 학교 달리는 아이들》 같은 사진책이 1992년에 나왔으나, ‘멈춘 학교’에서 고단한 아이들 모습을 살짝 그리는 데에서 그칠 뿐, 아이들이 마음껏 노는 즐거운 꿈까지 알알이 여미지 못했습니다. 1998년에 나온 《분교, 들꽃 피는 마을》은 시골마을 작은학교 어린이를 보여주기는 하되, 시골마을 어린이 삶까지 헤아리면서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2009년에 나온 《소꿉》이라는 사진책은 드디어 한국에서도 ‘노는 어린이’를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는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 될 만했는데, 이 사진책은 ‘아시아 어린이’만 보여줍니다. 이밖에 어린이를 주제로 삼아서 나온 사진책이 여러 권 더 있지만, 동심천사주의에 빠진 틀에서 못 벗어나기 일쑤였습니다. 어린이를 찍는 사진이라고 하면, 먼저 알록달록 예쁜 옷을 입히고, 놀이터나 꽃밭에서 놀거나 서도록 한 다음, 활짝 웃거나 병아리를 들여다보는 몸짓을 하도록 시키고서 찍기 일쑤예요. 시골 어린이를 사진으로 찍을 적에는 알몸으로 냇물이나 바닷물에 뛰어드는 모습을 찍기 일쑤이지요. 다들 하나같이 틀에 박힌 ‘어린이 사진’을 찍기만 하면서 ‘어린이가 누리는 삶’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한영수 님이 어린이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에서는 어떤 모습과 어떤 이야기가 흐를까요? 한영수 님은 ‘노는 어린이’하고 ‘일하는 어린이’를 나란히 찍습니다. ‘도시 어린이’하고 ‘시골 어린이’를 함께 찍습니다. 극장 앞에 있는 커다란 쇠울타리를 철봉 삼아서 노는 어린이를 찍고, 신문이나 책이나 껌을 파는 어린이를 찍습니다. 고무줄을 하는 어린이를 찍고, 그냥그냥 있는 어린이를 찍습니다. 그리고, 한영수 님이 찍은 어린이 사진에는 ‘어린이가 사는 터’가 잘 드러납니다. 어떤 집인지, 어떤 마을인지, 어떤 골목인지, 어떤 시골인지 하는 이야기가 환하게 드러나지요.





  1950∼60년대에 찍은 사진이니까 ‘일부러 흑백필름으로 골라서 찍은 사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요즈음도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하면 ‘흑백필름 사진’이어야 비로소 다큐사진이 되는 줄 잘못 아는 사진가와 비평가가 아직 제법 있습니다. 왜 흑백사진이어야 다큐사진일까요? 흑백사진은 그저 흑백사진입니다. 칼라사진은 그저 칼라사진입니다. 무엇보다도 ‘다큐 작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품고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다큐사진을 못 찍습니다. ‘다큐 작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품는 사진가는 ‘다큐 작품’을 만들 뿐입니다.


  《꿈결 같은 시절》에 나오는 어린이 모습은 ‘다큐 사진’도 아니고 ‘다큐 작품’도 아닙니다. ‘옛날 추억을 기록한 사진’도 아닙니다. 이 사진책에 흐르는 사진은 모두 한영수 님이 이녁 아이를 낳으면서 즐겁게 누리려는 삶을 그야말로 즐겁게 찍은 사진입니다. 내 아이를 바라보듯이 이웃 아이를 바라보는 사진입니다. 내 아이하고 동무할 이웃 아이를 마주하는 사진입니다. 지구별이라는 테두리까지 헤아리지 않더라도, 전국을 두루 헤아리지 않더라도, 서울 하늘에서만 해도 이렇게 수많은 아이가 수많은 모습으로 수많은 삶을 가슴에 안으면서 살아요.


  어느 날에는 웃고, 어느 날에는 웁니다. 눈물을 흘릴 때가 있지만, 이내 눈물을 씻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면서 놉니다. 맨발에 맨손이어도 흙을 뭉쳐서 소꿉을 짓습니다. 나물에 보리밥이어도 한 그릇 뚝딱 배부르게 먹고는 배가 꺼지도록, 아니 배가 꺼지고 나서도 신나게 뛰어놉니다. 제비랑 함께 놀고 박쥐하고 같이 놀아요. 아침을 제비와 함께 열고, 저녁을 박쥐랑 나란히 마무리하지요.





  한영수 님이 찍은 어린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흑백필름으로 찍은 결이지만 얼굴빛이나 목소리나 몸짓이 모두 잘 살아서 움직입니다. 필름으로는 까망과 하양 두 가지 빛깔로 그리는 이야기입니다만, 이 사진에 아로새긴 이야기는 온통 무지개빛으로 되새길 수 있을 만합니다. 포대기도 두루마기도 홑벌치마도 고무신도 모두 반들반들 예쁜 빛깔이 드러납니다. 판잣집도 흙길도 때 묻은 손도 모두 까무잡잡하면서 살가운 숨결이 배어납니다.



사진작가 한영수의 사진집을 시리즈로 출간한다는 계획은, 남겨진 필름과 밀착인화물을 처음 접한 이래 계속 생각해 온 것이지만, 막상 두 번째 사진집의 주제를 정하는 데에는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정한 것이 바로 ‘어린이’ 사진이다 … 이 사진들에 실려 있는 것은 아마도 지금 막 노년에 접어든, 재건의 시대를 거쳐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바로 그 세대들의 어린 시절일 것이다. (책머리에/한선정)



  1950∼60년대에 이 어린이 사진이 책으로 나오기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1970∼80년대에라도 ‘어린이’만을 헤아리는 사진을 그러모은 사진책이 한국에서 한 권쯤 제대로 나올 수 있었으면 한국에서 사진문화와 사진예술은 무척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풍경이나 산만 찍은 사진책이 아니라, 이렇게 아이들 목소리와 숨소리가 싱그러이 펄떡펄떡 피어나는 사진책이 1990년대나 2000년대라도 나올 수 있었으면, 다큐사진을 찍는다면서 ‘다큐 작품’만 만드는 요즈음 한국 사진가한테 따끔하면서 따사로운 한마디를 들려줄 만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어린이를 찍는 사진은 어렵지 않으면서 어렵습니다. 첫째, 어린이를 마주하는 어른으로서 ‘어린이 마음’이 되면 어린이 사진을 찍기란 어려울 일이 없습니다. 둘째, 어린이를 마주하는 어른으로서 ‘어른 생각’에 사로잡혀 아이들한테 반말만 찍찍 늘어놓고 이리 해라 저리 해라 시키기만 하면서 멋진 구도나 노출이나 풍경을 연출하려고 하면, 어린이 사진을 찍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놀도록 하면 아이들을 찍기는 아주 쉽습니다. 골목에 자동차가 싱싱 달리지 못하도록 막고, 자가용을 골목에 대지 못하도록 막기만 하면 돼요. 아이들이 골목길을 이쪽저쪽으로 100미터는 넉넉히 마음껏 내달릴 수 있는 터만 있으면 됩니다. 연줄을 잡고 달리면서 연을 하늘로 띄울 만큼 넉넉한 빈터가 있으면 ‘노는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기란 매우 쉽지요. 다음으로, 살림을 꾸리면서 아이들한테 잔소리나 꾸지람을 하지 않고 늘 웃고 노래하면서 심부름을 알맞게 시킬 뿐 아니라 아이한테 고마워 할 줄 아는 다소곳한 마음인 어른으로 지내면 ‘일하는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기란 참으로 쉽지요.


  아이들은 밥짓기나 비질이나 빨래도 참 좋아해요. 그러니 늘 소꿉놀이를 합니다. 아이들은 동생을 돌보거나 업기도 참 좋아해요. 그래서 놀이를 하면서 언제나 깍두기를 두어요. 아이들은 새로운 노래를 참 좋아해요. 대중가요나 뽕짝 같은 노래가 아니라, 어버이나 어른이 저희(아이)를 아끼면서 들려주려는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노래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웃으면서 부르는 노래를 귀여겨듣고는 따라 불러요. 노래하면서 춤추는 아이들이요, 웃으면서 뛰노는 아이들이며, 뛰놀면서 착하고 참다운 넋으로 거듭나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도 지게를 잘 집니다. 아이들도 호미나 낫을 잘 다룹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머잖아 나락도 손수 심고 나무도 손수 베어 집이랑 옷도 손수 짓겠지요. 어버이가 물려주는 깊은 사랑을 가슴으로 담아서 새로운 삶을 지어요. 어린이를 찍는 사진이라고 한다면, 어버이가 아이한테 온 삶을 사랑으로 물려주듯이 찍는 사진입니다. ‘웃으며 노는 모습’을 찍으면 되는 어린이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어른으로서 이 아이들이 ‘나(어른)한테서 물려받을 사랑’을 느끼면서 마음껏 뛰놀거나 기쁘게 심부름하는 하루를 찬찬히 담아낼 때에 아름다운 어린이 사진입니다.


  사진책 《꿈결 같은 시절》은 왜 “꿈결 같은 시절”을 말할까요? 사진에 찍히는 아이들이 사진을 찍는 어른을 믿고 따릅니다. 사진을 찍는 어른이 사진에 찍히는 아이들을 믿고 따릅니다. 아이들은 사진가 아저씨를 따라서 놀지 않습니다. 저희 놀고픈 대로 놉니다. 사진가 아저씨는 아이들 놀이에 맞추어 움직이면서 신나게 웃는 낯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일하는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적에는 사진가 아저씨도 차분하면서 고요한 몸짓으로 정갈하게 손을 놀려서 사진 한 장 살그마니 찍었을 테지요. 일하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거룩하면서 놀랍고 애틋한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사진가 아저씨 가슴이 찡하게 울렸을 테고, 이 울림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옮겼으리라 느낍니다.


  이리하여, 한영수 님이 어린이를 찍은 사진을 그러모은 《꿈결 같은 시절》은 ‘다큐사진’이 아닙니다. 그저 ‘어린이 사진’입니다. 어린이가 누리는 삶을 찍은 사진입니다. 어린이가 스스로 사랑하면서 마음껏 뛰놀거나 기쁘게 일하던 하루를 고맙게 마주하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앞으로 한국 사회 곳곳에서 ‘작품 만들기’가 아니라 ‘삶짓기’와 ‘사랑짓기’를 하는 몸짓과 마음으로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사진을 찍는 어른(사진가)이 늘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티없이 맑은 눈빛’을 찾아서 동남아시아나 남미나 티벳이나 먼먼 지구별 두멧시골 나라로 찾아갈 생각은 좀 내려놓고, 바로 이곳 한국에서 이 나라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터전부터 함께 가다듬고 마련하는 몸짓으로, 이 나라 아이들하고 함께 실컷 웃고 뛰놀려는 사랑으로 사진을 찍는 착한 어른(사진가)이 나타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9.10.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쿄 셔터 걸 1
키리키 켄이치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01



무엇을 왜 사진으로 찍으려 하는가

― 도쿄 셔터 걸 1

 켄이치 키리키 글·그림

 주원일 옮김

 미우 펴냄, 2015.7.30. 8000원



  한국에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으나, 어떤 사진을 왜 찍어야 하는가를 헤아리는 사람은 뜻밖에 매우 드뭅니다. 값진 사진기와 장비를 갖춘 사람은 무척 많지만, 이 사진기와 장비로 어떤 사진을 어떻게 찍고 읽는가 하는 대목을 슬기롭게 살피는 사람은 뜻밖에 아주 드뭅니다.


  가만히 보면, 한국 사회에서 ‘사진읽기·사진찍기’를 차근차근 이야기하거나 나누는 자리는 매우 드물어요. 학교나 강단에서도 ‘사진’을 알뜰살뜰 가르치거나 배우는 자리는 아주 드뭅니다.


  이른바 ‘이론 교육’은 있고, ‘잘 찍는 사진 소개’는 있으며, ‘공모전에 뽑히기’라든지 ‘전시회 열기’라든지 ‘사진 작품 팔기’는 있지만, ‘사진읽기·사진찍기’라든지 ‘사진 이야기’는 없다시피 합니다.



피사체는 흔히 볼 수 있는 도쿄 거리.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걷기만 해도 생각지 못한 만남과 놀라움이 있다. (10쪽)


내 카메라는 도쿄에 흐르는 현재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다. (14쪽)



  켄이치 키리키 님이 빚은 만화책 《도쿄 셔터 걸》(미우,2015) 첫째 권을 읽습니다. 고등학교 사진부 학생들이 도쿄 시내 곳곳을 거닐면서 ‘두 다리로 느끼는 이웃 삶’을 이야기하고, ‘머리에 넣는 지식보다는 몸으로 마주하는 삶’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느끼고 헤아리는 삶을 ‘사진으로도 넌지시 옮기는 즐거움’을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 만화책은 그림결이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사람들 얼굴이 거의 똑같습니다. ‘인체 비례’도 썩 잘 그리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도쿄 시내 구석구석’을 꼼꼼히 그려서 보여주려는 뜻인 만화책이기에 ‘인물 그림’은 뒤로 처졌구나 싶기도 합니다. ‘만화책으로 사진을 이야기하기’에 눈길을 맞춘 작품인 만큼 ‘인물 데생’에는 마음을 덜 기울였구나 싶기도 해요.


  어느 모로 본다면, 만화책에 나오는 그림은 좀 못 그려도 될 수 있습니다. 그림은 뛰어나지만 이야기가 없으면 어떤 작품이 될까요? 그림결은 훌륭하지만 이야기에 아무런 알맹이가 없이 재미조차 없으면 어떤 작품이 될까요?


  ‘사진을 이야기하는 만화책’이라는 얼거리를 헤아려 봅니다. 사진을 찍을 적에는 ‘사진을 잘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 찍은 사진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이야기가 깃들지 않으면 부질없어요. ‘사진 묘사’가 훌륭하다든지, ‘황금비율을 맞추었다’든지 ‘색감이나 비례나 콘트라스트나 이것저것 멋지다’든지 하더라도, 이 사진 한 장에 이야기가 없다면, 이런 사진은 더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요절한 위대한 작가의 모습은 이제는 사진에 담을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남겨진 작품 속에서 언제나 그와 만날 수 있다. (34쪽)


미하루는 그날 표정 중 제일 기쁘게 웃으며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40쪽)



  안 흔들리고 찍은 사진이기에 ‘좋지’ 않습니다. 안 흔들리고 찍은 사진은, 말 그대로 ‘안 흔들린 사진’입니다. 초점이 잘 맞은 사진도 그저 ‘초점이 잘 맞은 사진’입니다.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아주 쉽습니다. 내가 즐겁게 여기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으면 됩니다. 사진을 왜 찍어야 할까요? 아주 쉽지요. 내가 기쁘게 사는 모습을 그야말로 기쁘게 웃고 노래하기에 이 기쁨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즐거움을 사진으로 담을 적에는 ‘좀 흔들린다’든지 ‘초점이 살짝 어긋났다’든지 ‘색감이 좀 처진다’든지 ‘구도가 엉성하다’든지 하더라도 다 괜찮습니다. 즐거움을 담았으니까요.


  기쁨을 사진으로 옮길 적에도 이와 같아요. 기쁜 이야기가 흐르는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럴듯해 보인다거나 멋져 보여야 하지 않습니다. 돋보인다거나 대단해 보여야 하지 않습니다.



“내 사진은 안 돼. 조금 세련되지 못하다고 할까. 투명감이 떨어진다고 할까. 찍고 싶은 순간의 공기를 담을 수가 없어.” “라이카를 사면 찍을 수 있을지도? 키무라 이헤이처럼.” “고등학생한테 그런 돈이 어딨어. 가끔 생각해. 좋은 사진이란 대체 뭘까 하고.” “음, 정해진 답이 없는 게 아닐까? 난 이렇게 생각해. 카메라는 ‘신의 눈’이라고. 하늘의 색, 나무의 흔들림, 철새의 무리, 길을 걷는 사람들 표정, 어디를 어떤 각도에서 찍어도 거기에는 반드시 빛이 들어가고 생명의 흔적이 있어.” (75∼76쪽)



  문학상을 타려는 뜻으로 문학을 한다면 재미있을까요? 졸업장을 따려는 뜻으로 학교를 다닌다면 재미있을까요? 공모전에서 뽑히려는 뜻으로 사진을 찍는다면 재미있을까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은 ‘남이 보아주라’는 뜻으로 일구지 않습니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내가 스스로 다시 보고 또 보고 새로 보고 자꾸 보는 즐거움’을 누리려고 일굽니다.


  내가 쓴 글을 내가 새롭게 읽으면서 스스로 즐겁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을 내가 새롭게 바라보면서 스스로 즐겁지요. 내가 찍은 사진을 내가 새롭게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즐거워요.


  남한테 보여주려고 찍는 사진이 아니라, 내가 다시 보고 새롭게 보려고 찍는 사진입니다. 그러니까, 사진 좀 ‘잘 찍었다’고 해서 자랑할 일이 없습니다. 사진 좀 ‘못 찍었다’고 해서 서운해 하거나 아쉬워 할 일이 없습니다.



“스카이트리 건설에 따른 재개발로 풍경이 점점 변하고 있으니까, 들를 때마다 꼼꼼하게 촬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 그래서 이건 나 나름대로 남기는 마을의 기록이야.” (87쪽)


상반된 음과 양, 빛과 그림자를 통해 보이는 세계. 마치 내가 이제까지 몰랐던 오토나시 선생님의 또다른 모습과도 같았다. (118쪽)



  만화책 《도쿄 셔터 걸》에 나오는 고등학교 사진부 학생은 사진을 왜 찍을까요? 바로 ‘사진을 좋아하는 내 눈길로 내 삶을 담으려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바라보아 주는 모습이 아닌 ‘내가 바라보는 내 고장’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이 훌륭하다고 북돋아 주는 모습이 아닌 ‘내가 스스로 가꾸는 내 보금자리와 마을 이야기’가 흐르는 모습입니다.



“난 내가 가진 물감으로 도저히 하늘의 파란색과 나뭇잎의 녹색을 제대로 칠할 수 없어서 화가가 되는 건 무리라고 포기했어.” “딱히 하늘이 파란색으로만 되어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건 너 스스로가 무의식중에 선택한 거야.” (163쪽)



  사진은 잘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말솜씨는 훌륭해야 하지 않습니다. 시험점수가 높게 나와야 하지 않습니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되거나 시장·군수 같은 자리에 서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여기에 있으면 됩니다. 그저 나를 사랑하면서 삶을 가꾸면 됩니다. 그저 오늘 하루를 새롭게 맞이하면 됩니다.


  어떤 사진기를 써야 할까요? 어떤 사진기라도 다 되지요. 값진 사진기를 쓰고 싶다면 값진 사진기를 쓰면 됩니다. 가벼운 사진기를 쓰고 싶다면 가벼운 사진기를 쓰면 돼요.


  어떤 것을 찍어야 할까요? 어떤 소재나 주제라도 다 됩니다. 스스로 마음에 드는 소재와 주제를 찾으면 됩니다. 스스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자리에서 즐겁게 마주하는 소재나 주제라면 모두 다 사진으로 담을 만합니다. 남들이 많이 찍는 소재나 주제라도 됩니다. 남들이 아무도 안 찍는 소재나 주제라도 되지요. 가리거나 따져야 할 것은 없지만, 꼭 한 가지만 가리거나 따지면 됩니다. ‘너, 이 사진을 찍어서 즐겁니?’ 하고 물으면 돼요. ‘나, 이 사진을 찍으면서 즐거웠나?’ 하고 물으면 됩니다.



“카메라나 렌즈도 중요하지만 포트레이트를 찍을 때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상대와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취해 그 사람 본연의 모습에 되도록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 (177쪽)



  이야기가 흐르기에 사진입니다. 이야기를 빚기에 사진입니다. 이야기를 나누기에 사진입니다. 이야기가 새록새록 넘치기에 사진입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있기에 사진입니다. 모든 사진은 이야기입니다. 모든 책도 이야기요, 모든 글과 그림도 이야기예요. 모든 춤과 노래도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누리는 삶은 저마다 다르면서 새롭고 즐거운 이야기입니다.


  사진은 이야기를 찍습니다. 사진은 삶을 찍습니다. 사진은 사람을 찍습니다. 사진은 사랑을 찍습니다. 사진은 바로 내가 나를 찍는 즐거운 길입니다. 4348.10.10.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비평/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량리 588 - 조문호 사진집 눈빛사진가선 11
조문호 지음 / 눈빛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216



이웃을 생각하는 사진 한 장

― 청량리 588, 1984∼1988

 조문호 사진

 눈빛 펴냄, 2015.2.21. 12000원



  한국에는 “꿈꾸는 카메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다큐영화 〈사창가에서 태어나(Born Into Brothels: Calcutta's Red Light Kids),2004〉가 있습니다. 이 다큐영화는 인도 캘커타에 있는 사창가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창가에 ‘몸 파는 가시내’만 있지 않다는 대목을 보여주고, 사창가에 ‘몸 사는 사내’만 드나들지 않는다는 대목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다큐영화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짓는 삶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스스로 새로 가꾸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마을’을 보여주지요. 사람이 사는 마을, 사람이 사랑하는 마을, 사람이 꿈꾸는 마을을 보여주요.


  그러고 보면, 이 다큐영화를 한국말로 옮기면서 “꿈꾸는 카메라”로 새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어른들한테서는 꿈이 사라지거나 아스라하지만, 아이들은 꿈을 꾸거든요. 아이들은 새로운 마을을 꿈꾸어요. 아이들은 새로운 학교와 어른과 이웃을 꿈꾸어요. 아이들은 욕하지 않고 술 퍼마시지 않으며, 아이들을 안 때리는 어른들을 꿈꿉니다.


  다큐영화 〈사창가에서 태어나〉에 앞서 ‘마을 이웃’으로서 ‘사창가 사람’을 마주하려고 했던 사진가나 영화가는 있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창가’는 어느 나라에서나 ‘불법’이고(불법이 아닌 나라도 몇 있습니다만), 몸을 사고파는 일을 ‘합법’으로 여기면서 ‘직업 칸’에 적을 수 있는 나라는 없다시피 하거든요. 그런데 문학이나 영화에서는 ‘몸을 사고파는 사람’ 이야기를 자주 다룹니다. 불법인 이야기는 문학이나 영화에서 대단히 자주 나옵니다. 이와 달리 사진이나 영상으로 ‘불법 사창가’를 찍거나 기록하는 일은 몹시 어렵습니다. 말 그대로 불법이니까요.



비록 몸 파는 창녀일지라도 하나의 직업인으로 보아 주도록 사회의 인식을 바꿔 보자고 설득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인권을 되찾자는 데 공감해 사진작업에 많은 힘을 보태 주기도 했다. 동등한 사람으로 봐 주는 깨어난 세상을 바라며 4∼5년 동안 뛰어다녔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실패했다. 편견은 보기보다 완강했다. (머리말)





  사진을 찍는 조문호 님은 《청량리 588, 1984∼1988》(눈빛,2015)이라는 사진책을 선보입니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사진을 찍었고 1990년에 전시회를 열기도 했지만, 사진책은 201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선보입니다.


  1988년이라는 올림픽 언저리에는 이런 책이 나오기 어려웠겠지요. 올림픽이 지난 뒤에도 군사독재 정치권력은 그대로 있었으니 이러한 사진책이 한국에서 나오기란 그야말로 어려웠겠지요.


  그렇지만 눈길을 넓혀서 생각해 보면, 사창가를 바라보는 사람들 눈높이는 언제나 한쪽으로 굳어집니다. 사창가는 ‘사창가’라는 곳이요, 이곳에 있는 사람도 나와 똑같은 사람입니다만, 이 대목을 살피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아니, 사회는 사람들이 ‘편견과 선입관’으로 사창가를 바라보도록 내몹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평화롭거나 평등할 수 있는 터전이 되는 마을로 나아가는 사회가 아니라, 힘과 돈으로 사람을 억누르거나 짓누르는 사회가 됩니다.


  한번 거꾸로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사창가 아가씨’나 ‘사창가 아줌마’가 ‘사진작가’를 기록하거나 촬영을 한다고 한다면 어떠할까요? 사진작가는 사창가 아가씨한테 어떻게 보일까요? 그리고, 사창가 아가씨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사진으로 기록한다고 하면 어떠할까요? 사창가 아줌마가 바라보는 시장님이나 군수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창가 아가씨가 바라보는 군대는 어떤 모습일까요? 사창가 아줌마가 바라보는 시골이나 숲이나 바다는 어떤 숨결일까요?


  사진책 《청량리 588, 1984∼1988》은 서울 청량리 언저리에서 ‘몸을 파는 일’을 하는 가시내 삶자락 가운데 한 가지를 보여줍니다. 몸을 팔려고 ‘가게 앞’에 서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몸을 팔려고 ‘가게 안’에서 몸을 꾸미거나 화장을 하거나 옷을 갖춰 입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몸을 팔려고 ‘가게 안’에서 옷을 벗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밥을 먹으려고 연탄불을 지피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고단한 하루 일을 마치고 달게 잠든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가게 앞’을 빗자루로 정갈하게 쓸고 치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사진책 겉에 ‘청량리’나 ‘588’이라는 숫자가 없다면, ‘이런 이름’이 없이 사진만 흐른다면, ‘뭔가 다른’ 옷차림이나 ‘어쩐지 다른’ 길거리 모습을 담은 사진이 없다면, 이 사진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내 모습’이거나 ‘이웃 모습’이거나 ‘동무 모습’입니다. 그저 수수하게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차근차근 돌아볼 노릇입니다. 왜 ‘성매매’는 불법일까요? 사람을 바보로 갉아먹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며, 사람을 돈으로 사고팔아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사람을 괴롭히거나 휘둘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매매업소는 버젓이 있습니다. 게다가 성매매업소를 드나드는 사람은 ‘수수한 여느 사람’을 비롯해서 ‘정·관계’에서 굵직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까지 두루 있습니다. 그리고, 성매매업소를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사내’이지요. 돈이 있거나 힘이 있는 사내가 성매매업소를 드나듭니다. 성매매업소를 차리거나 성매매업소로 돈을 버는 사람도 하나같이 ‘사내’입니다. 사내들은 권력을 두 손에 거머쥐면서 가시내를 벼랑에 내몰지요. 사내들은 가시내를 발 밑에 두면서 마음대로 주무르지요. 이러면서 합법이니 불법이니 하고 입으로만 떠들고, 이 사회에 평등도 평화도 민주도 자유도 제대로 뿌리내리는 일에는 마음을 쏟지 않습니다.



1990년 2월, 그동안 찍어 온 사진들을 모아 전시회를 가졌으나 주인공인 그녀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니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언론은 사람 대접을 받게 해 달라는 그녀들의 애끓는 목소리보다 매춘이란 호기심에 무게를 둔 선정적인 나팔을 일제히 불어 재꼈다. (머리말)





  우리 집 여덟 살 큰아이가 저녁에 불쑥 “아버지, 밥이 왜 이리 늦어요?” 하고 묻습니다. 낮에 자전거를 타고 바깥마실을 다녀온 뒤 아이들을 씻기고 밥을 차리고 이것저것 바쁘게 움직이는데,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씻겨 주고 입혀 준 뒤에 느긋하게 밥상맡에 앉아서 만화책을 보고 놀다가 문득 한 마디를 합니다. 나는 하하하 웃고는 아주 즐겁게 아이를 타일렀습니다. 여덟 살 아이가 톡 터뜨린 말이 재미있고 즐거워서 웃었습니다. 더욱 신나게 밥을 지어서 얼른 마무리지었어요. 제 어버이는 바깥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1초도 쉴 겨를이 없이 이 살림 저 집일을 보듬으면서 밥을 차리는데, 아이로서는 배가 고프니까 배고프다는 말이 나올밖에 없을 테지요.


  아이들이 터뜨리는 말은 참말 언제나 재미있으면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사랑스럽지요. 모든 어른은 아기로 태어나서 아이로 자랍니다. 아기이지 않은 어른은 없습니다. 아이로 자라지 않은 어른도 없어요. 사진을 찍은 할아버지도 아기로 태어나서 아이로 살았습니다. 사진에 찍힌 풋풋한 가시내도 모두 아기로 태어나서 아이로 살았어요.


  사랑을 받으며 태어난 이웃입니다. 사랑으로 만나서 이 땅에 새롭게 태어난 숨결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자라서 오로지 사랑으로 꿈을 키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 나라에는 사랑이 아닌 돈과 힘 따위로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거나 부려먹거나 휘두르는 제도나 가게가 있어야 할까요? 왜 이 나라에는 아름다운 평화나 평등은 좀처럼 자리를 잡기가 어려울까요?


  가까운 곳을 둘러봅니다. 우리 둘레에 흔히 있는 학교만 보아도, 어느 학교이든 대학입시를 맨 앞에 둡니다. 대학입시에서도 서울에 있는 몇몇 대학교에 들어가도록 닦달합니다. 아이들한테 꿈이나 사랑을 가르칠 수 있는 넉넉하고 느긋한 학교는 매우 드뭅니다. 회사나 공공기관이나 공장도 엇비슷합니다. 어느 곳에서나 성과나 성적이나 실적을 외칩니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하고,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며, 성장률은 더 높아야 한다고 외쳐요.


  아이들은 놀면 안 될까요? 아니, 아이들은 놀면서 자라야 하지 않을까요? 초등학생뿐 아니라 중학생하고 고등학생도 틈틈이, 또는 자주, 아니 날마다 몇 시간쯤 느긋하게 놀면서 즐거운 나날을 누려도 되지 않을까요? 어른들도 빡빡한 일정에 맞추어 쳇바퀴처럼 돌지 말고, 느긋하면서 넉넉하게 삶을 지을 말미를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놀다 가세요∼” 거짓 사랑을 구걸했지만 지나치는 이의 반응은 차가웠다. “야! 니가 좋아서 잡는 줄 아니, 돈이 좋아 잡는다.” 체념 섞인 그녀의 절규가 듣는 이의 가슴을 더 아프게 한다. (머리말)





  내 한몸 먹고사는 일이 걱정없다면 몸을 팔아야 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 식구 먹고사는 일이 근심스럽지 않다면 몸을 팔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 집 여덟 살 아이가 나한테 불쑥 한 마디를 했듯이, 나도 누군가한테 불쑥 한 마디를 하고 싶습니다. “전투기 한 대만 안 사도 먹고사는 걱정을 안 할 사람이 확 줄 텐데?” 한 마디를 더 하고 싶습니다. “잠수함 한 대만 안 사도 먹고사는 걱정을 안 할 사람이 엄청나게 줄 텐데?”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원자력 발전소만 안 지어도 이 나라에 굶거나 가난한 사람이 몽땅 사라질 텐데?”


  나한테 전쟁무기가 없어도 너한테 전쟁무기가 있으면 무서우니까 전쟁무기를 너보다 내가 더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권력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치권력자한테 따져야 합니다. ‘이봐, 정치권력자야! 너희는 평화를 지키도록 그 자리에 있지, 전쟁무기를 만들라고 그 자리에 있지 않잖아? 우리한테도 저쪽한테도 전쟁무기가 다 함께 없어서 다 함께 평화로운 길이 되도록 네가 정치를 제대로 해야 하지 않아?’ 하고 따져야 합니다.


  나는 너한테 사랑을 말할 수 있어야 사랑스럽습니다. 너는 나한테 사랑을 노래할 수 있어야 사랑스럽니다. ‘거짓 사랑’도 아니고 ‘몸 섞어서 돈 주고받기’도 아닌 ‘서로 아끼는 아름다운 삶’이 될 때에 비로소 ‘사랑’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습니다.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놀고, 그야말로 거리낌이나 스스럼이 없이 서로 아끼고 돌보는 따사로운 마음으로 놀며,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로 꿈을 지을 수 있기를 빌어요. 우리는 모두 꿈꾸는 사람이 되고, 꿈꾸는 사진기를 손에 쥐고, 꿈꾸는 이야기를 오순도순 주고받을 수 있기를 빌어요. 사진이 노래가 되고, 노래가 사진이 되고, 삶이 노래가 되고, 노래가 삶이 되고, 이리하여 시나브로 사진도 노래도 삶도 모두 곱게 사랑이 되는 기쁜 지구별이 될 수 있는 꿈을 가슴에 품어요. 해님이 온 숲에 모든 풀하고 나무를 골고루 자라도록 비추듯이, 사랑이 온 지구별에 골고루 깃들어서 모든 사람이 기쁘게 웃는 삶을 꿈으로 꿉니다. 4348.10.7.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토닷 Photo닷 2015.9 - Vol.22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215



우리가 사진을 ‘읽을’ 때는 언제일까

― 사진잡지 《포토닷》 22호

 포토닷 펴냄, 2015.9.1. 1만 원

 정기구독 문의 : 02-718-1133



  즐거울 때에 사진을 즐겁게 읽습니다. 즐거운 날에는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면서 즐거움이 새롭게 샘솟습니다.


  고단할 때에 사진을 고단하게 읽다가, 어느새 고단함을 가만히 씻습니다. 즐거운 날에는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면서 더욱 즐거운 마음이 된다면, 고단한 날에는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동안 어느새 고단함을 녹입니다.


  옛말에 기쁨은 곱절로 북돋우고 슬픔은 반토막으로 나눈다고 했습니다. 살가운 곁님이나 동무나 이웃은 기쁨을 한결 따스하게 북돋웁니다. 이러면서 슬픔은 나누어 받으면서 너그러이 달래지요.


  마음이 아프다든지 일이 힘들다든지 살림이 팍팍할 적에는 언제나 아이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내가 찍은 우리 아이들 사진은 나한테 새롭게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 사진에서 웃는 아이들은 늘 나더러 웃으라고 속삭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사진에서뿐 아니라 바로 내 곁에서 늘 웃습니다.



인천 이외의 지역도 찍었지만 개인적으로 재미가 없었다. 인천 만수동을 비롯한 주택지역은 예상치 못했던 장면들을 불쑥불쑥 마주하게 되면서 찾아내는 재미를 느꼈다. 또한 그 모습 자체도 제멋대로라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서울 도심에서는 어느 정도 찍다 보니 질려 버렸다.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조경인데다 지속적인 관리를 받고 있어 몇 가지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32쪽/유리와)


작업 과정 자체가 퍼포먼스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영상으로 기록도 하고 싶었지만, 예산과 인력의 부족 문제로 실행하진 못했다. (43쪽/임형태)



  사진잡지 《포토닷》 22호(2015년 9월호)를 읽으며 우리가 사진을 읽을 때는 언제일까 하고 돌아봅니다. 그러니까 ‘사진찍기’ 말고 ‘사진읽기’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그야말로 누구나 사진을 찍어요. 전문가나 작가뿐 아니라 ‘안 전문가’도 사진을 찍습니다. ‘취미’로도 사진을 찍고, 전문가도 아니요 취미도 아니라 하더라도 사진을 찍어요. 이를테면 시골 할매가 이녁 손자를 손전화로 찰칵 찍은 뒤 액정 화면으로 담습니다. 한 해에 두 차례 있는 큰 명절에만 손자를 만나더라도, 한 해에 두 차례 사진을 찍지요. 볼 때마다 새삼스레 크는 손자를 손전화로 찍는 시골 할매는 무척 많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시골 할매가 ‘도시에 사는 손자’를 그리면서 찍은 ‘손전화 사진’을 죽 그러모아도 무척 재미난 사진전시가 되리라 느낍니다.


  아무튼, 사진찍기는 오늘날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사진을 안 찍는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작가’나 ‘사진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동강국제사진제에서 ‘동강사진상’ 수상자를 기념하는 정주하 작가의 전시장에서는 관객들의 다양한 물음들이 제기됐다. ‘왜 찍었을까, 무엇을 얘기하려는 것일까, 어떻게 봐야 할까…….’ 상동의 질문들은 현대미술을 다룬 전시장에서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질문들이다. (50쪽/최연하)


작가들은 관람객들이 현대미술에 대해 문외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볼멘소리를 하겠지만, 실상은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다. 어떠한 대상을 재현하더라도 그것에 ‘예술’이라는 이름표만 붙여 주면 된다는 이들의 안일한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 한마디로 사진은 마음만 먹으면 작가 행세를 할 수 있는 가장 ‘만만한’ 수단이 되어 버렸다. (109쪽/장정민)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면, 누구나 사진을 읽을까요?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누구나 사진을 읽을 수 있을까요?


  쉬우면서도 어려운 물음이라 할 텐데,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면 누구나 사진을 읽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누구나 사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전문 사진가만 찍는 사진이 아니듯이, 전문 비평가만 읽는 사진이 아닙니다. 전문 사진가만 값비싼 장비를 써서 찍어야 하는 사진이 아니듯이, 전문 비평가만 서양 철학이나 사상을 끌어들여서 읽어야 하는 사진이 아닙니다.


  시골 할매가 이녁 손전화로 손자 사진을 찍듯이, 또 시골 할매가 손전화를 켤 적마다 이녁 손자를 손전화 화면에서 보듯이, 우리는 누구나 ‘사진찍기’하고 ‘사진읽기’를 늘 함께 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새롭게 하나 물어 볼 노릇입니다. 사진잡지 《포토닷》 22호에서 최연하 님이 쓴 사진비평에 나오는 말처럼, 전시장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왜 찍었을까, 무엇을 얘기하려는 것일까, 어떻게 봐야 할까…….’ 하고 묻는다면, 전문 사진가와 전문 비평가는 ‘전문가 아닌 여느 사람’한테 사진읽기하고 사진찍기를 어떻게 이야기할 만할까요? 우리는 언제 사진을 찍고 언제 사진을 읽을까요?



별천지다. 찍고 싶은 장면들이 너무 많았지만 원칙적으로 내부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다. 걸리면 벌금을 내고 우리 같은 비정규직은 바로 해고다. 거대한 작업 현장에서 똑같은 작업복을 입고 온몸에 연장을 차고 마스크를 쓴 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폐쇄된 군대나 교도소를 떠올리게 한다. 길게 줄을 서서 2층으로 올라가는 사진이 대표적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 앞에 선 줄이다. 20분을 줄을 서서 기다려 15분간 밥을 먹고 다시 작업장으로 가는 데 20분이 걸린다. (75쪽/변해석)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습니다. 2015년 최민식 사진상 특별상을 받은 변해석 님이 ‘조선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동무를 사진으로 찍듯이, 참말 누구나 어디에서나 언제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헤아릴 노릇입니다. 조선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하고 정규직 노동자를 찍은 사진을 볼 사람들은 이 사진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변해석 님이 찍은 사진을 보면 ‘못 알아보’거나 ‘못 알아차리’거나, ‘왜 찍었을까?’ 하고 물을까요? 아니면, 사진을 보는 동안 ‘이래서 찍었겠네’ 하고 느끼거나 이 사진이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를 곧바로 고스란히 알아챌까요?




전세계 곳곳에서 초대받은 사진 관계자들은 아침마다 란린거 호텔에서 조식을 먹으며 자유분방하게 서로를 소개하고 교류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커다란 전시장을 하나 빌려놓고 공무원 중심의 개막식과 테이프 커팅 세레머니 이후에 뒷풀이를 하고 헤어지는 폐쇄적인 한국의 사진축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90쪽/강제욱)



  한국은 아직 ‘사진 후진국’입니다. 번쩍거리는 장비를 갖춘 사람들이 많은 한국이지만, 한국은 아직 사진 후진국입니다. 작가로 뛰는 사진가가 제법 많고, 사진전시가 전국 곳곳에서 다달이 꽤 많이 열리지만, 한국은 아직 사진 후진국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전시가 제법 많다고 하지만 막상 사진책은 한 달에 몇 권 못 나옵니다. 사진책이 어쩌다가 한 권 나와도 잘 안 팔립니다. 전문 사진가는 전문가답게 서양 철학과 이론에 맞추어 이녁 사진을 해석하거나 비평하는 길로 접어듭니다. 젊은 사진가는 젊은 사진가답게 미국이나 유럽에서 새롭게 떠도는 흐름에 발맞추어 ‘사진기라는 장비를 빌어서 펼치는 아티스트 활동’을 합니다. 여기에 사진 동호인은 스스로 ‘아마추어’라고 하지만 장비만큼은 누구보다 전문가답게 잔뜩 갖추어 ‘하이 아마추어’가 됩니다.


  삶으로 사진을 기쁘게 즐기는 사람은 뜻밖에 퍽 적습니다. 사랑으로 사진을 기쁘게 누리는 사람은 뜻밖에 꽤 적습니다. 꿈을 이루거나 펼치는 길에서 사진을 기쁘게 가꾸는 사람은 뜻밖에 참 적습니다.



꽃을 사진으로 찍든, 예쁜 이웃을 사진으로 찍든, ‘남들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멋져 보이거나 훌륭해 보이는 풍경을 사진으로 찍든, 새롭거나 낯선 모습을 사진으로 찍든, ‘전문가나 프로 작가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사진은 내가 나답게 살면서 찍습니다. 나는 나답게 내 둘레를 바라보면서 찍습니다. 내 사진은 오직 나다운 사진이지, 너다운 사진이 아닙니다. 내 사진은 ‘나다운 사진’일 때에 ‘내 이야기’가 서리면서 ‘내 꿈과 사랑’이 피어나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내 사진은 ‘브레송다운 사진’이거나 ‘카파다운 사진’이거나 ‘이런저런 잘 알려진 작가다운 사진’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내 사진을 읽는 사람이 ‘아, 이 사진을 보니 아무개 작가 사진이 떠오르네’ 하고 말한다면, 내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127쪽/최종규)




  우리는 멋있어 보이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에 남을 만한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남달라 보이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워 보이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충격과 공포’를 준다고 하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 삶을 사랑하면서 찍는 사진’으로 하루를 즐겁게 누리면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 삶을 사랑하면서 찍은 사진을 기쁘게 읽으’면서 하루를 아름답게 누리면 돼요.


  ‘전문가처럼 잘 찍는’ 사진은 그야말로 부질없습니다. 브레송을 흉내낸다든지 살가도 꽁무니를 쫓는 사진을 찍는 일은 덧없을 뿐입니다. 쿠델카나 아담스나 앗제나 카쉬 사진을 따라하는 듯한 사진을 왜 찍어야 할까요?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즐겁게 웃고 노래할 수 있는 삶을 가만히 사진으로 찍고 차분히 마음으로 읽으면 넉넉합니다.



1982년 울산에서 카메라를 처음 쥔 필자가 맨 처음 한 일은 서점으로 가서 사진잡지를 산 것이었다. (100쪽/진동선)


우리가 어떻게 (사진을) 만들었는지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사진을 보는 사람들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떤 방법을 썼는지,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지,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싶었다. 유명한 사진에서 액자를 걷어낸 것과 같은 모습에 사람들은 잠시 ‘뭐지’ 하고 고민한 뒤에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알던 사진도 거짓, 조작은 아닐까 의심한다. 우리는 묻는다. 사진은 믿을 수 있을까? 더구나 지금과 같은 디지털 사진의 시대에 말이다. (121쪽/조야킴 코티스·아드리안 존데르거)



  글을 쓰는 사람은 소설가나 시인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쁘게 글을 쓰면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가나 예술가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쁘게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밥을 짓는 사람은 요리사나 쉐프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쁘게 밥을 지으면 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육아 전문가’가 될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그저 ‘어버이’가 되면 돼요.


  이리하여, 우리가 사진을 읽을 때는 바로 오늘입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사진을 읽으면 됩니다. 사진찍기도 바로 오늘 하면 됩니다. 사진학교를 다니거나 사진강의를 들어야 하지 않습니다. 나라밖에서 사진을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이름난 스승한테서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상업 스튜디오에서 견습을 해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삶을 스스로 사랑하면서 사진기를 손에 쥘 수 있으면 됩니다. 푼푼이 돈을 모아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진책을 꾸준히 장만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으면 됩니다.


  사진으로 가는 길이란 삶으로 가는 길입니다. 삶으로 가는 길이 기쁘면 사진으로 가는 길이 기쁩니다. 삶으로 가는 길을 꿈으로 여민다면 사진으로 가는 길도 꿈으로 여밀 수 있습니다. 나는 바로 내가 되어 내 사진을 찍고 읽습니다. 너는 언제나 네가 되어 네 사진을 찍고 읽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우리 스스로가 되어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사진을 기쁘게 찍고 읽습니다. 4348.9.2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